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6회 - 2009년 5월 8일

발표자 오강남 교수

- <오강남의 도마복음 풀이> 발췌 및 동양철학과 비교 연구

*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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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절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_신성(神性)의 씨앗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밖에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렸습니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고, 또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결실을 내지 못하고,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숨통이 막히고 벌레들에게 먹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어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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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도 여래장如來藏, tathātagarbha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모두 여래, 곧 부처님 혹은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는 ‘장藏’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장’이란 ‘자궁’이라는 뜻과 ‘태아’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공간과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현실에서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돌짝밭, 가시덤불, 벌레 같은 장애물 때문에, 혹은 불교 용어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때문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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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엎드려 경배하십시오. 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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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여자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성령으로 혹은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여자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다. 제2 혹은 제3의 탄생은 생물학적·육체적 태어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 태어남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와 하나 된 사람, 그러기에 그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의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11:11)라고 했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 세례 요한이고, 천국에 있는 이들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라고 했는데, 여기 『도마복음』 제15절에는 아예 이런 사람들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인간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심지어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종교 지도자까지도, 결국 영으로 태어난 사람,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석가님도 여러 해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는 성불의 체험을 했다. ‘성불成佛’이란 어원적으로 ‘깨침을 이룸’, 혹은 ‘깨친 이가 됨’이란 뜻이다. ‘불’, ‘부처’, ‘붓다’는 모두 ‘깨친 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깨치는 경험을 하고도, 세상일에 집착하고 있는 일반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에 주목이나 할까, 주목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사람들에게 나가서 자기가 깨친 진리를 전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당시 최고신의 하나인 브라마Brahmā梵天 신이 내려와 그에게 경배하며 “세존이시여, 진리를 가르쳐주소서. 수가타시여, 진리를 가르쳐주소서. 눈에 티끌이 덜 덮인 중생들 중 진리를 듣지 못해 떨어져 나갈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M.26)라고 하며 세 번씩이나 간원한다. 불교에서 ‘깨친 이’는 천상의 신도 경배할 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종교’라는 뜻임을 감안할 때 이런 일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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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절: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손을 가지고, 새로운 발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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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제4절에서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공관복음서에 보면,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꾸짖자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마19:14, 눅18:16)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복음』과 다른 점은, 여기 공관복음서에는 어린아이들이 갓난아기라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그림으로나 혹은 듣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무릎에 앉은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정도의 어린이들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그것이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가는 이유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18:4)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그와는 달리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제4, 22절에 나왔고, 23, 48,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대부분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를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즉,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색(양)과 파란색(음)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이나 이항대립二項對立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고, 좀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도덕경』 28장을 보면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협곡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협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갓난아기’ 됨의 중요성을 알기에 노자는 『도덕경』 20장에서 “나 홀로 어머니의 젖 먹음을 귀히 여긴다.”라고도 했다. 또 2장에는 선악, 미추, 고저, 장단이 모두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절대시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 )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ΙΧΘΥΣ) 상징( ),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도 ‘양극의 조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심리적 성숙성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도 세계 모든 영웅 신화에 나오는 정신적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이 영웅들이 도달하는 최종의 경지는 ‘반대의 일치’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핵심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되찾아 양극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중세 기사騎士들이 찾아다니던 성배聖杯나, 다빈치가 그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중앙에 앉은 예수와 그 옆 사람(댄 브라운은 그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본다.) 사이에 만들어놓은 공간이나 모두가 V형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사들이나 다빈치는 다 같이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초인격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24)의 선두주자 켄 윌버Ken Wilber는 인간 의식의 발달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주객미분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주객이분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그리고 주객초월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가 있다고 했다. 아담 하와가 선악의 이분법적 의식을 갖기 이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던’ 의식은 주객미분의 단계로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그 단계로 가려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다. 주객이분의 의식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에게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객‘이분’ 의식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상적 의식에서 해방되기 위해 술이나 약물 등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미분’의 단계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종교에서 가르치고 목표로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미분과 주객이분의 단계를 모두 넘어서는 주객‘초월’의 단계라는 것이다. 미분과 초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윌버는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 했다. 갓난아기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적인 갓난아기가 됨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라고 했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예수님이 우리가 주객이분의 단계를 ‘초월’해야 함을 말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주객미분의 단계로 ‘퇴행’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니고데모는 ‘미분과 초월’을 혼동하는 ‘전초오류’를 범한 셈이다.

이 절에서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벌써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제106절을 보면 둘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 되고, 산을 보고 “움직이라고 하면 산이 움직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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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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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식의 예정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 눅13:24)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과 같다.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즉, 깨달음의 길jňāna marga, 신애信愛의 길bhakti marga,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신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구원의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성불하겠다는 선禪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 하며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淨土宗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교의 경우 믿음을 강조하는 불자들이 비록 자기들은 깨침에 이를 수 없지만, 깨침을 강조하는 불자들을 우러러보거나 존경할망정 결코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깨침을 얻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이라 여길 뿐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하거나 박멸하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도마복음』 같은 복음들이 사라진 배경에는 물론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같은 문자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도마복음』 유의 복음서들을 모두 배격하고 4복음서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큰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도마복음』 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반면 『도마복음』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깊은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기 품목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옛날에는 비록 상근기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이런 ‘난행도’ 같은 것을 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에서 누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도마복음』의 기별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인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선사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밑에서 선 수행을 하고 선사禪師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선원禪院의 주지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마복음』을 전문으로 하는 프린스턴 대학교 일레인 페이젤스 교수와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던 그는 어느 순간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이 선불교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한두 세대 전에만 해도 알 길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욜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듯’이 등장하리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근래에 펴낸 그의 책 『The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오늘처럼 정보화된 시대에 교육의 기회도 많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박해받는 일도 사라진 21세기에는 종교가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성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리스도교도 믿음뿐 아니라 깨침도 함께 강조하는 폭넓은 종교로 변해야 하고, 그리하여 “무조건 믿어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하!”를 연발하며 갈 수 있는 깨침의 길도 열려 있음을 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천 명에 한 명이든 천 명에 백 명이든, 깨침을 얻은 사람들은 제16절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 서게 된다. 임금에 대한 충절이나 의로움을 위해 죽은 사육신 성삼문마저 ‘독야청청’할 수밖에 없었거늘, 영적 눈뜸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21세기를 ‘개인적 영성’의 시대가 되리라 예견한 신학자나 미래학자의 말처럼, 이런 ‘홀로’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이 최근에 와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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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을 여러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여러분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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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야말로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하는 식의 율법주의적 윤리에 바탕을 둔 의식적인 사랑은 사실 진정한 사랑이 못 된다. 참된 사랑은 저절로, 자발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내 눈동자처럼 지키는 자발적·무의식적·무조건적 사랑, 남의 아픔이나 슬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진정한 사랑은 사실 영적으로 깨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무엇을 깨쳐야 하는가?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 나와 하느님, 나와 내 이웃, 그리고 나와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쳐야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일상적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모두 한 분 하느님의 같은 태에서 태어났다는 것, 혹은 모두 ‘하느님의 형상imago Dei’, 특히 『도마복음』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화엄불교의 용어로 이 세상 일체의 사물이 이사무애理事無헆·사사무애事事無헆, 상즉相卽·상입相入의 관계로 서로 막힘이 없이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신유학에서 말하듯 우리가 만물과 ‘혼연동체渾然同體’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런 일체성一體性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이 있어야 모두와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지고 남을 내 몸처럼, 내 눈동자처럼 여기는 사랑이 솟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내어줌을 강조하는 성경의 ‘아가페agape’ 사랑이나, 남이 아파하면 나도 ‘함께 아파함com-passion’을 말하는 불보살의 자비심이나, 남의 아픔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불인不忍’이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모두 이렇게 ‘더불어 있음interbeing’에 대한 존재론적 눈뜸에 근거한 사랑이다. 사랑은 물론 나의 이기심이나 나의 옛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이런 영적 깨침을 이룬 사람들이 보여주는 최종의 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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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절: 내 영혼이 세상의 아픔으로 아파하고 - 메타노이아 체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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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그저 우리 눈에 그런 모양으로만 나타나 보이기만 했다고 주장하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배격하고 직접 몸을 입고 오셨다는 수육受肉, incarnation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목적을 천명한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실재인 줄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眞如, 여실如實,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깨우쳐주기 위한 지혜의 화신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태는 어떠한가? 취해 있음에도 취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뭔가 해결책을 찾아 ‘목말라할 줄도 모르고’ 어둠에서 헤매며 고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당하는 중생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설 곳을 정하신 것이다. 피를 흘려 그 핏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이른바 ‘대속적 기독론Substitutionary Christology’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도덕경』 53장에 보면, 노자도 대도大道의 길이 평탄하지만 사람들이 곁길만 좋아하고, ‘비단옷, 맛있는 음식, 넘치는 재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현실을 향해 “이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외친다. 눈앞에 있는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참된 실재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이런 비극적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앞의 제16절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노자를 비롯하여 종교적 선각자들은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일깨우려 노력하는 이들이다.

부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가 깨친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이른바 ‘네 가지 거룩한 진리’ 혹은 ‘사성제四聖諦’를 설파했는데, 그중 첫째가 모든 것이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아픔[苦]’에 관한 ‘진리[諦]’였다. 일단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병의 원인[集]도 알고, 그것을 없애겠다는[滅]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일정한 방법[道]에 따라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아픔 자체보다 아픔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마음의 눈이 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데, 그것을 잡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취해 있지만 우리의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면, 그리하여 심안心眼의 개안開眼이 있기만 하면,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이다’라고 번역한 이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 해설자가 그동안 여기저기 책이나 논문에서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그 이상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관복음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주권이 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던 최대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있는 불교나 유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붓다’, ‘부처’, ‘불佛’이란 ‘깨침을 얻은 이the Awakened, the Enlightened’라는 뜻이고,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불하라.”는 말은 “깨침을 얻어라.”는 뜻이다. 유교에서도 신유학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학聖學’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뜻보다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Learning for Sagehood’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성인이란 한문의 ‘성聖’이라는 글자에 나타나듯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를 이룬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의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라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메타노이아다. 여기 이 절은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기가 막힌 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 나오는 “사람의 아들” 혹은 “인자人子”라는 말은 히브리어 표현으로 그냥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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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절: 지붕 위에서 외치라`_깨친 이의 사명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귀로, 또한 다른 귀로 듣게 될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십시오.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나 숨겨진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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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귀로, 또한 다른 귀로” 하는 말은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일 수도 있고, “다른 귀”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귀’, 보통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한문에 ‘성인聖人’이라고 할 때 쓰는 ‘거룩할 성聖’이라는 글자에 ‘귀 이耳’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귀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했다. 그것은 복음, 곧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 얽매여 고통을 당하던 내가 깨침을 통해 나의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됨으로써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는 소식처럼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소식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길에서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하는데, 맨 처음 실천 사항이 바로 사람들과의 ‘나눔’이다.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 ‘보시布施’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재시財施로 물질을 나누는 것, 둘째, 무외시無畏施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셋째, 법시法施로 진리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 진리를 나누는 것을 가장 훌륭한 나눔이라 본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과, 내 교회나 내 교파의 교인 수를 늘리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독일 출신 종교학의 대가로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친 요아힘 바흐Joachim Wach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갖는 네 가지 특성 중 한 가지가 그 체험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주: 네 가지 특성이 1. ‘궁극실재’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반응, 2. 인간의 전 존재로 반응하는 전폭적 반응, 3. 강도에 있어서 가장 강한 체험, 4. 행동을 수반.) 기막힌 종교적 체험을 했으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한 이사야와 같은 심정으로 그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리를 나누거나 전한다고 하여, 스스로 완전히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부산하게 쏘다니며 요란을 떠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등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기만 하면 된다. 변화된 나의 영적 상태를 구태여 숨기려고 애쓸 필요 없이, 내 속에 밝혀진 내적 빛을 가지고 가만히 그 모습 그대로만 유지하면 된다. 제20절 풀이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뭔가 한다고 요란스럽게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이 생각난다.

무엇을 해야 할까보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성결의 기초를 행위에다 두지 말고 됨됨이에다 두도록 하라. 행위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본질적 됨됨이에 있어서 위대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진정한 전도란 변화된 사람의 ‘무위의 위無爲之爲’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명심할 일이 있다. 외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의 제8절 풀이에서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심오한 진리, 진주같이 귀중한 진리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는 그것을 짓밟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주는 사람을 물어뜯어 해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남을 물어뜯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있는 작은 빛이라도 함부로 남에게 던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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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절: 먼저 힘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고`_축귀逐鬼의 깊은 뜻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털어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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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속담일 수 있다. 공관복음에도 인용되어 있는데(마12:29, 막3:27, 눅11:21-22), 모두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연결시켜놓았다. 『마태복음』에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이 어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랐지만, 바리새파 사람들만은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부하임에 틀림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어느 도시나 가정도 서로 갈라지면 버티지 못한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라고 대답한 뒤 여기 이 절에 나온 말을 했다.

전후 문맥으로 보면 결국 예수님이 ‘내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힘센 귀신의 손을 결박하고서만 할 수 있는 일일 터. 내가 만약 바알세불 같은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귀신이 귀신을 결박하여 내분을 일으키는 셈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내가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힘입어 바알세불의 손을 결박하고 이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하는 식의 논증의 일부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아무런 전후 맥락이 없이 달랑 이 말만 나와 있다. 내면적인 것을 강조하는 『도마복음』 전체의 기본 정신에 따라 내면적인 변화와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값진 것을 되찾아올 수 있으려면 지금 우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힘센 자를 결박해야 한다.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 힘센 자란 결국 우리를 손아귀에 넣고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이기적인 우리의 자아와 거기에 따르는 욕심, 정욕, 무지, 자기중심주의, 충동, 악한 성향, 악습 등등이 아닌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제어하지 않고서는 우리 속에 잠재된 값진 삶을 되찾아올 수가 없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우리의 이런 ‘이기적 자아ego’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나 유교에서 말하는 무사無私라는 것도 이런 이기적 자아를 없애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16:25)라고 했다. 작은 목숨―‘소문자 life’, ‘소문자 self’를 구하겠다고 안간힘을 하고 있는 이상 큰 목숨―‘대문자 Life’, ‘대문자 Self’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작은 목숨, 작은 자아를 내어놓을 때 비로소 큰 목숨, 큰 자아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찾게 된다. 작은 자아,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 진아眞我로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체득하라는 것이다. 내 안의 의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쫓아냄, 『장자』에서 말하는 ‘오상아吾喪我(내가 나를 여읨)’하는 체험, 이것이 전통적으로 말하는 ‘귀신 쫓아냄exorcism, 逐鬼’의 깊은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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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과객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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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에만 있고, 또 콥트어로 세 단어밖에 되지 않아 『도마복음』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나그네’의 의미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중의 하나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하는 최희준의 노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한국에서 독일어 선생을 한 적이 있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나그네 이야기도 인상 깊어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성을 찾아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자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주인은 나그네를 보고 여기는 나그네를 위한 여관Gasthaus, 客舍이 아니니 저 아래 여관으로 가보라고 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나그네는 잠깐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이 성에 지금 주인 되시는 분 이전에는 누가 살았습니까?”, “그야 물론 우리 아버지시지요.”, “그 아버지 전에는 누가 사셨나요?”, “우리 할아버지시지요.”, “그 할아버지 전에는?”, “물론 우리 증조할아버지…….”, “아, 그러고 보니 이 성에도 이처럼 여러 윗분들이 나그네처럼 잠깐씩 머물다가 가신 집이네요. 그러니 이 성도 결국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나 객사가 아니겠습니까?”

‘하숙생’ 노래나 ‘여관’ 스토리나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 따라서 삶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라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제21, 27, 56, 80, 110, 111절 등에도 비슷한 생각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염세적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모조리 거부하고 오로지 세상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고맙게 여기고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이 삶이 우리의 궁극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길을 가느냐, 아니면 갈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 삶에 달라붙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길을 떠난다’, 혹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중 기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가장 중요한 의무를 ‘다섯 가지 기둥’이라고 하는데, 신자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메카를 다녀오는 ‘순례hajj’를 그중 하나로 지정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이나 선불교에서 유명한 「십우도十牛圖」도 모두 종교적 수행의 시작이 집을 떠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에 나오는 실낙원, 출애굽, 바벨론 포로 등 성경의 큰 이야기들도 모두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정신적 순례를 예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구속의 전 과정 자체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22:21)라는 말에 귀가 기울여진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하는 노랫가락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물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물리적·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 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외적 공간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내적 공간inner space에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북쪽 깊은 바다北溟’에서 남쪽 ‘하늘 못天池’으로 나는 붕새의 ‘붕정鵬程’이요 ‘소요유逍遙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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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절: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_새로운 정체성의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빛에서, 빛이 스스로 생겨나, 확고히 되고,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 그곳에서 왔다.’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것이 너희냐?’ 하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그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아버지를 입증할 증거가 무엇이냐?’ 하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그것은 움직임과 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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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도마복음』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도록 하기 위한 간단한 교리문답 형식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도마복음』 식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심지어 그런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그런 사람들이 힐난조로 물어올 때 자기들은 ‘빛에서 온 사람들, 빛의 근원에서 나온 사람들, 빛의 자녀요, 아버지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임을 분명하고 당당하게 밝히라는 이야기다. 빛이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때 ‘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문법적으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절을 역사적 맥락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단순히 믿는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물’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마3:11, 눅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이며 “상속자”(갈4:7)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는데, 이는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제2의 세례를 받는 방법은 일률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세례를 주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을 취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세례 받기 전 일종의 세례문답 같은 것이 선행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마복음』 제50절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디서 왔는가 묻거든 “빛에서 왔다.”라고 하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연상되는 것이 있다. 선불교 전통에서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638~731)이 오조 홍인弘忍을 찾아갔을 때 홍인은 그에게 “어디서 왔고 무엇을 구하는고?” 하고 물었다. 혜능이 자기는 영남 신주에서 깨침을 구하고자 왔다고 했다. 홍인은, 영남 사람이라면 오랑캐들인데 어찌 깨침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이에 혜능이 한 대답이 유명하다.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따로 있겠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제가 오랑캐의 몸으로는 스님과 같지 않지만 불성으로는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절에서도 우리 속에 있는 빛, 혹은 우리의 근원인 빛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마복음』의 여러 곳(제11, 24, 33, 61, 77, 8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빛’, ‘모든 것 위에 있는 빛’, ‘빛을 비추라’는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데 비해 여기서는 “우리가 빛에서 왔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하는 등, 우리의 ‘근원’이요 ‘바탕’으로서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빛에 대해서는 제77절 풀이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증거가 “움직임과 쉼”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성경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1:2), 엿새 동안 창조 사업을 다 마치신 다음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2:2)라고 했는데, 이런 원초적 ‘움직임과 쉼’이 바로 하느님의 내재하심의 증거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둘째, 더욱 근본적인 것은 본래 움직임이 없던 근원으로서의 궁극 존재가 움직여 만물이 생기게 되고, 이 만물이 다시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 움직임이 없는 쉼의 상태에 이른다고 하는 이 엄청난 우주의 순환 원칙이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말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면, 내 속에 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깊은 평강과 쉼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움직임과 쉼’을 각각 우주창생론적cosmogonical·존재론적ontological·개인 심리적psychological 측면으로 본 셈이다.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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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절: 자기를 모르면_나를 아는 앎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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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공관복음에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마16:26, 막8:36, 눅9:25).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2)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 목숨이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앎’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를 통해 많이 알려진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앎과 자기 스스로를 아는 앎이 그것이다. 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바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일반적 앎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이나 직관 같은 앎이 있다. 초월적인 혜안慧眼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둘째 종류의 특수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 종류의 일반적 앎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반적 앎을 기초로 하여 굳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인습적 지식을 ‘알음알이’ 혹은 ‘분별지分別智’라고 하여 위험시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도덕경』 47장에도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심지어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앎을 추구하라고 하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덜 알게” 되니 조심하라고 했다. 곧이어 48장에서도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일상적 지식을 쌓느라 부산하게 쏘다닐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깊은 내면적 성찰을 통해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본래의 나를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가 금방 ‘한물간obsolete’ ‘지식knowledge’, 이른바 ‘obsoledge’가 되어 폐기처분해야 할 것으로 변하는 마당에 그런 것에 연연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앎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앎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잘못 아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잘 아는 앎’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앎을 두고 중세 신비주의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도 무지하고 아테네 사람들도 무지하지만 자기와 아테네 사람들과의 차이는,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반해, 자기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무지가 바로 ‘박학한 무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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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절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_우주적 자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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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진정 종교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라고 한 몇 절의 결론인 셈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는 빛이고, 또 그 ‘나’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나’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절에서 세 가지 정도를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해볼 것은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기 전부터”(요8:58) 있었던 그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앞의 제4절에서 본 것처럼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어머니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의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초개인적 자아transpersonal self’,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신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이것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예수님을 빛이라 선언한다. 여기서는 예수님만 빛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버리고 『요한복음』 전체를 차근히 읽어보면 그것이 반드시 예수님만 빛이라 단언한 것으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좀 모호할 수 있는 『요한복음』과는 달리, 『도마복음』은 우리 모두가 빛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빛임을 분명히 밝힌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빛’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종교 전통들은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나, 참생명은 바로 ‘빛’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고양된 순수 의식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빛’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우리 속에 있는 브라만[梵] 혹은 참나[我]를 두고, “그대 홀로―그대만이 영원하고 찬연한 빛이시나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인들이 염불을 통해 체현하려고 염원하는 ‘아미타’불도 ‘무한한 빛’,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3세기 문헌 『조하르Zohar』도 문자적으로 빛을 의미하고, 그 문헌에서 언급되는 절대자 아인소프En-Sof도 분화 이전의 무극無極 상태이면서 동에 ‘무한한 빛’으로, 그 빛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열 가지 빛이 흘러나온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 동방정교 전통에서도 ‘신의 영광’이란 빛이신 신의 특성을 이야기한다고 보고, 이런 빛을 보는 사람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퀘이커 교도들도 침묵의 예배를 통해 ‘내적 빛’을 체험하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빛’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의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의 찬연함을 말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이 절이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 신관’이다. 본문에 ‘나’ 혹은 ‘신성神性’이 ‘통나무’에서도, ‘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도가 문헌 『장자』에 보면 누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자가 “없는 데가 없다.”라고 하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한다. 결국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기장이나 피에도, 기와나 벽돌에도, 심지어 대변이나 소변에도 있다고 하며 이른바 도의 ‘주편함周遍咸’적 특성, 도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은 도가 만물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만물이 도 안에 있다는 변증법적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나 신의 내재와 초월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도의 내재만을 강조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구별한다. 많은 세계 신비주의 전통은 만물이 그대로 신이라는 범신론적 주장보다는 만물과 신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역설의 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 이 절도 “내가 모든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나와 만물을 하나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만물이 “나로부터 나왔고 또 나에게로 돌아온다.”고 할 때 이것은 동시에 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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