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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인도 구법(求法)과 현장상의 추이 / 남동신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작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남동신 dsnam@duksung.ac.kr

편집자
이 논문은 2003년도 정부 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인문사회 분야 지원사업 과제 :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 불교 유적의 연구” : KRF-2003-072-GS2001).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Korea Research Foundation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MOEHRD)"(KRF-2003-072-GS2001).

―서역기(西域記), 현장전(玄裝傳), 자은전(慈恩傳)의 비교 검토를 중심으로 

1. 머리말

인도 및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 경전이 차례로 한역(漢譯)되고, 이것이 같은 한자문화권인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로 유포됨으로써 동아시아불교는 비로소 성립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기원 1세기 무렵의 인도불교는 이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소승불교)를 거쳐 대승불교로 변천하고 있었다. 그런 인도불교가 때로는 교란되고 때로는 선택적으로 중국에 전해졌으며, 이것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정치·사회적 분열상과 겹쳐지면서, 동아시아 불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다기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석가모니의 정신에 부합하는 교단을 운영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인도 내지 서역으로 구법 여행길에 오르는 구법승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2세기 중엽부터 8세기 후반 사이에 약 130명가량의 구법승이 알려져 있는데,1) 이들 구법승 가운데 동아시아 불교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장(602~664)이다.  이주형 외, 2004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 불교 유적의 연구』(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인문사회 분야 지원 사업 가제 제1차년도 보고서) 부록 Ⅶ. 구법승 일람 참조. 이 명단에 나오는 127명 가운데, 阿離耶跋摩, 慧業, 玄太, 玄恪, 慧輪, 慧超(이상 신라 출신), 玄遊(고구려 출신) 등 7명이 한국 승려이다. 이외에 8세기 중반 서역에 가서 80권본 『華嚴經』을 가지고 왔다는 元表(『宋高僧傳』권30 元表)와,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해로로 인도에 가던 도중 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병사(病死)한 두 명의 신라 승려(『大唐西域求法高僧傳』上)가 더 있으며, 20세기 초의 자료에 처음 보여서 사실 여부가 미심쩍은 백제 승려 謙益(『朝鮮佛敎通史』上)이 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17년에 걸친 인도 구법 활동 및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진 방대한 역경 사업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2)  현장에 관한 기왕의 연구 논저는 王學春 編, 1995, 「玄奘硏究論著索引」『玄奘硏究文集』(黃心川․葛黔君 主編, 鄭州 中州古籍出版社), pp.497-547을 참조하기 바람. 여기에는 1904년부터 1993년까지 90년 동안 이루어진 주요 연구 성과가 분야별로 망라되어 있다. 

기왕의 연구 성과를 존중하되, 현장이 촉발한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역동적인 변화상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방법론상 두 가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인도 구법 활동을 기술한 자료들을 비교 검토하는 것이다. 기왕의 연구자들은 현장 관련 자료 가운데 ??자은사삼장법사전(慈恩寺三藏法師傳)?? 10권(이하 자은전)을 가장 취신(取信)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자은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현장의 눈부신 구법 활동 내지 인도 불교계에서 현장의 높은 위상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장 사후 20여 년이 지나면서 현장의 신화화(神話化)가 상당히 진행된 단계에서 편찬된 ??자은전??을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본고는 현장에 관한 3대 문헌 자료, 즉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이하 서역기), ??속고승전(續高僧傳)?? 권4 현장전, 그리고 자은전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물론 3대 문헌과 더불어, 현장 입적 직후에 명상(冥祥)이 지은 『대당고삼장현장법사행장(大唐故三藏玄?法師行狀)』1권(이하 행장)과 837년 유가(劉軻)가 찬술한 「대당삼장대편각법사탑명(大唐三藏大遍覺法師塔銘)」(이하 탑명) 등의 주요 전기 자료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비교 검토가 있었다.3)   대표적인 연구성과로 宇都宮淸吉, 1977 『中國古代中世史硏究』(東京: 創文社) 第13章 慈恩傳の成立について를 참조할 수 있다. 여기서 宇都宮淸吉은 자료 상호 간의 영향 관계를 바탕으로 慈恩傳 중에서도 惠立의 原著인 “慈恩三藏行傳”이 貞觀 22년(648) 12월부터 23년 5월 사이에 찬술되었으며, 冥祥의 行狀은 현장이 입적한 664년에 집필이 완료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647년 하반기 무렵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전 초고의 필사본(이하 현장전A)이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되었는바, 그 내용은 현장 입적 후에 탈고된 기존의 『속고승전』현장전(이하 현장전B)과 상당 부분 달라서, 현장 전기 자료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4) 藤善眞澄, 1979, 「『續高僧伝』玄奘伝の成立―新發現の興聖寺本をめぐって―」『鷹陵史學』5, 65-90쪽. 이 글은 藤善眞澄, 2002 『道宣伝の硏究』 第6章 『續高僧伝』玄奘伝の成立, 京都: 京都大学學術出版會, 179-244쪽 재수록 되었음. 興聖寺本 『續高僧伝』의 전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무엇보다도 최근에 발견된 현장전A를 포함하여 현장의 인도 구법을 기술한 3대 문헌이 대략 20년의 시차를 두고 편찬되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삼보(佛?菩薩, 法, 僧)와 관련한 현장 개인의 체험과 생각이 자료에 따라서 어떻게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이는, 자료가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집필되었으므로, 결국 7세기 후반 현장에 대한 인식, 즉 현장상의 시기별 변천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현장상의 시기별 변천은 자료를 남긴 집단들이 갖고 있는 현장상의 추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7세기 중?후반 현장계(系)의 필요성에 의하여, 인도 구법 시의 현장의 개인적인 체험이 신화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장의 인도 구법 행적이 7세기 후반 현장계의 요청에 의해 신화화된 것이라면, 현장계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해진다. 방법론상의 두 번째 시도는 이와 관련된다. 통상 현장의 역경 활동부터 기(基, 632~682)에 의한 법상종(法相宗) 성립까지의 역사는, 현장과 기를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현장 이후 자은학파와 서명학파의 분파와 갈등은 잘 알려진 연구 주제이다.5)  結城令聞, 1956「玄奘とその學派の成立」『東洋文化硏究所紀要』11, 368-372쪽 ; 高翊晉, 1978 「西明唯識의 基本立場」『東國思想』11․12 ; 高翊晉, 1989 『韓國古代佛敎思想史』,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62-165쪽 ; 南武熙, 2005 「圓測의 生涯와 唯識思想 硏究」, 국민대 박사학위 논문, 141-162쪽.

다만 일본 학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전자를 정통, 후자를 이단으로 보려는 정통론의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다. 이러한 태도는 현장 내지 기로부터의 직전(直傳)을 자임하는 일본 법상종의 역사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법상종의 성립사는 단선적 또는 정통론적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현장계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의 번역을 전후하여 점차 분화하며, 현장의 입적과 기의 연구 활동은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일찍이 유키 레이몬(結城令聞)은 자은학파(慈恩學派)와 서명학파(西明學派)의 대립과 더불어 유가론학파(瑜伽論學派)에서 법상유식학파(法相唯識學派)로의 이행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가론학파에서 법상유식학파로의 이행을 역사적 당연, 심지어 필연으로 파악하고, 자은학파와 서명학파의 대립은 자은학파를 정통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자은전이 최종적으로 성립되는 688년까지도 여전히 유가론학파와 유식학파의 분파 의식은 지속되었으며, 여기에 자은학파와 서명학파의 갈등도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현장계의 분화 과정에서 이른바 유가론학파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현장상이 바로 현장전B와 자은전이라고 생각한다. 본고는 이 문제에 국한하여 7세기 후반 현장계의 분화와 법상종의 성립 문제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장기적 목표는 법상종의 성립사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동향을 좀 더 다각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2. 3대 문헌

현장의 구법 활동을 기술한 최초의 자료는 646년 7월에 편찬된 『대당서역기』12권이다. 당시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당(唐) 태종(太宗)으로서는, 웅대한 대외 경략을 위하여 서역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17년간의 인도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현장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적임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태종의 명으로 찬술한 서역기는 현장 개인의 체험기라기보다는 서역에 관한 지리지(地理志)에 더 가깝다.6)1 水谷眞成 譯, 「『大唐西域記』解說」『大唐西域記』(東京: 平凡社, 1971), 432-452쪽 참조.

 실제로 서역기에는 17년간(629~645)의 구법 여행 중 장안(長安)에서 고창(高昌)에 이르는 사이의 여정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여행기는 현장이 귀국하기 직전 당에 정복된 고창의 바깥 서역북도[天山南路]의 첫 번째 나라인 아기니국(阿耆尼國)[焉耆]에서 시작하여 서역남도의 누란(樓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한편 대정신수대장경에 실린 서역기에는 ‘현장역 변기찬(玄?譯 辯機撰)’이라고 하여 찬자(撰者)에 약간의 혼선이 있다. 송초(宋初)에 편찬된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아예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변기의 서역기’를 별개의 저작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7) 1『新唐書』59 志49 藝文3 丙部子錄 道家類 釋氏

그러나 서역기 말미에 첨부된 변기의 찬(讚)에 의하면, 변기가 왕명으로 현장의 ‘지기(志記)’를 받아서 기록하고 편찬하였다고 한다.8)  1『大正藏』51, 947a-b

현장전에서도 변기가 현장의 수기(手記)를 받아서 차례로 엮었음을 밝혀 두었다.9) 1『大正藏』51, 947a-b

변기(辯機)는 645년 4월에 칙명으로 현장의 역장(譯場)에서 철문(綴文)의 일을 맡게 된 이래, 짧은 기간에 모두 4부의 경전 번역에 참여할 정도로 비중 있는 승려였다. 그런데 최초의 역장은 궁궐[玉華宮]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변기는 황제의 딸로서 귀족에게 시집간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발각되어 황제의 분노를 샀으며, 결국 648년 7월에서 649년 5월 사이 극형에 처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10)

게다가 애초에 서역기는 현장이 왕명으로 편찬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있어서 변기와 같은 시기에 현장의 역장에 참여한 도선(道宣, 596~667)과, 이보다 나중에 역장에 합류한 도세(道世, ?~668)는 서역기의 공식적인 찬자를 현장이라고 단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11)  1『大正藏』50, 455a, “又出西域傳十二卷. 沙門辯機 親受時事 連紕前後.”

이러한 혼선은 서역기의 주된 자료가 현장의 수기였지만, 여느 역경과 달리 서역기 편찬에서만큼은 변기가 필수(筆受)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한다. 명백히 현장이 주어인 문장에서 현장을 지칭하는 명사나 대명사가 사용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를 반증한다.

두 번째 자료는 도선의 ??속고승전?? 권4에 수록된 현장전이다. 도선이 『속고승전』 초고를 완성한 것은 645년이었는데, 바로 이해 정초에 현장이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도선은 그 직후 왕명으로 개설된 현장의 홍복사(弘福寺) 역장에 참가하여 활동하면서, 살아있는 현장의 전기를 『속고승전』에 새로 보입(補入)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속고승전』의 필사본이 근래 일본의 흥성사(興聖寺)에서 발견되었다. 이 흥성사본에는 현행본 『속고승전』에 실려 있는 인물 가운데 태종의 말년(649) 이후에 입적한 승려들의 전기가 하나같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흥성사본은 648년 10월 무렵부터 늦어도 649년경에는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2)  1 陳垣, 「『大唐西域記』撰人辯機」『桑原博士還曆紀念東洋史論叢』(1931); 『陳垣史學論著集』(吳澤 主編, 上海: 人民出版社, 1981), 266-287쪽

이 중에서도 현장의 전기(현장전A)는 ‘유가사지론 30여 권이 막 번역된 현장 나이 35세’에 찬술되었다.13)1 道宣(664년), 『大唐內典錄』권10(『大正藏』55, 333a), “皇朝坊州玉華宮寺沙門釋玄奘撰 大唐西域傳 一部一十二卷.”  道世(668년), 『法苑珠林』권29(『大正藏』53, 496c), “玄奘……奉詔譯經。兼敕令撰出西域行傳一十二卷.” 35세는 현장이 귀국하기 9년 전인 636년이어서, 뭔가 필사 과정에서의 착오인 듯하다.

전체 100권 가운데 30여 권이 번역된 시점이라면, 『유가론(瑜伽論)』이 한역된 647년 5월에서 648년 5월 사이, 아마도 647년 하반기 무렵이 아닌가 한다. 현행본 『속고승전』권4에는 현장과 범승 나제(梵僧 那提) 두 역경승의 전기가 실려 있지만, 나제(那提)는 655년에 중국에 왔기 때문에, 흥성사본 『속고승전』에는 오직 현장의 전기만 있다.14) 1 藤善眞澄, 2002, 앞의 책, 182-183쪽.

그렇다면 도선은 현장의 전기를 위하여 『속고승전』권4를 전부 할당할 정도로 현장의 전기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성사본의 현장전A는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된 현행본 현장전B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성립된 만큼, 양자는 내용도 상당 부분 다르다. 현장전B가 현장전A를 저본으로 하되, 648년 이후 현장 입적 시까지는, 현장 입적 직후에 명상이 찬술한 현장의 행장을 참조하면서, 도선 자신이 입수한 자료를 가지고 수정 보완하였으며, 다시 도선 입적 후에 누군가가 번천(樊川)으로의 현장 묘 이장 사실을 추기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현장전B가 648년 이후 현장의 행적을 전적으로 추가하였을 뿐 아니라, 645년 이전 현장의 인도 구법 활동에 대한 서술도 대폭 수정하였다.15)  1 藤善眞澄, 2002, 위의 책, 240쪽, “當今正翻瑜伽師地卅餘卷 其論梵本 可十萬偈 若度唐文 應出百卷. 春秋三十有五 年德俱俱盛 自吐新文 請益之徒 後進非少 自應別紀 故不敍之.”

오히려 현장전A는 서역기보다 불과 1년 남짓 뒤에 찬술되었다는 점에서, 공적인 지리지이기 때문에 서역기에서 충분히 서술할 수 없었던 현장의 행적을 원형에 가깝게 기술한 사료로서 주목할 만하다.

도선은 칙명으로 645년부터 현장의 역장에서 철문을 맡으며 현장과 교분을 쌓았다. 그는 내부적으로 교단의 숙정을 위하여 계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고, 세속 권력에 맞서 불교 교단의 자율성을 변호하였으며, 불교의 대중적 홍포를 위하여 불교적인 기적―그의 표현에 따르면 감통(感通)―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16)1 藤善眞澄, 2002, 위의 책, 184-185쪽.

 즉 도선은 역사적 사실 못지않게, 불교적 영웅상을 현장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도는 현장전A와 현장전B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세 번째 자료는 현장의 전기 자료 가운데 가장 방대하며 가장 상세한 자은전 10권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내용의 충실도라든가, 극적인 요소, 전아(典雅)한 문체 등에서 자은전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은전은 애초에 혜립(慧立)이 5권을 지어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그의 말년에 발굴한 것을, 혜립 사후인 688년에 언종(彦悰)이 다시 대폭 보완하여 10권으로 완성시킨 것이라고 한다.

원저자였던 혜립은 원래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645년 칙명으로 현장의 역장에서 철문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왕명으로 대자은사번경대덕(大慈恩寺?經大德)과 서명사도유나(西明寺都維那)를 차례로 역임한 바 있다. 특히 절대로 굴하거나 꺾이지 않는 성격에 정색하고 바른말을 잘하여, 고종(高宗) 때 자주 궐 안에 불려가서 도교와 대론(對論)하였으며, 궁중 관리가 책을 써서 불교를 비판하자 이를 꾸짖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17) 1 藤善眞澄, 2002, 위의 책, 202-244쪽에 興聖寺本 玄奘伝 전문을 첨부하고 아울러 현행본과 校合하였다.

657년과 658년에 있었던 불도대론(佛道對論)에서 혜립이 도사(道士)들을 논파한 활약상에 대해서는, 이를 직접 목도한 도선이 별도의 기록을 남긴 바 있으며, 이때 혜립의 활약상은 현장도 보고받았다고 한다.18) 1 山崎宏, 『隋唐佛敎史の硏究』(京都: 法藏館, 1967), 159-186쪽

자은전을 완성한 언종은 정관(貞觀) 말에 장안에 와서 현장의 문하가 되었다고 하므로, 혜립보다 연하로 추정된다. 그는 불교 교학보다는 철습학(綴習學)에 능하고 사필(辭筆)에도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혜립의 사후에 그 제자들이 언종에게 자은전의 차례를 정하고 서문을 쓰도록 주문하였던 것이다.19)  『宋高僧傳』권17 惠立(『大正藏』50, 813a)

이상에서 3대 텍스트의 편찬자와 편찬 시기 등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훑어보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변기, 도선, 혜립이 모두 645년 칙명으로 현장의 역장에서 철문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편집에 해당하는 철문 담당자는 모두 9명이었는데, 이들 세 사람 외에 정매(靖邁)도 나중에 『고금역경도기(古今譯經圖記)』를 편찬하면서 현장의 전기를 간략하게나마 서술하였다. 그리고 9인에 들지는 않지만, 언종 역시 현장의 역장에서 철습 즉 편집에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은 불교 교단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의 불교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항의하기도 하였다. 662년 출가자들도 세속의 국왕 및 부모에게 절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도선 등이 상서(上書)해서 그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며, 마침내 조칙으로 이를 파하도록 하였다.

이때 언종은 후대를 위하여 진(晉) 이후 당(唐)에 이르기까지 사문배속(沙門拜俗)의 논의를 정리하여 『집사문불응배속등사(集沙門不應拜俗等事)』6권(『대정장』52)을 편찬하였다. 혜립 또한 원래 성품과 기질이 용감해서 호법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불교도들에게 645년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당(唐) 왕조는 단명한 수(隋) 왕조를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에, 건국 초에는 수나라의 불교 보호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645년 현장이 장안으로 귀환하면서부터 불교에 대한 당조(唐朝)의 소극적인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해 4월 당조가 현장의 방대한 역경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것은, 불교도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변기조차도 평소에 ‘아름다운 시절’을 만났음을 가슴 뿌듯해하였다. 칙명으로 처음부터 역장에 참여한 승려들은, 그들에게 불교 중흥의 시대를 가져다준 현장을 다투어 영웅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다만 위의 네 자료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2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646년, 647년, 664년~667년, 688년에 각각 편찬되었기 때문에, 내용이나 표현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에는 7세기 후반 불교계의 동향, 특히 법상종의 성립 과정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3. 인도(印度) 구법과 ‘현장상’

1) 인도 구법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현장은 어려서 친형인 장첩법사(長捷法師)를 따라 낙양 정토사에서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11세에 동진 출가하였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를 유행하며 뛰어난 승려들에게 경론을 배운 끝에, 마침내 29세 되던 해에 장안에 머물면서 인도 구법 여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현장이 수학기에 만난 불교학자들은 견해가 저마다 분분하였으며,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경전조차 그 설이 모호하거나 서로 달랐기에, 현장은 이런 교리상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인도 구법을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구법의 구체적 동기와 관련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서역기에서 구법의 목적을 묻는 계일왕(戒日王, 尸羅阿迭多)의 질문에 현장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였을 따름이다.20) 1『集古今佛道論衡』권丁(『大正藏』52, 387c-389b). 李邕의 「道宣行狀」을 근거로 宋의 彦起가 찬술한 『釋門歸敬儀護法記』(『卍續藏』105)에 의하면, 慧立이 西明寺都維那가 된 657년에 道宣도 西明寺 上座가 되었다고 한다.

변기의 「서역기찬」에서도 자기주장만 고수하는 불교계의 폐단에 대하여, 불교의 근본적인 뜻을 명백히 하려는 목적에서 인도 구법 여행길에 올랐음을 거듭 진술하고 있다.21) 1『宋高僧傳』권4 彦悰(『大正藏』50, 728c-729a)

인도 구법과 관련하여 ‘유가(瑜伽)’와 ‘미륵’을 처음 주목한 것은 현장전A이며, 현장전B는 여기에 덧붙여 계현(戒賢)과의 대화에서 ‘유가 등의 논’을 배우고자 인도에 왔음을 강조하였다.22)  『大正藏』51, 894c.

그리고 자은전에서 비로소 장안을 출발하기 전부터 『십칠지론(十七地論)』, 즉 『유가사지론』(이하 유가론)을 가져와서 모든 의혹을 해석하고자 하였다는 유학의 목적이 보인다.23)  『大正藏』50, 222c

이와 같이 뒤로 갈수록 구법의 목적이 ‘불법’에서 ‘유가’로, 다시 ‘유가사지론’으로 특정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경향은 현장의 나란타사(那爛陀寺) 체류 시절 계현(??labhadra)과의 역사적인 만남에 관한 기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우선 서역기에서는 계현을 나란타사에 상주하는 수천 명의 학승 가운데 학덕이 뛰어난 8명의 학자의 하나로 언급하였을 뿐, 그의 저작은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24)  『大正藏』51, 923c-924a

 이와 관련하여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불지경론(佛地經論)』의 저자 문제는 주목할 만하다. 현장이 이 논서를 번역하면서 그 저자를 ‘친광(親光) 등’이라고 하였지만,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치는 티베트어 번역의 『불지경주(佛地經注)』(또는 『불지해설』)의 저자는 다름 아닌 계현으로 알려져 있다.25)  長谷川岳史, 2000 「玄奘における『仏地經論』․『成唯識論』譯出の意圖」『印度學佛敎學硏究』48-2, 55쪽 ; 袴谷憲昭, 1981「佛敎史の中の玄奘」『玄奘』(桑山正進․袴谷憲昭 共著), 大藏出版, 315쪽

이처럼 현장이 자신의 스승인 계현보다도 같은 호법의 문하의 친광을 『불지경론』의 주저자(主著者)로 지목한 이유는 앞으로 밝혀야 할 문제이다.

사실 현장의 수학 내용과 관련해서도, 현장이 멀리 중국에서 와서 ‘부처님의 심오한 법’을 배우고 있다는 말을 들은 동쪽 지방의 한 국왕이 그를 두세 번 초청한 적이 있었음을 언급하였을 뿐이다.26)  『大正藏』51, 927b

흥미롭게도 서역기에는 현장의 나란타사 체류와 관련해서 『유가론』을 아예 언급하지 않으며, 서역기 전체를 읽어 보아도, 무착(無着)이 미륵보살로부터 『유가론』을 들은 사실과, 진나(陳那)가 문수보살로부터 『유가론』 홍포를 권고 받은 일이 전부이다. 서역기가 646년 7월에 찬술이 완료된 데 비해, 『유가론』은 647년 5월에 가서야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서역기 편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유가론』이 그렇게 중요한 논서로서 부각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유가론』은 현장전A에 와서 좀 더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흥미롭게도 현장은 계현을 만나기 전에 이미 대각사에서 어떤 대승거사(大乘居士)로부터 『유가론』을 배운 사실이 현장전A에 처음 등장하여, 현장전B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27)  藤善眞澄, 앞의 책, 220쪽 ; 『大正藏』50, 451a, “時有大乘居士 爲奘開釋瑜伽師地.”

현장전A에서는 나란타사에 계일왕으로부터 봉호(封戶) 내지 십성(十城)을 공급받는 여러 논사 중 한 명이 계현인바, 그의 나이는 100세이며 계일왕으로부터 십성의 과세권을 받았다고 하였다.28)  藤善眞澄, 앞의 책, 223-225쪽

현장전B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절에는 지혜와 학식이 뛰어나서 세속의 군주로부터 봉호를 받는 대덕이 300여 명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106세의 계현이 대중으로부터 존중을 받아 정법장(正法藏)이라 불렸으며, 계일왕으로부터 10개의 성에 대한 과세권을 추가로 받는다고 하였다. 마중 나온 나란타사 승려 40명의 인도로 계현을 처음 만났을 때, 현장은 ‘유가 등의 논’을 배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서역기에는 나란타사에 학식이 뛰어난 8명의 학승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장전B에서는 그 대신 삼장(三藏)에 달통한 10인이 있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 공석이 된 1명의 자리에 현장이 거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란타사에서 계현으로부터 『유가론』 강의를 두 번 들은 사실은 현장전A와 현장전B가 같은데, 후자가 첫 번째는 15개월, 두 번째는 9개월에 걸쳐 강의를 들었으며 이후 5년 동안 조석으로 연구하였다고 좀 더 강조하였다.29)  『大正藏』50, 451c-452a

이와 같이 현장전A와 현장전B는 현장이 보드가야 대각사의 대승거사와 나란타사에서 계현으로부터 『유가론』을 배웠음을 분명히 한 가운데, 후자가 계현을 좀 더 부각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유가론』 및 계현과의 인연을 더욱 강조한 것은 자은전이다. 흥미롭게도 현장전A?B에서 언급한, 대각사의 대승거사가 현장을 위하여 『유가론』을 풀이해 주었다는 사실을 자은전에서는 완전히 누락시켰다. 또 계현의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현장의 도래(到來)를 예언한 이야기는 현장전B에 처음 등장하는데, 자은전에는 문수보살과 더불어 관자재보살과 자씨보살이 등장하며, 이들이 그냥 ‘법(法)’이 아니라 ‘정법(正法) 유가론’의 유통을 당부하였다고 하였다.

또 『유가론』 강의를 들으면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데, 현장은 모두 세 번을 청강하였다고 한다.30)  『大正藏』50, 451c-452a

이외에도 자은전에는 현장이 인도에 간 목적이 『유가론』에 있다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사후에 도솔천에 올라가서 『유가론』 강의를 듣겠다고 할 정도로 『유가론』을 강조하고 있다. 현장과 『유가론』의 관계는 자은전의 원저자인 혜립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법사)가 중천축(中天竺)의 나란타사에 이르러 대법사를 친견하였다. 그는 시라발타(尸羅跋陀)라 하며 중국에서는 계현(戒賢)이라고 부른다. 그는 대소승(大小乘)에 두루 통하며, 삼장과 사(四)베다에도 능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십칠지론(十七地論)에 특히 정통하였다. 이 논은 모든 경의 으뜸이어서 오로지 이것만을 강의하였다. 십칠지론은 원래 미륵보살이 만든 것으로서 대승을 포섭하는 근간인바, 바로 법사가 출발하기에 앞서 그토록 배우기를 기원한 것이다. 인도의 16대국에서 이 논에 귀의하지 않은 자가 없고 강의를 듣는 자가 언제나 만 명을 넘었다. 법사는 그곳에 가서 한번 대하자 너무나도 기뻐하면서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31)  『大正藏』50, 278c

확실히 자은전은 현장의 인도 구법과 관련하여 『십칠지론』(『유가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현장이 스리랑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곳 대덕들이 『유가론』을 잘 알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스리랑카를 가지 않은 것은 정정불안과 더불어 그곳에서 온 승려들이 계현만큼 『유가론』을 잘 해석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32)  『大正藏』50, 242a

현장이 귀국을 결심하고 계현과 나눈 대화에서도, 스승으로부터 『유가론』을 배워서 여러 가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33)  『大正藏』50, 246b

이상에 살펴보았듯이, 서역기에서 현장전A와 현장전B를 거쳐 자은전으로 갈수록, 현장의 구법 목적이 대승을 포섭하는 최고의 논서이자 정법이라는 『십칠지론』(『유가론』)에 있었다는 점과,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준 나란타사의 계현을 인도 최고의 논사로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현장이 629년 장안을 출발하기 전에 과연 『십칠지론』(『유가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십칠지론』은 정확하게 말하면 『유가론』의 부분역(部分譯)이다. 인도에는 오분(五分)으로 구성된 『유가론』 완본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현장 이전에 중국에서 완역된 적은 없었다.

진제(Param?rtha, 499~596)가 번역한 『십칠지론』과 『결정장론(決定藏論)』은 각각 『유가론』의 첫 번째 본지분(本地分)과 두 번째 섭결택분(攝決擇分)에 상당하며, 담무참(曇無讖)의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본지분 중에서도 보살지만 번역한 것이다. 나머지 섭석분(攝釋分), 섭이문분(攝異門分), 섭사분(攝事分)은 아예 번역조차 시도되지 않았다. 분량상 『십칠지론』은 『유가론』 100권 가운데 절반인 50권에 상당하는 분량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진제는 10분의 1 정도인 5권만 번역한 채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그마저도 일찍 산일(散逸)되었기에, 당시 중국 불교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도 못하였다. 어느 자료에서도 현장이 인도 구법 이전에 『십칠지론』을 배웠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일찍이 우이 하쿠주(宇井伯壽)는 중국에서는 십칠지경 혹은 십칠지론의 이름은 알려져 있었지만,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은 현장에 의해 비로소 중국에 알려졌다고 단언하였다.34)  宇井伯壽, 『瑜伽論硏究』(東京: 岩波書店, 1958), 36쪽.

현장이 인도 구법 여행을 감행한 주된 동기를 『십칠지론』에서 구하려는 기왕의 통설을 따를 경우, 인도로 출발하기 이전에 현장이 『십칠지론』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입증할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근래에 현장과 『십칠지론』 사이의 읽어버린 고리로서 중인도 출신의 역경승 파파(波頗, 波羅頗迦羅蜜多羅光智 565~633)를 주목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파파에 관한 기록은 도선의 『속고승전』권3 역경편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그는 나란타사 계현으로부터 『십칠지론』을 배웠으며, 나중에 서돌궐을 거쳐 당의 사신과 함께 626년 12월경 장안에 도착하여 국가의 지원하에 흥선사(興善寺)와 승광사(勝光寺)에 머무르며 역경 사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35) 『續高僧傳』권3 波羅頗迦羅蜜多羅(『大正藏』50, 440a), “十二年末復南遊摩伽陀國那爛陀寺, 值戒賢論師盛弘十七地論, 因復聽採, 以此論中兼明小教.”

이 기록에 근거하여 쿠와야마 쇼신(桑山正進)은, 파파가 장안에 도착한 해는 626년 겨울이며, 현장은 627년 가을에 장안을 출발하였으므로, 현장이 파파를 통하여 인도로 가는 여행로와, 나란타사의 계현 및 『십칠지론』 등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36)  桑山正進, 「玄奘三藏の形而下」『玄奘』(桑山正進․袴谷憲昭 共著, 東京: 大藏出版, 1981), 49-57쪽.

그러나 파파의 전기 바로 뒤에 나오는 혜색전(慧?傳)에는 파파가 장안에 온 시기를 정관(貞觀) 원년(627)이라고 하였다.37)   『大正藏』50, 441b

혜색은 파파의 역장에 참여하였는데, 파파가 한역한 『반야등론(般若燈論)』에 혜색이 부친 서문에서도 정관 원년설을 언급하고 있다.38)  『大正藏』30, 51a

이것은 파파가 한역한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과 『보성경(寶星經)』에 각각 부친 이백약(李百藥)의 서문과39) 법림(法琳)의 서문에서도40) 거듭 확인된다.  39) 『大正藏』31, 590a  40) 『大正藏』13, 536c

따라서 파파가 장안에 온 해는 정관 원년 11월(또는 12월)이 분명하므로, 쿠와야마의 견해는 성립하기 곤란하다.

또한 파파가 계현으로부터 『십칠지론』을 배웠다는 구절에 주목하여, 그를 유가파 승려로 분류하기도 한다.41)  羽溪了諦 해설, 『佛書解說大辭典』권9, 80c-81d 참조.

물론 파파가 630~633년 사이 한역한 『대승장엄경론경』13권(『대정장』31)은 유가학파의 대표적 논서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비슷한 제목의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과는 전혀 별개의 저술로서, 무착이 미륵보살의 뜻을 받아서 저술한 5부 대론의 하나이며, 『유가론』본지분 가운데 보살지와 장제(章題) 및 그 취급 항목에 있어서 공통성이 현저하여, 두 논서의 선후 관계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42)  小谷信千代, 1980 「瑜伽師地論と大乘莊嚴經論」『仏敎學セミナー』31, 32-34쪽 참조

그런데 파파는 유가학파와 더불어 중관학파의 논서도 한역하였다.

즉 그가 승광사에서 번역한 『반야등론』은 청변(淸辯)이 용수(龍樹)의 『중론(中論)』본송(本頌)을 해석한 것으로서 당파성이 매우 두드러져서, 외도와 소승은 물론 유가파(특히 安慧), 심지어 같은 중관파의 불호(佛護)까지 논박할 정도로 중관학파의 정통 사상을 고수하려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43)  『佛書解說大辭典』권9, 80-81쪽

더욱이 파파가 나란타사 계현으로부터 십칠지론을 배웠다는 이 구절은, 파파전(波頗傳)의 다른 내용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서 아무래도 현장이 장안으로 귀환하고 난 이후의 추기(追記)가 아닌가 한다. 파파의 행적에 대하여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현장이 인도 구법 여행을 감행한 주된 동기를 십칠지론에서 구하려는 전통적인 견해는 아무래도 현장전B와 자은전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필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왜 시기가 지날수록 현장의 구법 동기를 『유가사지론』에서 찾으려고 하였는가에 의문을 가지며,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현장전과 자은전이 찬술되던 시대의 불교계 상황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세 차례 논쟁과 현장
현장의 구법 활동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현장이 경험한 세 가지의 대론(對論)이다. 대론이 불교계 내부에서 일어났든, 불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서 일어났든 간에, 그것은 인도 사회에서는 일상적이었다. 간혹 세상의 이목을 끌 만한 논쟁을 세속 군주가 주재하기도 하였는바, 그 결과에 따라서 논쟁 당사자의 훼예(毁譽)는 물론 그가 속한 특정 집단의 성쇠와 존폐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현장 역시 인도에 머무를 때 대론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지만, 서역기에는 현장이 연루된 토론이나 논쟁을 일절 소개하지 않고 있다. 지리지라는 책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논쟁을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은, 현장이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에 찬술된 현장전A에 처음으로 순세외도(順世外道)와의 논쟁을 언급하기 시작하여, 현장전B를 거쳐 자은전으로 갈수록 세 가지 논쟁에 대한 서술이 분량도 많아지고 극적인 요소도 갖추게 되었다. 기왕의 연구자들은 이들 논쟁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제하에서, 현장이 인도 불교사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거나,44) 인도 불교에서 현장이 차지하는 위상을 언급하였다.45)  44) 光中法師 編著, 1989, 『唐玄奘三藏傳史彙編』, 臺北: 東大圖書公司, 584-596쪽  45) 結城令聞, 1956, 「玄奘とその學派の成立」『東洋文化硏究所紀要』11

그러나 필자는 세 가지 논쟁에 대한 기술이, 7세기 중후반 현장학파가 현장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사실보다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현장의 전기에 따라 세 가지 논쟁이 어떻게 다르게 기술되었으며, 그 차이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외도(外道)와의 논쟁과 ‘삼신론(三身論)’
서역기에서는 불교도와 외도 사이에 개인의 목숨 내지 교단의 존폐를 결정한 숱한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간다라 지방에서 세친(世親)의 스승이자 ??비파사론(毗婆沙論)??의 저자인 여의논사(如意論師)의 유적지를 방문하였을 때는, 여의논사와 백 명의 외도 사이에 있었던 목숨을 건 대논쟁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특히 이 논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스승을 위하여 세친이 외도를 굴복, 패퇴시켰음을 대서특필하면서 “패거리를 이루는 무리와는 대의를 다투지 마라. 미혹한 자들 속에서는 정론을 말하지 마라.”라는 여의논사의 말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46)  『大正藏』51, 880c-881a

이런 식의 기록 중에는, 불교를 없애려는 국왕과 외도에 맞서 오히려 외도들을 항복시킨 호법의 이야기라든가(권5), 나란타사까지 와서 자기의 스승인 호법과 논쟁을 요구한 남인도 출신의 외도를 논파하고 왕으로부터 마을을 기증받아 가람을 세운 계현의 무용담도(권8) 전한다.

서역기에는 나란타사에 머물던 현장이 대대로 외도를 신봉한 동자왕(拘摩羅)의 거듭된 초청과 스승인 계현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들여 오늘날의 아삼 지방을 방문한 일을 기록해두었다. 그런데 아삼 지방에서 현장이 구체적으로 불교를 어떻게 전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47)  『大正藏』51, 927b-c

외도, 즉 순세외도와의 논쟁을 처음으로 언급한 자료는 현장전A이다. 그런데 4대(흙?물?불?바람)가 만물의 인자(因子)라는 순세외도의 주장은 있지만, 이러한 주장을 논파하는 현장의 견해는 드러나 있지 않다.48) 藤善眞澄, 2002, 앞의 책, 224쪽.

현장전B에는 이 논쟁이 좀 더 드라마틱하게 서술되어 있다. 먼저 순세파(順世派, 쾌락주의)의 외도가 나란타사를 찾아와 논란을 요구하며 40여 조목을 써서 절 문에 걸고 자신을 이기면 목을 내놓아 사과하겠다고 호언하였는데, 현장이 그를 굴복시키고 그의 도움을 받아 ‘제악견론(制惡見論)’을 지었다고 한다.

그 직후 현장은 동자왕의 초청을 받고 불교의 근본을 유통시키고자 이도(異道)를 숭상하는 동인도 아삼 지방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사악한 무리를 몇 마디 말로 제압한 다음 부처님의 공덕을 질문하는 왕에게 ‘삼신론’ 300송(頌)을 지어 바치자, 동자왕이 이를 받들어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49)  『大正藏』50, 453a

그런데 현장이 동자왕을 위하여 지었다는 ‘삼신론’은 외도와의 논쟁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은 듯하다. 현장전B에서는 외도의 주장을 논파한 현장의 견해는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자은전은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앞서의 삼신론 관련 내용을 완전히 생략하는 대신, 순세파 외도가 내건 40여 조의 의의문(議疑文)을 구체적으로 논파한 내용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다만 현장전A와 현장전B에 따르면, 순세외도는 4대(四大)가 사람과 만물의 인자임을 주장하였는데, 자은전에서 현장은 순세파가 아니라 여섯 외도 전부를 비판하고 있다.

 즉 여섯 외도 가운데 포다외도(?多外道, Bh?ta), 이계외도(離繫外道, Nirgrantha), 누만외도(??外道, Kapali), 수징가외도(殊徵伽外道, Jutika)에 대하여는, 그 무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판하였으며, 나머지 수론외도(數論外道, S?mkhya)와 승론외도(勝論外道, Vai?esika)에 대하여는 그 교리를 자세하게 논파하였다.50)  『大正藏』50, 245a-b

이처럼 순세파의 질의와 여기에 대한 현장의 반론이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은전에 실린 현장의 반론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며, 그것이 과연 적절하였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② 대-소승 시비와 ‘제악견론(制惡見論)’
서역기는 인도 불교 교단을 크게 대승과 소승으로 구분하되 가능하면 부파까지 밝혀 두고자 하였다.51)  이태승, 2004, 「구법승이 본 인도 불교의 소승 부파와 대승」『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 불교 유적의 연구』(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인문사회 분야 지원 사업 제1차년도 보고서), 29-38쪽 참조

이와 관련하여 서역기에는 대승과 소승 논사들 간의 극적인―대부분 대승 측의 승리로 끝난―논쟁을 종종 소개하였는데, 정작 현장 자신이 간여한 논쟁은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그런데 654년 2월 귀국하는 인도 승려 편에 그가 마하보리사[大覺寺]의 삼장법사 혜천(慧天)에게 부친 답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준다.

예전에 제가 인도에 갔을 때 모습을 뵈었으며, 곡녀성(曲女城) 대회에서도 직접 논(論)을 주고받았습니다. 여러 군주와 수많은 군중을 마주하고서 그 심천(深淺)을 정하면서, 저는 대승의 뜻을 주장하였고, 법사께서는 소승의 종지를 내세워서, 오고 가는 사이에 목소리가 커졌지만, 오직 정리(正理)에만 힘썼지 인정은 돌보지 않았습니다.……이치가 주밀(周密)하고 말이 지극하기로는 대승만 한 것이 없는데, 아직도 법사께서 깊이 믿지 않으시니 한스럽습니다.52)  『慈恩傳』권7(『大正藏』50, 262a)

현장이 귀국하기 직전에 계일왕이 소집한 대규모 무차대회에 참가하여, 대각사의 소승 승려 혜천과 인정사정없이 언성을 높여 가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일 터인데, 현장의 편지에서 보이듯이, 논쟁에 패한 소승 승려가 대승으로 전향하는 등등의 극적인 결말은 아예 없었다.

서역기에서는 이 논쟁은 다루지 않았지만, 계일왕이 곡녀성 교외에서 개최한 무차대회에 현장이 초청을 받아 참여한 사실은 언급하였다. 이 대회에는 인도 각지에서 20여 명의 군주, 승려들과 바라문들, 그리고 수많은 관리와 병사들이 운집하였다. 여기서 승려들만 환대받는 것을 시기한 외도들이 화재를 일으켜서 소란스러운 틈에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였으며, 외도들을 죽이자는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계일왕은 자객만 처벌하고 5백 명의 바라문은 국외 추방시켰다. 3주간 진행된 이 대회는 어디까지나 제석천으로 분장한 계일왕이 주인공이었으며, 극적인 사건을 통해 그의 자비심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53)  『大正藏』51, 895a-c

그런데 현장전A에서는 계일왕이 5년마다 대시(大施, 무차대회)를 개최하였고 귀국길에 오른 현장에게 많은 물품을 공급한 사실은 언급하였으나, 현장이 토론에 참여하였다는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보이지 않는다.54) 藤善眞澄, 2002, 앞의 책, 225쪽, 228-229쪽

현장전B는 현장을 일약 무차대회의 영웅으로 꾸미고자 전혀 새로운 삽화를 추가하였다. 현장이 혜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논(論)의 정식 명칭이 ‘제악견론’이었음을 밝히는 한편, 이 논서의 등장 배경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즉 어떤 남인도 왕의 관정사(灌頂師)가 소승 정량부(正量部)를 연구하여 ‘파대승론(破大乘論)’ 700송을 짓자, 동인도의 소승 불교도들이 이를 떠받들었다. 당시 동인도를 정벌 중이던 계일왕은 대승과 소승의 우열을 가리고자 나란타사에 승려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계현이 해혜(海慧), 지광(智光), 사자광(師子光), 현장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현장은 출발에 앞서 순세외도의 도움을 받아 ‘파대승론’을 논파하는 ‘제악견론’ 1,600송을 지어 계일왕에게 제출하였다.

계일왕은 이 논서를 검증하고자 대규모 법회를 곡녀성에서 개최하였다. 사방에서 곡녀성에 모인 만 명 가운데 진리를 논할 수 있는 사람만 수천 명이었지만, 18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감히 따지는 이가 없었다. 이에 왕이 감탄하여 상으로 은전 3만 냥과 금전 1만 냥, 주단 1백 구를 현장에게 선물하였으며, 승려들은, “불법이 중흥하였다”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왕은 다시 75일간의 무차대회를 열어 코끼리를 비롯한 많은 금품을 귀국하는 현장에게 보시하였다는 것이다.55)  『大正藏』50, 452c-453c

서역기에서 언급한 화재와 국왕 암살 미수 사건, 그리고 현장의 편지에서 자술(自述)한 소승 혜천과의 감정 상할 정도의 논쟁 등이 현장전B에서는 빠졌다. 대신 18일 동안 아무도 감히 따지려 하지 않았다든가, 왕공대신들이 막대한 금품을 현장에게 선물하였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로써 성대하게 치러진 곡녀성 대회의 영웅은 인도 최고의 군주인 계일왕에서 당나라 승려인 현장으로 교체되었다.

자은전은 현장전B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현장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장황하게 그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 대신 중요한 몇 가지만 간추려보면, 현장의 ‘제악견론’은 소승의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겨냥한다는 점, 곡녀성 대회의 목적이 소승과 외도들이 대승을 비방하는 마음을 끊도록 하는 데 있음을 계일왕이 분명히 한 점, 대회에 나란타사의 승려 천여 명이 고승 대덕 3천여 명 및 외도 2천여 명과 함께 참여한 점, 자신의 논리에 잘못이 있으면 죽음으로써 사죄하겠다고 현장이 선언한 점, 소승과 외도들이 현장 암살을 모의하였고 이를 눈치 챈 계일왕이 강력하게 으름장을 놓은 점, 18일간의 회기가 끝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사도(邪道)에서 정도(正道)로,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향한 점, 마침내 현장을 대승교도들은 대승천(天), 소승교도들은 해탈천(天)이라 칭송하였다는 점 등이다.56)  『大正藏』50, 244c-248a

요는 계일왕이 개최한 곡녀성 대회에서 현장이 목숨을 걸고 ‘제악견론’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대승으로 전향하였는바, 그 과정에서 외도들이 암살하고자 한 인물도 계일왕이 아니라 현장으로 바꿔치기 되었다.

③ 공유논쟁(空有論爭)과 ‘회종론(會宗論)’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분파인 유가파(瑜伽派)와 중관파(中觀派) 사이의 이른바 공유논쟁과 관련하여, 3대 문헌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우선 서역기에서는 크리슈나 강 어귀의 청변논사(淸辯論師)는 용수(龍樹)의 학문을 계승하였는데, 그가 마가다국으로 호법(護法)을 찾아가 만날 것을 요청하였지만, 대각사에 머물던 호법이 수행에 바쁘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바람에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57)  『大正藏』51, 930c-931a

면담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청변과 호법 사이의 논쟁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8)   深浦正文, 1954 『唯識學硏究』上(敎史論), 京都: 永田文昌堂, 133쪽, 138-149쪽

물론 양자가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의 쟁론은 없었겠지만, 서역기는 두 사람으로 상징되는 중관파와 유식파 사이에 쟁론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청변은 적극적이었고 호법은 소극적이었다고 보일 수도 있는 이 사안에 대해, 현장전A와 현장전B에는 아예 청변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서역기에서는 호법과의 만남에 실패한 청변이 의혹을 해결하고자 커다란 바위산에 들어가 미륵의 하생(下生)을 기다린다고 하였다.59)  『大正藏』51, 931a

자은전은 청변이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대목만 간단히 언급하였다.60)  『大正藏』50, 241b

그 대신 서역기와 현장전A에서 언급하지 않은 현장 자신의 공유논쟁 체험이 이후 자료에는 차례로 부각되었다. 현장전B에 따르면, 애초에 나란타사의 대덕인 사자광이 『중론』과 『백론(百論)』의 종지를 세워서 『유가론』등의 교의를 논파하자, 현장은 성인(聖人)들이 지은 논은 서로 다른 점이 없으며 단지 이를 배우는 학자들의 향배가 다를 뿐이라면서 ‘회종론’ 삼천송을 지어서 스승인 계현에게 바쳐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61)  『大正藏』50, 452c

자은전은 여기에 몇 가지 내용을 덧붙이고 좀 더 윤색을 가하였다. 즉 현장이 스승인 계현의 지시를 받아 『섭대승론』과 『유식결택론』을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점, 현장이 사자광의 좁은 사고방식을 일깨우며 그에게 질문하였지만 사자광이 번번이 답을 못하자 학승들이 차츰 현장 주위에 몰려들었다는 점, 이에 사자광은 부끄러워 나란타사를 떠나 마하보리사(大覺寺)로 가서 전날의 치욕을 씻고자 다른 인도 승려를 보내어 현장과 논쟁토록 하였지만 되레 현장의 명성만 드높이고 말았다는 점 등이다.62)  『大正藏』50, 244b-c

이들 자료를 보면, 현장의 유학 당시 인도 불교계에 공유논쟁이 실제로 있었으며, 현장은 중관과 유가의 소통을 강조한 듯하다. 현장전과 자은전에 모두 인용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가 당시 불교계의 동향과 관련하여 ‘공유시비(空有是非)’를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당삼장성교서」는 648년 6월 『유가론』 번역 직후에 현장의 특별한 청원을 받아 당 태종이 직접 지었을 뿐 아니라, 태종 자신이 직접 필사하고 조칙으로 그때까지 현장이 번역한 모든 경전의 앞머리에 삽입하게 한 문장이기도 하다. 또한 649년 11월에 현장이 번역한 『불지경론』에서도 불멸 천년(佛滅 千年) 이후에 공유이론(空有異論)이 일어났다고 언급하고 있다.63)  『佛地經論』권4(『大正藏』26, 307a)

현장에 의하여 인도 대승불교의 ‘공유쟁론’이 소개된 이후, 중국 불교계에서 점차 이를 중요한 사상사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현장의 정통을 자처하는 기(基) 이래의 자은학파(慈恩學派)가 청변?호법의 공유쟁론에 대하여 호법의 학설이 정의임을 현양하려고 하였으며,64) 서명학파(西明學派)를 개창한 원측(圓測, 613~696)은 현존하는 모든 저술에서 ‘용맹종(龍猛宗)?청변종(淸辯宗)’과 ‘미륵종(彌勒宗)?호법종(護法宗)’의 차이점을 다루고 있다.65)  64) 玄奘이 번역한 淸辯의 『掌珍論』에 대하여 法相宗 측에서 이에 대한 註疏가 많이 나왔는데, 이러한 동향은 護法의 불교를 선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平井俊榮, 1976, 『中國般若思想史硏究』, 東京 春秋社, 237쪽). 65) 『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贊』, 『仁王經疏』, 『解深密經疏』(이상 『韓國佛敎全書』제1책 수록)는 물론, 최근에 알려진 圓測의 대표작 『成唯識論疏』(고영섭, 1999, 『文雅大師』부록, 佛敎春秋社, 259-337쪽)에서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화엄종의 법장(法藏, 643~712)도 그의 주요 저작에서 청변과 호법에서 지광과 계현으로 이어지는 공유쟁론을 중요하게 언급하였다.66)  智光과 戒賢 사이의 空有論爭이 오직 華嚴宗 法藏의 저술에서만 보인다는 점에 의문을 품고, 이를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이 소식을 法藏에게 전한 인도 승려 디바카라(Divākara, 日照)의 과장이든가, 아니면 디바카라에 가탁한 法藏의 제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深浦正文, 앞의 책, 149-173).

따라서 3대 문헌은 공유쟁론에 대한 현장 문하의 점증하는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장을 뒤이어 7세기 후반 인도를 여행한 의정(義淨, 635~713)이 인도의 대승불교를 중관과 유가로 나누어 보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역기는 석가모니 이래 세친 등의 대승논사를 거쳐 호법과 계현에 이르기까지의 불교 역사상의 주요한 논쟁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현장전A와 현장전B 및 자은전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현장이 세 차례의 사상 투쟁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고 과시하였다. 세 차례 논쟁이란, 첫째, 불교와 외도 사이의 논쟁이며 둘째, 같은 불교 안에서 대승과 소승 사이의 논쟁이며 셋째, 같은 대승 안에서 유가와 중관 사이의 공유논쟁을 말한다.

현장은 호법에서 계현으로 이어지는 유가파를 계승하였으므로, 현장의 승리는 궁극적으로 유가 진영의 승리를 의미하였다. 이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논쟁에서 현장이 지었다는 ‘제악견론’ 및 ‘회종론’은 현장의 저술로서 그의 사상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지만, 그 내용이 어디에서도 인용되거나 한역(漢譯)되지 않았다.

이는 세 차례의 논쟁과 현장의 눈부신 승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나중에 그의 문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화임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현장전B와 비슷한 시기에 찬술된 명상(冥祥)의 현장 행장과 정매(靖邁)의 『고금역경도기(古今譯經圖紀)』권4 현장전도 이들 논쟁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즉 현장 문하는 세 차례의 논쟁을 통하여 영웅적인 현장상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3) 미륵신앙
3대 문헌이 현장의 인도 구법을 기술하면서, 뒤로 갈수록 현장과 『유가론』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한데, 이와 아울러 미륵신앙을 강조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역기는 지역별로 현장의 여정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녀성을 출발하여 코샴비(?償彌)에 이르는 여정에서 맹수와 들짐승의 위험 외에 도적떼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1년 정도 뒤에 찬술된 현장전A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귀국을 앞두고 인도의 여러 불적(佛跡) 순례를 거의 마칠 무렵, 갠지스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현장은 일행 30여 명과 함께 추적(秋賊)에게 사로잡혔다. 도적들은 일행 중에서 오직 현장만을 산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을 때, 일행들이 도적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현장은 고국 생각을 하면서 담담하게 운명을 체념하였다고 전한다.67)  藤善眞澄, 앞의 책, 228쪽

현장전B는 이 이야기를 대폭 각색하였다. 여행을 한 시기도 인도 체류 후반부가 아니라 초기라 하였으며, 일행도 80여 명으로 늘어났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현장이 마지막 순간에 자존미륵여래(慈尊彌勒如來)를 떠올리면서 죽음을 맞이하려 하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도적들의 배가 전복되고 모래폭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으며, 그제야 일행들이 도적들을 설복하였으며, 참회한 도적들은 현장에게서 계(戒)를 받았다는 것이다.68)  『大正藏』50, 449c

자은전은 이를 더욱 종교적인 기적담으로 발전시켰다. 도적들은 시바의 아내인 두르가 신(神)을 숭배하는 무리로서 현장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고자 하였다. 일행들이 현장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도적들은 듣지 않았다. 현장은 최후를 직감하고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염(念)하면서, 내세에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로부터 『유가론』의 강의를 듣고 깨달음을 이룬 다음 다시 이 땅에 태어나 도적들을 선행으로 인도하겠다고 간절히 기원하였다.

이처럼 현장이 미륵보살을 염하여 그의 몸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 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이 불어 도적들의 배가 전복되고 모랫바람에 나무가 부러졌다.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에 도적들이 놀라서 참회하고 현장에게 오계(五戒)를 받자, 마침내 폭풍이 잠잠해졌으며 도적들이 백배사례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69)  『大正藏』50, 233c-234b

이처럼 서역기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사건이지만, 현장전A와 현장전B를 거쳐 자은전으로 갈수록, 갠지스 강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절체절명의 순간과, 현장이 미륵보살을 염함으로써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도적을 참회케 하였다는 식으로 점점 극화되었다.

현장이 나란타사에서 스승 계현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계현의 꿈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꿈 이야기는 현장전A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현장전B에서 비로소 등장하였다. 즉 현장이 계현을 처음 만났을 때, 계현은 3년 전에 있었던 신비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현이 심한 병고로 죽기를 작정하자, 꿈에 금빛 나는 만수실리(曼殊室利, 文殊菩薩)가 나타나, 3년 후에 중국 승려가 도착할 예정이니, 그에게 ‘법(法)’을 베풀고 그가 다시 법을 세상에 유통시키면, 계현의 죄는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은전은 꿈에 나타난 천인(天人)이 문수보살만이 아니라 관자재보살과 미륵보살이 함께 나타난 것으로 확대시켰으며, 같은 꿈속에서 계현은 내세에 도솔천의 미륵보살 곁에 다시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70)  『大正藏』50, 236c-235a

자은전에는 이외에도 미륵상생 신앙이 도처에서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7세기 후반 현장계(玄?系)의 미륵상생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4. 현장계의 형성과 분화

1)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한역(漢譯)과 ‘유가론학파’

현장은 17년간의 인도 구법을 마치고 마침내 645년 정월 대?소승의 범(梵)본 총 657부를 가지고 장안으로 귀환하였으며,71) 이후 연구와 저술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온 경전을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梵本 657부의 내역은, 大乘經 224부, 大乘論 192부, 上座部의 경․율․논 15부, 大衆部의 경․율․논 15부, 三彌底部의 경․율․논 15부, 彌沙塞部의 경․율․논 22부, 迦葉臂耶部의 경․율․논 17부, 法密部(=法藏部)의 경․율․논 42부, 說一切有部(=薩婆多部) 경․율․논 67부, 因明論 36부, 聲明論 13부이다.

현장의 번역은 번역의 분량과 원칙 및 그 내용에 있어서 동아시아 불교사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번역의 분량을 보면, 현장은 귀국 이후 664년 2월 입적할 때까지 약 20년에 걸쳐서 5일에 한 권꼴로 도합 74부 1,335권을 한역하였는데,72) 이는 역경 사상 전무후무하다.  玄奘이 한역한 경전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玄奘傳B은 73부 1,330권(『大正藏』50, 458a), 慈恩傳은 74부 1,335권(『大正藏』50, 277a). 『古今譯經圖紀』권4는 75부 1,335권(『大正藏』55, 367c), 『大慈恩寺三藏法師行狀』은 75부 1,341권(『大正藏』50, 219b)이라 하였다. 『開元釋敎錄』권8은 76부 1,347권이라 하였다(『大正藏』55, 555b-557b). 『開元釋敎錄』의 수치는 『大唐西域記』12권을 포함한 결과이며, 또 『能斷金剛般若經』1권은 나중에 번역한 『大般若經』에 그대로 편입되었므로, 이 둘을 빼고 계산하면 玄奘이 번역한 전체 수는 慈恩傳에서 말한 74부 1,335권과 맞아떨어진다(松本文三郞, 1926 『東洋文化の硏究』, 東京: 岩波書店, 46-51쪽).

구마라집(鳩摩羅什) 등의 5대 번역승이 번역한 총합 469부 1,222권보다 많으며,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 언급한 일체경(一切經) 1,124부 5,048권의 4분의 1을 상회한다.73)  松本文三郞, 1926 위의 책, 7-12쪽

실로 경이로울 정도로 방대한 분량은, 현장이 처음부터 기왕의 한역경전을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역경 사업을 염두에 두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현장은 철저하게 번역의 원칙을 고수하였는데, 이 점은 현장의 전기 자료에 인용된 현장 자신의 말에서 거듭 확인된다. 그는 되도록 인도식 발음에 충실하도록 용어의 통일성을 기하였으며, 최대한 원전의 뜻을 살리고자 직역을 원칙으로 하였다. 직역을 원칙으로 함으로써, 그는 인도 불교를 중국적으로 변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이해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런 점에서 현장은 불교의 중국화라는 거대한 역사적 조류에 맞서 이를 되돌리려고 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74)   結城令聞, 1971, 「初唐佛敎の思想史的矛盾と國家權力との交錯」『東洋文化硏究紀要』25.

현장은 번역을 통하여 한역불교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의 역장에 참여한 도선이 현장의 역경 활동에 대하여 내린 총평 가운데 “근본을 잡고서 전날의 잘못을 바로잡았다.”75)라고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大正藏』50, 459c.

실제로 현장은 655년 제자들에게 명하여 구역(舊譯)경전의 강경(講經)을 금지시키려다, 기성 불교승려들의 반발 때문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기도 하였다.76)  『續高僧傳』권27 法沖(『大正藏』50, 666c),“又三藏玄奘 不許講舊所翻經. 沖曰, 君依舊經出家, 若不許弘舊經者, 君可還俗 更依新翻經出家, 方許君此意. 奘聞遂止, 斯亦命代弘經護法强禦之士 不可及也.” 法沖은 『楞伽經』을 매개로 初期禪宗의 一派인 南天竺一乘宗을 형성한 인물이다[鄭性本,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서울: 민족사, 1991), 120쪽].

이러한 갈등을 무릅쓰고 현장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번역한 새로운 한역경전들을 기왕의 한역경전들과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7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불교는 현장이 새로 번역한 경전에 근거하는 신역불교와, 종래의 구역―구마라집, 진제 등의 번역―을 고수하려는 구역불교로 크게 나누어졌으며, 그 사이에 사상적 갈등은 불가피해졌다.

현장의 번역이 기왕의 번역과 또 다른 점은, 그가 인도 유가계(瑜伽系)의 경전을 전면적으로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현장 이전에도 『십지경론』, 『섭대승론』 등의 유가유식계 경전들이 번역되고 각각을 연구하는 학파까지 등장하였다. 그렇지만 현장이 도합 19부 199권에 달하는 유가계 경론을 번역함으로써, 비로소 인도 유가파의 교설이 전면적으로 동아시아 불교계에 소개될 수 있었다.77)  結城令聞, 1956, 앞의 논문, 355-364쪽.

그런 점에서 현장의 역경 사업이 갖는 불교사적 의미는, 인도 유가파의 교설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불교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현장의 인도 구법과 역경 활동을 가장 상징하는 경전은 말할 것도 없이 647년 5월에 착수하여 이듬해 5월에 완성된 『유가론』100권이다.

현장은 귀국 직후 당 태종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장안 홍복사에서 역경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황제의 명으로 현장의 역장에 소집된 승려들이 『유가론』의 번역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자은전에는 3대 문헌의 찬자들인 변기, 도선, 혜립이 다같이 철문 담당자로 나오는데, 「유가론후서(瑜伽論後序)」(648년)와 玄?傳A 및 玄?傳B에는 도선과 혜립이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이 중 도선은 645년 9월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20권을 번역하였을 때 증문(證文)을 담당한 것이 분명하며,78) 혜립은 650년 5월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1권을 번역하였을 때 필수(筆受)를 맡았고,79) 678년에는 『대반열반경다비분(大般涅槃經茶毘分)』2권에 대한 서(序)를 짓기도 하였다.80)  78) 『開元釋敎錄』권8(『大正藏』55, 555c) 79) 『開元釋敎錄』권8(『大正藏』55, 555c) 80) 『大周刊定衆經目錄』권2(『大正藏』55, 385b)

따라서 도선과 혜립이 현장의 역장에 초기부터 참여한 것은 확실하다.

변기와 도선과 혜립이 참여하여 이루어진 초기의 역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전은 당연히 ??유가사지론?? 100권이었다. 티베트대장경에서는 무착(無着)의 저술, 한역불교권에서는 미륵의 저술로 각각 전해지고 있는 이 문헌은, 300~35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인도 유가파(Yog?c?ra)의 기본 교리서이다.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648년 5월 번역을 마친 직후, 당 태종이 궁중으로 현장을 불러 손수 읽어 보고 특별히 아홉 부를 복사해서 전국의 아홉 개 주에 유통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라왕의 특별한 요청으로 『유가론』이 신라에 전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81)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299-300쪽), “唐文皇 以新羅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

현장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뛰어난 학승들의 참여로 대대적인 역경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가론』100권의 번역과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현장이 번역한 모든 경전들에 대한 서문, 즉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황제가 직접 찬술하였으며, 황태자가 이를 읽고 나서 「술성기(述聖記)」를 지은 일은, 초당(初唐)의 불교도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었다.82)  기왕의 모든 자료는 태종의 「大唐三藏聖敎序」와 황태자의 「述聖記」가 『瑜伽論』 완역 직후에 현장의 요청에 따라 찬술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玄奘傳A는 『瑜伽論』을 30권가량 번역한 시점에 이미 두 서문이 찬술된 것인 양 서술하고 있다.

3대 문헌의 편찬자들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순간을 현장의 곁에서 함께 하였기에, 그 들은 그 영광된 순간을 기억에 간직하고 싶었으며, 그 기억은 현장계의 결속력을 다지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현장의 인도 구법 목적은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접 인도에서 배워 오겠다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가 인도 유가파의 경론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역경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처음부터 동참한 현장계가 『유가론』 번역을 매개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 바로 서역기에서 자은전에서 이르는 현장상의 형성 과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서역기, 현장전A, 현장전B, 그리고 자은전은 모두 현장계 중에서도 『유가론』 번역에 참여한―유키 레이몬(結城令聞)이 유가론학파라고 명명한― 일파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현장에 대한 집단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2) 『성유식론(成唯識論)』의 번역과 현장계의 분화

① 『성유식론』 번역의 의미

『성유식론』은 『유가론』과 더불어 현장 역경 활동을 대표하는 논서이면서, 여러 가지 점에서 『유가론』과 대조된다. 무엇보다도 『유가론』은 현장이 인도에서 직접 계현(戒賢) 등으로부터 수학하였으므로 그 범어(梵語) 원전이 존재하지만, 한역된 『성유식론』에 상응하는 범어 원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유식론』은 『유가론』의 사상을 체계화한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다시 후대의 10대 논사들이 해석한 것들을 호법(護法)의 학설 중심으로 합유(合?)하여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즉 『성유식론』은 무착과 세친에서 호법과 계현에 이르는 계보를 정통으로 하는 인도 유식학의 발전 과정을 최종적으로 집약한 결정체인 셈이다.

그런데 내용을 검토해 보면, 10대 논사 가운데 몇몇 논사의 학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10대 논사 중에서는 호법보다 안혜(安慧)의 학설이 세친의 뜻에 더 가까우며, 심지어 현장이 스승인 계현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지도 않았음이 드러났다. 이처럼 『성유식론』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현장이 인도 각지에서 배운 유식학의 성과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조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유식론』은 현장의 유식사상을 잘 보여 주는 ‘창작적 번역’의 산물이라 하겠다.83)  『成唯識論』이 인도 유식학의 발전 과정을 반영한다는 점을 강조한 논고로는 結城令聞, 1956, 앞의 논문 및 上田晃圓, 1987 「『成唯識論』考」『宗敎硏究』60-4(271)를 들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玄奘과 基의 창작적 역할을 더욱 강조한 대표적 논고가 渡邊隆生, 1988, 「『成唯識論』の文獻上の性格と思想の特徵」『佛敎學セミナー』47이다.

그런 만큼 『성유식론』 번역은 현장계의 주목을 집중시켰을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성유식론』이 법상종의 근본적인 소의경전이며, 그 번역을 주도한 기(基)가 법상종의 실질적인 개창조(開倉祖)라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성유식론??이 번역된 659년 12월 무렵의 상황은 달랐던 듯하다. 법상종의 성립이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것도 아니며, 그 과정이 일사불란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성유식론?? 번역과 연구는 현장계 내부의 분화를 야기하였다. 현장의 문하에 열광적으로 모여들었던 승려들은 ??성유식론??의 번역과 연구에서 기(基)가 가졌던 독점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② 『성유식론』 번역과 ‘법상유식학파(法相唯識學派)’
기(基, 632~682)는 17세에 현장 문하로 출가하였으며, 역장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25세 때인 656년이었다. 645년 시작된 현장의 역경 활동이 12년째를 맞이하면서 후반부로 넘어갈 때였다. 말하자면 그는 현장계 중에서는 『유가론』 한역 이후 세대에 속하였다.

 그런 기가 불과 28세에 『성유식론』을 현장과 단둘이 번역하게 되었는데, 그 전후 사정은 당사자인 기의 증언에 의존한 것으로,84) 『송고승전(宋高僧傳)』 규기전(窺基傳)은 기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成唯識論掌中樞要』권上本(『大正藏』43, 608b-c)

즉, 659년 현장은 4명의 상족(上足)인 신방(神昉), 가상(嘉尙), 보광(普光), 기와 함께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10대 논사의 주석을 별역(別譯)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며칠 만에 기가 학설이 분분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10대 논사 가운데 호법의 설을 정의로 하여 번역하고 나머지 9인의 해석을 합유(合?)할 것을 건의하자, 마침내 현장이 세 사람을 내보내고 기 한 사람만 데리고 번역하였다고 한다.85)  『宋高僧傳』권4 窺基(『大正藏』50, 725c)

세 사람 가운데 가상과 보광은, 그 직후에 진행된 훨씬 더 방대한 『대반야경』 600권 번역에서 필수(筆受)로 활동하였다. 특히 대승광(大乘光)으로 더 잘 알려진 보광은 647년부터 현장의 말년까지 줄곧 역장에서 활동하며 가장 많은 28부의 번역 경전을 필수한 인물이다. 그리고 신방은 신라 출신으로서 650년 『본사경』 7권 번역 때 정매와 함께 필수를 맡은 바 있다.

이와 같이 현장이 659년 『성유식론』을 번역할 때, 번역 보조의 임무를 기에게 독점시켰는데, 이는 20년 동안 이어진 현장의 역장 활동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하였다. 현장 역장의 선배 세대들이 기에게 반감을 가졌다면, 『성유식론』 번역이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현장전B와 자은전에서 『성유식론』과 기를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현장계의 분화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유가론』을 선양하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하였던 유가론학파는 『성유식론』과 기에 대하여 다른 평가를 내린 듯하며, 그것을 현장의 전기 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기는 648년에야 현장 문하로 출가하였으므로, 이보다 앞서는 서역기와 현장전A에 기에 관련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은 당연하다.

660년대 중반에 찬술된 현장전B에서는 660년 1월에 처음으로 『대반야경』 번역에 착수하여 663년 10월 말에 모두 600권의 대질을 완역한 사실을 특필하면서, 그 사이에 『성유식론』, 『변중변론(辯中邊論)』, 『유식이십사론』, 『품류족론(品類足論)』도 번역하였다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86)  『大正藏』50, 458a.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기가 입적하고 난 이후에 편찬된 자은전에서는, 아예 『성유식론』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와 관련해서는 663년 『대반야경』 번역을 마치고 그해 11월 ‘규기(窺基)’를 시켜 어제서(御製序)를 청원하는 표(表)를 올렸다고 한 것이 전부이다.87)  『大正藏』50, 276b.

여기서 기(基)의 호칭 문제를 잠시 검토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규기(窺基)라고 통용되고 있지만, 언제부터 왜 규기로 불렸는지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88)  深浦正文, 앞의 책, 256쪽 주 2)

그런데 『성유식론』 번역 직후에 심현명(沈玄明)이 지은 후서(後序)에는 "삼장제자기(三藏弟子基)"라고 되어 있어서, 원래 그의 이름은 기였음을 알 수 있다.89)  『大正藏』31, 60a.

일본 나라(奈良) 시대(710~784)에 필사된 기의 저술 가운데 찬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총 29건을 보면, 기법사가 6건, 기사가 18건, 단지 기라고만 한 것이 5건이며, 어디에서도 규기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90) 石田茂作 編, 1930 「奈良朝現在一切經疏目錄」(『奈良朝佛敎の硏究』, 東京: 東洋文庫 所收), 1-148쪽

 한국도 사정은 같아서 12세기 초의 「금산사혜덕왕사비(金山寺慧德王師碑)」를 비롯한 고려 전기 법상종 승려들의 비명에서는 오직 기(基)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한편 규기라는 호칭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보인다. 최초의 자료는 현장 입적 직후에 명상(冥祥)이 정리한 현장의 행장이다.91)  『大唐故三藏玄奘法師行狀』(『大正藏』50, 219a)

그런데 『대정신수대장경』에 실린 행장의 저본은 헤이안(平安) 時代의 필사본이어서, 과연 처음부터 규기라고 표기되었는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자은전은 고려대장경본만 규기라 하였는데, 주지하다시피 고려대장경은 화엄종 승려들이 교감을 맡았다.

나머지 중국의 판본들은 모두 승기(乘基)라고 하였다.92)  『大正藏』50, 276b, “(龍朔 三年) 至十一月二十日, 令弟子窺基 奉表奏聞 請御製經序.” 저본인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은 窺基라고 되어 있지만, 宋本(1230년), 元本(1290년), 明本(1601) 및 일본 宮內省圖書寮本(舊宋本, 1104~1148년)에는 乘基라고 되어 있다.

후술하듯이 『송고승전』의 찬자 찬녕(贊寧)이 참조한 자은전에서 대승기(大乘基)라 한 것으로 보건대, 원래는 대승기가 아니었나 추측되는바, 이 이름은 태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룡(神龍) 연간(705~707)에 이부시랑 이예(李乂)가 찬술한 「당자은사대법사기공갈문(唐慈恩寺大法師基公碣文)」의 경우 제목에서는 기(基)라 하였으며, 본문에서는 고려의 화엄종 승려 의천이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은 규기(窺基)라고 한 반면 다른 자료 전승에는 기라고만 하였다.93)  『玄奘三藏師資傳叢書』下에는 基라 하였으며(『卍續藏』 88, 381c), 『釋苑詞林』 권194에는 窺基라 하였다(『韓佛』4, 666b). 義天이 편찬한 『新編諸宗敎藏總錄』에도 16번 모두 窺基라고 표기되어 있다.

830년에 이홍경(李弘慶)이 앞의 「기공갈문」을 참조하여 새로 지은 「대자은사대법사기공탑명」에서도 단지 기라고만 하였다.94) 『金石萃編』 113 唐73 9쪽 左下 ; 『全唐文』 권760

 730년 지승(智昇)이 편찬한 『개원석교록』권8에서는 현장이 번역한 경전 목록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필수로서 대승기가 모두 6차례 언급되었지만, 뒤이어 현장의 전기를 기술한 부분에서는 규기라고 하였다.95)『大正藏』 55, 556c-557b, 560c.

『개원석교록』 역시 고려대장경 판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이상의 자료를 정리하면, 당 태종이 하사한 대승기로도 불렸지만, 기의 저술과 비명은 그의 원래 이름이 기였음을 보여주며, 기를 추앙하는 법상종 측의 문헌 자료와 금석문에서도 후대까지 기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반면 규기라는 이름은 현장 행장에서 처음 등장하여, 8세기 전반의 『개원석교록』을 거쳐 10세 후반의 『송고승전』으로 이어진 듯하다.

이 중에서 현장 행장은 후대의 필사본을, 『개원석교록』은 고려대장경 판본을 각각 저본으로 한 것이어서, 언제부터 규기라고 불렀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다만 고려 화엄종 승려들이 편찬한 전적에서는 규기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었음을 주목할 만하다.

호칭과 관련하여 『송고승전』 규기전에서는 자은전을 가리켜서, “대개 혜립(慧立)과 언종(彦悰)이 전적으로 배척만 하지는 않았으므로 대승기라고 한 것이다.”96)라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宋高僧傳』 권4 窺基(『大正藏』50, 726b), “名諱上字 多出沒不同者 爲以慈恩傳中云, 奘師 龍朔三年於玉華宮 譯大般若經終筆 其年 十一月 二十二日 令大乘基 奉表奏聞 請御製序. 至十二月七日 通事舍人 馮義宣 由此云靈基 開元錄爲窺基, 或言乘基非也. 彼曰 大乘基, 蓋慧立彦悰 不全斥, 故云大乘基.”

이 말은 만약 규기라고 표현하였다면, 그것은 자은전의 찬자인 혜립과 언종이 기를 전적으로 배척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래는 규와 기 두 명의 승려를 후대인이 한 사람으로 혼동한 데서 비롯된 오사(誤寫)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있었지만,97) '窺' 자(字)의 의미를 감안할 때 '窺基'는 '基'에 대한 부정적인 호칭으로 볼 수 있겠다.  松本文三郞, 1926 앞의 논문, 41-45쪽 참조.

즉 『송고승전』의 찬자인 찬녕은 현장계 내부에서 혜립과 언종이 기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그는 기와 도선 사이에도 모종의 경쟁의식 내지 갈등이 있었음을 전한다.98)  『宋高僧傳』 권4 窺基傳에 따르면, 道宣은 매일 諸天王使가 와서 執事를 맡아보았는데, 基가 도선을 찾아오는 날에는 매번 基가 돌아간 이후에야 天使가 오기에, 도선이 늦게 온 이유를 묻자, 천사는 大乘菩薩이 있어서 善神이 그를 에워싸고 수종하므로 자신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大正藏』50, 726a). 후대의 기록인 『紫桃軒雜綴』에서는 갈등의 원인을 戒行에서 찾고 있다. 즉 南山律宗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선과, 평소 외출시에 술과 여자와 무기를 실은 세 수레를 따르게 하여서 三車和尙으로 불릴 정도로 戒를 지키지 않은 基를 대비시킨 다음, 마침내 道宣이 基의 法力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료에서는 ‘奎基’라고 하여 窺를 奎로 바꾸었다(『金石萃編』113 「大慈恩寺大法師基公塔銘」). 이들 기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基에 대한 후대인들의 대중적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송고승전』 규기전은 『성유식론』의 번역을 둘러싸고 현장계가 이른바 유가론학파와 법상유식학파로 분화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③ 서명학파(西明學派)와 자은학파(慈恩學派)의 갈등
현장의 구법 여행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유가론』을 얻으려는 데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성유식론』 번역 이후 『유가론』 연구가 용두사미 격으로 끝난 점에 대하여는 일찍이 지적된 바 있다.99)  勝又俊敎, 1938, 「玄奘門下の瑜伽論硏究について」『宗敎硏究』103, 242쪽.

현장계의 관심이 『유가론』에서 『성유식론』으로 급속도로 바뀐 현상에 대하여, 이를 현장 학파가 『유가론』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의 유가론학파에서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의 법상유식학파로 이행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100)  結城令聞, 1956, 앞의 논문, 354-373쪽.

그러나 현장 문하 전체가 매끄럽게 이행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병존하였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나아가 『송고승전』 규기전은 『성유식론』의 해석을 둘러싸고 현장계의 분열이 가속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기는 ‘백본(百本)의 소주(疏主)’라 불릴 정도로 현장이 역출(譯出)한 경전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성유식론』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일례로 대표작인 『성유식론술기』 10권 혹은 20권(『대정장』 권43, 229a-606c)는 『성유식론』10권(『대정장』권31 1a-59a)보다 저술 분량이 6.4배나 된다. 이는 불교 저술에서 매우 이례적인데, 기는 『성유식론』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폭 증보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호법의 학설을 정의로 하고 나머지 9명의 견해를 합유하는 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에, 법상종은 당시에는 호법종이라고도 불렸다.

이와 같이 현장 문하가 호법―계현의 견해를 정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계통의 유식가(唯識家)와 더욱 첨예하게 사상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우선 같은 유식학 내에서 진제에 의해 성립된 섭론학(攝論學)과 충돌하여서, 일반적으로 현장 이후를 신유식, 그 이전을 구유식이라고 해서 구별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01)  양자는 모든 인식의 본질이 자기인식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일치하였지만, 인식의 정의를 둘러싸고 견해차를 드러내었다. 구유식학에서는 安慧(510~570)의 설에 기초하여, 자기인식은 순수한 인식작용일 뿐이며, 개개의 인식이 띠는 형상은 非실재라는 無相唯識說을 주장하였다. 반면 신유식학에서는 護法의 설에 기초하여, 자기인식이란 나타나 있는 형상 이외에는 없고 인식작용과 그 형상을 나누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는 有相唯識說을 주장하였던 것이다(沖和史, 1982 「無相唯識と有相唯識」『講座大乘佛敎』권8 唯識思想(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 編輯), 東京: 春秋社, 179-181쪽).

여기서 비롯하는 문제인데, 신유식의 관점에서 구유식의 학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법상유식학파의 분화는 불가피하였다.

그것이 원측(圓測)의 서명학파와 기의 자은학파 사이의 사상 투쟁으로 나타났다. 당시 서명학파와 자은학파의 갈등을 반영하는 상반된 설화가 전해진다. 그것이 바로 기의 피신설과 원측의 도청설이다.

『송고승전』 규기전에 의하면, 현장이 『성유식론』과 『유가론』을 규기만을 상대로 해서 강의할 때, 원측이 문지기를 매수하여 이를 엿듣고는 규기보다 먼저 다른 승려들에게 강의하자, 규기가 원측에게 뒤진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이에 다시 현장이 규기에게만 진나(陳那)의 인명론(因明論)을 강의하면서, “오성종법(五性宗法)은 오직 그대만이 유통하지 다른 사람은 아니다.”라고 선언하였다는 것이다.102)  『宋高僧傳』 권4 窺基(『大正藏』 50, 725c-726a). 이 이야기는 圓測傳(『大正藏』50, 727b)에서도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도청설은 사실은 아니다. 기(632~682)―혜소(慧沼, 650~714)―지주(智周, 668~723)로 이어지는 자은학파가, 원측(613~696)―도증(道證)으로 이어지는 주로 신라 유식학승들에 의한 서명학파에 비하여, 자신들이 현장을 계승하는 적통임을 표방하고자, 원측을 비방한 것에 불과하다.103)  深浦正文, 앞의 책, 260쪽 

한편 9세기 전반에 오대산을 순례한 일본승 원인(圓仁)이 남긴 일기에 따르면, 기가 원측을 피하여 장안에서 오대산으로 갔으며, 그곳 사찰에서 처음 유식을 강의하였다는 피신설을 전하고 있다.104)  『入唐求法巡禮行記』 開成 5년(840) 7월 26일조, “行二里許 到童子寺. 慈恩基法師 避新羅僧玄測法師 從長安來 始講唯識之處也”. 이 기사는 일찍이 陳景富가 주목한 바 있다[「圓測与玄奘, 窺基關係小考」『玄奘硏究文集』(黃心川․葛黔君 主編, 定州 : 中州古籍出版社, 1995), 103쪽].

『송고승전』 규기전은 기가 663년 이후에 오대산 일대를 참배하면서 문수상을 조성한 사실을 전하고 있지만, 피신설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그런 점에서 피신설 역시 도청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성유식론』 해석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자은학파와 서명학파 사이의 분화와 갈등을 반영하는 속설이라고 하겠다. 양자 사이에 교리 논쟁에 대하여는 선학들의 연구성과에 미루고자 한다.

끝으로 덧붙일 것은 양파의 갈등과 관련한 정치적 변수이다. 측천무후는 무주혁명(武周革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 태종이 후원한 현장의 법상종에 대응할 만한 강력한 불교사상이 필요하였기에, 법장의 화엄종을 전폭 후원하게 되었다.105)  鎌田茂雄, 1965, 『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46-149쪽.

무후는 화엄종만이 아니라 같은 법상종에서도 원측을 후원하여, 683년 무렵부터 역경 사업에 참여케 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06)  南武熙, 2005, 앞의 논문, 52-63쪽 참조.

그런데 무후 말년 무렵 찬술된 이 예의 「기공갈문」은 중종(中宗)과 기가 동학의 관계임을 은연중 과시하였다.107)  『釋苑詞林』권194(『韓佛』4, 667a), “皇帝曾入緇徒 爲奘公弟子 與師同學 神龍啓運 離躍飛天1”

중종이 생후 1개월 만인 656년 현장 문하에 출가한 사실은 자은전에 자세히 전하는데, 이해는 바로 기가 처음 역장에 참여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종은 형식상 현장의 제자였을 뿐, 실제로는 궁중에서 성장하였으며, 680년 황태자를 거쳐 마침내 683년 중종으로 즉위하였으므로,108) 동학의 관계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다.   108) 『舊唐書』권7 本紀7 中宗 李顯 神龍元年(705).

그런데도 기와 중종의 동학을 강조하는 것은, 현장과 당 태종, 원측과 무후의 관계에 필적하는 정치적 상징 조작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5. 맺음말

구법승의 존재는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의 일방적 전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하여 인도 불교를 능동적이며 선택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증명해 준다.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불교사에 가장 굵직한 자취를 남긴 구법승이 바로 현장(602~664)이었다.

玄? 의 구법 활동을 언급한 자료는 적지 않은데, 기왕에는 이들 자료를 그대로 취신(取信)하든가, 아니면 부분적인 비판에 그친 감이 있다. 이에 본고는 그중에서도 3대 주요 문헌을 사료 비판의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현장상’의 추이와 그 의미를 7세기 후반 장안 불교계의 동향을 배경으로 음미해보았다.
먼저 제2장에서는 대략 20년의 간격을 두고 편찬된 3대 문헌―『대당서역기』(서역기, 646년)와 『속고승전』권4 현장전(현장전A, 647년 / 현장전B, 664~667년)과 『자은사삼장법사전』(자은전, 668년)―을 개괄적으로 소개하였다.

제3장에서는 인도 구법의 동기와 구체적인 구법 활동에 국한하여 이들 문헌을 비교해 보았다. 특히 구법 활동과 관련해서는, 현장이 체험한 3대 논쟁―불교와 외도, 대승과 소승, 유가와 중관―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후대 자료로 갈수록 미륵과 『유가사지론』과 현장을 더욱 내세우려는 경향이 뚜렷해짐을 밝힐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을 현창(顯彰)한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특정한 유파의 신앙[佛?菩薩]과 교리[法]와 종조[僧]를 전면에 표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법상종으로 수렴되는 현장계의 정체성 확립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즉 서역기에서 현장전A와 현장전B를 거쳐 자은전에 이르는 과정은, 현장계에 의하여 이상적인 구법승으로서의 현장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 동시대 현장계의 동향을 반영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4장에서 현장계의 형성과 분화를 고찰하였다. 3대 문헌의 편찬자들인 변기, 도선, 혜립―그리고 어쩌면 언종까지―은 국가의 전폭적인 관심과 성원하에 진행된 현장의 역장에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그리고 현장의 초기 역장에서 대표적인 번역서인 『유가론』은 현장이 인도에서 배운 유식학의 기본 교리서였다. 그래서 현장계는 『유가론』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들이 이른바 유가론학파이다.

그런데 659년 인도 유식학의 결정체인 『성유식론』 번역을 계기로 현장계의 관심이 『유가론』에서 『성유식론』으로 급속도로 쏠리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법상유식학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뒤늦게 현장 역장에 참여하였으면서도 『성유식론』의 번역과 연구를 주도하게 되는 기(632~682)였다. 그런데 법상유식학파는 『성유식론』의 해석을 둘러싸고 기를 중심으로 하는 자은학파와 신라 출신의 원측(613~696)을 중심으로 하는 서명학파로 분열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현장계의 분화가 가속화 되는 가운데, 현장계 내에서 선배 세대인 유가론학파는 현장계의 정체성을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찾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유가론』과 미륵신앙과 현장을 부각시키는 자은전의 편찬으로 귀결되었다. 이보다 앞서 명상이 정리한 현장의 행장 역시 기본적으로 자은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 유가론학파의 현장상은 당시 현장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가 가장 취신하는 자은전이 현장의 인도 구법 활동을 가장 자세하게 묘사한 것은 맞지만, 그 모두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아시아 불교의 내적 요구에 부응하여 현장이 인도 구법을 단행하였듯이, 현장의 인도 구법 활동은 현장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현장이 목격한 인도 및 서역의 불교 실상과 현장 자신의 구법 활동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자은전이 아니라 서역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남동신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이 논문은 《한국불교학》20호(2008년 ()월호)에 게재된 논문을 재수록하여 소개한 것임.-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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