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형 서울대 철학과 교수

불교와 ‘즐겁다’는 형용사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나 스님들의 절제된 일상 때문만은 아니다. 초월의 길에는 즐거움보다는 고난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전설이건 역사적 사실이건 불가에도 무수한 고행담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예컨대 달마의 9년 면벽이나 신광이 법을 위해 팔을 자른 일화는 해탈의 과정이 인고의 가시밭길임을 암시한다. 실제로 불교 수행은 미망을 깨뜨려 지혜를 열고, 중생의 경향성[혹은 업]을 극복하여 청정무위에 이르는 공부이기 때문에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업을 즐기고, 미망에 편안한 것이 중생인데 즐겁고 편안한 것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차라리 ‘불교는 괴로운 종교’라고 말하는 게 옳을 성싶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불교의 즐거움을 말하는가?

그것은 중생이 느끼는 감각적 쾌락이 참된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욕계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중생은 이 세상이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면 기분이 좀 상한다. 설사 괴로움이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벌충하고도 남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황야에서 미친 코끼리 떼에 쫓겨 우물로 피한 사나이의 우화를 보자.

그가 매달린 나무뿌리는 세월이라는 쥐가 갉아대고 있어서 머지않아 독룡의 아가리로 떨어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벌꿀의 단맛에 취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사나이가 처한 상황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괴로움의 구조인 것이다. 요컨대, 그러한 고통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 불교이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 즐겁지 않다면 대체 무엇을 두고 즐겁다고 할 것인가.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는 것 ―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게 이보다 더 숭고한 목적은 있을 수 없다. 즐거움은 그 자체로 선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쾌락주의도 즐거움의 최대치를 구하는 것이지 목전의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즐거움을 해탈이라고 정의할 때, 저열한 즐거움보다는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구한다는 점에서 불교를 고원한 쾌락주의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때 금욕주의는 쾌락주의에 포섭된다.

즐거움에도 수준이 있고 차별이 있다. 돼지의 행복은 소크라테스의 불행만 못하다. 말을 바꾸면,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행복한 돼지보다 더 고차원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한 돼지에게 소크라테스의 불행을 설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조차도 포교를 주저하게 만든 소통의 어려움이다. 모든 중생은 자기가 처한 국토와 업에 안주하고 그것을 즐긴다.

변하는 것을 변치 않은 것으로 오인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괴로움을 벗어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오욕락을 즐기는 욕계의 중생은 그것이 ‘총체적 괴로움의 구조’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을 떠난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무상정등정각 이전의 모든 즐거움은 괴로움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괴로움을 벗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괴로움 속에 있음을 먼저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성제의 첫머리가 고성제인 것도 까닭이 있다. 중생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락의 상(相)에 갇혀 있지만 출구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불가사의한 불성의 작용인가,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속에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평화를 갈구하는 향상심[혹은 진여심]이 있다.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구하는 마음이다. 만약 감각적 쾌락에 얽매이는 것이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밝게 비추어 본다면 그것을 벗어나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숙세의 업력과 현존하는 욕구로 인해 세세생생 애착하고 즐겨 온 것들을 일시에 놓고 끊기가 어렵다. 사람의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의지 자체가 업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쾌락을 즐기는 마음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통찰하느니만 못하다.

중생이 업을 즐긴다는 것은 느낌을 즐기고 생각을 즐기며, 총괄하면 오온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느낌이나 생각에는 뿌리가 없다. 그것은 허공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듯이 몇 가지 조건들이 화합해서 일어나는 무상한 현상에 불과하다. 그것을 ‘내 것’이라고 해서 즐기고 탐내고 집착할 때 비로소 실체가 되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뜨거운 애욕이나 거센 증오심도 그것이 일어날 때는 온 세상이 그것뿐인 듯하지만, 그렇게 견고하던 나의 감정과 생각도 조건이 조금만 바뀌면 연기보다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다. 마음 같지 않은 나의 ‘현실’ 또한 ‘현실에 대한 나의 생각’일 뿐이며, 그 생각이란 본래 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유위법이 꿈같고 물거품 같으므로 마땅히 그렇게 봐야 한다. 그러나 오랜 숙업 때문에 연기를 투철히 관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미망도 무시 이래로 ‘쌓여온[集]’ 것이기 때문에 무명을 벗고 연기의 실상을 관하는 길 또한 부단한 연습밖에 없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제각기 근기와 상황에 따르면 되겠지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평정심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덧없는 과정을 보면서 본래 붙잡을 게 없고 붙잡을 수도 없음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번뇌와 집착과 다툴 것이 아니라 그 공성을 볼 것이다. 공성을 통해 실상을 만나는 과정이 불교의 즐거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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