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대답하게 되는 나의 변명이란 대체로 궁색하기 짝이 없다.

어제 먹은 음식조차 답변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어제 뭐 드셨어요?”라는 질문은 어제의 아침을 묻는 것인지, 점심을 묻는 것인지, 저녁을 묻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고 최종적으로 질문자에게 “아침, 점심, 저녁 중 어느 식사를 물으십니까?”라고 되묻든지, 아니면 이야기의 분위기를 따라 대답하게 된다. 그런데 어제 점심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더라도 먹은 밥이 쌀밥인지, 보리밥인지, 콩밥인지, 그리고 반찬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일일이 다 말해야 하는지, 어느 특정한 반찬 하나만 이야기하면 되는지, 또다시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대화의 골자로부터 멀어져서 바보같이 취급당하기 일쑤다.

흔히 ‘진실(眞實)’이라는 단어를 매스컴이나 책에서 접하게 된다. ‘진리(眞理)’나 ‘정의(正義)’는 제쳐놓더라도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제3자의 궁금증이다. 그런데 사건의 당사자들이 말하는 진실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 수 있는지, 의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정치인들과 관련된 사건에서 그러한 일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 뇌물을 주었다는 사람은 있어도 받았다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 국민의 뜻이라며 거들먹거리지만 거기에 국민은 없다. 또 재판장에서도 원고와 피고인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재판을 기다리는 구속자를 수감하고 있는 구치소에 가면 죄인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들어온 사람들처럼 여겨진다.

내가 어제 먹은 점심을 설명하면서 말할 수 있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만약 된장찌개를 먹었다고 한다면 그 된장찌개에 사용된 재료까지 상세하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 진실일까? 된장찌개에는 부수적으로 따라 나오는 반찬들도 많다. 그런데 된장찌개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도대체 무어라고 말해야 된장찌개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나의 고민은 깊어진다.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진실조차 잘 모르는데 남의 사건까지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어제 경험한 일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오래 전의 진실을 알 수는 있는 것일까?

이제 ‘진실’ 이야기는 그만두고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진리라는 말은 ‘진정한 이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의 진실이 가지고 있는 그 이치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언급해 왔다. 종교들은 저마다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서 신도들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쏟아내며 진리에 한 발짝 다가서려 노력했다. 어떤 하나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거기에 의식적인 행위까지 겹쳐지면 그 철학은 종교로 발전한다. 흔히 말하는 현재의 4대 종교 역시, 어떤 사람들은 부정하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종교로 발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어떤 종교는 절대자로서의 신(神)이 있다고 말하고, 어떤 종교는 절대자로서의 신(神)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종교의 주장이 옳을까? 어쩌면 그 모든 주장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각 종교의 신도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가 진리라고 믿는 만큼 다른 종교의 주장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개종을 요구하는 그들의 눈빛과 말 속에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들의 말을 듣노라면, 지금 당장 개종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번번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는 누님이 한 분 있다. 20여 년 전에 선교사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지금도 틈만 나면 내게 전화를 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 ‘휴거(携擧)가 다가온다’고 한다. 매일같이 메일을 보내온다. 누님의 절절한 심정이 내 가슴을 울리며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누님의 말을 정성스럽게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느끼는 감동이란 안타까움일 뿐이다.

‘난 저렇게 정성스럽게 누군가에게 불교를 설명해 본 적이 있었던가.’ 뭐, 이런 생각이다. 난 누님과 달리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 누님이 믿는 진리와 내가 믿는 진리가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진실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사건조차도 진실로 드러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지나가 버린 일은 그저 지나간 사건에 불과할 뿐, 그것을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실의 판가름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기란 당사자조차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일일까?

내가 불교를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게 된 것도 별로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고등학생 때부터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며 불교를 신앙하였지만 왠지 불교는 할머니들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어서 남들에게 불교를 믿는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 기독교에서 너무 지나치게 선교 활동을 하고, 타 종교를 이단시하는 것이 싫어서 내 스스로 불교인이라고 드러내기 싫었던 점도 있었다. 나는 저들처럼 어느 하나의 종교에 매여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던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우리 학교 교육이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화의 기수에는 언제가 기독교인이 있고 그 반대편에 불교가 있다는 관념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이 나만의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를 신앙한다는 말 속에는 불교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난 최소한 그렇게 믿고 불교를 신앙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내가 믿는 불교와 다른 불교인이 믿는 불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나라에 있는 불교 종파만도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불교 종파가 각각 그 나름의 사상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100가지 이상으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파에 들어가 보면, 또다시 사람마다 생각하는 불교가 조금씩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에 어떤 재가 불교학자가 공부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불교를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듣고 있던 보살님 한 분이 “그건 불교를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불교는 안 그래요.”라며 반박했다. 그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학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모두 이 일을 어쩌나 하며 노심초사했는데, 옆에 있던 어떤 스님이 나서서 그 보살의 입막음을 한 후에야 사태는 진정될 수 있었다.

이런 일이야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각자가 생각하는 불교, 각자가 깨달은 불교는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보살의 태도를 보면서, 내가 아는 불교와 내가 알아야 할 불교 중에 나는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깨침의 미학이란 이렇게 가끔은 남의 실수나 오해를 딛고 이루는 것인가 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실수나 오해도 아름다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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