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불교와 자비를 등식의 관계로 받아들인다. 자비의 자(慈)는 남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체감하는 마음이고(慈能與樂), 비(悲)는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체감하여 그것을 뽑아 주고자 하는 마음(悲能拔苦)이다.

그래서 고익진 교수1)는 세계의 큰 종교들을 간단하게 비교할 때 기독교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의식(意識)이 강한 종교이고, 유교는 도덕에 대한 의식이 강한 종교이며, 불교는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의식이 강한 종교라고 하였다. 불교는 그 괴로움을 멸한 경지 즉 열반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에게 그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밝은 희망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부처가 가진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에는 자무량심(慈無量心)과 비무량심(悲無量心)이 있으니 이 두 마음이 부처 마음의 큰 부분이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한없이 괴로워하고 그 근본적 해결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분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편 《대반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아함부의 여러 경전에도 중생들은 마음속에 성불할 종자를 가지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그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마음 바닥에는 부처 마음의 큰 부분인 자비심이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987년부터 티베트불교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구미의 석학 과학자들과 1999년까지는 대체로 2년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매년 일주일 정도씩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일한 용어나 현상에 대하여 서구의 과학문화와 동양의 불교문화 간에 의미와 인식의 차이가 여러모로 드러나고 있어서 상호 간에 보완하는 점이 많고 특히 서구의 과학자들이 그 대화에 경도하고 있다.

그 대화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는 여러 번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자비롭고, 협동적이며, 분쟁을 싫어한다.”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서양 심리학의 주축을 이루는 생물행동과학에서는 자비심이 무시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달라이 라마와 구미 과학자들의 대화의 장인 이른바 ‘마음과 삶 연구소(The Mind and Life Institute)’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인간의 본성과 자비심에 대하여 고찰하며, 나아가 왜 서구의 심리학에서는 자비심을 소홀히 해 왔는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마음과 삶 연구소

달라이 라마는 유럽을 방문할 때마다 찾아와 대화를 요청하고 질문하곤 하는 천주교 신부이며 인지과학자인 파리 대학(Parisian Ecole Polytechnique) 바렐라(Fransisco Varela) 교수의 열의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1986년 달라이 라마가 바렐라 교수에게 제안하여 1987년 10월에 MIT의 물리학 교수 헤이워드(Jeremy W. Hayward)를 위시한 사계의 석학 6명이 인도의 다람살라에 모여 달라이 라마와 일주일 동안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루에 8시간씩 ‘마음의 과학(Science of Mind)’이란 주제로 대화를 하였는데 그것이 ‘마음과 삶 대화(Mind and Life Dialogue)’의 시초였다. 그 후 이 대화는 1999년까지 대체로 2년마다 계속되다가 2000년 이후에는 매년 열리게 되었다.

주제에 따라 매년 해당 학계의 구미 석학들이 바뀌어 가며 참가했는데 1998년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의 양자역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병행하며 희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조언으로 획기적인 실험 결과가 얻어졌기 때문에 독일의 《GEO》 잡지 1999년 1월호 표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2003년에는 미국의 MIT 공과대학에서 ‘마음의 탐구(Investigating Mind)’란 주제로 공개 학술회의 형식의 대화로 열리기도 하였으며, 2005년에는 조지타운 대학 의료원과 존스홉킨스 대학 의과대학 공동 후원으로 ‘명상의 과학과 임상응용(Science and Clinical Applications of Meditation)’이란 주제로 역시 공개 학술회의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 대화의 장이 ‘마음과 삶 연구소’로 정착하여, 달라이 라마와 과학자들 간의 대화 외에도 현재는 하계 수련회 등 여러 가지 공개 행사도 열고 있다. 지금까지 심리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뇌과학, 물리과학, 우주과학,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의 매우 세부적인 주제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09년에도 제18회 마음과 삶 대화가 ‘기억과 마음(Memory and the Mind)’이란 주제에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및 명상적 시각의 상승작용(A Synergy of Psychological, Neuroscientific, and Contemplative Perspectives)’이란 부제를 달아 4월 6일부터 10일까지 역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열렸다. 거기에서는 심리학자인 미국 미시간 대학 메이어(David E. Meyer) 교수 등 9명의 석학들이 참여하여 대화를 함께 나누었다.

‘마음과 삶 대화’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건전한 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동양의 종교 지도자와 대화를 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대화에 동참하는 과학자들은 “우리가 이 대화에 경도하는 것은 현대과학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에 광명을 불어넣고자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최종적 해결을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 풀지 못한 오래된 문제들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2)

3. 자비에 대한 서구의 인식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과 리 이얼리(Lee Yearley) 교수3)는 1990년에 ‘정념, 감정 그리고 건강(Mindfulness, Emotions, and Health)’이란 주제로 열린 제3차 ‘마음과 삶 대화’에서 서구에 있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철학적 전통인 개인주의(individualism), 완벽주의(perfectionism) 그리고 합리주의(rationalism)를 개관하고 윤리적 기반으로서 자비에 대한 4가지 논쟁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많은 종교 전통들이 자비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도 현대의 많은 서구인들은 비록 자비가 중요한 개인적 특징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윤리 체계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자비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비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물론 그 외의 여러 전통 속에서 다양한 불의를 용인해 왔다고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어쩌다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비에 기반한 윤리성의 관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비와 더불어 권리에 대한 관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관념은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제도를 형성할 수 있는 합리주의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비는 일정한 경우에 일정한 사람들에게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직 이성(reason)만이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지침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비는 개인 대 개인 단위에서만 제대로 구실을 하므로 우리가 사회의 기본적 불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마련해야만 하는 일반화된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비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에게 말해 줄 수는 있어도, 자비 하나만으로는 그 사람과 그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도록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려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비판도 있다. 자비는 거의 항상 온정주의 또는 한 무리가 그와 다른 한 무리를 보살피는 상황과 같이 표현하기 어려운 차별성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보살핌을 받는 무리의 자유가 서서히 손상되는데,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보살피는 자들이 상대를 어린애같이 취급하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자들은 설사 그들의 선택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비는 또한 문제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지상에서의 현생은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먼 생애에 비하면 단지 작은 부분이라는 특정 종교적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 대하여 많은 비판자들은 이생을 넘어서 삶이 있다는 특정 종교의 사상은 사실이 아니거나 최소한 과학적으로 유효하게 증명된 바가 없다고 믿는다고 한다.

더욱이 인간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적은 것이란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대체로 이런 종교적 견해가 사실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직면하는 실제의 고통에 덜 관심을 갖게 만든다고 하여 긍정적으로보다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서구인들의 자비에 대한 인식은 근년에 와서는 종교적 영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2,000여 년간 서구를 지배해 온 기독교의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리 이얼리 교수4)는 그 대화의 후반부에 ‘기독교 전통에서의 미덕(virtues)’에 대하여 13세기 이탈리아의 스콜라철학자이고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주장한 악덕(vices or sins)과 미덕(virtues)에 대하여 소개하고 논의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악덕으로 ①욕정(lust) ②식탐(gluttony) ③허영심(vanity) ④분노(anger) ⑤시기(envy) ⑥영적 냉담(spiritual apathy) ⑦탐욕(avarice) ⑧교만(pride) 이렇게 8가지와, 미덕으로 ①실용적 지혜(practical wisdom) ②정의(justice) ③용기(courage) ④중용(moderation) 이렇게 네 가지의 ‘중심적 미덕(cardinal virtues)’과, ⑤신앙심(faith) ⑥소망(hope) ⑦박애(charity) 이렇게 3가지의 ‘불어넣어진 미덕(infused virtues)’을 들었다.

이들 중 ‘불어넣어진 미덕’이 가장 중요한데 신의 직접적 작용에 의해서 인간에게 불어넣어졌다고 하여 ‘불어넣어진 미덕’이라고 하며 일명 ‘신학적 미덕(theorogical virtues)’이라고도 한다. 신앙심은 종교적 믿음에서 드러나지만, 믿음을 낳는 지적 작업과는 달리 신에 대한 사랑과 신과의 만남을 통하여 발현한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신과의 성실한 관계에서 비롯한 확신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소망의 표식은 믿음과 사랑으로 신과 교감하는 데서 솟아나는 자신감이다. 소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을 견뎌내면서도 현실적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해 준다.

소망을 품는 사람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신의 힘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한다. 아퀴나스는 신앙심과 소망을 논하면서, 기독교적 맥락에서 “박애(博愛)는 숭고한 신학적 미덕으로 믿음과 소망의 토대가 된다.”고 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박애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기쁨과 평정과 같은 신의 속성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또한 박애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능력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였다.

리 이얼리 교수는 박애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가깝다고 하였다. 물론 박애의 현실적 효과는 불교의 자비의 효과와 매우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되나 박애는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신의 속성에 의해 신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 자비를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해 있는 성품의 하나로 보는 불교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4. 악덕과 미덕에 대한 불교적 견해

리 이얼리 교수는 달라이 라마에게 불교 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악덕과 미덕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개인적인 견해로 본인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본인이 얻으려고 노력하는 행복이나 벗어나고자 애쓰는 고통은 모두 결과라고 했다. 사람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원인을 추구하고 또한 고통과 번뇌로 인도하는 원인을 피하고자 하는데 앞의 것을 미덕의 범주에 넣는다면 뒤의 경우는 악덕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 주된 악덕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번뇌(mental afflictions)로서 집착과 증오라고 하였다. 이들 속에는 많은 미묘하고 다양한 다른 형태의 집착과 증오들이 있으나 그들은 모두 이 두 종류의 기본적 번뇌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이 두 가지 번뇌보다 더 일차적인 번뇌도 있는데 그것은 중관 귀류논증학파(Madhyamika Prasangika)의 관점으로 볼 때 현상의 내재적 존재를 포괄하는 ‘무명(ignorance)’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달라이 라마는 번뇌를 마음의 평정이나 평화를 방해하는 정신적 사건으로 정의했는데 샨티데바(Shanti Deva) 선사의 ‘입보리행론’을 인용하며 자비도 하나의 번뇌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비는 일시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인 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사건이 불행을 짓는지 여부는 그것이 꼭 번뇌이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자비는 일시적 번뇌일 수 있지만 동시에 미덕임을 시사하였다.5)

7세기에 인도의 철학자인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 선사는 그의 ‘심리학 법칙’이라 불릴 수 있는 서술 속에서 인간의 심리적 상태는 서로 상반되는 정신적 상태들이 쉼 없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힘의 장(field of forces)으로 보았다. 감정의 영역에 있어서 한편에는 증오, 분노, 적대감 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부정적 감정의 부류가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사랑, 자비, 동정심 등의 긍정적인 감정들의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한 개인에 있어서 어느 때고 한쪽 부분이 강해지면 그 반대쪽은 약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적 부분을 강하게 하고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부정적 감정을 약화시킬 수 있으므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들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하였다.6)

다르마키르티 선사의 설명은 아퀴나스의 주장과 비교할 때 불교와 기독교의 문화간 인식의 차이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5. 서구의 생물행동과학은 왜 자비를 경시했는가

‘마음과 삶 대화’의 초기부터 달라이 라마는 서구의 관점과 차이가 있는 불교적 관점인 자비심에 대하여 강조해 왔는데 ‘이타주의, 윤리 그리고 자비(Altruism, Ethics and Compassion)’라는 주제로 1995년 10월 2일부터 5일간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열린 대화에서는 특히 자비심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흥미있는 대화들이 많은데 그중 서구 심리학의 주류인 ‘생물행동과학에서는 왜 자비를 경시했는가?’ 하는 소주제와 불교적 관점과 관련된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자비로운가?’ 하는 소주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생물행동과학과 자비에 대한 대화는 공동 좌장의 한 사람인 하버드 대학 과학사 교수인 앤 해링턴(Anne Harrington)이 말문을 열었다.7) 그는 지금까지 양편이 다 같이 객관적 실상을 탐구하는 불교계와 과학자들 간의 유사성에 대하여 논의했다고 강조하고 역사적으로 서구의 과학이 훨씬 깊게 실상에 대하여 탐구해 왔음에도 ‘자비심’과 같은 개념들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비유하면 불교적 방법으로 실상을 탐구할 때, 분명히 과학적 방법과는 전연 다른 실상에 도달한다고 하고 그는 어떻게 이런 차이를 이해해야 되느냐고 질문하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그들은 모두 객관적 실상을 얻고자 모색하겠지만 그들의 연구 방법으로는 양편이 동일한 보편적 실상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인간 본성 이해의 주류로서 과학적 탐구방법에 의하여 얻어진 인간의 본성이 공격적, 이기적, 그리고 잔혹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놀랐다고 하였다. 더 논의해 봐야 하겠지만 혹시 과학은 발전을 멈춘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하였다. 과학자들의 관점은 역사와 인간 지식의 진화에 있어 하나의 일정한 단계에 기반한 특수한 관점일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과학은 외부 세계와 비교하여 의식의 내부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관심를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직도 연구해야 할 터전이 크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 내용을 요약하거나 종합하여 표현하는 것보다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아래에 인용하기로 한다.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 위스콘신 대학 철학 교수) : “과학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서구에서의 심리학은 과학의 한 과목으로 인정된 것이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100년 전에는 철학과 심리학은 다른 학문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심리학이 실험적 및 경험적 학제가 된 것은 극히 근년의 일입니다. 그 백 년 중 근래 30여 년간 심리학의 지배적 사상은 행동주의였으며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는 것은 기피하였습니다. 심리학자는 환경과 행동은 중요시하면서도 정신적 활동에 대하여는 전연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바로 마음의 특성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과학적 탐구가 탄생하는 최초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제 겨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빈 스타우브(Ervin Staub, 매사추세츠 대학 심리학 교수) : “비록 그런 맥락이지만, 이타심을 연구하는 우리는 소버 교수가 방금 우리에게 설명한 바와 꼭 같지는 않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이타심, 감정이입(empathy), 자비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된 분야에 대하여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미국, 유럽,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앞서 논의한 분야에 대하여도 상당히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자비’란 용어는 감정이입과 동정심(sympathy)과 관련하여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타행, 협력적 행동, 보살핌 등, 모든 이런 일들은 최근 30여 년간 상당히 주목받은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연구를 확장하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리처드 데이비드슨(Richard J. Davidson, 위스콘신 대학, 심리학 및 정신의학 교수) : “어느 정도까지 심리학이 경험과학이 됨에 따라 생물의학의 일반적 분야에 통합되어 질병 치료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향한 어떤 경향과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과도한 연구는 건강한 상태보다는 질환에 대한 의학의 일반적 경향을 반영하였다고 봅니다. 만일 당신이 의사들에게 건강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실제로 건강한 상태에 대한 의학은 없었는데 이제야 겨우 긍정적인 감정 상태의 심리학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제 이 같은 실험적 노력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정적인 심리 상태에만 치우쳐 있던 것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건강한 상태와 긍정적 감정도 이론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달라이 라마 : “거기에는 아마 다른 인자도 있지요. 제가 이해하는 바로 서구의 심리학은 자못 행동 중심적인 분야로 보입니다. 심리적 상태가 어떻게 공격, 폭력, 등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지요. 그 사실은 분노나 적개심과 같은 강력한 감정의 행동적 표현을 당신이 관찰할 때, 그들은 그만큼 충격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 결과의 행동은 그만큼 두드러지게 들어날 것입니다. 반면에 자비심의 행동적 표현은 과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빈 스타우브 : “이 점을 다르게 말하면, 아마 폭력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부정적 힘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어떤 사람이 이타적으로 행동했을 때, 그것은 때때로 얼빠진 행동으로서 무엇인가 모자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완력에는 크게 충격을 받지만 그에 반하여 무엇인가 모자란 듯한 착한 행동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엘리엇 소버 : “그렇습니다. 반면에 긍정적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을 부추기는 동기를 부여함을 압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어린이들을 보살피도록 합니다. 저는 어떤 과학자들이나 또는 일반 사람도 단지 부정적 감정만이 행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긍정적 감정도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과학으로서 심리학(science of psychology)은 그런 것에 착안하지 않았는지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의학적 모형의 탁월성에 대한 리처드(Richie)의 제안이 극히 최근에야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만, 20세기 전반부를 돌이켜 보면 심리학은 실제로 의학의 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서구인들이 자랑하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많은 허점이 있음을 그 분야의 석학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불교로부터 배우며 그들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6.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자비로운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대화는 앤 해리슨과 같이 공동 좌장이었던 리처드 데이비드슨이 먼저 달라이 라마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8)

리처드 데이비드슨 : “성하시여, 이성(reason)과 열정(passion) 또는 감정(emotion) 간에는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서구 사회에서는 그것들이 우리의 합리적 사고 과정에 부정적 감정을 잡입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기본적 인간의 본성은 자비로운 존재라고 추정하는 불교의 관점과는 것보기에 매우 다르지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자비로운 본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무명(ignorance)의 방해를 받기 때문에, 인간의 목표는 그 무명의 껍질을 벗겨내고 근본 자리인 자비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 두 관점은 매우 다릅니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개념의 차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하께서 불교적 관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달라이 라마 : 고전적 불교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중생들의 타고난 심성 속에는 긍정적 및 부정적 의지력을 둘 다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저의 생각이 대부분 불교적 개념, 특히 모든 중생은 완벽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인 성불의 종자를 지니고 있다는 불교의 기초교의에 의해 형성된 것이긴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자비롭다고 확신하는 것은 저의 경험적 관찰로부터 얻은 신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탄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존재의 기본적 양상을 관찰해 볼 때 인간의 감성 속에는 온정(affection)과 자비심이 주동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저는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자비롭다는 이 믿음의 중심적 전제는 우리의 가장 큰 본능이 행복을 구하는 것이란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타고난 욕구라고 말할 만큼 내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만일 선천적 기질을 고찰하고, 또한 행복감을 증진시켜 주는 일련의 수단이나 일상적 요소들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자비(compassion), 온정 그리고 애정(love)이 이 행복의 문제와 거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애정이고 온정이며 또한 유대감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이와 같은 행복을 희구하는 기본적 욕구가 저지되었을 때 일어나는 하나의 반발심입니다. 이런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고통이나 적대적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더욱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비록 분노나 폭력성 그리고 공격성은 우리 마음의 자연적인 일부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다른 수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감정의 제2차적 수준에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공격성과 폭력성은 반응의 일면인 행동 특성으로 구분하고, 한편 분노와 적의(敵意)는 동기의 일면인 감정의 상태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런 생각에 확신을 갖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육체적 건강을 살펴본다고 할 때 온정, 애정 그리고 자비와 같은 건전한 감정들은 당신의 마음속에 고요하고 평온한 의식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의식은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한편 분노나 적의와 같은 경직된 감정들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일종의 혼란만을 초래하며, 그와 같은 혼란은 여러분의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상태로서 인간의 육체의 구성은 그 자체가 애정과 온정과 같은 감정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엘리엇 소버 : “인간을 설명하는 불편부당한 방법은 인간은 무자비함과 자애로움의 잠재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치우치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경험의 결과이지 인간의 본성에는 어느 쪽도 근원적으로 편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하시여, 제가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의 관점은 양쪽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나, 한쪽이 더욱 근본적이어서 보다 많이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쪽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 아닌 것입니까?”
달라이 라마 : “아닙니다. 그쪽도 인간 본성의 일부분입니다. 그 관점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불교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가 불편부당합니다. 그것은 건전한 것도 불건전한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이쪽과 저쪽 양쪽의 잠재력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내부에는 부정적 행동의 가능성과 긍정적 행동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정반대인 양쪽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비교해 볼 때, 자비심과 온정 그리고 애정과 같은 긍정적 기질 쪽이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긍정적 특성들이 분노, 적의, 공격성과 같은 부정적 특성들보다 훨씬 주도적으로 인간 심성의 자연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애로운 쪽이 훨씬 지배적이어서 인간은 평소에 화내지 않고 늘 적의를 갖지도 않습니다.”

엘리엇 소버 : “다른 쪽보다 자주 일어나는 쪽이 지배적입니까?”

달라이 라마 : “그것뿐만 아니라 불교에는 긍정적이고 건전한 감정 쪽이 훨씬 단단하게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엘리엇 소버 :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 간에 개체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한쪽이 훨씬 자주 일어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반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많이 느끼고, 만족하는 것보다는 화를 더 자주 내기도 합니다.”

달라이 라마 : “물론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 간에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악하다거나 부정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 사람의 일생, 특히 어린 시절을 관찰해 보면 그 사람도 그의 모친이나, 모친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정성과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처음 시작하는 어린 시절은 이와 같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졌으므로 그것이 그 사람의 본성에 더욱 크고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성장해 온 과정입니다.

저는 지금 자비와 온정이 기본적인 기질인 인간 본성의 특정 모형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공격적 성향, 경쟁성 그리고 폭력성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입니다. 모든 이와 같은 행동적 특성들은 주로 특정한 시기와 환경의 영향에 의하여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생애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욕구는 매우 간단할 뿐만 아니라 생활도 매우 단조롭습니다. 그들은 동굴에서 기거하고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그들의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간단한 행동 특성을 갖습니다.

인간을 위의 경우와 비유한다면 인간은 지성과 상상력이라는 재능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 희귀한 재능에 대해 매우 높은 경쟁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해 감에 따라 우리의 요구도 더욱 복잡해 가고 그 범위 또한 넓어져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먼 옛날에는 인간의 일상생활과 생활공동체의 운영도 훨씬 단조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할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도 별로 공격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오늘날이라 해도 전연 산업화되지 않은 먼 오지의 사회나 문화 속에서는 삶이 훨씬 덜 긴장되고 덜 조급하며, 훨씬 한가롭게 살아감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만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의 인간이나 옛날의 인간이나 기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모든 외부적인 조건들이 우리가 공격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터전을 빼앗길 위험이 있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나는 많은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본능들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또한 타고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분히 특정한 생활양식, 특정한 환경과 물질적 조건들의 압력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인즉 저는 온정과 같은 건전한 상태와 분노와 같은 불건전한 상태들 간에 감각적이거나 경험적인 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분노 즉 화는 거의 하나의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격발시키는 조건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을 격발시킬 때 외부적 조건으로서 온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분노를 경험할 때 여러분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어나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화를 내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연 없는데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엇 소버 :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켰는데, 그는 그 일을 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의 저변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일은 잘못됐다’는 이성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일한 사람에 대하여 긍정적인 감정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웃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웃어 주기에는 적합지 않거나 조금은 매스꺼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웃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웃음이란 긍정적 감정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검증하며 행동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앤 해링턴  : “우리는 우리의 느낌에 대해 늘 평가합니다.”

엘리엇 소버 :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들을 논의했으며 경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성하의 관점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인간들이 다른 환경 속에서 행동하고, 그 위에 인간 본성의 본질을 정립하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실제로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관찰을 통하여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생물학계는 연구자가 일련의 사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대하여 진화론적 설명을 찾아내는 일을 주로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끝없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어째서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에만 경도되어 행동하려 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것입니다. 불교철학에도 이와 유사한 과정, 즉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하여 먼저 관찰하고 그에 따르는 설명을 구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불교의 관점이 정확하다면, 왜 우리 인간 종자들이 이와 같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달라이 라마 : “여기서 인간 본성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저의 개인적 관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주장은 인간 실존 양식의 경험적 관찰에 기반한 인간 본성의 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이 생각을 불교 신앙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중요한 요점입니다. 저의 신앙적 기반 위에 형이상학적 전제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적 서술이요, 형이상학적 서술로 택할 만합니다. 이 외에 이 이상의 형이상학적 토대는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 주장은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일생을 통하여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의 온정에 의지해 왔으며, 또한 그 온정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가슴으로 느껴왔는가 하는 경험적 관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은 선하다는 저의 주장에 확신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만의 독특한 접근 방법은 아닙니다.”

7.맺는 글

좌장의 한 사람인 리처드 데이비드슨(Richard J. Davidson) 교수는 이 대화의 전체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자비의 시각(Visions of Compassion)》9)이란 저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이타주의, 친사회적 행동, 동정심 등과 관련된 서구의 행동과학에 대해서는 말하기 조심스러운 연구 전통이 있습니다. 서구에서 행동과학의 주된 특징은 비극적 남성우월주의(tragic-machismo)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의 근본을 ‘살인자 원숭이(killing apes)’라고 부르고, 우리의 잠재력을 폭력에 기울여 왔으며, 우리 능력의 유전적 및 생화학적 기반을 이기심, 우울, 불안 등과 관련하여 개발해 왔음을 발견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티베트불교는 오랫동안 인간의 잠재력을 자비라고 찬양해 왔고, 자비로운 감정과 행동의 범위, 표현 그리고 그것을 증장하기 위한 훈련에 대하여 연구해 왔으며, 자비는 행복을 지속하고 더욱 근본적으로 정신적 전환에 대한 열쇠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글 속에 자비에 대한 동서 문화 간 인식의 차의가 극명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과 삶 대화’를 통하여 자비에 대한 동서간 및 종교 간 문화적 인식 차의가 접근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음을 대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대화가 계속됨에 따라 앞으로도 동서 간, 또는 여러 문화 간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이 해소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이준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과 명예교수. 현재 실상과 과학 연구원 원장,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상임고문,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고문, 조계종 중앙신도회 인재원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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