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1. 몽테뉴의 생애와 사상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르네상스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며 문필가이다. 그는 남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城)에서 출생하였다. 보르도에서 포도주 장사로 부자가 된 그의 증조부가 성을 매입했다. 몽테뉴의 부친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참전하고 돌아와서 이 성을 확장하고 가꾸어 귀족행세를 하며 살았다. 진보주의자였던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학자를 가정교사로 초빙했다. 그는 이미 여섯 살에 학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라틴어를 유창하게 쓸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명문 기엔느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철학과 고전에 열중하며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였다.

1554년(21세)부터 페리고르 지방재판소의 근무를 시작으로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퇴직할 때까지 16년 동안 판사로 재직했다. 1554년(32세)에 보르도 고등재판소 판사의 딸, 프랑소아즈 드 라 샤뉴사와 결혼하고 1568년(35세)에는 부친 피에르 에켐이 죽자 몽테뉴 성과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1570년 판사직을 사임하고 몽테뉴 성으로 돌아온 것은 종교전쟁의 내란 때문이기도 했다. 귀족 신분이었던 그는 왕을 수행하여 구교도로 참전하고 때로는 양 진영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전쟁의 참혹 속에서 비극을 목도하며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인간에게 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며 필경 인간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그의 시선은 인간 탐구에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성탑 3층에 있는 서재에 들어앉아 독서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라틴 고전과 현대서적을 섭렵하여 책 여백에다 주석과 독후감을 기입하며 지냈다. 1572년에 쓰기 시작한 그의 《에세(Essais)》는 한 마디로 인간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1575년(43세) 몽테뉴는 자신의 초상을 주조해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평형을 이룬 저울[天秤]을 그려 그 주위에 ‘Eπέχω’(나는 판단을 배제한다)를 새겨 넣었다. 이것은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판단 보류를 표명한 것이다. 자신이 밝힌 대로 그는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의 책에서 많은 부분을 빚졌다고 하며 제논의 엄격한 스토아철학,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 피론의 회의주의 철학에 경도되어서 자신의 글 주제에 맞게 그의 글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얹어 에세이를 써나갔다.

1580년에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에세》(2권)를 보르도에서 간행하고, 이 해 신장결석 치료를 겸하여 독일 · 스위스 ·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외국 체류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르도 시장이 된 것에 그는 자부심을 느꼈다. 1583년 다시 시장에 재선되었으며 종교전쟁과 페스트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86년에 몽테뉴 성으로 돌아와 《에세》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그 뒤 집필을 계속하여 1588년 3권 107장의 《에세》 신판을 간행하고, 독서와 글을 쓰면서 지내다 1592년 자택에서 59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2.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는 자신의 책 제목을 《에세(Les Essais)》라고 붙였다. 에세는 ‘실험’ 또는 시험을 의미한다.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의 행위들이 아니라 나 자체이며 나의 본질”이라며 “나는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스스로를 평가한다. 자신만 돌보며 나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분석하고 음미한다”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탐구’야말로 몽테뉴가 그토록 존경했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 나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의 《수상록》에서 읽을 수 있는 글귀이다. “에세란 자기 판단력의 시험이다” “에세는 나에 관한 연구이며 자신을 위한 교훈이다”라는 말도 놓칠 수 없다. 그의 《에세》는 오늘날 에세이의 효시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수상록》으로 번역되었다. 그는 자기체험을 중시하고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교훈을 《수상록》에 기록했다. 키케로의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다.”를 아예 한 장(章)의 제목으로 삼아 에세를 쓰기도 하였다. 

1) 죽음에 대한 통찰

“인간의 죽음이야말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재다. 만일 내가 책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다양한 죽음을 모은 사례집을 한 권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야말로 인간에게 사는 방법도 가르쳐주니까”라며 《에세》 제1권 제20장에서 몽테뉴는 말한다.

죽음은 예고 없다. 교황 클레멘스가 리옹에 입성할 때, 군중들에게 치여 죽을 줄을 누가 미처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가 하면 우리 임금의 한 분(앙리 2세)이 경기를 하다가 죽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조상 한 분(필립)은 돼지와 충돌하여 죽지 않았던가. 에스킬스는 집에 깔려 죽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언제나 집 밖에서 잤지만, 끝내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발에서 떨어진 거북의 등에 맞아서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도 씨 한 알 때문에 죽은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황제는 머리를 빗다가 빗에 찔려 죽었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자기 집 문지방에 발이 걸려 죽었으며, 아우피디우스는 회의실에 들어가다 문에 부딪혀 죽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여자의 허벅다리 사이에서 죽었다.

그는 죽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기습해 오는 것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죽음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흔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어찌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한순간인들 죽음이 우리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죽음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정면으로 대면하자. 피하려 하지 말고 앞서 마중하자. 사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의 낯섦 때문인데, 그렇다면 죽음을 자주 바로 보고 죽음과 친해지면 된다고 했다.

“일찍이 아무도 나만큼 철저히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말할 만큼 그가 죽음에 천착하게 된 데에는 1563년 절친한 친구 라 보에티의 급작스러운 죽음(30세)과 이듬해 남동생(27세)이 운동경기 중 머리에 공을 맞고 몇 시간 뒤에 사망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슬하에 여섯 명의 딸을 두었는데 다섯 명이 모두 갓난아이일 때 죽고 차녀 레오노르만 살아남았다. 또한 아버지의 사망과 그를 괴롭히던 지병인 신장결석도 그를 죽음의 성찰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모른다. 죽음의 도(道)는 모든 예속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불행이 아닌 까닭을 깨닫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불행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는 언제나 생각을 정리하여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내게는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닌 것이다. 언제나 구두를 신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시로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어느 날 말을 타고 산책길에 나섰다가 말에서 떨어져 두 시간 이상이나 의식을 잃고 선지피를 토해내며 하인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말발굽 아래 밟히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은 너무 다급하여 공포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이때 갑자기 한 줄기 번갯불이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어서 다시 저승에서 돌아온 것처럼 느꼈었다. 이런 조그마한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일에 좋은 교훈을 얻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때 비로소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죽음에 접근해 보는 도리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에서 그가 낙마했을 때 허공으로 솟구친 몸은 땅바닥에 세차게 떨어져 이내 의식을 잃었다. 핏덩어리를 몇 번 토하고는 눈을 떴다. 하인들이 손으로 떠받치고 있을 때, 그는 요술 양탄자를 타고 하늘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통증도 없었고 누워 있는 것이 행복했다. 이런 경험은 몽테뉴가 그 이전에 상상했던 죽음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실습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에세》에 적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뒤로 물러서는가? 아무에게도 도망칠 구멍은 없지 않은가. 그대들은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손해를 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 모든 나날은 죽음으로 달음질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훌륭한 교훈이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자연은 삼라만상 속에서 얼마나 놀라운 율동과 조화의 기적을 이루어 내고 있는가. 자연 안에 고통이 있으면 치유가 있고, 죽음이 있으면 새로운 탄생이 있다. 모든 것은 돌고 돌며 끝없이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몽테뉴는 삶이 고통의 연속임을 경험했고, 세상이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장임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연은 돌고 도는 것이며, 고통 뒤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담석증으로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 경험을 통해 고통도 발작의 때가 지나면 자연히 수그러든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이 육체를 죽이지 않는 한, 육체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곧 자연의 힘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의지나 인내력 따위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자연으로 하여금 좀 더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으며 자연은 자기 일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자연에 맡기자고 권고한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사(死)가 생(生)의 한 부분이라면 아예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과의 공존은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 준다. 무슨 선물인가? 죽음과 친해질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외형상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지만 동시에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지웠던 모든 짐을 죽음은 남김없이 내려놓게 하지 않던가. 병도 고통도 근심도 번뇌도 모두, 너무나도 완벽하게 덜어 내린다. 이 완전한 해방은 다름 아닌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 죽는 방법을 아는 것은 우리를 모든 예속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에 순응하는 것, 즉 자연을 따르라고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라. 당신이 생각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온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라. 당신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여러 부품 중 하나이다. 이 세상의 생명의 한 부품이다.

그러니 자연을 넘어서려는 오만함, 부질없는 야망을 버리고 전적으로 자연에 맡겨라. 그러면 자연이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을 할 것인가. 

몽테뉴의 삶의 지혜는 결국 ‘즐기자, 떳떳하게 즐기자’로 요약된다. 그는 스스로 쾌락주의자임을 자랑스레 선포한다. 처음에는 금욕주의적인 스토아철학에 경도되었으나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육체를 경멸하며 이성과 의지로써 인간 본성을 극복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라는 금욕주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몽테뉴는 죽음과 고통 따위는 자연에 맡기고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자연회귀를 택한다.

2) 피론의 판단중지 

프랑스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시민이 죽었다. 그들의 평온한 죽음을 목도하면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죽음의 철학이 삶의 철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종교전쟁은 신교도(위그노파)와 구교도(가톨릭)의 광신도들이 빚어낸 광기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성만을 오로지 고집하는 오만한 독단론자들이었다. 그들이 진술하는 신, 우주, 영혼, 정신, 육체 등 주요한 주제들에 의견을 점검하며 몽테뉴는 그 가운데 절대적 진리가 부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공허한 관념들로 옥죄고 있는가? 우리를 짓누르는 편견과 독단, 이 허구로부터 풀려나지 않는 한 인간은 사유와 창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본 그는 지식에 관한 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양극단을 엄격히 배제하는 실증주의자로서, 어떤 종류의 확실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를 거부하는 회의주의에 기울었다.

회의주의는 그리스 철학자 피론(Pyrrhon)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마음의 평정이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사안의 양 측면을 동시에 바라보고 판단중지 상태, 즉 모든 문제에 대해 ‘에포케’ 상태를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판단의 보류를 주장한 것은 불안의 근원인 오진(誤診)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안정(安靜, ataraxia)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몽테뉴는 회의에 대해 ‘곧고 굽힘이 없는 판단의 자세’라고 정의하며 그는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되 집착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다”고 언급했다.

‘사물을 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필자는 갑자기 그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主而生其心)’는 《금강경》의 수행자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점차 모든 얽매임과 집착으로부터 놓여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저 맑은 하늘처럼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이 상태를 가리켜 회의주의 철학자(피롱파)들은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는데 몽테뉴가 진술한 만년의 심경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경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봐도 그 둘레에 하늘은 고요하고, 공기를 어지럽히는 어떤 욕망도,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또 과거와 현재의 어떤 어려움도 없는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에게 고마운 일인지……

그는 이미 어떤 욕망도, 두려움도, 의심도 없는 자리에 가 있다니…… 그가 반야의 행자처럼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가왔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성소(至聖所)가 아닌가.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무가애고 무유공포(無罫碍故 無有恐怖)’가 겹쳐지는 것이다. 이미 욕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는 그가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 있는 해탈한 성자나 다름없어 보였다. 

3) 에피큐리언과 쾌락주의

에피큐리즘을 창시한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271)는 인간은 지구상에 단 몇십 년을 머물렀다 사라지고 마는 존재이니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기쁘게 해줘야만 하는 사람 같은 것도 없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율법 따위도 없으니 불행해져야 할 이유를 찾기보다는 즐기는 쪽을 택할 수 있고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즐거움은 존재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며 그는 삶의 목표를 쾌락에 두었다. 그들에게 즐거운 삶이란 술 마시고 떠들며 노는 것도, 성을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든 회피하든 그 근거를 찾고 영혼을 잠식하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테네 외곽에 집 한 채를 사서 철학공동체를 설립하고 ‘정원(The Garden)’이라 부르며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낯선 자들이여, 여기 머무르십시오. 여기서 최고의 선(善)은 즐거움입니다.”

그는 자기 것이라고 부를 물건도 거의 없었고 빵과 올리브, 물만으로 아주 소박하게 끼니를 때웠다. 에피쿠로스학파의 관심은 행복에 집중되었다. 행복이란 결핍이 없는 만족한 상태, 채움으로써가 아닌 비움으로써 무엇보다 ‘갈망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완전한 소멸이었으며 영혼이란 원자 입자들의 일시적인 구성물에 불과했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잘 산다는 것과 잘 죽는다는 것은 결코 둘이 아닌 하나’라고 규정했다.

스토아학파 사람들도 죽음에 직면해서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고요함을 중시하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 현인들의 훌륭한 사상을 수집한 그의 기술(記述)을 칭송하며 몽테뉴의 작품에 열광한 17세기 자유사상가들은 그를 대담한 자유사상가로 평가했다. 니체는 몽테뉴 정신의 가벼움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스토아철학적이면서도 에피쿠로스적인 생활방식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구성한 것을 찬탄했다.

그의 《에세》에는 헬레니즘의 세 가지 위대한 전통의 변모가 깔려 있다. 이는 ‘에우다이모니아’로 여기[인간적인 번영]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평정 또는 균형, 즉 ‘아타락시아’라고 믿는 공통점이 있다. 몽테뉴는 감각적 쾌락에서조차도 정신을 개입시킴으로써 쾌락이 전인적(全人的)인 것이 되기를 원했다. 즐거움을 맛보고 누리되 그것이 감각의 표피를 스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대신, 온 정신으로 그것을 증폭시킴으로써 더욱 충일한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이 경지를 가리켜 ‘완성’이란 말로 표현했다. ‘자신의 현존재를 당당하게 즐길 줄 아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주의를 더욱 집중하려고 애쓴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나는 그것을 더 깊고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 ” “나는 머물러 있는 존재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묘사한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지나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 순간 변화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몽테뉴의 방식에 매료된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그가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만 집중한 최초의 작가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단순한 느낌에 주의를 집중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현존재의 오롯한 알아차림, 당처(當處)가 모두 진여(眞如)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몽테뉴의 삶의 지혜는 결국 ‘여기서 지금 완전한 주인으로서 마땅히 즐기자’로 요약된다. 

40, 50대에 그는 죽음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어떤 일도 걱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무슨 일이든 걱정할 가치가 없다.” “죽음은 단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겪게 되는 몇 가지 나쁜 순간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었다.

삶의 끝이자 극단에 죽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삶의 목적은 아니다. 삶이 삶 자체의 목적이자 목표여야 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처신하도록 용인해야 한다며 죽음에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삶의 기술을 터득한 달인이 된 것이다. 발고여락(拔苦與樂)의 현자가 된 것이다.

3. 몽테뉴의 사상과 불교의 상이점(相異點)

불교의 궁극적 목표도 발고여락이다. 붓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것만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과 해탈, 여기까지가 불교와 맞닿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다른 점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그는 죽음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죽음을 상정하고 있다.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살아 있을 때는 그대들 생존해 있으므로(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그대들 벌써 이 세상에 없으므로(죽음이 없다), 아무도 그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과 내가 요행히 어긋나서 그것을 만나지 않게 된다는 어법이다. 죽음과 내가 맞닥뜨리지 않아서 죽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죽음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을 내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로써 모든 괴로움[死]으로부터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내[我]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존재를 5온(蘊), 즉 몸[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작용, 표상작용, 결합작용, 분별작용)의 다섯 가지 요소로 규정한다. 마치 여러 가지 목재가 모인 것을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오온이 모인 것을 존재[衆生]라고 부르는데 어느 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 오온에 나(我)는 없다. 무아(無我)다. “끌어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풀어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이 시구처럼 ‘나’란 나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이 원인과 조건으로 연기(緣起)된 것이기에 실체가 없으며 본질적으로 공(空)이다. 다만 무성(無性) 연성(緣性)으로 인연 따라 변하는 것뿐이다. 생사고(生死苦)를 고뇌하던 싯다르타는 ‘생멸(生滅)이 적멸(寂滅)’임을 깨닫고 적멸락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얼음이 물인 것처럼 생멸이 적멸이다. 얼어도 물이고 녹아도 물이다. 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게 아니다. 불생불멸이다. 생멸은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적멸’인 것이며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다. 

“색[육체]에는 ‘나’가 없고 수상행식에도 ‘나’는 없다. 죽을 내가 없는데 어디에 죽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불교의 죽음관이라면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말라”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것이 몽테뉴의 죽음관이다. 

다음은 발고여락(拔苦與樂)의 문제에서 열반과 아타락시아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아타락시아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불교에서 ‘열반’이란 지멸로(止滅)로,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들이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중도(中道)’를 깨쳤기 때문이다. 중도는 열반에 이르는 길[8正道]로서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연기(緣起)이며 공(空)이다.

몽테뉴가 도달한 아타락시아의 경지는 탐욕의 불이 꺼진 ‘무욕(無慾)’과 ‘평정심’의 상태로 불교의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열반, 즉 멸(滅)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재생[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본래적인 마음, 불성(佛性)의 현현을 체험하는 것인데 거기까지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를 경애해 마지않는 것은 나는 누구인지, 나의 실체를 정확히 보려는 것에서 출발한 그의 명상이 도달한 곳은 무심(無心)과 평정심이었으며 그의 《에세》는 엄격한 자기 점검과 성찰로 이어진 수행의 여정(旅程)이었다. 그는 견해(見解)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현자였으며 양극단을 배제한 중용(中庸)의 실천가였다. (여기서 잠깐) 그의 ‘중용’과 불교의 ‘중도(中道)’는 다른 것이다. 중용은 균형을 잃지 않는 모랄에 있다면 중도는 연기에 기반한 공(空)과 무아를 확실하게 아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는 격조 높은 철학 수필을 우리에게 선물한 최초의 에세이스트였다.

4. 《수상록》의 서지적 평가

그는 한 가지 물음에 대하여 더 많은 질문과 풍성한 일화들을(호라티우스, 루크레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을 인용)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하고 있다.

앙드레 지드가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가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라고 토로할 만큼 몽테뉴는 인간 보편성에 근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내가 기록하는 글은 나 자신이며 나의 본질이나 다름없다”며 그는 인간성의 공통보편이라는 논리에 의거해 자신의 성격이나 버릇, 체험 등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와 부딪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고찰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끌어준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해답과 주석이 친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에세》는 1640년, 스페인에서 금서목록에 오른 데 이어, 1676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금서에 올랐다. 그가 죽고 나서 17세기에 들어와 회의주의는 가톨릭의 적으로 취급되었고, 몽테뉴는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파스칼은 몽테뉴가 말한 ‘어리석은 시도’나 ‘죽음에 대한 신앙 없는 태도’를 보여준 《에세》를 혼란스럽다고 비판했으며, 파스칼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인들도 그의 탄핵에 합세했다.

그 결과 1669년부터 1724년까지 55년간 《에세》는 프랑스에서 출판조차 될 수 없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1685년에 새로운 영역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몽테뉴는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었다. 반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출판되지 못한 《에세》는 1724년 영국에서 출판되어 프랑스로 들어왔다. 몽테뉴는 계몽주의의 선구적 철학자라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는 몽테뉴를 자연회귀를 주장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했다. 독일의 니체는 몽테뉴의 문화상대주의와 ‘간결하고 발랄한 회의주의’를 찬양하고, 프랑스의 빌레는 몽테뉴를 콩트 실증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그의 《에세》는 17세기 이래 프랑스와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500년의 시간을 넘어 이제 그의 책은 영원한 고전(古典)이 되었다. ■

 

맹난자 / 수필가. 《에세이문학》 발행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 편집위원장 역임. 수상록 《본래 그 자리》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사유의 뜰》 《만목의 가을》 등과, 묘지 기행 《인생은 아름다워라》 《주역에게 길을 묻다》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정경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대상, 현대수필문학 대상 등 수상.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