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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종교지형의 변화 / 윤승용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윤승용 seyoyun@yahoo.co.kr


1.서론

미군정은 해방 당시 좌익 또는 중도 우위의 사회를 친미 우익사회로 전환하여 분단국가를 건설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민족국가에 대한 신앙 대중의 열망을 기능적으로 관리하면서도 소수의 우익세력이 다수의 중도와 좌익을 뒤집는 과정이기 때문에 분단국가 수립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해방공간의 과제였던 일제 잔재의 인적 법적 청산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새로운 사회 구성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좌우 이데올로기 차원을 넘어 민족의 미래 진로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또한 미군정의 정책들을 계승한 이승만 정권은 냉전체제하에서 자유진영의 최첨단 전진기지로서 역할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해방공간의 좌우대립만이 아니라 분단국가 수립이후에도 치열한 남북 대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의 정점에서 있는 사건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이같이 분단국가의 건설과 한국전쟁은 친미반공이라는 차원에서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 정점인 한국전쟁에서 그 이데올로기는 비로소 내면화되고 제도화된다.

한 사회의 종교지형의 변화는 ①각 종교의 내적인 역량 ②사회구조적 변화 ③종교시장의 변화 등이 추동한다. 여기서 각 종교의 내적인 역량이라면 인적 물적 자원과 교리의 재해석 능력을 의미한다. 교리의 재해석 능력에는 각 종교의 이데올로기적 시선도 포함된다.

그리고 해당사회 전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전쟁과 같은 대형 사건은 대체로 종교적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데, 이때 전쟁의 성격에 따라 사회구조가 변화되고, 그 변화의 방향에 따라 신앙 대중이 요구하는 신앙적 성향도 달라진다. 이렇게 종교시장의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기본적으로는 반영하는 것이지만 예외적으로 시민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곳에서는 국가의 종교시장 개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종교지형의 변화는 각 종교가 가지고 있던 내적 역량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의 종교시장 개입과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종교시장의 변화가 중요한 함수가 된다. 그래서 이 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종교지형의 변화와 그 특성을 종교시장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 구체적으로 분단국가 건설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종교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형성한 종교시장의 변화와 한국전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종교시장의 변화, 이 두 가지의 변화가 이전의 종교지형을 바꾸어 놓은 원인이자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 전후에 나타나는 종교시장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종교지형의 형태와 그 특성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의 효과적인 서술을 위해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왜 종교시장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당시의 종교지형의 변화를 꼭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종교시장 중심의 서술은 기존의 개별 종교 중심이나 종교문화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서 전체 사회와 관련해서 종교문화 전반을 살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본 주제가 해방 이후 한국종교의 전반적 흐름과 한국사회 흐름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 양자의 접합점이 되는 종교시장을 등장시켜 서술의 범위를 제한해 보려고 하였다.

또한 전쟁 이후 한국종교에 일어난 많은 현상들이 반드시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어 생긴 것인지를 구분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어쩌면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서 나타난 결과일 수 있고 또 시간적으로도 장기간에 걸쳐 그 영향이 나타나는 예도 많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특정 종교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증폭되었다면 이글 에서는 그것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간주하고 서술할 것이다.

2.분단국가 건설과 종교시장 

1) 미군정기의 종교시장

한국사회는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와중에서 유례 없는 격동기를 맞는다. 한국종교 역시 이 같은 좌우대립과 맞물리면서 교단의 재건과 분열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었거나 통합되었던 여러 교단들이 다시 재건되는 가운데 일제 잔재 청산의 범위와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려 재건과 분열의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단 재건 과정에서 교단을 맡을 지도자 선정을 두고서도 일제 잔재 청산의 문제가 또다시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향후 통일국가에 참여할 청사진들을 마련하느라 종교계는 분주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분단국가 수립을 위한 종교 정책과 한국종교의 분열된 내부의 역량으로 말미암아 이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당시 미군정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팍스아메리카나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한반도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고 한반도를 반공의 최전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출범을 반대하는 민족진영보다는 친미반공의 이념을 계속 창출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 줄 수 있는 정치 세력에게 정권을 이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임시정부 계열의 민족 진영은 그 법통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국내 기반은 별로 없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택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통치 방침은 종교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의 관철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거나 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종교는 지원하고, 그에 반대하거나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종교는 억제하는 것이 미군정의 기본적인 종교 정책이었다. 즉, 친미반공 이데올로기 생성과 정당화, 그것의 사회적 확산에 유리한 종교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증대되는 반면, 다른 입장에 있던 종교들은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전부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관계를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으로 설정하여 철저한 반사회주의 입장을 고수한 개신교와 천주교와 같은 기독교는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한편, 민족자주노선을 지향하거나 민족주의 성향아 강한 천도교, 대종교, 그리고 민족종교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한국전쟁의 체험을 통하여 친미 반공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정착됨에 따라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당시 미군정은 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엄상섭의 자문을 받아 교육과 종교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문교부가 된 ‘한국교육위원회’에 김성달, 현상윤, 유억겸, 김성수, 백낙준, 김활란 등 7명을 추천하였다. 이들은 모두 친일파 혹은 기독교인들로서 미군정이 들어서자 바로 반공·친미주의자로 둔갑하여 교육, 문화, 종교 등 문교정책의 근간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들이 마련한 미군정의 종교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성격이 명확해진다.

1945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기독교계의 요구를 수용해 형목 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 사업을 전담하게 한 점, 1947년 국영 성격을 가진 서울중앙방송을 통하여 선교 방송을 하도록 한 점, 일요일의 공휴일화를 추진한 점 등이다. 이들은 명백히 한국 문화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도된 기독교 편향의 종교 정책에서 파생된 것이고, 나아가 국내 종교 세력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 세력을 의도적으로 육성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반면에 식민지 권력의 도구였던 불교의 사찰령이나 포교 규칙 철폐에 대한 불교 측의 요구는 묵살하고, 일본 종교 단체가 남겨 놓은 적산자산의 처리 과정에서도 기독교에 재산권을 불하한 것과는 달리 재산관리권만 넘긴 것 등에서 그 편향성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전통종교들과 민족종교들이 지니고 있었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분단정부 수립에 대한 갈등은 미군정 당국으로 하여금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통제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되도록 하였다. 미군정은 불교 혁신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조선불교혁신회’를 좌익으로 지목하여 1946년 말에 해산시켰으며, 그 후에도 대부분의 불교 혁신계들을 총무원 측의 고발에 따라 탄압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불교 혁신계 인사들은 월북하거나 우익으로 전향하였으며, 1948년 상반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혁신 집단들이 거의 해체되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을 정치권력의 도움을 빌어 청산하려 했던 총무원의 태도는 국가권력에 대한 종속화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대종교나 천도교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미군정이 기독교를 ‘준(準)국가종교’로 우대한 종교 정책, 종교의 재건 과정에서 종교계 분열과 좌절을 가져다준 일제 잔재 청산, 미군정에 이어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킨 분단정부 수립 과정, 사찰의 물적 토대인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과 일본 종교가 남겨 놓은 적산자산의 처리 문제 등이 해방 정국에서 종교시장에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사건들이다. 이들 중에 미군정의 종교 정책을 제외한 다른 것은 전쟁 도중 또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종교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2) 이승만 정권기의 종교시장

이승만 정권은 반공의 제도화를 통하여 이념적 체제를 독점하고, 경찰과 관료를 통하여 제도화된 반공정책을 관철시켰다. 따라서 반공은 권위주의 체제를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권위주의를 유지시켜 주는 장치였다. 특히, 한국전쟁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국방력 강화를 통해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강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감리교 신자였던 이승만은 집권 초기부터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방한 개신교나 천주교와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면서 미군정의 ‘기독교 우대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다.

불교와 유교와 같은 전통종교들은 애당초부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전통종교에 대해 종단 분규를 조장하여 권력 유지에 이용함으로써 정치적 대항력을 약화시키고 반대세력을 제거하거나 국가권력에 종속되도록 하였다. 이는 항시 소수의 세력들을 충동질하여 다수의 기존 세력들을 무력화시키거나 소수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도덕성이 손상되고 지지 기반이 약화될수록 그의 종교 정책 노선, 즉 종교시장이나 개별 종교에 대한 정치권력의 지원 또는 배제 정책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이 같은 종교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한 점, 형목 제도를 만들어 형무소 교화 사업을 기독교에 전담시킨 일,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을 통하여 선교 방송을 하도록 한 점, 일요일의 공휴일화를 추진한 점 등으로, 미군정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교체하고 국기 우상화 반대 운동을 전개한 것, 군종 제도를 실시하여 군 선교에 힘썼던 것, 경찰 선교를 실시하도록 한 것, YMCA와 같은 기독교 단체에 막대한 후원을 한 것, 그리고 1954년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을 설립한 것 등을 기독교에 특혜를 준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승만 정권은 헌법에 명시된 종교에 대한 국가 중립성과 정교분리 원칙을 무시하고 기독교 우대 정책을 유지했으며, 그러한 종교 편향 정책으로 인해 다른 종교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1954년 이승만의 정화 담화 이후 대처·비구의 수렁에 빠져 막대한 불교 재산 손실과 사회적 공신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과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창숙이 이끄는 유교도 주도권을 둘러싸고 자유당의 지지 세력과 내홍을 겪게 된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대종교는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급속한 약화를 겪어야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기독교 편향 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 직후 남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가 1960년에는 7.5%에 달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3.한국전쟁과 종교시장

1) 한국전쟁기의 종교시장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삶을 이렇게 엄청나게 변화시킨 예가 없었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걸쳐 파급 효과가 지대했다. 100만 명에 가까운 인적 피해는 물론이고, 200만 명에 가까운 피난민, 460만 명의 전쟁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피난 생활, 가족 이산, 전쟁고아, 사회 불안 등 전쟁의 참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가시적 손실 못지않게 비가시적인 인간의 의식이나 가치관, 그리고 생활윤리와 생활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쟁 세대의 의식과 태도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전후 한국사회의 전개 방향을 잡는 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종교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많은 사찰과 교회가 파괴되고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북에 끌려갔으며, 북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종교시장과 관련해서 정리해 보자.

먼저 전쟁의 참화를 들 수 있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족을 살해하는 비인간적 폭력성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을 구성원 모두를 한몫에 살해하는 무자비한 잔인성을 드러내며, 점령과 수복,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남북을 초토화시키며 오고 간 승자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무질서와 아노미 현상이 불러온 전통적인 가치규범 파괴와 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에 대한 회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외적인 행동과는 다르게 자기 내면의 분열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남북 어느 곳에서나 전쟁으로 상처받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아우성쳤다. 전쟁의 공포감 때문에 운명적 순응주의가 내면화되었을 뿐 아니라 절박한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리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치열한 생존경쟁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혈연과 지연의 연줄을 찾는 것도 바로 한국전쟁이 낳은 습성의 하나다. 전쟁의 이런 상황은 앞으로 운명론적이고 구복적인 새로운 종교들이 발호하는 토양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기존의 한국종교들도 그러한 방향으로 변모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다음은 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대미 의존 심화이다. 해방 이후 한국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으면 전혀 유지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쟁 기간인 1950∼1953년까지 3년간 원조액은 5억 2천만 달러, 휴전 후인 1954∼1961년까지는 무려 21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는 국민총생산 12%, 한국 세입의 32∼58%에 해당된다. 당시 이 엄청난 해외 원조는 우리 사회 전반을 미국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운명이 외국 원조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국민들로 하여금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게 하였다. 특히, 미국 교회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원조는 개신교회의 재건과 학교 구호기관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다시 신자들을 친미주의자로 만들어 갔다. 이처럼 미국 동경이나 숭배는 분단국가 건설과 친미반공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물자 원조라는 물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상 친미 내지 숭미주의는 이 물질주의에 비롯되고 있어서 친미 사회로 기울어진 한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종교에서도 그런 현상이 그대로 표출된다.

새로 유입된 기독교인은 이전의 기독교인들과는 성향이 많이 달랐다. 상당히 운명론적이고 구복적이며, 토속적인 종교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을 기화로 기성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나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내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들로 이동하게 된다. 전쟁 이후 신흥 기독교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것은 이런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 이 같은 종교시장의 성향은 전체 한국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종교시장에 기독교적 영향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종교문화를 구복화하고 물상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다음은 계층 변동의 사회적 충격이다. 대규모의 피난길 때문에 지역 간, 계층 간의 인구 이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런 인구 이동으로 말미암아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이 마구 파괴되었다. 따라서 그 원초적 조직을 보완하고자 새로운 종교 공동체가 형성되거나 아니면 형식적인 조직체인 관료제도가 우리 사회에 새롭게 정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규모의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들을 전통적인 신분의식에서 해방시켜 평등의식을 심어 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는 평등하게 경쟁하여 계층적 상승 욕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서 도시로 몰려든 실향민들은 계층 상승의 가능성을 자극받아 서로 교육 기회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리게 된다. 이 같은 사회적 상황 변화는 종교에서도 원초적인 공동체를 재구성하려는 경향과 동시에 삶의 터전을 삼으려는 세속적인 욕망에서 기독교 결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끝으로 가족 및 생활상의 변화이다. 많은 사상자와 대규모 피난길로 인하여 가족이 해체되고 뿌리가 뽑힌 개인들은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극한 상황에 몰렸다. 특히, 1952년 3월 현재 전국의 미망인 숫자가 29만 명이나 집계되었다.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여성의 사회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그래서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종교단체에서도 여성 세력이 남성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의 발달로 이어졌고, 나아가 유교적 가부장 질서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야기한 이 같은 생활상의 변화는 전통종교 문화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그 전달 기능마저 기대하기 힘들게 하였다. 이런 전통문화의 공백은 전통에서부터 자유로운 보다 도시적이고 개인적인 새로운 문화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농민과 제대군인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여기에 월남 피난민 인구까지 유입되어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종교시장 때문에 종교성은 다소 미약했으나 전통적인 공동체의 유지와 사회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유교나 민족종교는 전쟁으로 야기된 사회구조의 변화와 친미반공 일변도의 사회에서 이미 신앙의 설득력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2)한국전쟁과 시민종교 형성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주어진 8·15 해방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없게 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소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편입됨에 따라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밟은 해방 정국은 남북이 서로가 분단의 정당성을 확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회 전 영역에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모든 영역에서 과잉 정치화가 진행되었다.

 예컨대, 해방 이후 단시간에 창당된 정당이 60여 개나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잉 정치화로 말미암아 정치권력의 풍향만 바라볼 뿐 민족의 역사도 전통문화도 보살필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반탁운동은 과거 친일파들을 현재 애국자로 세탁시키는 기제가 되었고, 실제로 이를 계기로 하여 친일 경력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뒤이은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고, 국군과 유엔군, 중공 의용군과 인민군 간의 국제적인 대전이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발발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전쟁의 이런 성격 때문에 남북은 서로 간에 자기 이데올로기의 정당성만 강조하고 그것을 절대시하였다. 남한은 이 전쟁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민족과 민중의 이해를 담보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이전의 미군정과 건국 과정에서 형성된 친미반공 이데올로기가 남한에 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다. 이전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우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도 한국전쟁 이후 대폭 약화되고 남한은 친미반공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회로 정착하게 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근대적 사회통합의 기초로서 일종의 시민종교의 역할을 한다. 이 종교는 냉전적 반공주의를 축으로 하는 독특한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 방법들을 만들어 갔다. 시민종교는 실제 종교 이상의 성화된 국민적 종교로서 자리를 잡는다. 전쟁의 참화를 눈앞에서 목도한 신앙 대중에 의해 확산되고 나아가 위정자들의 권력 이해와 동족 간의 불신을 통해서 더욱 증폭되었다. 이제 민족에 대한 이해 담보와 일제 잔재의 청산은 대중의 행위기 준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고 심지어는 전쟁을 통해 사수하려 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마저도 이 종교 때문에 위협을 받을 만큼 강력한 규제력을 가진 세속적 종교로 발전하였다.

당시 명목상으로는 모든 종교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 시민종교를 통해 국가가 종교시장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각 종교가 자기 교리에 의한 사회적 재해석을 마음대로 표출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이후에는 그 시민종교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 시민종교를 무기로 하여 종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 영역을 이것으로 정당화하고 1960년대까지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종교시장은 실제 종교만의 시장이 아니라 종교보다 더 강력한 세속적인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도리어 세속종교가 우위에 있는 위계적인 종교시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종교 역시 정치화, 더 나아가서 스스로 이데올로기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능동적으로 편승한 기독교와 수동으로 편입된 전통종교 간에 사회활동 영역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 활동 결과 역시 종교시장에서 냉정하게 반영되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하여 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민족적 이해와 민중적 이해를 반영한 많은 종교들이 약화되고 소멸해 간 반면에 친미반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친미반공의 보증수표로 통용되는 기독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당시 기독교 세력은 바로 친미반공 세력의 핵심으로서 그 선봉자임을 자임하며,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정치권력과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속칭 ‘빨갱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면 기독교를 믿으라’는 메시지가 그 시대의 상징이었다. ‘기독교인이면 적어도 빨갱이는 아니다’라는 등식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 기간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한국 민주인사들이 기독교에 입문한 사실은 이러한 등식과 무관하지 않다.

4.전후 종교지형의 변화

한국전쟁은 북한 지역의 신자를 상실했음도 불구하고 남한의 종교시장을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역동적이게 하였다. 일차적으로는 앞서 지적한 대로 전쟁의 참화가 가져다준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의 분단국가 수립 과정에서 보여 준 종교 정책의 영향이기도 했다. 일제 잔재 청산 과정에서의 분열을 통해 나타난 종파들, 전쟁 이후 발생한 기독교계 신종교들, 한국전쟁과 더불어 상륙한 다양한 소종파 종교들 등이 한국의 종교지형을 다양하고 역동적인 장을 형성해 주었다.

또한 전쟁을 통해 강화된 이원론, 말하자면 냉전의 흑백논리와 사고의 경직성은 한국 종교의 내부적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여 다양한 개신교 분파와 불교 종파를 만들었다. 그런 분열은 불교나 개신교만은 아니었다. 증산교를 비롯한 여러 신종교에서도 재건과 분열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지하에 잠복하거나 해산을 당했던 동학계, 증산계, 각세도계 등 여러 종교들이 조직을 정비하거나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대종교의 경우처럼 국외로 가서 활동하던 종교들은 귀국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특히,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분단국가 건설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에서는 반공전쟁의 십자군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종교계에 친미반공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게 되고, 미군정의 협조 아래 적산자산을 인수하고 미국 선교부의 선교 지원금을 획득하여 교회의 물적 기반까지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당시의 종교시장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세속적이며, 친미적이고 반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한 한국전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주도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한편으로는 국가가 주도히는 ‘멸공통일을 위한 전쟁’으로규정되어 간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자신의 교리체계와 관련하여 전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반면에 전통종교는 민족의 이해 때문에 또는 전쟁의 반인륜적 폭력성 때문에 전쟁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하는 데 주저하였다.

냉전의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분명하지 않은 태도 역시 종교지형의 변화에 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친미반공이라는 강력한 시민종교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결합된 미증유의 종교지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한국 사회의 전통이나 문화와는 관계없는 그리고 민족의 이해와는 멀리 떨어진 새로운 형태와 특성을 가진 종교지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1) 종교지형의 이원구조와 다원화

당시 종교지형은 외형적으로는 종교들이 아주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특권적 종교와 그렇지 않는 비특권적 종교로 간단하게 구획이 된다. 즉, 사회적 특혜와 배제를 중심으로 이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친미반공과 분단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개신교와 천주교는 특권적 종교 영역에, 반면에 민족적 성향이 강하고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전통종교나 민족종교는 비특권적 종교 영역에 배치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와 천주교는 친미반공의 전위대 역할을 하면서 문화 전통의 압력과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종교지형 내에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간 것이다.

정치권력의 종교 개입도 특권적인 기독교 집단에 대해서는 특혜를 제공하고, 비특권적인 비기독교 집단에 대해서는 교묘한 분할 정책을 이용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세력과 정권에 부담되는 세력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유교는 전쟁 이후 이전보다 더 심각한 내부 분규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직접적인 원인이야 어떻든 이승만 정권 내내 그 분규가 지속이 된다. 

한편, 종교지형의 이러한 이원화와 더불어 전쟁 이후 종교지형이 상당히 다원화된다. 이러한 종교지형의 변화는 종교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우리 사회가 다원종교 사회로의 진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신종교들과 해외에서 새로 유입된 종교들과 다양한 소종파들이 기존의 종교지형에 한꺼번에 합류한 결과이다.

특히, 전쟁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독교계 신종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 기독교계 신종교들은 동족상전에 대한 체험이 ‘고통의 신정론’으로 체계화되면서 대중에게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친미반공과 민족구원이 결합된 ‘반공적 선민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부흥회와 동족상전으로 상처받은 민족자존 의식을 가지고 신앙 대중을 불러 모았다.

대표적인 종교들이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등이다. 이들은 기존 친미적인 개신교에 저항하면서 한국적인 개신교로서 자리를 잡고자 하였다. 여기에 해방을 계기로 본격화된 수많은 외래 종교의 수입이 뒤를 따른다. 여호아의증인과 몰몬교를 비롯한 미국계 신종교, 바하이교와 같은 중동계, 그리고 도덕회. 국제도덕협회, 신령도덕회 등 중국의 일관도계 신종교들도 들어와 한국의 종교지형을 역동적이고 풍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2) 종교지형의 정치화 내지 이데올로기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남한의 종교들은 친미반공이라는 시민종교와 더불어 종교시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제도적인 기성 종교들은 모두 정치화의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이데올로기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방 당시 한국의 종교들은 좌익에서 중도를 거쳐 극우에까지 다양한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있었다. 그와 함께 민족에 관련한 시선도 종교에 따라 각기 입장이 달랐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는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 입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앞서 언급했지만 단독정부 수립 과정은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특정 종교를 지원하거나 배제하는 과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기존의 복합적인 현실을 무시한 채 이념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종교를 비롯한 사회 전 영역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친일과 반일이 뒤집히고, 민족과 반민족이 뒤집히고, 민중과 반민중이 뒤집히는 등 어이없는 결과가 나타나곤 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부차적으로 반공주의를 결합시키고 있었으나,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반공주의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부차적으로 친미주의, 자유민주주의, 민족주의가 결합되었다. 이런 가운데 대중의 동원력과 호소력이 큰 민족주의는 이제 스스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친미 반공주의와 결합해서만 그 효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반공주의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덧씌워 ‘반공적 선민의식’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 전쟁을 계기로 하여 전 세계적인 냉전적 대결 구도에서 반공 진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는 자부심, 남한이 자유 진영의 보루라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성스러운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앙 대중에게 민족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교와 불교 같은 전통종교는 당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도리어 좌우익 대립의 폐해를 격심하게 겪었다. 불교의 경우 사찰령 철폐와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농지 개혁을 주장하는 등 철저한 불교 개혁을 부르짖던 불교계 혁신 세력들은 1946년 말 미군정에 의해 좌익으로 지목당해 해산당하고, 일부 인사들은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를 따라나섰다가 그 길로 일부는 월북하게 된다.

또한 민족통일의 이해와 민중의 이해를 동시에 담보한 민족종교는 종교에 따라 또는 종교 내부의 파벌에 따라 이데올로기 성향에 다양한 편차가 있었지만 민족통일에 대해서는 입장이 확고했다. 특히, 천도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좌측에 가까운 중도였으며, 대종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우파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나 역시 통일 민족의 이해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벌써 사회주의와 갈등을 일으켜 왔던 천주교와 개신교는 분명하게 친미반공 분단정부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도리어 그것을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남북이 분단이 되더라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입장은 기독교를 ‘반공의 보증수표’로 만들어 주었고 국가와 구조적 통합에 이를 만큼 강력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을 가진 각 종교들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미반공 일변도로의 이데올로기 지형에 모두 복속되고 만 것이다. 이제 한국의 모든 종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치화 이데올로기화 과정을 밟게 되었다.

3) 종교지형의 도시화와 여성화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존논리를 각인시키고 전통적인 신분의식과 그에 따른 도덕 체계를 붕괴시켰으며, 그런 생존의 몸부림 앞에서 공동체성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남한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만이 아니라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를 우리 사회에 내면화하고 분단 체제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영향 하나하나가 한국 종교의 변동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서 많은 것을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주 특징적인 종교지형의 변화만 골라 간단하게 지적해 보기로 한다.

전쟁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은 전쟁 이후 사람들을 종교로 모여들게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월남 피난민이거나 시골에서 올라온 하층 농민들로서 자신의 사회적 뿌리가 모두 뽑힌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서 언급했지만 원초적인 공동체를 재구성하려는 경향과 동시에 종교를 통하여 삶의 터전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은 상당히 공동체적이며 동시에 운명론적이고 구복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런 신앙적 성향이 바로 기독교계 신흥 종교들을 창출하였고, 기성 종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적 요소가 종교전통에 관계없이 종교시장에 많이 스며들었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기독교 부흥회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것이 한국 종교의 구복화와 물상화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전까지 한국종교들은 대체로 남성 중심과 농촌형 종교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이후로는 여성 중심, 도시형 종교들이 종교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의 종교시장을 지배한 종교들은 불교와 유교와 같이 신분의식이 남아 가부장적인 문화 전통에 근거하는 전통종교이거나 민족적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성이 강한 대종교나 천도교 등의 민족종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가부장적인 종교나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종교들이 크게 쇠퇴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핵가족적이고 여성형의 종교나 도시 유랑민의 생활을 감싸고 포옹하는 도시형 종교들로 채워가게 된다.

여기서 이전의 전통종교과 민족종교들은 상당히 타격을 받았다. 분단정부 수립과 종교 근대화에 한계를 보인 전통종교와 민족종교들은, 친미반공 일변도에다 가족과 지역공동체 붕괴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산된 사회에서는 이미 신앙 대중에게 설득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종교지형에서는 반공적 선민주의를 담은 기독교계 신흥 종교 부상, 한국 종교 전반의 여성화 진행, 도시형 종교들의 확산 등이 이 시대 특징적인 종교현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4) 개신교와 천주교 교세의 폭발적 증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체적인 잠재적 종교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종교에서 종교 인구가 증가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천주교와 개신교만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1940년대는 물론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1950년대에도 순조로운 교세 성장을 계속하였다. 개신교회는 해방 당시 신자 수가 불과 10만 명에 머물렀으나 1950년경에는 50만을 넘어섰고, 1950년대 말에는 100만명을 상회하였다.

해방 이후 15년 동안 연평균 25% 이상의 성장을 보여 주었다. 또한 내분을 겪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분단국가 수립을 지지하며,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천주교도 해방 이후 급속한 교세 성장을 이룬다. 해방 당시 북한 교인 5만3천 명 정도의 신자를 잃었음에도 남한의 천주교회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해방 당시 남북을 합친 교세를 만회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에는 연평균 16.5% 속도로 고속 성장하여1960년에는 신자 수가 45만을 넘어섰다. 이런 급속한 성장은 기독교 선교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선교드라마를 남한에서 연출한 것이다.

반면, 불교와 유교는 교세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불교는 1952년 250만으로 집계되었으나 1960년에는 불교 인구가 120만 명 정도로 크게 반감하였다. 그리고 유교는 해방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59년 유도화총본부에서 회원등록제를 실시했을 때 30만에 불과하였다. 또한 천도교는 해방 당시 신자의 70∼80%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천도교 신자들은 대체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월남한 신도도 많지 않았다. 북한 정권과의 갈등을 일으킨 일부 지도층들을 중심으로 월남했기 때문에 신도 수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도교 교세는 50만 명 이하로 축소되었다. 대종교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만들만큼 임정 초기에는 신자가 상당히 증가하였으나 이승만이 임정 세력을 견제하고 1952년 자유당에서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 계열 인사들이 제거되자 신자들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처럼 당시 전통종교나 민족종교는 모두 교세의 감소 내지 정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에도 불교와 유교, 그리고 천도교는 자체 분열에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도 시선을 외부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기독교의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 이면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작용하였다. 우선 개신교가 친미반공 이데올로기 지형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친미반공적 사회체제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이 대폭 높아졌다는 것이다.

개신교 월남민은 적산자산의 불하와 해외원조 물자에 의해 기독교 성장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고, 또한 해외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상당한 원조를 받아 남한 전역에 걸쳐 시골까지 피난민 교회를 세웠다. 특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예장통합 측은 장로교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들의 원조는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교회복구와 새로운 교회 신축에 활용되었으며, 1954년 12월 25일에 창립한 기독교방송국도 이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에 형성된 군종 제도 역시 기독교 신자 증가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군종 제도의 목적은 반공사상의 계몽과 신앙 무장을 통한 전쟁의 승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각 교회의 교회 인적자원을 보호하고 선교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국가 제도에 종교가 편입되어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국가가 특정 종교에게 제도적으로 종교시장을 개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국가권력이 종교시장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이전에는 신흥 종교 수준이나 다름이 없었던 개신교가 해방 정국부터 사회적 헤게모니를 가진 종교로 완전히 ‘준국가종교’로 재형성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전쟁이후 학교, 병원, 구호단체 등의 각종 기독교기관에서 생계기반까지 제공받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전래 이후 한동안 개신교는 문화적인 이질성 때문에 민중의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한계를 절감하던 기독교가 좌우대립 속에서 탁월한 우익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사회 정치적인 힘을 통해서 교세를 팽창해 갈 수 있었다.  
 
    5.결론

해방 당시 6대 종교로 대표되었던 한국 종교지형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 등 기독교는 비약적인 성장, 불교와 유교 등 전통종교는 분열과 침체,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종교는 쇠퇴라는 종교지형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전쟁이후 유교와 천도교, 대종교가 6대 종교의 종교지형에서 주도권을 성실하고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만 남아 주도권을 다투게 된다. 이같이 한국전쟁은 한국종교사에서도 급격한 변동을 초래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 종교지형에서 보이는 많은 특징들은 이때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교지형의 변동은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동에서 형성된 것이고, 한편으로는 분단  정부가 종교시장에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다. 전자로는 가부장적인 종교나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종교들이 크게 쇠퇴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여성적이며, 도시 중심의 종교들이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준비가 부족했던 전통종교와 민족종교들이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후자는 당시의 분단정부가 국가 중립성이라는 원칙을 깨면서까지 불공정하게 종교시장을  교란시킨 것이다. 개별 종교를 선택적으로 지원하고 또는 규제하였을 뿐 아니라 선교의 장을 임의적으로 배분하고, 특정 종교에 물적 자원을 특별히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개입은 대체로 선교의 장이나 물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 외적인 지원이었던 반면에, 불교나 유교의 개입은 종교 내부의 신앙 문제였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입의 차원을 넘어선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국가의 불균등한 종교시장 개입을 통해 기독교는 이미 해방공간에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적산자산을 불하받아 자신의 물적 토대까지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종교와 민족종교들은 국가권력의 종교개입에 의해 내부갈등들이 증폭되어 대사회적인 시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에 전통종교나 민족종교들은 기독교의 종교적 헤게모니에 대해 나아가 지배 권력에 대해 ‘저항의 종교’로 발전해 갈 가능성이 많았으나 친미반공이라는 전일적 지배체제와 사회변화에 대한 내부 역량의 부족으로 지배 권력에 도리어 종속화되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급신장은 종교내적 또는 문화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결과가 아니라, 분단과 냉전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질곡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권력과의 비정상적인 유착관계, 친미반공주의의 극단적인 심화, 기독교인구의 급격한 팽창과 민족종교의 몰락,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의 출현 등이 이 시대 종교지형의 특징으로 고려될 수 있는 데, 이런 현상들은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고, 분단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빗어진, 그리고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것으로서 종교시장에서 상충하는 다양한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서로가 착종된 데서 나타난 기형적인 종교현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

 

윤승용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문예진흥원 전문위원,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이사, 서울대, 한양대, 한신대 감신대 등 강사 역임. 현재 한국 종교학회 이사, 신종교학회 이사,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논문으로 〈최근 20년간 한국종교문화변동〉 〈종교통계로 본 한국불교〉 〈한국종교의 사회세력화 형태와 전망〉 등이 있고, 저서 및 편저로는 《한국종교의 의식과 예절》 《한국종교문화사 강의》 《한국종교와 종교학》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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