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 2009년 9월 25일

-佛敎의 社會化를 위한 한 理論的 定礎-

Ⅰ. 緖 言

오늘의 韓國佛敎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自省과 批判의 소리가 佛敎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그 자성과 비판의 대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의 하나는 불교인들의 社會意識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국불교인들의 사회의식은 매우 빈약하고 저조한 실정이다.

그리하여 급속한 時代의 변화가 몰고 온 수많은 사회적 難題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주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를 능동적으로 嚮導해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불교가 自己變革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투철하고 적극적인 사회의식이라고 하겠다. 사회의식이 그동안 우리 한국불교가 護國佛敎라는 기치 아래 강조한 體制順應的인 同參意識이나 協同意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批判的 社會意識, 즉 批判意識이며 批判精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批判精神을 佛敎의 어떠한 思想과 敎說속에서 導出해 낼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것을 中國 三論宗의 根本敎義인 破邪顯正 등의 思想보다도, 우선 불교사상의 原流라고 할 수 있는 緣起說을 통하여 論究해 보고자 한다. 연기설이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임을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큰 意義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연기설은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業感緣起說, 阿賴耶識緣起說, 眞如緣起說, 法界緣起說(또는 無盡緣起說), 六大緣起說등으로 전개되어 왔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연기설은 思想的發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原初的인 연기설의 精神이 굴절되고 왜곡된 점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本稿에서는 흔히 十二緣起說로 通稱되는 初期불교의 緣起說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불교는 社會的 批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종교로 曲解되기 쉽다. 그러한 곡해는 대체로 불교는 어디까지나 慈悲의 宗敎라는 先入見, 그리고 불교의 戒律이나 業說 또는 緣起說 등에 대한 皮相的이고도 편협한 이해 때문에 야기되는 것 같다. 불교는 확실히 자비를 重視하는 종교이다. 그렇지만 자비의 具體的 실천이 항상 따뜻하고 관대하고 順應的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만은 없다고 본다. 불교의 진정한 자비는 오히려 剛直한 忠告와 철저한 批判을 통해서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계율 가운데에는 他人에 대한 誹謗을 삼가는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法網經’의 경우만 보더라도, 十重大戒속에는 說四衆過戒와 自讚毁他戒가 있고 四十八輕戒 속에도 謗毁戒 등의 내용이 있다. 이러한 계율을 잘못 이해하면 불교는 사회적 비판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만으로 불교가 批判的 社會意識을 부정한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衆生을 無知와 罪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으므로, 무지와 죄악을 덮어두고 放置하는 것은 佛敎정신에 정면으로 背馳되는 것이다. 따라서 범망경 등에서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남을 비방함으로써 자신을 내세우려고 한다든가 필요 없이 남을 헐뜯는 것을 취미로 삼는 어리석음을 경계한 것이지, 결코 타인의 迷妄과 잘못을 수수방관하라는 말은 아니다.

범망경의 다른 계율조항을 보면, 중생을 敎化하지 않는 것은 罪이며, 病을 보고 간호해 주지 않는 것도 죄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社會가 병을 앓고 있거나 自己矛盾 속에 빠져 있는데도 외면하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도 하나의 죄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誹謗과 批判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성질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佛敎의 業說은 의도적으로 지은 善業과 惡業에는 今生이나 來生에 반드시 그 果報가 따른다는, 이른바 因果應報의 思想이다. 이 업설은 대개 三世輪廻說과 함께 설해지므로 잘못하면 일종의 宿命論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釋尊이 일찍이 숙명론을 三種外道의 하나라고 하여 배격한 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할 것이다.

三世業報說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깊은 硏究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알지만, 적어도 업설은 現世의 業因에 대한 果報가 後世뿐만 아니라 現世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고통과 불행 또는 현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不條理와 社會惡을 반드시 운명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사실 業說의 核心은 인간의 自由意志를 중시하며, 그에 다른 創造的努力과 道德的 責任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業說이 현실의 질서를 절대시한다거나 批判的 社會意識을 부정한다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緣起說에 대한 通俗的이고도 皮相的인 이해이다. 일반적으로 연기설은 一切萬有의 相依相資性으로 해석되어 和解와 協力, 慈悲와 寬容의 理論的 근거로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佛敎思想의 核心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설에 대한 이러한 一方的인 이해는 人間學의 요람인 불교의 풍부하고 力動的인 思想을 왜곡시키고 形骸化시킬수 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연기설에 대한 다양한 視角을 견지하면서 연기설 자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함은 물론, 연기설의 基底에 흐르고 있는 실천적 불교정신까지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취지에서, 本稿에서는 緣起를 相依性으로 파악하는 이른바 緣起相依說의 제반 문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서 檢討한 후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 拙論이 ‘佛敎의 社會化’를 위한 基礎理論의 定立에 一助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Ⅱ. 緣起說의 一般的 解釋

‘緣起를 보면 法을 보는 것이고, 法을 보면 곧 緣起를 보는 것이다’는 中阿含 象跡喩經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緣起說은 佛敎의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敎說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만큼 연기의 진리는 그 意味가 甚遠하여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釋尊은 한 때 제자 阿難으로부터 “如來와 여러 比丘들이 연기법이 甚深하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에는 그렇게 깊은 뜻이 없는 것 같습니다”는 말을 듣고, “아난아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라, 十二緣起는 그 의미가 매우 甚深하여 일반인들이 명확하게 알 수가 없느니라”고 가르친다. 또한 長阿含의 大緣方便經에서도 석존은 “아난아, 이 十二緣起는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연기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 뜻을 思量․觀察․分別하려고 하면 모두 즉시 荒迷해져 버릴 것이다.”고 설하고 있다. 雜阿含의 한 經에는 12연기에 대한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緣起法 義說이 설해져 있지만 難解하기는 마찬가지다.

緣起法은 이처럼 難見難知의 법이기 때문에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도 연기법에 대한 해석이 각 부파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던 모양이다. 俱舍論에서는 연기설에 대한 부파시대의 諸解析을 크게 ① 刹那(kṣaṇika)緣起 ② 連縛(sāṃbaṃdhika)緣起 ③ 分位(āvasthika)緣起 ④ 遠續(prākarṣika)緣起 등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 중의 세 번째인 分位緣起에 석존의 本懷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찰나연기란 1찰나에 12연기가 갖추어져 있다는 해석이고, 연박연기는 12支가 12찰나에 각각 대응하여 連續한다는 해석이다. 또한 분위연기는 이른바 三世兩重因果說이며, 원속연기는 12支의 因果가 多生에 걸쳐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그리하여 12연기의 眞意가 分位緣起, 즉 3세양중인과에 있다는 해석은 後代의 論師들이 거의 대부분 수용하게 된다. 물론 唯識家인 護法(Dharma-pāla 531~561)은 二世一重因果說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共感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近來에는 이 3세양중인과설이 많은 불교학자들에 의하여 비판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新解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稿를 달리하도록 하고, 우선 이 章에서는 한국의 일반 불교인들에게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통적인 3세양중인과설과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교서적에서 채택하고 있는 緣起相依說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1. 三世兩重因果說

胎生學的 緣起說의 母胎라고 할 수 있는 3세양중인과설은 12연기의 12支 가운데에서 無明(avijjā ; avidyā)과 行(saṇkhārā ; saṃskāra) 二支는 過去世의 二因으로 보고, 識(viññāṇa: ; vijñāna)․名色(nāma-rūpa)․六處(saḷāyatana ; ṣaḍāyatana)․觸(phassa ; saṃsparśa)․受(vedanā ; vedanā) 등 五支는 現在世의 五果로 본다. 그리하여 과거세와 현재세 사이에 一重의 因果 관계가 성립된다.

또한 愛(taṇhā ; tṛṣṇā)․取(upādāna ; upādāna)․有(bhava ; bhava) 등 三支는 未來世의 果를 引生할 現世의 三因으로 보고 生(jāti ; jāti)․老死(jarā-maraṇa ; jarā-maraṇa)의 二支는 현세의 三因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未來世의 二果로 본다. 그리하여 다시 現在世와 未來世 사이에 一重의 因果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여 결국 三世(과거세․현재세․미래세)에 걸친 兩重(過現一重, 現未一重)의 因果, 즉 三世兩重因果가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 2因은 前際의 2支分에 해당되고 현재 5果와 현재 3因은 中際의 8支分이 되며, 미래 2果는 後際의 2支分에 해당된다. 그리고 과거의 無明은 현재의 愛․取와 동일한 것이므로 그 이전에 다시 識․名色․六處․觸․受 등이 있게 되고 미래의 老死는 현재의 名色․六處․觸․受에 상응하므로 그 이후에 다시 愛․取․有 등이 따르게 된다. 이상의 내용을 오른쪽 페이지 하단의 表1과 같이 圖示할 수 있을 것이다.



2. 緣起相依說

20세기로 접어들면서 3세양중인과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일기 시작한다. Max Walleser는 ‘Die philosophische Grundlage des älteren Buddhismus : 1904 刊’을 통하여 12연기에 대한 在來의 胎生學的 해석을 비판하고 여기에 論理的 해석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로부터 수년 후 日本의 松本文三郞는 다시 “종래 일반적인 설명에 의하면 十二緣起는 原因․結果의 원인관계로 해석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2연기는 論理的인 관계를 나타낸 것이므로, 결코 時間的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이따금씩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는 形而上學的 解析이라든가 自然科學的 또는 心理學的 해석, 또는 논리적 관계와 發生的 관계를 결합한 해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緣起의 論理的 相依關係를 역설하여 연기설의 해석에 실질적인 하나의 획을 그은 사람은 宇井伯壽라고 할 수 있다. 宇井은 12연기설은 결코 ‘우리들 人生生存이 어떻게 발생하여 왔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생존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설하려고 하는 가르침이라는 대전제 하에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12支의 하나하나는 결코 원인․결과의 관계 순서로 설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건과 귀결의 관계를 따라 열거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아니, 더욱 적절하게 말한다면 各支는 相關的․相依的관계에 있는 것을 條件을 따라 순서를 세워 열거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시간적으로 본다면 이 12支 모두가 한 全體로서 묶여 다음 시간, 다음 시간으로 계속하여 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12支로 한 것은 본래, 현실의 우리들이라고 하는 구체적 一全體를 개념상 분석적으로 구별하여 열거한 것이고, 12支 하나하나가 부분으로서 實在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을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이것을 잘못하여 各支를 실재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輪廻의 進程을 나타낸다는 등의 그릇된 이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주로 연기의 기본공식이라고도 일컬어지는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宇井은 이 문장의 근본취지를 ‘相依相關性’으로 파악하고 十二緣起의 趣意도 근본적으로 세계의 相依를 밝히는데 있기 때문에 12연기설을 相依설, 또는 緣起相依說로 지칭한다는 것이다. 흔히 無時間的 論理的緣起觀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입장은 연기의 支分을 철저하게 개념상의 法으로 이해하는 和辻哲郞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增永靈鳳은 그의 책 ‘根本佛敎의 硏究’ 제 8장의 제목을 ‘緣起相依說’이라고 하고 거기에서 “佛陀의 근본적 입장은(有支說 보다는) 오히려 相依說에 있다고 해야 한다. 상의설은 日常生存의 모든 것이 相互關係的으로 相依相資로서 나타나 있다고 보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本稿에서 연기상의설의 개념을 좀 더 확장시켜 사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연기설 속에서 시간적 관계를 완전히 否定하지는 않더라도, 특히 ‘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를 空間的 相依性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모두 연기상의설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緣起關係에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공간적․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生起的 관계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이로써 인간이나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因果關係, 자연현상에 대한 인과관계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는 주장과 같은 경우, 이것도 연기상의설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를 공간적․論理的 관계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廣義의 緣起相依說을 전제로 할 때 요즈음 우리나라의 일반 불교서적에서는 대부분 연기상의설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東華박사는 ‘佛敎學槪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此有故로 彼有며 此起故로 彼起니라’ 라고 한 것이 즉 緣起의 意義다. 이 宇宙 간에 森森羅羅한 一切萬有는 서로 서로 相依相資의 聯關的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한 가지도 孤立獨存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즉 此有故彼有라는 것은 一切萬有의 空間的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요, 또 此起故彼起라 하는 것은 一切萬有의 時間的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前者는 일체 事物의 同時並存的 연관성을 道破하는 것이요, 後者는 일체 사물의 異時繼起的 연관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張元圭교수 또한 “‘此有故彼有’의 句는 現象的 모든 존재는 공간적으로 동시에 相依相關하는 관계를 밝히는 것이요, ‘此起故彼起’의 句는 시간적으로 異時繼起하는 상의상관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연기상의설을 주장하고 있다.

無盡藏스님 역시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멸한다’는 것은 시간적 앞뒤 관계를 나타내고,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다’는 말은 공간적 또는 논리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기로 하자. 高淳豪법사는 그의 ‘佛敎學槪觀’에서 “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萬有의 공간적 상의성 관계를 나타낸 말이요, ②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 상의성 관계를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교서적과 포교용 小冊字에는 이와 같은 緣起相依說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연기상의설은 佛敎學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서 相依說에 대한 批判이 적지 않게 나타나게 되고,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제기되면서, 연기설을 둘러싼 이른바 뜨거운 緣起說論爭 이 시작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 논쟁은 아직까지도 끝이 나지 않은 상태인데 今年(1989)에도 일본의 소장학자 松本史朗는 그가 쓴 ‘緣起와 空-如來藏思想批判-’ 속에서 相依說의 논리적 해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高翊晋 교수가 1970년도에 이미 ‘此有故彼有’에 대한 宇井伯壽의 해석과 그의 無時間的․論理的 관계로서의 緣起觀에 대해 異論을 제기한 바가 있고,그 외에도 한 두 편의 論文 속에 相依說에 대한 비판적 視角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들은, 緣起相依說에 대한 批判을 주요 테마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그에 관한 언급이 너무 간략하고 개괄적이다.

따라서 이제 본고를 통하여 그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論證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연기상의설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우선 연기상의설의 가장 根本的인 理論的 典據라고 할 수 있는 ‘此有故彼有’ 및 ‘Idappaccayatā'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Ⅲ. 緣起相依說의 再檢討

1. 此有故彼有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것은 이른바 緣起의 基本公式이라고도 할 수 있는, 緣起相依說의 典據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중요한 文句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이 중의 ‘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를 空間的 相依性으로,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을 時間的 繼起性으로 해석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논하기 전에 먼저 필자는 이러한 圖式的인 해석이 가능하게 된 배경을 두 가지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첫째, 이러한 도식적인 해석에는 ‘緣起說은 곧 相依說’이라고 하는 先入見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大乘佛敎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初期佛敎의 緣起說보다는 大乘佛敎時代에 발달한 연기설-이를테면, 華嚴의 重重無盡의 法界緣起說과 같은―을 먼저 접하였던 것이 通例였음을 상기해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동안 日本佛敎學界에 상당한 威勢를 떨쳤던 宇井伯壽의 연기상의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적어도 初期佛敎의 硏究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불교는 오랫동안 中國佛敎學의 영향을 받아 訓誥的이고 註釋的인 學問方法이 主流를 형성해 왔다는 점이다. 훈고적인 方法論은 意味를 확장시키고 直觀力에 호소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長點도 있지만, 자칫하면 文脈(context)을 소홀히 하는 비약적인 해석과 思辨으로 흐르기 쉬운 短點도 있다.

‘此有故彼有’를 공간적 상의성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文脈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착오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다음에서 밝혀보기로 한다.

佛典에는 ‘此有故彼有……’가 독립적으로 설해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十二支緣起 등이 뒤따라 나온다. 이에 관한 문헌상의 근거를 몇 가지만 밝혀 보기로 한다. 먼저 中阿含 卷 47에는,

云何比丘知因緣 世尊答曰 阿難 若有比丘見因緣及從因緣起知如眞 因此有彼 無此無彼 此生彼生 此滅彼滅 謂緣無明有行. 乃至緣生有老死 若無明滅則行滅 乃至生滅則老死滅 阿難 如是比丘知因緣

이라고 설해져 있다. 다음 雜阿含 卷12에는,

云何緣起法法說 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謂緣無明行 乃至純大苦聚集 是名緣起法法說.

이라고 되어 있다. Pāli Nikāya의 경우도 英譯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Majjhima-nikāya에는,

As to this, Ānanda, a monk knows thus; ‘If this is, that comes to be; from the arising of this, that arises; if this is not, that does not come to be; from the stopping of this, that is stopped. That is to say; Conditioned by ignorance are the (karma-)formations; conditioned by the (karma-)formations is consciousness;……; conditioned by birth there come into being old age and dying, grief, sorrow, suffering, lamentation and despair. Thus is the origin of this whole mass of anguish……. Thus is the stopping of this whole mass of anguish.' It is at that stage, Ānanda, that it suffices to say, ‘The monk is skilled in conditioned genesis.’

라고 설해져 있다. 다음 Saṃyutta-nikāya에는,

Thus: this being, that becomes; from the arising of this, that arises; this not being, that becomes not; from the ceasing of this, that ceases. That is to say, conditioned by ignorance, activities, conditioned by activities consciousness comes to pass, and so on:

이라고 설해져 있다. 이러한 예는 이 밖에도, 漢譯 阿含에서든 Pāli Nikāya에서든, 수없이 발견되는데 이 ‘此有故彼有……’가 Pāli원문에서는 yadidaṃ, 漢譯에서는 謂 英譯에서는 that is to say에 의해 다음 문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즉’ 또는 ‘다시 말하면’이라는 의미의 yadidaṃ에 의해 연결되는 뒷 문장은 다름 아닌 ‘차유고피유……’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12支緣起를 비롯한 一連의 有支緣起의 내용을 제외시켜 놓고서 ‘차유고피유……’를 독립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겠다. 사실 三枝充悳도 지적하고 있듯이 ‘차유고피유……’의 定型句는 十二緣起說 등이 설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各支를 일일이 열거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一括的으로 표현한 일종의 抽象化 또는 公式化의 産物인 것이다.따라서 此有故彼有와 此起故彼起는 표현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此有故彼有와 此起故彼起는 모두 ‘無明(此)을 緣하여 行(彼)이 있게 되고, 行(彼)을 緣하여 識(彼)이 있게 되고, ……, 생(此)을 緣하여 老死(彼)가 있게 된다.’는 12연기의 流轉緣起 全過程을 함축적으로 指稱하는 말로서 결국은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는 공간적 상의성으로,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은 시간적 계기성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문맥상으로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此無故彼無를 空間的(同詩的) 相依性으로 해석하는 것은 自己矛盾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현재 공간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無의 상황에서 此와 彼를 구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此無故彼無 역시 표현만 다를 뿐이지, 그 의미는 此滅故彼滅과 같은 것으로서 還滅緣起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동일한 내용을 중복하여 설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또는 偈의 形式을 보다 충실히 갖추기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된다.

金東華박사는 위에서 인용한 내용에 부언하여 “一切諸法이 공간적으로 同時並存하는 관계를 본다면 그것은 마치 三把의 束蘆가 相互 依支가 되어서 동시에 존립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일체제법도 甲이 존립하는 데서 乙, 丙, 丁 등의 支持를 필요로 하고, 또 乙이 존립하는 데도 역시 甲, 丙, 丁 등의 支持를 요하는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束蘆의 비유를 이와 같이 비약시켜 해석하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른바 이 ‘갈대묶음의 비유’는 12支중 識과 名色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서,一切諸法에 대해서까지 확대 적용시킬 수 없다고 본다. 이 비유는 雜阿含 卷12에 나오는데, 摩訶拘絺羅가 “名色은 識을 緣하여 生하고 동시에 識은 名色을 緣하여 생긴다”고 말하자, 舍利弗 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 뜻을 다시 묻자, 마하구치라가 다시,

譬如三蘆立於空地 展轉相依而得竪立 若去其一 二亦不立 若去基二 一亦不立 展轉相依而得竪立 識緣名色亦得如是 展轉相依而得生長.

이라고 답한다. 여기에서는 三蘆라는 표현 때문에 곡해의 여지가 있지만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결국 識과 名色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Saṃyutta-nikāya Ⅱ 중 ‘The sheaf of reeds'라는 經에서도,

If, friend, I were to pull towards me one of those sheaves of reeds, the other would fall; if I were to towards me the other, the former would fall.
Even so, friend, from the ceasing of name-and-shape, consciousness ceases; from the ceasing of consciousness, name-and-shape ceases; from the ceasing of name-and-shape sense ceases, and similarly is there ceasing of contact, feeling…and of this entire mass of ill.

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갈대 묶음의 비유’가 識(consciousness)과 名色(name-and-shape)의 상호관계는 물론, 형식상으로는 名色이 멸하면 六處(sense)가 멸하고 6처가 멸하면 觸(contact)이 멸하고…… 등, 無明과 行을 제외한 識 이후의 還滅緣起 과정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이것 역시 식과 명색의 관계에 한정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갈대 묶음의 비유’를 현상계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까지 확대 적용시키는 것은,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日本에 있어서도 이러한 圖式的인 해석은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면 山本啓量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것은 存在의 有無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은 상호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것은 生滅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相互 相關하여 生起하고 있다는 의미이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차유고피유……’를 독립시켜 思辨的인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차유고피유……’를 相依的으로 이해하지 않는 경우도 발견되다. 中村元은 그의 ‘原始佛敎의 思想’ 속에서 “이것(甲)이 있을 때 저것(乙)이 있다. 이것(甲)이 生하므로 저것(乙)이 멸한다”를 ‘이것을 원인으로 하고 있는 것(此緣性, idappaccayatā)으로 파악하여, “이 경우, 甲이 항상 조건지우는 것, 또는 원인이고, 乙이 항상 조건지워지는 것, 또는 결과이다. 조건지움의 관계는 항상 일방적이며 可逆的이지 않다.”고 진술하고 있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하여 松本史朗는 藤田宏達이 同時的(相依的)因果의 근거로 예시하고 있는 ‘imasmiṃ sati idaṃ hoti’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행하고 있다. 松本은 먼저 sati와 bhavati를 똑같이 ’有‘로 해석하는데 대하여 반대한다. bhavati는 '생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If this is, that comes to be'라든가 ’this being, that becomes'등의 英譯이 此有故彼有라는 漢譯보다는 훨씬 原文에 충실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기본적으로 松本의 의견에 共感하지만, 우리말로 옮길 때는 ‘생하다’가 此起故彼起의 ‘起’와 중복되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있게 된다’정도의 譯語가 어떨까 생각한다.
松本은 계속해서 ‘imasmiṃ sati idaṃ hoti 중의 A文에 絶對處格 locative absolute이 나
A B
타나 있기 때문에 A와 B는 同時’라는 藤田의 주장을 정면으로 공박한다. 즉 A文에 절대처격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A와 B는 異時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此有故彼有를 相依的(空間的, 同時的, 論理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한편, 宇井伯壽는 ‘imasmiṃ sati idaṃ hoti’ 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것의 번역문인 此有故彼有 등의 彼는 원문에는 모두 此(idaṃ)이기 때문에 원문대로 ‘此有故彼有’로 번역해도 좋고 또는 彼와 此를 교환하여 ‘彼有故此有’라고 번역해도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여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첫째, imasmiṃ이 idaṃ의 處格 locative이기 때문에 번역문의 彼가 原文에는 똑같이 idaṃ인 것은 사실이나, idaṃ의 용례상 이것은 꼭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지 않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경우에도 A, B, C가 서로 다른 대상물이지만 이것들이 서로 근접해 있을 때는 모두 ‘이것’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둘째, 此有故彼有등은 독립적인 文句가 아니고 뒤에 연결되는 緣起의 支分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宇井의 논리대로라면 ‘此起故彼起’의 경우에도 (此와 彼가 原文에는 똑같은 idaṃ이기 때문에) 此와 彼를 바꾸어 ‘彼起故此起’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해야 할 텐데,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宇井의 이러한 판단착오는 근본적으로 이 句節을 굳이 相依性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此有故彼有등의 번역문에서 적어도 此와 彼의 사용은 온당하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서의 彼는 此와 대칭되는 의미의 彼가 아니라, ‘또 다른 이것’이라는 의미의 彼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은 初期佛敎의 緣起說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此有故彼有……’의 우리말 번역에도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안다. 그런 의미에서 이에 대한 우리말 번역을 Pāli文과 漢譯을 함께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시도해 본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또 다른 이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또 다른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또 다른 이것)이 없게 되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또 다른 이것)이 사라진다.

2. Idappaccayatā

初期佛敎 緣起說의 定型句라고 할 수 있는 ‘此有故彼有……’에 대한 그릇된(相依的) 해석이 행해진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idappaccayatā는 술어를 相依性으로 번역한 것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이것을 相依性으로 번역한 宇井伯壽는 “idappaccayatā(梵語로는 idaṃpratyayatā)란 ‘이것에 의지하는 것’이 그 字義이지만, 그 의미는 甲은 이 乙에 의지하고 乙은 또 이 甲에 의지한다는, 다시 말해서 서로 相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相依性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日本의 많은 佛敎學者들이 이 말을 相依性이라고 번역하고, 또한 사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상의성이 原語에서 分離․獨立되어 쓰이게 되어버렸다.그러나 다음 Saṃyutta-nikāya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이 말을 상의성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매우 곤란함을 알 수 있게 된다.

Katamo ca, bhikkhave, paṭccasamuppādo? jātipaccyā, bhikkhave, jarāmaraņaṁ∣uppādā vā Tathāgatānaṁ anuppādā va Tathāgatānaṁ, ṭhitā 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paccayatā∣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i-karoti∣‘passathā’ti cāha-‘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ṇaṃ’∣

참고로 이에 대한 英譯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What, brethren, is causal happening?
Conditioned by rebirth is decay and death: ―whether, brethren, there be an arising of Tathāgatas, or whether there be no such arising, this nature of things just stand, this causal status, this causal orderliness,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
Concerning that the Tathāgata is fully enlightened, that he fully understands. Fully enlightened, fully understanding he declares it, teaches it, reveals it, sets it forth, manifests, explains, makes it plain, saying ‘Behold! Conditioned by rebirth is decay and death.’

이 句節에 상응하는 漢譯 雜阿含 卷12의 내용 중에는 idappaccayatā에 대응하는 특별한 譯語가 발견되지 않는다. 日譯 南傳大藏經에서는 이것을 相依性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英語로는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緣起를 ‘生을 緣하여 老死가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十二緣起를 指稱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文脈上 idappaccayatā는 결국 12緣起의 屬性이나 特性을 나타내는 말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相依性으로 해석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다. 十二緣起는 대표적인 有支緣起이기 때문이다. 물론 12연기 중에서 ‘名色’과 ‘識’의 관계는 相依性을 띠고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렇게 본다면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이라는 英譯은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와는 다른 句節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隨順緣起’라는 漢譯도 相依性보다는 原語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idappaccayatā의 原義를 ‘此緣性’으로 파악한 三枝가 여기에서의 차(idaṃ)를 支(aṅga)로 해석하여, 此緣性은 결국 ‘支緣性’ ‘支緣起’ ‘有支緣起’ 등으로 보아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결론적으로 言明하고 있는 다음의 내용은 초기불교 연기설의 근본성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十二支를 세우는 十二緣起를 비롯한 各種의 緣起說은 반드시 둘 이상의 支를 施設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연기설은 ‘支緣起’ ‘有支緣起’라고 그 표현을 달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실은 ‘支연기‘ ’有支연기‘라는 말에 의하여 idappaccayatā(의 본래 의미)가 표시됨과 동시에 초기불교의 거의 대부분의 연기설을 망라하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Ⅳ. 緣起說의 再解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此有故彼有나 idappaccayatā는 결코 緣起相依說의 典據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불교계에서는 ‘연기=相依’라는 이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리하여 緣起說은 흔히 平和의 原理로서, 또는 慈悲와 協力의 원리로서 해석되기 일쑤였다.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두 가지만 例擧해 보기로 한다. 먼저 佛敎學槪論제 Ⅷ장 제3절 ‘佛敎의 平和와 協調原理’ 가운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부터 우주적 집단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諸法은 연기적 도리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너와의 협력과 모든 것과의 조화 속에서 더욱 발전되고 평화로운 나와 우리들의 삶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연기적 도리에 무지하여 自我를 고집라고 몇몇의 우리만을 내세워 온갖 편견과 대립을 유발시키고 그것은 불타는 욕망과 결부하여 끝내 共滅의 무서운 전쟁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前後關係를 살펴볼 때, 이와 같은 설명은 ‘이것이 있는 까닭으로 저것이 있다’는 가르침에 근거하여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水野弘元은 그의 ‘原始佛敎’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더욱 높은 입장에서 不殺生의 근거를 緣起說에서 구하고 있다. 이것은 후에도 詳說하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어서, 자신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똑같이 평화와 행복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주위를 不幸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理想이 個人 및 社會의 완성에 있기 때문에 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자비와 同情의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연기설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 본래의 입장이다.

오랜 佛敎史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總體的 緣起思想의 입장에서 廣義的으로 볼 때, 연기설은 이러한 平和와 協力의 원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初期佛敎의 緣起說에 대해 그것도 此有故彼有를 근거로 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온당하다고 볼 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본래 人生苦(老死憂悲苦惱)의 條件을 규명하고 原因을 分析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三枝가 十二緣起說을 ‘苦의 考察’로 규정하는 것이나 水野가 ‘佛敎에서 緣起를 설하는 所以는 事實世界의 현상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의 不安과 苦惱가 생겨나고 그 고뇌를 제거하여 常樂의 理想境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 문제를 바르게 알고 그 바른 인생관에 따라 수양하고 노력하여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도 그 표현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緣起說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釋尊의 出家動機를 음미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싯달타 태자는 老․病․死와 같은 현실의 고통과 고뇌를 直視하고 그러한 人生苦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였던 것으로, 훗날 緣起의 眞理를 깨닫게 된 것도 이러한 출가 동기와 無關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無明緣起(無明을 출발점으로 하는 12支緣起) 뿐만 아니라 齊識緣起(識을 출발점으로 하는 十支緣起)라든가 貪愛緣起(愛를 출발점으로 하는 五支緣起)와 같은 연기설도 설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老死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無明에 이르게 되는 연기설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셋째, 경전에는 ‘어떠한 法이 있어서 老死가 있는 것이며, 어떠한 法을 조건으로 하여 老死가 있는 것일까’라고 하는 물음이 더러 발견되는데, 이것 또한 연기설이 성립되는 과정을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專精思惟의 결과 마침내 석존은 ‘老死는 生을 연하여 있고, 生은 有를 緣하여 있다. 有는 取를 緣하여 있고……行은 無明을 연하여 있다’는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명의 편의상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行을 緣하여 識이 있다. 識을 緣하여……生을 緣하여 老死憂悲苦惱가 있다’고 순서적으로 정리하여 설하게 된 것이며, 經典에서는 통상 이러한 순서적 설명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現實苦가 條件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十二緣起說은 결국 우리의 현실고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無明에 의해 나타나 있는 相對的이고 可變的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연기설은 우리에게 ‘모든 고통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緣起되어 있으므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설은 본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현실극복을 위한 創造的 批判, 그리고 적극적 실천의 자세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하겠다. 이 점은 12연기설을 보다 조직적이고 실천적으로 설해 놓은 四聖諦의 가르침을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성제는 다름 아닌 ‘苦의 自覺을 통한 苦의 극복’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緣起說의 精神은 個人的․心理的․實存的 현실(苦)만이 아니라 社會的․歷史的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삶은 본래 ‘정신과 육체’라든가 ‘개인과 사회’로 兩分할 수 없는, 有機的․總體的․力動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설은 사회적 고통이나 혼란도 절대적 현실이 아니고, 緣起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통찰과 분석으로써 그 원인과 조건을 바르게 파악하여 제거해 간다면 반드시 해결․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은 불교인의 비판적 사회의식을 위한 충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Ⅴ. 結 語

필자는 이상으로 佛敎의 社會化를 위한 하나의 기초이론을 定立해 보려는 의도에서, 먼저 緣起相依說의 문제점을 분석․비판하고, 이에 입각하여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첫째, 연기상의설의 근거로 인용되는 此有故彼有는 흔히 空間的 相依性으로 해석되지만 文脈上으로 보아 그것은 오히려 時間的 繼起性의 의미이며, idappaccayatā는 어원상으로 보나 문맥상으로 보나 相依性이 아니라 此緣性 또는 支緣性의 의미라는 점.

둘째, 따라서 초기불교의 十二緣起說은 결코 相依說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

셋째, 十二緣起는 일반적으로 無明→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老死의 순서로 설명되지만, 본래는 老死로부터 시작하여 그 원인과 조건을 규명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는 점.
넷째, 12연기설은 우리의 現實苦가 조건에 의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가변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

다섯째, 적어도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우리에게 平和와 協力의 原理를 제공해 주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극복과 현실개혁을 위한 창조적 비판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

여섯째, 이러한 창조적 비판의 원리는, 삶의 有機的․總體的․力動的 性格에 비추어 볼 때, 개인적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

일곱째, 따라서 연기설은 불교인의 批判的 社會意識을 위한 충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 등이다.

‘緣起→此有故彼有→相依相資’라고 하는 근거 없는 思辨的 論理는 자칫하면 불교인에게 관용과 협력의 자세만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들에 대한 방관자적 자세와 기존질서에의 무비판적 순응을 은연중에 강요할 수도 있고, 그리하여 타성과 안일, 무관심과 현실외면 속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연기설의 정신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기설의 根底에 흐르고 있는 창조적 비판의 정신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안다. 사실 釋尊의 위대한 생애는 끊임없는 창조적 비판정신의 結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석존이 당시 인도사회의 Caste system을 批判하고 四姓平等의 새로운 敎團을 創始하여 운영해 갔던 것은 한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緣起說의 저변에 살아 움직이는 이러한 創造的 批判精神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투철한 批判的 社會意識과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창조적으로 克服하려는 불교인의 노력은 참으로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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