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민속의 만남

1.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신라가 어떻게 삼한 통일의 주역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일연(一然)의 의중은 다분히 불교적이다.

우리는 그 한 가지 증거를 《삼국유사》 〈흥법(興法)〉 편에서 읽을 수 있다.

양으로 볼 때 〈기이(紀異)〉 편에서 전반부가 끝난 《삼국유사》는 후반부를 이 〈흥법〉 편으로 시작한다. 〈흥법〉은 삼국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어 정착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기술한 부분이다. 모두 6개 조, 삼국에 각각 2개 조씩 배분되어 있다. 이 같은 겉모양만으로 보아서는 매우 균형 있게 삼국의 상황을 기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내용에 들어가 보면 다분히 신라의 손을 들어 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처음 3개 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으로 기술된다. 이는 명백히 불교의 유입 순서대로이다. 그런데 다음 3개 조는 신라―백제―고구려 순이다. 처음과는 역순인데, 이는 삼국에서 불교가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그 발전의 양상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 가운데 불교를 제대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종교로까지 발전시켰다고 일연은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국력의 발전과 평행선을 이룬다. 제대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신라 쪽에 강조점을 찍은 것이다. 곧 불교를 발전시켰기에 나라가 발전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일연의 불교역사주의라고 말한다.

신라에 불교를 전하고 정착시킨 이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다는 데에서 일연의 필치는 더욱 극적으로 나간다.

〈아도기라(阿道基羅)〉 조에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하면서 일연은 “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아도)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는 대목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수록하였다. 《삼국사기》에서 “또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화상(我道和尙)도 곁에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왔다.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한데, 여러 해를 머물며 아프지도 않다가 죽었다.”는 대목과는 미묘한 차이가 난다. 일연은 두 기록을 모두 인용하지만 조금씩 다른 부분을 뒷사람의 논의에 맡긴다 했는데, 다분히 ‘자결’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듯하다.

순교의 피는 순결한 것이다. 이 전통은 아도에서 생겨 이차돈(염촉)으로 이어진다. 신라의 불교가 운명적으로 뿌리 깊게 박히는 것은 무엇보다 이 순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기에 일연은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滅身)〉 조에 이차돈의 죽음을 찬미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이차돈의 목을 치자 붉은빛이 아닌 흰 젖 같은 피가 솟구쳤다는 이적을 시화한 것이 처음 두 줄이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서 ‘몸은 사라진 뒤’라고 하여, ‘신망후(身亡後)’라고 쓴 것은, 몸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의 정신은 오롯이 살아남아 후세에 전해졌다는 시적 함의이다. 그러기에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온 나라를 흔드는 것이다.

이렇듯 일연이 바라본 신라는 찬란한 불교의 나라이고, 불교이기에 찬란한 신라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굳건하다.

일연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신라는 불교의 나라만일까. 신라가 그렇다고 해서 일연은 신라의 불교만을 《삼국유사》에 담으려 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종착은 불교에 두고자 했으나 신라가 가진 민속종교의 여러 면을 담아 두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더러 그 둘 사이의 갈등과 다툼 속에서 신라만의 독특한 신앙 형태가 절묘하게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강조할 필요도 없이 신라는 불교를 모른 채 시작한 나라이다. 자생적이건 어디서 연원하여 들어왔건 민속종교라고 묶어서 말할 신라의 고유 신앙이 있었다.

〈기이〉 편의 〈제2대 남해왕〉 조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반부 곧 남해왕부터 지증왕까지 사이에 나온 왕의 칭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간추려 적어 놓았다. 그 가운데 “신라에서 왕을 부를 때 거서간이라 하는데 그곳 말로 왕이다. 간혹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 하고, 어떤 이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은 ‘차차웅은 이 지방 말로 무당을 일컬으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두려워 공경하다 보니, 높으신 분을 자충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먼저 눈에 띈다. 무당은 원문에서 ‘무(巫)’라고만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무당이 남무(男巫)일지 무녀(巫女)일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가 제정일치의 원시적인 국가공동체로 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시호가 확립되는 지증왕대 이전까지 신라에서는 왕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제정일치의 원시적인 공동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하나 있다.

제4대 탈해왕은 석(昔)씨 성의 처음 왕이다. 박혁거세로 시작하여 그의 손자까지 3대에 걸쳐 직계가 왕위를 잇는 사이, 돌연 석씨가 나타나 왕이 된 데는 주변의 호의만 끼어들어 있지 않다.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의연히 그 배후 역할을 해내는 한 무녀가 있다.

“(탈해의 배가)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에 있는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구 가에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어미였다.”는 대목을 다시 보기로 하자. 〈기이〉 편의 〈제4대 탈해왕〉 조의 처음 부분이다. 여기서 논란이 되기는 ‘아진의선’이라는 사람의 정체이다.

아진의선은 ‘아진포에 사는 의선’이라고 풀 수 있겠다. 그런 의선의 신분을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어미’라고 한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원문에는 ‘고기잡이 어미’를 해척지모(海尺之母)라 쓰고 있다. 해척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척(歌尺)은 노래하는 사람, 무척(舞尺)은 춤추는 사람과 같은 용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척(水尺)은 무당을 뜻한다. 여기에다 신라 귀족의 제4등 파진찬(波珍?)의 별명이 해간(海干)이었음을 가지고 수척과 해간을 묶어보면, 해척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제의 임무를 맡은 고위급의 여성을 해척이라 불렀음 직하다.

시대는 아직 제정일치 사회였다. 거기서 나아가 사제는 그대로 두고, 남성이 왕의 권력을 떼어내 독립하는 일이 벌어지는 때를 우리는 고대왕권사회라 부른다. 신라에서 처음 그 일을 한 사람은 혁거세였는데, 그의 뒤에는 아진포의 의선이 사제로서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으리라. 이런 롤 모델을 따라 두 번째로 배출된 이가 탈해였다고 보인다. 〈제4대 탈해왕〉 조의 다음 대목을 보자.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고 하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늘을 향해 맹서를 하자 곧 열렸다. 그 안에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 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7일 동안 먹여주었더니 그제야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박혁거세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극도의 비밀에 부쳤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든지, 중국 황실의 공주가 신라로 옮겨와 선도산의 신모가 되어 거기서 태어났다든지, 신화로 도배된 기록이 전면에 나서 있다. 그런데 뜻밖에 탈해의 출신 배경담에 와서 비밀이 새는 느낌이다. 도배된 신화의 뒤편에, 정작 자신을 키운 이는 시골 바닷가의 무당이었음을 나타내는 ‘해척지모’라는 말이 〈제4대 탈해왕〉 조에서 일연의 입을 통해 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삼국사기》만 해도 아진의선을 ‘해변의 할머니’라고 적었을 뿐, 혁거세와는 아무런 상관성도 말한 바 없다.

그에 비해 탈해는 그 출신이 명확하다. 신화적인 수사로 덧칠해진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든든한 교사요 후원자인 의선을 찾아와 혁거세처럼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새이다.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모를 배 한 척을 끌어다 놓고 의선은 하늘에 기도하고 있으며, 궤짝의 문이 열리자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7일 동안 먹여준다. 7일은 단군신화의 곰이 동굴에서 보낸 3×7일을 연상하게 한다.

탈해는 토함산을 넘어 경주로 들어가, 호공의 집을 꾀를 써서 빼앗고, 지략을 인정받아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처남인 노례왕과 어처구니없는 내기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끝내 제4대 신라의 왕에 올랐다.
이 모든 시간표의 작성자는, 상상이 허락된다면, 동해안 무녀 아진의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3.

신라의 무속신앙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이〉 편의 〈연오랑 세오녀〉 조에 실려 있다.

한갓진 해변에 살던 평범한 부부가 어느 날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일본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그간 연구자들이 내린 이 이야기의 숱한 의미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망을 벗어나는 또 다른 해석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인 정유년[157]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 태워서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내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괴이히 여겨 나가서 찾아보았다. 남편의 신발이 벗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바위 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한 이전처럼 태워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왕에게 바쳐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귀비(貴妃)로 삼았다.

서기 2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에서 일본이니 왕이니 하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만, 핵심은 동해 바닷가에 살던 한반도의 부부가 일본열도로 그 사는 곳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서 왕과 왕비라는 극상의 대우를 받았다.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신비스럽게 만들었지만, 외적의 침입에 대해 극도로 민감했던 때였으니만큼 도리어 귀신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과연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어떤 면을 보았기에 부부에게 고난 대신 영광을 주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야기는 다음 대목에서 심각해진다. 일본이 아니라 신라에서이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령이 우리나라를 버리고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까닭에 이 같은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연오는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 지낸다면 될 것이다.”

그러고서 그 비단을 내려주었다. 사신은 돌아와 아뢰었다.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처음부터 이 이야기가 일본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에 가서 왕과 왕비가 된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달이 나기로는 신라였다. 바로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사건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기로야 신라의 왕이나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고기잡이하며 사는 동해 바닷가의 평범한 부부가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그들이 해와 달을 움직이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쥐도 새도 모르게 출국한 연오와 세오 부부가 야속할 따름이다.

일이 벌어지고 나니 그같이 엄청난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불찰로 그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부부를 찾아가 신라로 다시 돌아오기를 간청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연오와 세오의 출국이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늘이 시켜서’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말하는 연오이지 않은가.

대안으로 왕비가 짠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신라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음은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필자는 이미 연오와 세오를 해와 달의 정령(精靈)을 의인화한 것으로 본 바 있다. 한 집단은 정신세계의 어떤 고갱이가 필요하다. 그것으로 이른바 하나된 세계를 만들고, 그것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사회질서를 다잡아 나간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갔다는 것은 신라 사회의 그런 정신적 질서가 상실되었음을 말한다.

해와 달을 의인화한 데서 이야기의 의의는 더 커진다. 이런 이야기 수법을 일연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월명사의 이야기에 가면 이는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월명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남긴 사람이다. 〈도솔가〉는 다름 아닌 해가 둘 나타난 변괴를 물리치기 위해 지은 노래가 아닌가. 월명은 해를 다스린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월명은 달도 다스린 사람이었다. 달 밝은 밤 피리를 불고 길을 가는데 달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해와 달이 제 빛을 내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바로 서 있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연오와 세오의 이야기는 해와 달을 매개로 월명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필자는 연오와 세오를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 바닷가에 사는 어부의 어떤 비극적인 죽음과, 그 죽음을 애도하는 혼굿의 전승으로 보기도 하였다. 지금도 동해안 일대에서는 바다에서 죽은 이의 넋을 달래는 수망굿이 장엄하게 펼쳐지곤 한다. 연오와 세오의 이야기는 수망굿의 원형적인 스토리가 아닐까.

연오가 바다를 건너 저 세상으로 간 것이며, 그가 떠난 자리에 세오가 와보니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는 상황을 보면 언뜻 죽음이 연상된다. 그러니까 바닷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다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된 어떤 부부가 있었다 하자.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슬픈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 방식의 예식을 베풀어주는 행사가 있었다 하자. 하늘의 해와 달이 다름 아닌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았다 하자.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확장되고 굳어지면서, 사람들은 마지막에 이 부부를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가 왕이 되었다고 기억하게 된 것은 아닐까.

세오가 짠 가는 비단을 가지고 와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대목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제물로서 비단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사실 여성 사제가 베를 짜서 이를 신의(神衣)로 삼아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데, 보다 분명한 이야기의 형태를 가지고 남아 있는 연오와 세오의 경우는 무척 중요한 실례에 속한다. 이를 가지고, 영일 바닷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비단의 생산지였으며, 직물신(織物神)에게 드리는 감사의 제례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을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도 있다.

4.

신라가 불교를 국가종교로 인정하는 법흥왕(514~539)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신라 안팎에서는 불교가 알게 모르게 퍼졌음을 우리는 한 사건을 통해 짐작한다. 비처왕 10년(488)에 터진 사금갑(射琴匣) 사건이다.

법흥은 지증왕(500~513)의 맏아들이고, 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 왕권국가의 기반을 놓는다. 법흥왕의 ‘법’은 율령을 가리키는 것이자, 왕 15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한 데서도 비롯한다. 지증(智證)이라는 시호 또한 지혜를 증득함, 곧 바른 지혜에 의해 열반을 증명한다는 불교식 이름으로도 볼 수 있다.

지증과 법흥이 완연한 불교 분위기에 기울었음에 비해 그 앞인 비처왕의 때는 민속종교와 신흥종교 간에 갈등하는 시기였다고 해야겠다. 예의 사금갑 사건을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 편 〈사금갑〉 조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하였다.

왕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

때마침 까마귀가 쥐와 함께 와서 우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새가 가는 곳을 찾으시오.”

왕은 말 탄 병사를 시켜 쫓게 했다.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자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구경하다 문득 까마귀가 간 곳을 놓치고 말았다. 길가에서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한 노인이 나타났다. 연못 가운데에서 나와 편지를 바치는데 겉면에, “뜯어서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병사는 돌아와 그것을 왕에게 바쳤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뜯지 않아 한 사람이 죽는 게 낫겠지.”

왕이 그렇게 말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왕도 그럴 것 같아 뜯어보게 하였다. 거기에는 “거문고의 갑을 쏘아라.”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의 갑을 쏘게 하였다. 그랬더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가 몰래 정을 통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참형을 당하였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배경과 그 결과에 대해 알고자 문면을 따라가자면, 본분을 망각한 패역한 승려의 비참한 말로를 그린 것처럼 보이고, 폐쇄된 왕실 안에서 문란한 성 풍속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이를 해결해 내며 쌓아올리는 신라의 도덕적 무장이 완연 강인했음을 나타낸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이 모든 과정에서 곳곳에 포진한 신라인의 협력이 왕실을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하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연못 가운데서 걸어 나와 편지를 바치는 신이한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은 까마귀나 쥐 그리고 돼지 같은 동물에게까지 이어져 있다. 백성 둘의 희생보다 왕을 잃는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일관의 조언은 충성심 그 자체요, 결과적으로 국가의 큰 이익에 공헌하는 현명한 판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어떤 무속 의식의 시나리오로 보며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왕이 행차한 천천정은 의식의 장소이다. 사람의 말을 하는 쥐가 등장하는데, 이는 쥐로 분장한 소무(小巫)일 것이며, 날아가는 까마귀도 나는 흉내를 내는 무당의 일원으로 보인다. 까마귀를 따라가는 다음 의식은 돼지의 싸움이다. 이 판이야말로 굿의 중심이다. 사슬 위에 통돼지를 올려놓는 의식은 지금도 서울 부군당 굿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절정의 순간이다. 이런 절정의 순간에 신탁(神託)의 글을 받쳐 든 무당이 나타난다. 글을 해석하는 일관은 무당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데, 그에 의해 활을 쏘는 행위가 마무리로 이어진다. 사방으로 활을 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은 지금도 굿판에서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왕까지 참여하는 무속 행위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았다 할 것이다. 그 목적은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액운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사금갑 사건의 기록 끝에 “이로부터 나라 안에 풍속이 생겨났다. 매년 정월 첫 해(亥)일, 자(子)일, 오(午)일에는 삼가 근신하며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또 15일은 까마귀가 꺼린 날로 삼고, 찰밥을 지어 제사 지내는데, 지금까지 행해진다.”는 일연의 부기(附記)가 따르지 않았는가. 해는 돼지, 자는 쥐, 오는 까마귀를 가리킨다. 곧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오(午)는 본디 말인데 이를 까마귀를 나타내는 동음이의어인 오(烏)를 대입시켜가면서까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굳이 정월의 첫 해(亥)일, 자(子)일, 오(午)일에 근신한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새해맞이 행사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전국적인 신년 마을 굿과 다름이 없다.

다만 이런 의식은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몰래 정을 통하다 적발된’ 궁주와 분수승은 실제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이 사건에서 유래하여 매년 같은 시니리오를 가지고 굿판이 열렸을 것이다.

문제는 왜 하필 분수승인가 하는 점이다.

신라가 아직 불교를 공인하지 않은 시점이기에, 분수승의 존재와 그 정체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법당의 향불을 사르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역할이 주어진 승려라는 일반적인 설명밖에는 말이다. 그런데 비처왕의 시기에 오면 상당한 숫자의 불교 인구가 생겼으리라 보인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법흥왕의 불교 공인으로부터 불과 30여 년 전이고, 아도가 와서 불교를 전파하던 때가 바로 이 왕 때였으며, 묵호자가 처음 신라로 온 것이 앞선 눌지왕 때였다. 특히 묵호자가 병든 눌지왕의 딸을 고쳐준 일은 선교의 호기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인 사이에서 암암리에 불교가 퍼져 나갔으리라는 것이다. “아도화상도 곁에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왔다. (중략) 아도가 죽은 뒤에도 모시던 세 사람은 머물며 경률(經律)을 가르쳤는데, 더러더러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라 주류 세력의 불교에 대한 거부감은 완강했다. 후원을 해 주던 “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는 기록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사금갑 사건의 본질은 불교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기존 세력의 보다 큰 규모의 조직적인 불교 탄압으로 볼 수 있다. 분수승의 사통(私通)은 그 자체로 문제 삼을 수 있으나, 이것을 해마다 환기시키며 승려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연례적인 행사로까지 확대한 데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민속종교는 기존 세력의 이해득실과 맞아떨어져 새로운 종교의 등장 앞에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금갑 사건은 이를 웅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존 세력이 지닌 힘의 절정이요, 이제 기우는 달과 같이 절대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5.

민속종교의 위력이 강한 만큼 새로운 외래 종교는 발을 붙이기 쉽지 않았지만, 그런 시련을 겪어 냈기에 불교가 신라에서 튼튼히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가 기존의 민속종교를 몰아내고 대체세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면 이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민속종교와 불교 사이에는 매우 절묘한 동거가 이루어졌다.

화랑에게 붙여진 세속오계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보다 큰 구조적인 유합(類合)의 예가 ‘제석(帝釋)’이라는 말에서 찾아진다.

단군신화에서 일연은 ‘환인’ 아래에 ‘제석’이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 어원을 찾자면 《리그베다》의 주인공 인드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드라는 뇌정신(雷霆神)이라고도 불리는데, 산스크리트어 정식 명칭은 사크라드바남인드라, 한자어로 번역하여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이다.

이를 줄여 석제환인(釋帝桓因)이라 하고 의역한 이름이 제석천(帝釋天)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이나, 일연이 주석을 붙인 제석은 모두 불교의 이름이지만, 제석은 단순히 불교에만 의지된 이름이 아니었다. 고대적인 천신(天神)의 개념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와 아무 상관없는 단군신화에 불교의 이름인 환인이 본문에 쓰이고, 이를 일연이 굳이 천신에 가까운 개념의 ‘제석’으로 주석을 달아 놓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그것은 곧 불교 도입 이후 단군신화마저 불교적 용어에 익숙히 용해되어 들어갔음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 전반기를 지나 일연이 사는 13세기에 오면 더욱 그렇다.

이런 현상을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본래 하늘님, 즉 천신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가 있었을 것이나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천(天)ㆍ천제(天帝)ㆍ황천상제(皇天上帝)ㆍ상제(上帝)라는 한자 용어로 표현되는 한편, 당시 유행되던 환인 또는 제석이란 불교 관념의 용어로도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안지원 《고려의 국가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출판부, 2005에서

이는 단순히 용어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안지원은 “우리 고유의 하늘 관념에 입각해 불교의 도리천(?利天)을 수용함으로써 고대적 천신과 제석이 동일시되어 제왕이 천손이라는 고대 지배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불교의 제석신앙과 결합될 수 있게 하여 제석신앙이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다.”라고 확대해석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평왕이 설치한 내제석궁(內帝釋宮)이요, 그의 딸 선덕여왕이 사후 도리천 가운데 묻어 달라는 유언이다. 물론 선덕이 말한 도리천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곳이 어딘지 몰라 묻는데, 선덕은 낭산(狼山) 남쪽이라 한다. 선덕이 죽은 10여 년 뒤, 문무왕이 선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게 되자, 사천왕 하늘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불교적 공간이 완성된다.

불교와 민속종교의 넘나듦이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신라 사회에는 전통의 이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기이〉 편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인 비형랑이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비형은 죽은 진지왕의 혼령이 찾아와 과부로 사는 도화녀를 만난 다음 거기서 태어난 사람이다. 반인반귀(半人半鬼)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귀신으로, 하루를 24시간 내내 살았다. 참으로 특이한 캐릭터이다.

비형이 왕의 부탁으로 고용한 귀신이 길달이다. 그런데 귀신일 뿐인 길달은 인간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여우로 변해 숨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와 죽였는데, 죽은 귀신을 또 죽인다는 게 이채로운 발상이나, 이 일로 다른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귀신을 쫓아내는 효과, 사람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지어서 부른 노래가 다음과 같다.

귀하신 왕의 혼으로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 그 사람의 방이 여기네
날고 뛰는 가지가지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는 말아라

일연은 이 노래 끝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붙여 귀신을 쫓는 습속이 생겼다.”(〈도화녀 비형랑〉 조)는 설명을 붙였다. 마치 처용의 얼굴을 그려 귀신을 쫓는 풍속과 흡사하다. 민간에서 유행한 이러한 풍속은 당연히 민속종교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사실 《삼국유사》 〈기이〉 편의 〈처용랑 망해사〉 조에서 처용의 이야기는 가장 중심에 서는 화소이지만, 이 조를 전체적으로 보면 왕이 사방의 신들을 찾아다닌 편력담이다. 처용은 왕이 동쪽으로 갔을 때 만난 용왕신의 아들이었다. 뒤를 이어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으로 가서 왕이 만난 신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또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이다.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는데, 곁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만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서서 춤추니, 왕이 손수 따라 춤을 추며 형상으로 보여주었다. 신의 이름을 상심(祥審)이라고도 하므로, 지금 나라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면서, 임금이 춘 상심[御舞祥審] 또는 임금이 춘 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신이 나타나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 본 떠 기술자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여주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도 하였다. 또는 상염무(霜髥舞)라 하는데, 이는 곧 그 모양을 가지고 일컫는 것이다.

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이다.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옥도검(玉刀鈐)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 춤을 추는데,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헌강왕은 신라 하대인 875년부터 10년간 재위하였다. 이때라면 신라 불교는 난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지키는 토속적인 신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그런 나라가 신라였다. ■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전공은 한국고전문학. 저서로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은 묻는다》 《한국 고전시가의 근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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