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4회 - 2009년 4월 10일

하나.

우리는 때로 그다지 쓸모없는 주제를 가지고 말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유희의 차원에서 말장난을 하기도 한다. 후자는 우리 문화 속에서 개그라는 말로 정착해서 몸짓을 섞은 말장난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상당 부분 지배하면서 그 일에 종사하는 이 시대의 광대들을 최고의 연봉을 받는 인기인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들은 때로 터무니없는 말로 우리를 웃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른 담론을 통해서는 쉽게 접어들기 어려운 삶의 핵심 문제를 한 두 마디의 진솔한 언어로 파고들며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철학(哲學, philosophy)은 개그에 비해 인기가 없는 편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동양철학관’들이 있고, 그들 중의 일부는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넘나들면서 개그맨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상당한 정도의 부(富)를 축적하고 있지만 우리 철학계가 ‘그런 철학’을 철학의 외연(外延)으로 쉽게 포함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철학 전반의 인기를 평균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 그나마 일반인들의 철학에 대한 요구가 강단 철학계가 지배하는 대학의 철학에 대한 수요보다는 나은 편이라는 점이 철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철학이 인기가 없는 것일까? 이 질문 자체가 포괄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답변도 포괄적인 것이거나 초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것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겠지만, 대체로 두 가지 정도의 답변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철학이 이 시대 사람들의 철학적인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철학 자체의 한계를 이유로 제시하는 방식의 답변이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이 시대 사람들이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시대의 한계 또는 특징을 이유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답변 모두가 일정한 적절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닌다. 첫 번째 방식의 답변은 우리의 철학자들이 우리 자신의 생활세계와는 동떨어진 철학적 담론 안에 매몰되어 있거나 자신들의 철학을 우리의 삶과 연계시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일정 부분 적시해 주는 데는 유효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런 노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 한계를 지닌다. 두 번째 방식의 답변은 거꾸로 시대의 흐름을 관조하여 반영하는 장점과 함께 철학을 이끌고 있는 주체들의 책임에 눈감는 한계를 지닌다.

이런 한계들에 유의하면서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는 다소 광범위하고 모호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초점을 점진적으로 분명히 해가거나 미리 논의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규정해 두는 일이 필수적이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도 몇 가지 한계와 함께 제한된 초점을 전제로 해서 전개된다. 한계의 첫 번째는 물론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의 학문적․ 인간적 한계이다. 철학과를 나와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야만 통하는 이른바 우리 철학계의 ‘정통’에 속하지도 않고, 윤리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서양철학의 대부분의 영역에 관한 논문도 없으며 동양철학도 도덕교육적 관점에서 선비[士]와 보살(菩薩)을 이 시대의 시민 개념과 비교하는 정도의 공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한계는 과연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하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적 한계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한계는 초점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화자(話者)의 초점이자 오늘의 주제이기도 한 불교(佛敎, buddhism)의 관점에서 철학을 바라보고자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교는 기독교와 함께 대표적인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런 전제에서 본다면 기껏해야 불교라는 종교를 철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철학 이상의 논의를 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종교철학의 범위 안에 머물거나 불교철학(佛敎哲學)에 관한 논의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이 또한 한계로 비판받을 수 있다.

‘불교는 철학인가?’라는 제목은 사실 식상한 느낌을 주는 주제이다. 서양 철학이 세계 철학계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래로 오랜 시간동안 ‘불교는 철학인가, 아니면 종교인가’ 라는 주제가 계속적으로 다루어져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철학 또는 종교 한 분야로 기울거나 ‘철학이기도 하고 종교이기도 하다.’는 두루뭉실한 답변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화두(話頭)로 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당연히 그런 답변에 쉽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이 시대 화두로서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질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질문은 최소한 두 가지 개념에 관한 논의를 요청한다. 불교와 철학이 그것인데,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두 개념 모두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비교적 명쾌한 정의가 가능하지만, 이 붓다가 고대 인도 사회에 존재했던 역사적 존재자인 고타마 붓다에 한정되는지, 아니면 대승 불교권에서 일정한 신격화의 과정을 거친 상징적 존재자로서의 붓다를 가리키는지에 따라 각각 다른 외연(外延)뿐만 아니라 내포(內包)를 달리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그 가르침의 성격이 이른바 철학적인 것인지 아니면 한 종교 지도자의 종교적인 것인지 하는 초점에 따라 각각 다른 답변 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의가 가능해진다.

철학이라는 개념은 더 혼란스럽다.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철학자는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미 학문편제 속에서 하나의 학문 분과로 정착해서 더 이상 묻지 않거나 철학 개론 정도의 수준에서 논의되는 정도의 질문에 불과하다.’(홍윤기, 2007, 158)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여전히 이 질문이 자신의 실존적 삶의 영역 속에 살아있다고 고백한다. 예를 들어 박이문은 “40년 가까이 철학을 공부했고 적지 않은 수의 논문과 저서를 낸 논자 자신도 아직까지 철학의 의미에 대한 위와 같은 의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철학의 정체성과 그 가치가 적어도 내 자신에게도 아직까지 확실치 않다.”라고 고백하기도 한다.(박이문, 2002, 13-14)

물론 철학 자체가 끝없이 물음을 던지는 학문이고 그 물음의 대상으로 자신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이문의 철학의 정체성과 의미에 관한 실존적 물음 자체가 철학의 핵심 내용과 철학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화두로서의 성격을 갖는 철학적 질문들은 그 자체로 철학의 정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지점이지만, 바로 이러한 철학의 성격 때문에 우리의 질문, 즉 ‘불교는 철학인가?’라는 질문도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화두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주어지는 일상을 연속적으로 또는 불연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제의 삶이 기억의 형태로 오늘에 이어지기도 하지만, 온전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만 이어진다는 점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한편 오늘의 삶은 이 순간의 느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고, 이 느낌은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일로 단절적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 삶의 구성 요소로서의 시간이 지니는 이러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고타마 붓다의 핵심적인 고민거리이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거리이기도 했고 하이데거(M. Heidegger)의 핵심적인 관심사이기도 했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양적인 확장이라는 의미에서의 길이가 아니라 일종의 지속(Dauer)로 이해되고 있다(마르틴 하이데거, 2001, 149).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 지속이 지니는 의미는 다층적이겠지만, 그 핵심적인 지향은 공간과의 연계성 속에서의 점유의 지속성일 수밖에 없다.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점유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그 조건으로 지속을 담보하고 있어야만 하고, 그것은 곧 점유의 지속성이다. 그러나 그 점유의 지속성은 그 자체로 온전한 지속성이 아니라 지속과 변화의 공유과정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일정한 지속과 변화의 공존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삶을 설명하는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지닌다.

인간의 삶은 특별한가? 시간과 공간을 그 구성 요소로 삼는 삶을 전제로 해서 지속과 변화의 요건을 문제 삼을 경우에 그 특별함은 부각되지 않는다. 인간이나 동물, 식물, 광물 모두에게 존재함으로서의 삶은 지속과 변화라는 동일한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산에 있는 바위도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지속과 변화를 내적 속성으로 삼아 역시 동일한 차원의 공간적 의미를 지니면서 그 자리에 머물며 다른 한편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을 발견한 붓다는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틀로 연기성(緣起性)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였다.

고타마 붓다가 발견했다는 진리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한 마디로 무엇인지를 늘 알고 싶어 했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어쩌면 그런 궁금증을 남들에 비해 더 갖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고타마는 그 궁금증을 한편으로 귀찮아하기도 했고 말로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자비심을 발휘해서 우리들에게 반복해서 말로 설명해 주었다.

“내가 깨달은 이 가르침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온하고 숭고하고 생각의 범위를 초월하며 미묘하여 지혜로운 사람이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보기 어렵다. 또한 모든 형성을 고요히 함, 모든 집착을 버림, 갈애의 부숨, 욕망의 버림, 번뇌의 소멸, 열반의 진리를 알기 어렵다. 만일 내가 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 몸만 피로하고 괴로운 일이다.”(쌍윳다 니까야: 6)

“비구들이여, 나의 통찰력으로 깨달은 진리를 그대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왔다. 그대들은 청정한 삶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고 머물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철저하게 배우고 닦고 연마하고 수행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며,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간곡히 이르나니,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여래의 마지막 열반할 날도 멀지 않았다.”(디가 니까야: 16)

“아난다,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없구나. 우리의 스승은 이제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 내가 지금까지 가르치고 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내가 열반한 후에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 내가 열반한 후에 승가는 원한다면 사소하고 덜 중요한 계율들을 폐지해도 좋다.”

그런 후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에게 간곡히 이르나니,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리고 여래는 선정에 드셨다. 그리고 열반에 드셨다.(디가 니까야: 16)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이 명제를 붓다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라는 말로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어찌 보면 상식적인 명제이다. 우리 눈과 같은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진리이기도 하고, 분석적인 측면에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안’이라는 개념적 설명틀을 확인하여 검증할 수도 있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타마의 발견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다만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를 탐구해서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제시해 놓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자성(自性)을 독자적으로는 가질 수 없고 반드시 다른 것들에 의존해서만 가질 수 있다는 또 다른 과학적 통찰의 결과물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연기성과 공(空)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편 마음[心]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활용하여 정착시켜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청정하고 비고 고요한 마음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의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며 중생들의 근원인 깨닫는 본성이니, 이것을 깨쳐 지키는 자는 진여에 앉아 움직임 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는 자는 육취에 거주하면서 오랜 시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한 마음이 미혹해서 육취에 머무는 사람은 오락가락하며 흔들리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온 사람은 본원으로 돌아와 고요함을 얻는다고 말하니, 비록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 즉 중생심이라고 한다.(而此淸淨空寂之心 是三世諸覺 勝淨明心 亦是衆生 本源覺性 悟此而修之者 坐一如 而不動解脫 迷此而背之自 往六趣 而長劫輪廻 故云迷惑一心而往六趣者 去也動也 悟法界而復一心者 來也靜也 雖迷悟之有殊 乃本源卽一也 所以云言法者 衆生心, 「牧牛者修心訣」,『한국불교전서』권4, 710하-711상)

어떤 사람이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인과가 없는데 어찌 부처는 인과와 선악의 응보를 말씀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허망한 마음이 갖가지 경계를 좇으면서 그 경계를 알지 못하고 온갖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는 인과법을 가지고 그 허망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과를 말씀하셨을 뿐이다. 진심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은 온갖 경계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런 이유로 부처께서 인과법을 특별히 말씀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或曰 眞心平常 無諸異因 奈何 佛說因果善惡報應乎 曰 妄心遂種種境 不了種種境 遂起種種心 佛說種種因果法 遂伏種種妄心 須立因果也 若此眞心 不遂種種境 由是不起種種心 佛卽不說種種法 何有因果也, 「眞心直說」,『한국불교전서』권4, 722중)

자기 불성을 보고자 하면 마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라. 오직 안으로 비춰보라. 범부는 경계에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하나니, 그 이치는 공산명월(空山明月)과 같으니라. 깨치고 깨치지 못함은 그대들 자신의 문제일 뿐, 낸들 도리가 있겠는가? (청담, 2002, 71)

셋.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을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연기(緣起)와 공(空)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마음[心]의 개념으로 전환시켜 정착한 동아시아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 ‘그것이 과연 철학인가 또는 철학일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한편으로 우리 삶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떳떳하지 못함’의 대상이기도 한 불교는 바로 그런 이유들로 인해 그 정체성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 특히 불교를 지탱해온 중심축의 하나인 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석가모니 붓다와 산신(山神)이 함께 모셔져 있기도 하고 곳곳에 산재한 점집들도 절집과 같은 상징물을 사용하거나 아예 특정 보살상을 모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우리 불교의 외연(外延)일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일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절집을 중심으로 불교를 평가해 본다면 ‘철학’을 점치는 일 정도로 정의하지 않는 한 그것이 철학이라는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다는 곤혹스러움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함께 살펴본 초기 경전에 나타나 있는 고타마 붓다나 지눌, 청담의 생각에 초점을 맞춰 보면, 과연 이런 생각들이 유일신을 전제로 해서 형성된 종교(宗敎, religion)라는 개념 속에서 완전히 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우선 고타마는 ‘내가 열반하고 나면 나의 가르침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보자.

아난다야,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열반에 든 후 자신을 등불(dīpa)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라.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아라.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수행자는 열심히 정진하는 최상의 수행자가 될 것이다.(쌍윳따 니까야: 47)

‘자신과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수행하면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불교적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서구적 종교의 개념 속으로 쉽게 포함시킬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종교들은 유일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되는 종교들이다. 불교는 창립자인 고타마 붓다의 신격성(神格性)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한다면 최소한 그러한 종교의 범주에는 쉽게 넣기 어렵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정도의 논의가 추가되어야만 답을 모색해갈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두 번째는 과연 초기불교만을 불교의 외연으로 삼을 수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이미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축이 자력(自力)에서 타력(他力)으로 옮겨왔고, 우리 불교에서도 이미 원효부터 타력적인 신앙의 세계를 열어놓는데 기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런 불교들을 제외한 초기불교만을 온전한 의미의 불교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박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타력신앙을 받아들인 대승불교 이후의 흐름은 종교이고, 그 이전의 초기불교는 철학인가?

이쯤해서 우리는 다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뒷전에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편함을 느낀다. 도대체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철학이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학문적 차원의 논의와 함께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묻는 다층적 성격의 질문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공유한 것처럼 학계의 철학에 관한 인식과 일반인들의 철학에 관한 인식은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외연(外延)의 경우에 일반인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지키고자 하는 어떤 원칙 또는 원리를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점집에서 하는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을 동양철학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계에서는 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에 대해서도 그것이 철학의 범위에 속하는지에 관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철학(哲學)’이라는 개념 자체는 백종현의 지적과 같이 서양 학문의 한 분야로 개화기 이후에 수입된 것이다.(백종현, 1998, 24-25) 그것도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거쳤기 때문에 일정한 왜곡의 과정을 피할 수 없었고, 그것은 다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와 미 군정 통치기를 거치면서 ‘태양의 나라 일본(日本)’과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이라는 환상 속에서 끝없는 열등감을 전제로 하여 받아들여야 했던 수입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철학은 곧 서양철학과 동일시되는 역사를 감내해야 했고, 현재도 서양철학은 그대로 ‘철학’이지만 동양철학 또는 한국철학은 ‘동양’과 ‘한국’을 붙여야만 통용되는 일상적인 어색함이 크게 나아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실을 ‘동양’ 철학자 이강수의 지적과 같이 ‘우리 민족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일제의 식민 통치와 6․ 25전쟁을 겪으면서 온갖 고난 속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쳤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느 겨를에 제대로 철학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진단할 수도 있고, ‘서양’ 철학자 정대현과 같이 ‘20세기 철학이 현상학은 인간 이해를, 비판철학은 역사 변화를, 구조주의와 후속 유파가 문화 담론을 주도하였다면, 분석철학은 프레게의 언어 계산성으로써 정보사회를 산출하여 사람들을 연결했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으로 다원화를 도입하여 사회가 너그러워지도록 도왔다.’고 진단하면서 ‘20세기 한국철학도 그런 세계사적 흐름에 들어있었다.’고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평가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이강수, 2000, 13, 정대현, 2000, 31)

정대현은 더 나아가 20세기 한국철학이 이룩한 성과를 ‘전통 철학 사유와 현대 철학 사유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고, 개과천선(改過遷善)과 실험 논리, 비판 정신, 합리성 등의 개념들이 언어로 이루어지는 토론의 매력과 비판 행위의 불가피성을 보였다는 점’ 등으로 구체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정대현, 2000, 32) 실제로 정대현의 주장은 일정한 전제 안에서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촉발된 미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체성이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주된 화두가 되었고, 그것은 젊은 철학자들을 마르크스주의 중심의 사회철학에 몰두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록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러한 사회철학적 관심은 더 이상의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급속히 몰락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는 했지만, 철학계 전반에 ‘현실’과 ‘우리의 문제’를 철학적 탐구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를 심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이 과정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리 철학자 중의 하나인 소흥렬은 철학의 성격과 철학자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철학자가 보는 현실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일반적이다. 개별 현상들을 보면서도 그런 현상들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의 문제, 체제의 문제, 조직의 문제, 인간적 요인의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현실을 보면서도 현실과의 거리를 두면서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현실을 보고자 한다. 나무 하나하나를 보면서도 전체 숲을 본다는 것과 같은데, 결국은 나무 하나하나를 제대로 보는 것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는 것도 그런 거리감을 두면서 현실을 보기 때문에 철학 특유의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비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은 현실 문제를 근본의 문제나 본질의 문제로 본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비판의 시각으로 볼 때 현실 속에서 종교나 예술이 하고 있는 역할도 철학자에게는 비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잘못된 정치, 잘못된 언론을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체제 또는 지배 집단이 철학자의 발언을 환영하지 않는 이유이다. 소크라테스를 정치적 재판으로 처형하게 되는 이유이다(소흥렬, 2009, 98).

이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소흥렬이 철학을 주로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이라고 하는 나무 하나하나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은 주로 그 현실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철학자의 주된 임무이지 현실을 직접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과제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의 성격 규정에는 소흥렬 이외에도 이 땅의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철학의 본질을 ‘철학함’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김상봉이나 홍윤기 등의 철학자들은 그 철학함의 본질을 ‘반성적 사고에 기반한 성찰(省察)’로 보고자 한다. 이 반성적 성찰은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내향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하여 의미를 묻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비판과 상통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김상봉, 2005, 121, 홍윤기, 2007, 165, 박병기, 2007, 76)

철학이 ‘비판을 지향하는 철학함’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과연 이 정의만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철학함의 과정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끝없는 물음과 비판의 대상으로 내놓은 행위이지만, 그것만으로 철학이 완성된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느껴지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아쉬움을 의미 또는 가치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결국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귀착되고, 니체의 서양 철학사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가치론의 모색으로 끝맺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설명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차원을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의 모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철학이 끝없는 물음과 비판의 과정 자체로서도 일정한 완결성을 지닐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모색하는 하나의 세계관 정립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모색되고 정립된 세계관은 이미 그 정립의 순간부터 다시 비판적 검토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 비로소 철학으로서의 자격을 지닐 수 있다. 완결될 수 없는 잠정적인 세계관을 모색하면서 그 끝없는 아포리아를 포기하지 않는 작업의 과정 자체가 철학이라고 정의할 때, 그 철학은 일정하게 불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넷.

불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가? 철학을 정의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가 도달한 결론을 토대로 하여 던질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 아마도 고타마 붓다와 많은 조사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정의한 불교는 고타마 붓다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시작해서 그것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성적 성찰의 과정이라고 해석하는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는 당연히 철학이다.

불교는 고유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많은 근거를 떠올리게 된다. 연기(緣起)와 공(空), 마음[心]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해서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규명하고 있고, 그것을 깨닫기 위한 내면적 성찰의 과정과 관계 속에서의 자비(慈悲)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허용되는가 하는 점에서 생긴다.

초기 불교적 연기관의 경우에는 그러한 성찰을 허용하는 전제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윤회를 바탕으로 삼아 다음 생에서의 태어남을 믿는 종교적 세계관도 분명히 불교적 세계관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과연 불교가 철학적 성찰의 과정을 온전히 허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 한국 불교의 현실 속에서 신행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복행위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아니면 진정한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불교가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일정한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온전한 철학이라면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고 그것은 곧 고유한 세계관에의 지향과 그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우리의 철학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불교는 철학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철학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상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선불교 전통의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깨침의 과정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라는 강한 외침은 연기와 공, 깨달음이라는 개념들로 이어지는 불교의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역시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마저도 공의 논리의 일관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입장에 설 수 있다. 아법양공(我法兩空)의 중관 논리(김성철, 1993, 499, ‘역자후기’ 참조)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인데, 그렇게 본다면 역시 불교는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을 넓은 범위와 의미에서 포기하지 않는, ‘철학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종교’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불교와 철학의 불연속 지점이 그 자체로 우리 사유의 지평을 온전히 제약하는 것은 아니다. 소흥렬과 같이 철학적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을 자신의 철학적 화두로 삼고 있는 경우에는 결국 인간은 이 궁극적 관심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관심은 인간의 인식 능력과 논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을 그는 ’철학의 논리가 멈추어야 하는 한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지점이 바로 철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불교가 자리하고 있고 또 자리해야 하는 지점이다.(소흥렬, 2009, 83, 86)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생멸적 차원(生滅的 次元)의 문제이다. 비판과 세계관의 차원에서 철학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불교가 과연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러한 특성을 제대로 구현해 내고 있는가? 이 질문 자체의 중층성 때문에 한 마디로 답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긍정적 답변을 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현실 자체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해내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적 일상의 침윤(浸潤)으로부터 더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연기적 세계관을 갖고는 살아내기 어려운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불교의 세계관을 뿌리내리고자 하는 노력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수경스님의 절망적인 선언과 같이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불교에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수경, 2007, 2009) 시민사회의 정착과정에서 불교계도 받아들인 총무원장과 본사 주지 선거의 과정이 금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무소유와 걸림 없음[無碍]을 가치론적 지향으로 삼아야 하는 불교계가 실제로는 끝없는 소유와 걸림의 잣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 불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문제를 회피할 수는 있다. 개신교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의 타락이 불교보다 못하지 않고, 세속과 비교하면 그나마 승가공동체는 깨끗한 편이라고 말하면서 회피와 반격으로 일관할 수 있는 길이 여전히 열려 있고 우리는 이 길을 손쉽게 택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불교를 비롯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생멸(生滅)과 진여(眞如)에 걸쳐 있는 한 일정한 타락과 어긋남은 피할 수 없다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긴장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다.

그런 절망감의 나락에 서서 다시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떠올리게 된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현재 우리 불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처절한 비판에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에 대한 처절한 비판은 당연히 그 중심에 있는 승가(僧伽, saṇgha)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계율의 전승과 수지를 소홀히 하면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승가공동체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모습이자 희망의 씨앗이기도 하다.

그나마 우리의 현실은 두 가지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재가 신도를 비롯한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불교의 마음공부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결제철이 되면 아직도 선원(禪院)에 방부를 납자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두 가능성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간화선(看話禪)은 물론이고 위빠사나 수행법 까지 포함해서 승가공동체가 보여주는 수행의 모범은 재가신도들과 일반인들의 명상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거꾸로 일반인들의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은 승가공동체의 수행문화 재정립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불교는 일차적으로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일상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의 계기와 과정을 제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견지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것이 우리 불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런 후에는 불교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도 그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는 자세를 보여줄 때 우리 불교는 비로소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지향성(指向性)을 제시하는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제대로 정립되어 구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계의 식민성과 무력감을 비판하는 견제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 철학계는 ‘철학함’의 본질인 비판과 세계관 정립의 과제 어느 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불임성과 무력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계와 유사한 한계를 노정시키고 있다. 정대현의 주장과 같이 20세기 한국철학이 우리 사회에 전통적 사유와 서구의 현대철학적 사유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21세기 한국철학은 그 구체적인 만남의 장은 물론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우리 삶의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철학으로서의 우리 불교’와의 진지한 만남의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의 작은 이야기도 그 장을 여는 촉발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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