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수 한성대 교수

어느 나라에서 임금이 학자들을 모아 놓고 백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책으로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학자들이 모여 100권의 책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다시 한 권으로 줄여서 가져오라고 했다. 나중에 두툼한 책 한 권을 가져왔는데, 임금이 이것도 많으니 단 한 줄로 줄여달라고 했다. 단 한 줄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공짜 점심은 없다.”였다고 한다. 그렇다. 세상만사가 거저 되는 것이 없다. 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이야기다. 당시 이라크와의 전쟁 때문에 미국 경제는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되어 경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민주당 후보인 빌 클린턴이 유권자를 향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고 소리쳤다. 이 짤막한 선거구호가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국불교에 이 구호를 패러디해서 적용해 보면 어떨까. “문제는 사회복지야, 이 바보야!”라고 말이다.

불교와 사회복지― 이론적으로 볼 때 불교와 사회복지는 같은 뿌리(同根)적 관계다. 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근간으로 한다. 또 불교의 보시사상, 자비사상, 생명존중사상, 복전사상, 윤회사상, 개유불성(皆有佛性)은 종국적으로 사회복지와 맥을 같이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위로는 진리(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사회복지는 무엇인가. 협의의 사회복지 개념은 요보호대상자(要保護對象者)인 노인, 장애인, 빈민 등을 위한 시책, 프로그램, 제도 등을 말한다. 광의의 사회복지는 위의 요보호대상자에다 소득, 의료, 환경, 교육, 노동 등을 합친 개념이다. 최광의의 사회복지는 전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불교와 사회복지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사의 발전 과정을 볼 때, 18세기를 ‘인권 발견의 시대’라 말한다. 평민이 절대군주로부터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시기이다. 19세기는 ‘계급 발견의 시대’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명칭을 발견하고 경쟁에서 실패한 자의 인권과 개인적인 가치를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20세기는 ‘집단 발견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민중이 모여서 패거리를 만들고 한 목소리를 내면서 그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이익집단이 등장한 시기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무엇인가. ‘사회복지 발견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는 18세기의 인권, 19세기의 빈부, 20세기의 집단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배계층의 의무요, 국가의 최우선 정책적 과제다. 여기에 종교가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겠는가. 더더구나 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여 부처님, 보살은 중생과 자신이 동일체라 관찰하고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는 온갖 사람들을 극락정토에 왕생케 하는 것이 불교의 수승(殊勝)의 길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 환경―단군 이래 최고의 조건이다. 절 살림도 과거에 비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다. 수행 환경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했다. 불교 신자도 타 종교에 비해 견실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불사(佛事)·수행(修行)·포교(布敎). 모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복지의 실천이다. 거리에는 쓰러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불사(佛事)를 거창하게 해서 무엇을 추구하려 하는가. 빈민, 노숙자들을 버려둔 채 선방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만 하겠다는 그 폐쇄적 오만으로 무엇을 추구하려 하는가.

불교의 3대 과제는 수행, 포교, 교육이다. 이 과제를 여실하게 성취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3대 과제를 여법(如法)하게 성사시키는 최선의 길은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는 어머니와 같은 종교다. 집을 떠난 탕아가 세상에 나가서 나쁜 짓을 다 하다가 고향의 어머니께 돌아와 “어머님, 제가 이러저러한 나쁜 짓을 했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를 하면, 어머니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서를 하는 종교다. 이러한 불교는 복수적 본능을 가진 타 종교와 구분되고, 이러한 불교의 이념은 자비와 용서를 바탕으로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 우리나라에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국기법 대상자)가 약 160만 명쯤이 있다. 이들에게 정부는 매월 40여 만 원씩 생활급여를 준다. 개인이 받는 금액을 별로 크지 않지만, 정부입장에서는 큰 예산이 든다.

그런데 수급자들은 이 돈을 받으면서 크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물질적 복지만 있지 ‘마음의 복지’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러한 빈곤 계층을 비롯한 소외 계층을 위해 마음의 복지를 실천해야 한다. 불교의 사부대중에 묻는다. 불교가 빈곤선의 한계점에서 수시로 닥치는 공포의 바다를 건너 주고 있는가. 캄캄한 밤중에 허우적거리는 민중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있는가. ‘그것은 다 인연법에 의한 것이다. 윤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있는 법이다.’라고 설법을 하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한국불교가 그동안 사회복지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를 묵묵히 실천해 온 사찰도 많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적극적으로 불교의 사회복지를 실천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불교의 복지를 지향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회복지시설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요보호대상자를 위해 보시할 수 있도록 유효자원을 개발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불교 내의 인적 자원을 사회봉사 인력으로 투입시켜서 봉사하는 사람, 봉사받는 사람 모두가 만족스럽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보살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사회복지를 성공적으로 실천하면 결국 포교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사회복지를 신심(信心)으로 하다 보면 그것이 불가(佛家)의 수행이 되며, 사회복지 속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세 가세 저 피안의 언덕으로 가세)”의 길이 보인다.

불교―이제 사회복지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공짜 점심을 먹지 않는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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