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유형, 기원, 치료법, 의미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 관점 비교

1. 머리말

인간에게 고통이 왜 일어나는 건가? 이것은 호기심에 왕궁 밖 세상 나들이를 나갔던 사춘기 소년 석가에게 밀려든 근본 의문이었다. 병들어 신음하는 모습, 찌들고 노쇠한 얼굴들, 부패한 시체와 그 유족들이 뿜어내는 우울한 기운들이, 안락한 궁전에서 밝은 모습 좋은 기운만 받고 살던 왕자에겐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강한 자극’이었을 거다.

 ‘자아(自我)’는 고통 자극에 대처하기 위해 본능으로부터 분화되어 발달해가는 정신조직이기에, 고통스런 좌절을 거의 겪지 않고 살아온 왕자 석가의 자아는 아직 미발달 상태여서, 낯선 자극이 유난히 강한 자극으로 각인된 것이다. 자신의 욕구에 전적으로 부응해주는 자기애적 왕궁 세계 대 당황스럽고 곤혹스런 세속 세계 사이의 대극적 특성들을 석가는 방어(분열, 부인……)하기보다 정신으로 감당하며 통합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 뜻밖의 ‘강한 자극’들은 소년 석가가 내면화한 기존 사고 틀과 지식으로는 감당되거나 해소되지 않아, 정신의 불균형과 불안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석가는 강한 자극에 교란된 정신 내부를 진정시켜줄 탁월한 치유자를 찾으려 결심한다. 안전한 울타리로 믿어왔던 왕궁이 결코 완벽하고 영원한 보호막이 아님을 느끼며, 불안에서 구원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왕궁(속세)을 버린 채 미래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모험길을 떠났다(‘분리’). 모험 과정에서 여러 ‘스승’을 만나 견문을 넓혔고(‘입문’), 박해·유혹·환상들에 시달리고 몸이 탈진해 생사 경계를 넘나드는 섬뜩한 통과의례 과정을 거쳐, 자신과 인류의 고통을 치유하는 놀라운 깨달음을 체득한 부처님이 되었다(‘성취’).

부처가 성찰하여 인류에게 전해준 고통해소 약은 사성제(고집멸도)다. 이 약에 의해 지난 2천6백 년간 수많은 인류가 정신이 붕괴되는 고통 상태에서 회복되어 크고 작은 안식을 얻어왔다. 그런데 삶의 환경과 병을 일으키는 병인들이 부처 당시와 너무도 바뀌었다. 사람들의 정신유형ㆍ성격 유형ㆍ방어기제 유형이 고대에 비해 상당히 바뀌었고, 불안과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수많은 ‘약’들(프로작, 심리치료술)이 출품되었다.

 이런 현대 환경에서도 2천6백여 년 전 죽음 공포에 압도되어 ‘힘 있는 대상(신―왕―선지자)’에게 (투사적동일시로) 자신을 맡기고, 그의 말씀ㆍ특성ㆍ행동을 굶주린 아기가 젖을 삼키듯 ‘내사’하며 집단무의식에 ‘융합’되어 살던 고대인에게 효력 있던 사성제가 현대인에게도 동일하게 경탄스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걸까?

2천6백여 년 전 인류는 죽음 공포 속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신령들의 집합처럼 느껴졌던 ‘자연’과, 신통력(‘마나’)을 지닌 ‘왕’의 보호를 갈구하는 사회구조와, 타자 속에 ‘자기’의 일부ㆍ전부를 집어넣는 ‘투사적동일시’로 서로 융합된 집단정신 속에서 살았다.1) 이런 고대 인류의 정신구조와 고통 유형이, 형이상학적 신념과 가치들을 해체하고 자연을 편리한 이용물로 가공시킨 과학기술과, 경제가치를 전능화하는 자본주의와, 전 세계 민족들의 다양한 지식과 요구와 욕망을 인공실재(인터넷)로 공시적으로 연결해 무수한 정보와 쾌락을 공유하는 정보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구조ㆍ고통 유형과 과연 동일한가?

나아가 고대~근대 인류가 ‘진리’로 믿어온 전통 사상들의 숨겨진 문제를 충격적으로 드러내어 현대사상의 문을 연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출현으로, 현대와 현대 이전은 여러 차원에서 불연속성을 지닌다. 가령 현대인은 의식이 언어와 형식논리를 사용해 구성된 어떤 ‘진리 이론’도 언어의 불완전한 실재 반영성과 의식의 편향된 관점성(perspective) 때문에 결코 ‘완벽한 진리’일 수 없음을 자각한다(니체).

또한 사회에서 부각되는 어떤 진리 관점과 이론도 그것을 주장한 개인이나 집단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사회(정치경제)적 ‘구조 작용’과 그 구조 속 특정 ‘위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마르크스). 또한 의식의 자립적 힘으로 생성한 것이라 믿어온 모든 진리 이론ㆍ정신현상들이 ‘무의식’과의 역학 관계에서 생성된 타협 형성물임을 인정한다(프로이트).

이 세 유형의 사상이 현대문화에 미친 영향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그 어떤 학문적 종교적 입장들은, 주체적 사고능력을 포기한 인간들에게만 파고들어 공생ㆍ군림하는 우민 이데올로기 내지 비현실적 관념이라 비난ㆍ냉소 받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고 고통 증상을 치유하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고대인의 심리상태와 고통 유형을 반영하여 치유한 사성제가 현대인의 정신 문제를 해소하는 데 어떤 부적합함이 있는지 살펴보자.

2. 사성제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사성제(고집멸도)는 고통의 유형(고), 고통의 원인(집), 고통의 소멸(멸),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도)으로 구성된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고하셨다. “네 가지를 갖춘 경우 세속의 왕에 필적하는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르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질병을 잘 아는 것이니라. 둘째는 질병의 원인을 잘 아는 것이니라. 셋째는 병의 치료법을 잘 아는 것이니라. 넷째는 질병의 치료가 끝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아는 것이니라. ……여래, 응공, 등정각이 네 가지 능력을 갖추어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여래는 고성제(苦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고집성제를 그대로 알고, 고멸성제를 그대로 알고, 고멸도성제를 그대로 아느니라.”2)

고통을 대하는 부처의 말씀 내용은 놀랍게도 정신분석의 입장과 유사하다. 정신분석가는 고통을 해소해달라고 호소하는 내담자에 대해 먼저 그가 현재 어떤 겉으로 드러난 고통 증상들과 배후에 어떤 숨겨진 고통 내용을 지니는지 관찰ㆍ추론하여 내담자의 정신질환 유형을 진단한다[고].3)

이 진단에 따라 치유 목표와 치유 방법이 달라진다. 예비 진단을 내린 이후에는 고통 증상을 만성적으로 생겨나게 한 원인들을 꿈과 자유연상 자료와 전이와 저항 현상을 통해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다중으로 탐색해간다[집]. 그러고는 내담자가 ‘무의식의 병인(病因)’들을 의식에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 준비가 된 최적의 ‘그때’를 기다려 무의식을 두드리는 ‘짧은 해석’을 제공해,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병인들을 ‘해석(성찰)’하게 돕는다[도]. 의식 모르게 의식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온 무의식적 병인들은, 무의식에 대한 자유로운 언어 연상 활동과 이 표현물에 대한 ‘해석’활동에 의해 자아의식에 ‘통합’됨으로써, 더 이상 ‘병인’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정신질환과 고통 증상을 일으켜온 핵심 병인들이 뜻밖에 성찰되는 순간, 과거엔 감당하기 힘들어 억압했던 ‘그것’들이 분석가의 해석 능력을 내면화하여 과거보다 주체성이 향상된 현재 관점에 의해 ‘재해석(사후해석)’되는 순간, 정신·신체적으로 강한 감동이 일어난다. 이 감동이 오래 지속되어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정신구조화)될 때까지, 고통의 뿌리(원인들)가 머리뿐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서 소멸될 때까지 끝까지 ‘훈습(반복 해석)’하면 무의식의 환상들과 정신구조가 바뀌면서 자아가 발달한다. 그 결과 삶을 주체적으로 향유하는 능력과 고통 감내력이 강한 인간이 된다. 이 상태가 되면 내담자는 더 이상 분석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분석가와 동등한 삶의 주체로 독립하게 된다[멸].

이런 고통 증상의 유형에 대한 ‘진단’, 병의 원인들에 대한 부단한 탐색, 병인적 무의식에 대한 ‘해석’, 해석이 자아에 통합되어 정신구조가 균형화될 때까지의 ‘훈습’이 정신분석 작업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2천6백여 년 전 부처가 제시한 ‘사성제’ 내용은 현대의 정신분석 관점과 어떤 같음과 다름을 지니는가? 노(老)―병(病)―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출렁이는 삶에 대한 근본 치료법을 성찰한 대의왕(大醫王) 부처와 현대 정신분석가는 서로 어떤 소통을 할 수 있는가?

1) 고 : 고통 유형에 대한 불교의 해석과 정신분석적 해석의 차이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이다(일체개고).” (苦)

부처는 당 시대 사람들이 받는 주요 고통 현상을 4가지 또는 8가지로 구분했다. 4고는 생, 노, 병, 사이며, 8고는 4고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가 추가된 것이다.

태어남, 늙음, 병듬, 죽음이 불안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상식이다. 의식주와 생존 울타리와 의료 기술이 열악했던 고대엔, 출생ㆍ늙음ㆍ병듦은 곧바로 ‘죽음’이 닥칠 수도 있는 위험 상태를 의미했기에, 불안과 고통의 보편 표상이었다. 매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정글과 초원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상황에서, 외부인과 야수와 병원균의 침입 등으로 고대인의 평균 수명은 매우 짧았고, 불과 몇 달의 안전한 생존도 예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체개고’라는 말에는 삶 자체가 고통이기에, 윤회(태어남) 없는 ‘해탈(열반적정)’ 상태를 목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진정 불교의 입장이라면, 정신분석은 관점을 달리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태어나기 이전 상태, 아무 자극도 느끼지 않는 무기물 상태로 회귀하려는 욕구를 ‘죽음욕동’이라 명명한다.

이 욕동의 목표는 삶의 불안정성을 무생물 상태의 안정성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 욕동은 정신 기관 내로 흘러들어오는 흥분량을 무(無)의 상태로 낮추거나 가능한 최소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을 추구한다.4) 불교의 수행 목표인 ‘해탈·열반’은 종종 프로이트가 주목한 죽음욕동·열반원칙과 유사한 무엇으로 해석된다.

출생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욕동과 삶욕동의 영향을 함께 받으며 살아간다. 삶의 과정에는 죽음욕동과 삶욕동이 조화롭게 혼합되어 작용하다가, 삶욕동이 소진할 무렵에 죽음욕동이 엄습하여 삶에 대한 욕망을 자연스레 거두어간다. 삶욕동은 쾌락 원칙을 추구하는 성욕동과 안정된 생존을 꾀하는 자기보존욕동(자아욕동)으로 구성된다.

삶욕동은 외부세계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수용하여 기존에 축적된 내부 자료들과 함께 ‘묶어’ 보다 복합적이고 통합된 정신조직과 정신현상들을 생성해낸다. 이에 비해 죽음욕동은 삶욕동이 다양하게 흡수하고 통합하여 생성한 복합적 구성물들을 ‘해체’하여 무기물 상태로 되돌리는 극단적인 회귀 활동이다. 프로이트가 말년에 깨달은 인간 삶에 대한 이해와 불교의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불교는 ‘생(生)’ 자체를 향유하고 창조해야 할 가치로운 무엇으로 보기보다 치료되어 벗어나야 할 ‘고통 증상’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이 경우 삶욕동에 의해 생성되는 모든 정신현상과 의미 형성물은 소중한 욕망 대상이나 가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마치 삶의 일부 순간에 경험되는 고통들을 감당하기 부담스러워 마치 ‘삶 전체가 고통이다’라고 은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A는 B다.).

여기엔 삶의 부분 특성을 과대 초점화하여 전체 특성인 양 동일시하는 오류가 담겨 있다. ‘생’에는 생리심리적인 고통 현상과 더불어 쾌락ㆍ욕망이 존재한다. 양자는 상호의존(연기) 관계이기에, 고통을 전적으로 없애려 들면, 쾌락ㆍ욕망도 마비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인류 정신이 사용해온 가장 원시적이고 극단적인 방어작용이 ‘분열(splitting)’이다. ‘분열’은 정신조직의 일부분을 전체 정신에서 분리시켜 고통 자극들만 그곳에 몰아넣고 봉쇄하는 활동을 한다. 이때 고통을 ‘지각하는 활동’ 자체도 마비된다. 그 결과 분열된 부분에 저장된 내용물에 대해선 아무 고통 지각 없이 살아가게 된다. 고통스런 자극이 침투될 때마다 그런 분열작용이 계속되면, 정신조직의 대부분이 마비되어 아무 지각도 느끼지 못하는 멍한 상태로 된다.

 미국의 공원에서 혼자 명상 고독 자유를 만끽하는 사색가인 양 보이는 수백만 노숙자들 중에는 정신분열증자가 많다. 외부세계의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침낭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들은, 만연된 ‘분열작용’ 때문에 적어도 의식으로는 ‘아―무 고통도 지각하지 않는(못하는)’ 고통 해탈자다. 그러나 무의식엔 고통 불안이 극심하다.

‘생로병사’는 삶욕동과 죽음욕동으로 구성된 ‘삶’에서 고통과 연관된 현상들을 선별한 것이다. 그 선별된 현상들만 한데 모아 초점화시키고, 그러므로 ‘인생 일체는 고통이다.’라고 규정하면, 이는 삶욕동ㆍ기쁨 현상들을 모두 배제한 편집증적(원시적, 이분법적) 판단이다.

또 다른 4가지 고통 유형을 살펴보자.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의 원형을 정신분석에선 최초 대상과의 ‘분리’와 최초 성대상의 상실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라 해석한다. 인간이 애착했던 최초 대상은 유아기의 젖가슴과 엄마이다. 그리고 최초 성대상은 아동기(오이디푸스기)의 이성의 부모다. 유아에게 젖가슴과 엄마는 곧 생명과 만족의 근원이요 보호막이요 세상 자체이다. 따라서 엄마에게서 ‘분리’되는 유아의 고통과 불안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무엇이다.

가령 엄마와 융합되어 살던 유아가 어떤 이유로 친척에게 맡겨져 엄마와 한 달 이상 떨어져 살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그 ‘분리’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리적 방어기제(‘분열’, 투사, 투사적 동일시)가 작동된다. 그 결과 애착 대상에게서 버림받는 유기 불안과 격노에 평생 시달리는 경계선 성격장애자가 된다. 경계선자는 자신을 영원히 버리지 않을 ‘완전한 보호자(신)’를 갈망한다.

유아가 아동이 되어 ‘남녀 성 차이’를 지각하면, ‘이성의 부모’를 사랑대상으로 강렬히 욕망하게 된다. 그런 아동에게 ‘이성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고 분리되라’는 ‘아버지의 요구’가 운명처럼 가혹하게 주어진다. 이 낯선 규범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고통은 너무 심각하기에 ‘억압’되며, 그로 인해 무의식에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평생 역동하는 콤플렉스로 남는다.

이 어릴 적 고통 상처들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외부 자극과 우연히 연결되는 순간에 상처, 불안, 실수, 증상들을 일으킨다. 아동기(오이디푸스) 상처와 콤플렉스 감정은 사춘기 이후부터 평생동안 애정 대상(애인, 배우자, 자식……)과의 관계 경험에서 재경험된다. 청춘기에도 유년기와 유사한 이별 상처를 겪으면 유년기와 청춘기의 상처가 결합ㆍ증폭되어 방어막을 파열시키는 ‘병리적 상처(trauma)’를 일으켜 어떤 고통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증상을 지닌 신경증자가 된다.

사랑 대상과의 이별은 분명 고통스럽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정신은 이별 고통을 겪고 ‘애도’하는 과정을 통과해가면서 성숙해진다. ‘자기’가 취약하여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을 욕망하고 관계 맺을 능력이 없거나, 유년기에 애착했던 대상을 애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들을 내적 대상(환상)으로 간직한 채 평생을 그 환상과 더불어 살아간다.

모든 정신질환자들의 내면에는 ‘유년기 사랑과 이별’에 연관된 이런 환상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의 무의식에도 이 환상들이 존재한다. 최초의 애착 대상(젖가슴, 엄마, 이성의 부모)과 ‘분리, 이별, 애도’를 하지 못하면, 새로운 대상들과의 친밀 관계와 동일시 작용을 통해 발달해가는 자아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자아가 발달하지 못하면, 사소한 외부 자극에도 고통과 불안을 느끼는 정신질환자가 된다.

그러나 보통의 성숙한 사람에겐 사랑 대상과의 이별이 삶 전체를 체념할 만큼 섬뜩한 고통도, 평생 시달리는 증상적 고통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발달을 위해 감당해내고 거쳐야만 하는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고통이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만나 관계해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은 모든 인간이 평생 겪을 수밖에 없는 본질 고통인가? 인간이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 대상의 원형은 유아기의 ‘나쁜 엄마’, 아동기에 날 ‘거세’할 것 같은 ‘무서운 아버지,’ 그리고 시기하는 형제·자매다.

유아가 마땅히 누려야 할 양육자의 돌봄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박탈’ 경험을 계속할 때, 유아의 내부에는 파괴욕동이 들끓게 된다. 파괴욕동은 유아의 연약한 자아가 감당하기 힘들기에 외부 대상(엄마)에게 투사된다. 투사의 결과 외부 대상이 마치 자신을 파괴할 것 같은 괴물처럼 환상화된다. 그 투사물은 자동적으로 내사되어, 자신을 박해하고 잡아먹는 ‘나쁜 엄마’ 환상이 내적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이성의 부모를 강렬히 욕망하는 오이디푸스기의 아동에게는 사랑 대상을 포기하라 강요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증오’가 자연스레 일어난다. 이 오이디푸스 욕구는 ‘거세 공포’로 인해 억압됨으로써 평생 무의식에 ‘증오 감정과 환상ㆍ상처ㆍ불안’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유년기 파괴욕동과 대상 표상(환상)들은 의식의 배후에서 평생 작동되어 새로운 ‘대상’들과 만날 때, 자신도 모르게 유년기의 부정적인 고통 감정과 불안을 일으킨다.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고통은 유년기에 엄마 상처, 아버지 상처가 큰 개인일수록 유난히 심하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들은 유년기에 엄마의 헌신적인 돌봄과 아버지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제공받기에, 극도로 증오하던 그 대상이 자신에게 좋음을 제공하는 대상이기도 함을 자각하여, 대상에 대한 미움을 사랑과 ‘통합’하는 정서 발달 경험을 한다(편집분열자리에서 우울자리로의 발달). 대상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동시에 기쁨을 주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성찰을 한 보통 사람들은 ‘원증회고’에 심하게 시달리지 않는다. 원증회고가 심각해 삶의 기쁨조차 향유하기 힘든 성격 유형은 파괴욕동(죽음욕동)을 ‘분열’·‘투사’하여 현실 대상들을 ‘전적으로 좋은 대상/전적으로 나쁜 대상’으로 양극화하는 편집증자, 경계선 성격장애자, 자기애 성격장애자, 반사회성 성격장애자 등등이다.5)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은 ‘소유욕’과 연관된다. 탐욕과 소유욕 집착은 구강기의 박탈 경험과 항문기의 과도좌절 경험에 기인한다. 엄마가 좋은 것을 혼자 소유한 채 자신에게 애정과 젖가슴을 온전히 제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유아는, 엄마 몸(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픈 탐욕을 지니게 된다. 엄마의 헌신적 돌봄에 의해 탐욕이 수정되지 못할 경우,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자기를 위해’ 봉사시키고 물건처럼 이용하고 싶어 하며 자기애적 모욕감, 수치감, 열등감에 시달리는 자기애 성격장애자가 된다.

항문기(2~3세) 아이는 자신의 변을 자신이 만들어낸 자랑스런 창조물이자 자기 신체의 일부로 지각한다. 그런 아이에게 부모가 원하는 시간에 맞추어 변을 배설하라 요구하면, 자기 신체의 일부 내지 귀중한 소유물을 상실당했다는 박탈감에 시달린다. 그 상태에 고착되면 평생 ‘소유’에 집착하며 재산(시간, 돈, 건강……)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침범당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강박형성격자가 된다.6)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소유욕의 좌절 고통으로 인해 삶의 다른 기쁨들을 향유하지 못하는 강박증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색(色, 육체), 수(受, 느낌), 상(想, 생각), 행(行, 의지), 식(識, 마음)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심신을 갖는 것이 고통을 형성시킨다(五陰盛苦)는 불교의 관점은, ‘산다는 게 고통의 연속이요, 다시 태어남(윤회)도 고통이다.’라는 해석과 유사한 문제를 지닌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심신의 ‘어떤 특성’이 때로 ‘어떤 고통’을 일으킨다는 주장과, ‘오온이 합하여 고통을 이룬다.’는 해석은 진리성과 타당성이 매우 다르다.

색, 수, 상, 행, 식은 삶의 과정에서 접촉되는 자극들을 수용ㆍ지각하게 하는 구성요소이다. 오온과 심신은 고통의 구성 요소인 동시에 만족의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오음성고는 ‘생’의 일부 특성을 과대 초점화하는 언명이다. 이런 언명에 공감하는 현대인은 현실세계에 애착이 없는 깊은 우울증자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통자극을 거부하기 위해 현실 관계에서 ‘철수’를 반복하는 분열형(schizoid) 성격자들뿐이다. 보통의 한국인에겐 이 언명이 결코 ‘전체적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9고 : 환경(大他者) 결함

부처님이 2천6백여 년 전 인류가 겪던 고통 유형을 정리한 8고에, 현대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고통 유형을 덧붙인다면,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고통’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는 ‘최초 양육자, 가족, 사회적 상징계, 자연’이라는 다중의 ‘환경’과 접속한다. 이 ‘최초 환경’들은 개체의 내부로 내사되어 정신성 형성에 주요 영향을 미친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위니컷은 ‘최초 환경인 엄마―아기’ 사이의 2자 관계 환경이 정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고, 프로이트는 ‘어머니―아버지―나’ 사이의 아동기 3자 관계 환경이 정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그리고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은 출생 순간부터 인간을 둘러싸는 보이지 않는 대타자(大他者, 상징계, 언어 구조, 의미그물망)가 정신구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개체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타자의 시선들, 타자가 자신에게 던진 말,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해 사용하고 있는 사회적 언어체계, 문화 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각한다. 이 대타자의 특정 구조 속에서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가치가 생성되며, 개인의 정신은 그 의미와 가치, 평가 시선 등에 좌우되어 고통받거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 대타자를 정신에 온전히 내면화하지 못한 인간은 본능욕동대로 사는 동물 상태와 주관적 상상계로부터 벗어나 “나는 ~의 아들이고, ~의 선생이며, ~~이다” 등의 상호주관적 의미 세계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어떤 대타자도 구조적으로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며, 뭔가를 끊임없이 욕망하게 하는 어떤 결여를 지닌다. 그 결여는 그 사회구성원의 정신에 내면화되어 죽을 때까지 해결해야 할 불편한 짐으로 작용된다. 인생이란 본래의 자기 것이 아닌 타자로부터 부과된 타자의 결함을 자신도 모르게 짊어지고 사는 꼴이다.

2천6백여 년 전 부처님도 언어의 환상성이 번뇌를 일으킴을 전하셨지만, 사회제도 환경과 의식의 배후에서 작동되는 ‘언어구조’가 무의식의 구조로 자리 잡아 인간 삶에 욕망과 불안을 일으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는 19세기(프랑스혁명~) 전까지는 인류가 특정 사회제도와 일체화(융합)된 특정 ‘집단무의식’ 속에서 지냈고, 사회환경(사회제도, 문화, 언어)이 인간 삶에 보호 울타리 역할과 동시에 고통을 일으키는 구조적 기능을 한다는 자각을 명료히 하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대타자가 정신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을 부처님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대의 인류가 아직 그것을 자각하고 감당할 자아(시대정신)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성은 그가 관계하는 가족환경, 집단환경(학교, 종교집단, 직장……),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환경 등과 직간접적으로 관계해 동일시ㆍ내면화하면서 ‘형성ㆍ발달’해간다. 현대의 정신분석학계는 개인을 둘러싼 대타자(환경)의 결함이 심하면, 그와 그를 동일시하게 될 후손들이 대대로 (그 오래된 원인을 알지도 못한 채) 정신질환을 겪게 될 수 있음을 주목한다(가계도, 문화 사회심리학).

‘원치 않는 환경에 살아야 하는 고통’은 개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구조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목표를 지닌 한국불교에 ‘나쁜 환경’이 정신에 미치는 고통 유형 분석과 더불어, ‘나쁜 환경’이 생겨나게 된 원인론과 치료론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환경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한 불교의 용어에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나그네’가 일으킨 먼지에 번뇌가 일어난다는 이 말은, 실은 현실 환경이 개인 정신에 미치는 고통자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를 유머로 작게 만들어 표현한 것이다. 불교의 수도자에게 엄격히 요구되는 수많은 계율들은 환경 대상들이 정신을 곤혹스레 오염시켜 만성 고통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이미 인식하여 경계한 것이다.

10고 : 증상

보통 사람이 인생 과정에서 잠시 겪는 ‘보통 고통’과 정신질환자가 만성적으로 짊어지는 ‘증상 고통’은 불안의 ‘질’과 양이 다르다. 보통 사람이 겪는 불쾌 자극들은 그의 자아가 ‘감당할 만한 고통’이다. 이에 비해 ‘증상 고통’은 자아에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과잉 자극(상처, trauma)’에 기인한다.

정신분석의 초창기엔 ‘만성적 고통’의 기호인 증상(symptom)들은 정신질환자만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정신증(psychosis)자는 과도한 죽음욕동 때문에 ‘자기(self)’가 산산조각 나는 멸절불안에 시달리고, 편집증자는 무시무시한 박해불안에 시달리며, 경계선 성격장애자는 유기불안과 분노에 시달린다. 자기애 성격장애자는 내적 공허감과 모욕감에 시달리고, 신경증자는 거세공포에 시달려 삶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한다. 이들은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원인들’이 일으키는 반복되는 ‘증상’ 때문에, 인생 과정이 불안의 연속이다. 불안 때문에 증상이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단 증상이 발생된 후부터는 온전한 휴식ㆍ자유ㆍ기쁨을 맛볼 수 없게 되기에, 그야말로 ‘일체개고’ 상태로 산다.

그런데 현대 발달심리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보통 인간의 내면에도 정신증적 요소, 경계선적ㆍ자기애적 요소, 신경증적 요소들이 ‘인류 발달과 유아 발달 과정의 흔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 상처를 받으면 잠정적으로 또는 만성적으로 이들 병증 상태로 퇴행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심리학 자료와 인간을 하나의 보편 기준이 아닌 각 민족과 개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공감적으로 이해하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이 결합되어, 현대는 ‘정상/비정상’ 사이의 경계가 매우 유동적이고 모호한 상태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집합 속에 신경증, 자기애 성격, 경계선장애, 정신증이 고유한 인성 스타일로 자연스레 섞여 있는 상태다. 따라서 이젠 반복되는 만성 고통을 의미하는 증상도 인류를 특징짓는 보편적 고통 현상으로 포섭해서 생각해야 할 때다. 즉,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려면, 정신적 고통의 대표 희생자인 증상을 지닌 인간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이해와 현실적 구원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2) 집 : 고통의 원인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불교는 정신의 고통이 생겨나는 원인을 탐(貪: 탐욕), 진(瞋: 분노), 치(癡: 어리석음)의 3독심이라 본다. 탐욕은 색성향미촉 5욕애(欲愛)와 재물욕, 명예욕,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다. 불교의 이 욕심들이 과연 치료를 필요로 하는 만성적 고통의 원인인가?

프로이트에 의하면 정신현상들은 내부에서 추동되는 본능욕동들에 의해 생성되며, 욕동이 현실에서 얼마나 상처ㆍ불안 없이 ‘충족/좌절’되는가가 삶의 만족과 고통을 좌우한다. 라캉은 유년기에 경험했던 ‘그 쾌락지각’들을 유년기 이후에 다시 충족하려는(‘지각동일성’) 욕구는 결코 완벽히 실현될 수 없으며, 이 결여를 채우려는 정신작용이 ‘욕망’을 일으킴을 주목한다.

이 ‘욕망’은 증상(만성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활동이다. 본능욕동과 욕망은 현실에서 어떤 부분은 충족되고 어느 부분은 좌절된다. 충족될 경우 쾌락이 느껴지고, 좌절될 경우 고통이 느껴지며, ‘과도 좌절’되면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증상 고통’이 일어난다. 인간 고통이 상당 부분 욕심(욕동, 욕망)의 좌절에 기인한다는 것은 근본진리이다. 그런데 그 욕심은 실현되는 만큼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이 만성 고통의 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보통의 욕망이 아닌 ‘탐욕’이다. 탐욕이란 한계를 모르는 욕심을 의미한다. 이 탐욕은 엄마의 전적인 돌봄을 받는 생후 1년 6개월 사이(구강기, ‘편집분열자리’)에 엄마가 유아에게 헌신적인 관심과 애정과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런 엄마를 지닌 유아는 대상(엄마, 세상)의 상태에 대한 온전한 인식도 배려 능력도 지니지 못한 채, 엄마가 ‘좋은 것들’을 모두 혼자 소유하고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는 박탈감에, 엄마 몸속에 있는 가치 있는 좋은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 소유하고픈 탐욕을 지니게 된다. 이 탐욕을 엄마가 좋은 돌봄 제공을 통해 완화시키지 못할 경우, 유아의 마음엔 엄마(세상) 몸속의 ‘좋음’들을 모두 파괴하고 싶은 파괴욕동과 시기심이 극성하게 된다.7)

박탈감, 탐욕, 시기심이 과도해지면 아이의 연약한 자아가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붕괴된다. 따라서 이 부정적인 원초 감정들을 정신의 일부분에 몰아넣고 봉쇄하는 ‘분열’ 방어작용이 작동된다. 이 ‘분열’기제가 정신구조화되면 유아기의 박탈ㆍ탐욕ㆍ시기심이 내면에 저장되어, 만성적 고통의 원인이 된다. 타자가 지닌 좋음들(능력, 힘, 권력, 재물, 명예, 지식, 남근, 음식……)을 모두 자기 속으로 삼켜 소유하고픈 욕심,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할 바에야 좋음들 자체를 파괴하는 시기심은 정신 내부를 황폐화시켜 만성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유아기에 보통의 건강한 엄마에 의해 탐욕을 가라앉히는 헌신적인 돌봄을 제공받는다. 그로 인해 끝이 없고 이기적인 탐욕이 아니라, 타자(엄마)의 상태를 배려하고 타자를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의 욕심을 갖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보다 만족을 더 느끼며 산다.

재물욕은 ‘변’을 자신이 만들어낸 최초의 자랑스러운 창조물 내지 자기 신체의 일부로 생각하는 항문기(2~3세) 아이의 욕망, 상처, 환상에 기인한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는 귀한 소유물이자 신체 일부인 ‘자기의 변’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미할 수 있는 시간과 행동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채, 부모로부터 ‘변 가리기’ 훈련을 강요받게 된다. 이 요구가 가혹할 경우, 아이는 자기 신체에서 나온 중요한 소유물(창작물)이 타자의 침범에 의해 상실당했다는 피해감과 분노에 젖는다.

이 시기의 욕동과 감정에 고착되면, 아이의 소유물인 변이 성인에겐 재물로 대체되어 자신에게 기쁨 주는 물건을 악착같이 소유하려 드는 재물욕이 커지게 된다. 항문기에 고착된 항문형성격자(강박증자)는 귀한 재물을 모아 자기 마음껏 혼자 오래 음미하는 낙으로 산다. 그 재물은 돈, 골동품뿐만 아니라 ‘희귀 지식’을 담은 책일 수도 있다. 그 경우 그는 탁월한 학자가 되기도 한다. 이 재물욕 역시 ‘좌절/충족’ 비율에 따라 고통의 원인인 동시에 기쁨의 원천이다.

명예욕은 오이디푸스기(4~6세)에 형성되는 초자아(super-ego)에 기인한다. 이 시기에 아동은 이성의 부모와 결합하고픈 강한 욕망을 지니는데, 그 욕심을 포기하고 현실 규범을 수용하라는 곤혹스런 ‘아버지의 요구’를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모 사랑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거세불안에 압도되어 이 ‘아버지의 말씀’을 수용하고 동일시하면, 그 사회에서 칭송하는 ‘자아 이상(Ego ideal, 인생 목표)’을 제공하는 초자아가 내면에 형성된다. 이것이 명예욕의 심리적 근원이다(“내가 아버지도 무시할 수 없는 명예를 지닌 인간이 되면, 그때는 아버지처럼 엄마와 여성들의 당당한 욕망 대상이 되어, 원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을 거야.”).

이 오이디푸스기 심리는 정신구조의 주요 부분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명예로운 존재로 평가받고픈 명예욕을 지닌다. 그런데 치열한 경쟁 구조에서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 선망되는 명예를 얻을 수는 없기에, 명예욕은 끊임없는 좌절에 시달리게 만든다. 명예 없는 사람이란, 세인에게 관심과 욕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살아야만 하는 하찮은(거세된) 존재다.

타인에게 하찮은 시선을 받는 고통은 엄청난 것이기에, 인간은 평생 자신이 명예로운(힘과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부단히 애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 수밖에 없는 한, 명예욕은 고통의 원인인 동시에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다.

영원한 생명을 갖고 싶어 하는 ‘유애(有愛)’는 ‘자아전능 감정’에 도취하는 유아기 ‘자기애 단계’의 감정과 환상이 마음에서 일으키는 욕심이다. 이 시기의 유아는 욕구를 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엄마의 돌봄으로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이루어지며, 그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인간에겐 누구나 이 ‘자기애 단계’의 흔적이 남아 있어,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종종 유아기 단계로 퇴행해 그때의 만족들을 꿈과 환상 속에서 재향유하곤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성향이기에, ‘유애’가 현실 적응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정신질환의 징표이거나 만성적 고통의 원인이라 말할 수 없다.

‘무유애(없어지고픈 욕구)’는 현실의 고통 일반에서 일시에 벗어나고픈 욕구이다. 명예가 추락해 살아 있는 한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현실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무유애’가 자연스레 일어난다. 이 ‘무유애’는 고통의 원인이기보다, 계속되는 과도한 고통 상태에 대한 정신의 반응 양태 중 하나이며, 그 속에는 ‘열반 원칙’을 추구하는 ‘죽음욕동’이 있다.

분노(瞋)는 파괴 활동의 기표이다. 유년기에 유아에게 일어난 분노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못한 채 내부에 분열ㆍ억압되면 무의식에 저장된다. ‘그것’은 이후의 삶에서 만나는 대상들에게 무심결에 투사되어, 그 결과 마치 ‘외부 대상’이 자신을 파괴할 것 같은 박해환상과 박해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듯 내면에 축적된 분노는 내적으로도 고통스럽고 외부 대상을 부정적 표상으로 왜곡해 불안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분노 자체가 고통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은 분노해야 할 때 분노를 느끼고 표현해야 정상이다. 분노를 그 원인을 제공한 대상에게 온전하게 말로 표현하여 담아지거나 소통되면 분노가 정화되고 창조에너지로 전환되어 ‘진정한 자기’의 형성과 발달에 기여하는 에너지원이 된다.8)

정신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분노 자체가 아니라 외부로 분출되지 못한 채 내면에 구조화된 ‘만성적 분노’이다. 만성화된 분노는 유아가 느낀 분노감이 ‘대상(엄마……)’을 향해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거나 ‘대상’에 의해 공감적으로 담아지지 못할 때 발생한다. 분노를 표현했다가 혹독히 보복당했거나 외면당할 때, 아이의 분노는 내향화되어 ‘자기’를 파괴한다.

 이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 분노가 저장된 ‘자기’의 한 부분이 자동방어에 의해 ‘분열’되면, 평생의 분노가 된다. ‘분열’되면 분노 지각이 마비되어 자신이 분노를 갖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그 마비된 분노는 뜻밖의 순간에 ‘해리’상태로 타자에게 표출되어 ‘치명적 실수’를 일으킨다.(이승희, 유영철……)

우리는 진정한 자기의 표현인 ‘정당한 분노’와 병리적 정신구조에 기인된 과도하고 만성적인 ‘증상적 분노’를 구분해야 한다. 분노를 자신의 욕구에 부응해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박해하는 ‘환경’에 대한 ‘자기’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노 자체를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부정적 가치 평가하게 되면, 자연스레 표출되면 금세 해소될 분노가 내향화ㆍ분열ㆍ억압되어 만성적 고통을 일으키는 병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癡)은 고통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정신분석에서 문제 되는 어리석음은,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지 않거나, 자신의 무의식 직면을 거부하거나, 주체적 삶보다 안전한 삶을 선호하는 태도 등이다. ‘성격장애자’들은 내면에서 자동 작동되는 ‘원시 방어기제(분열, 부인, 투사……)’로 인해 외부 대상과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주관적 환상으로 왜곡한다. 그 결과로 타자 관계에서 오해와 소통 불통과 싸움이 일어나면, 남 탓을 한다.

성격장애자들은 자기애적 심리상태에 고착되었기에, 자신의 증상들과 문제를 (자아 이질적) 문제로 자각하질 못한다. 그로 인해 이들은 타인이 그의 문제를 지적하면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느껴, 인정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이 지닌 환상을 진리로 믿고 고집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진실에 대한 성찰’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힘 있는 누군가에게 융합하여 정서적 결핍을 직접 위로받고 보충받기를 원한다. 내면의 진실을 깨닫게 해 자신을 변화시켜줄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덮어주고 감싸주며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대상을 원한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진실을 부인, 회피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은 굳어진 유아적(자기애적) 정신구조에 기인한다.

그런데 성격장애자들은 강력한 원시적 방어작용의 효과로 (고통 원인들이 무의식에 봉쇄되어 있기에) 정작 고통을 많이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어리석음’이 ‘자아동조’ 상태로 정신구조화되어 자기가 문제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성격장애자들의 심리적 고통은, 자신의 문제와 증상을 민감히 자각하며 고통의 원인을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신경증자가 받는 심리적 고통보다 매우 낮다. 아둔하고 배부른 ‘돼지’가, 의심하는 철학자보다 (‘의식 차원’에선) 행복한 것이 정신분석의 진실이다.

유년기에 직면된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현실을 ‘부인(否認)’하고 만족스런 환상으로 대체해 방어해낸 아이의 ‘자연스런 어리석음’은, 그 방어기제와 환상이 정신구조화될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 지속된다. 이 경우 진실 인식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어리석음은 고통의 원인이기보다, 유년기 고통 상처의 결과적 증상이다.

불교는 고통의 제4원인으로 ‘교만(Hybris)’을 든다. 동서양의 신화들과 비극 작품에는, ‘교만’이 ‘비극의 원인’임을 드러내는 사례가 많다. (아라크네, 오이디푸스……) 그런데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교만 역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기보다 결과적 증상이다. 교만스런 태도를 취하는 대표적 인격 유형이 자기애 성격장애자다. 이들은 ‘자기’와 ‘자기애’가 취약하여, 자신이 잘난 존재라는 것을 타인에게 끊임없이 인정받지 못하면 모욕감, 공허감, 존재가 사라질 듯한 불안 고통에 시달린다.9)

이런 감정들이 견딜 수 없기에, 계속 잘난 척하게 되는 것이다. 교만 증상의 근원은 유아기에 엄마로부터 온전히 존중받고 돌봄 받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태어난 아기의 존재 자체와 그 아이가 나타내는 본능욕구 표현들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며 이뻐하며 돌봐주는 대상(엄마) 관계 경험을 온전히 한 사람은, ‘자기애’가 충족되고 ‘자기’가 안정되어 외부 대상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기에, 타인을 향해 잘난 척을 해야 할 심리적 이유가 없다.

따라서 교만은 인간 일반의 보편적 고통 원인이기보다, 자기애 성격장애자의 과도한 유아기 박탈 상처에 기인한 일종의 결과적 증상이다. 교만 증상은 타인을 불쾌하게 해 보복(무시, 왕따)당함으로써 유년기에 겪은 박탈 ‘비극’을 반복시킨다.

불교가 번뇌의 또 다른 원인으로 드는 ‘만, 의심, 오견(五見)’역시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기보다 유년기에 겪은 상처에 기인한 일종의 결과적 증상, 환상, 방어 양태이다.

정신분석이 발견한 고통의 원인들은 대부분 분열ㆍ억압되어 의식이 자각하기 힘든 무의식의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유년기에 발생되어, 정신구조ㆍ성격구조ㆍ내적대상(무의식적 환상)으로 자리 잡아, 평생 지속되는 만성 고통의 원인이 된다. 정신분석학계가 지난 백여 년간 주목해온 ‘만성 고통(증상)’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Freud(신경증) : 상처(좌절, 유혹, 분리,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거세공포, 성욕동 발달 장애, 유아성환상, 사후작용.

Ego Psychology : 자아발달 장애, 정신(이드/자아/초자아)의 불균형(갈등), 현실 부적응, 원시 방어기제, 유전.

Klein(정신증): 죽음욕동, 무의식적 환상, ‘분열’과 투사적 동일시, ‘편집분열 자리’와 우울자리 고착, 가혹한 초자아

Winnicott(성격장애) : 열악한 최초 환경(‘박탈’된 엄마 관계), 수용되지 못한 공격성, ‘중간 대상(transtional object)’ 부재, 병리적 자기(거짓자기)

Kohut(자기애적 성격장애) : ‘자기대상(self-object)’ 결핍, 자기애 결핍, 과대 자기

Kernberg(경계선 성격장애) : 파괴욕동, 손상된 자기, 부정적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 부정적 대상 관계 패턴, ‘유기’ 상처.

Lacan(신경증) : 대타자(大他者)의 결여,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불균형, 병리적 환상 구조, 주체성 결여.
기타 : 애도 장애, 애착 장애, 담아주기 실패, 개성화 과정 정체, 정신의 대극적 분열.

정신질환은 위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형성된다. 즉, ‘다중 원인’들이 ‘결합’되어야 평생 지속되는 심인성 고통 증상이 일어난다.

또한 혹자가 비록 고통 원인들을 여럿 지닐지라도 그것을 상쇄할 만족 요인들이 워낙 클 경우, 정신질환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유아기에 엄마 상처가 심각할지라도 아동기에 아버지 관계가 매우 좋으면 정신질환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위 요소들 각각은 의식의 특성이 아니라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를 지칭하며, 무의식이기 때문에 무시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만성 고통의 원인이 된다. 불교 역시 오랜 세월 의식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제7식(말라야식)과 제8식(아뢰야식)에 대한 성찰을 통해 번뇌를 일으키는 씨앗인 ‘내면의 미세망상들’을 직면하고 대결해왔다. 제7식, 8식에 대한 불교의 오랜 연구는 정신분석에 의해 현대인의 정신에 이해될 수 있는 양태로 언어화·체계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과거 시대엔 부처의 언어들로 대중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거대한 에너지를 제공하여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발견이 문화 속에 녹아든 현대에는, 무의식만을 집중 연구해 의식에 충격을 주는 정신분석학의 소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불교는 현대인에게 만성적 고통을 일으키는 무의식의 원인들을 집중탐구한 정신분석의 소리와 소통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곱씹어야 할 점은 심리적 고통들의 근본 원인은 억압된 유년기의 욕동, 상처, 환상, 불안, 방어기제에 있다는 것, 그 누구도 혼자의 의지로 방어기제를 뚫고 무의식을 성찰할 수 없다는 것, 방어작용을 통과해 무의식을 성찰하려면 ‘정신분석 환경(setting)’과 특별한 기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신은 유년기에 그 구조가 형성되고 사춘기에 그 구조가 굳어진다. 이 정신구조는 ‘방어기제’와 내적 대상(환상)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되어 의식의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것을 혼자 의지의 힘으로 수정하기 어렵다.

수십 년간 홀로 토굴 수행을 한다 해도, 무의식의 정신구조 자체는 결코 의지적 노력에 의해 바뀌지 않으며, 자동 방어기제 때문에 무의식 성찰은 정신구조상 용이하지 않다. 어떤 인간도 자기 눈으로 자기 ‘등(무의식)’을 볼 수 없다. 그 등을 보려면 ‘타자의 눈’이 필요하다. 정신분석 치료는 ‘분석가―내담자 관계’에서 일어난다. 만성 고통을 호소하는 내담자의 방어기제를 뚫고 무의식을 성찰하려면, 반드시 어릴 적 전능해보이던 엄마 아버지 전이환상을 일으키는 경륜 있는 타자(분석가, 선사, 先覺者)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3) 도 : 고통의 원인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

8정도와 계정혜 3학은 고통에 대처하는 불교 고유의 실천적 방법이다. 그런데 이 치유법은 ‘의식/무의식’의 분열이 심화된 현대인에게 어떤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가?

현대의 정신분석가는 정신질환을 치유하는 방법을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정신치료(psycho-theraphy)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다. 정신치료란 내담자의 손상된 자아에 에너지를 보충해 ‘자아를 보강’시킴으로써, 자아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과 불안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자아가 에너지를 얻는 주요 방법은 외부에서 좋은 자극을 흡수(내사, 동일시)하는 길이다.

이때 좋은 자극은 대상(사람) 관계로부터 직접 올 수도 있고, ‘말씀, 지식’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정신치료는 엄마가 유아를 잘 돌보아주듯이, 치료사가 무기력해 하는 내담자에게 ‘힘을 주는 몸짓과 언어’를 자상하게 제공한다. 가령, 내담자의 고통을 공감해주고 고통에 대응해 온 내담자의 노력과 생각과 행동에 나름의 귀한 가치가 담겨 있음을 긍정적으로 주목하게 하고 전적으로 지지해줌으로써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그 공감과 지지는 자아에 힘을 강화시켜 현재의 고통을 감당하게 도와준다. 그런데 이런 심리치료는 병리적(유아적) 정신구조나 성격구조에 기인된 만성적(증상적) 고통의 원인을 뿌리까지 해소하진 못한다. 만성적 고통을 지닌 인간들의 경우 정신치료만으로는 궁극적 치료가 되지 않으며, 무의식의 병인에 대한 ‘깨달음(정신분석적 해석)’으로써만 궁극적 치료가 가능해진다.

정신분석은 억압된 무의식의 병인을 외부로 끄집어내 ‘해석’을 통해 변형시켜 병리적 방어구조와 정신구조를 변화시키는 길이다. 심리치료는 자신의 무의식을 끄집어내 직면하고 성찰하기엔 현재 자아가 너무도 무기력하고 미발달한 성격장애자에게 적용한다.

그런 사람에게 상처 많은 무의식을 직면시키면 자아가 감당할 수 없어 붕괴되기에, 강한 자아를 지닌 분석가가 공감 지지와 보조자아 기능 제공(현실 안내)을 통해 자아의 힘을 보충시키는 심리치료를 하는 것이다. 무의식에 대한 ‘해석’은 자아가 어느 정도 발달하고 자아 강도가 높은 신경증자에게야 가능하다. 

불교의 8정도와 3학 중 ‘계’와 ‘정’은 보통의 인생 고통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의 자아에 에너지를 보충시켜서 번뇌에 휘둘리는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데는 유익하다. 나아가 힘 있는 대상을 ‘내사·융합’해서 ‘대상의 에너지’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드는 성격장애자들에게 힘을 주는 데도 유효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8정도와 3학에는 ‘무의식의 병인’들에 접속하여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하나씩 제거하는 데 유효한 방법, 치유술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자아의식의 힘을 보강하는 데는 유익하지만, 이것이 제8식에 있는 미세망상을 과연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6식과 8식 사이에는 개인의 의지 노력이나 선각자의 고귀한 말씀으로도 꿰뚫리지 않는 강력한 ‘방어기제’가 작동된다. 방어기제는 유년기에 죽을 것 같은 충격적 상처와 공포 상황에서 생존 본능에 의해 생성된 ‘자아’의 원초 작용이다. 그 기제는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의식의 어떤 노력도 그 기제를 바꾸기 어렵다. ‘어떤 노력’이란 이미 그의 무의식이 허용하는 만큼의 노력일 뿐이다.
8정도와 3학에 이 무의식의 방어기제를 변화시킬 어떤 묘책이 담겨 있는가?

무의식에 봉쇄되어 있는 (유년기의) 상처, 불안, 욕동, 환상 등을 해소하려면, 방어기제를 이완시켜 무의식을 의식 밖으로 표현하게 하는 배경 지식과 숙련된 기법을 필요로 한다. 정신분석은 ‘자유연상’ 기법, ‘전이, 저항’을 불러일으킨 후에 그것을 ‘해석’하는 기법, ‘꿈 해석’ 기법 등을 통해 무의식을 의식으로 부단히 표출하고 통합한다. 그런데 8정도와 3학은 무의식을 외부로 표출하는 정신분석 방법보다, 무의식을 가라앉히는 정신치료 방법을 사용하는 듯 보인다.

신도들 중에는 전능한 신의 존재, 신의 말씀(경전), 힘 있고 든든한 종단, 권위 있는 종교지도자를 원시적으로 이상화하고 ‘내사’해서 ‘융합ㆍ의존’하려 드는 유아성 성격자들이 꽤 많다. 이들의 불안과 고통을 다스리는 데는 정신치료 방법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교양 수준이 높아진 현대의 보통사람들과 높은 지적 능력을 지닌 신경증자의 고통 치료에는 정신치료 방법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물론 불교에선 내면에 관심을 집중하는 명상 수련 중에 번뇌망상이 올라올 때 회광반조(恢廣返照)하여, 번뇌의 원인을 성찰해내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왔다. 그러나 ‘명상’을 통한 회광반조에는 한계가 있다. 무의식은 의식과 ‘불연속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에, 어떠한 의식ㆍ사유ㆍ언어로도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관조할 수 없다. 그리고 유기체의 안정을 도모하는 자아는 ‘무의식’이 의식에 자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늘 모종의 변장 작업(압축, 전치, 상징화, 검열, 방어)을 거쳐 변형되어야만 비로소 의식으로의 발현과 지각이 허용된다.10) 따라서 어떤 탁월한 의식 능력을 지닌 자라도 무의식 자체를 직관적ㆍ직접적으로 ‘회광반조’할 수 없다. 무의식을 성찰하려면 어느 정도의 ‘직관’과 더불어 반드시 ‘해석’ 작업이 필요하다.
불교는 8정도와 3학이 유년기에 형성되고 사춘기에 굳어진 무의식적 정신구조와 정신 내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임상사례들을 온전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중의 요소들이 그물망처럼 얽힌 복합된 현대 사회에서 다중의 무의식적 원인들에 기인된 현대인의 질병을 온전히 이해하며 치유하려면 8정도와 3학에 현대화된 뭔가가 더 필요하다. 현대인의 ‘무의식’과 전문적으로 대면 대결해온 정신분석적 지혜와 기법은 그 필요에 상당히 부응할 것이다.

 3. 증상의 의미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간의 한계를 직면하고 인정하며 끊임없이 진실할 수 있는 개방적인 마음과 삶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나’라는 잠정적인 실재는 살아 있는 한 고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은 곧 고통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삶욕동과 죽음욕동이 혼합되어 있듯이, 삶에는 고통과 쾌락이 공존한다. 만성적인 고통 증상은, 자아가 미발달했던 과거 시절엔 결코 감당할 수 없었던 상처, 불안, 금지된 욕동과 환상을, 생존에 덜 치명적인 양태로 분출하고 있다는 기호이다.

만약 이 ‘증상적 분출’이 없었다면, 상처 입은 수많은 인간들은 이미 과거에 정신이 붕괴되었거나 치명적 실수를 했거나 자살하는 더 큰 파국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반복되는 증상적 고통 자체가 일종의 감당할 수 있는 양태의 고통 처리술인 것이다.

신경증자는 고통 증상 속에서 금지된 소망을 변장된 모습으로 분출하며 향유한다. 의식에는 고통으로 지각되지만 무의식에선 은밀히 쾌락을 향유하는 것이 신경증 증상이다.11)

‘향유’ 요소가 있기에, 증상이 수십 년간 좀처럼 없어지지 않은 채 지속되는(무의식이 붙잡는) 것이며, 한편으론 치료를 갈망하지만 다른 편으로 치료를 위한 구체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즉, ‘증상’은 순수한 고통의 기호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기호이다.

인간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고통’들에도 이중가치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가령 금지된 행동으로 쾌락과 이익을 누린 사람은 내면에서 초자아 징벌이 작동해 우연인 양 현실에서 실수를 저질러 파멸되거나 원인 모를 병을 앓게 된다. 그 현실 파멸과 병에는 죄의 대가를 고통으로 치룸으로써 더 이상의 초자아 징벌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안식’이 담겨 있다.

이처럼 ‘고통’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혹자를 현재의 생활양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길을 도모하도록 촉발시켜 정신을 발달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통의 이런 양가적 특성을 자각하는 자일수록, 고통에 함몰된 병자가 아닌 고통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전통 불교의 대결 관점에는 고통의 심리적 가치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고통과 전적으로 단절하려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고통 관점은 매일 과도한 고통 자극들에 함몰되어 ‘안전한 삶’을 갈구하던 원시 인류와 유아기의 고통 상처에 함몰된 성격장애자들을 위로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보통의 현대인들이 불교를 진정한 깨달음의 종교로 신뢰하면서 접촉하는 데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4. 마무리 말

‘사성제’에 담긴 고통의 유형, 원인, 치료 방법을 현대인의 병증(만성 고통)을 치유하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았다. 그런데 불교의 ‘정상/비정상’ 기준은 정신분석의 ‘정상/비정상’ 기준과 다른 것 같다.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근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망 활동 자체를 최소화하고 끊으려는 수도자들의 고통 관점은, 욕망이 충족되는 기쁨의 향유와 욕망의 좌절로 인한 크고 작은 고통을 주체적으로 감당하는 게 건강한 자아 상태라 보는 정신분석의 관점과 기준ㆍ목표가 다르다.

가령 정신분석은 삶의 가치를 긍정하고 삶을 욕망하고 향유하며 타자(사회)에 기여하는 창조적 노동을 하는 보통 사람(중생)의 상태를 정신치유와 회복의 기준과 모델로 삼는다. 이에 비해 불교에선 먹고 입고 성교하고 소유하고 과시하는 등등의 욕망을 최소화하며 오직 ‘깨달음’에만 몰입하는 수도자의 삶을 정상성의 모델로 간주한다.

 불교 수도자가 선택하는 삶의 기준과 목표는 중생이 선택하는 삶의 기준ㆍ목표와 다르며, 각각에게 요구되는 고통 해소의 방법도 다르다. 이처럼 양자는 ‘삶’을 대하는 가치관ㆍ존재론이 매우 다르기에 고통의 유형, 원인, 치유술, 의미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느 관점이 보다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무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2천6백여 년전 부처님이 전한 고통 치유술을 현대인의 생활환경과 정신성을 반영해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한국 불교의 현대화에 있다면, 사성제에 대한 필자의 정신분석적 해석은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

이창재 / 연세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학교 포스트닥터 과정을 수료한 정신분석학자. 연세대 등 여러 대학교와 학술단체에서 정신분석과 철학을 강의함. 한국학술진흥재단 ‘정신분석’ 학술연구교수, 한국도서치료학회 정신분석 교육이사이며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저서로 《프로이트와의 대화》, 《정신분석과 철학》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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