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 서론

한반도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고구려에서는 372년, 백제에서는 384년, 신라에서는 527년이다. 이렇게 도입된 한국불교는 시대마다 그 과제가 달랐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여러 교종 간의 대립을 화해하고 조화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고, 이 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람이 원효,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에 선종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화해하고 조화하고자 하는 것이 과제였고, 이 과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사람이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이라고 하겠다. 의천과 지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선종과 교종의 화해를 추구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이제 국면이 바뀐다. 조선조에서는 유교(성리학)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 쪽에서는 유교의 배불(排佛) 논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유교·불교·도교의 3교조화론을 주장하였다. 이 3교조화론의 주장도 시대의 요구에 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립되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서양 문물(가치관)이 중심을 이루고 전통문화에 근거한 가치관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따라서 불교 쪽에서도 서양 문물(가치관)에 적극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 말에 들어서서 또 다른 현상이 생겨났다. 그것은 남방 상좌부불교가 한국불교에 적극적으로 소개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대승불교’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남방 상좌부불교에 대해 ‘소승불교’라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남방 상좌부불교에 대한 불교 대중의 인식이 점차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 이면에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여러 폭력 사태와 조계종이 청정한 승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래서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공부하고 수행한 사람이 남방 상좌부불교는 석가모니 불타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한 것인 데 비해서 한국불교는 힌두교의 요소가 섞인 대승불교를 계승한 것이어서 남방 상좌부불교보다 열등하다고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수행법에 관해서는 대립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조계종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을 수행하다가 결국 건강만 해쳤다는 말이 간화선 수행자 사이에서 떠돌면서 자연스럽게 남방 상좌부불교의 위빠사나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일부의 위빠사나 수행자는 ‘위빠사나’가 석가모니 불타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는 종교적 권위를 제시하며, 그에 비해 조계종의 간화선은 중국 선종의 조사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고 깎아내린다. 게다가 위빠사나 수행법은 친절하고 단계적이어서 수행의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 반해서, 간화선의 수행법은 비장한 각오만을 너무 내세우고 수행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몇몇의 위빠사나 수행자는 비판하기도 한다. 그에 대해 일부의 간화선 수행자는 간화선이 한국불교의 전통이고, 간화선을 수행해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법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그칠 것이라고 대응한다.

이 글에서는 앞에서 말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대립 현상에 주목하고, 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을 제시하여 두 수행법의 대립 현상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글의 진행에 대해 말하면, 2장에서는 위빠사나를 소개하고, 3장에서는 간화선에 대해 알아보며, 4장에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을 살펴보고, 결론 부분에서는 그 차이점을 통해서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서술하고자 한다.


2. 위빠사나의 소개

위빠사나(vipassanā)는 팔리어 ‘vi’와 ‘passanā’의 합성어이다. ‘vi’는 ‘관통하다’ ‘분리하다’ ‘쪼개다’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passanā’는 관찰, 식별, 봄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의미는 ‘꿰뚫어 봄’이라고 할 수 있고, 한역 경전에서는 위빠사나를 관(觀), 관법(觀法)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위빠사나는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마음지킴(念, sati)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자신이 잡념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또는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고 깨달아서 모든 번뇌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법이 가장 잘 소개되어 있는 경전이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글에서 ‘위빠사나’라고 할 때는 초기불교의 《대념처경》 등에서 말하는 내용과 현대 남방불교의 현대적 수행법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위빠사나에 대해 3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둘째, 한국에서 유행하는 ‘위빠사나’는 현대화한 수행법이라는 점을 알아보며 셋째, 위빠사나 수행 형식에 대해 알아보고, ‘위빠사나’와 ‘칠각지’의 관련성을 검토한다. 

1)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개괄적 설명 

위빠사나 수행법은 《대념처경》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먼저 《대념처경》의 내용을 알아보고,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위빠사나 수행법의 근거가 되는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온다. ‘사념처’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이다. 신념처(身念處)에서는 호흡의 출입, 몸의 동작, 몸의 행동, 몸의 구성 요소 32가지, 몸의 4대 요소, ‘묘지에서 몸이 부패해가는 9단계의 과정’에 대해 알아차림을 말하고 있다. 수념처(受念處)에서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알아차림을 제시하고 있다. 심념처(心念處)에서는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 등을 알아차림을 말하고 있다. 법념처(法念處)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오온(五縕), 육입(六入),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알아차림을 제시하고 있다.

위 《대념처경》의 내용에 근거해서 현재 미얀마와 태국 등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스승들은 각기 자신의 독자적 가풍(家風)을 펼쳐 나간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하시(Mahasi) 사야도 계열의 수행센터에서는 ‘신념처’에서 ‘몸의 동작’과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을 중심으로 위빠사나 수행법을 가르친다.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계승한 슈웨우민(Shwe Oo Min) 사야도는 ‘심념처’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고엔카(S.N.Goenka)는 ‘신념처’의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과 ‘수념처’를 중심으로 가르치며, 모곡(Mogok) 사야도는 ‘심념처’와 ‘법념처’를 중심으로 해서 가르치고, 테잉구(Theinngu) 사야도는 ‘수념처’에서 ‘괴로운 느낌’을 중심으로 가르치며, 파욱(Paauk) 사야도는 사마타[止]를 먼저 익히게 한 다음에 위빠사나를 수행하도록 한다.

2) 현대화한 수행법으로서 위빠사나

현재 한국에서 ‘위빠사나’로 알려진 수행법은 초기불교(상좌부불교)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지만, 초기불교의 내용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변형된 것, 곧 현대화 한 것이다. 그 내용을 미얀마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본다.

19세기 후반까지 미얀마 상좌불교의 전통에서 수행이란 일부의 수행자에게 국한된 일이었다. 그런데 민돈 왕(Mindon, 재위 1853~1878)은 왕궁에서 수행을 실천하기에 이르렀고, 1910년대를 지나면서 전문적인 수행센터가 설립되고 출가자와 재가자에게도 위빠사나 수행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우누 수상에 의해서 위빠사나 수행법이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우누 수상은 우 트윈에 의해 설립된 ‘불교협회’의 창설 멤버이고, 특히 마하시 사야도를 초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미얀마에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보급된 데에는 다음의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정부의 지원도 한 가지 원인이고, 훌륭한 스승을 따르려는 재가자의 노력도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하겠으며, 마하시 샤야도의 교학과 수행의 능력도 또 다른 원인이다.

이상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면,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이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3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과거에는 전문적인 소수의 수행승이 숲 속의 수행처에서 수행을 하였던 데 비해서 현대의 위빠사나에서는 많은 수행자들이 좋은 여건의 수행처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19세기까지 수행은 일부의 승려, 곧 교학 연구에 안목이 있으면서 충분한 연령에 이른 승려만의 특권이었던 데 비해서, 현대 위빠사나에서는 수행이 불교의 재가자에게도 열려 있고, 나아가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수행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점이다. 셋째, 과거에는 ‘위빠사나’가 조직적으로 수행된 적이 없었던 데 비해서 현대의 위빠사나에서는 모든 연령의 수행자, 곧 재가자, 승려, 여성 출가수행자(thila-shin)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고, 이들이 수행센터에 머물면서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러한 점에서 조계종의 간화선과 대비된다).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전통의 바탕에는 3가지 불교경전과 논서가 있다. 그것은 《초전법륜경》 《대념처경》 《청정도론》이다. 《초전법륜경》에는 팔정도의 가르침이 소개되어 있고, 《대념처경》에는 사념처 수행이 제시되어 있으며, 《청정도론》은 5세기 붓다고사가 지은 저술로서 이는 남방의 상좌부불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다.

3) 위빠사나 수행 형식과 칠각지

위빠사나, 곧 사념처의 수행 형식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대념처경》의 설명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주로 닦는 것이고, 《입출식념경》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좌선을 통해서 닦는 것이다. 그리고 사념처 수행과 칠각지는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1)일상의 활동 속에서 닦는 사념처

사념처의 수행 형식이 일상의 활동 속에서 닦는 것이라고 《대념처경》에 분명히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대념처경》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일상의 활동 속에서 수행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념처의 내용에서 수행 형식의 표준이 되는 것은 ‘몸의 동작’과 ‘몸의 행동’에 관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비구들이여, 걸어갈 때는 ‘걸어간다’라고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이 외의 다른 몸의 동작이 있을 때 그러한 동작을 그때그때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지킴)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한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도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분명한 앎을 지니고,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니고, 가사(승복)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고,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신념처의 수행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분명하게 주시하는 것(알아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대념처경》에서는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를 일상의 활동 속에서 주시한다는 표현은 없다. 그렇지만 수념처 가운데 “어떤 수행자가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 속에는 일상의 활동을 지칭하는 단어는 보이지 않지만,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는 것은 먹을 때, 마실 때, 잠자리에 들 때,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 침묵하고 있을 때, 말하고 있을 때 등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수념처에서 일상의 활동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주시한다는 표현이 없더라도 그런 내용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는 심념처와 법념처에도 마찬가지다.

심념처에서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또는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탐욕이 있는 마음이 벌어지는 것도 일상의 활동이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일상의 활동을 벗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것이다. 법념처에서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관한 부분에서 “비구들이여, 여기에 내적(內的)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일상의 활동 속에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감각적 욕망이 있음을 주시하고,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없다는 것을 주시한다.

이러한 내용, 곧 사념처 수행이 일상의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음의 경전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만일 비구가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동안 관능적이거나 미워하거나 공격적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묵인하지 않고 내쫓거나 버리거나 제거하며 그것을 소멸시키려 한다면 그는 그 속에서 머물면서 다시 진지하게 노력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단호한 사람이다.

만일 비구가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동안, 탐욕·분노·게으름과 나태·불안과 근심을 떠나고 쓸데없는 의심을 버린다면, 그는 강하고 견고해질 것이고 그의 염처(마음챙김)는 방심하지 않고 명확할 것이고, 그의 몸은 흥분하지 않고 고요하며, 그의 마음은 집중되고 모아질 것이다.
 
(2) 좌선을 통해 닦는 사념처

사념처 수행을 좌선 수행과 결부 지어서 말한 경전은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들숨날숨의 마음챙김이라는 경)》이다. 이 경전에서는 결가부좌를 하고 들숨과 날숨을 주시하면서 신념처 수행을 하고, 그다음에는 들숨과 날숨을 계속하면서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바꾼다. 그리고 이 경전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칠각지(七覺支)를 성취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3)사념처 수행과 관련된 칠각지

앞에서 칠각지가 사념처 수행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 칠각지의 항목은 어떤 것인가? 칠각지의 첫째 항목은 염(念)이다. 이는 수행자에게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항목은 택법(擇法)이다. 이는 법을 택해서 지혜로 고찰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셋째 항목은 정진(精進)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마음챙김[念]이 확립되었을 때, 이미 그 대상도 정해졌을 것이므로 ‘택법’도 이루어졌고, 또한 ‘정진’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음챙김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첫째 항목[念] 속에 이미 둘째 항목(택법)과 셋째 항목(정진)은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넷째 항목은 희(喜)이다. ‘희’는 마음챙김을 하는 속에서 세속적 욕망이 없는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섯째 항목은 경안(輕安)이다. ‘경안’은 기쁜 마음을 느낀 다음에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여섯째 항목은 정(定)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수행자가 그 다음에는 마음집중의 단계에 들어간다. 일곱째 항목은 사(捨)이다. ‘사’는 집중된 마음이 내적으로 평온해지는 것이다. 이는 선정조차도 넘어서는 경계이고 이 때 진정한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칠각지의 설명 방식은 다양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칠각지 항목은 염(念), 택법(擇法), 정진(精進), 희(喜), 경안(輕安, 猗), 정(定), 사(捨)인데, 이 항목들은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수직적으로 발생하는 측면도 있다.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염’각지를 충실히 닦는다는 것 가운데 나머지 항목인 택법 등의 항목도 아울러 다 닦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한 ‘염’각지가 되기 위해서는 택법(擇法)부터 사(捨)까지를 모두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발생적인 측면은 ‘염’각지를 닦고서 택법, 정진, 희, 경안, 정, 사를 순서대로 닦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미로 보자면, ‘염’각지를 닦는다고 할 때 이미 ‘택법’과 ‘정진’의 의미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고, 그 다음에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기쁨인 ‘희’가 생기고, 그 다음에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경지인 ‘경안’이 생기며, 그 다음에 ‘선정’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선정’도 넘어서는 ‘사’에 도달하는 것이다(그런데 《입출식념경》의 칠각지 설명은 횡적인 의미인지 발생론적인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3. 간화선의 이해 

중국의 선종은 크게 4개의 종파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북종, 하택종, 홍주종, 우두종이다. 북종은 마음을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고, 하택종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제시하고 있으며, 우두종에서는 삼론종의 영향을 받아서 공(空)사상을 부각시키고 있고, 홍주종은 선종의 주류로서 여기서 5가7종이 생겨났다. 이 홍주종 계열을 ‘조사선’이라고도 부른다. 홍주종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마조도일은 평상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이어받아 임제의현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깨달음이 유지된다고 한다. 임제의현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법에는 애써 공부할 것이 없다. 다만 평상(平常)이고 일이 없을 뿐이다. 화장실에 가고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그대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모두 진실이다. 설령 번뇌가 남아 있더라도 오무간업(五無間業)이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가 된다.”

남송 시대에 들어서서 임제종의 양기파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이 간화선의 단서를 제공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간화선을 제시하였다. 이 간화선은 한국에서는 보조지눌이 처음 수용하여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였는데, 보조지눌은 ‘돈오점수’와 ‘간화선’의 관계에 대해 고심하였다. 고려 말의 3대 선사, 곧 나옹혜근, 태고보우, 백운경한은 간화선을 재료로 사용하여 제각각 개성을 발휘하였고, 조선시대 서산대사로 알려진 청허휴정은 《선가귀감》에서 간화선에 강조점을 두는 수행체계를 정비하였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서 3문(三門)수행, 곧 염불과 진언을 수행하는 ‘염불문(念佛門)’, 교학공부를 의미하는 ‘원돈문(圓頓門)’, 간화선 수행의 ‘경절문(俓截門)’이 성립되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조사선은 ‘광의의 간화선’이고, 대혜종고가 제시한 수행법을 ‘협의의 간화선’이라고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대혜종고가 제시한 수행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대혜종고의 간화선은 조사선의 내용을 계승한 것이고, 24시간의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들라고 하면서 그 귀결은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다(이 점에서 현대 위빠사나 수행법에서 수행의 초심자를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베푸는 것과 구분된다.). 

우선, 대혜종고는 조사선의 내용을 계승한다. 대혜종고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면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에서 깨달음이 유지되어서 마음이 고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조도일이 평상의 마음이 도(道)라고 말한 것과 통하고, 임제의현이 “다만 평상이고 일 없을 뿐이다. ……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모두 진실이다.”라고 말한 것과 통한다. 이 점을 대혜종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심식(心識)이 고요해서 한 순간이라도 생각이 움직이는 곳이 없다면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한다. 깨달음이 이미 바르다면 24시간의 일상생활[日用]에서 색(色)을 보거나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거나 맛을 알며 촉각을 느끼거나 법(法: 관념의 대상)을 알며,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동작과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있을 때에도 고요[湛然]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또한 스스로 전도(顚倒)된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 수행자에게] 생각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수행자의 경지는] 모두 청정하며, 이미 청정하다면 [수행자가] 움직일 때는 고요한 것[湛然]의 용(用)을 드러낼 것이고,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고요한 것[湛然]의 체(體)에 돌아갈 것이다. 비록 체(體)와 용(用)이 다르지만 고요한 것[湛然]에서는 하나이다.

그리고 대혜종고가 그의 편지글을 모은 《서장(대혜보각선사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전에 어떤 경지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생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대혜종고는 주장한다. 그래서 대혜종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를 알면 전체를 알고, 하나를 깨달으면 전체를 깨달으며, 하나를 증득하면 전체를 증득한다. 이는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베는 것과 같아서 한번 베면 한꺼번에 끊어진다. 끝없는 가르침[無邊法門]을 증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어떠한 단계도 없다. 그대가 ‘개에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깨친 것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대혜종고는 일상의 활동에서 무(無)자화두를 참구하라고 한다. 이는 무자화두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바닥까지 꿰뚫어서 생사를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무자화두를 잘못 참구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며 그렇게 참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례처럼 무자화두를 참구하면, 생사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근(意根)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생사를 넘어설 수 없고, 선지식이 선문답할 때 격외(格外)의 도리로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을 깜박이거나 하는데 진정한 체험 없이 이런 모습을 흉내 내는 것으로 생사를 넘어설 수 없다. 또 언어를 통해서 깨달음의 근거를 제시해 보았자 그것은 언어의 장난일 뿐 생사의 문제와 관계없다는 것이며, 무위(無爲)의 도인(道人)인 척 아무 일 없이 우두커니 지내는 것도 자신의 내면은 공허한데 거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써서 보여 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자신의 체험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생사의 문제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 대신 일상의 활동에서 순간순간 무자화두를 잡아들고 순간순간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하였다. 이 무(無)라는 한 글자야말로 수많은 잘못된 앎과 지각을 무찌르는 무기이다. 이 무(無)자 화두를 참구할 때는 있다[有] 없다[無] 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이치로써 이해할 수 없으며, 의근(意根)으로 생각해서 분별할 수 없고, 눈썹을 치뜨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 근거를 두지 말아야 하며, 언어를 통해 근거를 제시하지 말아야 하고,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있어서도 안 되며,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서 답을 구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문자를 통해서 증명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다만 24시간 동안의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동작 가운데서 순간순간 [무자 화두를] 잡아들고[提撕],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擧覺].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라는 화두를 일상생활[日用]에서 떼어놓지 마라.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살펴본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볼 것이다. 그때는 세상 어느 일에도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내 가슴 속에는 생생한 조사의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조사의 뜻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약 일상생활[日用]을 떠나서 따로 구할 곳이 있다면, 이는 파도를 벗어나서 물을 구하는 것이고, 그릇을 벗어나서 금을 구하는 격이어서,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질 뿐이다.

그러나 대혜종고가 무자화두만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대혜종고는 운문 선사의 ‘마른 똥막대기’ 화두를 들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대혜종고는 운문 선사의 ‘수미산(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허물이 있습니까? 수미산)’, 조주 선사의 ‘방하착(하나의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내려놓아라.)’의 화두를 참구할 것을 제시하며, 나아가 ‘죽비자(竹篦子)’ 화두,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다 마셔버린다’는 화두,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도 공부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혜종고가 생사에 벗어나는 것을 강조하고 엄격한 수행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대혜종고가 36세 때 스승인 원오극근에게 자신의 견처를 말하면서 해결책을 구하였다. 대혜종고는 깨어 있을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데, 꿈속에서는 황금의 보배를 좋아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꿈속에서도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죽음이 엄습해 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원오극근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원오극근은 대혜종고의 망상이 끊어져야 비로소 ‘깨어 있는 상태’와 ‘잠자는 상태’가 한결같은 경지인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대혜종고는 스승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뒷날 대혜종고가 다시 깨달음을 얻고서 ‘깨어 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가 한결같은 경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체험을 한 대혜종고는 제자에게도 그 경지를 엄하게 추궁한다. 대혜종고는 유보학(劉寶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일상생활[日用]의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동작에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가 한결같이 유지되는가? 움직일 때와 고요히 있을 때에도 화두가 한결같은가[움직일 때와 고요히 있을 때에 공부가 서로 구분되지 않는가]? [화두 공부에서] 꿈꿀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은가? [그대의 경지에서] 이(理)와 사(事)가 일치하는가? 마음과 대상세계가 모두 일치하는가?”이는 화두 공부가 단순히 고요히 있을 때에만 되어서는 안 되고, 움직일 때도 화두 공부가 유지되어야 하고, 나아가 꿈을 꿀 때도 깨어 있을 때처럼 화두 공부가 유지되는지 묻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 자신의 경지가 궁극에는 이(理)와 사(事)가 일치하는지, 마음과 대상세계가 완전히 합치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래야만 비로소 생사에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4.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간화선은 대승불교에 속하고 위빠사나는 소승불교에 속하는 것이기에 서로 공통점이 없다는 말인가? 이 방면의 선행연구에 따르면, 일상의 활동에서 마음챙김을 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알아본다.

월폴라 라훌라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공통점에 대해 마음챙김(mind-fulness)은 자아의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식에서 벗어나서 현재의 순간에 살고 현재의 행위에 충실하라는 말이고, 이는 중국불교의 선종에서도 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내용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챙김은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또는 ‘나는 저것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거나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대는 행동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관념 속에서 사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은 망쳐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야 하고, 자신이 하는 일 속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연설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의식하고 ‘내가 청중에게 연설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연설은 방해받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은 혼돈스러워진다. 그러나 연설자가 자신의 말 속에, 자신의 주제 속에 자신을 던진다면, 그 연설자는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해서 말도 잘 할 것이고 사물을 분명하게 설명할 것이다. 모든 예술적, 시적, 지적인 측면의 위대한 업적은 다음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곧 창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 속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그래서 자기 자신도 함께 놓아버려서 자아의식에서 자유로울 때이다. 자신의 행위에 관한 마음챙김은 불타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고, 이는 현재의 순간에 살고 현재의 행위에 살라는 말이다.(이것은 선종의 방식이기도 한데, 선종에서도 앞에서 설명한 가르침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묵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隨觀)는 화두와 법이라는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을 통해서 마음이 혼매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추구하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으로 송위지 교수는 간화선은 모든 동작의 상황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모든 동작의 상황에서 스스로 그런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 점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앞에서 소개한 견해에 동의하며,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에 대해 2가지 주장을 새롭게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간화선도 사념처 가운데 법념처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위빠사나처럼 간화선에도 칠각지의 맥락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1) ‘법념처’의 한 요소로서 간화선의 화두

우선, 앞에서 말한 내용을 좀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념처 설명 가운데 신념처에서 일상의 활동 속에서 그때그때 마음챙김(지킴)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고, 이는 《대념처경》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에도 적용된다고 2장에서 지적하였다. 그리고 대혜종고가 주장한 간화선도 화두에 대해서 24시간 동안의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동작과 일상의 활동(생활)에서 순간순간 화두를 잡아들고 순간순간 깨어 있는 것이라고 3장에서 말하였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일상의 활동에서 마음챙김을 하는 것이고, 간화선은 일상의 활동(생활) 속에서 화두를 잡아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간화선은 위빠사나처럼 일상의 활동 속에서 마음챙김을 하는 것인데, 다만 그 마음챙김의 대상이 ‘화두’라는 것이 위빠사나와 다른 점이다.

이 지점에서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사념처 수행 가운데 법념처에 주목해 보자. 《대념처경》에 따르면, 법념처의 내용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 오온, 육입, 칠각지, 사성제에 대해 일상의 활동 속에서 마음챙김을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장애 등은 불타의 가르침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은 법념처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공(空)이 《대념처경》에 소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空)이 법념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념처의 목적은 다섯 가지 장애 등을 마음챙김을 함으로써 열반을 얻는 데 있는 것인데, 공(空)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하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법념처의 범위를 확장해서 공(空)도 법념처에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선종의 ‘화두’도 법념처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화두는 선종의 조사의 가르침이므로, 화두에 대해 마음챙김을 하면 열반(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화두에 대해 마음챙김을 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다.《대념처경》에서 법념처의 대상으로 다섯 가지 장애 등을 거론한 것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법념처의 대상은 확장될 수 있고, 그 가운데 대승불교의 공(空), 선종의 ‘화두’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간화선의 화두는 《대념처경》의 법념처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분모로서 ‘칠각지’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공통점은 앞에서 말한 내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2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입출식념경》에서 사념처를 들숨과 날숨의 수행 속에서 설명을 하고, 그리고 나서 사념처와 칠각지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칠각지에 관한 내용이 간화선을 설명하는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에 위빠사나와 간화선 수행의 공통점이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4대 고승에 포함되는 운서주굉(雲棲袾宏, 1535~1615)이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에는 여러 선사의 견성 체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철산소경(鐵山紹瓊) 선사가 말한 내용은 발생론적 측면의 칠각지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는 칠각지 가운데서 ‘염’ ‘택법’ ‘정진’ ‘희’ ‘경안’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석상(石霜, 807~888)의 처소에 갔는데 [그곳에서] 상암주(祥庵主)가 콧구멍의 공간을 항상 관(觀)하라는 내용을 읽고 [그 가르침대로 공부하였더니] 마침내 청정한 경계를 얻었다. 그 후 어떤 승려가 설암(雪巖)의 문하에서 왔는데 [그 승려에게서 설암의 《좌선잠(坐禪箴)》을 빌려서] 설암의 《좌선잠》을 써 가면서 보니 나의 공부경계는 아직 설암의 《좌선잠》에서 말하는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설암의 처소에 가서 설암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였다. [거기서는] 오직 무자화두만을 잡아들었다. 4일째 밤에 이르러서 온몸에 땀이 흐르고 매우 상쾌하였다. 그래서 법당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오로지 좌선만을 한결같이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콧구멍의 공간을 항상 관해서 청정한 경계를 얻은 것’은 세속의 욕망에 벗어난 기쁨에 얻은 것, 곧 칠각지의 ‘희(喜)’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청정한 경계를 얻었을 때 세속에 물들지 않은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콧구멍의 공간을 관했다’는 표현 속에는 ‘염’ ‘택법’ ‘정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콧구멍의 공간을 관할 것을 택한 것이 ‘택법’이고, 이 관법을 계속 수행한 것은 ‘정진’이고, ‘택법’과 ‘정진’이 아울러 있을 때 염(마음챙김)이 어느 정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암의 처소에 가서 무자화두를 잡아들었는데 4일째 밤에 온몸에 땀이 흐르고 매우 상쾌하였다”는 것은 칠각지의 ‘경안(輕安)’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매우 상쾌한 것을 체험한 것은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철산소경은 큰 환희를 동반하는 ‘선정’을 체험하였고, 그 뒤에 화두를 깨뜨렸다. 그 뒤에 철산소경은 몽산(蒙山, 1231~1308년경)화상을 만나서 몽산 화상에게 ‘선정을 익혀서 번뇌를 없애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더욱 공부해서 깊은 선정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선정공부가 더욱 깊어졌다. 그 뒤로 철산소경은 《신심명(信心銘)》의 가르침을 접하고 견처(見處)가 열려서 공부가 한 단계 올라섰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칠각지의 ‘경안’을 체험한 뒤에 ‘선정’을 체험하고, 그 뒤에 더욱 미묘한 선정을 닦은 뒤에 마지막으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맨 마지막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칠각지의 ‘사(捨)’의 경지와 일치한다고 추론한다. 칠각지를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 선정을 뛰어넘는 평온한 경지[捨]는 궁극의 깨달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은 위빠사나와 간화선이 《대념처경》의 법념처 수행이라는 공통된 측면이 있고, 간화선에도 ‘위빠사나’처럼 칠각지의 맥락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빠사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대념처경》(또는 초기불교 경전)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고,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이 《대념처경》에 근거를 두고 현대화한 것이므로, 간화선이 현대 위빠사나 수행법과도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마하시 위빠사나의 경우에 걷기 수행[行禪]과 일상 행동에서 관찰하는 수행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간화선에서 24시간 동안 일상의 활동(생활)에서 화두를 챙기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현대 위빠사나 수행법은 여러 가지이므로 간화선과 개별적으로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근거 없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의 일부는 위빠사나를 수행하면 일시적인 마음의 평화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위빠사나 수행자의 일부는 위빠사나는 석가모니 불타가 제시한 수행법이고, 간화선은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인 선종의 조사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위빠사나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 두 견해는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바라본 것으로서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공통점, 곧 불교 수행법의 보편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서 ‘세계불교’라는 거대한 시각 속에서 ‘한국불교 문화’를 어떻게 진작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5.결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상호 발전 

이제까지의 내용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공통점에 관한 것이었고, 이런 공통점이 있으니 서로 비난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고, 그 차이점을 통해서 서로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한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점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간화선은 남송시대에 제시된 것이고(현재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대혜종고의 간화선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이며),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수행법이기는 하나 이것이 미얀마 등에서 현대화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위빠사나는 ‘교학 연구에 안목이 있으면서 충분한 연령에 도달한 승려’만의 전유물이었던 데에 비해서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은 불교의 ‘재가자’와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 있고, 그리고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에서는 재가자와 승려와 여성 출가수행자가 잘 갖추어진 수행센터에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 이 점이 시사하는 것은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에는 재가자를 포함한 수행의 초심자를 위한 수행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고, 그 프로그램의 특징은 ‘수행의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지도’와 ‘근기에 따라 방편을 베푼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간화선을 공부하고 지도하는 사람은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비교할 때 《대념처경》의 법념처의 범주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대혜종고의 간화선에서 확인하였듯이, 간화선에서는 생사의 바다를 넘어서고 가장 뛰어난 경지를 얻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 수행의 초심자를 위한 배려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에 비해, 한국불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들은 수행 초심자를 위한 배려에서 독특한 색깔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간화선 수행법이 현대화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은 현재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수행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조계종의 수행문화에서는 출가와 재가의 이분법적 사유가 자리 잡고 있어서 재가자는 ‘수행’보다는 ‘복’을 구하는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고, 출가자는 수행을 통해서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안거의 횟수가 출가자의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되고, 출가자의 종교적 신성을 나타낸다.

이런 풍토 속에서 재가자의 수행은 출가자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이러한 경향 속에서는 재가자에게 수행을 지도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난다(물론 예외적으로 일부의 한국사찰에서 재가자에게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행은 출가자의 전유물이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수행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는 출가자에게도 손해로 다가온다. 출가자가 재가자에게 수행법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에 출가자의 지도 능력도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조계종은 선종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수행이 조계종의 문화에서 중심점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현재 조계종의 수행문화는 친절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간화선의 수행에서 지도자의 친절한 상담이 있어야 하고, 지도자의 자상한 점검이 있어야 하며, 또한 지금처럼 간화선 중심의 경직된 태도에서 벗어나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간화선의 현대화이자 대중화이고, 나아가 간화선과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을 비교해 볼 때 간화선 쪽에서 시급히 도입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간화선 속에서도 앞에서 거론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는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간화선에서도 발생론적 측면의 칠각지의 맥락이 발견된다고 하였는데, 이 점은 간화선 수행에서도 수행의 초심자가 단계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간화선 쪽에서 현대의 위빠사나 수행법에서 배워야 할 점에 대해 주로 서술한 것이다. 그렇지만, 위빠사나 쪽에서도 간화선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만약 앞에서 말한 대로 간화선이 법념처의 한 종류로서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간화선의 존재는 사념처에서 법념처 해석의 지평을 넓혀 주는 계기가 된다.

초기불교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 오온, 육입, 칠각지, 사성제에만 법의 개념을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점에서 월폴라 라훌라는 법념처의 해석을 더욱 유연하게 하고 있다. 월폴라 라훌라는 법념처 수행을 윤리적·정신적·지적인 주제에 관한 명상이라고 보고 있다. 윤리적·정신적·지적인 주제에 관한 모든 공부, 독서, 토론, 대화, 숙고가 법념처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간화선이 법념처의 한 종류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은 월폴라 라훌라의 견해를 지지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칠각지’ 해석에서도 간화선에서 하나의 시점을 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간화선에서도 ‘칠각지’의 맥락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칠각지’ 해석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이다. 첫째 항목 ‘염’각지에서 시작해서 ‘택법’ ‘정진’을 거쳐서 그 다음에 ‘희’ ‘경안’을 얻고 그리고 나서 ‘선정’에 들어간 다음에 그 선정마저 넘어선다는 것[捨]이 칠각지의 내용이다(칠각지의 발생론적 이해이다). 여기다 간화선을 수행할 때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고요할 때와 움직일 때 화두가 한결같이 유지되는지[動靜一如], 꿈속에서도 화두가 한결같이 유지되는지[夢中一如],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할 때에도 깨어 있을 때처럼 화두가 계속 유지되는지[寤寐一如] 여부를 따지는 간화선의 엄밀함은 칠각지의 수행에서 선정의 개념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게다가 ‘광의의 간화선’에 포함되는 ‘조사선’의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는 위빠사나 수행자도 존중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임제의현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법(佛法)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세이고, 이러한 개방성은 조사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초기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에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사선만큼 활발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은 점은 분명하다. 위빠사나에서도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에서 수행에 임한다면 더욱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을 만나서 잘 적응을 한다면 본래의 문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이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만나서 도전을 받고 있지만, 이 도전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면 한국불교 문화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

 

이병욱 / 고려대, 중앙승가대 강사. 1995년 〈천태지의 철학사상 논구〉로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 저서로 《천태사상》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에세이 불교철학》 《인도철학사》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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