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가르침에서 보면 참 나 곧 진아(眞我)란 무한공간, 무한시간으로서의 우주(宇宙)다. 원시불교의 오온무아설(五蘊無我說)이 의미하는 바에는 ‘고(苦)의 실체가 없다’ ‘아소(我所)의 부정’ 외에도,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그리고 구공(俱空)’의 삼공(三空)이 있다.

이는 나도 비었고, 대상도 비었고, 내가 비고 대상도 비었다는 사실도 비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삼공은 진공(眞空)이 되고, 진공은 곧 묘유[眞空卽妙有]가 된다. 그렇다면 이 묘하게 존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대아(大我)요, 우주적 자아요, 우주와 내가 하나인 일상(一相)이다.

이 일상이야말로 진아요 본래면목이며,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따라서 진아는 곧 우주 자체다. 이 시공의 제약을 초월한 존재인 우주적 자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없고 여기, 저기, 거기가 없다. 또한 너, 나, 그도 없고 네 것, 내 것, 그의 것도 있을 수 없다. 이에 범부중생들의 자아 관념, 시공 관념, 소유 관념이 부정된다.

그런데 우주는 알고 보면 ‘지금여기(here and now)’다. 무한공간, 무한시간이 가장 큰 나로서의 우주라면 지금여기는 가장 작은 나로서의 우주다. 이때 가장 큰 나와 가장 작은 나는 둘 다 진아지만, 진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큰 나와 작은 나는 하나다. 즉, 하나의 우주를 가장 크게 말하고 가장 작게 말했을 뿐, 이것이 크건 작건 ‘절대유일(絶對唯一)의 실체’라는 측면에서는 똑같다.

이처럼 무한공간, 무한시간[우주]이 지금 여기와 등가(等價)임을 잘 알려주는 것이 의상대사(義湘大師)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라는 최소 공간 속에 시방세계라는 무한공간이 들어 있고[一微塵中含十方]…… 한 생각이 일어나는 찰나적인 시간이 곧 무한대의 시간과 동일하다[一念卽是無量劫]”는 말이다. 의상 대사는 중(中)과 즉(卽)의 논리로써 우주와 ‘지금여기’가 다른 것이 아님을 잘 설파하고 있다.

진아, 본래면목, 중도실상인 ‘지금여기’를 제대로 자각하면 아집(我執)과 아상(我相)이 사라지고, 업장(業障)이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집과 아상이란 가짜 나[假我]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집과 아상에 바탕을 두고 나온 행위가 곧 탐진치(貪瞋痴) 삼독을 발생시키고, 이 삼독은 업장을 형성한다. 업장은 업감연기(業感緣起)하여 고를 일으키고 윤회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업장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업장의 소멸이란 곧 전식득지(轉識得智)를 가리킨다. 이는 제8식인 아뢰야식[무의식]에서 근본무명식(根本無明識)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바뀐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것이 이제 제7 말나식[잠재의식], 제6 의식의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를 거쳐서 전오식(前五識)에서 성소작지(成所作智)를 낳는다. 이는 하화중생, 상구보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이다. 이때 현실을 감수감각(感受感覺)하는 전오식에서의 언행은 그대로 무루선적(無漏善的)인 보살행 즉, 자비행이 된다. 그러면서 무한한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이러한 전체 과정을 유식학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진아인 ‘지금여기’를 어떻게 자각할 것인가? 호흡이야말로 지금여기 그 자체다. 따라서 호흡을 자각하면 된다. 그러면 진아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말하자면 호흡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호흡이 곧 지금여기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며, 진아의 깨달음으로 가는 진리의 관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진리가 비근한 일상 속에 있음을 말해 준다.

불경에서는 이처럼 가까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함을 일찍이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를 찾음’에 비유한 바 있다.

‘지금여기’를 자각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지금여기 호흡 알아차리기 수행’이다. 이것을 필자는 시공일체선(時空一體禪) 수행으로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호흡은 시공일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공일체선을 수행하면 어떠한 효과가 나타나는가? 필자는 가장 작은 나인 ‘지금여기’란 절대유일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나로서의 우주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우주세포(宇宙細胞)’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우주란 무수히 많은 지금여기라는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는 것이다.

생명체라면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금여기라는 세포 속에는 우주라는 생명체의 신령스러운 기운인 우주영기(宇宙靈氣)는 물론이고 이때까지의 우주의 온갖 정보가 온전히,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에 시공일체선 수행을 하면 먼저 우주영기가 내면에 들어온다. 이것은 그대로 정력(定力) 곧 집중력이 된다. 그러면 정혜일체(定慧一體)의 원리에 따라서 우주의 정보에 대한 통찰력과 관찰력이 생긴다.

그리하여 우주의 정보를 보고 듣고 자각하게 된다. 시공일체선 수행을 극진히 하면 최고의 정력을 유지하게 되고, 그러면 최고의 통찰력을 갖게 되며, 이에 따라 우주의 정보를 남김없이 자각하게 된다. 그 최종 결실은 ‘지금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現在進行: ∼ing]함’이다. 보적장자(寶積長者)가 말한 “무심의이현행(無心意而現行)”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성불(成佛)의 삶이다.

그렇다면 시공일체선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계(持戒)를 바탕으로 날숨―앉아 있음―들숨―앉아 있음―날숨을 무수히 반복하면 된다. 숨을 내쉬면서 내쉼을 알아차리고 들이쉬면서 들이쉼을 알아차린다. 앉아 있음이란 내가 중도실상 자리, 본래면목 자리, 진아의 자리에 앉아 있음이다. 제대로 앉아있다면 일체의 분별심과 사량심(思量心)이 개입될 수 없고, 날숨과 들숨의 알아차림에도 추호의 어김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앉아 있음이다.

불교는 일찍부터 경전을 통해 ‘지금여기’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불교계가 아직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이에 그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수행의 생활화를 통해서 보다 많은 한국의 불자(佛者)들이 진아에 입각한 지혜와 자비, 나아가 지복(至福)의 삶을 향유(享有)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