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석 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나는 되어가는 되어진 불교인이지만, 되어가는 아직 되어지지 않은 기독인이다.”이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 니시타니 게이지다.

그는 일본 교토학파의 제2세를 차지지하고 있는 천재적인 종교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서 글로벌 철학이니 글로벌 종교니 하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진정한 종교 간의 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로벌이란 동서의 차이나 종교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 지구 가족으로서의 이념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성싶다.

나는 대학원 시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눈을 떴던 사람이다. 그 시절 한국불교연구원 이기영 박사님은 가끔 불교와 기독교 대화의 장과 세미나를 열었었다.

나는 그 시절 어줍지 않게 그런 대화의 현장에서 속된 말로 ‘시다바리’역할을 하였다. 그 와중에 알게 된 분이 작고한 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변선환 박사님이다. 그분을 통해서 기독교 사유 속에도 불교적 사유와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소위 말하는 진보신학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조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 화해와 동반적 관계의 모색이었고 자기의 종교만이 제일이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였다. 그럴 경우 각각의 종교가 보다 풍성해지고 그 풍성한 가르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데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였다.

그후 나는 종교문화연구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김승철, 이찬수, 박문수 등등의 신학자들을 알게 되었으며 대원정사에 재직하면서 불교와 기독교 대화 총서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 당시 변선환 박사님과 그의 애제자 김승철 교수 등 여러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총서 간행의 닻을 올렸다.

물론 그런 나의 생각을 잘 읽고 허락해준 대원정사 경영진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 대화 총서를 8권까지 간행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책이 니시타니 게이지의 《종교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내 불교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널리 확대해 생명력 가득한 진리의 보고이기도 했다.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대화 총서 역시 기독교의 신학과 서양철학의 비교를 통해서 불교의 넓이와 깊이를 들여다보는 데 귀중한 자양분을 심어주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종교간의 대화 시리즈에 대해서 불자들을 흔쾌히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불자들은 흔히 생각한다. ‘불교가 최고야. 불교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 불교를 어떻게 기독교와 비교할 수 있어’라고 말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기독교와 서양철학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기독교는 성경 한 권이지만 거기서 파생된 신학과 철학의 깊이와 넓이는 어마어마하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아무리 중세를 넘어선 근세의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 철학의 이면에는 기독교의 신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담겨 있다. 그리고 비록 현대의 포스트모던 철학이 불교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할망정, 거기에도 역시 신이나 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그리고 새로운 모색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사유의 틀을 배제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에는 교리적, 철학적 체계가 분명히 서 있다. 그것을 조직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불교에는 이러한 현대적 철학체계, 조직불교학이 없다. 요즘 김성철 교수가 체계불학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당시 변선환 박사님이 나에게 말한 게 생각난다. “고 선생, 불교는 현대철학화해야 해.” 그것이 1990년대 중반의 얘기다. 요즘은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계는 철학계에 발도 제대로 못들여 놓았다. 불교는 이제 현대 철학과 신학의 새로운 담론과 대결해야 된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언어로 새로운 불교척학의 영역을 형성해 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되려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대충 하는 게 아니라 전문적인 분야로서 기독교 신학과 철학, 그리고 그 신학의 주변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불교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불자로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 중에 기독교 전공자를 눈 씻고 찾아보아도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심지어 동국대학 불교대학에 기독교를 가르치는 과목조차 개설되어 있지 않다.

현재 세계의 철학과 문화가 급속도로 변화고 있다. 그중 하나의 특징은 동서의 철학과 종교가 혼합되는 형식이다. 이제 비교를 넘어서 절충을 하다가 혼합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유태교적 불교인, 기독교적 불교인, 기독교적 선불교 등등의 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혼합주의적 종교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 이러한 종교인들은 낮설지 않다. 그들은 또 다른 새로운 종교문화를 꽃피워 가고 있다. 그로 인해 기존의 불교나 기독교도 또 다른 지층의 변화가 예견된다.

이런 와중에 우리 불교계에서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공부하는 학자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는 불교도이긴 하지만 기독교에서도 배울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불교는 뛰어난 종교다. 불교만큼 철학적 종교적 사유가 깊은 어떠한 사상도 없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불교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하나만 있어도 족해서 다른 것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제대로 알 때 기독교의 선교 전략에 대해서도 한 차원 높은 태도로 대응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한 말이지만, 불교를 더 풍성하게 가꾸어나가기 위해선, 그리고 불교가 현대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도 기독교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종교편향과 관련된 세미나의 현장에서 시골의 한 작은 교회를 이끌고 있는 신학자가 불교계에 당부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불교계에도 기독교를 전공하는 학자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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