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작

1. 문제의 제기

우리나라의 고대 불교사상가 가운데 동아시아 불교계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로 고구려의 승랑(僧朗, 450~530C.E.경),1) 그리고 신라의 원측(圓測, 613~696C.E.)과 원효(元曉, 617~686C.E.)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측이나 원효의 경우는 그 사상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 저술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승랑의 경우 《화엄의소(華嚴義疏)》라는 저술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2) 《화엄의소》는 물론이고 다른 그 어떤 저술도 현존하지 않기에 그 사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승랑의 사상은 직(直)제자인 승전(僧詮, ~512~)과 손(孫)제자인 법랑(法朗, 507~581C.E.)을 거친 후 증손(曾孫)제자인 길장(吉藏, 549~623C.E.)에 이르러 방대한 저술을 통해 ‘삼론학’으로 집대성되는데, 길장의 저술에 다양한 호칭과 함께 ‘승랑’의 사상이 소개되어 있긴 하지만, 플라센(Joerg Plassen)의 지적과 같이 그런 호칭들이 과연 승랑만을 지칭하는 것인지, 또 그런 호칭과 관계하여 사상을 소개하는 문장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지 애매하기 때문에,3) 승랑의 고유사상만을 가려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삼론학 문헌에서 승랑의 특칭(特稱)과 함께 소개된 사상이 아닌 경우, 그것에 대해 ‘승랑의 사상’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 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이루어진 승랑과 관계된 연구를 일별하면, 국내 학자들의 경우 승랑 사상의 범위를 가능한 한 넓게 잡으면서 대부분의 삼론사상을 승랑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한 반면, 국외 학자들 가운데 특히 일본학자들의 경우 길장의 저술에서 승랑의 사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내용조차 승랑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4) 삼론학 전통에서 승랑을 치켜세웠던 것은 길장의 조작이라고 말하며 승랑을 격하시켜 왔다.

먼저 국내의 예를 들면, 김잉석의 경우 ‘섭령대사(攝嶺大師)’ ‘섭산대사(攝山大師)’ ‘대랑법사(大朗法師)’ ‘낭대사(朗大師)’는 물론이고 ‘대사(大師)’ ‘사(師)’ ‘일사(一師)’라는 호칭들을 모두 승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한 후, ‘《성실론》을 소승이라고 배척한 점’, ‘삼종중도’, ‘삼종중도에 대한 삼종방언’ ‘이제시교론’ ‘어제와 교제의 구분’ ‘삼종이제’ 등이 모두 승랑의 사상에 귀속되는 것으로 보았으며,5) 김인덕 역시 김잉석이 나열한 호칭들 가운데 ‘사(師)’라는 호칭을 제외한 다른 모든 호칭들을 승랑의 별칭이라고 보면서,6) ‘제3제의 건립’ ‘이제시교론’ ‘어제와 교제의 양종이제설’ ‘삼종중도론’ ‘삼종방언’ ‘사중이제설’ ‘이제가 무애·상대·상즉함’ ‘타가의 이제설과 삼론가 이제설의 차이에 대한 10가지 해석’ ‘중도가 이제의 체로 된다는 점’ ‘사종석명의’ ‘이장삼법 교판론의 근원’ ‘이제에 대한 4절·3종의 병관과 출입관’ ‘비범부행 비성현행의 보살행’ ‘사제이제일제의 양종의’ ‘연진어관 관진어연 이론’ ‘오교생지의’ ‘중가체용 4종의’ 등을 승랑의 사상으로 간주하였다.7)

반면에 일본이나 중국학자들의 경우 삼론학 전통과 관계하여 승랑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강남에서의 승랑의 행적 가운데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제(齊)의 관리 주옹(周퉎, 440~494C.E.경)8)을 가르쳐서 ‘이제에 대한 세 가지 조망’을 담은 《삼종론(三宗論)》9)을 저술하게 했다는 점이고,10) 다른 하나는 양(梁)의 무제(武帝, 464~549C.E.)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전하여 대승으로 전향하게 했다는 점이다.11)

그러나 일본의 사카이노코요(境野黃洋, 1871~1933C.E.)는 담연(湛然, 711~782C.E.)의 《법화현의석첨(法華玄義釋籤)》에 기술된 승랑의 강남도래 시기에 근거하여 승랑이 주옹을 만났다거나 주옹을 가르쳐 삼종론을 짓게 했다는 것은 물론이고 승랑의 가르침 이후 양무제가 대승으로 전향했다는 길장의 설명이 모두 허구일 것이라고 주장하였고,12) 사토테츠에이(佐藤哲英, 1902~1984)는 전통적으로 승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온 ‘섭령’이나 ‘섭산’이라는 호칭이 승전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신삼론의 주요사상인 약교이제설은 승랑 이전의 광주 대량(大亮)법사에게서 유래한 것이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13)

한편 히라이에이(平井俊榮, 1930~)의 경우 승랑이 주옹을 만난 것이 사실일 수 있다고 말하며 사카이노코요의 학설을 비판하긴 했지만, 약교이제설이 대량에게서 기원한다는 사토테츠에이의 논지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면서14) 승랑이 주옹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옹에게서 배운 것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5)

또, 중국의 탕용통(湯用?: 1893~1964) 역시 사카이노코요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반야삼론에 능통했던 혜기(慧基)나 현창(玄暢)이 주옹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에 《삼종론》이 승랑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16) 이들 일본과 중국학자들의 논지는 김잉석,17) 박상수,18) 플라센19) 등20)에 의해 비판된 바 있다.21)

승랑을 부당하게 격하시키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승랑 사상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아 뚜렷한 근거 없이 대부분의 삼론사상을 승랑에게 귀속시킬 경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삼론학 전통 내에서의 승랑의 역할에 대해 비교적 공정하게 접근해온 독일의 플라센은 “삼론과 관계된 자료들에 대해 주의 깊게 재조사해 보면, (한국학자들이) 승랑에게 귀속시킨 사상들 대부분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며 어떤 문구들은 승랑의 사상에서 명확하게 제외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22)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잉석의 경우 삼론학 문헌에 쓰인 ‘대사(大師)’나 ‘사(師)’라는 호칭 모두 승랑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플라센은, 앞에 특별한 명칭이 부가되지 않고 쓰인 ‘대사(大師)’나 ‘법사(法師)’, ‘사(師)’라는 호칭은 승랑이 아니라 길장과 혜균의 직접적 스승인 법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승랑을 섭령대사(攝嶺大師)나 섭산대사(攝山大師)라고 부르긴 하지만, 흥황사(興皇寺)의 법랑에 대해서도 흥황대사(興皇大師)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아울러 플라센은 승랑의 사상이 확실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주옹에게 전해진 근본사상―승조의 공가상즉, 유무상즉의 사상24)
2. 이제와 중도―중도와 가명을 판연히 다른 것으로 본다.25)
3. 중전가, 가전중, 중후가, 가후중―‘용가, 체중, 체가, 용중’ 등의 이항(二項) 술어를 창안함26)

‘1’과 관계된 문장의 경우 ‘산중법사의 스승은 원래 요동 사람인데(山中法師之師 本遼東人)27)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고, ‘2’와 관계된 문장에서는 ‘섭산대사(攝山大師)’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으며,28) ‘3’과 관계된 문장에서는 ‘섭령사(攝嶺師)’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다.29) 이 가운데 ‘1’이 고구려 요동 출신 승랑의 사상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토테츠에이는 ‘섭산대사’나 ‘섭령대사’라는 호칭이 반드시 승랑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30) 혹 이러한 주장이 인정된다면 ‘2’나 ‘3’도 승랑의 고유사상으로 볼 수 있는지 문제가 될 것이다.

김잉석이 거론했던 승랑의 호칭들 가운데 ‘낭(朗)’자가 포함된, ‘대랑법사(大朗法師)’나 ‘낭대사(朗大師)’ 등의 경우 승랑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기에, 그와 관계된 문장에 담긴 사상 역시 승랑 고유의 사상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호칭의 경우 그것이 승랑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제자 승전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섭산에 거주했던 승랑과 승전 모두를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금릉 성문 밖의 흥황사에 주석했던 법랑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애매하다.

본 논문은 삼론사상 가운데 승랑의 고유사상이 무엇이었는지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승랑의 고유사상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승랑의 특칭과 함께 기술된 사상들이다. 주된 자료는 길장의 저술 전체와 혜균의 《사론현의》이지만, 승랑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는 혜교(慧皎)의 《고승전》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중국 역사서인 《진서(陳書)》, 《신이전석교부기사(神異典釋敎部紀事)》와 1775년 간행된 팽제정(彭際靖)의 《거사전(居士傳)》,31) 승랑이 주석했던 섭산 서하사의 비문(碑文), 일본에서 발간된 작자미상의 《삼론조사전집(三論祖師全集)》 등도 자료로 삼는다. 그러면 먼저 길장과 혜균의 저술에서 사용된 삼론가들의 호칭과 그 용례를 검토하여 승랑의 특칭을 확정해 보기로 하겠다.

2.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특칭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에서는 삼론가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호칭들이 보인다.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고려랑대사(高麗朗大師)’〔승랑〕32)나 ‘도랑(道朗)’〔승랑〕,33) ‘지관전(止觀詮)’〔승전〕34) 또는 ‘흥황화상(興皇和尙)’〔법랑〕35)과 같은 표현들도 있고, 신삼론 전통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일가(一家)’36) ‘산가(山家)’37) ‘섭령흥황(攝嶺興皇)’38) ‘섭령상승(攝嶺相承)’39) ‘섭령상전(攝嶺相傳)’40) ‘일가상전(一家相傳)’41)과 같은 호칭들도 있다.

또, ‘섭령대사(攝嶺大師)’42), ‘섭산대사(攝山大師)’43) ‘섭산사(攝山師)’44) ‘섭령사(攝嶺師)’45) ‘섭산(攝山)’46) ‘산중(山中)’47) ‘산중사(山中師)’48) ‘산중법사(山中法師)’49) ‘산문(山門)’50) ‘일사(一師)’51)와 같은 호칭도 자주 사용되며 ‘산문상승(山門相承)’52) ‘산문일가상승(山門一家相承)’53) ‘일사상승(一師相承)’54)이란 표현도 보이는데, 이들 호칭의 경우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정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길장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 대한 주석서인 안징(安澄, 763-814C.E.)의 《중론소기(中論疏記)》를 보면 일찍이 일본 삼론종 전통 내에서도 삼론가의 호칭에 대해 논란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술의》 가운데〕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중(山中)’은 고려국의 대랑 스님이고, ‘산문(山門)’은 지관사의 승전법사이며, ‘일사(一師)’라고 말하거나, ‘대사(大師)’라고 말하거나 ‘사(師)’라고 말하는 것은 흥황사의 법랑 스님이다.” 이제(今)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장》 하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55)

《술의(述義)》56)에서는 ‘산중’은 승랑(僧朗), ‘산문’은 승전(僧詮), ‘일사, 대사, 사’는 법랑(法朗)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길장의 저술들을 보면, ‘산중’이라는 말이 어떤 곳에서는 승전을 지칭하지만57) 다른 곳에서는 법랑을 지칭하기도58) 하기에 ‘산중’은 승전과 법랑 모두에 해당하는 호칭이라고 설명한다.59) 또 ‘산문’이라는 말은 승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60)

위의 인용문에서 문제로 삼은 호칭은 ‘산중’과 ‘산문’과 ‘일사, 대사, 사’의 여섯 가지지만, 안징은 ‘일사, 대사, 사’라는 세 가지 호칭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론소기》의 다른 곳에서 ‘일사(一師)’라는 호칭이 흥황사 법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명시하는 구절이 발견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일사어(一師語) 등등’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설명해 보자. 여기서 말하는 일사는 흥황사의 법랑 스님이다. ‘타유유가유(他有有可有) 등등’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설명해 보자. ……61)

이 구절은 길장의 《중관론소》 가운데 “一師語多對他而起 他有有可有 卽有空可空 …”62)이라는 문장에 대해 해설하는 부분인데, 이 문장에 사용된 ‘일사’는 법랑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63) 따라서 앞의 인용문에서 거론한 ‘일사, 사, 대사’에 대해 안징이 더 이상 해명하지 않은 이유는 이 모두를 법랑의 호칭으로 간주하는 《술의》의 설명에 대해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길장과 혜균의 저술에 사용된 ‘일사’라는 호칭의 용례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일사’가 언제나 반드시 법랑 1인만을 지칭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한다.

1) ‘산중’과 ‘산문’이라는 호칭

먼저 ‘산중(山中)’이나 ‘산중(법)사’라는 호칭에 대해 검토해 보자. 앞의 《중론소기(中論疏記)》 인용문에서 보듯이 《술의》에서는 ‘산중’이 승랑을 가리킨다고 기술하지만, 안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절을 근거로 ‘산중’은 승전을 가리키기도 하고 법랑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승전을 가리키는 구절:

① 山中法師之師本遼東人 從北地學三論 遠習什師之義(《二諦義》) /
② 止觀師六年在山中 不講餘經 唯講大品〔《대품반야약소》(逸書)〕.
법랑을 가리키는 구절:
③ 山中興皇和上 述攝山大師言〔《中論玄義》(逸書)〕 /
④ 山中師 請止觀 講涅槃 不聽師立(〔《涅槃經疏》(逸書)〕.

이 가운데 ①과 ②가 승전을 가리키는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③과 ④에 대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③의 서두에 쓰인 ‘산중흥황화상’이 ‘산중의 흥황화상’이라고 해석되기에 흥황사 법랑도 산중이라고 불리었다는 안징의 주장에 대해 사카이노코요와 사토테츠에이 모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히라이에이는 ‘산중흥황화상’은 ‘산중과 흥황화상’과 같이 병렬의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산중은 지관사 승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 ④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산중사는 지관〔승전스님〕에게 《열반경》을 강의해 달라고 청하였다.”와 같이 되기에 여기서 말하는 ‘산중사’가 법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히라이에이는 안징이 인용한 문장에는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삼론현의검유집(三論玄義檢幽集)》에 실린 다음과 같은 구절을 소개한다.64)

산중의 법사들은 지관〔사 승전스님〕에게 《열반경》을 강의해 달라고 청하였다.(山中諸法師 請止觀 講涅槃 )65)

즉, 안징이 ‘제(諸)’자를 누락시켰기에 ‘산중사’가 승전의 제자인 법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라이에이가 말하듯이, 길장은 그 저술에서 ‘산중’이나 ‘산중(법)사’를 승전의 호칭으로 일관되게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산문이라는 호칭의 경우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현존하는 길장과 혜균의 저술에 기술된 산문이라는 호칭과 함께 소개된 사상들을 모두 취합해 보아도, 그것이 승랑과 승전 가운데 누구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정할 만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또 안징의 《중론소기》에 ‘산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두 군데 있긴 하지만, 그 설명에 일관성이 없다. 먼저 앞에서 잠깐 소개한 바와 같이 산문이 승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산문’은 승랑66)스님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풀이가 있다. 첫째, “처음으로 산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일사의 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셋째, “석법도의 상족제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고승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낭야에 있는 섭산의 법도에게는 네 명의 제자가 있었다. 첫째는 그 이름이 승랑67)인데 화엄과 삼론을 가장 잘했으며 원래는 요동 사람이다.” 무릇, 섭산에는 여러 곳이 있다. 한 곳은 서하정사인데, 원래는 관이었다가 사찰로 된 곳이다. 다른 한 곳은 산자정사이다. 〔《고승전》의〕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승랑이 선대 스승의 발자취를 계승하여 다시 산사를 통솔하였으며 화엄과 삼론 등을 강의할 수 있었다.”68)

처음으로 산문에 살았고, 일사의 문중에 속하며, 법도의 뒤를 이어 섭산의 서하사를 통솔했기 때문에, 승랑을 ‘산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산문’이 승전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산문현의》라는 저술의 제목에 사용된 ‘산문’의 의미에 대해 해설하면서 안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산문’이란 다음과 같다. 승전 스님은 처음에는 산문에서 살았고 다만 나중에 산중에서 살았다. 지금의 흥황법사는 승전 스님의 상족제자이기 때문에 산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승을 좇아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둘째는 산문의 승전 스님으로부터 《현의(玄義)》를 받았기 때문에 《산문현의》라고 말하는 것이다.69)

앞의 인용문과 달리, 여기서는 산문이 승전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승전이 처음에는 산문에서 살았고, 이렇게 산문에서 살던 승전에게서 법랑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법랑의 저술인 《현의》를 《산문현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에서 ‘산문’의 용례를 모두 수집해 보아도 그것이 승랑이나 승전 가운데 누구를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구절은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산문’이라는 호칭과 관계된 사상 중에는 승전의 창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승랑에게서 유래한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2) ‘섭령’과 ‘섭산대사’라는 호칭

길장의 저술에서 ‘산중(山中)’은 승전에 대한 호칭인 반면, ‘섭령(攝嶺)’이나 ‘섭산(攝山)’과 관계된 호칭은 승랑을 가리킨다. 히라이에이 역시 “남도(南都)의 삼론전승에서는 승랑, 승전, 법랑의 호칭에 관해서도 혼란이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길장의 경우는 그 구별이 명료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70) 그런데 ‘섭산’이라는 호칭의 경우 보다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사카이노코요71)와 사토테츠에이72)는 ‘섭산’이라는 호칭 가운데 길장의 《열반경유의》에서 보이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용례는 승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열반경유의》: 就攝山大師73) 오직 삼론과 마하반야를 강의할 뿐 《열반경》이나 《법화경》에 대한 강의를 열지 않았는데 학인들이 《열반경》을 강의해 달라고 청하자, 대사는 “사람들이 지금 반야를 이해하는데 어찌 다시 나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는가? 다시 거듭 청하자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본유금무(本有今無)’의 게송에서 결국 강의를 멈추었다. 흥황사 법랑에 이르러 이 경전이 크게 퍼지게 되었다.74)

여기서 사카이노코요나 사토테츠에이가 생각하듯이 ‘섭산대사’를 단일한 호칭으로 간주할 경우 첫 구절을 “섭산대사의 경우는 오직 삼론과 마하반야만을 강의하고 《열반경》이나 《법화경》에 대한 강의는 열지 않았다.”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절에서는 이와 동일한 내용이 승전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품경의소》: 지관사의 승전스님은 6년 동안 산중에 살면서 다른 경전은 강의하지 않고 오직 《대품경》만 강의하였다. 돌아가시던 해에 학인들이 《열반경》을 강의해 달라고 청하자, 스님은 “모든 사람들이 반야를 이해하는데, 어째서 다시 《열반경》을 강의하려고 하겠느냐? 다만 삼론과 반야를 읽어서 스스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지 다시 다른 경전을 강의할 필요는 없다.” 학인들이 이미 간절하게 스님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헤아려 《열반경》의 대의를 요약하였는데, ‘본유금무(本有今無)’라는 게송에 이르러 마음이 오직 반야에 머물 뿐이었다.75)

《삼론유의의》: 삼론가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아 삼종중도를 밝히는 것인가? 섭산의 지관사 승전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접적으로는 성실론사를 대상으로 삼아 밝힌 것이다. 섭산의 승전법사는 항상 《대품경》을 독송했기 때문에 이에 의거하여 설한다.76)

이 두 가지 인용문에 의거할 때, 지관사 “승전이 《대품반야경》이나 삼론만 강의할 뿐 《열반경》에 대해 강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며, “학인들의 요청으로 《열반경》을 강의하다가 ‘본유금무’의 게송에서 강의를 중단했다.”는 기록이 앞에 인용했던 《열반경유의》와 여기 인용한 《삼론유의의》 모두에서 보이기에 ‘섭산대사’가 ‘승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히라이에이는 앞에 인용했던 《열반경유의》 서두의 ‘就攝山大師’ 이후의 구절을, “승전이 섭산대사〔승랑〕에게 취학(就學)하여 ‘오직 대품과 삼론만을 강의하였다’고 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77)고 주장하면서, “안징을 시작으로 [일본] 남도의 삼론 전승에서는 승랑, 승전, 법랑의 호칭에 대해 혼란이 많았으나, 길장에게는 그런 구별이 명료하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길장의 저술에서 ‘섭산’이라는 호칭은 일관되게 승랑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就攝山大師’에 대한 히라이에이의 해석은 부자연스럽다. 《열반경유의》를 보면 이 문장 바로 위에 ‘就此經有南北二本 廣略不同(이 경전의 경우 남북의 두 가지 본이 있는데 광략이 같지 않다)’로 시작되는 문장이 실려 있는데, 연이은 두 문장에 사용된 ‘就’자와 용례가 서로 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섭산대사’라는 호칭이 일관되게 승랑을 가리킨다는 히라이에이의 주장도 인정하면서, 위에 인용한 《열반경유의》의 기사가 승전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도 인정되게끔 해석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就攝山 大師唯講三論及摩訶般若”와 같이 ‘就攝山’과 ‘大師’를 띄어 읽는 것이다. 이 때 앞에 인용한 《열반경유의》의 문장은 “섭산〔전통〕의 경우 〔승전〕대사는 오직 삼론과 마하반야만 강의할 뿐 …”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에 호칭의 일관성이 보전된다.

그러나 이렇게 띄어 읽을 경우 바로 앞 단락에 쓰인 “就此經 有南北二本 廣略不同”이라는 문장과 그 흐름이 어긋나게 된다. 이렇게 끊어 읽을 경우 ‘就’에 걸리는 개사구(介詞句) 다음에, 앞에서는 ‘유(有)’라는 동사(動詞)가 이어졌는데, 뒤에서는 ‘대사(大師)’라는 명사(名詞)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就攝山大師 唯講三論及摩訶般若”와 같이 끊어 읽어서 “섭산대사의 경우는 오직 ‘삼론’과 ‘마하반야’만을 강의하고 …”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카이노코요가 말하듯이 이 구절에서만 예외적으로 섭산대사는 승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78) 아니면 사토테츠에이가 주장하듯이 섭산대사라는 호칭은 승랑이나 승전 모두에게 사용된다고 보아야 할까? 우리는 혜균의 《사론현의》에 실린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이런 혼란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大朗師論師는 《대반열반경만》을 오로지 강의하지 않았다. 난해한 구절에 대해서만 학인들을 위해서 그 뜻을 해석할 뿐이었다. 언제나 학인들에게 “도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중론》 제18장〕 〈관행품〉과 《대품[반야경]》은 마치 크고 밝은 거울과 같다.”고 권하였다. 항상 학인들에게 권하였지만, 오직 법랑법사와 지변, 혜용 두 스님만이 산중사의 뜻을 포착하여 《대반열반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79)

이토타카토시(伊藤隆壽)가 주석하듯이80) 이 인용문 서두의 ‘大朗師論師’가 ‘大朗師詮師’의 오사라고 볼 경우 이는 “대랑스님〔=승랑〕81)과 승전스님은 …”이라고 번역되는데, 어쨌든 이 구절에 의거하면 승전은 물론이고 승랑 역시 《대반열반경》을 강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 가운데 ‘섭산대사’ 운운하는 《열반경유의》의 문장이나 ‘지관사’ 운운하는 《대품경의소》의 문장 모두 《대반열반경》의 ‘본유금무(本有今無)라는 게송’과 관계된 내용을 싣고 있기에, 사카이노코요나 사토테츠에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길장의 혼동이나 실수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서력기원 후 549년에 사망한 양무제가 승전의 좌탈입망(坐脫立亡)을 목격했다는 《삼론조사전집》의 기록82)에 근거할 때, 동 549년에 탄생한 길장이 승전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리는 없다. 또 법랑의 경우 영정(永定) 2년(558년) 이후부터 금릉의 흥황사에 거주했기에,83) 법랑을 ‘흥황대사(興皇大師)’라고 부르는84) 《사론현의》의 저자 혜균 역시 승전을 만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길장이나 혜균이 말하는 승랑 및 승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그 스승인 법랑의 입을 통해 이들에게 전해진 내용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동일한 사상을 갖는 사제(師弟)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들이 그들의 사후(死後)에 누군가에게 전해질 때, 어떤 것이 스승의 사상이고 어떤 것이 제자의 사상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신삼론 전통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삼론 전통에서 제4대에 속하는 길장이나 혜균이 제3대인 법랑으로부터 그 선대인 제1대 승랑과 제2대 승전의 사상이나 일화에 대해 전해들을 경우, 양자 가운데 누구와 관계된 것인지 특별히 지목하여 소개한 경우 이외에는, 여러 사상이나 일화들 가운데에서 승랑과 승전 각각에 해당하는 사상이나 일화가 무엇인지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섭산대사’라는 호칭과 관계된 길장의 혼동에 대해서는 우선 이렇게 일반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길장은 자신의 저술에서 수많은 경전을 인용하는데, 이를 원문과 대조해 보면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 구절들이 많이 발견된다.85) 이는 길장이 주로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경전을 인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승열반경》 강의와 관계된 일화를 《열반경유의》에서는 ‘섭산대사’인 ‘승랑’에 대한 것으로 소개하는 반면, 《대품경의소》에서 ‘승전’에 대한 것으로 소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기억에만 의존하는 길장의 저술방식’ 때문에 빚어진 혼란일 수 있다. 길장은 41세에서 49세까지 회계의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다가 양주의 혜일도량(慧日道場)으로 이주하여 51세까지 지낸 후 다시 멀리 내륙의 장안으로 가서 일엄사(日嚴寺)에서 말년을 보낸다.86) 《대품경의소》는 길장이 가상사에 머물던 장년기(495년)의 저술인 반면87) 《열반경유의》는 길장의 생애 말년에 지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88)

위에 인용한 《대승사론현의》의 설명과 같이 승랑이나 승전 모두 《대승열반경》을 강의하지 않았고 난해한 구절에 대해서만 제자들에게 그 뜻을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유금무’라는 구절에서 강의를 중단했다는 기사는 원래 승전과 관계된 일화지만, ‘기록’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여 저술하는 습성을 갖는 길장이 노년기에 《열반경유의》를 쓰면서 이를 ‘섭산대사’인 승랑과 관계된 것으로 착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섭산대사’는 승랑의 특칭이라고 볼 수 있다.

3)‘일사’와 ‘일가’라는 호칭

삼론가의 호칭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다른 하나는 ‘일사(一師)’이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중론소기》의 저자 안징은 ‘일사’가 법랑을 가리킨다고 보았고, 히라이에이 역시 이런 안징의 생각에 대해 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에서 ‘일사’의 용례를 수집해 보면, ‘일사’가 삼론가 가운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또 ‘일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지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승랑에게서 시작된 신삼론 전통은 승전에 이르러 학파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법랑의 시대가 되자 폭발적 융성을 보인다.89) 길장은 물론이지만 《대승사론현의》의 저자 혜균 역시 승랑, 승전, 법랑으로 이어지는 삼론학 전통을 별도의 학파로 묶어서 표현하였다.

이러한 신삼론(新三論) 전통을 표현할 때 길장은 ‘섭령흥황(攝嶺興皇)’이나 ‘섭산흥황(攝山興皇)’, 또는 ‘섭령상전(攝嶺相傳)’, ‘섭령상승(攝嶺相承)’, ‘일가(一家)’, ‘일가상전(一家相傳)’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길장과 동학(同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혜균은 이런 학파적 표현들 가운데 ‘일가’, 또는 ‘일가상전’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한다.

‘사(師)’나 ‘대사(大師)’와 같은 표현의 대부분90)은 길장이나 혜균의 직계 스승인 법랑을 가리키는 호칭일 수도 있다. 그러면 안징이 기술하듯이 ‘일사’ 역시 법랑만을 가리키는 호칭일까? 길장의 저술에서 ‘일사’의 용례를 찾아보면 ‘일사’가 법랑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일사(一師)’께서는 언제나 《열반경》91)으로 입증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일교(一敎)’92)에서는 곳곳에서 모두 불성을 밝히기 때문에 〈애탄품〉에서 유리구슬로 비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성품〉에서는 모두 불성의(佛性義)를 밝힌다. 내지 〈사자후품〉과 〈가섭품〉에서는 널리 불성사(佛性事)에 대해 밝힌다.93)

앞에서 ‘섭산대사’의 호칭에 대해 논의할 때 길장과 혜균의 저술을 통해 승랑이나 승전이 《열반경》에 대해 강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인용문에서 “언제나 열반경으로 입증했다.”는 ‘일사(一師)’가 법랑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사’가 승랑을 가리키는 구절도 있다. 길장은 《중관론소》에서 삼종중도(三種中道)에 대한 네 단계의 이해94)에 대해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것은 섭령흥황의 시말(始末)이다. 전통적 이론에 대응하여 이러한 네 단계를 설정한 것이다. 이 의미를 파악한 사람은 ‘일사(一師)’께서 세운 중가체용(中假體用)의 뜻을 이해한다.95)

여기서 ‘일사(一師)’가 세웠다고 기술하는 ‘중가체용(中假體用)의 뜻’은 ‘체중(體中), 용중(用中), 체가(體假), 용가(用假)’의 네 가지를 의미하며, 다음에서 보듯이 이는 승랑의 가르침이다.

섭령사(攝嶺師)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명(假名)96) 이전에 중도(中道)97)를 밝히는 것은 체중(體中)이고, 가명 이후에 중도를 밝히는 것은 용중(用中)이며, 중도 이전에 가명을 밝히는 것은 용가(用假)이고, 중도 이후에 가명을 밝히는 것은 체가(體假)이다.98)

섭령사(攝嶺師)는 섭산대사와 마찬가지로 승랑의 별칭이다. “일사가 중가체용의 뜻을 내세웠다.”는 《중관론소》의 설명과 “섭령사가 중가체용에 대해 말했다.”는 《대승현론》의 기술을 종합하면, 《중관론소》의 인용문에 기술된 일사는 승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일사’가 어느 경우는 법랑을 가리키고 어느 경우는 승랑을 가리킨다는 혼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위해 먼저 ‘일사’의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자. 길장의 저술이나 혜균의 《사론현의》 어디에서도 ‘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 대해 정의 내리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일사(一師)’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들께는 오직 ‘일도(一道)’만 있을 뿐이기에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수여! 법은 언제나 그러하니라. 법왕에게는 오직 ‘일법(一法)’뿐이어서 그 어느 것에도 두려움 없는99) 사람은 일도(一道)에 의해 생사에서 벗어나느니라.” 이렇게 원래 오직 일도(一道)뿐이고 이도(二道)가 없으니 오직 일리(一理)만 있고 이리(二理)가 없다. 또 만일 이제(二諦)가 이리(二理)를 갖는다면 유소득(有所得)을 이루고 만다. … 이런 곳과 마찬가지로 경문은 한 없이 많다 그러므로 이리(二理)는 없고 오직 일리(一理)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질문: “그대의 경우 원래 [진제, 속제, 중도제일의제]의 삼제(三諦)가 있다면 응당 삼체(三體)가 있어야 하리라. 우리의 경우 이제(二諦)가 있기에 이체(二體)가 있다.” 해명: “만일 일가(一家)의 의도를 터득했다면 이런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하기를 …”100)

제말양초(齊末梁初)의 금릉은 중국 불교계의 중심지였지만 이설(異說)만 분분할 뿐 일관된 종지를 전승하는 학파나 종파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릉 외곽의 섭산(攝山)에서 시작된 신삼론 전통에서 ‘삼론학’의 중도(中道) ‘일리(一理)’를 《법화경》의 ‘일불승(一佛乘)’ 및 《열반경》의 ‘불성(佛性)’과 통합하여 ‘일미(一味)’의 가르침으로 빚어냄으로써 중국 불교계에서 최초로 학파가 탄생하였다.101)

위의 인용문 말미에 씌어진 ‘일가(一家)’라는 명칭은 ‘일리(一理)를 종지로 삼고 일승(一乘)을 지향하는 학파’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家)’라는 글자가 의미하듯이 ‘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학파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일가(一家)에 소속된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일사(一師)’라는 호칭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길장이나 혜균이 말하는 ‘일사’는 법랑의 특칭일 수도 있지만 승랑과 승전, 법랑을 모두 포괄하는 선대(先代) 삼론가의 통칭일 수도 있다.

4) 그 밖의 호칭들

이상 ‘산중’, ‘섭산’, ‘섭령’, ‘일사’라는 호칭의 의미와 정체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아울러 ‘사(師)’, ‘대사(大師)’, ‘일가(一家)’와 같은 호칭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산중’이 사용된 호칭은 모두 승전을 가리키고 ‘섭산’이나 ‘섭령’이라는 호칭은 승랑을 가리키며, ‘사’나 ‘대사’의 경우 ‘대사’의 용례에서 약간의 예외102)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법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호칭들은 승랑이나 승전이나 법랑 가운데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호칭들이다. 그런데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에서는 이런 호칭과 함께 삼론 전통을 함께 묶어서 표현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산가(山家)’, ‘산문(山門)’, ‘섭령흥황(攝嶺興皇)’과 같은 호칭, ‘섭령상승(攝嶺相承)’, ‘섭령상전(攝嶺相傳)’, ‘일가상전(一家相傳)’, ‘산문상승(山門相承)’, ‘산문일가상승(山門一家相承)’, ‘일사상승(一師相承)’처럼 상전이나 상승이라는 술어를 덧붙인 호칭들이 그것이다.

이들 호칭과 관계된 사상의 경우 승랑의 고유사상도 있을 수 있겠지만, 승전의 창안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섭령대사나 섭산대사와 같은 특칭은 승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토테츠에이도 주장하듯이103) 섭령흥황104)이나 섭령상승, 섭령상전에 쓰여진 ‘섭령’은 승랑과 승전 가운데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 호칭들의 경우 길장의 저술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혜균은 이들 대신에 ‘일가(一家)’라는 통칭을 주로 사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통칭들과 관계된 사상 가운데 승랑에게서 유래한 것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승랑의 고유사상인지 감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또 단순히 ‘상전(相傳)’이라는 호칭만 사용된 경우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앞에 별도의 수식어가 붙지 않고 단순히 ‘상전(相傳)’이라고 쓰인 경우도, 승전과 승랑을 모두 포함한 ‘신삼론 전통’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사용된 ‘상전’이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이러한 해석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셋째, 또 《법화경》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어도, 다짜고짜 《열반경》만 듣고도 깨달음을 얻는 중생이 있다. ‘상전(相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성론》에서는 《대품경》 등은 이근의 보살을 위한 것이고, 《법화경》은 중근인을 위한 교설이고, 《열반경》은 하근기를 위한 교설이라고 말한다. 또 예를 들어 비록 같은 《반야경》이라 하더라도 《반야경》에는 한량없는 부류가 있다.”105)

이는 길장의 《법화유의》에 실린 문장인데, 여기서 ‘상전(相傳)’의 말로 인용하는 《보성론》은 511년에 후위(後魏)의 늑나마제(勒那摩提)에 의해서 번역되었으며, 서력기원 후 522년106)까지의 기록이 실린 《고승전》에 《보성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서력기원 후 530년경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승랑이 《보성론》을 접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이 인용문만 자료로 삼아 판단할 경우, ‘상전’이라는 호칭이 삼론가 전체가 아니라 법랑만을 가리킬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보성론》의 가르침이라고 소개하는 “《대품경》 등은 이근의 보살을 위한 것이고 … 운운” 하는 구절이나 이와 유사한 문장이 실제 《보성론》 그 어디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길장 당시 유포되어 있었던 《구마라습법사대의》에 중생의 근기를 셋으로 나눈 후 그에 따른 교법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있긴 하지만, 위와 같이 경전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107) 따라서 위에 인용한 《법화유의》에서 ‘상전’이라는 호칭과 함께 《보성론》을 언급한 것은, 본고 제Ⅱ장 제2절에서 검토했던 ‘섭산’이라는 호칭이 그랬듯이, 기록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여 저술활동을 했던 길장의 착오일 것으로 생각된다. ‘상전’이라는 호칭 역시 ‘섭령흥황’이나 ‘섭령상전’, 그리고 ‘일가상전’과 같이 승랑 이후, 승전을 거쳐 법랑에 이르는 신삼론 전통 전체에 대한 통칭이다.

3. 승랑의 특칭과 관계된 승랑의 고유사상

승랑과 관계된 호칭에 대한 이상과 같은 분석에 근거하여 길장과 혜균의 저술에서 승랑의 사상을 추출하고자 할 경우, 승랑의 사상이 분명한 것은 ‘섭령대사(攝嶺大師)’ ‘섭산대사(攝山大師)’ ‘대랑법사(大朗法師)’ ‘낭대사(朗大師)’ 그리고 ‘도랑(道朗)’과 같이 승랑에 대한 특칭과 관계된 사상들뿐이다. 물론 ‘섭령흥황(攝嶺興皇)’이나, ‘산가(山家)’ ‘산문(山門)’ ‘섭령상승(攝嶺相承)’ ‘섭령상전(攝嶺相傳)’ 일가(一家) ‘일가상전(一家相傳)’ 산문일가상승(山門一家相承) ‘산문상승(山門相承)’ ‘일사(一師)’ ‘일사상승(一師相承)’ ‘상전(相傳)’ 등과 같은 삼론가에 대한 통칭과 관계된 사상들이 승랑과 무관한 것일 수는 없다.

이런 통칭들 가운데 ‘섭령흥황, 산가, 산문, 섭령상승, 섭령상전, 산문일가상승, 산문상승’과 같이, 승랑과 승전이 거주했던 ‘섭산’의 ‘산(山)’자가 들어간 호칭과 함께 소개된 사상의 경우, 승전의 가르침일 수도 있지만 그 기원이 승랑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가, 일가상전, 일사, 일사상승, 상전’ 등과 같이 ‘산’자가 들어가지 않은 호칭의 경우 그와 관계된 사상이 승랑의 것일 가능성은 낮아진다.

본고 서두에서 소개했듯이, 길장의 저술들과 혜균의 《사론현의》 이외에 승랑의 사상과 학풍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로는 《서하사비문》과 《삼론조사전집》과 《진서(陳書)》 등이 있다. 또 청(淸)의 팽제정(彭際靖)이 저술한 《거사전(居士傳)》 등이 있는데, 이들 자료에서 승랑의 특칭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내용에 근거하여 승랑의 고유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양무제의 저술에 나타나는 대승사상: 양무제를 교화하여 대승으로 전향시켰다―《대승현론》(앞의 책,108) 19b), 《이제의》(108b), 《유마경의소》(912a), 〈서하사비문〉(《금릉범찰지》, 493쪽), 《삼론조사전집》(43b; 44a)

② 제(齊)의 은사(隱士) 주옹의 공 사상―주옹을 가르쳐 《삼종론》(또는 《사종론》)을 저술하게 하였다―《대승현론》(19b), 《이제의》(108b), 《중관론소》(26b; 29b), 《삼론조사전집》(43b)

③ 삼론문헌을 일관하는 무소득(無所得)의 사상: 대승을 무소득의 입장에서 해석한다―《사론현의》(36b; 200a), 《삼론조사전집》(43b; 44a)

④ 포용적 불교관: 무쟁자(無諍者)라고 불리듯이 다른 학파나 학승에 대해서 전투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진서》(卷三十, 列傳 第二十四 傅縡傳), 《신이전석교부기사》(卷上, 卍纂續藏經88, 487b), 《거사전》(卍新纂續藏經88, 192b)

⑤ 이제시교론(二諦是敎論), 즉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과 이내이제설(理內二諦說)을 제창하였으며 이는 시대와 교화대상에 따른 방편설법[對緣斥病]이었다―《중관론소》(28c), 《대승현론》(22c), 《정명현론》(893a; 894a), 《대승사론현의》(114a)

⑥ 《중론》 제24 관사제품의 삼제게(三諦偈)에 의거하여 창안한 중도(中道)와 가명(假名)의 이론―《중관론소》(22c-23a)

⑦ 중도와 가명에 의거하여, 불교 교화방식을 체가(體假), 용가(用假), 체중(體中), 용중(用中)의 넷으로 구분한 것―《대승현론》(28c)

⑧ 관하상전을 계승하여 ‘둘이지만 둘이 아닌(不二而二)’ 이치로 천승(天乘), 인승(人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불승(佛乘)의 오승(五乘)에 대해 밝힌 것―《사론현의》(200a)

⑨ 《화엄경》에 대한 무소득의 해석: 제(齊)의 무제(武帝: 483-493 在位)를 만나 대화를 나눈 후 그 요청에 의해 《화엄의소(華嚴義疏)》 총8권을 저술하였다―《삼론조사전집》(44a), 《중론소기》(3b) / 《화엄경》의 1회를 1회에 강의하였다―《화엄유의》(1a)

⑩ 법화·열반 이외의 삼론사상: 《법화경》과 《열반경》은 강의하지 않았다―《삼론조사전집》(44a)

⑪ 《중론》에 대한 과문과 주석: 《중론》 제1 관인연품의 연연(緣緣) 비판에 대해 주석하였다―《중관론소》(50c) / 《중론》 제27 관사견품의 처음 5게를 과문(科文)하였다―《중관론소》(168b)

⑫ 횡수(橫竪), 소밀(疏密), 쌍척(雙隻), 단복(單複)의 이론으로 삼론을 해석―伊藤隆壽(70쪽)

여기서는 길장이나 혜균의 저술에 기술된 삼론사상 가운데 승랑의 특칭과 함께 기술된 내용만 열거했지만, 실제로 삼론사상 가운데 승랑에게서 유래한 것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승랑이 무소득(無所得)의 정신(③⑤⑧)에 투철한 포용적 불교관(④)을 갖고 있었고, 삼론해석에 ‘횡수, 소밀, 쌍척, 단복’(⑫) 이론을 도입했으며, 삼론학의 핵심 개념인 ‘중도와 가명’의 이론을 창안하고(⑥) 발전시켰다(⑦)는 점이다. 또 제의 은사 주옹과 양의 무제에게 대승을 가르쳤기에(①②) 이들의 저술에도 승랑의 사상이 많이 반영되어있을 것이다. 삼론문헌에 나타나는 《화엄경》에 대한 해석(⑨), 《중론》에 대한 주석과 과문(⑪⑫) 역시 승랑에게서 기원한 것이지만, 《법화경》이나 《열반경》에 대한 후대 삼론가들의 해석의 경우 승랑과는 무관할 것으로 짐작된다(⑩).

지금까지 승랑의 호칭을 분석한 후, 그 특칭을 가려내고 그와 연관된 승랑의 고유사상을 추려보았다. 이에 근거하여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 끼친 승랑의 영향’, ‘승랑사상의 특징’, ‘길장의 삼론학과 승랑사상의 차이’ 등 승랑사상에 대해 포괄적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이는 후일을 기약한다. ■

김성철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제6회 가산학술상(1996) 및 제19회 불이상(2004)을 수상하였고, 저서에 《중론》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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