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에 뿌리를 둔 모든 생명이 피어나는 지난 4월 18일 새벽, 중년의 한 수행자가 심장마비로 열반에 들었다. 그는 지산(志山) 스님으로 1988년에 입산 출가한 이래 부처님의 정법을 향한 쉼 없이 정진하던 수행자였다.

스님은 부처님의 길, 여래의 원음(圓音)을 찾으려 한국에서 미얀마, 인도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쉼 없이 걸으면서, 다양한 세계 불교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원대한 서원을 세우고 북방의 간화선과 남방의 위빠사나, 티베트불교를 두루 수행하였던 특별한 이력을 가졌다.

출가 전 그는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불교학생회를 통해 불교의 신행을 심화시켜 나갔다. 수행 공간이나 일상에서 본 그의 모습은 준수한 용모뿐만 아니라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과 함께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지적 명민함이 가득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종교, 사상, 과학 등에 대한 앎의 열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가운데 ‘선사상’의 동인으로 번역과 글쓰기 작업을 하였다. 그때 번역해 낸 책들은 《나는 누구인가?》 《일본 십대선사》 《과학시대 불교》 《세속과 초월》 등이다. 그중 《나는 누구인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영성을 일깨우는 책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서른한 살 되던 1988년 오랫동안의 숙제였던 자신의 존재의 본원을 찾아 송광사 법흥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 년간 국내 선원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였다. 수행 초기에는 자유, 사랑, 아름다움 등 3가지 원력을 세웠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간의 영원한 자유, 모든 중생세계의 무한한 사랑, 시간과 공간 자신의 존재함마저 망각할 지고의 아름다움이라 한다.

스님은 세계 불교의 다양성을 넘어 북방불교의 간화선과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티베트불교 교학과 수행 등 세계 3대 불교 흐름을 모두 수행하여 하나로 회통시키겠다는 원대한 발원을 하였다. 구체적 실천 수행은 1998년에 인도 따시종 티베트 사원에서 6개월간 금강승 불교수행을 하는 가운데 오체투지 10만 배를 하며 금생에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 후 1999년 1월부터 미얀마 파욱센터에서 사마타와 찬메센타, 쉐우민센타에서 위빠사나를 3년 6개월간 수행했다. 그 후 귀국하여 남양주의 봉인사에서 위빠사나를 통해 많은 수행자들을 새로운 수행으로 이끌었다.

그 사이 스님은 《붓다의 길 위빠사나의 길》을 탈고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 티베트불교를 제대로 배우고자 발원하고 인도로 향했다.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는 닝마파의 따시종 사찰에서 수행한 데 이어 카규파의 수장 카르마파를 찾아 티베트불교 수행을 했다. 그 중간에 티베트어를 배우고 티베트대장경과 불교서적을 열람하면서 《티베트 불교문화》를 번역하였다. 2008년 겨울 티베트불교 수행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서 12월에 다시 미얀마를 향했고 2009년 3월까지 쉐우민센터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다.

쉐우민센터에서는 마음 관찰을 중심으로 수행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불교의 마하무드라 수행과 많이 닮아 있고 또한 선불교의 관법(묵조선)과 유사하여 환희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세계 삼대 불교를 회통시키고자 하는 발원을 다시 다짐하였다. 귀국한 후 4월에서 12월까지 안성 도피안사에서 정진하였고, 같은 해 12월에서 2010년 3월 계룡산 대자암 제2 무문관에서 100일간 정진을 하였다.

지난 4월 16일에 스님을 만났을 때에도 티베트불교는 정밀하고 체계적인 교학을 가지지마는 힌두교적인 요소가 많다고 하면서, 위빠사나가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라 하였다. 필자의 판단으로 스님의 세계 불교의 회통은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 불교이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이고 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상좌부불교라고 판단하고, 붓다의 가르침 또한 상좌부 시각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스님이 티베트불교를 철저하게 수행을 한 10년 후에는 어떤 판단과 수행법을 제시할지 모르지만, 열반 전까지는 위빠사나가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불교는 공간적으로는 인도를 떠나고 시간적으로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지역과 계층에 따른 다양한 사상과 접목하면서 풍요로워지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이나 종교와 뒤섞이면서 방편이라는 잡티가 늘어났고 그것은 지역의 고유한 불교색이 되었다. 대승, 소승, 남방, 북방이며 티베트불교, 한국불교, 중국불교, 태국불교, 미얀마불교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스님은 위빠사나를 가장 정통 수행법으로 판단을 하면서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수행자의 눈을 열어 준 다양한 수행법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로 수렴하는 수행법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으로 자공 스님이 하동에 짓고 있는 위빠사나수행센터(사단법인 ‘붓다와 함께’)에서 수행과 전법에 전념할 계획을 가졌다. 하동의 수행 공간은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으며, 스님이 거처할 꾸띠(오두막)도 완성되었다. 그곳은 미래 한국불교 수행의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다양한 세계 불교를 회통시킬 요람이 될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그 꿈은 깨어져 버렸다. 아니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스님의 열반이 한국불교계에 만년의 부처님 당시 사리뿟따 존자의 죽음처럼 보일 것이라는 생각한다. 쌍윳따 니까야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마가다의 날라까 마을에서 중병으로 열반에 들자 그의 시자인 사미 쭌다는 사리뿟따 존자의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기원정사로 가 아난다 존자에게 보고하고 이어 부처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약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멍하니 혼미하고 가르침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저에게 조언자였고 상담자였고 저를 가르쳐 주었고, 분발케 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는 담마를 가르치는 데 지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을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가 저희에게 준 담마의 도움, 담마의 풍성함, 담마의 자양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 만년의 사리뿟따의 존재처럼 승가의 사표로서 지혜와 자비가 남달랐다고 한다. 아난다 존자의 고백처럼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수행의 조언자, 인생의 상담자였으며 진리에 분발하게 하였으며 기쁨을 주었고 또한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가게 하여 주었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참으로 준수한 모습에 고요하고 맑고 밝았다. 세속에 사는 필자로서는 절집 안에서 스님의 모습은 잘 모르지만 함께 수행한 몇 분의 스님으로부터도 수선납자로서 순수하고 맑은 성품으로 법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가운데 반듯하게 행동하고 일심으로 정진하였다고 들었다.

또 스님은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환한 미소로 여유롭게 대했고, 모두에게 친절했다. 상대를 한없이 편안하게 하면서 유머 넘치는 언어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혀 나갔다. 명철한 지성과 예리한 판단력 그리고 섬세한 감성으로 다져진 미의식 등이 어우러지면서 상대를 배려하면서 끊임없이 귀 기울이며 설득하고 지칠 줄 모르게 법을 설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에 닦아온 수행의 이력이 배어 있었다. 스님은 하심과 배려가 체화되어 있으며 지혜와 자비심이 가득하였다. 이러한 맑고 향기로운 모습 속에 더 큰 지혜와 자비의 법륜이 구를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졌다.

많은 불자들은 스님의 행원과 안목이 자랑스러웠고, 미래의 한국불교에 큰 빛이 되리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스님과 어느 생에서 다시 해후할지 모른 채, 인연의 바퀴는 여기서 멈추어 서면서 세계 불교 회통이라는 원대한 꿈은 세세생생을 통해 성취해야 할 원력이 되고 서원이 되었다.

스님의 육필 중에 “붓다이시여, ……많은 사람들이 저를 통해 당신께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스님은 미완의 큰 발원을 어느 생인가는 숙명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또다시 이 땅에 왕생할 것이다. 스님께서 원력보살로서 다시 이 땅에 하루속히 오시길 간절하게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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