특집 - 생명공학과 불교

1. 서언

인간 게놈 지도의 초안이 완성되었다는 보도에 우려와 기대가 함께 하고 있다. 인간이 무병 장수할 수 있게 된 인류 최대의 쾌거라는 평가와 인종 차별, 민족 차별과 함께 이제 유전자 차별이 또 하나의 중요한 차별항목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유전자를 조작하여 완전한 인간을 만들려는 우생학적 유혹을 떨쳐 버리기 쉽지 않으리라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기계·화학공학의 시대에서 생명공학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 캐나다 생명공학회사인 넥시아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지난 1월 거미의 유전자 1개를 몸에 지녀 거미줄 섬유를 젖과 함께 분비하도록 형질전환된 염소 2마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연말까지 ‘거미 염소’를 1,500마리로 불려 ‘바이오 스틸’로 이름 붙인 세계 최강의 섬유를 양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계공학과 화학공학은 물질을 변형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고, 생명공학은 생명을 변형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든다.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로 물질이건 생명이건 모든 것을 변형시켜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인간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원하는 인간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날도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 이렇게 전지전능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오늘 우리에게 감도는 불안은 기우인가?

윤리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또는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규범이다. 다른 동물들은 행위에 대한 규범이 없다. 동물들은 본능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의 선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와 판단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지식은 이러한 사고와 판단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지식의 수준이나 내용에 따라서 인간의 윤리적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이제 유전자를 조작하여 생명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그 결과 인류는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 상황을 맞이했다. 예전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가 윤리의 중심문제였다면 이제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윤리는 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기존의 사상이나 종교에서는 대부분 윤리의 문제를 인간 이외의 존재로 확대해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찍이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이해하고,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不殺生)을 제일의 도덕적 덕목으로 삼았다.

필자는 이러한 불교 속에서 새로운 윤리의 방향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기대를 바탕으로 먼저 불교의 생명관을 살펴보고, 불교의 생명관에 기초하여 생명공학의 윤리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근본불교의 생명관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영혼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영혼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붓다의 가르침에 생명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생명이라는 말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개념이다. 즉 세계를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하는, 다시 말해서 물질과 정신을 개별적 실체로 생각하는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나온 개념이다.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생명은 정신이나 영혼/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스템 이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고,1) 생물 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 즉 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2)

베이트슨(Gregory Bateson)에 의하면 “마음은 살아 있음의 본질이다.”3) “마음과 생명 또는 그의 관점에 따르면 마음과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명백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베이트슨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4)고 한다. 그는 과정으로서의 생명을 개념의 틀로 묶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붓다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붓다는 ‘육신과 영혼이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 침묵으로 대응한다. ‘여래(如來)는 사후(死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물음에도 침묵한다.5)

영혼과 육신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생명의 본질을 영혼이라고 믿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의 근거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認知作用)이다.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인지작용을 근거로 인지의 주체로서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것을 생명의 본질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는 이러한 영혼을 불멸의 실체로 생각한 정통 바라문교와 자이나교가 있었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신/영혼은 물질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한 유물론자들이 있었다.

붓다는 이러한 대립적인 두 사상을 “의미는 한 가지인데 다르게 주장될 뿐”6)이라고 비판한다. 붓다가 같은 의미라고 비판한 것은 이들이 영혼이나 물질을 실체로 생각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실재론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체는 신체 속에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어리석은 범부는 무명에 가리고 애욕에 묶여 자신의 내부에 식(識)이 있고, 외부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7)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식하고 사유하는 실체이다. 우리의 몸 속에는 이러한 영혼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물을 본다는 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12연기설’의 출발이 되는 무명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 따라서 12연기설의 무명은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우리가 정신이나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연기한 현상임을 강조한다. 중아함 《차제경》에서 붓다는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의식(識)이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업을 짓고 죽어서는 다음 세상에서 그 과보(果報)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차제(Sa-ti)라는 비구를 크게 꾸짖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식(識)은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이야기했다. 식은 연이 있으면 생기고, 연이 없으면 멸한다. 식은 연이 되는 것을 따라서 생기므로 그 연을 이야기했다.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식이 생기며, 식이 생기면 안식(眼識)이라고 부른다.8) 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나타난 인지현상을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이야기는 인지(認知), 즉 마음을 체화(體化)된 행동으로 보는 인지과학자 바렐라(Francisco Varela) 등의 견해와 일치한다.9)

붓다는 우리가 영혼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활동이 체화된 인지현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영혼을 인지의 주체로 생각하는 실체론적 사고는 신체의 수만큼 영혼도 많다는 신념을 낳는다. 이러한 신념에서 사후(死後)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가, 아니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멸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붓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단상중도(斷常中道)를 설한다.

상견(常見)은 업의 주체인 불멸의 영혼이 사후에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견해이고, 단견(斷見)은 영혼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멸하므로 업을 짓는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는 서로 다른 영혼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상견과 단견은 생명체의 수만큼 영혼의 수도 많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 대하여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의식은 스스로가, 한정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의 구체적 상태, 즉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 그것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 이에 따라 의식 또는 정신도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은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서양철학자의 대부분은 물론이고 아마도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왔을 것이다. 그러한 사상에 따라 신체의 수만큼 영혼도 많다는 생각이 생겼고, 그 영혼들이 신체처럼 사멸할 운명인지 아니면 영생불멸하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이 즉시 던져졌다. …… 그에 따라 훨씬 어리석은 질문이 생겨났다.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가? 여성 또는 남자만이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마저도 생겨났다.10)

이러한 슈뢰딩거의 생각은 붓다의 단상중도와 상통한다. 붓다는 생명의 본질을 육신이나 영혼으로 생각하는 실체론적 사고를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중도를 제시하고 있으며, 붓다가 제시한 패러다임은 세계와 생명을 상호의존적인 관계구조로 보는 연기설이다. 붓다는 생명을 영혼과 육신으로 이해하려는 기존의 생명관이 생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연기법의 자각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생물시스템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생명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생명이라는 과정은 인지(認知)의 과정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마음은 인지의 과정이며 생명의 과정 그 자체이다.11)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불교의 12연기는 인지의 과정, 즉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므로 생명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처한,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는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문제삼았다. 만약에 생명이 본래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 독특한 모든 경험과 기억을 통해 개성적인 그 무엇,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그 무엇을 이루고 있다는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는 그것을 ‘나’라고 부른다. “그러면 대체 이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은 그것이 경험과 기억이라는 개개 자료의 모임, 다시 말해 그러한 자료들을 모아 놓은 캔버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철저히 자기성찰을 함으로써 ‘나’의 진정한 뜻은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들이 쌓이는 바탕재료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렇지만 인생에는 단절이 없다. 삶 속의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 어떤 경우에도 애도해야 할 개인적 존재의 소실은 없다. 언제까지나 없을 것이다.12)

슈뢰딩거의 생각은 붓다와 일치한다. 12연기의 무명(無明)은 경험과 기억을 쌓아놓고(集)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면서 ‘나’를 바탕재료로 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를 쌓아간다. 이렇게 경험과 기억이 쌓인 것을 오온(五蘊)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모아 오온을 형성하여 ‘나’로 집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다.

그리고 생명의 실상을 자각하여 오온을 멸하고 생명의 구조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인 ‘팔정도(八正道)’이다. 붓다는 12연기의 깨달음을 통해 오온의 집(集)과 멸(滅)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이 문제되는 것은 ‘나’를 생명의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이라면 ‘나’는 생명의 주체일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경험과 기억의 모임에 불과한 ‘나’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늙어 죽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경험과 기억의 모임인 오온을 ‘나’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나’는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붓다는 우리가 생명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삶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내용이 기억되고 개념화되어 언어화된 것으로서 이것을 실체시(實體視)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무지(無明)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13)

붓다는 생명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불교의 수행은 생명의 구조를 깨닫고 그 구조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길이다. 이 가운데 ‘사념처(四念處)’는 생명의 구조를 깨닫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 몸(身), 내 감정(受) 내 마음(心), 외부의 사물(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잘 관찰하면 내 몸, 내 감정, 내 마음, 외부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사념처’인 것이다. 우리의 삶을 관찰하면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사실이다.

또 배설해야 산다. 먹기 전의 음식은 나의 몸이 아니지만 먹은 음식은 나의 몸이 된다. 배설하기 전의 배설물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데, 배설한 후의 배설물은 나의 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참된 나의 몸은 어떤 것인가? 몸(身)에 대한 관찰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 결과 이 세상에 나의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감정·마음·사물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관찰과 사유를 행한다.

고락을 느끼는 감정(受)은 영혼이나 정신의 작용이 아니다. 지각(知覺)의 경험(觸)이 쌓여 감정을 유발한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의 경험이 동일한 고통의 감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마음(心)은 삶을 통해 형성된 관념(名色)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인지된 대상(法)은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마음에 기억된 관념이 대상화된 것이다.14)

이와 같이 사념처의 수행을 통해 우리의 몸이 있고, 그 속에 영혼이 있으며, 영혼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는 신념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배설되는 과정 속에 우리의 육신이 있다. 육신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 아니라 음식물이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강이 사라지듯이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거나 배설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정신활동이 있을 수는 없다.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지의 과정을 우리는 정신이나 영혼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와 같이 육신과 영혼은 삶을 통해 우리가 인식한 내용으로 만들어 낸 허구적인 관념일 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삶에는 물질과 정신, 육신과 영혼의 구별이 없다. 모든 것이 함께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삶 속에는 특별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가 아니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무아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으며, 생명도 없고, 생명 아닌 것도 없다. 이러한 사실에 무지한 상태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느끼는 괴로운 삶이 연기하고, 무아와 연기를 깨달은 상태에서는 ‘나’ 아닌 것이 없이 모두가 ‘한 생명’이므로 생사(生死)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涅槃)이 연기한다. 이것이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은 삶의 두 가지 상태, 즉 생명의 두 가지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을 의미한다. 삶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삶(業)을 통해 나타난 무상한 의식(報)들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의식 덩어리’이며 ‘삶의 그림자’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진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색온(色蘊)을 이루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낀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수온(受蘊)을 이루고, 비교하고 사유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상온(想蘊)을 이루고, 욕구를 가지고 의도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행온(行蘊)을 이루고,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식온(識蘊)을 이룬다.

이와 같이 오온은 중생들이 삶의 과정에서 생긴 경험을 기억하고 모아서 존재화한 것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진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지각하는 감관을 지닌 육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과거로부터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한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하여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감정·이성·의지·의식이 몸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물과 나의 존재라고 믿고 있는 육신이나 영혼은 ‘경험의 모임(集)’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가 ‘나’의 존재로 믿고 있는 오온의 실상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삶, 즉 ‘업보’이다. 생명은 이러한 삶, 즉 업보의 현상이다. 우리가 육신이라거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본질은 업보인 셈이다. 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업보설(無我業報說)’을 의미한다.

무아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연기란 업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업보, 즉 연기하는 삶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의 실상이 무아이며 업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삶과,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명에서 연기한 삶이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이러한 업보, 즉 연기의 도리이다. 우리의 삶이 생명의 실상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살아가면 생로병사의 괴로운 삶이 연기하고, 무명을 멸하여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살아가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열반의 삶이 연기한다.

이러한 사실은 삶의 세계에 변함 없이 상주하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보, 즉 삶으로 본다. 이러한 업보의 생명관에서 보면 생명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업보의 과정, 즉 삶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衆生)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15)이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는 생명체가 소유한 육체나 영혼 또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

3. 대승불교의 생명관

근본불교의 생명관은 대승불교에 의해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발전한다.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법신(法身) 등은 모두 생명의 참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교리가 생명의 실상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생명관과 무관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불성론》의 ‘불성’과 《화엄경》의 ‘비로자나불(法身)’을 통해 간단히 대승불교의 생명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불성론의 생명관

불성은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실상을 불성이라고 한다. 근본불교의 ‘무아’와 ‘공’이 ‘불성’이며 ‘진여(眞如)’이다. 근본불교에서는 허망한 실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무아’와 ‘공’을 강조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참된 생명을 긍정하는 의미에서 ‘불성’과 ‘진여’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존재, 즉 나(人)와 세계(法)는 본래 연기하는 ‘한생명(一心)’이므로 나라고 할 것도 없고, 세계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며, 이것이 생명의 참모습(眞如)이다. 이와 같은 도리에 통달하면 나와 남, 육체와 영혼 등과 같은 허망한 집착이 사라진다. 생명의 실상이 ‘공’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청정한 지혜의 공덕이 생기는데 이것을 ‘진실(眞實)’이라고 한다. 생명의 실상을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은 새롭게 전환된다.

중생들의 삶은 자기를 중심으로 영위된다. 이것이 아집(我執)이다. 불성을 알게 되면 이러한 아집이 고쳐진다. 즉 불성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보되 나와 남이 있을 수 없다(二無所有)고 보아 자신을 사랑하는 생각을 쉬고, 모든 생명을 한생명에 포섭되는 일체 공덕으로 보아 일체 공덕을 성취한다.

이리하여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반야(般若)로 말미암아 자신을 사랑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대비(大悲)로 말미암아 남을 사랑하는 생각이 생기며, 반야로 말미암아 불법(佛法)을 성취하고, 대비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을 성숙시킨다. 이것이 자타(自他)의 분별이 사라진,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함께 하는, 반야(般若)와 대비(大悲)가 충만한 한생명, 즉 참생명을 실현하는 대승적 삶의 모습이다.16)

2) 화엄경의 생명관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불(佛)’은 ‘생명’이다. 생명은 온 우주에 충만하다(佛身充滿於法界).17)(如來現相品)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한 ‘한생명(法身)’이 무량무변한 세계를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다(所說無邊衆刹海 毘盧遮那悉嚴淨).18)

생명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려는 갖가지 희망(願)들이 갖가지 차별된 삶의 모습과 세계를 만들어 간다(如是種種各差別 一切皆依願海住).19)

이와 같이 모든 세계는 업력(業力)에 따라 생긴 것이다(一切諸國土 皆隨業力生).20) (普賢三昧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한 생명’의 원력(願力)과 업력(業力)에 의해 아름답게 장엄된 것이고, 이것을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부른다. ‘한 생명(毘盧遮那佛)’은 무수겁의 세월 동안 갖가지 모습의 세계를 아름답게 이루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광대무변한 생명의 힘이다(毘盧遮那於往昔 種種刹海皆嚴淨 如是廣大無有邊 悉是如來自在力).21)(華藏世界品)한 생명 속에 무량한 세계가 있다. 그 무량한 세계마다 생명이 자리잡고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간다(一一毛孔中 微塵數刹海 悉有如來坐 皆俱菩薩衆).22)(入法界品) 이러한 생명관에는 생명과 세계의 차별이 없다. 생명 속에 세계가 있고, 세계 속에 생명이 있으며, 하나의 생명 속에 만생명이 들어 있고, 만생명 속에 개개의 생명이 모두 들어 있다. 이와 같이 《화엄경》에서는 모든 생명이 삶을 통해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구조로 연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4. 생명공학의 윤리 문제

생명공학은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떤 기술혁명보다도 걱정스러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생명공학에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있음을 지적한다.23)

생물체의 유전적 암호를 재작성함으로써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적 발전이 중단되는 치명적 위험은 없는가? 인공생물체의 창조는 자연계의 종말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복제 생물, 키메라(chimera: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세포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개체), 유전자 이식 생물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인류는 외계 생물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유전공학적으로 처리된 수천 종의 생물체가 만들어져 방출되면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의 훼손을 초래하여 핵 오염이나 석유 화학 오염보다 훨씬 위험한 유전자 오염을 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세계라는 유전자 공급원이 소수의 다국적 기업의 지적 재산으로 될 때 세계 경제와 사회에 어떤 결과가 야기될 것인지? 생명을 특허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명의 신성함과 본질적 가치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깊은 신념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모든 생명을 ‘발명품’이나 ‘상업적 재산’으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자랄 때 인간은 정서와 지능에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아기들은 주문하는 대로 유전적으로 디자인하여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유전자형을 기준으로 신원이 확인되고 분류되며 차별을 받는 세계에서 인간의 의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과정에서 어떤 위험이 뒤따를 것인가? 생명공학이 인류에게 큰 편익을 가져다 줄 ‘꿈의 기술’이긴 하지만 인류가 그 기술을 사용할 때 치뤄야 할 대가는 치명적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19, 20세기의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환경문제와 같은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생명공학까지 가세한다면 인류는 ‘꿈의 기술’을 향유하기도 전에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생명공학은 서구의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낳았고, 과학기술은 자연 파괴, 자원 고갈, 환경오염과 같은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이기심에 기초한 인간 중심적 사고가 인간의 삶마저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생명공학의 성과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생명공학이 여전히 이기적 인간 중심주의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는 서구의 자연관에 기인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자연관에서 나온 것으로서 영어의 ‘nature’에 해당된다. 즉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원래의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손이 닿으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nature’라는 개념 속에는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자연과 조화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기계적 세계관에 기초한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문명이며 진보라고 믿게 만들었다.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자연과 인간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자연은 중생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중생은 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고, 자연은 인간의 삶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나아가 자연과 인간은 한 생명이다. 우주는 싸늘한 물질과 에너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무관한 객관적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의해 이해되고 변화하며,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윤리는 인간 상호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자연을 생명으로 이해하고, 생명은 서로 얽혀 한 생명을 이루고 있다는 불교의 생명관은 인간이 모든 생명에 대하여 이타적인 삶과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윤리적 당위성을 제공한다. 서구사회의 윤리체계에서는 도덕의 핵심이 ‘정의(正義)’지만, 불교의 윤리체계에서는 ‘자비(慈悲)’가 핵심이다. 정의는 기계적 세계관에 근거하는,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익을 놓고 서로 대립한다.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립할 때, 공정한 분배의 원리가 요청된다. 이때 공정한 분배의 원리가 ‘정의’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연기설에 근거하여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의식을 강조한다. ‘자타불이’의 의식을 통해 ‘나’에서 ‘남’으로, ‘인간’에서 ‘자연’으로 자아는 확장될 수 있다(無我). ‘자아’를 확장하여 ‘자아’가 ‘타아’를 포용하면 인간 상호간의,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般若:지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자비(사랑)를 통해 실현된다. 자아가 확장되어 다른 존재를 포용한다면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타인에 봉사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확장’은 현대의 심층 생태학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서 윤리학에 새로운 장을 열어 줄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이 생명의 구조 속에서 통일적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인간 중심의 윤리에서 보다 확장된 생태 중심적, 생명 중심적 윤리체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이제 물질과 생명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소유했다. 좋든 싫든 이것을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다.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 것이다.”(《老子》 8장)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饒益衆生)을 선으로 가르친다. 인간에게만 이로운 것이 선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생명공학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면 선이 되고 해롭게 하면 악이 된다. 생명공학은 매우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날카로운 칼일수록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듯이 생명공학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생명공학은 위험하지만 생명공학이 꼭 필요한 분야가 있다. 기계·화학공학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생명공학은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공학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공학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위한 수단이 될 때는 기존의 어떤 과학기술보다도 더 큰 해악을 가져올 것이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훌륭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인간은 훌륭한 유전자에 의해서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생명관, 가치관을 가지고 훌륭한 삶을 살면서 훌륭한 사회를 이룩할 때, 그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업보이다. 이기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는 악업(惡業)은 인류의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재앙의 업보를 낳을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참된 구현은 지혜와 자비이다.

지혜로 ‘한생명’의 진실을 밝혀내고, 자비로 만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된 삶이다. 진실된 삶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조작하는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은 지금까지 잘못된 자연관과 생명관을 가지고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하여 악업을 지어 왔다.

그 악업의 과보가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인간성 상실과 같은 현대의 여러 위기이다. 따라서 인류는 이제 그 악업을 없애는 방향으로 삶의 길을 잡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생명공학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다른 생명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이라는 진리 아래 사용되어야 한다.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의 악업에 의해 손상된 자연과 다른 생명을 되살린다면 인류는 악업을 소멸하고 다른 생명과 하나 되어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아함의 중도체계》 《불교의 이해와 실천 1·2》가 있고, <공의 의미> <불교의 인간관> <불교의 생명관>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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