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등산로도 아닌 산 속을 다닌 까닭은 산삼을 캐기 위해서였다.

사촌 백씨인 화촌 형님은 위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예가였던 화촌 형님은 내게 “우리 이름이 서로 비슷해서 요즘 날더러 소설도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며 내가 소설가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아무런 약도 소용이 없는 형님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폐사지에 가서 신라 시대의 기와를 주워 갖다 드리기도 했다. 오래된 기와를 달구어 배에 대면 난치병에 효과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삼베 같은 흔적이 새겨진 천 년 전의 기와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무렵, 내게 글을 배우는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심마니들과 아주 친했다. 나는 그와 함께 주말이면 산삼을 캐러 다니기 시작했다. 산삼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하니 혹시 효험이 있을까 해서였다.

산삼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나는 김천 황악산 깊은 곳에서 산삼 열 몇 뿌리가 균형 잡힌 모습으로 한 군데 모여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바위에 앉아 ‘아, 저걸 갖다 드려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좀처럼 통화가 되지 않는 산속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앉아 있는 바위는 전파가 잘 떨어지는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벨소리를 들으며 나는 형님이 죽었다는 전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전화를 받았을 때 막 형님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산삼을 한 뿌리 캐와 어린 딸에게 주었다. 자주 병원 신세를 지곤 하던 애가 지금까지 아프지 않지만 정작 선물을 받아야 할 이는 결코 그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문득 문득 산속을 헤매다니곤 했다. 처음에는 산삼을 찾기 위해 산을 올랐지만 몇 시간을 계곡을 오르내리다 보면 산삼을 찾는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나 자신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내가 내가 아니고,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것들이 덧없이 가벼워지고 없어져 버렸다. 인기척 소리에 놀라 산비탈을 달려 오르는 고라니며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꿩들만이 정적을 잠시 흔들 뿐 산속은 언제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산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어느새 생겨났다. 길도 없는 계곡과 등성이를 가로질러 수런거리는 나무들 앞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도 저무는 해를 뒤따라오는 청색 어둠처럼 고요해지곤 했다. 노래를 부르노라면 나무들은 청중처럼 이파리를 흔들며 박수를 쳐대는 것 같았다. 나는 나무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절했다. 그래도 나무들은 내 노래를 들었을 것이고, 날더러 시끄럽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노래를 부르다가 목이 쉬면 나는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산삼을 찾으러 다니곤 했다.

산에 올라 노래도 부르고 더덕도 캐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산삼도 캐면서 나는 길 없는 산에 나 있는 세 개의 길을 보았다. 희미한 길이 나 있어 따라가 보면 무덤이 나왔다. 잡풀이 뒤덮여 있는 무덤은 후손이 찾아오지 않은 지 오래되어 봉분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양지바른 곳이어서인지 고사리도 모여 서 있고 은방울과 둥글레가 서로 싸움질을 하며 무리지어 있었다. 한때 후손들이 벌초하러 다녔던 길이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 허물어진 봉분처럼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후손들은 봉분이 어디 있는지 위치조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제법 선명한 길도 있었다. 그 길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군데 군데 짐승들이 쉬어 간 흔적이나 배설물이 있었다. 그 길은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다니는 길이 있고 그 길 가운데 가장 안전한 곳에서 쉬어가곤 했음을 안다. 나도 산을 오르내리다가 지치면 그들이 쉬었던 자리에 앉아 짐승처럼 쉬곤 했다. 짐승들이 쉬어 간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한 길은 산 아래까지 흐릿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에 나무하러 다녔던 길이다. 요즘은 더 이상 땔감을 하지도 않고 장터에 나무를 내다팔지도 않기 때문에 무수히 다녔던 그 길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산속을 돌아다니면 산삼과 나무와 풀들이 내게 전해 주는 가르침이 있다. 산에 있는 식물 가운데 산삼처럼 균형 있게 서 있는 식물이 없다. 다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흩어져 있지만 산삼은 다섯 개 이파리를 길고 짧게 내뻗으면서도 황금분할처럼 균형을 갖추고 우뚝 서 있다. 산삼은 내게 균형 잡힌 것이 참으로 힘이 세다는 것을 전해 주었다.

나무와 풀들도 인생처럼 결코 평화롭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 준다. 침엽수와 활엽수의 경계선에는 그들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풀들도 마찬가지다. 척탄병처럼 경계선에 선 쪽이 힘이 부쳐 다른 한쪽에 밀리면 어느새 상대 쪽에 점령당하고 만다. 둥글레와 은방울꽃이 세력다툼을 하던 곳을 이듬해 가 보면 은방울꽃이 둥글레를 밀어내고 세력을 넓히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저잣거리와 산속이 그리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다만 그들은 패배를 받아들일 뿐이다. 산속 깊이 혼자 핀 꽃도 안간힘을 다해 피어 있는 시간을 유지하다가 진다. 번성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뜻인지.

세 개의 길을 수없이 지나고 노랫소리마저 산을 넘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노을이 질 때까지 나무처럼 팔을 벌리고 서서 오래 귀를 기울인다. 나무처럼 서 있으면, 여름 가고 겨울 가고 세월이 흘러서 내 몸속으로 수액이 흐르고 발밑으로 뿌리가 내릴까. 나무도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기울인다는 뜻일까? 나는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뒤늦게 전업 작가를 하면서 입속에 황금모래를 가득 물고 있는 기분이 들면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나무처럼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선다. 삶이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무의 운명을 사랑해야 하는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사람이 나무가 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기다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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