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주목할 역사적 사건은 1980년에 일어난 이른바 ‘10·27 법난’이다. 10·27 법난은 1960~70년대 불교사의 종착점이었고, 1980~90년대 불교사의 출발점이었다. 그럼에도 10·27 법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학문적인 분석이 미약하였다. 그렇지만 법난에 대한 배경, 원인, 진행 과정, 조계종단에 끼친 영향 및 파장, 피해 승려들에 대한 인권 문제, 당시 신군부 정권의 만행 등에 대한 성격과 내용은 불교계 내외에 적지 않게 알려졌다.

이는 법난 발발 이후,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관련 단체, 승려, 조계종단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이다. 즉 10·27 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대표: 송월주), 10·27 법난 불교대책위원회(상임대표: 법타), 조계종의 10·27 법난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법타, 원학)와 그 밖에 대불련, 민불련,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실천승가회 등 다양한 단체들이 지난 30년간 법난의 진상 규명,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8년 12월 30일 강영훈 총리의 특별담화가 있었는데 이는 정부가 법난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7년 10월 25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10·27 법난 사건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국방부의 진상 보고서에 힘입어 2008년 2월 26일에는 10·27 법난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2008년 12월 30일에는 10·27 법난 피해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이렇게 불교 현장에서는 10·27 법난에 대한 진상 규명, 피해자 명예회복이 줄기차게 요구되어, 그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10·27 법난에 대한 학문적인 정리, 접근, 분석, 해석 등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진하였다. 이에 대한 원인은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근현대 불교사 연구의 미약과 관련 자료의 부족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0·27 법난 연구는 불교 연구자의 손에서 우선 정리되고, 그후에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연구 성과물을 법난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다음으로 법난의 관련 자료집이 간헐적으로 출간되었으나 내용과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는 미진하였다. 그러나 2007년 12월 12일, 조계종의 10·27 법난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 추진위원회는 《10·27 법난의 진실과 증언》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자료집을 2권으로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 자료집도 법난이 갖고 있는 역사성, 다양성, 심대성에 비추어 보면 완벽한 자료집으로서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집에 근거하여 추후에는 다양한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본 고찰은 이 같은 10·27 법난과 관련된 정황과 연구 성과에서 출발하여 법난에 대한 원인과 배경, 그리고 법난 발발 30년을 맞는 지금의 과제를 불교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10·27 법난에 대한 연구는 추후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여 생산될 것이다. 필자는 근현대 불교사 연구자로서 평소 10·27 법난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자료 부족, 국가 소장 자료의 접근 불가, 관련 증언자들에 대한 인터뷰 작업에 대한 어려움 등으로 연구의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위에서 소개한 자료집인 《10·27 법난의 진실과 증언》을 통해 비로소 실제적 내용의 일단을 접할 수 있었다.

 

본 고찰의 초점인 10·27 법난에 대한 배경과 원인은 법난의 성격을 가늠할 정도로 중요한 주제이기에 필자는 필자의 소견을 시론적으로 개진하는 선에서 머무르려고 한다. 법난의 배경과 원인은 정치, 사회, 군사, 종교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법난이 벌어진 현장, 관련 인물들의 터전이 조계종단이기에 우선적으로는 불교사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근현대 불교사의 맥락에서 10·27 법난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려고 한다. 지속적인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하여 보완할 예정인바, 선학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2. 10·27 법난의 발생 배경

10·27 법난의 발생 배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기본적으로 불교사 관점에서만 접근하려고 한다. 이는 필자의 연구 분야가 불교사인 것이 작용한 것이지만 추후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지금껏 법난의 발생 동기, 원인과 관련해서 제기된 이른바 외인론과 내인론을 분석하고, 그 분석에 나타난 내용에서 발생 배경을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법난의 발발 원인에 나타난 요체와 당시 불교사 흐름과의 상관성을 추출하려고 한다. 이러한 접근 작업은 불교사적인 연구 방법이다.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언급할 것은 본고에서는 법난에 대한 호칭, 성격, 정체성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지금껏 불교계에서 제기되었던 법난의 내용과 성격을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바로 법난의 발생 배경을 찾아 보려고 한다.

 

1) 외인론

 

법난의 원인은 지금껏 외인론에 의거하여 강조, 재생산되어 왔다. 외인론이라 함은 법난이 불교계(조계종단)의 외부에서 시작되어, 외부의 필요성에 의해, 외부의 공권력이 개입하여, 국가 및 신군부 정권이 자행한 탄압, 만행,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외인론은 법난의 진상 규명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던 10·27 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의 인식에서 살필 수 있다. 그 추진위원회가 1988년 11월 22일에 발표한 〈성명서〉에는 외인론의 근간이 극명하게 나오는바, 〈성명서〉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27 法難은 군사정권이 불교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자주의식을 말살하여 불교교단을 군사정권에 예속시키려는 의도에서 자행한 반민주적 만행이다.
―10·27 法難은 “全斗煥 將軍 대통령 추대 지지성명” 거부에 대한 폭력 보복이었다.
―10·27 法難은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정권 정통성 시비에 그들의 궁색한 입장을 호도하기 위하여 자행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 10·27 法難은 부도덕한 군사정권이 그들의 도덕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마치 불교계에 부정축재 재산이 많은 것처럼 과다선전하고 명분없는 국고환수를 표방한 것이다.
― 10·27 法難은 불교교단과 국민정신을 파괴한 만행이다.

위의 성명서에 나오는 만행, 폭력 보복, 사기극은 불교계 외부의 군사정권이 자행한 것으로 그 자체가 불교계로서는 법난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불교계 내부의 승려, 단체, 법난 유관 단체 등에 수용되었다. 그 실례로 2005년 7월 4일에 결성된 10·27 법난 불교대책위원회의 성명서 〈10·27 불교 법난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의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 3천여 곳을 급습하여 이유도 없이 수많은 스님들을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망각한 채 권력투쟁을 일삼고 성스러운 사찰을 급습하고 스님들을 연행, 고문하여 삼청교육대로 보냈다는 것은 역사 이래로 초유의 일입니다. 이것을 불교계에서는 ‘10·27 법난’이라고 합니다. ‘법난(法難)’이란 외부의 세력, 또는 무력에 의하여 불교가 박해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러 종교 중에서도 유독 불교계만 박해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듯 대책위원회가 밝힌 성명서에서 10·27 법난은 외부의 세력, 외부의 무력에 의하여 박해, 탄압을 받은 것으로 규정되었다. 법난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대책위원회의 행사 문건인 〈정부 당국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온다. 이렇게 법난은 불교계 외부에서 시작된 만행, 폭력사태라는 이해가 지난 25년여간 불교계 내부의 지배적 인식이었다.

이 같은 법난의 원인, 개념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인식은 정부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당초 1980년 법난이 발생할 때의 신군부(정부)와 조계종 정화중흥회의에서는 ‘불교정화’라고 표현하였다. 1989년 국방부 발표에서도 ‘불교 수사’라고 표현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국방부가 펴낸 결과 보고서를 보면 법난의 현실 인식에 상당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즉 2007년 10월 25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법난에 대한 조사를 하고, 그를 정리한 책자인 〈10·27 법난 사건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는 10·27 법난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0·27 법난은 1980. 10. 27 계엄사 합수단이 주축이 되어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특정한 종단(조계종)에 사법적 잣대를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발생한 국가권력 남용의 대표적 사건이다.

위의 보고서에 나오는 법난의 내용, 동기, 개념 등은 일면으로는 애매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과거 30년간 정부, 공권력의 인식이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합수단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행동이 부적절하였고, 국가권력 남용의 대표적 사건으로 규정한 점이다. 결과적으로 법난의 외인론이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점, 즉 외인론이 법난의 원인 및 배경에 중요하다고 보고, 그를 구체적으로 살핀 연보 내용을 소개한다. 이를 보면 당시 신군부 정권이 법난을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일정한 기획에 의해서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껏 정부와 수사 참여자들은 법난이 졸속으로 처리되었음을 수긍하면서, 나아가서는 그렇게 졸속이었기에 법난에 대한 뚜렷한 의도, 기획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국가권력 및 공권력은 권력과 무력을 단순하게 집행하지 않는다. 일정한 목적, 목표, 집행 방법, 효과 등을 철저하게 기획, 검토한 연후에 추진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신군부로 불렸던 공권력 추진 주체의 법난 관련 내용을 요약한다.

―1980. 2 ; 문공부, 〈대한불교조계종 분규 현황〉 작성. 조계종 분규의 원인, 문제점, 대책을 분석.
    2. 29 ; 계엄위원회의 제17차 회의에서 불교계 문제 토의. 문공부 차관, 종무국장, 종무관리관 참석. 문공부 차관, 〈불교분쟁에 따른 전망과 대책〉을 제출, 발표. 불교 분규에 대한 심각한 우려 표명됨. 정부의 개입도 가능함을 시사.
―1980. 5. 31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 이하 국보위로 약칭) 설치.
―1980. 6. 5 ; 국보위 상임위원장, 종교빙자 정치활동 엄단 발언. 종교(특수분야) 분야도 정화대상이 될 수 있음을 언급.
    6. 14 ; 국보위, 국가의 기강 확립 실천 작업 착수.
    6. 26 ;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 각 부서의 자체 정화가 미흡하면 국보위가 직적 개입, 발언.
―1980. 6. ; 국보위, 〈업무 보고〉라는 문건에 사회정화 시책 방향의 추진방향에서 “자체 정화 불가능 또는 미흡 분야를 역점시행한다”고 기재됨. 단계별 추진과제에서, 불교계는 3단계(10월 이후)에 포함됨. 국보위, 합수단에게 불교계에 대한 수사 지시.
―1980. 8. 22 ; 문공부(차관), 종교지도자 초청 오찬. 종교계 전반의 자율정화 방안 제시. 
―1980. 9. 1 ;합수단장 교체(김충우 취임), 취임 직후 불교계 수사 준비 착수.
            9. 7 ; 종로경찰서, 〈대한불교조계종 실태〉조계종 분쟁을 위주로 한 사건발생 현황〉 작성.
            9. 10 ; 국보위 사회분과위원회, 조계종 총무원장(월주), 비위 자료 수집. ‘폭력배(승려)’ 숙정하겠다는 목표와 연관
            9. 19 ; 김천경찰서, 〈치안일지〉에 불교계 정화대상 폭력배 실태 조사 지시.
―1980. 9. ? ;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조계종 집행부 대상 비리자료 수집. 합수단이 수사에 착수.
―1980. 10 ; 합수부, 수사 본격화. 불교계 투서와 진성서 분석, 연행 승려 검토. 합수부 단장, 조계종 방문, 원로 승려에게 정화계획 언질, 자문. 실무대책반(양근하, 전창열 등) 구성, 수사 협조 및 자문. 실무대책반에서 〈자율정화계획서〉 작성. 군법사 및 신도회장 등에게 불교계 동향 파악, 불교계 여론 수집. 군법사단 소속 군인, 차출 및 지원. 수사자문회의 입안(목적, 운영, 대상 등).
    10. 24; 보안사령부에서 회의개최, 〈검거대상자 및 수사 착안 사항〉을 주제로 45계획과 검거 대상자 명단 배포.
    10. 25 ; 합수단, 〈불교계 정화방안 요지―그 실태와 정화대책〉 작성
    10.   ? ; 문공부, 〈불교계 정화추진 방안〉 작성. 합수단, 〈불교계 정화수사 계획 (45계획)〉 수립
―1980.10. 27 ; 10·27 법난 발생.

이와 같은 법난에 대한 당시 신군부 측의 작업,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때에 10·27 법난은 기획 의도된 시나리오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본 고찰에서는 상세히 분석할 여력이 없지만 문공부와 합수단에서 작성한 〈불교계 정화추진 방안〉 〈불교계 정화방안 요지〉는 법난에 대한 준비가 철저하게 준비되었음을 말해 준다. 요컨대 10·27 법난은 신군부, 공권력이 기획, 입안에 의해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0·27 법난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당시 국보위 내부의 합수단에서 작성한 〈불교계 정화방안 요지―그 실태와 정화대책〉과 법난 발발 후 계엄사 당국에서 발표한 문건 〈사이비 승려 및 불교계 내부 폭력배 소탕에 관한 계엄사 발표문〉에 극명하게 나온다.

국가 백년대계의 확립은 국민의 의식구조 혁신을 통한 정신개조에서 출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정화는 시급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고 이를 위하여 당국은 불교종단의 자율정화에 일임한 바 있으나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여도 아무런 효과나 진척이 없음을 볼 때 자력갱생의 여력이 없음으로 단정하고 또한 교계의 뜻있는 참신한 승려와 신도의 여망에 따라 부득이 당국에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戒嚴當局은 政界를 비롯한 社會 各界에 對해 嚴肅한 肅正과 淨化措置를 斷行하면서도 宗敎가 지니는 特殊性과 獨自性을 尊重하는 立場에서 佛敎界 自體의 自律的 淨化와 肅正이 있기를 企待하여 왔던 것이나 相當한 其間이 經過하여도 아무런 自體 淨化의 움직임이나 効果를 나타내지 못할 뿐 아니라 自力으로는 到底히 更生의 힘이 없는 것으로 判斷, 부득이 社會淨化 措置의 次元에서 鐵槌를 加하게 된 것이다.

이 문건에 나오듯 10·27 법난은 신군부(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사회정화’라는 명분으로 개입, 자행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10·27 법난의 외인론에 대한 타당성과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법난의 외인을 이해함에서는 당시 신군부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송월주 총무원장)의 노선, 성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조계종 집행부는 3년의 종단 내분을 종식시키면서 새롭게 등장하였지만, 종무 집행 노선으로 신군부와 갈등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갈등의 내용과 성격을 알아야만 법난이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집행부가 등장한 이후에 행한 노선 중에서 정부, 군부, 공권력과 연관된 핵심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80. 4. 26~27; 조계종 중앙종회 개최, 총무원장 송월주 선출. 종정은 미선출. 조계사 측의 종무 인수 비협조
4. 28 ; 송월주, 취임 기자회견. 불교관련 법 개정, 종단개혁, 민족불교 구현 등을 발표
4. 29 ; 총무원장 문공부에 취임 등록 신청, 거절당함
5. 9 ; 문공부에 총무원장 취임 등록 재신청(서류 보완). 장관 지시로 등록 지연(종정 미취임의 이유)
5. 13 ; 신집행부 승려, 총무원 청사 진입.
5. 15 ; 고암 스님 측, 인수인계 협조로 신집행부 업무 개시. 종단 안정, 우선적으로 조치.
5. 24 ; 조계종단, 광주사태 구호봉사단 파견.
5. 30 ; 조계종단, 광주민주화운동 발생 직후 광주시민 지원책 강구. 광주시민돕기 대책본부 설치.
6. 3 ; 조계종단, 광주지원을 위해 광주 현지 방문.
7.    ; 조계종 전승려, 분한신고. 사찰 재산 철저 위해, 망실재산 실태 조사.
7. 20 ; 불교재산 관련 법, 개정 위해 문공부에 건의
7. 21 ; 신군부에 협조하는 대한불교총연합회와 전한국불교회에서 조계종 탈퇴
7. 24 ; 송월주 총무원장 종단 운영방침 기자회견(종단을 자주, 자율로 운영). 문공부의 등록지연을 비판, 3대사업(도제양성, 포교, 역경)을 강력 추진. 불교 관련법 연구하여 개정 검토, 불교의 사회적 기능 강화 고려.
8. 14 ; 불교관계법 개정 5인(이두, 혜성, 종하, 명선, 향운) 추진위원회 구성. 개정 시안을 문공부와 국보위에 제출키로.
8.  ? ; 전두환 추대 지지에 대한 요청을 총무원장이 거절. 정교분리, 종단의 자주화라는 명분으로.
8. 22 ; 문공부가 요청한 정화 방법(위원회 구성, 타율징계 등) 거부. 자정 방법을 강구(율장, 갈마) 종단 자율로 하겠다는 취지의 공문을 문공부에 발송.
8. 26 ; 조계종 국보위의 지시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자체정화 추진. 정화 추진 방안(종단 내부의 분쟁 해소, 자질 향상, 재산 분규 방지 등) 수립.
9. 17 ; 총무원, 불교 관련법의 개정 시안을 문공부에 제출
10. 20 ; 조계종단 자율정화 세부지침 확정(5개 항 13개 목). 조계종단 정화추진위원회 구성, 지부 결성

이와 같이 1980년 4월 26일에 등장한 조계종단 집행부는 자주종단, 자율종단을 만든다는 취지를 내세워 당시 문공부와 불편한 관계를 노정하였다. 그 결과 총무원장의 등록은 유보되었다. 더욱이 이런 관계로 말미암아 조계종단은 정부 주도의 정화 추진 방안을 따르지 않았고, 신군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을 방문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신군부와 대응 관계를 유지했다. 더욱이 혼란한 정치 일정 아래에서도 불교 관련법을 개정하겠다는 다소 도전적인 종무행정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조계종단의 노선은 신군부 측에서 동의를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계종단은 신군부가 추구하는 정화를 통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구도에 합류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당시의 조계종단 집행부는 문공부, 국보위 등 공권력과 대응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불교를 정화한다는 사전 기획이 입안되어 있던 터에 조계종단의 노선은 신군부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신군부는 정권의 장악과 유지를 위해 사회정화를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조계종단에 메스를 가하였다. 자연스럽게 신군부가 주도하는 법난(불교정화)은 예정대로 실행되었다.

2) 내인론

10·27 법난이 발생한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된 것은 이른바 내인론이었다. 내인론이라 함은 불교계(조계종단) 내부에서 법난(타율적인 정화)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계종단 내부의 비리, 모순 등이 산적해 있었고, 종단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체 정화를 할 수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법난(정화)이 일어났다는 논리이다. 이는 주로 법난을 야기한 신군부 측에서 제기하였다. 이 같은 논리와 전제에서 불교계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신군부 및 정부에 불교계 비리를 정화해 달라고 요청하는 투서, 건의서가 산적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이와 관련된 해석은 1989년 1월 30일에 있었던 국방부의 〈불교 수사경위〉라는 보고서에 나온다.

● 종단분규가 극도로 악화되는 ’79년에는 청와대, 문공부, 검찰, 치안본부 등 각 기관에 폭력 및 사기 부정비리를 수사 처벌해 달라는 건의 진정 및 고소 사례가 계속되어 왔음.
● 79. 10. 26 계엄이 선포된 이후에는 계엄사에도 진정 및 고소가 쇄도하여 당시 계엄사령관 자문 기구였던 계엄위원회에서는 ’80, 2월 자체회의에서 불교계의 문제점에 대한 토의가 있었음.
● 종단분규에는 원칙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불교계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토록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불교계 재산관리 등 제도상의 문제점을 보완을 위한 새로운 법규 제정이 필요하다는 등 불교계 문제가 계엄 업무 현안으로 제기된 바 있음.
● 5·17 계엄 확대 조치 이후 국보위가 설치되어 사회개혁에 착수한다는 보도가 나가자 불교계  문제도 국보위로 건의 진정하게 되어 불교계의 민원이 국보위에 접수되었음.
● 국보위에서는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민원사건으로 관계기관에 하달, 처리토록 하였으나 계속적인 진정 및 투서가 쇄도하고 사회정화 차원에서 수사해 달라는 스님 및 신도 연명의 진정서를 접하고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우선 각 분야의 자율정화를 촉구함과 동시에 자율정화가 미흡한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전이 없자 ’80년 6월 불교계를 정화 수사토록 합수단에 지시.
● 수사 지시를 받은 합수단은 당시 과중한 계엄 업무 수행으로 수사에 착수치 못하고 미루어 오던  중 광주사태 등 주요 사건이 마무리 되는 ’80년 10월 경 수사에 착수.

이 보고서에 나오는 ‘진정 및 투서가 쇄도하였다’ 혹은 ‘사회정화 차원에서 수사해 달라고 스님 및 신도 연명의 진정서가 접수되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취지는 〈불교계 정화수사계획(45계획)〉의 목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佛敎 宗團의 自體 整備 期待가 困難한 非理와 不合理 現象을 宗敎界 淨化 次元과 國民精神 改造
側面에서 拔本塞源하여 佛敎 本來의 護國思想을 浮揚시켜 國歌에 參與토록 誘導코저 함

이렇게 투서, 진정서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신군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법난의 실무 책임자들의 증언,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합수단의 단장이었던 김충우의 입장을 들어보자.

우리가 또 뭐 그걸 사심을 가지고 한 거 아니고 완전히 진정, 투서에 의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들어온 걸 좀 다 보고 또 그 다음에 각계 여론도 좀 듣고, 불교계 또 가서 우리가 팀을 구성해 가지고 했는데 그것도 거기 옛날에 다 나와 있을 거다. 그리고 본래 근본 취지는 잘못된 게 없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불교가 정화시킬 능력이 아직 안 되어 있잖아. 총무원이고 뭐고 전부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잖아. 그 당시는 계엄하이기 때문에 그건 완전히 모든 걸 해 놓은 상황에서 그때 개혁하는데 한번 정화 그때 하는 거지, 언제 해요.
그러니까 그때 뭘 하겠느냐 하는데 불행히도 제일 진정, 투서가 많고 자기들끼리 싸움하고 문제가 돼서 과거 이승만 박사 시절부터 문제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교 쪽에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에서 그렇게 된 거지.
불교계도 제가 볼 때에는 그렇다. 지금 와서 솔직히 따져 보면 참 70, 80% 대세는 완전히 한번 혼내야 된다는 쪽이고 정화 차원에서. 근데 우리가 더 치밀하게 더 많은 연구를 해 가지고 시간이 더 있었으면 될 텐데. 그런 게 안 되었기 때문에 에러가 좀 많아서 한 20, 30%는 문제가 있었다고 저도 본다.
  
이렇게 실무 최고 책임자였던 합수단장 김충우는 법난이 투서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일부 시행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정화(법난)는 대체로 잘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해석은 법난의 준비 작업에 참여한 보안사의 양근하도 같은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게 마련되어 있기보다도 투서, 진정서들이 들어와서 다 들어온 것으로 했거든요. 270 몇 건인가, 나는 기억에 없지만. 그걸로 전부 이뤄진 것으로 되어 있다. 결정이라는 건 국보위에서 내려온 진정, 투서 들어온 거 전부 다 받아 가지고 한 거다.그 당시 국보위에서 내려와 가지고 나한테 자문이라기보다도 와서 의견을 물었을 적에 내가 처음에는 굉장히 그거했다. 왜 불교만 하느냐, 그런 걸 내가 한번 나름대로 그걸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그건 사실이고, 정화를 해 달라는 그 자체 그 당시 시대적 배경 말이죠. 그걸 전부 불교 신도회하고 스님들, 고승들 찾아가서 쭉 보니까 정화의 필요성은 있다 하는 그런 어떤 분위기를 띄워서 내가 전달해 준 거고. 그런 시대적 배경은 그거거든요.(중략) 그 당시 그런 걸 다 접근을 해 가지고 시대적 배경 이런 것을 느껴 가지고 그런 필요성을 얘기했지.

내가 기독교도 해야 되지 않느냐고 그랬거든. 그러니 이거는 기독교는 무슨 건이 있어야 하지 말로는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뭐가 들어와야 진정이 들어오고 투서가 들어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게 없었다. 이거는 어떤 기획에 의해서 한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국보위에 투서, 진정에 의해서 단순하게 한 거다. 그거는 뭐 어떤 기획을 갖고 계획적으로 뭐 이걸 하라 하는 게 있는 진 모르겠는데 내가 그런 단계까지는 기독교 쪽까지는 모르겠고. 나는 불교 오더 떨어진 거에 대해서만 단순하게 했던 거다.

양근하도 역시 투서, 진정서 해결의 차원과 불교계 내부의 필요성에서 법난이 시작되었다고 발언하였다. 김충우, 양근하의 논리는 실무대책반 반장의 역할을 한 전창열 발언에서도 나온다.

다만, 수사 진정서들이 많이 올라왔는데 그 사람들에 대한 곧 수사가 착수가, 진정서 처리 차원에서 불교계의 비리를 척결하고 그 다음에 종단 분규를 발본색원하는 그런 수사, 그 정도의 추상적인 얘기만 들었어요.
처음에는 모르긴 했지만 수사 착수한다고 했을 때는 그 당시에 불교계에서 한 3, 4년간 조계사파하고 개운사파하고, 그래서 종단 분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잖아요? 그래서 생각하는 불교신자들로 하여금 많은 실망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 것이 하루빨리 어떻게 해결이 돼서 종단이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종단 주변의 폭력배라든가, 폭력성, 일부 그것도. 그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아마 그런 차원일 것이다 하는 걸로 설레는 마음으로 맨 처음에 들어갔어요.

전창열도 분규(투서)를 법난(수사)의 계기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당시 문공부의 종무관으로 불교 문제에 관여하였던 담당 공무원인 한영수도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큰스님이고 중진 스님이고 훌륭한 스님도 중상모략 안 받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걸 보고 한다는 것이 그건 잘못이라 이거예요. 그다음에 군에서는 그걸 봐 가지고 그 투서에 의해서 중점적으로 한 거 아니냐. 그러니깐 수습할 대상도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깐 다 보안사 데려가고 다 데려갔단 말이에요. 그러니깐 누가 수습할 겁니까? 그러다 보니까 너무 일이 확대가 되고 감당 못 하니까 우리 문공부에 나를 차출한 거 아닙니까? 진정서 그것 때문에만 된 게 아니지만 외형적으로 불교의 분규가 심화돼 가지고 시민들에게 국민들에게 의해서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는 거지. 게다가 이런 투서가 자꾸 올라오지. 소재가 있지 그러니까. 그런 것이 취합이 돼서 한 게 아니냐. 다른 요인은 볼 수가 있나.

 

이렇듯 법난의 내인론, 즉 내적인 발생 배경에 투서, 진정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10·27 법난의 발생, 원인에서 투서, 진정서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배경으로 인하여 1989년 1월 30일에 국방부 주최로 열린 법난 설명회에서도 법난의 근거가 불교계의 투서, 진정, 고발이라는 주장이 논란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내인론 문제가 보다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9년 말과 1990년 초반이었다. 그 당시 은해사 기기암의 승려 휴암은 1989년 10월 20일에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의 문제》라는 소책자(비매품)를 제작하여 불교계에 배포하였다. 당시 동국대 총장 구속에 대한 불교도들의 반발에 나타난 현실 인식(탄압)에 대한 이의를 표출하려는 목적에서 배포된 그 책자는 불교계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휴암은 불교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불교 탄압이라는 구호에 대해 강한 불만과 이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10·27 법난도 10·27 사태라고 부르는 것이 승가로서의 바른 태도, 양심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10·27 사태는 당시의 전두환 세력이 그들의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창한 새 시대 구현과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들의 정치적 동기에 그 연유를 두고저 한다.

이처럼 휴암은 10·27 법난의 연유를, 신군부 정권의 명분 확보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신군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기와 유혹의 소재’를 제공한 주체는 불교계와 승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

그 유혹의 구체적인 소재의 첫째가 바로 당시의 승려에 대한 투서들이었고 또 70년대가 저물도록 우리의 승가가 분쟁으로 눈을 뜨고 분쟁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끝도 없는 문제의 집단이라는 인상을 국민적으로 심어주어 이런 집단에는 어떤 메스를 가해도 국민들이 그것 참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스스로 한없이 추락시켜온 우리의 승가였다는 사실이 그 두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휴암은 법난(사태)이 일어난 요인을 승려에 대한 투서, 승가의 내분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전두환 세력이 일천수백 통의 투서를 접하였고, 그 투서들을 통하여 승가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그 투서들을 통해 사태(법난)를 일으킬 수 있는 자신감,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신선감을 얻을 수 있다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같은 유혹을 제공한 당사자는 ‘승가인 자신들’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휴암의 주장에 대하여 세계평화법회사인 법전은 〈불교신문〉에 “휴암 스님, ‘승가의 양심과 불교탄압의 문제’를 읽고”라는 기고문(1990.1.31)에서 내인론은 근시안적인 주장이라고 이의를 표하면서, 법난이 일어난 양 측면을 다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청룡암 주지인 지명은 〈법보신문〉의 “특별기고, 대외적(對外的) 호법(護法)과 대내적(對內的) 자성(自省) 구별해야”라는 글(1990.2.5)에서 휴암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서 휴암은 〈법보신문〉의 기고문 “반성은 깊이 할수록 좋다”라는 글(1990.3.5)에서 자신의 입장을 재차 강조하였다. 〈법보신문〉 지면의 휴암과 지명 논쟁은 결과적으로 법난의 발발 원인에 대한 문제를 심화시켰다. 이 논란으로 인해 법난의 내인론이 퍼져 나갔다.

법난의 내인론은 곧 진정서, 투서로 상징되는 불교계 내부의 분쟁, 분규, 부패가 법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 내적인 원인이 있었기에 신군부는 불가피하게 불교 수사 차원에서, 사회정화와 불교정화 차원에서 불교의 문제를 적법하게 대응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의 실수, 문제점은 시인한다는 논리였다.

3) 법난의 배경

10·27 법난의 배경은 전술한 바 있는 법난의 외인론과 내인론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외인론과 내인론을 부정하고서는 법난의 배경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외인론을 주장하는 경우는 불교계 외부의 요인만을 강조하고, 내인론을 주장하는 경우는 불교계 내적인 요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필자는 외인론과 내인론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 사태, 운동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연관된 원인, 배경을 공정하게 분석의 대상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원인과 배경을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설명하여 진실 및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모든 사건, 사태의 근원에는 본질이 있고, 사건의 실체와 연관된 다양한 요인이 있다. 이런 역사적 이해 및 분석의 상식, 사건의 인과 관계 및 논리에 의해 설명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각 원인에 대한 주안점, 강조점 등에 대해서도 적절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필자는 10·27 법난의 배경을 최우선적으로 외인론을 강조한다. 즉 불교계 외부의 신군부의 기획, 의도, 조치, 실행이 있었기에 법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설사 불교계 내부에 부패, 분규의 요인이 있었더라도 신군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신군부가 그런 정책과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무리하기 짝이 없는 그런 방법으로 정화 추진을 하지 않았더라면 법난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법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유승무의 글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히려 제5공화국 정부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이념을 생산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정화법이란 전무후무한 법을 제정하여 국보위라는 폭력적 국가기구를 통해 불교계의 정화란 미명하에 폭력을 행사한 국가폭력이다.

요컨대 신군부, 국보위, 합수단이 행한 국가폭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10·27 법난의 미시적 배경을 우선적으로는 신군부의 등장, 활동, 부적절한 법 집행, 정교분리에 반하는 정책 등과 그것이 구현된 기간, 즉 10·26 사태(박정희 시해 사건)이 일어난 1979년 후반부터 1980년 10·27 법난이 일어나기까지 1년간의 정치 상황을 법난의 배경으로 본다.

다음으로 법난의 배경으로 고려할 측면은 법난의 내인론에서 제기된 불교계 내부의 분규이다. 진정서, 투서로 대변되었던 불교계 내부의 분규, 분쟁, 갈등이 법난의 원인과 배경이 되었던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지금껏 신군부와 법난 실무자들이 자신들의 행동과 논리를 합리화 하려는 과정에서 그 요인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였다. 법난의 배경을 성찰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휴암의 논리도 부정할 수 없다. 법난의 원인, 배경으로 불교계 내부의 분열, 분규로 지적하였던 경우도 법난 직후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자료를 소개한다. 법난 직후, 조계종의 기관지인 〈대한불교〉의 사설(1980.11.23), “불교인의 자각과 반성”이라는 글에서는 법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2년 6개월 동안 싸움으로 수많은 삼보정재는 재판 비용으로 탕진되었고 신도들까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리는 일이 생기자 금년에 들어 화합하여 새로운 집행부를 탄생시켰으나 종정 추대를 하지 못한 채 출범, 초기부터 파행적 운영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중략)

사실 근래 우리 불교는 불타 정신에 입각하여 개인의 자각과 중생구제에 몰두하였다기보다 명분이 없는 유형적 재산 싸움에만 급급하였고 나아가서는 종권을 쟁취하기 위해 폭력까지 동원하는 일이 자행되어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고 크고 작은 사찰 주지를 놓고 문벌 간에 치열한 경쟁을 일삼기도 하였다. 이런 결과로 인해 한국 불교는 일찍이 없었던 상호불신 풍조가 만연하여 종교의 공신력까지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불교계 내부의 분열, 혼란이 극심하였음에서 찾았다. 그 결과 불신풍조 만연, 사회로부터의 공신력 상실, 내부의 부패, 자정 기회의 상실 등이 불교계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은 미시적으로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조계종단 내부의 갈등, 재판 속출, 종권 대립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배경에서 법난, 즉 강제적인 정화를 당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었다. 예컨대 법난 직후 등장한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인 탄성은 법난의 원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불교는 그동안 조선불교의 탄압과 왜정시대의 불교 속화정책, 8·15 해방 후 비구, 대처의 시비가 법적인 정화에만 그치고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점이 너무 많은 데다 내적으로는 물질주의가 팽배해 바람직한 승가상 정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근현대 불교사의 모순 특히 불교정화운동의 실패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박탄성의 이러한 입장은 정화중흥회의 의장이었던 박기종이 승려들이 맡은 소임을 소홀히 한 것과 수행자의 자세를 지키지 못한 결과라고 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불교계 내부의 분열, 부패, 정체성 혼미 등이 결과적으로 법난의 원인이었으며, 그것이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었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법난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후인 중앙승가대 신문사가 법난 12년을 맞아 학인, 동문 승려, 신행단체장, 동국대·불교대생 등을 대상으로 한 ‘10·27 법난과 불교 자주화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즉 불교계의 부패가 전두환 정권의 사회정화라는 명분에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법난의 원인을 이해하였던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정리하면, 10·27 법난은 불교계 외부의 신군부 등장, 신군부의 정화에 대한 정책, 불교계에 대한 불법자행 등의 외적(정치, 사회)인 배경과 함께 1970년대 불교계 내부의 분열, 대립에 나타난 모순(정화 운동의 후유증, 정화 정신의 소멸)을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이 법난의 배경을 간략히 언급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거니와 법난의 배경은 더욱 다양한 자료, 관점에서 천착해야 함을 지적한다.


3. 불교의 과제

여기에서는 10·27 법난에 나타난 문제를 직시하면서 불교계가 향후에는 10·27 법난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서 고민할 문제를 추출하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정밀하게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본고는 그 개요만 살핀다.

첫째, 불교 자주화의 문제이다. 불교 자주화는 불교의 운영, 노선, 지향 등을 불교인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함을 말한다. 그러나 지난 근현대 불교사를 조망하면 이에 반한 행동이 적지 않았다. 불교가 자주화에 투철하지 못한 것은 조선시대 산중불교의 영향, 일제의 식민지 불교의 영향이 우선 거론된다. 인사권과 행정권을 일제에게 피탈당하였던 사실(사찰령 체제), 해방 이후 불교정화운동 당시에 공권력에 의존, 정화운동기와 1960년대에 불교계 내부의 문제를 사법부에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였던 수많은 재판과 송사, 1970년대 종단의 종권 다툼 시의 송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런 구도하에서 승려들은 행정부, 사법부, 공무원에게 다양한 진정서, 투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국가의 공권력과 법에 의존하며, 불교와 종단의 문제를 불교 외부로 가져가서 해결하는 관행이 굳어졌다. 그런데 이럴 경우 불교계 내부나 종단에 문제가 생기거나, 불교 및 종단의 위상이 취약할 경우에는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침해당할 소지가 다분하다. 요컨대 10·27 법난과 같이 권력의 부당한 개입으로 인해 불교계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불교 자주화의 지향이 불교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불교 내부의 문제는 불교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불교계 내부의 각 종단에는 종헌, 종법이 존재한다. 문제가 생기면 종헌, 종법에 의거하여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고, 그렇게 운영을 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종단, 사찰, 불교단체에서도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 작금에도 불교계에서는 종단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사회법에 제소, 해결하려는 행동이 나온다. 이런 문화와 사고가 근절되어야 한다.

셋째, 불교 고유의 전통을 회복하고, 그를 근간으로 생활해야 한다. 불교계 내부의 문제 해결 시에는 종헌, 종법의 기준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하지만 종헌과 종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다수 발생한다. 이럴 경우에는 불교의 전통, 각 본사 전통, 문중 전통으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예컨대 대중공사, 율장, 청규, 관행, 가풍 등 불교의 유산을 활용하고, 그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

넷째, 승려, 승가, 종단의 수행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요컨대 승가, 승단의 청정성이 제고되어, 승가, 승단이 승가답고, 승단다워야 한다. 불교계 구성원들에게서 혹은 불교계 외부의 언론, 시민에게서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청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 그것은 곧 불교와 종단의 치명상이다. 수행 풍토를 진작하는 것이 법난을 극복하는 첩경이다.

다섯째, 승려, 승가, 종단은 사회의식 고취와 중생구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 세상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국가 및 사회의 공동체에서 불교가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족과 국가의 아픔에,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불교가 앞장서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변화를 따라갈 수 없으며 사회로부터 배척당할 여지가 크다.

여섯째, 종단 및 사찰의 운영에 재가신자들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는 지난 수십여 년간 논란이 되어 온 문제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성과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다. 법난을 유발한 진정서와 투서를 남발한 당사자에는 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종단, 사찰, 승려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그런 행동을 하였다. 재가신도들의 종단 및 사찰 운영에의 참여는 어떤 형태로 제도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법난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법난에 드러난 문제점을 대별하여 보았다. 이 문제들은 법난 발발 이후 1980~1990년대의 개혁, 개선, 진보의 과정에서 논란되었고, 반영된 것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인 역사적 과제로 끌어안을 때, 법난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결어

지금까지 10·27 법난의 발발 원인, 배경, 과제를 불교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 글은 필자의 10·27 법난 연구의 첫출발이다. 그리고 10·27 법난에 대한 불교사적인 탐구의 시론의 성격을 갖는다. 이에 적지 않은 문제, 한계가 내재함을 자인한다. 이 점은 지속적인 자료수집, 연구로 보완할 예정이다. 추후 이 분야 연구에서 유의할 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에 대하고자 한다.

첫째, 지속적인 자료 수집을 하고,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들은 불충분하고, 제한적인 자료들이다. 당시 국보위에서 행하여졌던 다양한 문건들을 수집해야 한다. 조계종의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2권의 자료집은 최초의 자료집이라는 위상을 갖지만 미흡한 측면이 있다. 수집 및 발굴된 자료들도 일부분만 편집을 하거나, 노출된 대상 자료들 중에서도 누락된 경우가 많다. 추후에는 보다 완벽한 자료집이 발간되어야 충실한 연구가 가능함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 구술 증언에 유의하고, 그 성과물을 자료집으로 발간해야 한다. 현재 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는 다수의 증언 자료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그 자료는 문화방송(MBC)의 특집방송을 위한 취재 과정에서 나온 것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상당한 한계가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담당 PD가 법난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진행하였지만 아무래도 비전문가로서의 한계가 노정되었다. 최근 증대되고 있는 구술사 분야의 연구서, 이론서, 성과물을 섭렵하고, 10·27 법난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을 겸비한 전문가에 의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법난에 대한 연구 활동이 추진되어야 한다. 10·27 법난에 대한 진실 규명, 명예회복, 학문적 연구, 기념관 및 교육관 설립 등은 이제 출발한 상황이다. 이런 사업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소의 설립을 검토해야 한다. 그 연구소는 전문 연구진의 확보, 연구 예산의 투입, 자료의 보관, 자료 및 구술증언 자료 수집, 연구서 및 대중서 발간, 교육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해야 한다. 연구소가 어렵다면 연구를 추동하는 조직체에서 연구 사업이 수행될 때 진정한 의미의 역사 찾기나 기념사업이 가능하다.

넷째, 정기적인 학술 행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념 세미나는 물론,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와 학술행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여건하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동학농민운동 등 유사 분야와의 비교 연구, 외국의 유사 사례와의 비교 연구 등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수 있다.

지금까지 추후 10·27 법난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여 보았다. 이 방안들이 단시일 안에 모두 달성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할 때 법난 기념사업은 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제시한 내용 이외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을 것이다. 10·27 법난에 관심 있는 학자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관련 위원회 및 기관 단체의 후원을 기대한다. ■

 

김광식 / 동국대 연구교수.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초빙교수,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 역임. 현재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한국 현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등 2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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