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은 물론 외출할 때도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다.

서울에는 지하철이 아홉 개 노선이나 깔려 있어서 거의 모든 지역을 지하철로 왕래할 수 있다. 값싼 찻삯도 찻삯이지만, 특히 약속 시간을 맞춰야 할 때에는 지하철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요즘 지하철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문화의 옷을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곳곳에 시를 내걸고 있음은 물론 역사나 객차 안에 붙어 있는 작은 게시물 하나하나에도 문화의 향기가 은은히 서리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볼 때마다 향긋한 감흥에 젖곤 한다. 시민의 발이 된 지 이미 오래인 교통수단으로서 지하철이 교통수단 이상의 가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민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 승객으로서 내가 느끼게 되는 흥취는 주로 지하철회사, 곧 서울메트로나 서울도시철도가 붙여 놓은 게시물의 문구를 통해서이다. 상업광고의 우격다짐하고는 거리가 먼 문구들이 빚어내는 말맛이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지하철 1, 2, 3, 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가 객차 안에 붙여 놓은 고객콜센터 안내문에서 “時時콜콜”이란 말을 만났다. 절묘했다. 24시간 하루 내내[時時], 그러니까 낮이나 밤이나 아무 때나 전화[call]하면 된다는 사실과 매우 하찮고 사소한 일까지도 전화[call]하면 해결해 준다는 의미를 이 말은 담고 있지 않은가. 지하철 5, 6, 7, 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에서는 이런 게시물을 만났다. “제1회 愛-say 공모전−사랑을 말하세요.” 지하철과 관련된 사랑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공모한다는 것이었는데, ‘에세이(essay)’를 “愛-say”로 풀어낸 언어 감각이 놀라웠다.

우리 겨레의 언어 감각이 날로 세련되어 가고 있다. “時時콜콜”과 “愛-say”의 경우 외국어와의 결합을 통해 빚어낸 말이라서 조금 아쉽기는 해도 소통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 한마디 말로써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잘된 것이었다.

‘완경(完經)’이란 말이 새로 생겼다. ‘여성의 월경이 없어짐. 또는 그런 상태’를 일컫는 ‘폐경(閉經)’을 대체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일단의 페미니스트들이 처음 쓰기 시작한 이 말을 곰곰 헤아려 보면 참 잘 만든 말이지 싶다. 여성에게서 일어나는 그것을 ‘닫힘’이나 ‘단절’의 의미로 새겼을 때보다 ‘완성’의 의미로 새겼을 때 한 여성의 생애가 온전히 빛나지 않는가. 이 말 속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찰을 넘어 모성에 대한 지극한 찬미가 담겨 있다.

‘완경(完經)’이란 말처럼 ‘죽음’을 ‘완생(完生)’이라 고쳐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말 속에는 죽음을 일컫는 말이 참으로 많다. 그 말이 그렇게 많은 것은 언중(言衆), 곧 우리 겨레가 그만큼 죽음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그 여러 말들이 죽은 사람의 생애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 사람이 생애를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쏟아부었을 그 수많은 번민과 노력을 잘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셨다’는 고유어도 그렇고 ‘별세(別世)’ ‘서거(逝去)’라는 한자어도 그렇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갔다’는 의미만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쓰고 있는 ‘소천(召天)’이나 ‘선종(善終)’ 같은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 쓰고 있는 ‘열반(涅槃)’이나 ‘해탈(解脫)’ ‘입적(入寂)’ ‘입멸(入滅)’은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는 있으나 일반 대중이 폭넓게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렵다.

얼마 전에 나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구십 생애를 누리시다가 큰아들네 안방에서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작지 않은 체구이셨지만 어린아이 네댓이면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로 당신 육신을 비우고 비워내신 다음이었다. 이렇게 먼 길 떠나시는 어머니를 뵈며 떠올린 것이 ‘완생(完生)’이란 말이었다. 죽음이란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생애를 살아온 이가 가슴 가득 품었던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겪어야 했던 눈물겨운 희로애락을 그냥 그렇게 무화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생각한다. 말을 이어가며 생각을 한 올 한 올 이어간다. 그러므로 말이 없으면 생각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 말맛이 좋은 말을 즐겨 쓰다 보면, 그의 삶도 어느덧 고양된다. 물론 말맛이 좋지 않은 말을 즐겨 사용하다 보면, 그의 삶은 자꾸만 누추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하철에 내걸리는 문구 하나하나에도 우리가 세심히 배려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지막 호흡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완성한다는 적극적 의미로서 ‘죽음’을 ‘완생(完生)’이란 말로 고쳐 부르고 싶다. 그렇게 쓰다 보면, 자기 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 더욱 애쓰게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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