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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보수주의 불자의 푸념 / 탁효정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탁효정 미디어붓다 기자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집 앞에는 ‘광산 탁씨 종친회’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안동에서 한참 들어간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나마 면소재지에 위치한지라, 장이 서는 날이면 우리 집은 집안 어르신들로 북적거렸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직후 장날마다 내가 할 일이 정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집에 들르는 어르신들에게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분위기를 스윽 봐서 머리숱이 얼마 없으시다 싶으면 “할배 오셨니껴!”라고 외치고, 머리숱이 많다 싶으면 “아제 오셨니껴!”라고 외쳐야 했다. 내가 잘못 짚어서 촌수로 아저씨뻘 되는 분에게 “할배 오셨니껴!” 하고 외치면 우리 아버지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아제다.”라고 한마디 하시곤 했다.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나에게 돌아오는 동전의 숫자 또한 늘어났으니, 지금도 깍듯한(?) 나의 인사성은 여기에서 출발했던게 아닌가 싶다.

뿐만이 아니다. 외갓집과 큰집이 모두 한 동네에 위치한 터라 아침에 등교할 때는 외할머니한테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친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때는 쭈쭈바와 새우깡 또는 복숭아, 찐옥수수 같은 것들이 인사의 대가로 돌아오곤 했다.

오가는 금품 속에서 할머니들과 집안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느끼며 성장한 내가 가족, 집안, 가문, 종친을 최고의 가치라 믿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커 갈수록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치사회적 포지션은 언제나 ‘진보’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들 또한 하나같이 진보주의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김일성을 인간의 탈을 쓴 돼지로 묘사한 만화를 단체관람하면서 성장한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학교 밖의 민주주의가 다른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농활 온 대학생들이 붙여 놓은 대자보 속 끔찍한 사진들을 통해 광주사태를 알게 되고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전교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선생님을 눈물 콧물을 쏟으며 떠나보내야 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강경대를 비롯한 10여명의 언니 오빠들이 쇠파이프에 맞아죽거나 스스로의 몸에 신나를 껴안고 불타오르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는 보수라는 말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진보=공공의 선’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왜 진보주의자가 됐을까 하는 의문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사 강좌를 듣고 그 즈음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언급되는 보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 진보주의자들에게 존경받는 보수주의자라고 하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진보는커녕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조차 존경받는 보수주의자가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왜 보수와 수구의 구분이 불분명할까? 왜 진정한 보수들조차 스스로 보수임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일까? 보수라는 것이 무언가를 지키고 이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 시대에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불교라고 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를 믿고, 조선시대의 가치와 사상을 연구하고, 민족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이념이라고 믿는 내가 어쩌다가 보수가 아닌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게 되었는가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우리나라의 이분법적인 진보―보수의 개념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라는 말이 대부분 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 사용된다. 보수라고 공격받은 이들은 자신이 진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편에게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보수−진보 논쟁은 제멋대로에다, 몰개념적이며,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에 건강한 철학을 지닌 ‘진짜 보수’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이다.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한국전쟁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는 반일, 반공, 반미라는 개념이 너무도 크게 자리 잡았고, 또 한편으로는 서구 문화에 대한 엄청난 동경과 환상을 품게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전통적인 가치들은 보수꼴통, 구닥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버려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보수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치적 보수주의자는 있지만, 심정적 보수주의 즉 전통주의자들은 거의 없음을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정당을 지지한다고 해도, 민족이라는 공동체의식을 존중하고 전통적인 가치와 이념을 계승하는 것은 일종의 심정적 보수(전통주의)에 해당된다.

보수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사회적 책무가 따른다. 이들은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보다 세금도 훨씬 더 꼬박꼬박 내야 하고, 불법주차는 한 번이라도 덜해야 하며, 군대에서 총알 한 방이라도 더 쏴야 한다. 우리가 지닌 기존의 전통적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구 내지 보수를 빙자한 이권세력과는 명백하게 구분된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불교는(적어도 다수의 불교도는) 보수의 종교, 보수의 철학을 지향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1,700년의 역사를 지닌 유구한 종교 집단이자 사상 체계이다. 이들은 과거에는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국가적인 이익을 대변했고 한반도의 민중들이 추구할 만한 가치와 이념을 생산해 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불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불교가 과연 시대적 의제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이 보수정당을 자처하는 이들이나, 보수의 대변인임을 자처해 온 대통령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진정한 보수’여야 할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믿는다. 또한 가장 큰 책임이 일차적으로 불교 또는 유교의 지식층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지금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 유교라는 종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유교라는 종교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소수의 유학자들조차 자신들은 학자이지 종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조선시대 500년의 수난기를 거치면서 역동성은 물론 사회적 책임감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부처님은 비록 카스트 제도를 부정한 리버럴리스트였을지 몰라도, 한반도에서의 불교는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1,700년간 제1종교로 역할해 온 기득권층의 종교가 아닌가. 따라서 이들은 시대적 의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고,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전통의 가치에 대해 응답해야 하며, 아노미 상태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깊은 영성의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존재이다.

나는 지금의 불교를 보면, 수십년 뒤에는 지금 유교가 당하고 있는 설움을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불교계 기자를 올해로 9년째 하면서 요즘 들어 특히 구멍 난 배에 올라타고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불교는 전통의 현대적 가치를 제시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의 철학적 토대도 제공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을 때도, 용산의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에 의해 죽어갔을 때도 가장 먼저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데모대를 끌어안은 이들은 천주교 사제들이었다. 스님들은 천주교 사제들이 미사를 올린 그 자리에서 목탁 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도 불교계는 “자랑스런 불자를 믿는다.”는 말만 했지, 왜 줄기세포 연구가 진행돼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가 천주교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미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이등종교로 전락했다. 기독교보다도 신도 수가 적고, 사회적 신뢰도에서는 천주교에 밀렸다. 어린이 포교, 청소년 포교, 대학생 포교 또한 고사 직전까지 치달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실정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불자들을 양성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쳐 버렸다.

나는 불교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법은 사회적 신뢰도의 향상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본래적인 가치, 즉 보수철학에 기반해 사회적 의제에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무엇인가, 우리가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불교가 구체적인 대답을 해 줄 때 비로소 눈밝은 젊은이들이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면 젊은 청년불자들이 확보될 것이고, 대학생^청소년^어린이 포교는 그때부터 차차 나아가면 된다.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의식구조 개선과 적극적인 사회활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불교가 이 시대의 가치철학을 제시해야 한다. 환경운동, 봉사활동과 같은 사회적 실천은 그 가치철학에 수반돼야 하는 것들이다. 줄기세포 연구는 왜 가능하냐, 미국소 수입은 왜 안 되느냐, 종교편향은 왜 안 되느냐, 4대강 사업이 왜 안 되느냐에 대해 불교 철학으로 설명하고, 현대인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지금처럼 ‘그건 비불교적이라서’ ‘생명이 다치니까’ 하는 낭만적인 발언은 집어치우고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연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다음 괄목할 만한 성과물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진짜 보수’다운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갖추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얼마 뒤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이다. 나는 ‘보수’를 지지하는 이 글을 쓰면서 괜시리 노 전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의 미래’를 걱정하며 봄날 후두둑 떨어지는 모란 꽃잎처럼 스러져간 이상주의자를 떠올리며 나는 왜 보수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질까?

나는 나중에 내 자식이 커서 혹시라도 자신을 가리켜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쓰게 될 때, 해마다 5월이 되면 대지 위를 흩날리는 붉은 꽃잎들을 바라볼 때, 지금의 나 같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보수적인 세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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