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발행인 무산 스님 열반 1주기 추모 특집

설악무산의 불학사상과 그 의미 / 조병활 
설악무산의 문학세계와 그 위상 / 이숭원
기자가 본 설악무산의 인간적 면모 / 조현

2019년 5월 15일(수) 오후 6시 30분 / 동국대 만해마을 문인의 집 강당
주관 / 계간 불교평론 후원 / 설악산 신흥사 · 백담사

 

1. 동시대 출가자의 생애와 사상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1) 들어가는 말

동시대(同時代)의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쉬우나 한편으로는 어렵다. 같은 시대에 살았기에 평가대상인 그 인물을 만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은 연구자에게 장점으로 작용한다. 순전히 ‘남겨진 문헌’을 통해 연구할 수밖에 없는 과거 역사 속의 인물에 비해 자료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평가’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비추는 것임을 생각하면 직접 보고 들었다는 점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문헌’도 결국에는 평가자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의식에 비춰 해석(解釋)될 수밖에 없다. 

평가대상이 평가자와 동시대에 살았든 혹은 평가자보다 과거에 살았든, 평가자는 결국 사실과 자료를 통해 평가대상[인물]을 ‘번역(飜譯)’해야 한다. 해석과 번역은 평가자의 눈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 따라서 동시대의 인물이든 과거의 인물이든 평가자에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다만, 평가대상인 인물과 연구자가 같은 시대에 살았기에 그 시대의 정신과 문제의식[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공유(共有)했다는 점은 평가자가 동시대 인물을 판단할 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같은 이유로 평가대상인 인물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시대정신은 계층과 계급에 따라 다르다. 소속된 정파(政派)나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출가자는 ‘입세(入世)’보다는 ‘출세(出世)’를 지향할 수밖에 없고, 사회문제보다는 개인의 내적인 관조(觀照)에 보다 치중해야 하는 특성을 지닌다. 한평생 세간의 붉은 먼지와 함께 득의(得意)와 실의(失意)를 겪어야 하는 일반 사회인들과는 다른 측면이 많다. 

보편적인 견지에서 보면 출가자도 인간 세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명의 사람이나, 특수한 입장에서 보면 출세간을 지향하는 ‘방외지사(方外之士)’이고, ‘정적(靜的)인 환경 속의 동적(動的)인 마음’이 그들이 유희(遊戲)하고 소요(逍遙)하는 주된 대상이다.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출가자의 문제의식이나 시대 인식이 일반인들과 같을 수는 없다. 한 명의 출가자를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금(古今)을 떠나-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분석과 평가는 장아함 권 제19에 나오는 ‘코끼리 만지는 장님들[맹인모상(盲人摸象)]’1)처럼 산발적이고 단편적이 될 개연성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그 출가자의 ‘역사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출가자도 주어진 시간(씨줄)과 공간(날줄) 속에서 살았던 ‘객관적인 인물’이자, 한정된 형상을 가진 ‘시간적인 존재’이다. 어떤 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그 산의 객관적인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출가자도 다양한 형상(形象)을 가질 수 있지만 무한한 변형(變形)을 가진 ‘특별한 존재’에 속하지는 않는다. 결국은 파악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고, 번역될 수 있는 모습을 가진 ‘역사적인 인물’이 바로 출가자다. 그러면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출가자를 해석하고 번역할 틀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평이하게 그저 따라 기술하는 것[술이부작(述而不作)]’이 아닌 ‘옛것을 궁구(窮究)해 새로운 모범을 창출[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2) 보살과 육바라밀–지혜와 방편의 분석틀

출가자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형인 ‘보살’과 그의 행동 준칙인 ‘육바라밀’은 출가자를 평가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준거가 된다. 보살의 수행 준칙인 육바라밀은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와 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로 나눠진다. 먼저 재물이나 가르침 혹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방식 등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인연을 맺어야 한다[보시(布施)]. 중생들에게 손실과 해를 끼치는 보시는 올바른 보시가 아니기에 계율을 지키며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지계(持戒)]. 타인이 자기에게 가하는 위해(危害)를 참지 못하고 되갚음을 되풀이하면 청정한 계율을 지킬 수 없다. 인욕(忍辱)이 필요하다. 상대가 가한 해(害)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면 타인의 많은 나쁜 행위를 무력화시킬 수 있고, 보살 자신은 선(善)을 행하는 것이 되므로 인욕은 최고의 이타행이자, 중생을 버리지 않는 방편이다. 자리(自利)의 대표는 지혜의 힘으로 해탈의 안락을 얻는 것이다. 지혜는 그냥 오지 않는다. 선정으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사물의 본성을 관조해 공성(空性)을 ‘몸으로 체득(體得)해야’ 한다. 선정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타든 자리든 한두 번 행한다고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지어가야 한다. 정진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여섯 가지는 대승의 모든 것을 포괄하며 이외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혹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 원(願) · 역(力) · 지(智) 등 네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나, 육바라밀 자체에 이미 모두 들어 있다.

물론, 자리와 이타로 양분되는 육바라밀을 복덕과 지혜로 나눌 수도 있다. 《대지도론》 권 제15는 강조한다.

깨달음을 이루려면 두 가지 방식의 수행이 필요하다. 하나는 복덕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방식이다. 보시 · 지계 · 인욕을 수행하는 것은 복덕문이 되며,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모습-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이다-을 체득하는 것은 지혜문이 된다. 보살이 복덕문으로 들어가 모든 죄악을 제거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죄악이 방해한 때문이다. 지혜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며 ‘열반에 머무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이다. 두 가지는 같기 때문이다. 지금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기게 하고자 한다면 선정이 필요하다, 반야바라밀의 핵심은 선정문에 의해 일어나며, 선정문은 큰 정진의 힘을 필요로 한다. 왜 그런가? 마음이 흩어지면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바람 속에 있는 등불은 사물을 비출 수 없고, 방 안에 있는 등불이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다.(강조는 필자)

보시 · 지계 · 인욕은 복덕문이며, 선정 · 지혜는 지혜문이다. 정진은 두 문에 모두 필요하다. 정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복덕도 지혜도 성취되기 힘들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육바라밀 전체가 결국은 방편이다. 그래도 굳이 분류하자면 수행 과정의 보살에겐 복덕문이 방편에 해당한다. 따라서 육바라밀은 방편과 지혜로 구분해도 된다. 구마라집(343~413)이 한역한 《유마힐소설경》은 설명한다.

 

속박이란 무엇입니까?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선정과 삼매의 맛에 집착하는 것이 보살의 속박입니다. (방편과 함께) 선정과 삼매의 맛을 즐기는 것이 보살의 해탈입니다. 또한 ‘방편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방편 없는 지혜가 속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애착을 가진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숙케 하고, 공 · 무상 · 무작법[無願]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방편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방편 있는 지혜가 해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애착 없는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숙게 하며, 공 · 무상 · 무작법[무원]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피곤해하거나 싫증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방편 있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방편은 속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살이 탐욕 · 성냄 · 삿된 견해 등 여러 번뇌에 머무르며 여러 덕행의 근본을 기르는 것이 바로 ‘지혜 없는 방편은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방편은 해탈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탐욕 · 성냄 · 삿된 견해 등 여러 번뇌를 떠나 여러 덕행의 근본을 길러 무상정등각에 회향하는 것이 바로 ‘지혜 있는 방편은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강조는 필자)

유마힐이 문수보살에게 제시한 설명에 따르면 보시 · 지계 · 인욕은 방편이며, 선정 · 지혜는 지혜에 해당한다. 정진은 둘 모두에 필요하다. ‘지혜 없는 방편’이나 ‘방편 없는 지혜’는 둘 다 속박이다. ‘지혜 있는 방편’이나 ‘방편 있는 지혜’는 둘 다 해탈이다. 지혜와 방편이 균등하게 필요하다. 지혜 없는 방편은 삿되기 쉽다. 방편 없는 지혜는 날카로우나 무미건조해 남과 자기에게 그다지 이롭지 않다. 두 가지가 균등하게 구비되어야 한다. 그러면 양식[자량(資糧]]이 준비된 여행자처럼 언제라도 해탈과 중생구제의 여행에 나설 수 있다. 《대보적경》 권 제52는 말한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많이 닦았기에 두 종류의 자량資糧에 능히 통달한다는 것을 마땅히 아십시오. 무엇이 두 가지 자량이냐 하면 복덕과 지혜가 그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복덕자량(福德資糧)이라 합니까? 이른바 보시의 본성은 복 짓는 일이며, 지계의 본성은 복 짓는 일이며, 여러 수행의 본성은 복을 짓는 일이며, 큰 자비가 큰 자비의 방편을 결정하는데, 보살은 복을 짓는 여러 일들에 머무릅니다. ……사리불이여!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많이 행할 때 이처럼 인연법에 머물기에 지혜에 모두 섭수됩니다. 그래서 이를 지덕자량(智德資糧)이라고 합니다. (강조는 필자) 

《대보적경》의 설명에 의하면 보시 · 지계 · 인욕은 복덕자량이며, 선정 · 지혜는 지덕자량이다. 정진은 지혜자량이나 복덕자량을 쌓는 데 다 필요하다. 여행할 때 필요한 노자(路資)와 양식이 자량의 원래 뜻이다. 불교적 의미의 자량은 수행에 필요한 선근(善根) · 공덕(功德)을 가리킨다. 

좋은 보답 · 결과를 가져오는 착한 행위가 선근이다. 선행(善行)의 결과로 보답 받는 과보(果報)를 공덕이라 한다. ‘자량’이 내포하는 의미는 깨달음이나 중생구제라는 이념이 아무리 위대해도 현실적 양식인 ‘착한 행위’가 부족하면 그것들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살은 원인[因]을 중시하고 중생은 결과[果]를 중시한다.”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착한 행위[善因]’를 실행하지 않고 ‘좋은 과보[善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자량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

3) 고승(高僧)과 명승(名僧)-홍도(弘道)와 명교(明敎)

육바라밀에 내포된 방편과 지혜, 복덕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이다. 보살행을 실천할 때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은 방편이고 선정 · 지혜 · 정진은 지혜지만, 대각을 성취하면 방편은 복덕으로 전화(轉化)되고, 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승화된다. 그래서 복덕과 지혜를 원만하게 갖춘[양족존(兩足尊)] 붓다가 된다[귀의불(歸依佛)]. 대승보살의 양대 무기는 결국은 지혜와 방편이다. 지혜에는 교화를 위해 임시적으로 수단을 꾀하는 권지(權智, 방편의 지혜)와 궁극적이고 영구히 변하지 않는 실지(實智, 진실된 지혜)가 있다. 방편의 실천은 지혜를 증장시키고, 지혜의 활용은 방편을 가치 있고 품격 있게 만든다. 방편과 지혜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이자, 서로를 상승시키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방편과 지혜를 현실에 얼마나 적절하게 잘 활용했느냐’로 출가자를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지혜와 방편의 숙성도와 활용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고승(高僧)이냐? 명승(名僧)이냐’이다. 중국 남조 양나라(502~557) 시대에 살았던 스님 혜교(慧皎, 495~554)는 519년 편찬한 《고승전》 권 제14에서 힘주어 말했다. 

앞선 시대 이래로 전기(傳記)에는 흔히 명승(名僧)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명(名)이라는 것은 본래 본질에 비하면 손님이다. 수행을 실질적으로 닦아도 빛을 감추면 덕과 경지가 높아도 이름난 것은 아니다. 반면 공덕이 적어도 시대에 영합하면 이름은 높아도 (덕 · 경지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름만 알려지고 경지가 높지 않은 이는 본래 (이 책 즉 《고승전》에) 기재될 사람이 아니다. 경지가 높으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들을 지금 여기 기록해 놓았다. 때문에 명(名) 자를 없애고 고(高) 자를 사용해 고승(高僧)이라 했다.

‘지혜와 방편’ ‘고승과 명승’을 서로 짝지으면, 지혜와 방편을 조화시켜 적절하게 잘 활용한 인물은 고승, 지혜보다는 상대적으로 방편을 능숙하게 사용한 사람은 명승에 배대할 수 있다. 여기에 “무릇 깨달음은 사람에 의해 널리 퍼지고 가르침은 글을 통해 밝혀진다.”7)는 《홍명집(弘明集)》 〈서문〉이 제시한 ‘홍도(弘道)와 명교(明敎)의 원칙’을 덧붙여 정리하면, 고승은 홍도와 명교에 능통한 사람이고, 명승은 홍도에 더욱 힘을 쏟은 인물로 정리해도 무방하다. 홍도와 명교는 불이적(不二的) 관계다. 홍도를 실천하려면 명교, 즉 가르침에 밝아야 한다. 가르침에 밝지 않은 채 홍도에 나서면 자리와 이타 어디에도 일가(一家)를 이루기 어렵다. 홍도를 통해 명교가 강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르침에 밝지 않고 방편에만 능통한 출가자가 홍도를 위해 ‘자비심을 내어 세간에 들어가[낙초자비(落草慈悲)]’면 속화(俗化)되고 악화(惡化)될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그런 출가자가, 후진(後秦, 384~417)의 승조(僧肇, 384~414)가 〈반야무지론〉에서 강조한 ‘세간과 출세간을 자유로이 왕래하는[화광진로(和光塵勞)]’ 모범을 모두에게 보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구체적으로 말해 ‘시장 바닥에 뛰어들어[입전수수(入鄽垂手)]’도 세속인들을 안양(安養)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게다가 ‘세간에 있으면서 물들지 않는 경계[처염상정(處染常淨)]’를 성취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따라서 ‘지혜와 방편’ ‘홍도와 명교’는 출가자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하나의 틀이나 준거(準據)가 될 수 있다. 실지와 권지 그리고 방편을 X · Y · Z축으로 삼고 고승과 명승, 홍도와 명교를 좌표로 삼아 설악무산(雪嶽霧山, 1932~ 2018, 이하 존칭 생략, 무산으로 약칭) 스님의 사상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설악무산의 불학사상과 그 의미

1) 지혜의 측면-무산의 불교 이해

무산(霧山)의 불학사상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아무래도 남겨진 문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문헌이 100% 객관성을 담보해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전해지는 일화보다는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무산 본인이 발표한 글이나 본인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은-각색의 손질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인의 책임하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들이기에 제1차 자료가 된다. 무산이 남긴 저서 가운데 시집을 제외한 책들, 즉 《벽암록》 《선문선답》 《무문관》 《열흘간의 대화》 《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에 담긴 내용을 분석해 ‘무산의 불학사상과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무산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출가자, 시인, 신흥사 조실, 만해사상 선양자 등. 이 가운데 근본 중심은 아무래도 출가자다. 발 딛고 서 있는 ‘원래 자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옮겨간 다른 자리도 불안한 법이다. 만해가 위대한 것은 불교사상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체득한 토대 위에서 다른 활동을 물러섬 없이 전개했기 때문이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농부는 ‘무늬만 농부’다. 그런 농부가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시를 잘 짓고 붓글씨를 잘 써도 출가자의 본문인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시와 서예에서 이룩한 경지도 의심받는다. 따라서 무산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산 불학사상의 원천은 붓다다. 무산의 생각을 직접 읽어 보자.

 

[1] ‘불교를 믿는다’는 말은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 가르침이 옳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살다 보면 반드시 괴로움을 극복하고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불자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따른다.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문제가 그것이다. 아무리 불자를 자처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외도(外道)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 신앙의 내용 가운데 이른바 기복신앙(祈福信仰)을 정당화하려 한다. 기복이 없으면 종교가 될 수 없다느니, 대중을 인도하자면 방편으로 기복을 권장해야 한다느니 하는 변명이 난무한다. ……오늘날 불교에서 행해지는 불교는 간판만 ‘불교’라고 내걸었을 뿐, 내용은 기독교나 바라문교라고 해도 무방한 종교가 된 지 오래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 태도를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강조는 필자)

[2] 인도의 종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제사(祭祀)의 길(Karmamārga)에 속하는 종교, 둘째는 신애(信愛)의 길(Bhaktmārga)에 속하는 종교, 셋째는 지혜(智慧)의 길(Jῇānamārga)에 속하는 종교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는 이 세 가지 종교 유형 가운데 세 번째인 ‘지혜의 길’에 속한다. ‘제사의 길’이나 ‘신애의 길’에 속하는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제례주의나 신비주의 또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희생의 요구를 배척한다. 지혜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 있는 가르침은 아니다. 이 길은 분명 다른 종교보다 합리적이고 뛰어난 점이 있다.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틀림없이 지혜의 길에 의해 완성된다. 이 길은 모든 문제를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강조는 필자)

[3] “인도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세계화된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다. 이는 불교의 교리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리성과 보편성, 그리고 당위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인간의 이성에 호소했다. (강조는 필자)

[4] 스트레스라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바깥에서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내면에서 생기는 것이거든요. 불교는 바로 이것을 지적하는 종교입니다. 모든 고통과 불행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내면을 다스려서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메시지가 합리적인 서양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먹혀든 것이라고 보아야지요. (강조는 필자)

무산이 파악한 불교는 대중을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종교다. 제사의 길도, 인격신을 믿고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라, 합리성과 보편성, 그리고 당위성을 가진 종교이다. 지혜의 가르침인 불교는 합리적이고 뛰어나지만,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 있는 가르침은 아니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기에 힘들다. 그럼에도 무산은 불교는 지혜의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자,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실천적인 종교라고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붓다를 절대적인 존재로 보고 소원을 비는 형태의 기복신앙(祈福信仰)을 배격한다. 기복신앙을 멀리 던지고 찾은 ‘그의 불교’는 어떤 형태일까? 

[1] 불교는 인간의 운영이 미리 결정돼 있다는 운명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그저 우연으로 성립돼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인간의 운명이 스스로 지은 업(業)에 의해 결정되고 지배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인연론(因緣論)이라고 한다. ……모든 인생의 조건이 ‘운명’인 것처럼 떠벌리는 것을 믿기보다는 ‘당연한 상식’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래야 남을 속이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하는 점술사의 술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불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내가 만든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를 업보론(業報論)이라고 한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인생의 문제가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그대가 지금 이 지루한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순전히 그대의 자유의지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

[3] 어리석은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인간의 이성에 기초해 합리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일을 ‘믿음’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헌 옷을 불에 태우면 좋은 옷이 생긴다는 황당한 얘기를 믿다가 헌 옷마저 잃고 당황하는 어리석은 벌거숭이가 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무산이 생각하는 불교는 스스로 지은 노력에 의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종교, 이성에 기초해 합리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가르침을 말한다. 결코 ‘믿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런 불교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불교를 파악한다.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인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해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불교에서 흔히 쓰는 술어에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화엄경》이라는 불교의 최고 경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 그런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곧잘 오해를 한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니깐 객관적인 어떤 사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50리나 되는 거리를 마음만 먹으면 30리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마음이 만든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둥근지 모가 났는지, 예쁜지 추한지를 판단한다는 뜻이다. ‘제 눈에 안경’이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순전히 인식론적인 문제이지, 존재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착각하면 엄청난 오류가 생긴다. ……불교는 사실을 왜곡하고 착각하도록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보고 판단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다는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마음은 창조적 의지를 굳게 할 수 있다.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모델을 구상하고 기계적 장치를 생각하면 그런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가 자동차를 만든다. 선과 악도 이렇게 마음이 지어간다. ‘일체유심조’의 뜻은 여기에 있다. (강조는 필자)

사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체유심조’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다. 인식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 무산은 이 구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제시했다. 지혜로 존재의 본성 · 본질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종교가 불교임을 무산이 체득(體得)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무산은 “불교 수행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인생의 현실을 직시하고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산의 불교 이해가 합리성과 이성에 기초하고 있음은 ‘중도(中道)에 대한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 중도(中道)를 말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는 ‘좌도 우도 아닌 중간상태’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도의 참뜻을 왜곡한 것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좌와 우의 중간 상태란 있을 수 없다. …… 불교에서 중도를 설명할 때 ‘변(邊)을 떠나 가운데 처한다[離邊處中]’는 말은 좌우의 중간이란 뜻은 아니다. 참(眞) · 실재(實在) 또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좌우를 부정하는 일종의 부정의 다이너미즘(dynamism)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중도는 두 사물의 중간이라고 하는 기하학적인 상태개념이 아니라 양극단을 부정하는 역학적 기능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기존의 가치체계를 부정함은 물론, 나아가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좋다는 식의 체제 순응적 논리가 거부된다. 모순의 현실을 방관하고 체제 온존 · 순응의 논리로 중도개념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불교의 중도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부정의 논리다. 그것은 중립(中立)이 아니라 독립(獨立)이고 정립(正立)이다. ……잘못된 것을 눈감아주는 변명으로서 ‘중도론’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불교의 본뜻도 아니고 현실을 개혁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사실 용수가 지은 《중론》 권 제4 〈관사제품〉의 제18 · 19번째 게송이 말한 중도는 ‘비유비무적인 존재’, 즉 인(因)과 연(緣)에서 생겨난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주된 원인[因]과 보조적인 조건[緣]들에 의해 생긴 모든 존재[法]를 나는 공[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임시적인 이름[假名]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의미이다. 인연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공[공성] 아님이 없다.” 

청목은 이 게송에 대해 “여러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 모든 존재를 나는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인과 연이 갖추어져 생겨난 사물은 인과 연에 속하므로 자성(自性, 불변하는 실체)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하다. 공 역시 공하다. 다만 중생들을 인도하기 위해 임시로 이름을 붙여 말한다. 있음과 없음의 양 변을 떠나 있기에 중도라고 부른다. 이런 존재[사물]는 자성이 없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는 것은 아니므로[가유假有와 가명이 있다]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만약 존재[사물]가 자성이나 자상(自相)을 갖고 있다면 인과 연을 기다리지 않아도 있게 되며, 인과 연을 기다리지 않고 생기는 존재[사물]는 없으므로 공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라고 해설했다. 

인용문에 따르면, 용수가 말한 중도는 중간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존재는 본성상 공한 성질(소멸돼야 할 성격)을 갖고 있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임시적인 형태를 띠고 임시적인 이름으로 부를 수 있기에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인 자성을 가진 그런 존재는 아니기에 언젠가는 사라지며, 그러나 임시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기에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 그런 존재, 세간에 있는 모든 ‘유위법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무산의 설명은 중도 자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중도가 올바른 이해에 기초한 중도가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용수의 중도 설명에서 더 나아가 오해되고 있는 중도에 대한 교정이다. 아무튼, 여기서도 합리성과 이성, 그리고 지혜에 토대를 둔 불교 이해가 ‘무산 불교사상’의 근본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에 토대를 둔 그의 불교 이해가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진리는 엄청난 고행을 견뎌야 하고 수많은 세월을 보내야 비로소 얻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무산의 설명이다. “진리는 우리 자신 속에 내장되어 있고, 바로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진리가 비록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지만 선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 진실한 세상은 단 한마디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말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무산은 강조했다. 

[1] 선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 진실한 세상은 단 한마디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실천, 잠시라도 그것을 잊어버릴 때 그런 세상은 금방 사라진다. 그러면서 선한 말, 진실한 말을 했는데 왜 선하고 진실한 세상이 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으로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수양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늘의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본성 자체를 탐욕과 무명에서 자비와 지혜로 바꾸지 못하면 세상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 이럴까? 진리가 우리 자신 속에 내장되어 있다면 사회는 더 맑아져야 하고, 세상은 더욱 순화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대한 무산의 답변은 명료하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아는 것만큼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이나 이론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부지런히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도록 하려면 ‘방편’이 필요하다. 무리한 강요보다는 자발적인 유도가 훨씬 큰 효과를 낸다. 무산은 방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했을까?

2) 방편의 측면–무산의 불교적 지혜 활용

참다운 지혜는 방편을 통해 널리 퍼진다. 방편이 없으면 진리도 힘을 널리 떨치기 힘들다. 진리라고 사람들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습관과 나태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낯설고,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수도 있다. 대상에 적합한 방안을 고안해 가르침을 펴야 한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말은 방편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초등학생들에게 대학생 수준의 설명을 하면 모르겠다며 하품하고 잠만 잔다. 대학생들에게 초등학생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다고 불평한다. 대상의 수준에 맞게, 시간과 공간에 적합하게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방편이 바로 이런 의미다.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아름다운 말로 상대방을 이용하고자 내지르는 수단은 참다운 방편이 아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간지(奸智)로 포장된 방편’은 삿되기 쉽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불교를 추구한 무산은 어떤 방식의 방편으로 불교적 지혜를 펼쳤을까? 무산과 신경림 시인이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용을 정리해 출간한 《열흘간의 대화》에 무산의 방편활용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1] 한국불교의 명상법은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해서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방법인데 저는 그중에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명상하라고 합니다. 즉 ‘부모가 나를 낳기 이전의 나는 어떠했는가?’를 명상하는 것인데 제가 제시하는 방법은 좀 독특합니다. ……이렇게 집중하다 보면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것은 제가 젊은 시절 삼랑진 토굴에서 공부할 때 체험한 것인데, 이번에 제 경험과 방법을 가르쳐주었더니 다른 수행법보다 쉽다면서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조는 필자)

[2] 선생님(신경림 시인을 말함)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셨는데, 저는 그 여행이 육도윤회를 경험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윤회란 사람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돌고 도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왜 인생을 육도윤회라고 말하는가 하면 인생이란 살다 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육도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을 수시로 교체하며 선악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천상이란 항상 즐거움이 넘치는 세계를 말합니다. 중생은 이러한 육도의 세계를 무시이래로 윤회해 왔다는 것이 윤회설의 골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생이나 내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더 자주 경험하게 되지요. ……일일일야(一日一夜) 만사만생(萬死萬生)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강조는 필자)

위의 두 인용문만 봐도 무산이 방편을 잘 활용하는 대가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어려운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생활 속의 예를 들어 교리를 설명한다. 직접 경험한 방법을 사용한다. 방편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화법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윤회를 저 먼 세상의 것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한다. 간화선 하면 대개 오래 앉아 있어야 하고, 힘든 수행법이라고 생각들 한다. 무산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방법과 현실의 살아있는 예를 들어 간화선과 윤회에 대한 통념을 깨버린다. 그래서 상대방이 좋아한다. “해탈이 무엇이냐?”는 신경림 시인의 질문에 대한 무산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읽으면 다가온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윤회의 삶이 고통이라고 할 때 다시는 그 굴레에 들어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재생하지 않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재생하지 않는다고 하면 섭섭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다시 태어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요?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적멸위락이라고 합니다. (강조는 필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산은 본인의 어릴 적 경험을 자세하게 회상하며 말한다. “사랑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애욕입니다. 애욕이란 일종의 감정적 집착입니다. 집착은 필연적으로 소유욕을 불러옵니다. 이 소유욕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무산은 불교를 설명한다. 

“저는 젊은 시절의 애정이 이별로 끝난 이후부터 사랑이란 마치 허공에 핀 공화(空華)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환상에 사로잡혔을 때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손에 잡히는 것은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백담사 만해마을’을 제가 ‘건달바성(乾闥婆城)’이라고 이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허무한 것에 너무 집착하면 그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측은지심을 배우려고 애씁니다.” 

남녀 간의 애욕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불교의 무연대비(無緣大悲)’로 인도한다. 안내 방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공화, 건달바성, 대자대비, 측은지심 등 사용하는 단어는 어려운 듯하나 실은 쉽다. 그래서 설명이, 교리가 더 대상에게 다가간다. 상대를 놀라게 해 불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조곤조곤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건달바성’에서 벗어나 ‘진리의 성’에 들어가도록 상대를 안내한다.

물론, 필자의 해석과 다른 점도 있다. 예를 들면 “생명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지만 또한 그것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한 몸[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명을 다 같이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에 대한 설명은 ‘도가적(道家的)인 해석’으로 보인다. 반야중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 구절은 다르게 분석된다. 천지와 만물은 객관, 아(我)는 주관을 말한다. 객관은 연기적 존재, 즉 인과 연이 결합해 생긴 비유비무적인 존재다. 주관 역시 오온이 임시로 결합해 만들어진 허깨비다. 그래서 둘 모두 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언젠가는 다 사라진다. 만물이든 아(我)든 인과 연이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고, 그래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본성상 공한 것’, 즉 성공(性空)이다. 혹은 ‘공한 성질을 가진 존재’, 즉 공성(空性)이다. 다시 말해 “언젠가는 사라지는 성공 혹은 공성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천지와 나는 마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완전히 동일하고, 만물과 나는 흡사 한 몸처럼 일치한다.”라고 반야중관사상은 해석한다. 불교철학의 요체는 ‘성공(性空)’이고, 유가와 도가철학의 토대는 ‘실유(實有)’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방편을 활용해 상대를 불교적 지혜로 인도하는 무산의 방식은 탁월하다. 신경림 시인이 “사람이란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결국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단 말씀이신 것 같은데……”에 대한 답변에서 그렇다. 약간 길지만 중요하기에 전부 인용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꽃 중에서도 장미꽃이 곱다고 하고, 국화꽃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며 알아줍니다. 또 소나무는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고 꼽습니다. 그러나 뒷동산 할미꽃이나 패랭이꽃도 향기와 아름다움이 있고, 참나무나 개떡갈나무도 푸른 잎을 가진 나무입니다. 모두가 그 나름의 값이 있는데 어떤 것만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이것은 인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가봤던 곳을 저는 가보지 못했고 제가 경험한 세계를 선생님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세계가 무진장하면 내가 모르는 세계도 무진장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우리 절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밥 짓는 공양주 보살과 허드렛일 돌보는 부목처사입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절의 부목처사는 저보다 뛰어난 데가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자동차 운전을 못 하는데 그 사람은 운전을 잘해요. 석가모니도 운전은 못 했어요. 운전을 못 하는 사람한테 운전을 잘하는 것처럼 잘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려운 불교 용어는 하나도 없다. 난해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는 불교의 핵심을 너무나 잘 설명한다. 신을 받들기에 인간은 노복(奴僕)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여기서 산산이 부서진다. 오상고절이나 독야청청이나 할미꽃이나 패랭이꽃이나 참나무나 개떡갈나무나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누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누가 누구보다 못하다는 야호선(野狐禪)도 여기에 발붙일 수 없다. 그들에게 여기는 은산철벽이다. 여기에 이르러 방편은 지혜가 되고, 지혜는 방편과 한 몸이 되었다. 지혜와 방편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색하다. 물과 거품이 하나이듯이, 물에 비친 달과 물이 떨어질 수 없듯이, 지혜가 방편이고 방편이 지혜가 되었다. ‘방편 있는 지혜’와 ‘지혜 있는 방편’이 왜 해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명교(明敎)는 홍도(弘道)가 되었고, 홍도는 명교 속에 자리 잡았다. 분명한 방편을 통해 홍도가 드러났고, 은은한 명교를 통해 지혜가 밝아졌다. 고승은 평이한 방편적 설법 속에 나타났고, 명승은 지혜롭게 소리 없이 고승을 따라 나왔다. 고승과 명승, 홍도와 명교, 지혜와 방편은 이성(理性)과 지성(知性) 그리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무산의 불학사상’에서 융합됐다. 권지(權智)가 함축된 실지(實智), 실지를 빛낸 권지, 방편에 내포된 지혜, 지혜에 병합된 방편, 명승을 함유한 고승, 고승을 포함한 명승, 명교와 하나 된 홍도, 홍도에 드러난 명교 등의 개념이 원융일체가 되어 그의 불학사상에서 등봉조극(登峰造極)을 이뤘다.

 

3. 결론

무산이 남긴 《벽암록》 《선문선답》 《무문관》 《열흘간의 대화》 《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을 통해 그의 ‘불학사상과 그 의미’를 분석했다. 지혜와 방편, 홍도와 명교, 고승과 명승이라는 관점에서 무산의 사상을 궁구(窮究)했다. 일찍이 붓다는 강조했다. 

“비구들이나 지혜로운 이들이여! 금을 태우고, 자르고, 문질러 보듯이 잘 검토해 본 다음 나의 말을 받아들여라. 존경심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무산은 이 가르침대로 불교를 파악했다. 무산이 파악한 불교는 지혜의 길이다. 창조신에게 굽신거리는 종교가 아니다. 인격신에게 절해야 하는 종교도 아니다. 합리성과 보편성으로 무장한 실천적인 지성의 종교다. 

알다시피, 합리적인 가르침은 뛰어나나 바르게 수용하는 이는 드물다. 스스로 선택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무산은 불교는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불교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실천적인 종교’라고 강조했다. 붓다를 초월적인 존재로 보고 희망 사항을 이야기하면 들어주는 형태의 기복신앙(祈福信仰)을 무산은 멀리했다. 그가 찾은 불교는 스스로 지은 노력에 의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종교, 이성에 기초해 합리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가르침이다. ‘믿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런 교조(敎條)는 아니다. 그에게 불교는 이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나침반이었다.

그 결과, 그의 저서 곳곳에는 지혜와 방편이 화학적으로 융합된 가르침이 지천(至賤)이다. 무엇보다 쉽게 불교를 설명한다. 상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방편을 사용하는 방식이 춘풍처럼 부드럽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지혜가 넘친다. 방편이 과(過)하면 지혜가 부족하고, 지혜가 차면 방편이 부족한 법이다. 지혜와 방편을 균등하게 활용하기는 쉽지 않다. 

무산은 취모검(吹毛劒)을 휘둘러 무명을 베어버린 선객답게 둘 다를 놓치지 않았다. 때로는 적절하게 빛을 감추고 때로는 적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현적(顯迹)과 은적(隱迹)도 법문으로 활용했고, 고승과 명승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시장에 들어가 머물러도[입전(入鄽)] 항상 깨끗함[상정(常淨)]을 잃지 않았다. ‘입전상정의 경지’를 개척했다. 이성과 지성을 강조한 그의 불교관이 작용한 결과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잘 검토한 다음 믿으라!”는 붓다의 당부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조병활
성철사상연구원장.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과 졸업. 북송 선학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중국 중앙민족대 티벳학연구원에서 티베트불교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혜홍의 문자선 사상 연구〉(중국어, 북경대 박사학위논문) 〈유종원의 문학과 불교관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 《불교미술기행》 《다르마로드》(상, 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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