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1회- 2009년 2월 27일

1. 교통표어의 비극, 또는 희극 - “사람은 왼쪽, 차는 오른쪽”

“사람은 왼쪽, 차는 오른쪽” 누구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던 교통표어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통행규칙이다.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대륙의 경우 사람이든, 자동차든 우측통행을 하게 되어 있고,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섬나라의 경우는 대부분 좌측통행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이런 독특한 통행규칙을 제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교식 의례에서 따르는 남좌여우(男左女右)나 제사상의 홍동백서(紅東白西)의 규칙에서 보듯이, ‘인간’과 ‘자동차’의 지위를 구별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그러면 그런 규칙에 따라 통행을 할 경우 무언가 편리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렇게 통행할 경우 정반대로 불편과 위험이 따른다. 두 가지 상반된 규칙을 염두에 두고서 생활해야 하기에 번거롭기도 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보행자의 바로 왼쪽에서 차가 정지하기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교통규칙’이다.

통계를 찾아 본 적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가운데 횡단보도 사고가 다른 나라에 비해 특히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교통규칙이 이렇게 특이하게 제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면에는 한반도의 정치적 비극이 숨어있다. 서구의 자동차 문화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람이든, 자동차든 모두 일본의 방식을 따라 좌측통행을 하였다.

그런데 8.15 해방 후 미군과 함께 들어온 군용차들이 도로의 우측을 질주하자, 당황한 관리들이 엉겁결에 급조했던 표어가 “사람은 왼쪽, 차는 오른쪽”이었다. 이 비극적(또는 희극적) 표어는 근대화 이후 제도와 문화와 경제의 모든 면에서 우리사회를 분점(分占)하고 있는 이들 두 나라의 영향을 상징한다.

2. 한국 종교 교세 변화에 대한 정치 역학적 분석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격언이 있다. 어떤 사회의 물질적, 경제적, 군사적 토대에 의거하여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규범과 문화 등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먹어야 양반이다.”라거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는 우리의 속담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조셉 나이(Joseph Nye)는 한 국가의 힘을 ‘딱딱한 힘(hard power)’과 ‘부드러운 힘(soft power)’으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이고 후자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국이 원하는 바를 다른 나라들이 원하도록 만드는 한 나라의 힘’인데 헌팅턴(Huntington)은 이 두 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물질적 성공과 영향력에 뿌리를 둔 것으로 파악될 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부드러운 힘’은 ‘딱딱한 힘’의 토대 위에서만 힘을 갖는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단단해지면 자신감과 자부심이 올라가며, 자기 문화 혹은 부드러운 힘의 상대적 우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진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내리막길을 걸으면 자기 회의와 정체성에 위기가 찾아오고 다른 문화에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성공의 열쇠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딱딱한 힘’은 앞에서 말한 하부구조에, ‘부드러운 힘’은 상부구조에 대응하며, 요컨대 종교를 포함한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적 힘의 우위를 쫓아 변화한다는 것이다. 구한말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최빈국 중 하나였으며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위치하기에 국민 전체의 무력감(無力感)과 빈곤감(貧困感)이 상대적으로 극심했던 ‘한반도’의 ‘종교 교세 변화’를 분석할 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다.

근대 이후 우리 한반도는 소위 4대 강국의 각축장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소련(러시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미국,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일본 …. 끔찍하다. 필자는 어느 수필에서 한반도의 분단의 모습을 거열형(車裂刑: Pulled-Apart)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양팔을 끌어당겼고, 남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양 다리를 끌어당겼다. 허리가 찢어졌다. 분단이었다.

한반도 주변국의 ‘물리적, 경제적 힘’(딱딱한 힘)은 한반도의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부드러운 힘)의 세력 판도와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⑴ 개신교 - 미국

구한말 한반도 주변의 ‘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희망을 미국에서 찾고자 한 고종은 미국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그 활동을 보장하였다.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가 파견하여 1885년 조선에 입국한 후 배제학당을 설립(1885)한 아펜젤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하여 의료선교활동을 벌이다가 연희전문을 설립(1915)한 언더우드, 미국 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5월 3일 입국한 후 이화학당을 설립(1886)한 스크랜턴 등이 구한말 활개를 펴고 활동했던 대표적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개신교 국가의 창설을 공표하고 다녔던 이승만이 집권한 후 6.25사변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 개신교가 급성장하였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부구조’의 위력으로 한국인의 ‘상부구조’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한국에 ‘해방자’로 들어온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한국 개신교 세력의 급격한 성장을 ‘종교적 기적’이라고 평하는 학자도 있지만, 보다 깊이 분석해 보면 이는 해방 직후 한국과 미국의 경제력의 극심한 격차를 반영하는 일일 뿐이다. 미국이 제공한 ‘하부구조’(딱딱한 힘)의 위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적 흠모’는, 개신교회 일색인 LA나 뉴욕의 교포사회의 모습, 미국 내 한국 유학생 비율, 아직도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 취득을 ‘행운’으로 간주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정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모습과 똑같은 일을 동남아, 몽골, 중동 등 저개발국가에서 재현하고 있다. 이들 코리안 크리스천들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현지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개신교는 최근 들어 급격한 쇠락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원인을 개신교 내부의 부패에서 찾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 어느 정도의 부패는 상존한다. 종교집단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힘이 있을 경우에는 그런 부패가 오히려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칭송되거나 사소한 예외로 무시되기도 하지만, 힘을 잃을 경우에는 비난을 받게 된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미국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우리 사회에 유포되었고, 미국 일변도의 해외무역에 변화가 왔으며, 우리와 인접한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경제,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 최근 들어 개신교가 쇠락하는 근본 원인이다.



⑵ 가톨릭 - 유럽

가톨릭의 경우 한반도에 전파된 지 200년이 넘었음에도 개신교와 비교할 때 교세 성장 속도는 둔했는데, 최근 들어 교세가 급격하게 신장하고 있다. 종교인구통계조를 보면 최근 10년 동안 신도 수가 40% 가량 늘어날 정도로 급성장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먼저 가톨릭의 급성장 역시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종속적’ 성격을 갖는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30여 년 전 한반도 내에서 우리가 접하는 서양사람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 과거, 우리에게 ‘서양’은 ‘오직 미국’일 뿐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과 합작하여 만들어진 고속철도(KTX)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십 수 년 전부터 유럽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증대되고 있다.

영국이나 독일 북부지방 등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은 가톨릭 국가들이다. 해외여행자유화 이후 유럽여행을 통해 우리 한국인들이 서구에서 가톨릭의 세력이 꽤 크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고, ‘개신교계 목회자의 타락에 염증을 느낀 사람’, ‘불교계의 각종 사태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무종교인이 ‘가톨릭 조직’에 입문하면서 가톨릭 인구가 급증한다.

학교 교육이든 매스컴이든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서구의 학문과 문화를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하기에, 새롭게 발견된 가톨릭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확산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의 현실참여와 ‘이미지 관리’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라고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톨릭에서 선도적(先導的)으로 사회운동가들을 포용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1970년 전후하여 독재에 항거하며 시위하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하기 시작한 것은, 그 당시 대학생들의 ‘잘못된 상식’때문이었다. 중세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성역(聖域: Sanctuary)으로, 지금의 외국 대사관이 그렇듯이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였다. 영국의 경우 중세를 포함하여 17세기까지 정치권력과 교회 사이에는 법집행의 장벽이 있었다.

그런데 서구의 중세를 그린 영화(映畵)를 통해 가톨릭교회를 ‘치외법권의 성역’으로 착각한 대학생들이 박정희 통치기에 ‘3선개헌반대’, ‘유신헌법반대’를 외치다가 공권력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하게 된다. 물론 그 때 그들을 적극 감싸주고 공권력에 항거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없었다면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정진석 대주교 취임 이후 명동성당 부근의 ‘상근 시위자들’을 모두 내쫓았다. 일반국민 대부분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가톨릭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이것이 가톨릭교단의 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서구역사에서 진보적 사회운동과 가톨릭교단은 상극관계에 있었다. 소설 ‘로빈후드’에서 보듯이 중세의 가톨릭은 제후와 결탁하여 민중을 착취하는 종교권력기관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1789년)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은 가톨릭교단은 그 면모를 쇄신한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궁핍한 자에 대한 자선’의 표어를 내걸고 전 세계 선교에 나섰던 것이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예수회(Jesuit)였다. 예수회는 우리나라의 서강대학을 설립한 교단인데,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주사파 운운’ 하며 진보진영을 비난했던 박홍 총장(신부)의 발언에 로마 가톨릭 주류의 사회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800년대에 일어났던 서구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 역시 가톨릭을 위협하는 적대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이례적으로 우리 사회의 진보적 흐름에 동조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김수환 추기경 개인의 행보였다. 그리고 가톨릭 사제들이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현실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국제적 정교(政敎) 혼합 조직’인 로마교황청이 그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연구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안에 대해 로마교황청에서 지침이 만들어지면 전 세계 가톨릭교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 지침이 준수되도록 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대(對)사회적 선언과 행동 모두에 고도의 전략을 담는다. 가톨릭 내부의 문제나 갈등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게 철저하게 단속함으로써 ‘종교적 신뢰’의 본질인 ‘성직자의 청정성’을 시현한다. 세계 최대의 단일한 종교조직인 로마가톨릭의 ‘세력 확장’ 비결이다.

⑶ 불교 - 일본, 미국

① 여말선초 - 근현대불교의 흐름에 끼친 한반도 주변국의 영향에 대해 논하기 전에, 600년 전으로 돌아가 한반도 역사에서 종교 판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던 여말선초의 정치-종교적 상황을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고려 말 불교의 부패로 인해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사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은 명나라의 통치이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건의 ‘훈요십조’(943년)나 최승로의 ‘시무이십팔조(982년)’에서 보듯이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경고는 고려 초부터 있어 왔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불교에 대한 유생들의 비난은 고려시대 전반(全般)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유독 고려 말에만 극심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교의식(儀式)은 고려시대를 통틀어 국가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 중요한 기복행사로 계속 거행되었다.

그런데 고려 말이 되어 주원장(朱元璋)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명을 건국(1368년)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고려 말 공민왕 4년(1370년)에 주원장이 보냈던 새서(璽書)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사신이 돌아왔기에 국왕의 정사를 물으니 말하기를, “왕이 불도에만 힘쓰고 있으며, 바닷가를 지나오는데 백성들이 바다에서 50리, 혹은 3, 40리 떨어진 데서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기에 짐이 그 까닭을 물으니, 왜놈들이 침범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어, “성곽이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백성은 있어도 성은 없다고 하며, “갑병이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엄숙한 기상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며, “왕의 거처가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거처는 있어도 정사를 청단(聽斷)하는 곳은 없다고 하였다. 짐이 이내 생각해 보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왕을 위하여 심히 염려된다. 짐이 비록 덕은 부족하지마는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고려왕이 이미 신이라 일컫고 조공을 바쳤으니, 사체가 옛날의 예절과 부합된다. 무릇 제후국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짐이 위태함을 붙들어 주는 도리로 왕에게 개유하여 이를 알리지 않을 수 없다. … …

역대의 군주는, 중화와 사이(四夷)를 논할 것 없이, 인의와 예악을 행해야만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룰 수 있는데, 지금 왕은 이를 버리고 힘쓰지 않으며, 날마다 재(齋)를 지내고 계(戒)를 지키는 것을 일삼아서 죄와 원한에서 벗어나 내생의 복을 구하기를 바라니, 불경의 설(說)에 이런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왕도를 높이지 않고 불도를 높이니, 그 요령을 잃은 것이다. 짐이 어릴 때 중이 되어 선강(禪講)을 또한 참구(參究)하였는데, 부처가 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요, 생사를 초월함은 전혀 증험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힘써서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실로 고금에 없었으니, 양무제(梁武帝)의 처사가 귀감이 될 만하다. 지금 왕이 능히 선왕의 도를 행하여,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일으키고 해되는 것을 제거해서 부모처자로 하여금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게 하여서 각기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한다면, 인구가 날로 번성할 것이다. 이 도가 만약 행하여지면 복덕(福德)의 응보로서 반드시 궁중에서 왕자가 날 것이니, 이는 수행의 큰 것이다. … …
사신의 보고에 의하여 왕이 법복을 마련해서 종묘를 받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짐이 매우 기뻐하여 이제 왕의 관복과 악기, 그리고 배신(陪臣)의 관복과 대통력(大統曆)을 주노니, 그곳에 도착되거든 받도록 하라.

명나라를 건국한 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원장은 고려말 공민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불교를 폐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대륙에서 원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간파한 공민왕은 반원 정책으로 일관했지만 이어서 우왕 집권기에 명이 요동을 점령하자 우왕은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정벌을 명한다. 이성계는 이를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들어와 위왕을 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에 오른 후 명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국호를 낙점 받아 조선을 건국한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와의 관계, 세종의 한글 창제와 함께 편찬된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 세조의 간경도감 설치에서 보듯이 조선조 초기 왕실은 내부적(內部的)으로 친(親)불교적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대국 명에 순응하면서 외적(外的)인 통치의 영역에서 불교는 완전히 말살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고려-조선 전환기의 통치이념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의 건국이었다. 조셉 네이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면,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던 중국대륙에서 ‘hard power’를 갖는 나라가 원(元)에서 명(明)으로 바뀌면서 ‘soft power’ 역시 불교에서 유교로 변하였기에, 인접국인 조선의 통치자들은 이에 순응했던 것일 뿐이다.

② 근현대 - 근현대는 한국 불교의 여명기이기도 하다. 중국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난에 못지않은 조선왕조의 폐불정책으로 기나긴 혹한기를 견뎌온 불교는 구한말 이후 소생하기 시작한다. 주지하듯이 그 시발점은 일본 일련종 승려의 건의로 조선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된 1895년이었다.

한반도 불교사에서 단기간에 가장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시킨 시기는 구한말에서 20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근 100여 년 동안일 것이다. 경허(1849~1912), 용성(1864~1940), 만공, 혜월, 만암, 한암, 만해, 한영, 동산, 효봉, 전강, 구산, 청담, 경봉, 운허, 성철, 탄허, 서옹, 숭산 … . 그러면 조선시대 500년 간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불교가 구한말 이후 크게 부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구한말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모두를 승리한 ‘불교국가 일본’의 영향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에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불교와 관련하여 일본의 긍정적 역할을 굳이 하나 든다면, 친일이나 항일 여부를 떠나 ‘불교’를 상위에 놓는 가치관과 인생관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심어놓았다는 점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의 많은 엘리트들이 불도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승려들의 현실참여 역시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용성과 만해 등 불교지도자들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불교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일본 유학파가 주도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1945년 해방이 되고 1950년의 6.25동란을 거치면서 ‘세계 최강국인 보호자 미국’의 강한 영향으로 개신교는 급성장을 했지만, 전통종교는 역(逆)으로 절멸의 위기에 몰렸다. 사실 개신교의 급성장과 함께 전통 무속신앙은 ‘미신’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거의 사라졌다. 많은 개신교도들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백 년 전승되어온 유교적 제사나 차례의식을 거부하였다.

각 가정 내에서 일어났던 개신교와 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은 ‘구습(舊習)’과 ‘현대’의 갈등으로 위장되었기에, 그 어떤 정치경제적 힘을 갖지 못했던 유교는 백전백패하였다. 우리나라의 관혼상제 의식을 모두 장악했던 유교였지만 서구적 종교관이 우리사회에 유포되면서 내세관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종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종교인구통계조사 항목에서 아예 제외되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 불교의 운명 역시 다른 전통종교와 크게 다를 수 없었다.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개신교도들은 불교에 대해서도 ‘우상숭배’ 운운하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10여 년 지난 1960년대에 다시 불교 부흥의 불씨가 되살아난다. 불교대중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62년 대한불교청년회, 1963년 대학생불교도연합회, 1966년 삼보법회, 1970년 대한불교법조인회, 1973년 대원불교교양대학 등이 창립되었다. 이 때 청년포교의 일선에 나섰던 대표적 인물들은 벨기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기영을 포함한 동국대 교수들이었다.

이들이 불교의 우수성을 일반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했던 설득력 있는 논거 가운데 하나는 “미국을 포함한 서양인들이 불교에 심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많은 불자들은 ‘감동’하였다.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개신교의 공격으로 위축되고 있던 불교였는데, 포교 일선에 나선 불교학자들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힘’을 이용해 불교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이이치이(以夷治夷)의 포교방식이었다.

사실 1960년대 서구 사회의 변화를 되짚어 보면 이들이 제시했던 논거는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제국주의시대는 막을 내리고, 통치이념의 차이로 인해 세계는 동서 양 진영으로 갈리었다. 1953년 한반도에서 휴전이 성립한 후, 월남전이 발발하자 서구권의 맹주인 미국은 1963년 월남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20대 초반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국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결국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서구사회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었다.

1964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 점거하면서 발발한 미국의 학생운동은 1966년 6월 서베를린 자유대학의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1969년까지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의 대학으로 번진다. ‘68혁명’, ‘히피(Hippie)’ ‘대항문화(Counterculture)’, ‘뉴레프트(New Left)’ 등의 신조어들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구미를 뒤흔들었던 학생, 시민운동의 성격이 집약되어있다.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는 Flower Childs라고 불리던 히피들의 집결지였다. 서구의 학생운동에 신명을 불어넣었던 ‘박수무당’들이 바로 비틀즈(Beatles)였고, 조안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등 미국 대중가수들의 저항가요가 유행하였다. 젊은이들은 네팔의 카트만두(Kathmandu)와 인도 남동부의 고아(Goa)로 몰려갔다. 지금도 고아(Goa)에는 1960년대에 이주했던 ‘늙은 히피’들이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선불교에 대한 스즈키 다이세츠의 해설서를 탐독하였고, 인도의 마하리쉬 마헤시 요기가 창시한 초월명상법(T.M.)이 유행하였다. 일본 선승의 지도로 좌선 수행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Zen Master’라는 애칭을 갖는 농구감독 Phil Jackson은 NBA 출신 최초의 히피였다고 하며 뉴욕의 시카고불스 감독 시절 Michael Jordan과 Scottie Pippen, Dennis Rodman 등의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참선수행을 지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숭산(崇山) 스님은 구미 포교에서 기적과 같은 일을 일구어냈는데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스님의 활동 시기(1972년 미국 홍법원 창립)가 ‘자신들의 세계관과 종교전통에 환멸을 느낀 서구의 젊은이들’이 종교적 대안을 찾던 때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우, 1972년 송광사에 개설된 국제선원으로 서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삭발, 출가하였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UCLA대학의 불교학자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교수는 구산스님의 제자였고, 현재 미국의 의과대학과 병원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불교적 심리치료법인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의 개발자 존 카밧진(Jon Kabat-Zinn) 박사는 숭산스님의 제자였다.

이렇게 ‘미국을 포함한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은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감동’시켰고, 60, 70년대에 포교일선에 나섰던 불교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1960년대 서구의 저항적 젊은이들이 그렇게 했듯이 ‘산중의 큰스님’들을 대중 앞에 모시면서 불교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된다.

요컨대 근현대 한국불교의 부흥에 영향을 주었던 ‘힘의 원천’은 전반기에는 일본, 후반기에는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미국의 신세대(New Age)들이었다. 최근 한국의 많은 불자들이 선불교보다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 역시 구미 불교계의 변화와 유관하다.

⑷ 공산주의 - 소련과 중국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북한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 하에 들어갔으나, 북한의 정치가들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한 등거리 외교를 위해 제3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창안한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 이후 중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의존도가 커지면서 주체사상은 활용가치를 상실하였다.

3. 불교 부흥의 길 - 세계 불교도 연대와 승가의 청정성 회복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이전, 또는 자국의 문화 전통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나라의 국민이든, ‘경제력이나 군사력’[hard power]이 강한 ‘집단이나 나라’가 신봉하는 ‘종교나 이데올로기’[soft power]에 경도되기 쉽다. 위에서 분석해 보았듯이 이는 근대 이후 한반도 내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의 세력 판도와 변화에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은 물론이고 불교든 북한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든 그 세력의 판도와 변화는 한반도에 대한 4강대국의 힘의 분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런 조망에 근거할 때 앞으로 우리 불교계가 나아갈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강대국의 힘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승가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먼저 중국과 미국, 유럽의 불교계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교류를 확대한다. 최근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중국이 세계최강국이 될 날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접한 중국의 불교세가 강력해질 때, 한국의 불교세력 역시 급성장할 것이다. 중국불교의 부흥을 위해 대만이나 홍콩의 불교계와 공동의 노력을 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

아울러 1960년대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미국과 유럽의 불교지도자들을 국내의 불교포교 일선에서 적극 활용한다. 이를 통해 아직도 ‘서구적인 것이 보다 앞선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서구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교의 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있는 지금이기에 ‘강대국의 힘에 의지한 포교전략’만으로는 과거 ‘빈곤의 시대’에 개신교가 거두었던 것과 같은 정도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가 있다. 불교포교를 위한 정치 역학적(力學的) 전략이 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승가의 청정성 회복을 위한 불교 내부의 정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인간의 인지와 심성을 진정으로 성숙시키는 체계적인 교학이 고안되고 수행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이슬람교 전파의 경우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거나 “딱딱한 힘에 따라서 부드러운 힘이 변한다.”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근대 이후의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남아메리카의 가톨릭, 영미권 국가의 개신교신앙, 무력을 수반한 이슬람교 전파 등이 그 예들이다.

그런데 불교가 이들 셈족의 종교(Semitic Religion)와 차별되는 점은 하부구조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갖는다는 점이다. 초전기의 중국불교가 그랬고 지금 서구에 전파되고 있는 티벳불교가 그렇다.

후한(後漢) 말 위, 촉, 오 삼국 분립기를 거치면서 잔혹한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중국의 지식인들은 현실도피적인 노장사상에 경도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은 죽림칠현이었고 그 사상적 결실은 위진현학(魏晋玄學)이었다. 그런데 불교가 전파되면서 현학은 서서히 불교로 대체되었다. 불교 발생지인 인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등에 업고서 불교가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상부구조의 힘만으로 상부구조에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현재 구미에서 불교포교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티벳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티벳인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학교’를 지어주고 ‘병원’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불교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티벳의 군사력이 미국이나 유럽을 보호하고 있기에 전파되는 것도 아니다.

티벳불교 ‘승가의 청정성’과 ‘교학의 설득력’이 서구인들을 불교에 심취하게 만든다. 순전히 상부구조의 힘만으로 상부구조를 대체하는 방식이다. 사회구성원들이 경제적, 물질적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에는 이런 방식의 포교가 ‘힘에 의한 포교’보다 더 효과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을 ‘종교전파방식’에 적용할 때, ‘식사 전’과 ‘식사 후’를 나누어 풀이할 수 있다. ‘식사 전’에는 금강산보다 ‘식사를 제공하는 측’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근현대 한국 종교의 세력 추이(推移)가 그랬다.

그러나 ‘식사 후’에는 식사가 아니라 ‘금강산’의 절경(絶景)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현대 구미 사회에 티벳불교가 전파되는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한(恨)’이 풀린 지금의 우리 사회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티벳불교가 그렇듯이 다른 종교 이상의 ‘절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청정한 승가’와 ‘체계적인 교학’이다.

 

김성철 / 1957년생. 198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199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 과정 졸업(철학박사). 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저서 및 역서로 《중관사상》,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중론》, 《회쟁론》 등이 있고, 논문으로 〈역설과 중관논리〉외 50여 편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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