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준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교수

약간은 점잖은 흉내를 내는 모임에서 금기의 대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것이 ‘종교’와 ‘정치’에 대한 대화가 아닌가 싶다. 종교와 정치를 화제로 꺼내는 사람은 분위기를 해치는 이 무슨 생뚱맞은 짓인가 하는 눈총을 받기 쉽다. 그래도 종교와 정치가 화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때 내가 하는 대답은 “불교적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이다.

‘불교적 성향’이 있다는 나는 누구인가? 열 살 때부터 관세음보살 사진을 오십 년이 넘도록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으면서, 그동안에 이 사진을 천 장 이상 복사하여, 택시 기사 등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관음보살의 영험을 이야기하면서 나누어 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수가 된 것도 관세음보살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불교를 믿는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왜 불교적 성향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는가? 내가 오십 년 이상 관음보살 사진을 소중히 모시고 다닌다고 해서 내가 기복적으로만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의 내용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그 위대성과 장엄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또한 이 장엄한 불법을 인간으로 태어나서 만나게 된 행운에 대해 엄청 감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불법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학문에서도 나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제일 귀중한 열쇠가 되고 있다.

십여 년 전에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불교를 믿는 적극적인 분이 있어 ‘성불회’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때 내심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참가한 많은 사람들 중 평소에 스스로 불교 신도라고 자칭한 분이 적다는 점이다. 어떤 분은 기독교도로 짐작했는데 성불회에 참여한 분도 있었다. 그 성불회의 모임은 그 적극적인 분이 떠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그 자신을 은폐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몇 가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온유하고 평화적인 성격적 성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전투적이고 논쟁적인 이교도와의 언쟁이나 갈등을 유발시킬 빌미를 피하자는 의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불법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은 마음과 연결시킬 수 있다. 자기가 진정 보물로 생각하는 물건은 남에게 공개하지 않고 자기만이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소중히 보관하고 싶은 것이다. 괜히 공개하여 그 보물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로, 집안의 내력이나 인연으로 불교를 믿으면서 체험적으로 불교에 대하여 친화력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런 분은 불교를 믿는 동기에 대해 구구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번거롭게 느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지식과 실천에 대한 의지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포교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는 분이 머뭇거리는 경우이다.

짧은 시간 내에 불교적 내관력이 약한 사람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불교 지식인들이 일반 사람에게 불교를 설명하는 것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가끔 보기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도 깨달음을 얻은 후 이를 알릴 것인가에 깊은 고민을 하신 후 출가 시의 도반을 찾아 가신 것을 상기하면 그 머뭇거림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럼 나는 왜 불교적 성향이라고 우물쭈물하고 있는가? 딸이 대학생이 된 후 불교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다. 딸은 중·고교 재학 시절에 불교학생회 활동도 많이 하고 신심도 깊다. 그런데 딸과 불교 대화를 하면서 간혹 엇박자가 나기도 하고 침이 마르고 혼란을 느끼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내가 불교에 대해 너무 편식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불교에 대한 긴 사회화 과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육조대사의 일화나, 선승들의 파격적인 행동에 대해 재미나게 들어 왔다. 체계적으로 불교 교리에 대해 공부해 보지도 않았고, 문자로 익히는 것을 약간 경시하기도 한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불립문자적인 불교에 익숙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가 불교적 성향이라고 우물쭈물한 제일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는 불교 신자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동안 허황된 멋 부림으로 불교를 알아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주어진 연구년에 불교에 관한 책을 게걸스럽게 읽었다. 그것도 기초적인 불교교리 책, 불교사상의 흐름에 관한 책, 불교 수행자의 고뇌가 서린 책, 서양인이 이해하는 불교 책 등 교양적 수준의 책을 많이 읽었다.

이제 나는 불교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불교를 믿는다고 말 할 수 있는 신도가 되고 싶다. 불교와의 만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짧은 시간 내에 주변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또한 오십 년 이상 관음보살상을 품고 다니는 이유를 비불교도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싶다. 문자나 말로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것부터 홀가분하게 정리되면 얼마나 개운할까. 나무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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