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생명공학과 불교

1. 서 론

생명공학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분야는 유전공학이다. 유전공학이란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한 생물의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에 접합시켜 새로운 유용한 생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애당초 유전학이란 유전 이론과 유전인자의 본성, 유전인자와 형질과의 관계, 어버이의 형질의 자손에 있어서의 전개 등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를 지칭하였으며, 전통적인 유전학은 멘델(Gregor J. Mendel, 1822~1884)의 법칙 안에서 유전의 규칙성을 연구하여 그 결과로 유전적 질병의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주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과 실무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유전공학이며, 이것은 유전인자의 연구를 통하여 유전인자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얻은 기술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새로운 유전자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법을 도입하는데, 그러한 기법으로서는 유전정보를 가진 유전자(DNA)의 조작과 세포의 융합, 핵 또는 세포기관의 치환, 그리고 조직의 배양 등을 들 수 있다.

아무튼 생명공학은 인간에게 자신의 목적에 맞게 생명체의 유전인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과, 전례(前例)가 없었을 정도로 많이 진화에 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에 의해 주도되어 생명의 핵을 다루고 있으며, 그 기술의 결과는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윤리적인 통찰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생명공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윤리적 입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생명공학의 유용성과 문제점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생명공학의 유용성과 문제점

인간이 유전질에 관여하여 새로운 요소를 생산해 내거나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원칙적인 부정이나 일반적인 긍정으로 대답되어질 수 없다.

신학적으로 고찰한다면 질병을 유전공학적인 분야로 극복하는 것이나 새로운 생물로 식량난을 극복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대답에 결정적인 것은 인간이 이러한 관여를 통하여 인간의 그것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그러한 삶을 위협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모든 과학 분야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유전공학도 인류에게 유용할 수도,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적 생명공학은 농사·의학·식품산업 등에서 혁명적 성과를 얻으리라 예상되지만, 유전공학의 어떤 측면은 생명의 상징·인간의 존엄성·인류의 미래 등에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유전자 조작 기술에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의 생각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 기술이 인간에게 가져다 줄 거의 무한정한 유익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유익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경제성’과 ‘편리함’이다.

1) 유전공학의 유용성

현대의 유전공학이 전통적인 배양 방법과 다른 점은 개별적인 유전인자를 분리시켜서 나중에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유기체에 주입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원하는 특성을 얻을 수 있으며 동종 이동에서 이종 이동의 방법으로 새로운 유기체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리하여 동물로부터 추출한 ‘이익 유전자’들을 식물들에다 옮겨 놓는 ‘유전자 변이’를 한 결과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먼저 바이러스와 세균에 저항력이 강하고 해충과 질병에 잘 견디는 식물을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공해에 강한 식물이나 광합성의 능력이 증가된 식물, 그리고 공기 중의 질산염을 흡수하거나 질산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을 생산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식물·동물·박테리아 등의 조작은 보다 많은 영양가를 지니거나, 쉽게 소화되거나, 혹은 적당한 지방질을 포함하고 있는 등의 개선된 곡물과 염가의 식품, 더욱 효과적인 제약 등을 생산해 낼 수 있게 한다. 의약 분야에서는 인터페론, 인슐린, 성장 호르몬, 다양한 주사제와 같은 희귀한 의약품들뿐 아니라 동물실험을 통하여 이미 종양을 죽이는 단백질을 분리해 내었다.

언젠가는 종양의 발생을 억제하거나 암을 치료하는 약제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물 복제기술로써 대량 생산과 저렴한 제조단가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동물 복제기술은 그 외에도 개량된 동물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의 목적은 많은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한다든지, 양과 질이 개선된 우유의 생산이 가능하게 하거나, 혹은 전염병에 강한 가축으로 개량하는 데에 있다.

이로써 축산농민들의 소득 향상을 꾀할 수 있으며,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난제인 식량 문제를 현존하는 어느 방안보다도 더 효과적 해결해 낼 수 있다. 나아가 포유류에 대한 복제기술의 성취는 인간에게 장기를 제공할 형질전환동물의 대량 생산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전망이다. 특수한 형질을 지닌 실험동물이나 질환 모델 동물 또는 멸종 위기에 놓인 희귀종의 동물에 복제술을 적용하면 증식이 가능하게 되어 기초의학 및 생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학문적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자연 생태계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

그리고 유전공학적인 조작으로 미생물들을 새로이 구성하여 각종 폐수나 폐유를 정화해서 환경을 보존하는 일과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일에까지 그 응용범위가 넓은 게 사실이다. 모든 DNA의 순서와 십만에서 삼십만 개의 모든 단백질 구조와 각 단백질의 정확한 기능이 밝혀진다면 여러 가지 질환의 예방과 치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특히 유전자 변이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선천성 대사 질환, 현재 불치병이라고 여기는 당뇨병, 심장 질환과 각종 암들의 예방과 치료에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정신분열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정신 질환들도 유전자 변이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 보고가 많이 있는데, 이 방면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 질환으로 간주되고 있는 알츠하이머 병이나 파킨슨씨 병 등과 같은 노인성 신경 퇴행성 질환들의 원인 규명과 치료에도 많은 발전이 기대된다.

2) 유전공학의 문제점

생명공학을 회의적으로 보는 반대자들은 경제성과 편리함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유익 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이익을 거론한다. 우선 DNA 합성 기술과 같은 생명공학의 연구 개발을 위해 투자되는 엄청난 비용을 언급한다. 그리고 사회윤리적으로 특별히 숙고해 보아야 하는 점은 유전공학의 방법을 통한 식량의 증산과 대용 식품의 판매로 다국적 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할 것이며 이 때문에 농산물이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식량의 정의로운 분배도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구호 사업의 형태로 이것을 보완하는 것을 가톨릭 교회는 적절한 방법으로 보지 않는다. 생명공학을 반대하는 다른 이유는 조작적인 진화가 결국에는 생태학적인 파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생물체가 수정할 경우 그 후손들은 각기 다른 면역 체계를 갖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체 종족의 높은 생존가능성을 담보하게 된다.

이에 비하여 단일 유전자 복제생물들은 거의 같은 유전형질을 지니므로 특정한 바이러스나 질병에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떼죽음을 당할 가능성도 많다. 또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변종들이 나타나는 경우 기존의 자연종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멸종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로 생태계의 생존을 담보하는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매우 축소된다는 의미의 생태계의 파멸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로, 유전공학의 응용은 어떤 목적으로든 새로운 생명체를 조작하는 일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예기치 못한 위험 요소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해가 없는 박테리아로부터 자연적인 천적이 없는 새로운 병균이 생산되거나 악성 질병 바이러스가 증가하여 환경 중에 만연되는 경우 사람이나 가축의 생명을 위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아니면 특정 인체 호르몬의 대량 생산을 위한 실험과정에서 이들 유전자가 자연계의 어느 특정 세포나 동물의 장내세균 등에 부착되어 이런 물질을 마구 생산해내는 사태도 상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병충해에 대한 내성적 면역력이나 강한 저항력을 내장하고 있는 식물의 열매가 인체에 예상하기 어려운 기형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러한 부작용이 어디까지 이를지는 현재로는 예측할 수 없다. 더구나 이들 유전자 조작기술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남용되었을 때 초래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장기적 위험 가능성은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다.

독립국가연합이 유전자 조합기술로 세균무기를 개발한 것은 바로 그 좋은 예의 하나인데, 유전공학의 군사적 이용을 통하여 언젠가는 원자폭탄 이상으로 가공할 만한 무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영화 ‘미션 임파셔블 2’에서 상상하여 그려내고 있듯이 몰염치한 정권이나 테러리스트들이 오로지 자신들만이 그에 대한 ‘해독제’를 확보한 뒤 악성 돌연변이체들을 악용하여 인류에 폐해를 끼칠 우려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반대자들은 지나친 효율성 도모로 인간들이 공유해 온 도덕적 이념들의 상실도 지적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생명을 점점 도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생명을 오로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유용성의 척도에 따라 관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외의 생명체들은 단지 인간의 목적을 위한 물질로만 취급되며 그들의 고유한 존재의 가치와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하여 인간 자신조차도 자연과 함께 점점 더 기술적인 행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지식의 증대는 처음에는 유전 질병의 치료 등을 겨냥했으나 점점 인간 유전자 구조를 변화, 개선시키는 데에 이용될 것이다.

이 또한 처음에는 개인 수준에서 이용될 것이나 결국은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어 유전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선별, 양산함으로써 헉슬리(A. Huxley)의 《위대한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방불케 하는 전체주의적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정말로 우려해야 할 일은 “사실은 DNA의 구실을 전혀 몰랐던 시절에 쓰여진 …… 것처럼, 유전자 이식 또는 핵치환으로 새로운 종을 만들려는 시도, 또 그러한 시도 뒤에 숨어 있는 우생학적인 관념이다. …… 그리고 그러한 ‘신종 개발’과 인간복제술이 합해지면 더욱 가공할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1)

3. 유전공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윤리적 입장

1997년 11월 11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29차 총회에서는 196개 회원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선언은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 및 의학 분야의 인간 유전자 연구가 지녀야 할 윤리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규범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유전적 특징에 관계 없이 각 개인의 존엄성과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게놈은 개인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결정론을 거부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구체적인 과제는 특히 기술적인 발전 과정에 비판적으로 동반하여 영원히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위한 변호인이 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삶의 과정에 더 깊이 관여하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덜 예견되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규범들은 더 신중하고 더 쉽게 감독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생명공학과 같이 삶의 과정에 근본적으로 관여하고 이것을 책임성을 가지고 행하려는 사람은 책임질 수 있는 행동과 책임성 없는 행동 사이에 한계를 그을 수 있는 규범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규범은 불가피하게 윤리적인 판단 요소들을 갖는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유전공학은 총체적으로 취급되어질 수는 없다. 하느님에 의해서 규정된 동식물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선 인간 영역과 비인간 영역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1) 인간 외의 생명체에 대한 유전공학

비오 12세는 1953년 9월 7일 유전학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좋은 것은 촉진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축출하기 위하여 유전인자에 영향을 주는 유전학의 기본 경향을 환영하면서 이것은 윤리적인 입장에서 이의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같은 연설에서 계속해서 “유전학이 추구하는 실질적인 목표들은 가치가 있다. …… 단지 유전학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평가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동물과 식물의 세계와 다른 편으로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 있어서는 종을 개량하는 방법과 수단이 완전히 자유롭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개개의 존재가 앞에 있기 때문에 침해할 수 없는 윤리적인 규범과 결합되어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도 1982년 10월 23일에 행한 연설에서 식량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식물들의 배양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회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예방과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세포 조작과, 의약 개발을 위한 동물이나 식물 세포들의 조작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반드시 인간 생명을 존중하면서 인간에게 봉사할 때 그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여론도 동식물의 유전공학적 조작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듯하다. 아마도 유전자 변형 동식물을 포함하여 인류에게 유용한 특성을 지닌 동물의 대량 생산을 통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으며, 또한 질병치료에 획기적인 도움을 주는 등 인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아닌 생명체가 물론 불가침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편으로는 그러한 생명체를 훼손하는 행위에는 합법성을 필요로 한다. 인간 외의 창조물에 대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서는 안 되며, 유전공학적 조작에 있어서 관계되는 동식물과 인간의 흥미가 책임성 있게 숙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동식물 자체를 보호하는 규정과 종(種)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존중할 의무를 잘 지켜나갈 때에 비로소 그러한 연구와 조작은 인간이나 다른 생물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되거나 커다란 유익이 된다고 여긴다.

2) 인간의 생명에 대한 유전공학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10월 23일에 교황청 과학원 모임에서 한 훈화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실현시키는 연구들과 실험들에 동의하였다. 인격을 존중하고 인간의 공익에 기여하는 생물적인 실험들도 허용되는 것으로 표명하면서, 유전공학에 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전자 부호(genetic code)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기술들이 특별한 경우 유전자와 염색체의 손상으로 인하여 질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긍정적이다. 아울러 유전자 이식을 통하여,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많은 종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낫형 적혈구 빈혈증과 같은 특별한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유전병들을 생물학적인 실험에 의한 발전을 통하여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생물학의 연구는 유전자들의 이식이나 변화들이 염색체에 의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상태도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아주 작고 약한 인간 존재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혹은 출산 후에 치유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이 이해한 유전공학은 바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1983년 10월 29일 세계 의학 협회에서 행한 훈화에서 확인되는데, 여기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지 치료상의 침해만이 원칙적으로 원하는 것으로 고찰되어지는데, 이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안녕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 하지만 설사 의학분야의 기술이 인간의 유전자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유전병 환자를 직접적으로 치료해주는 일 이외에 인간의 생물학적인 개량을 목표로 하는 것, 예를 들어 IQ를 높인다든지 하는 치료의 한계를 넘는 모든 행위는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회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행위를 허용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적인 전제와 제약은, 그의 견해에 의한다면, 인간 정체성의 보호이다. 따라서 인간 생명의 원천에 관한 것에 인간이 간섭하거나 관여하여서는 안 되며 “그것의 목적이 유전적인 상속의 변화와 다른 종류의 인간 무리의 생산이라면 그러한 조작은 피하여야 한다. …… 인간을 유전공학적인 조작의 대상으로 저하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끝으로 “학문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는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보호를 제시하는 윤리적 가치들에 커다란 존경을 나타내어야 한다. 의학적인 가치의 순서에서는 생명이 인간의 최상이며 절대적인 선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모든 훼손은 피하여야 하며, 그런 후에 연구를 하여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같은 견해는 모든 사람은 좋고 나쁨이 없이 유일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떠한 기술도 그 사람의 인격 자체에 간섭할 수 없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에 속하며 모든 국가의 헌법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연구의 자유는 제한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연구대상과 목표설정, 그리고 연구방법이라는 세 가지 연구의 분야와 측면들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거나 법적으로 절대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구의 자유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윤리적 가치들과 경쟁관계에 놓이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만 보장되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윤리적 가치들로서 특별히 인간 존엄성의 보호와 그것과 직접 결합된 보호대상들, 무엇보다도 자기 결정과 육체와 생명의 온전성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온전한 인간으로의 발전을 도모할 때” 참된 가치를 지니는 과학과 기술은 “그것을 만들어 내고 발전시킨 인간들에 의해서 그 올바른 목적과 그들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이에 의해서 생명공학도 역시 다만 인간 존엄성의 보호와 같은 한계들을 지킬 경우에만, 그것이 위험성과 모험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허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의하면,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의 능력이나 행위에 의해서 설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향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은 실질적인 인간에게 초월적인 것이며 질병이나 장애로 인하여서, 혹은 윤리적인 범죄를 지음으로써 상실되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가 특별히 기여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와 유용성은 구분된다는 것을 인식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인간의 육체도 역시 인간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인격에 대한 경외는 육체와 생명에 대한 경외 속에서도 표현되어질 수 있으며, 또 표현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에서 발간한 《의료인 헌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육체는 인간에게 고유한 실재성이며 상징이자, 타인과 하느님 그리고 세계와의 관련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것이다. 육체를 무시하고, 정신만을 윤리성의 기준과 원천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주관적인 감정과 욕구가 객관적인 육체적 조건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을 따르게 되면, 개개인의 소망(그리고 기술적 가능성)이 행동의 합법성과 생명에 대한 개입의 판단 기준이 되어 버린다.”(41항) 따라서 인간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인간 생명을 조작하고 있는 오늘날 생명공학의 행동 방식은 명백히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며 윤리의 기본에 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인간복제의 윤리성

어떤 학자들은 기형아와 정신박약아가 태어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인간복제에 반대하며, 다른 학자들은 ‘시험관 내 수정’이라는 체외 수정의 방법이 이해득실과 상관 없이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심지어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악용할 염려가 있다는 우려에 의해서 인간복제를 반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도 역시 인간복제 또는 실험 자체가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판단하는데,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간 생명 그 자체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

둘째, 인간복제는 인간 존재의 유일회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셋째, 인간복제 행위는 남녀 양성(兩性)에 의한 생명 질서를 근본적으로 어지럽히며 혼인의 신성함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넷째, 전통적 가족 관계를 붕괴시킬 것이다.

다섯째, 인간복제 시도는 특정 인종만을 선별해 번식시키려는 우생학의 도구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또한 아이를 공산품처럼 주문 생산하는 사회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미 완전한 인간으로 발달할 수 있는 인간의 배아 세포를 도구화하여 쓰고 버리는 것이므로 생명 윤리 측면에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이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고백적 전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 윤리는 인간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자유를 가진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조작하는 모든 행위는 거부되어진다. 하지만 복제인간은 그를 ‘생산’해낸 실험자의 조정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그에 의해 조작당하고 계획화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자유를 가진 존재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복제는 거부되어진다.

복제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하신 힘을 비극적으로 서투르게 모방하려는 위험한 시도”2)일 뿐이다.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에 있다. 사람의 삶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인류는 영원하지만 개인의 생명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도구화될 수 없으며 이것이 바로 인간 존엄성인 것이다.

그러나 체세포 핵치환 방법에 의한 인간복제를 통하여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언제라도 재생산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값싼 싸구려 상품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으며, 생명복제라는 이름으로 인권과 윤리가 파괴되고 사회전반에 걸쳐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지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생명공학이 인간복제의 길로 들어선다면 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복제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복제를 당한 사람의 존엄과 인간 생식의 존엄을 부인하기 때문이다.”3)

1997년 2월 27일 교황청 기관지인 《롭세르바또레 로마노》에서 윤리신학자인 지노 꼰체띠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책에서는 생명 전달의 법칙이 확고 부동하게 정립되어 있는데, 이는 결혼과 책임감 있는 부부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은 허용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거스르고 인간과 결혼의 존엄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험실에서가 아닌 인간의 방식대로 태어날 권리가 있다.” 인간은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한 자연의 산물이라는 사고에 의해서 인간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변질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즉 인간의 기원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된 부부의 생물학적 및 영적 결합과 관련된 생식에서부터 비롯된다.”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은 양성(兩性)의 결합으로 태어나 사랑을 받고 혈육관계를 맺으며 다른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활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우수한 유전인자의 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감각과 느낌의 교환으로 행복의 결실을 맺는다. 이에 반해 복제인간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탄생하므로 그 차별성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파괴될 것이다. 또한 복제인간은 ‘생산자들’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산술적으로 계산된 존재로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종속된 인간(subhuman)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복제는 인간의 만남은 상호 관계라는 근본적인 윤리의 근간을 흔들어 놓아 정상적인 인간 관계가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수년간에 걸쳐 부모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그러나 부모가 없이 무성 생식되는 복제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다운 품성을 키우는 양육은 매우 어려우며, 결과적으로 인간관계가 단절된 비인간적 인간의 출생과 현실이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인간복제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이용되어 순전히 생물학적인 몇 가지 기능(난자와 자궁을 제공하는 것)만 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4)는 점도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다른 이유는 복제인간의 경우 친족의 개념과 부모나 형제자매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들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데에 있다. 핵이식 생명복제술을 인간에게 적용할 경우 동일한 유전적 형질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복제되는 수만큼 출현한다는 문제가 일어난다.

이 경우 복제된 생명은 모체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나 딸로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한편의 부모에게서만 받은 유전적 요인을 가지고 있으므로 체세포를 제공한 사람과 동일 존재의 새로운 개체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또한 동시에 동일한 유전적 요인을 가진 다수의 생명을 발생시켰을 경우 동일한 존재의 다수성은 현금의 모든 인간관계를 뒤집어엎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인간 복제는 복제된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도 비판받아야 한다. 복제 인간은 다른 존재에게서 ‘복사’(생물학적인 복사일 뿐이라 하더라도)됨으로써 세상에 등장한다. 이러한 행위는 복제 인간에게 근본적인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 …… ‘복제인간’은 복제할 ‘가치가 있는’ 누군가와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그는 기대와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주목이 그의 인격적 주체성에 진정 타격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기대에 의해서 출생하는 인간은 어느 특정한 목적의 수단으로서 생산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존엄성은 그 자체로 인정되기보다는 그의 유용성이 더 큰 가치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5)

나아가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실험실에서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서 생산되는 복제인간은 그 존엄성과 천부적 가치를 상실하여 상품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복제인간은 우생학적으로 인간 개량을 지향하여 어떤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간 또는 육체적으로 강인한 인간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우수한 인종으로 개량된 다수의 복제인간이 태어난다면 우수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의 불화가 초래되어 약자의 존재는 무시될 수밖에 없고, 결국 우리 사회는 강자의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결과 약자를 예속시키는 것이 강자의 권리에 속한다는 사회적 다위니즘(Darwinism)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여 개개인의 존엄성은 무시되고 말 것이다.

남성 불임을 이겨내기 위해 생식복제를 이용하는 경우 윤리적 문제도 제기된다. 아기를 갖기 위해 복제를 희망하는 경우에는 오로지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을 생성해 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도 타인의 특성들이나 심지어는 겉모습을 결정할 권리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인간의 외관과 수많은 특징들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복제에 의한 생식은 아이의 겉모습에서 유전형질의 특성들에 이르기까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미리 구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 태어날 인간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이미 이전에 있었던 육체와 비슷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유전적인 차원이 우연에 의해 이루어질 때 아이가 어떤 특성들을 가졌는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런 경우에 비로소 아이는 부모의 과잉 보호를 받는다거나 아이가 부모의 의지대로 끌려 다니지 않게 되어 참다운 인간의 의미를 갖게 해주는 독립성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복제된 아이의 경우 겉모습에서 유전적 특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미 구상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독립성과 존엄성이 보장되어질 수 없다. 인간복제를 윤리적으로 반대하는 마지막 이유는 인간복제의 학문적이며 기술적인 수준의 발전을 위하여 인간의 배아나 태아를 가지고 행하는 실험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데에 있다. 많은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도 인간 생명의 시작을 수정되는 순간으로 보고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의학자들과는 달리 생명의 시작을 ‘영혼의 주입’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 영혼을 가진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교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이미 시작한 수정란 자체를 인간 생명체로 인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배아도 역시 인간 존엄성의 보호라는 사고에 의해 절대적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치료를 위한 목적을 지녔다 하더라도 배아나 태아를 희생시키는 것은 인간 생명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윤리적인 사고에 어긋나는 것이다.

한 생명을 위하여 다른 생명을 희생시킬 권리는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특히 애초부터 인간의 태아를 연구 목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은 생명의 발전을 저지하고 살해를 할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도 어긋나는 생명파괴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오늘날 이용되는 유전공학적인 조처는 단지 한정된 성공률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든다면 복제양 돌리는 277번째 실험만에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식 세포들이 한정된 성공률로써 조작되어진다면 아마도 비정상 개체가 발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비정상 개체 발생시 이를 폐기 처리할 수 있으나 인간복제 결과물은 기형체라 할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를 폐기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동물과 인간의 체세포 복제에서 기형체는 인간의 경우 약수백 배 수준으로 높은 발생률을 나타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인간복제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성립되는 시점에서도 과학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단지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배아 조작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에 의해서 다시금 유전공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치유하는 목적에만 이용되어야 하며, 생명을 조작하고 인간 존엄성을 파멸시키는 인간복제는 용납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로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12월 5일 이탈리아 법조인 협회에서 행한 훈화에서 “어떠한 사회적 또는 과학적 유용성도 그리고 이상적인 목적도 그것이 치료 목적이 아닌 한 정당화될 수 없다. 즉 유전자 개입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장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4. 결론

제3의 기술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생명공학은 식량과 자원 문제의 해결, 난치병과 유전적 질병의 치유, 생태계 문제의 극복 등과 같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가히 인류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또 그 속에 핵무기나 화학 무기보다도 더 가공할 만한 잠재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 중대한 윤리문제에 지속적으로 부딪쳐 왔다. 생명공학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문제는,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공학적인 조작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이 단순히 기술이나 유용성에 연관된 계산에 의해 삶을 영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개량된’ 인간을 생산하려는 시도는 ‘죄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인간의 행위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오로지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인간에게 봉사할 때만 그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생명공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고양시키면서 유용한 성과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생명공학의 목표설정은 일반적인 인간성의 획득이라는 목적을 가진,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치유로 보아야 한다.

그 외에도 삶의 질의 증가와 개선, 그리고 질병의 치료와 생명의 보호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에 의하여 그 결과들에 대하여서도 역시 숙고해야 한다.<끝>

구경국
신부.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대학교 졸업. 신학박사(윤리신학 전공). 현재 부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윤리신학). 논문으로 〈그리스도교 환경 윤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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