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켄 윌버의 《무경계》(김철수 옮김, 무우수)를 읽고

1. 들어가며: 저자를 위한 책과 독자를 위한 책

언제부터인지, 나는 책을 읽는 재미를 잃었다. 한 권을 소화하는 데도 며칠, 아니 몇 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이 흐르기도 한다. 매 학기 초면 읽을 거라고 책을 수십 권씩 사고, 그렇게 사둔 책이 일 년 내내 서고에 꽂혀 있는 경우도 태반이다.

내가 책을 읽는 재미를 잃은 것은 물론 읽을 만한 책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상서라는 것들이 대개 그렇지만, 내가 접하는 많은 책들이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저자를 위한 책이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저자를 위한 책은 독자를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글의 논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강요한다.

독자를 억지로 우물까지 끌고 가 물을 마시라고 윽박지른다고나 할까. 반면 독자를 위한 책은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삶의 지혜도 선사한다는 게 특징이다. 저자를 위한 책과 달리 독자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책에 빠져들어 끝(마지막 페이지)을 보지 않고는 잠 못 들게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 독자를 유혹하는 사상서가 과연 얼마나 될까? 어쩌면 내가 직업상 책을 가까이 하다 보니, 이렇게 책을 선별하는 습관이 생겼는지 모른다. 또 고른 책들 중에서도 나의 영혼을 가꾸고 살찌우기 위한 책보다 당장 강의를 하는 데 필요한 것부터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나의 구분, 즉 좋은 책, 나쁜 책이 있을 수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내가 아무 책에나 쉽게 빠져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책을 읽을 여유로운 시간이 충분치 않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책 읽기에 지친, 짓눌린 나에게 어느 날 《무경계》란 책이 나의 망막에 맺힌다.1) 무경계? 이 책도 물론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이다. 무경계? 그래 내가 요즘 고민하는 것이 바로 경계 때문이 아니던가? 내가 이제까지 수많은 책들과 씨름하는 것도 결국은 경계를 초월하기 위한 연습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내가 철학을 전공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내가 요즘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 어떻게 하면 경계를 초월할 것인가가 아닌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계들을 짓고 또 그 속에서 수인처럼 살고 있는지를, 그 배타적 경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심하게는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무경계》는 바로 이렇게 누구나 삶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경험하게 될 다양한 심리적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일소할 수 있는지를 저자의 통찰력과 혜안으로 소상히 밝히고 있는 책이다. 《무경계》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딱딱한 사상서들처럼 무언가를 독자들에게 주장하는 책이 아니라 차분하게 독자들을 설득시킨다는 점에서 사뭇 특별한 책이다. 불교계에서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사상서들처럼 단지 “집착을 버려라”, “자신이 지은 경계들로부터 벗어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책은 마치 우리가 거울을 쳐다보듯 일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고통들을 독자가 스스로가 반추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임상의학적으로 상세하게 안내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다르다. 이런 점에서 《무경계》는 독자가 직접 책의 주인이 되게 한다. 저자를 위한 길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와 같이 길을 동반해준다고나 할까.2)

켄 윌버(Ken Wilber, 1949~ )의 《무경계》가 갖는 흡입력과 재미가 이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이 책을 약관(弱冠)의 나이에 집대성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교 교리에 대한 깊이는 수 십 년을 수행한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논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서양의 의학과 동양의 불교 및 노장 사상, 정신분석과 선(禪)이 이보다 더 찰떡궁합을 이룬 경우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고백컨대, 《무경계》는 최근 들어 책을 읽는 재미를 잃어가는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옥고(玉稿)였고, 경계들을 오가며 고통스러워하는 나에게 마치 죽비를 내리치듯 “정신 차리라”고 경책(警責)하는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켄 윌버와 같이 이미 무경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는 도저히 쓰여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무경계》는 초프라(Deepak Chopra)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프로이트, 마르크스, 아인슈타인이 세계관을 바꾸어 놓은 것만큼이나 새로운 세계관의 창시자로 인식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책이고, 슈워츠(Schwartz)는 이 책을 “프로이트와 부처의 결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무경계》가 서양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온갖 경계를 지어 편을 가르고, 그 인위적 구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꼭 일독 했으면 좋을 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무경계》의 내부로 독서 여행을 시작해보자.3)

2.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는 《무경계》의 제1장 제목이기도 하다. 이 물음에 대해 데카르트라면 ‘생각하는 존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의 저자 A. 카뮈는 ‘저항하는 존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소비사회》의 저자 J. 보드리야르는 ‘소비자’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켄 윌버의 이 물음은 이와 같은 즉답(卽答)들로 쉽게 해소되는 질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물음은, 그의 말대로, “나의 진정한 자기는 무엇인가? 나의 근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23)라는 물음이기에 그렇다.4) 바꿔 말해, 이 물음은 우리가 쉽게 내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대답들보다 훨씬 근원적인 물음이라는 뜻이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켄 윌버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방식은 x, y, z로 대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켄 윌버는 오히려 x, y, z로 대답함으로써 범하는 경계짓기의 오류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고 할 때 도대체 어떤 일이 수반되는지에 그는 주목한다.

“자신이 ‘자기’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그저 내적으로 느낄 때, 당신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모든 경험의 장을 가로지르는 정신적인 선(線)이나 경계(境界)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라고 느끼거나 자기라고 부른다. 한편 그 경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비자기(not-self)라고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24).”

요인즉,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나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에 소속된 것’의 일부로 대답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자신인 것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긋고” “단지 그 안쪽에 있는 것을 묘사하면서 답한다.(25)” 그리고 그것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일반적으로 착각한다. 문제는 이렇게 착각함으로써 “경계선은 〔언제든지〕다시 그어질 수 있고(25)”, “모든 경계선이 또한 잠정적인 전선(戰線)이라는 점, 따라서 하나의 경계를 긋는 것은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47~8)”을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켄 윌버가, 마치 미셀 메이에르가 문제제기론에서 제기했던 것처럼,5)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켄 윌버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물음을 통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경계의 문제이며,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의 문제(48)”라는 데 있다.

부언컨대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만 이렇게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음들에 대해 경계를 긋고, 자신이 속한 쪽에 유리하게 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보니 다른 쪽, 즉 자신이 속하지 않은 쪽은 이 과정에서 부정되거나 제거되는 것이다.

그의 정확한 지적대로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경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립을 다루려고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경계 자체의 존재를 결코 의문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를 실재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대립이란 영원히 격리된, 화해할 수 없는, 분리된 것이라고 완고하게 생각해버린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신과 악마,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자기와 타인은 (…) 말하자면 낯과 밤만큼 다르다(49)”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여기에 《무경계》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다. 요컨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계 자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고통과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바로 이 ‘잘못 그어진’ 경계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6)

《무경계》에 대한 이상의 소개만으로도, 독자들은 켄 윌버가 우리에게 안내하려는 곳이 어디인지 충분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가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려는 것인즉 “안 없는 밖, 아래 없는 위, 패배 없는 승리,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51)”는,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전혀 분리할 수 없는 것(50)”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무경계》의 핵심 내용이다.

때문에 우리는 켄 윌버가 왜 《도덕경》의 다음 구절을 인용했는지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하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드러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대며, 앞과 뒤는 서로를 뒤따른다.”(51)7)

그런데 어떤가? 우리는 과연 켄 윌버가 지시하는 경지에 있는가 아니면 너무도 많은 경계들의 수인으로 사는가? 만일 우리가 경계들의 수인으로 산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는가?

경계는 인위적 산물이고,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의 소산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결국 이 무지와 무명을 타파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무지와 무명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계와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현재 순간,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각성(40)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켄 윌버는 몽상가라기보다 임상의학자이며, 하나의 이론에 안주하는 자가 아니라 끈질긴 자기의식의 탐험가이다. “의식의 신세계(21)”, “지고(至高)의 정체성(25)에 대한 그의 탐험의 결과물이 다름 아닌 《무경계》인 것이며, 무경계의 지평에서 본 ‘나’는 다음과 같이 4단계(수준)로 분류된다(28~33 참조).

첫 째가 페르소나 단계로, 이 수준에서 ‘나’는 자신의 이미지나 그림자를 자기 정체성으로 착각하며, 아직은 전개인적(prepersonal) 상태에 머물러 있다. 두 번째는 자아가 형성된 단계로, 이 단계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는 “최초의 경계(84)”가 세워지며 ‘자기조작’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질적인 영역이나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은 부정하고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강하게 표출된다. 문제는 그럴수록 ‘나’는 점점 자신은 물론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분리심만 심화된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자신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세 번째 단계는 소위 “개인을 넘어선 어떤 과정이 개인 내에서 일어나는(30)” 차원이다. 이름하여 초감각적 지각 활동에 의해 ‘나’가 자기/비자기의 경계를 초월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前)유기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즉 이 세 번째 단계에서도 ‘나’는 아직 지고(至高)의 정체성, 우주와의 합일의식에 이른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최소한 경계 가로지르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결국 《무경계》가 지향하는 합일의식의 단계다. 이 단계에 이르러 자기/비자기, 나/세계가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31)”를 이룬다. 다시 말해, ‘나’가 “우주와 일체”가 된다. 즉 우주적 유기체로서 ‘새로운 나’가 탄생된다.8)

이렇게 ‘새로운 나’를 자각하는 최종 단계에 이르면, 그 때 인간의 의식은 소위 ‘항상적 의식’이자 순수한 공(空)이 된다. 켄 윌버가 스콧 워렌과의 인터뷰에서 강조하고 있듯,9) 여기서 “공이란 개념이 아니라 단순하고 직접적인 각성”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공을 각성하게 되면 유형(有形)의 세계 전체가 무형(無形)의 의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에 따르면 “공과 의식은 동일한 실재에 대한 두 개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전체가 순간순간 생겨나는 광대한 개방성과 자유이다. 공이란 이 순간 우리 자신에 대한 원초적 자각이다.

공이란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근원적인 영(靈) 그 자체이다.”10) 이상의 논의를 켄 윌버는 각 단계에 부합하는 구체적 치료기법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상·하위 할 것 없이 각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생기(生起)할 수 있는 특정 병리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하고 치료받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이 직접 치료를 할 수 없을 경우는 전문가의 지도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11)이 도표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한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이다. 즉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동 가능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단계를 제외한 모든 단계는 각각 그에 적합한 나름의 수행법 내지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켄 윌버가 인간 의식의 스펙트럼을 동서양의 사상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하나로 종합하여 이룬 나름의 업적이고 성과다.

이에 근거해 볼 때, 모든 인간의 의식은 이완되고 긴장하는 것에 따라, 하강하고 상승하는 것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와 합일된 진정한 자기(眞我)를 찾아 무경계라는 존재의 근원에 다다를 수고 있고 아집(我執)에 갇혀 경계들의 수인이 될 수도 있는데, 이는 각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각자는 현재 ‘나’의 단계가 과연 어디인지, 가늠해볼 일이다.12)

‘나’의 현 위치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최대 관건은 당연 모든 경계의 마술, 경계짓기의 우상(偶像)들을 꿰뚫어본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켄 윌버의 설봉(舌鋒)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실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실세계에는 선(線)은 있지만, 그 어떤 실질적인 경계도 없다(57).”

4. 글을 맺으며: 지금, 여기의 무경계에서 성불(成佛)해야

그렇다. 켄 윌버의 말대로, 실재의 세계에는 경계가 없다. 뒤집어 말해 모든 경계는 단지 인위적 환상일 뿐이다. 인위(人爲)를 놓으면 결국 인간도 자연과 우주의 일부일 뿐이요, 모든 존재가 “대립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속에 “하나의 살아있는 현존 그 자체(19)”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듯 무경계는 철저히 비이원성(nonduality)과 불이(不二)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 이치를 켄 윌버는 힌두교는 물론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켄 윌버가 인용하고 있는 《능가경》의 한 구절을 재음미해보자.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이 서로 별개의 것이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단독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인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본질적으로 사물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61)켄 윌버가 강조한대로, 실재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은 곧 실재가 무경계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따라서 대립의 투쟁을 해소하는데 필요한 것은 서로 투쟁하는 대립 중 어느 한 쪽만을 취해 재주부리기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경계를 명도(明渡)하는 것이 핵심이다.

부언컨대 대립의 투쟁은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생긴 하나의 증상일 뿐이다. 그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는 환상적 경계라는 문제의 근원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62 참조). 요인즉 “문제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자연의 실제 영토를 경계가 완비된 관습적 지도로 만들어낸 다음, 그 둘을 〔우리가〕 철저하게 혼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59) 따라서 무경계를 깨달은 자, 합일의식에 이른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이 온통 경계들의 소굴일 것이요 격렬한 전쟁터를 보는 듯 할 것이 뻔한데, 불행히도 그것이 우리의 속세 풍경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시시비비의 원인이 여기에 있고, 이는 재삼 강조하지만 “둘이 아니고 하나”인 “실재 위에 덧씌운 경계들”(61) 때문이다.

무지와 무명의 풍기(風氣)가 센 곳에 경계들의 파고(波高)는 당연 높을 수밖에 없다. 분류하기, 이름짓기, 식별하기 등이 모두 경계의 전도사들이다.13) 이 경계들로 인해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들이 얼마인가. 이 경계들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이 또 얼마인가.

서양에서 인간의 자연 지배의 역사,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e)와 개인주의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반면 이 모든 경계가 불교에서처럼 한낱 환상에 불과하고 가공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14) 바로 그 순간 지금, 여기가 불국토(佛國土)로 변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밖에는 어떤 과거도 어떤 미래도 없기 때문에 이 순간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121) 《六祖壇經》에서 설하고 있는 대로, “따라서 〔경계도 제한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 평화이다. (…) 여기에는 영원한 기쁨만이 존재할 뿐이다.”(121)지금, 여기에서의 절대적 평화와 영원한 기쁨, 이것이 우리 불자가 추구하는 이상향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경계의 파도타기를 일삼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거나 기웃거릴 이유가 없지 않는가. 《무경계》에서 켄 윌버가 말한 소위 합일의식의 정체가 이것이며, 또 이것이 불교에서 강조하는 본래 깨달음이자 수행(本證妙修)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모든 것들을 인위적 조작이나 경계적 분리심을 발동하지 않은 채 관(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재 이 순간이 영원한 지금이다. 이는 곧 지금, 여기가 대립의 조화, 긍정과 부정이 화음(和音) 상태에 있는 우주라는 말과 같다.

요인즉 바로 무경계를 여여(如如)하게 살라는 것. 자연(우주)과의 합일을 마다하며 경계들 속에서 허덕이는 자여, 무경계의 대양 위에 ‘나’의 집을 지어보겠다고 안달하는 이여,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등을 돌리고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예나 지금이나 “길은 있건만 그 길을 가는 자가 없으니”(《淸淨道論》), 진리의 등불을 켜는 자도, 그것을 지키려는 자도 외롭지 않겠는가!(95) ■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프랑스 부르곤뉴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논문으로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 서양인들에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 <일상어와 시어, 시와 선시 - 선시론의 정립을 위한 일 모색>, <J. 데리다와 G. 들뢰즈의 차이와 용수의 중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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