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생명공학과 불교

1. 서 론

지금 모든 종교는 역사 이래 가장 큰 도전을 받게 된 것 같다.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생명공학 앞에서 기성의 종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가지 중심 문제에 대한 설명들이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생명 창조 문제, 죽음과 그 사후 문제, 영혼과 구원의 문제, 윤리 문제, 삶의 의미와 가치 문제 등등 인생 전반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새로운 답을 내놓으라고 점점 더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전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종교는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할 종교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교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당장은 느끼지 못할지라도 틀림없이 이번의 이 도전이 불교가 지금까지 받아온 도전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교리들 가운데서도 이 도전에 가장 힘겨워 할 교리는 윤회이론일 것 같다. 이 소론에서는 문제 제기 차원에서, 윤회이론이 생명공학과 만나면서 가지게 될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선결해야 할 점은 제기된 문제의 성질과 상황을 가능한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2,600여 년 전 인도라는 상황에서 제기된 인간의 문제와 그것을 위한 설명이 현재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요구하고 있는 설명과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은 붓다의 가르침을 의지해야겠지만 그 해석은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할 점은, 윤회설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그 답을 내놓은 것이고, 생명공학은 과학적 입장에서 내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게 만족한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생명공학 시대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이 붓다 당시에도 제기되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붓다의 가르침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윤회이론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는다면 윤회이론이 생명공학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들을 대국적인 면에서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2. 불교의 윤회설

1) 윤회의 의미

불교에서는 만물을 현대 생물학에서처럼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체는 유정물(有情物)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식물과 같은 생물체는 돌이나 흙이나 광석과 같은 범주에 넣어 생명이 없는 것, 즉 무정물(無情物)이라고 부른다. 윤회(輪廻)는 유정물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질 뿐 무정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윤회란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돌면서 생과 사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말한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것을 ‘돌고 도는 것’ 즉 윤회(輪廻)라고 하는 것이다. 윤회는 3계(三界), 또는 6도(六途)를 통해 전개된다. 3계란 욕계(欲界)·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이고, 6도란 지옥도·아귀도·축생도·아수라도·인간도·천상도이다. 윤회의 세계는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3계라고도 하고, 6도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세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2) 업(業 : karman)

불교는 생명의 발생과 그 유지의 문제를 ‘업이론’으로 설명한다. 업이란 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업에는 육체적으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언어로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이 있다. 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행위가 다 업은 아니다.

업의 결과인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業力)을 가지고 있는 행위를 말한다.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춘 행위이어야 한다. 의도되지 않은 행동,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동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먼저 마음 속에서 의도하고 그 의도한 것을 육체나 언어나 마음을 통해 바깥으로 구체화한 행동이어야 한다. 윤리적인 행동이란 선하거나 악한 행동을 말한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법칙 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악의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과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은 종교적인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업은 그것이 끝난 후에 우리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을 남긴다.

마치 향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아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업이 남기는 흔적은 일종의 에너지 형태이므로 그것을 업력(業力)이라고 부른다. 이 업력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존재 속에 남아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중생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의 모든 것은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든 것은 현재 우리가 짓고 있는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수 있는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현재와 미래 생(生)의 모든 조건을 결정하는 것도 업력이다. 중생들의 형태·성격·운명·행과 불행·병, 그리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모두 이 업력의 영향 아래에 있다.

업의 결과는 한 생(生)뿐만 아니라 여러 생에 걸쳐 작용한다. 그래서 중생들의 현재의 운명은 과거에 그들이 지은 업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든 것은 현재 그들이 짓고 있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업은 한 존재가 과거 생으로부터 받아 현재 생을 살게 하고, 역시 미래 생을 결정하는 정보체와 같은 것이다. 생명공학에서 말하는 DNA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업은 개체(個體)의 의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적(個的)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거나 다른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를 자신이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역시 어떤 외부적인 존재나 힘도 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자신이 짓고 자신이 그 결과를 받아야 한다. 중부경전에서는 이것을 “이 악업을 지은 것은 너 혼자서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과보도 너 혼자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게 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틀림없이 과보를 맺지만 그 결과가 산술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두 개의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된다. 예를 들면 똑같은 내용의 보시(布施)를 하더라도 그 보시가 행해진 대상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그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 주는 것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 큰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농부가 동일한 양의 종자를 동일한 넓이의 밭에 심어도, 그 밭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수확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그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행하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전은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잔 속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 속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떤 업에 대해서 다른 업으로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말하자면 업이론은 기계론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존재의 계속

불교의 존재론에 의하면 생명체란 끊임없이 변하는 비실체(非實體)적인 몇 개의 요소들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모여 있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五蘊-無我이론). 존재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물질적·정신적 현상들의 집합체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의 반복적인 운동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촛불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을 켜 놓으면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계속해서 탄다. 그 촛불은 초저녁에서 밤중으로 밤중에서 새벽으로 끊임없이 변하면서 계속한다. 촛불 속에는 실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생명체도 이와 같이 변하면서 계속한다는 것이다. 개체의 생명을 일정 기간 동안 유지시키고 계속하게 하는 것은 단지 업력(業力)의 작용일 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찰나생멸적인 존재의 생명을 현재에 유지시키고, 미래에 계속시키는 업력은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축적되고 보관되었다가 현재의 생이 끝날 때 다음 존재로 전달되는가.

이 문제는 아뢰야식 이론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뢰야(阿賴耶:a-laya)’라는 말은 ‘장(藏)’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장(藏)’이라는 말은 업력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섭지(攝持)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뢰야식이란 한 마디로 ‘업력을 그 속에 간직하여 보존하고 있는 식(識)’을 말한다. 우리가 무한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은 모든 업은 잠재적인 에너지(餘力, 餘習)의 형태로 이 아뢰야식 속에 훈습(薰習)되어 보존되게 된다.

후기 불교에서는 이 업력을 종자(種子)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식물의 종자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업력도 틀림없이 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력을 보관하고 있는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서 순간 순간 생멸하면서 그 결과를 맺을 때까지 소멸되지 않고 유지된다. 종자는 찰나마다 생멸하면서도 그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종자끼리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앞 순간의 종자가 뒷 순간에 새로운 종자로 변천하면서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자가 종자를 낳는다.’라고도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뢰야식 속에 보존되어 계속된 업력이 한 생명체가 죽어 육체가 소멸될 때 어떻게 다음 생명체에 전달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중유(中有)이론으로서 설명된다. 한 존재가 죽으면 그 존재가 가지고 있던 업력은 즉시 중유라는 존재로 된다. 중유란 존재가 죽는 순간에서 다음 생을 받게 되는 사이에 취하게 되는 한 형태로서, 사(死)와 생(生) 사이에 일시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중간존재’이다.

모습은 어린아이와 같고, 신체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의 시각기관으로서는 볼 수 없다. 이 존재는 형태적으로는 중유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아뢰야식이다. 이 식은 앞 존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업력, 즉 모든 정보를 보존하고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한 존재가 중유 상태에서 다음 존재로 생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유는 자신의 부모가 될 인연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여자, 또는 암컷과 수컷이 만나서 교합하는 것을 보면 마치 중유 자신이 그 행위를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고, 자신도 교합하려는 욕망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그 두 남녀, 또는 암컷과 수컷은 각각 정혈(精血=精子와 卵子)을 내게 되고 그것들은 모태에서 결합하여, 마치 끓인 우유가 엉기듯이 응결하게 된다. 이 응결체(凝結體)에 중유가 결합하게 된다.

중유는 이 응결체와 결합하는 순간에 소멸된다. 중유가 소멸됨과 동시에 그 속에 보존되어 있던 아뢰야식(=業力)이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응결체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물질원소(四大種=地·水·火·風)와 함께 작용함으로써 미세한 감각기관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력의 영향 속에서 점차로 태아의 신체로 발전하게 되고, 때가 되면 완전한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태어난 존재는 전생에서 물려받은 업을 소비하면서 한 생을 살지만 역시 다시 새로운 업을 만들고 그것을 다음 생으로 전하게 된다. 생명체(有情物)는 이렇게 자기복제를 반복하면서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긴긴 세월에 걸쳐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3. 생명공학

1) 유전자

DNA 생명의 신비는 생명체를 태어나게 하고, 그것을 유지시키고 다시 다음 세대로 계승시키는 유전자의 비밀에서 시작된다.

이 신비를 푸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멘델(Mendel)이다. 그는 1865년에 유전 법칙을 발표했다. 이것은 현대 생물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뒤 모건(Morgan)은 유전자가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염색체 위에 실려 있다는 것을 해명했고, 에이브리(Avery)가 유전물질은 DNA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DNA란 Deoxyribo-Nucleic-Acid의 줄임말로서 디옥시리보 핵산(核酸)을 가리킨다.

1953년에는 왓슨(Watson)과 크릭(Crick)이 이 DNA의 구조를 규명해 내었는데, 그것은 2가닥의 실이 꼬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DNA의 이중나선구조). 왓슨과 크릭이 규명해 낸 이 사실은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멘델의 유전법칙 발견에서부터 왓슨의 DNA 이중나선 규명까지 생물학자들이 알아 낸 사실들을 한 마디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모든 생물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세포의 핵 속에는 여러 개의 염색체들이 들어 있는데, 이 염색체는 DNA라는 물질이 이중나선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이중나선은 당(糖)과 인산과 염기(燐酸:鹽基)의 3가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당과 인산이 이중나선의 바깥쪽 부분을, 염기가 그 안쪽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닥다리에 비유해 설명하면 당과 인산은 사닥다리의 양쪽 버팀목이고, 염기는 사닥다리의 계단에 해당된다.

이 염기들은 아데닌(A)·티민(T)·구아닌(G)·시토신(C) 등 4종류인데, 이것들은 항상 두 개씩(A와 T, G와 C) 쌍을 이루어 결합해 있다. 이것을 염기쌍이라고 부른다. DNA에 포함되어 있는 염기는 4가지 종류밖에 되지 않지만 이 4종류의 염기가 수천 개 또는 수만 개로 배열된다면, 그 배열순서의 종류는 천문학적인 수에 달하게 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세포 한 개 속에 46개의 염색체, 즉 46개의 DNA가 들어 있고, 여기에는 약 30억 개의 염기배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염기 배열의 차이가 사람들의 차이를 만들게 된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피부빛깔·목소리·성질 등이 다른 이유는 이 염기 배열의 차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전자란 유전정보를 의미하는 것이고, 유전정보란 DNA분자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유전자의 전달

모든 생물은 그 종(種)과 개체의 특성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새는 새의 특성을, 사람은 사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새들, 또는 사람들 가운데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새와 사람이 지상에 나타난 이래 똑같은 새나 사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때문이다. 새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새가 되어야 하고,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새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와 ‘이 사람’이 되지 않고 ‘저 새’와 ‘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유전자 때문이다.

유전자는 태어나는 존재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 지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최근까지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여러 가지 추측들만이 무성했다. 신을 믿는 종교들에서는 생명의 출현은 신의 창조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문제는 신의 영역이고, 그 누구도 관여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대의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인 입장에서 밝혀 나가면서 그것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생명의 발생, 진화, 계속(유지)에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구에 생명이 출현하게 된 것은 먼 과거의 어느 때(30억 년 전)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고, 그것들이 어떤 계기에 변이(變異)를 일으키면서 진화해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 유전자를 전제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어떻게 유지·계승되어 왔고, 또 어떻게 다음 세대로 전달이 되는가. 사람이라는 생물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성(性)세포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세포핵 속에는 46개의 염색체가 들어 있는데, 모든 유전자는 그 속에 물질(鹽基)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일생 동안 불변적인 것으로서, 어떠한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전한다. 이 유전자가 다음 존재로 전달되는 것은 오직 정자와 난자를 이루고 있는 성(性)세포만을 통해서이다. 성세포는 육체를 이루고 있는 체(體)세포 염색체의 절반인 23개의 염색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도 체세포 유전자의 절반밖에 들어 있지 않다. 이 반쪽씩의 성세포는 혼자서는 절대로 사람의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반드시 난자와 정자라는 두 개의 세포가 결합해서 완전한 하나의 새로운 세포(수정란)를 형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세포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서 성숙된 한 인간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유전정보의 전달이 남녀간의 성 관계에 의한 두 개의 성세포의 결합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이유는, 새로 태어나는 개체에게 한 존재의 유전자만이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내용이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2개의 유전자가 융합함으로써 개체는 새로운 생을 시작 할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흡수해서 변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생물들은 이와 같은 유전자의 전달방법을 통해서 그들 각각의 종을 보존하면서도 개체들의 특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다가 한 번씩 유전자에 돌연변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유전자들은 기존의 틀을 깨고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만들어 내곤 한다. 이것이 진화현상이다. 그러나 생물의 유전자는 돌연변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어느 누구도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영역은 신(神), 또는 만물을 창조한 존재(창조주)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3)생명공학

생명공학이란 생물학에서 규명해 낸 생명에 대한 사실들을 공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기술이다. 생명공학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체의 신비를 해명해 내려는 것보다는 인간의 영원한 소망인 무병장수, 즉 암·당뇨·치매와 같은 난치병을 치료하여 병 없이 오래 살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식물의 품종을 개량해서 보다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유전자 속에서 암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암을 사전에 방지한다든지, 우유를 많이 생산해 내는 소의 유전자를 찾아 내어 그와 같은 소를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위해서이다. 생명공학자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세포의 구조와 세포핵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물체의 유전자를 바꾸거나 혼합해서 제3의 세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 지상에 아직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생물을 돌연변이나 진화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의도와 힘으로 새로운 생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토마토와 감자 세포를 합성해서 토마토도 아니고 감자도 아닌 포마토(pomato)라는 새로운 식물을, 그리고 호랑이와 사자의 유전자를 결합해서 호랑이도 사자도 아닌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1996년에 생물학상에 있어서 획을 긋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한 연구소에서 윌머트라는 생명공학자가 지금까지 해온 생명조작 단계를 훨씬 뛰어 넘어 양(羊)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돌리 양의 탄생’이다. 이 일은 인간의 삶에도 크나큰 변화를 예고하게 되었다. 어떤 학자는 이 일을 “인간의 역사를 ‘돌리’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 대사건”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는 성(性)세포의 결합을 통해서 만이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될 수 있었는데 돌리라는 양은 성세포가 아닌 체(體)세포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원리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이렇다.

A라는 양의 미수정 난자에서 그 핵을 제거해 버리고 B라는 양의 체세포(유방세포)의 핵을 꺼내어, 그것을 핵이 제거된 A양의 난자에 삽입해서 B라는 양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양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윌머트는 단지 약용(藥用)에 필요한 단백질이 들어 있는 양유(羊乳)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이 연구를 해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물학상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된 것이다.

윌머트가 이룩한 연구결과는 생물의 어떠한 부분의 세포를 가지고서도 생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태어난 생물은 세포를 제공한 그 생물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품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사람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피 속에 들어 있는 세포나 손가락 부분에서 떼어낸 세포를 가지고서도 그 세포의 주인과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대로라면 태어나는 2세는 부모의 양쪽 유전자를 반반씩 소유해야 되겠지만 이처럼 체세포를 가지고 출생하는 2세는 체세포 주인의 유전자만을 가진 복제인간이 되는 것이다. 돌리라는 양이 세상에 태어난 지 만 4년이 되는 지난달 6월 26일, 생물학계는 다시 한 번 세상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인간 유전자 연구 계획)’의 중간발표가 있었다. 이 날은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인간 게놈(genome)이란 인간의 세포핵 속에 들어 있는 염색체 전체를 가리킨다. 인간이 가진 46개의 염색체 내에는 30억쌍의 염기가 이중나선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이 염기 배열의 순서가 바로 인간 유전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이 30억쌍의 염기가 어떤 식으로 배열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았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란 이 염기 배열을 모두 분석하려는 것이다.

30억 개의 염기쌍 가운데서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몇 개씩의 염기쌍들이 모여 이룬 유전 암호체)는 대략 10만 개쯤 된다고 보고 있는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란 바로 이 유전자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염색체의 어떤 부분에 어떤 유전정보를 가진 유전자들이 위치하고 있는가를 규명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연구계획은 여러 나라의 수백 개 연구소들이 30억 달러라는 막대한 예산과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치기로 하고 1990년에 시작되었다.

처음 계획보다 빠르게 작업이 진행되어서 올 가을에는 계획했던 연구가 매듭을 짓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염색체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 그들의 기능과 작용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은 세포단계에서 미리 태어날 인간의 모든 것, 즉 육체적인 조건뿐 아니라 정신적인 성향, 지능, 뒷날 걸리게 될 병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그것을 조작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우리가 인간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면 부모가 될 사람은 태어날 자식을 세포 단계에서 이미 손을 대려고 할 것이다. 암과 같은 무서운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놔두고라도 키·머리색깔·지능지수 등을 부모의 뜻대로 정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타인의 의사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4. 윤회설과 생명공학의 주장 비교

1) 윤회설의 주장

윤회설에 의하면 인간은 어느 때 어떤 조물주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또 이 세상에서 단 일회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까마득한 세월을 통해 태어나서 죽고, 죽어 다시 태어나는 일을 한없이 되풀이한다. 역시 인간과 동물은 처음부터 별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원은 동일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세계를 통해 다른 형태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즉 사람이 짐승이 될 수 있고 짐승이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은 신과 같은 타자의 의지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가 지은 업에 의해 스스로 결정이 된다. 업이란 한 존재가 오랜 세월을 통해 겪어온 정신적·육체적 경험의 축적이고, 미래를 살아갈 정보의 총합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이 업에 의해 결정이 된다. 업은 각 개체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단 결정이 된 뒤에는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업의 결과(果報)는 어느 때인가는 틀림없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존재가 과거의 업을 계승해서 새로운 생을 시작할 때 업은 자동적으로 과거의 생에서 현재의 생으로 계승되는 것이지, 자신이나 타자의 뜻과 힘에 의해 주어지거나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에 자신의 의지에 의해 새로운 업을 지어서 과거에서 계승한 업에 변화를 줄 수는 있다. 업은 일종의 에너지 형태로 바뀌어(業力)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축적된다. 우리가 한 생을 살다 죽으면 육체는 물질 원소로 되돌아가지만 아뢰야식은 중유(中有)라는 존재로 형태를 바꾸어 자신과 인연이 있는 존재의 정혈(精血: 정자와 난자)의 응결체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게 된다(三事化合).

여기에서 말하는 정혈의 응결체란 생물학에서 말하는 수정란과 같은 것이 아니라 DNA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정자와 난자의 응결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핵이 제거된 성(性)세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유란 어떤 한 존재가 긴 과거를 통해 축적한 모든 정보체이기 때문에 복제인간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체(體)세포의 핵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재탄생은 성세포의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체의 체세포의 전이(轉移)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물공학의 주장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에 관한 사실들은 거시적 관점에서는 불교의 윤회설과 비슷하다. 즉 인간은 창조자인 신(그런 존재가 있다면)과 같은 누구에 의해 특별히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모든 동물들은 근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수없이 긴 세월을 통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계속되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 생명을 계속하게 하고 생물의 종류와 특성을 결정짓게 하는 것은 존재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정보체(DNA)라는 것, 이 정보체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다음 생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이 정보체는 불교의 업(業)의 경우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두 주장의 차이

불교에서는 생명체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시키고 다음 세대로 전달시키는 인자를 일종의 에너지(業力)라고 보는데, 이 에너지 자체는 한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의 총합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물질(DNA)이라고 본다. 이 물질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생물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성(性)세포를 통해 다른 곳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불교의 정보체(業)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죽어야만 다른 존재에게로 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항상 한 존재에서 한 존재로 계승되는 것이지, 한 존재가 두 존재 또는 세 존재로 증식될 수는 없다.

태초부터 그 존재는 그 존재일 뿐이다. 단지 형태만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자손을 많이 가지는 경우 그것은 그와 인연이 있는 존재들이 그의 몸을 빌려 그에게 태어나는 것일 뿐 생물계에서 보는 것처럼 증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5. 윤회설의 문제점과 가능성

1) 생명공학이 야기할 수 있는 난제들

생명공학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큰 혜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오랜 바람인 병 없는 삶, 그리고 오래 살 수 있는 것, 즉 무병장수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고, 식량의 증산과 환경문제의 개선으로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좋은 점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명공학의 발전 앞에서 우려하고 망설이고 반대하고 있는 것은 생명공학의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이다. 부정적인 점들이 긍정적인 점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명공학 시대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미리부터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인류역사 이래 인간은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시대와 동일한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에 뒷따르게 될 문제들이다. 생명공학은 다른 과학 기술과는 달리 인간의 핵심 요소인 유전자를 인간의 의도대로 바꾸어 결국 인간 자체를 변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경우 그것과 함께 발생할 문제들 가운데서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새로운 차원에서 제기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순수한 물질인 DNA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복제로 만들어진 인간도 진짜 인간의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체세포를 빌려 준 인간과 새로 태어난 인간의 관계도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과 유전자가 똑같은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 과연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인을 했을 경우 죽은 사람의 피 한 톨만을 가지고도 그 사람을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의 탄생에서 절대적이었던 성(性)이 다음 생을 재생산하는 유일한 도구도, 방법도 아니라는 것이 구체화되었을 때 성 윤리는 얼마나 달라질 것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 가족문제는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영혼의 문제도 역시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불멸적인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들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것이다. 한 존재로부터 많은 복제인간을 만들었을 때 육체와 동일한 숫자의 동일한 영혼이 존재하게 되는가, 육체는 같아도 영혼은 다른가. 만약 여러 사람의 유전자를 조합해서 한 인간을 만들었을 때 영혼도 여러 가지가 혼합되는 것인가. 이런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어떤 답을, 어떤 설명을 내 놓을 수 있겠는가. 외견상으로 인간복제 문제 앞에서 윤회설은 다른 종교 교리에 비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문제를 좀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심각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생명공학의 도전에 직면한 윤회설

① 업문제(유전자 문제):
유전자(DNA) 조작으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때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될 것은 업이론일 것이다. 업의 원리는 행한 대로 그 결과를 받는다는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업이론에 따르면 얼굴이 못생기고 목소리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전생에 ‘욕설’을 많이 한 결과다. 이제 욕설을 많이 한 사람도 유전자의 조작에 의해 다음 생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과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쁜 업을 많이 지으면 축생의 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우려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역시 축생이 될 수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버리고 우수한 인간으로 태어날 유전자를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콩 심은 데 콩이 아니라 팥이 날 수도 있게 되고 말았다. 업은 타력이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타자의 뜻에 의해 사전에 계획되고 수정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업이론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윤회설은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며 불교의 윤리 문제는 그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② 윤회문제(재생문제):
윤회사상에 의하면 우주의 생명체는 그 기원에서부터 그 숫자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생명체가 죽으면 그것은 형태를 바꾸면서 다시 태어나게 되지만 증식은 할 수가 없다. 태초부터 그 존재는 그 존재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자식들을 많이 가지는 경우, 그것은 그와 인연이 있는 존재들이 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일 뿐 새로 창조된 존재들은 아니다. 이제 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복제인간이 만들어져 나오게 된다면 윤회의 이와 같은 설명은 통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③ 수행문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고(苦)에서의 해탈, 또는 고의 소멸, 열반이라고도 표현하지만, 말을 바꾸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탐욕심(貪), 화내는 것(瞋), 진리에 대한 무지(癡) 등 이른바 3독(毒)이다. 수행이란 궁극적으로는 이 3독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3독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는 길고 긴 세월을 통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다.

수행이 잘 된 사람의 세포를 구해 자신의 DNA를 재구성함으로써 수행의 극적인 결과를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자은행에서 좋은 정자를 공급받듯이 역시 ‘상점’에서 원하는 업(業)을 구입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상에 불과한 일이지만 허황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미인이나 지능이 높은 사람들의 정자와 난자(유전자의 덩어리)가 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멀지 않아 유전자의 조작으로 인간의 공격성· 분노심·나태심·탐욕심·어리석음과 같은 나쁜 경향을 완화시킬 수 있는 날이 올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수행의 의미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수행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말지도 모른다. <끝>

윤호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 졸업. 종교학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초기불교 전공). 저서로는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인도불적답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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