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세미나중계
     
기자가 본 설악무산의 인간적 면모 / 조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조현 cho@hani.co.kr

설악무산의 불학사상과 그 의미 / 조병활 
설악무산의 문학세계와 그 위상 / 이숭원
기자가 본 설악무산의 인간적 면모 / 조현

2019년 5월 15일(수) 오후 6시 30분 / 동국대 만해마을 문인의 집 강당
주관 / 계간 불교평론 후원 / 설악산 신흥사 · 백담사

 

당주조한(噇酒糟漢): 장형을 맞을 말, 맞을 짓을 골라서 하다

아침 5시에 문자가 딩동 하고 울렸다면 뭔가 급한 일이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고독과 그리움을 천석고황처럼 껴안고 몸부림치던 오현 스님은 자신을 ‘독거노인’이라고 했다. 내 노모도 40여 년 전 홀로 돼 독거노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이 표현은 스님에게서 더욱 적절하다. 5시라지만 실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남의 단잠까지 깨우지 않는 배려심으로 분초를 늦추고 늦춘 시간이니 그로선 가장 늦은 시간이다. 서울 북쪽 끝 수유동에서 남쪽 끝 서초동으로 오려면 먼 거리지만 아직 거리가 한산한 시간이니 ‘택시를 타면 20분이면 올 것’이라고 채근한다. 

하지만 불초는 급한 호출해 호응할 만큼 배려가 없었다. 평소 대중교통만을 이용하는 분수대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가곤 했다.

스님은 서울에 머물 때면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불교평론》이 있는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 주석하다가 10여 년 전 남부터미널역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토굴로 삼았다. 문을 열러 나온 스님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고, 바지춤 밖에 내의가 삐져나와 있기 일쑤였다. 산승이 도심의 오피스텔에 출몰하는 까닭을 알 리 없는 이웃 거주자들이 그 복식과 불콰해진 모습을 보면 아마도 남의 상갓집에서 모처럼 술상을 받아 밤을 새운 조선시대의 광대나 사당패로 볼 만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아무리 취기가 올라도 선수(先手)를 빼앗기는 법이 없었는데, “이것이 납자의 본분상입니까?”란 질문이라도 받은 듯이 낙승을 자처했다. 낙승(落僧)이란 ‘낙방한 중’이란 뜻으로, ‘50년 넘게 절밥만 축냈으니 중이 되려다 못된 중’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절 받고 돈 받는 게 중 아니냐”고 했다. 또한 만해마을을 만들어 만해축전을 열고, 만해상을 유명 인물들에게 주는 것을 놓고는, “이만하면 만해를 팔아 장사를 잘했제”라며 담배 연기를 뿌옇게 내뿜었다. 그야말로 하룻밤 추위를 녹이려 절간의 보물인 부처님을 쪼개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넣고 있는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 선사가 목불을 태우다)의 언행을 하면서도, 천연덕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는 《벽암록》을 쓰면서, 자신에 대해 “이 술지게미나 먹고 취하는 당주조한(噇酒糟漢) 같은 놈! 백주에 장형(杖刑)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는데, 잔나비 상호로 배시시 웃으며 능청스럽게 ‘만해 장사’ 운운하며, 그야말로 장형 당할 소리만 골라서 해대는 것이었다.

하나 그 정도는 권두언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왜 시(詩)를 쓰게 됐느냐면”으로 묻지도 않는 답을 이어갔는데, “국민학교도 안 나왔다고 무시하길래 뽐내려고 시를 썼다”고 했다. 1970년대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할 당시만 해도, 본사 주지는 시청에 학력과 경력까지 들어가는 이력서를 첨부해 등록해야 했는데, 시장과 국회의원이 국민학교도 안 나왔다고 안 알아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인은 알아준다’는 말을 했다. 대학교수들조차도 자신을 소개할 때 시인이라고 할 만큼 시인이라면 알아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시인이 누구냐고 했더니, 젊은 사람들 중엔 이근배 시인이 《한국문학》 잡지도 내고 있어 알아준다고 했다. 그래서 이근배 시인을 불러 시집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에게 “대한민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뭐니 뭐니 해도 ‘미당 서정주’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1년 만에 시집을 만들어 교정지가 왔는데, 이 시인의 평론이 미당과 자신을 비교했는데, 미당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듯 보였단다. 그래서 자신이 이를 뜯어고쳤다고 한다. “서정주의 시는 화려하나 조오현의 시는 오만하다. 서정주는 가꾸고 있으나, 조오현은 버리고 있다.”고 자기가 자신의 시를 ‘남의 이름을 빌려’ 평했다는 것이다.

그가 탔던 수많은 상이 그저 그의 후원의 덕화를 입은 이들이 갚은 은공 정도가 아니었겠느냐고 폄하의 생각을 유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해대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보면 그가 하버드대나 버클리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초청받아 강연했다는 것도 그런 정도로 이해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인도에서 시성 타고르와 조오현의 시를 비교하는 세미나를 여는데, 동행할 테냐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어찌 타고르에 갖다 붙일까’라며 가당찮다는 생각에, 핑계를 대어 거부한 것이었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면서 감히 한산과 습득의 흉내를 내면서, 명예까지 탐하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자신의 ‘탄생 비화’를 들려주었는데, 이는 그야말로 장광설의 화룡정점이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밭일을 하다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중 전라도에서 무슨 일로 도망을 다니던 사람이 어머니를 범해 자기를 낳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형제들과 얼굴이 닮지 않아 처음엔 무당집에 맡겨졌다가 꼴머슴으로 절에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부친을 알 수 없는 선종의 5대 조사 홍인대사는 자기의 성씨를 불성(부처의 성)이라고 했고, 고구려 시조 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자식이라고 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 자신이 이라고 했다. 내세울 수 없는 부친을 이렇게 신화화하는 경우는 숱하지만, 자기의 출생을 ‘사통’으로 인한 것으로 희화화하는 것은 익히 본 바가 없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조오현(曺五鉉)과 조현(曺鉉)은 같은 창녕 조씨에 돌림자 현 자까지 같으니 ‘너는 내 동생 아니냐’고 하는데도, 그가 과연 조(曺)씨인지 아닌지도 더욱 미궁에 빠져들었다. 스님은 마시던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라 홀짝이며, 이렇게 ‘조오현’이란 돌멩이로 공깃돌 놀이도 하고, 제기도 차고, 물수제비도 뜨며 일인극을 하는 것이었다.

 

금선탈각(金禪脫殼):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자유롭게 살다

근세 선의 증흥조인 경허선사가 견성을 한 뒤 처음 가진 법회에서였다. 속가의 어머니도 소문을 듣고 와 법회에 참석했다. 과연 견성 도인의 법은 어떤 것인가 시선을 경허에 집중하고 있던 차 법상에 오른 경허가 갑자기 옷을 벗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너무도 놀란 어머니는 “내 아들이 견성을 했다더니 미쳐버렸구나”라며 법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경허가 혼자 중얼거렸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쓸쓸히 깨어 있구나.”

그 뒤 경허는 장터에 가서 곡차를 동이째 털어놓고 얼굴을 붉게 단청했다. 어느 날 경허는 시자 만공을 데리고 가던 중 곡차를 마시고는 지나가는 아녀자를 껴안고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마을 장정들이 잡아 죽이려고 경허와 만공을 쫓았다. 잡히면 꼼짝없이 맞아 죽을 판이었다. 강을 건너 겨우 도망을 치는 경허를 따라서 구사일생한 만공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길을 가는 경허에게 따지며 물었다. “스님, 어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여인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경허가 말했다. “나는 그 여인을 내려놓은 지 오래인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껴안고 있느냐.”

만공의 의뢰를 받아 만해는 경허의 사후 《경허집》을 썼고, 조오현은 경허를 사숙했다. 광인처럼 나신으로 춤을 주는 듯한 스님에게서 어느 순간 경허를 보았다. 손자병법 21계에 금선탈각(金禪脫殼)의 계가 있다. 매미가 아무도 모르게 허물을 벗어버리고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스님이 역해해 출간한 《벽암록》 제84칙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옳다고 해도 옳다고 할 만한 것이 없고, 그르다고 해도 그르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옳고 그름을 이미 버리고 얻었다거나 잃었다거나를 모두 잊어버리면 깨끗한 벌거숭이가 되어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 말해 보라. 내 앞뒤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이 설두선사의 법문에 대해 해석을 붙인 원오선사의 ‘정라라(淨裸裸 적쇄쇄(赤灑灑)’를 소개했다. 즉 원오는 진리 당체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장자》에 나오는 송나라 ‘원군(元君)의 화가’ 일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 때 많은 화공들은 명령을 받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데 한 화공은 늦게 도착했다가 그림도 그리지 않고 자기 숙소로 가버린다. 그리고 숙소에서 옷을 홀랑 벗고 벌거숭이로 쉬고 있다. 원군은 그야말로 참된 화공이라고 한다.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온갖 아름다운 겉모습보다 아무런 치장이 없는 그 바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정신이 초롱초롱한 아침 시간임에도 낙승을 자처하던 스님의 비화에 현혹돼 그 바탕의 성적(惺寂)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분하기 그지없다. 여우 같은 의심으로 먹고사는 기자의 업습의 한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성스럽게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위선과 거짓이 사무쳐 있는 종교가의 이면과 실상을 숱하게 보아오면서도, 여전히 겉모습의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만 탓이다.

더구나 스님의 무용담은 무협지 같은 것이어서 의심을 늘 부채질해 현혹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198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식당일을 하던 중 가톨릭 신부의 초청으로 성당에 가서 강연하면서 황진이와 백호 임제의 시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 후 인기 강사로 떠서 텍사스주로부터 귀빈 증서를 받고, 휴스턴시 등 18개 시에서 명예시민증을 받고, 미국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로부터도 명예 지휘검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영국에 가서는 우리 한국에선 예의 바른 사람을 ‘영국신사’라고 한다고 서두를 꺼내고, 한국에 와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둘러본 엘리자베스 여왕의 우아한 모습을 찬사하며 비위를 맞춰주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다시 그 영광의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날 좀 보소’란 민요 가사가 사람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아니냐”며 “나도 날 좀 봐달라고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야기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면서는, 바지춤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채 미국 등 서양에서 수백 명의 제자를 둔 국술원 총재 등이 자신을 따르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젊어서는 한 주먹 했다”고 권투 폼을 재기도 했다. 영락없이 무성영화 속의 채플린 같은 모습이었다.

원오는 설두의 법문에 박자를 맞춰 화답한 선서(禪書)인 《격절록(擊節錄)》을 남겼다. 격절(擊節)이란 ‘핵심을 찌른다’는 뜻이다. 원오가 설두의 법문에 ‘무릎을 치며 탄복하고 칭찬한다’는 데서 ‘격절탄상(擊節嘆賞)’이란 말이 나왔다. 그런데 허물을 벗어버리고 훠이훠이 날고 있는 그의 무애자재한 본래면목에 격절탄상은 고사하고, 나 또한 경허 모친의 우를 되풀이하고 만 것이다. 조주처럼 신발을 머리에 이고, 운문의 간시궐(幹屎厥, 똥막대기)을 짚고 허우적거리듯 비틀거리는 그 모습을 그저 광대놀음으로 여겼을 뿐이다. 매미 허물에만 현혹돼, 술에 넘어지고, 담배에 또 한 번 넘어지고, 곡예극에 다시 넘어지며 진흙밭에서 허우적거렸으니, ‘맹인 코끼리 만지기’식 군맹모상(群盲摸象)이었다. 강을 건넌 뒤에도 갈 길을 가지 않고 뗏목을 붙들고 낑낑대는 꼴이었다. 허수아비의 광대놀음에 취해 시퍼런 칼날이 녹스는 줄도 몰랐으니, 번갯불처럼 뗏목줄을 단칼에 베여내 함께 훠이훠이 나르듯 가지 못하고 미망의 밧줄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숨은 보살을 누가 알아보는가

근세 숨은 고승 33인의 삶을 추적하고 그들의 제자들을 만나 《은둔》이란 책을 펴낸 적이 있다. 많은 스님이 그 책에 대해 과분한 평을 해주었다. 스님과 인연이 닿은 것도 《은둔》을 〈한겨레〉에 시리즈로 쓴 것을 본 스님이 만남을 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스님은 “조현은 앞으로도 꼭 붓을 놓지 않고 불법의 당체를 드러낼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책과 격려를 해주었다. 

《은둔》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세상 속에 숨어들어 대승의 길을 연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보살들을 조명했다. 33분의 고승은 모두 열반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화광동진의 살아 있는 보살이 앞에 나타났을 때는 이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스스로 청맹과니였음을 고백지 않을 수 없다.

그랬으니 스님이 펴내 내게 던져준 책도 수년간 제대로 펼쳐본 적조차 없었다. 뭐 볼 게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스님의 《절간 이야기》를 집어 들었는데, 그날 밤은 저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소쩍새 울음 같은 호곡소리를 들었다. 〈절간 이야기 1〉은 새벽 사지가 다 부러지는 뼈마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아궁이의 군불을 때는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 이야기다. 

“양산 통도사 극락교 그 돌다리, 장골 열 사람의 목도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 큰 돌덩어리 누가 들어다 놓았는지 아는 사람 있능교? 울할아버지가 익산 미륵사지에서 혼자 야밤중에 들어다 놓았니더. 밀양 표충사 대웅전 대들보는 또 누가 짊어지고 왔능교? 울아부지가 짊어지고 왔니더. 그 대들보 짊어지고 오시다가 허리뼈가 부러져 아니 지게가지가 부러져 그날로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했니더. 운명하실 때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날 부둥켜안고 ‘시님들 말씀 잘 듣거라이. 배고프면 송기 벗겨먹으면 배부르다이.’ 하고 갔니더.”

다른 이야기에서는 캉캉한 시골 노인과 염장이 등이 등장한다. 고승도 대시주자도 아니다. 절집 주위 가장 소외된 중생들이다.

불가에서 유정설법을 넘어 무정설법까지 알아들은 소동파의 시만큼 널리 회자되는 시도 드물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산빛이 어찌 그대로 청정법신이 아니겠느냐)”이다. 그러나 어찌 시냇물과 솔바람의 소리만 있겠는가. 진정한 무정설법은 중생의 삶이다. 시인묵객들이 노래하는 시냇물과 솔바람에 묻혀버려 들리지 않는, 중생들의 신음 소리 말이다.

그러나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손이 있어도 글을 못 쓰고, 아파도 아프다는 말조차 못 하는 고통 중생의 화농이 스님의 시집에서 터져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 하는 시와 소설을 읽어보면 새로운 기교와 기법을 가미해 달리 현혹할 뿐이라는 감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이날 밤 스님의 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글에서 기교가 아닌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들의 애응지물(礙膺之物)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통한이 서려진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그의 다른 책들까지 찾아내 읽어보니, 하나 같이 가장 연약한 이들의 심중에 가닿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님이 없었다. 더구나 글이 글로 끝나지 않고 보살로 화작(化作)하는 것을 보고 나서, 여우 같은 의심을 끊을 수 있었다.

간혹 서울 정릉 흥천사를 비롯한 절간에서 스님을 뵌 적도 있는데, 그는 절에서 상좌들에겐 호랑이 같으면서도, 부목이나 공양주 보살이나 심부름꾼이나 대중들에겐 자비롭기가 봄바람 같았다. 남이 더 무시하고 하대하는 이들을 더욱 아끼고, 존대하고 공경했다.

이런 태도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대승의 보살도’로 행해졌다는 게 더욱 뜻이 있다. 설악산 신흥사가 있는 속초와 낙산사가 있는 양양에서 신흥사와 낙산사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들이 얼마나 여법하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본 이들은 소아적 불교의 나태함 대한 한심함을 단번에 벗고, 미래 불교의 대안에 환호작약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백담사가 있는 인제에서 백담사가 용대리 주민들과 백담사까지 운행하는 버스 기사들을 얼마나 불보살처럼 공양하고 모시는지를 보면, 그 모방할 수 없는 모습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이 열반 직전까지 주머니를 다 털어서 공양하고 모신 것도 이들이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버려지고 찢긴 상처가 진주가 되기까지

조오현은 1932년 경남 밀양시 상남면 이연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조선 초기 이래 창녕 조(曺)씨의 집성촌이었고, 조선 명종 때는 조말손이 기근으로 굶주리는 고을민들을 구휼했다고 전한다.

스님은 어려서 무당집에서 지내다가 여섯 살 때 경남 밀양 종남산 은선암에 맡겨져 소머슴으로 살았다. 절에서 서당에 보내줘 《천자문》과 《사자소학》과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그는 소금쟁이와 노는 데 한눈이 팔려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꾸중을 듣고 가출을 해 도시로 나가 떡장수, 배달꾼, 막노동 등을 하다가 절로 귀환했다. 그는 한 절에서 노스님을 시봉하는 시자를 했는데 그 절이 너무 가난해 매일 탁발을 해 끼니를 해결했다.

어느 날, 탁발을 나간 그는 한 집 앞에서 《반야심경》을 두 번이나 외며 염불을 했는데도 집주인이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한센인 부부가 구걸하러 왔는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한센인들에게만 쌀을 주었다. 그 주인은 한센인에겐 한 됫박의 쌀을 주면서도 그에겐 방아도 찧지 않은 겉보리 한 줌만을 주었다. 이를 본 그는 ‘부처님보다 한센인이 더 낫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한센인을 따라가 같이 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거절한다. 하지만 조오현은 끈질기게 그 부부들을 설득해서 먹고, 자고, 구걸하면서 그들과 반년 동안 움집에서 함께 산다. 그는 그들 부부의 따뜻함과 배려심으로 전에 느끼지 못한 평화를 누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한센인 남자는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문학도 좋아하고, 시도 썼다. 그는 조오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세계 명작 책을 구해 가져다주며 명작의 줄거리를 들려주며 감상담을 나누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은 것도 그때였다. 그 한센인은 기인 같은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스님에게 자기 아내의 젖을 빨라고 하고는, 그렇게 하면 이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조오현에게 혼자서 읍내로 나가 구걸을 해 오라고 했다. 혼자서는 구걸을 시키지 않았던 분들이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시키는 대로 구걸을 해서 움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보이지 않았고, 잘 지내라는 당부 편지만 있었다. 그는 그 한센인 부부를 잊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가며 전라도 해남까지 갔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다시 출가한다. 이번에야말로 스스로 승려의 길을 택한 발심출가다. 그는 당시 은사였던 밀양 성천사 인월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무문관》에서 언급했다. 스님은 도반인 조계종 전계대화상 성우 스님의 소개로 해인사에 와서 조계종 전 종정인 고암 스님에게 수계를 받아 승려인증을 받는다. 스님이 대처승의 상좌여서 승려로서 제대로 길을 가지 못할 것을 염려한 성우 스님은 수계를 받은 스님을 해인사 강원에 넣으려 했는데, 그때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태연하게 절에서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도반 조오현과 성우 스님 등은 승려시인회를 결성해 시문학 활동을 했고, 스님은 ‘율’이라는 시동인으로도 활동한다. 그러므로 30대 중반부터 이미 시를 써온 셈이다. 그러니 그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시인이 됐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당시 성우 스님은 스님의 열반 뒤 조오현의 단면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한번은 청도 신둔사라는 절의 객실에서 하룻밤 함께 묵은 적이 있는데 그날 밤 신둔사에 강도가 들었다. 한창 자고 있을 때 복면을 쓴 강도가 들어와 턱밑에 칼을 들이밀고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혼비백산한 성우 스님은 벌벌 떨며 걸망 속까지 열어 보이며 가져갈 것 있으면 다 가져가라 했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고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강도는 어이가 없었는지 눈만 한 번 부라리다가 나갔다. 성우 스님은 이때 오현 스님에 대해 ‘이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갈 사람’임을 간파했다고 한다. 아마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담대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다져진 것이기도 할 것이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쫓겨난 뒤 삼랑진 금무사 약수암에서 6년간 정진하며 상당한 체험을 했지만, 그는 어떤 불교적 체험을 통해서보다는, 간난신고의 고해를 건너며, 삶의 이치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게 “어느 순간 세상 이치가 훤해져버렸다.”고 했다.

 

지독지정(舐犢之情): 새끼를 핥는 어미 소처럼 약자를 껴안다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 빨리지 않은 젖통이 부어 온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 통나무 구유에 담긴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다 알고 있다. ……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 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 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 그러나 그 어미는 그 밤을 혀가 마르도록 온 몸을 핥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팔려갔다.// 보았다. 죽으러 가는 그 어미의 걸음걸이를, 꿈쩍 않고 버티던 그 힘 그 뒷걸음질을, 들입다 사립짝을 향해 내뻗던 뒷발질을, 동구 앞 당산 길에서 기어이 주인을 떠 박고 한달음에 되돌아와 젖을 먹여주던 그 어미의 평생은 입에서 내는 흰 거품이었다.

 

스님의 〈어미〉라는 시를 읽으면, 간뇌도지(肝腦塗地)하는 중생의 애달픈 고통이 3만6천 뼈를 시리게 한다. 어미 소와 송아지의 심중에 어쩌면 이토록 일심과 동체에 이를 수 있을까, 그 경지가 아득해질 뿐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떠나 절집에 맡겨졌던 그에게서 오세암 동자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아무도 없는 깊고 깊은 겨울 설악산 암자에서 불모 관세음보살에 의지해 모진 겨울을 난 어린 동자의 애달픈 그리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어려서 모정이 결핍되면 사람을 믿기 어렵게 되고, 그 분리불안의 공포를 떨치기 어렵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스님도 그 그리움과 짙은 애수가 골수에 맺혀 시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 응어리에 걸려 있지만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보살이 되었다. 칼로 베어내는 듯한 파도가 스쳐간 상처를 진주로 토해낸 조개처럼.

그는 내게 “생모가 90세가 넘어 백담사로 찾아왔는데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고향 읍내 여관을 잡아 묵으며 자기식 이별을 고했고, 끝내 상가엔 가지 않았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인도 다람살라를 찾은 부모를 따라온 한 한국인 소년이 “어떻게 해야 부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소년이 “엄마”라고 답하자, 달라이라마는 엄마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또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넓혀 온 세상 사람, 온 중생을 다 사랑하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답했다.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의 가엾은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하며 그 자비를 확산해갔던 스님의 모습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관대작들과도 가까이 지냈지만, 그가 늘 세심하게 정성을 쏟은 이들은 약자들이었고, 만해상을 준 이들도 대자비를 확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거행된 오현 스님의 다비식의 대미는 한 유랑승의 무애춤이었다. 그 노승은 스님의 법구가 활활 타오르는 다비식장에서 춤을 추며 오현스님을 보냈다. 깊고 깊은 상실의 아픔이 밴 춤사위였다. 

스님이 주석하는 설악산 신흥사나 백담사엔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상좌들이 제지하면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치곤 했다. 그렇게 사찰 내에서도 객비나 동냥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워 어느 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을 스님만큼 승려 대접, 사람대접해주는 이는 요즘 풍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스님은 말년에 유랑승을 모아서 자신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인도 성지순례를 가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불교평론》의 홍사성 주간도 스님은 늘 그런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한번은 《불교평론》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었다.

정념 스님이 서울 성북구 돈암2동 흥천사에 조실채를 멋지게 지었다. 오현 스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결국 스님은 살지 않고 오피스텔 토굴과 무문관을 오가다 입적했지만, 처음엔 서울의 사찰에서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데 기대감이 큰 듯했다. 스님은 조실채의 이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절에서 조실채는 염화실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절집 용어 외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1~2주일을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손잡고 오르는 집’.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격절탄상이 터져나왔다. 그 이름만큼 불교의 이상, 그리고 그가 살아온 동체대비적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저 높은 것을 향한 욕망과 노력하고 정진한다. 그런 발분망식의 정진만으로도 수행가에선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 이를 위한 초발심의 가치는 사라져 거기에 타인이나 대비는 사라지고 개인의 명예욕만이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늘 손잡고 올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들, 무시당하는 자들, 버려진 자들, 아픈 자들, 약한 자들과 함께. 

스님은 2011년엔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갔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돼 대학생들이 1인당 15만~5백만 원의 벌금 고지서를 받고 힘들어한다는 〈한겨레〉 기사를 보고는 한겨레신문사에 벌금 총액인 1억3천만 원을 기부해 벌금을 대납하게 했다. 이 사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해 당시 ‘한 스님의 기부’로만 알려졌다.

혹자는 스님이 가난한 문학인들과 예술인들과 약자들을 지원한 것을 두고 절집 돈으로 인심을 쓴 것 아니냐고 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신흥사보다 절 수입이 몇 배나 되는 사찰들이 우리나라엔 있지만, 그 사찰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공적인 곳, 혹은 이름 없이 보살도를 행한 것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돈이 들어오는 대로 그 돈이 가장 요긴하게 쓰일 곳, 가장 필요로 한곳, 가장 빈한한 곳, 가장 아픈 곳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다. 그래도 돈이 그에게서 머물러 있는 법이 없었다.

 

대지약우(大智若愚): 비루먹은 말이 천 리를 날듯이

스님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게을러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벽암록》과 《무문관》에서 꼬리를 밟혔다. 흥천사 조실채를 작명할 때 이미 번개를 잡아채는 지혜에 혀를 내둘렀지만, 《벽암록》의 서문을 보고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아둔함을 좀체 벗지 못한 이 둔재로서는 그의 활발발한 종횡무진이 부러울 뿐이었다. 스님은 자신을 한없이 비하했지만 그 속에 든 천재성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가끔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 중에 스님은 어려운 문자를 쓰는 걸 거의 피했지만, 어지간한 불교의 한문 경전들을 꾀고 있을 만큼 천재적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스님은 털털했다. 옷매무새도 단정치 않았다. 손도 잘 씻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 자체가 허술하게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에 비해 신흥사 주지직을 물려받은 우송 스님은 티끌 하나 묻지 않게 새하얀 승복을 풀칠해 빳빳하게 다려 입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우송 스님은 처음 조실스님을 가깝게 모실 때는 “스님께서 왜 그렇게 약주와, 담배를 하시느냐는 생각도 했지만, 스님의 진면목을 본 뒤부터 이를 시비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송 스님은 “조실스님은 말씀은 화려하게 꾸며 하지 못하지만 힘이 있었고, 뜻이 좋았다”면서 “아랫사람에게 한번 일을 맡기면, 그다음엔 믿어주었다”고 했다.

사람이란 조그마한 권력이 있어도 이를 좀체 놓지 못하고 이를 두 배 세 배 누리려 하기 일쑤다. 그러나 스님은 그렇지 않았다. 1년 중 6개월을 감옥과 같은 무문관에 들어가면서도, 나와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또 다른 무문관이나 다름없는 오피스텔에서 홀로 지내는 게 안타까워 “스님, 이제 연세도 있으시니, 절에서 시봉을 받으시지, 왜 이렇게 지내시느냐?”고 하면, 그랬다. “노인네라는 게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게 돼 있어.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죽지도 않고 잔소리만 해대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잔소리꾼이 어른이라고 앉아 있으면 절에 손님이 와도 늙은이만 찾고, 주지한테는 들르지도 않으면 주지는 허수아비가 되는 거야. 그러니 나처럼 늙은 노인네는 절에서 피해주는 게 돕는 거라.”

그렇게 상좌들의 고충을 생각해서 절을 나와 홀로 지내며, 곡기도 들지 않고 막걸리로 허기나 채우며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매사 사리가 분명했고, 일신의 편리를 도모하기보다는 사리를 따랐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 주석하던 지관 스님은 말년에 오현 스님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했다. 지관 스님은 동국대 총장을 거친 불교계 최고의 학승이자 현직 총무원장이었다. 지관 스님은 당대의 대율사로, 해인사에서 오현스님이 젊은 날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쫓아낸 자운 스님의 상좌다. 지관 스님은 은사와 달리 오현 스님이 곡차와 담배를 하는 것을 승려들이 시비하면,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살림을 보라”며 오현 스님을 두둔했다. 오현 스님도 지관 스님이 금석문의 꽃인 역대 고승들의 비문을 망라해 정리한 《역대고승비문총서》 7권을 보고는 “원효 이후 지관 스님만 한 학자가 없다”며 칭송했다. 지관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일 당시 조계종 총무원과 조선일보사 간의 갈등이 커졌을 때, 조선일보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지관 스님에게 직접 가서 사과하게 한 것도 오현 스님이었다. 

두 어른은 식사를 함께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이심전심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가 서로의 진면목을 익히 본 지음(知音)인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불교계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가산불교연구원이 현대 대장경 불사 격으로 진행 중인 불교대백과사전 《가산불교대사림》 22권 발간작업이 설립자인 지관 스님의 열반 후 위기에 봉착하자, 아무도 몰래 연구원 이사장을 맡아 수십 명의 연구원들을 지원해온 것도 오현 스님이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상가가 문전성시지만, 정작 정승이 죽고 나면 상가가 텅 빈다는 염량세태는 현대에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도 지기지우의 사후에까지 의리를 베푼 덕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불수불탐(不受不貪): 받기 전에 주고, 섬김을 받기 전에 섬기라

절집안이 어렵다. 갈수록 신심은 약해지고, 보시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신도 대중들의 보시를 유도하기 위한 절집안의 아이디어도 천태만상이다. 그런데 오현 스님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살림보다는 베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계산법은 세간법과 반대였다. 

낙산사가 화재로 인해 전소되다시피 한 뒤에 보인 행보에서도 그랬다. 낙산사는 당시 전각 20채 중 14채가 불타고 경내 80%가 소실되는 중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오현 스님의 상좌인 정념 스님은 낙산사 재건을 위한 구걸에 나서기보다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다. 먼저 경내 10여 개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고, 점심때면 국수도 무료로 대접했다. 가장 궁핍할 때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역발상에 대해 정념 스님은 “조실스님의 가르침대로”라고 했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 복원이 시급해 한 푼이 아쉬운 시점에 오히려 낙산사 입장료를 없애고, 양양 시내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시행했다. 그 뒤 복원불사를 하자마자 가장 먼저 은혜를 지역민들에게 돌리기 위해 60여억 원을 들여 양양 시내 2,500여 평에 유치원과 공부방, 도서관, 노인요양원, 노인복지관을 지어 양양의 아이들, 노인들이 무료로 좋은 시설에서 지내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서울 흥천사를 인수하게 된 것도 오현 스님식 계산법과 배포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흥천사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왕비 신덕왕후를 위해 세운 원찰로 역사적 중요성이 큰 곳이다. 그러나 일본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경내에 한 집 두 집이 들어서면서 사찰인지 여염집들인지 구분이 모호한 지경이 되었다. 사찰을 재정비하라면 이들 집을 모두 내보내야 하는데, 무려 22가구가 들어서 있고, 세입자만도 60집이 되어서, 이들에게 보상비를 지급해줘야 해서 조계종단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치한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주자들의 보상비도 늘어나니, 원찰의 회복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오현 스님은 정념 스님에게 거주자들과 세입자들에게 불만이 없도록 충분히 줘서 내보내도록 했다. 보상비만 110억 원이나 됐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뭔가 이익을 보려고 하면 절을 인수할 수 없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절을 인수할 수 있다”고 했다. 대출을 받아 보상비를 모두 지급하더라도 이 정도 사격이면 목탁만 열심히 두드려도 대출 이자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서 수입이 들어오는 대로 대출 이자를 갚으면 대중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냐고 걱정부터 했지만, 스님은 “자기 돈 한 푼 안들이고 은행 돈으로 점거자들을 다 내보내면, 서울에 이런 대찰이 남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다운 배포가 아닐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조계종으로서는 서울 도심권에 가장 큰 규모의 대찰을 하나 더 확보한 셈이었다.

스님은 작은 것만을 탐하는 자는 작은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베푸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없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지폐를 ‘나뭇잎’으로 표현하면서 나뭇잎을 받고 좋아한다고 배시시 웃는 그였으니, 세속인들과 소유의 견처가 달랐다. 

그가 열반 몇 해 전에 서울 한남동의 삼성가 오너의 자택에 초청을 받아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홍라희 여사는 불교와 원불교에서 널리 존경받는 분들을 자주 뵙고 있었다. 한결같이 계행이 청정한 이들인데 이날 결이 다른 오현 스님과 마주한 것이다. 그럴 밖에, 스님은 약주와 담배를 꺼리지 않는 분이었다. 이날 스님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중국이나 후진국에서 버는 돈들을 가져올 생각 말고 그곳에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야 그들이 삼성을 적대기업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위한 자기 나라의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또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했다. 자신들이 존중받은 만큼 충성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스님께서 이 험한 세상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유혐간택(唯嫌揀擇): 어느 손가락이나 다 내 손가락이다

스님은 남다른 면모가 많았지만, 진보와 보수 간 동병상련의 이전투구판을 한 세기 가까이 관통하면서도, 그 진흙탕 속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또한 산중에 은거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언론인, 고관대작들을 맞상대하면서도 양극단의 어느 쪽을 경계하지도 않으며, 내치지도 않고, 둘을 다 아울러 껴안으며 화이부동(和而不同)했다는 점에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가 만든 만해축전은 만해와 〈조선일보〉 설립자인 방응모와의 각별한 인연을 들어 우파 신문인 〈조선일보〉와 공동주최했다. 그러나 만해대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 리영희 선생, 이소선 여사, 고은 시인, 김지하 시인, 조정래 소설가, 강원용 목사,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두봉 주교, 백낙청 선생, 신영복 선생 등 당대 대표적인 진보인사들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시상됐다. 그가 아니면 남남갈등의 시대에 대표적 우익신문의 이름으로 ’좌익’으로 손꼽힌 이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 제3세계에서 군부와 독재자들의 폭압 아래서 목숨을 걸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는 평화 · 인권운동가들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그들의 운동을 간접 지원했다.

그러나 신영복에게 만해상을 줄 때는 고충이 적지 않았다. 오현 스님은 흥천사 조실채의 이름을 ‘손잡고 오르는 집’이라고 작명한 뒤, ‘편액 글씨를 신영복 선생이 써줬으면 좋겠다’면서 내게 부탁을 했다. 지인을 통해 신 선생에게 말을 전하니,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신영복 선생은 천성이 부끄럼을 잘 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엔 함께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용하게 흥천사에서 오현 스님과 자리를 만들어 함께 식사를 했는데, 스님은 그 자리에서 신영복 선생 부친의 함자를 부르면서, “밀양에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을 한 신학상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고 친밀감을 표했고, 신 선생도 스님과 만남을 행복해했다.

스님은 신영복 선생에게 만해상을 주고 싶어 했으나 〈조선일보〉에서 ‘신영복만은 안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다음 해 다시 상정해 기어이 뜻을 이루는 뚝심을 내보였다. 그때 심사위원단에게 보낼 추천서를 내게 당부했는데, 신 선생과 함께 또 하나의 추천사도 당부했다.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 등을 돕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는 ’손잡고‘’라는 단체였다. 그는 당시 쌍용차 해고근로자들의 자살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만해상을 주어 상금 5천만 원으로라도 간접지원 해주고 싶어 했다.

그는 평소 사람을 대할 때도 종교나 지역을 따지지 않았고, 오직 인간됨과 뜻을 보았을 뿐이었다. 기독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계천 피복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아무도 몰래 매달 후원금을 보냈다. 이 사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늘 “조오현 스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2011년 이 여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감으로써 유족들에 의해 밝혀졌다. 만해상 수상자를 결정할 때도 승려나 불자 여부를 따지지 않았고, 만해마을에 유숙하는 문학인들과 그가 지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더욱 좋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했고, 승려들에겐 좁은 안목을 격파해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오도록 했다. 그의 법문은 늘 허울의 불교를 던져버린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이 된 지 오래다.”면서 “대장경의 글과 말 속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 여러분이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라고 경책하고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소설가 이청준의 말대로 절집에만 ‘당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하라”고 했다.

그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엔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듯이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며 “천 년 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뱉어놓은 사구(죽은 말)만 들고 살지 말고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불교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이다. 한국 근대 100년만큼 일수사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역사도 드물다. 자신의 좁은 안목으로 노선이 같으면 선이며, 다르면 악이다. 선의 6조 혜능은 5조 홍인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은 뒤 자신의 의발을 빼앗으려 달려온 혜명에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때 그대의 본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고 물어 선악 시비를 넘은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이끌었다.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相爭何事,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투는가)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 부싯돌 번쩍이는 사이에 붙어 있는 이 몸이거늘)”이라며 비웃을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스님은 내게도 틈만 나면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잘난 놈 못난 놈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타고르 〈동방의 등불〉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지역이든 분별심에 빠지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포나 민족, 나라와 인류애는 제쳐두고 눈을 번득이며 총칼을 들거나 악구를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는 야차들만이 득실대던 현대사에서 오현 스님은 타고르가 말한 위대한 조선인의 모습을 잊지 않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준 선구자였다.

초반엔 스님이 배를 갈라 내장을 드러나 보이는데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스님을 신뢰하고 공경했으니 나의 전심(前心)은 무엇이고, 후심(後心)은 무엇일까. 설악산 대청봉 위로 한 미친 노인네가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매고 대청봉을 넘고 있는데, 아직 나 홀로 설악산을 헤매고 있다. 스님이 떠난 봄날의 무산(霧山, 안개산)은 벼랑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에 참 좋은 날이구나. ■

 

조현 /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주요 저서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 《인도 오지 기행》 《은둔》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등이 있다. 〈한겨레〉 수행 · 치유 웹진 휴심정 운영자.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