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불교적 모색

1. 머리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공동체보다 자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어떻게 하면 각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시민사회의 핵심 관심사이고, 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그가 가진 권리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중세 서구의 교회공동체와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족공동체에 억눌려 왔던 역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자유주의적 배경의 시민사회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지향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유독 그러한 자유주의적 지향이 더 강한 곳이다. 양반과 평민으로 구별되던 계급사회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사회 변혁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평등주의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4·19와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는’ 대상으로 자유가 등장하여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는 역사가 바로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공간에서의 자유가 문제되고 있고 그것이 이명박 정권에 이르러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자유와 관련지어 결정적인 후퇴가 허용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국민들의 유전자 속에 ‘자유’라는 코드가 강하게 새겨져 있어서 그 억압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와 같은 정보 통제와 왜곡도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자유 자체가 아니라 자유를 탈맥락적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한국적인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이다.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외연 속에 포함되면서도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에 대해 훨씬 더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일종의 극단화된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허용될 수 있는 자유는 자신의 존재성 자체 안에서 그 범위가 결정되는 제약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려 없이 자유 자체를 독립된 요소로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근본적인 전제 조건 또는 선행 요건을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 담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한계는 바로 이러한 오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 전통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사상과 윤리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수입된 자유주의 담론에 치중하거나 그 자유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한 서구의 공동체주의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논의 모두 그런 오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최근에 서구의 유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의 역수입 형태로 거론되고 있는 유교 공동체주의론도 동일한 서구적 맥락을 지니는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담론이 지니는 이러한 한계점들에 유의하면서 우리는 맥락적 사유를 근간으로 삼아 자유에 관한 불교적 담론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설정하거나 바라보는 주된 개념 중의 하나로 작동해온 인연(因緣) 또는 연기(緣起)는 실제 우리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다. 그 논쟁의 주된 흐름이 서구의 논쟁 자체의 수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거의 대부분 유교적 담론 자체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자유는 독존(獨尊)의 개념으로 치환될 수 있다. 스스로 존귀한 존재임을 자각한 석가모니 붓다의 깨침이 불교(佛敎), 즉 붓다 가르침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 존귀함의 까닭 자체를 묻는 것이 불교 교리의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독존(獨尊)은 그러나 독존(獨存)이 아니다.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럼에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존귀하다는 명제는 불교적 자유 개념을 고찰하는 논의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 명제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존귀함을 인식하고 그 존귀함을 연기성(緣起性) 속에서 지켜나가는 일이 불교 신행(信行)의 핵심 과업임을 인정한다면 결국 불교의 자유 개념은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尊)’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작은 논의에서는 이러한 전제를 근간으로 삼아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을 개괄하고 특히 그 과정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맥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공동체주의를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공동체가 ‘연기적 독존’에 기반한 공동체여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을 담을 수 있는 개념 틀로는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를 활용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통해 더 많은 소통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독존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에 이미 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의 일상적 맥락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논쟁 맥락에서 불교의 고유한 자유와 공동체 개념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낯설기는 하지만 충분히 수용될 수 있는 여지와 불교적 사유 방식을 고유하게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 설정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에서 선택하는 일종의 방편이다.

2.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의 현재적 의미와 한계

1) 논쟁의 주체적 맥락 문제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주체성을 결여한 채 일종의 수입 담론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현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롤스(J. Rawls) 등에 대한 반론의 형식으로 제기된 공동체주의는 샌들(M. Sandel)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공동체(identity-constituting community)’나 맥킨타이어의 ‘전통 의존적인 합리성(tradition dependent rationality)’ 등으로 구체화되면서 지속적인 논쟁의 흐름을 주도했고, 그것이 우리의 철학계와 정치학계에 수입되면서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경우 정치적 맥락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왈처(M. Walzer)의 ‘공유된 이해(shared understanding)’나 테일러(C. Taylor)의 ‘소속감(sense of belonging)’ 개념도 주목받아 왔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일종의 대항 담론으로서의 공동체주의와 그 공동체의 외연을 유교의 공동체에까지 확대하여 ‘유교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으로 재구조화하는 논의,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에 대응하는 자유주의의 반론 등으로 이어지면서 전개되어 왔고, 현재는 그러한 논의 자체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상황이다. 논의의 활력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자생적인 담론이 아니라 수입 담론으로서의 유행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행(流行)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논쟁의 중간 단계에서 일정하게 한국적 맥락에 유의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유교적 담론으로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본질적인 유행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역동을 갖추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 논자의 분석이다.1)

우리 사회가 이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그러한 토대를 먼저 마련했던 서구의 관련 담론이 지닐 수 있는 유효성과 적실성 자체를 온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토대에 못지않게 불교와 유교로 대표되는 전통사상과 윤리의 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담론이 지닐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박효종의 주장과 같이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주의에 대한 담론과 관행 및 실천이 일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론화나 개념화는 미흡하거나 빈곤하기 때문에 논의 과정에서 서구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적 틀에 의존하거나 원용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만 않지만 그 ‘의존이나 원용’이 한국적 맥락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공소한 이질적인 담론으로 끝나버리고 그 결과 실천의 영역에서는 거의 힘을 지닐 수 없는 이론 자체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도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2)

그러한 한계는 이미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논의 과정을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난 바 있다. 한국과 대만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에 토대를 두고 적극적으로 제안된 유교자본주의론과 아시아적 가치론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들 국가의 경제 위기와 관료들의 부패 등을 이유로 용도 폐기되는 모습을 우리는 이미 지켜본 바 있다.

물론 그 담론이 주로 현실 정치와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그 결과 적실성을 결정짓는 요소도 변화무쌍한 현실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고, 그 저변이 깔려 있는 원론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남아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또 아시아적 가치를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담론의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수입 담론으로서의 근원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또 다른 굴레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3)

그렇다면 이 논쟁에서 유의해야 하는 한국적 맥락 또는 주체적 맥락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맥락에 대한 고려는 먼저 그 상황 자체에 대한 고려를 의미하고, 그것은 다시 그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시간과 공간의 지점을 의미한다. 우리의 상황 속에서 시간은 21세기 초반이라는 현재와 한반도의 남쪽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공간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시공간의 제한이 ‘21세기 현대 한국’ 자체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 시간적으로는 20세기와 19세기로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는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와 중국·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미국과 유럽 등 서구와 이어지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적 초점이 단순히 지정학적 초점이 아니라 사상과 역사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 논쟁의 맥락을 정의해놓고 나면 이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맥락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 담론의 수입품이어서 그 맥락을 온전히 규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에서부터 이미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로 규명할 수 있는 이념적 현상이 충분히 관찰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 자체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낙관론까지 그 논의의 스펙트럼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담론은 우리의 맥락을 고려하는 신중한 담론일 뿐이다.

물론 이 ‘신중한 담론’에 포함되어야 하는 맥락은 우리의 시공간적 특수성에 관한 최소한의 관심이고, 최소한의 관심 속에는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생멸(生滅) 차원의 특수성과 함께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진여(眞如) 차원의 보편성이 동시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2)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재검토

이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이 ‘21세기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지닐 수 있는 현재적 의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규명을 할 차례이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서 이 논쟁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정리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리의 관심의 범위 안에서 그 핵심 쟁점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재규정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우리 관심의 범위란 불교적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성격에 대해 규명하면서 그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주의는 최소한 자유주의와의 논쟁 속에서 등장한 그것에 한정할 경우에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것은 특히 롤스(J. Rawls)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면서 자유주의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핵심 관점을 임의로 규정해서 제안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공동체주의자들인 샌들(M. Sandel)과 맥킨타이어(A. MacIntyre), 테일러(P. Taylor), 왈처(M. Walzer)로 제한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4)

첫째는 인간관의 문제인데,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 또는 공동체 이전의 개인으로, 혹은 아무런 연고 없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택한다. 즉 개인들이 자신의 목적과 가치를 이미 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선(善)과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규정짓는다는 관점을 택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보편주의의 문제인데,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도덕과 정치에 관한 신념이 문화와 관계없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사회 또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단지 각 개인들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일종의 결사체(association)일 뿐이다. 이러한 결사체 안에서의 만남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기준으로 성립될 수 있을 뿐 왈처가 말하는 ‘공유된 이해(shared understang)’나 샌들이 말하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공동체(idendity-constiting community)’와는 차원이 다른 만남일 뿐이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반론에 대해서 롤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리적 기반을 포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설득력 있는 재반론을 펼치고자 했고, 그들의 주장이 갖는 공통 요소들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자유주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인데, 실제로 롤스의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무지의 베일 속에 있는 개인’이란 그의 정의 원칙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론적 가설일 뿐 현실 속의 개인을 전제로 하는 가설은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둘째로는 좀 더 적극적인 반론으로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자들이 제안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공동체의 모형에 대한 비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비판적 논리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공동체 모형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우리 시대의 공동체 가능성을 묻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이 일정한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속에서는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렇게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은 그 이후에도 각각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전개되었고, 우리 학계에서도 주로 정치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유교자본주의와 동아시아적 가치를 반영하면서 좀 더 전개되었지만 그 핵심에 있어서는 특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논쟁이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하는 보다 실천적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지어서 우리는 이 논쟁이 그 이론적 차원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에서 계속 진행 중인 실천적인 쟁점이라는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한편으로는 각 개인의 자유 영역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고, 그 징후들은 계속 확대되고 있는 독신자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주로 여성 전문직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독신주의 확산은 결혼으로 상징되는 유교 공동체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징후로 해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결혼과 가족을 중심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찾고자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는 개인을 당연히 ‘연고적 개인(situated self)’으로 설정하는 연고주의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한 개인을 그 자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그가 태어난 고향과 부모, 학교와 연관시켜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아직도 강한 사회인 현대 한국사회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학벌주의와 지역주의, 강한 교육열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동시에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가족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명절 때면 고향을 찾는 열기와 가족을 위해서는 기꺼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연결되곤 한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은 이론적인 차원보다는 실천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각 개인들 사이는 물론 한 개인의 내면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판단이 틀리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철학에 있어서 이론의 의미에 대해서 뒤셀(Enrique Dussel)은 “정치철학은 후대 사람들이 추종하게끔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하는 일이다. ……진정한 정치이론은 현재적 경험에서 나오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잘 이해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 삶 속의 경험을 더 명확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론이다.”라고 말한다.5) 이러한 뒤셀의 이론관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이론적 식민지 상황인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가 있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은 다순한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내외적 경험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에 토대한 살아 있는 이론적·실천적 쟁점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우리의 사유 과정과 방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의 실체를 규명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함께 대안을 모색해보는 일이다. 이 작업도 방대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초점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오늘 우리의 초점은 한국불교이다.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의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국 불교는 그 ‘살아 있음’의 기반 때문에 쉽게 이론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실천성과 변화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조차도 우리의 논의를 위해 또 다른 차원의 제한을 가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여기서는 주로 만해를 출발점으로 삼아 원효로 그 뿌리가 닿아가는 한국불교의 핵심 흐름을 고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만해가 식민지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와 직접 만나야 했던 첫 번째 세대라는 점과 그 논의의 뿌리가 원효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수행과 계율 전통에 닿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근거한 것이다.

3. 불교적 대안으로서의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

1) 불교의 ‘자유’와 ‘공동체’

불교철학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유와 공동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정확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는 그 배경에 자유주의를 깔고 있고, 그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한 개인의 고립성과 이기성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의 연기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 배경에 공동체주의를 깔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공동체주의는 하나의 실체로서의 공동체를 벗어난 개인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연기성과 함께 독존(獨尊)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불교의 공동체 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미 유의한 것처럼 실제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 각각의 입장을 택하고 있는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구체적인 논의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면 이상의 논의에서 제기되고 있는 불교적 사유와 그들의 사유 사이의 간극은 현저히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롤스의 자유주의는 그 스스로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인데, 이때의 ‘정치적(political)’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상당한 정도의 각 개인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성이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6)

그럼에도 우리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제기된 쟁점이 갖는 맥락적 의미를 수용한다는 입장에 선다면, 그 위험성을 자각한다는 전제 속에서 각각의 차별화된 지점에 주목하는 일은 가능하고 그 바탕 위에서 논의를 불교에서 자유와 공동체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또 불교에서 그것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개념은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의 문제로 확산시키는 일은 필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사유체계 속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혼재 양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우리 나름의 대안을 찾아가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에서 개인에 해당하는 낱말을 찾자면 자아(켥tman)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자아는 이미 불교철학에서 극복 대상으로 설정되면서 무아(無我) 개념으로 발전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서구적 의미의 고립된 개인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무아를 말하는 이면에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아가 있고, 이 자아는 그런 점에서는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규정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극복의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동체에 해당하는 말은 자유에 비해 풍부하게 존재한다. 승가공동체가 이미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왔고, 한 개인의 존재가 타자와의 연계성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연기성의 원리를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 원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물론 이 때의 공동체는 실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닌 일종의 상상 속의 공동체이거나 연기성의 구체화된 표현으로서의 개념적 공동체일 가능성이 높지만, 계율의 전통 속에서는 이미 하나의 승가공동체로 존재했던 만큼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실체를 지닌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있다.

다만 그 공동체에 속하는 과정에서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해 주었고 공동체로부터의 이탈 과정에도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 하는 스승과 도반의 존재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정치공동체에 초점을 맞춘 서구의 그것과 차별화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승가공동체의 성립은 석가모니 붓다 당시의 인도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붓다 당시의 수행자들은 전통적인 브라흐만 세력에 반대하는 수행자들로서 집단을 이루어 함께 생활하면서도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돌며 결식과 탁발에 근거한 탈속적인 집단이었고, 그들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제정된 것이 바로 계율이다.7)

목정배는 이 시기 승가공동체가 ‘동일한 사람 아래에 입문 의식을 치르고 함께 수행하는 동료’로서의 의미를 지니다가 후대에 들어가면서 ‘함께 살고 배우며 의례와 행위 규범, 수행법, 생활 방법, 나아가서는 세계관을 함께 배우고 전승해 나가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강해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8) 일종의 동료의식으로서의 승가(僧伽)가 점차 구체적인 공간적 의미로까지 확장된 역사적 과정을 비교적 명료하게 분석해낸 견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승가공동체는 한편으로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함께 하는 이념적 공동체로서의 도반(道伴)임과 동시에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로서의 속성도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규범체계인 계율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 전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공동체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로 이어지는 진리 인식의 과정을 전제로 해서 성립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안에서의 개인의 자유 또한 동일한 제약 속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명제를 추론해 내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철학적 속성에 주목하고자 노력하는 시더리츠(M. Siderits)가 무아 개념을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상을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고립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방식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9)

그는 결국 이러한 이중적인 설정을 통해서 한 개인의 존재는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가능하고 그 의존은 각 개인의 독자적이고 고립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공동체라는 개념도 그러한 의존성과 연기성에 근거해서만 성립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읽혀진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불교에서 자유와 공동체에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개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이지만, 그럼에도 자유는 연기성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개인에게 독존(獨尊)의 의미를 깨우쳐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존재 가능하고, 공동체는 그 연기성에 대한 자각을 시도하는 수행의 과정 속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종의 이념적 존재자로서의 그것을 설정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한 개인의 고유한 삶의 영역이 독자적으로 보장될 수는 없지만, 그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은 여전히 독각승(獨覺僧)과 같은 개념 속에서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 여정은 다르마를 향한 스승과 도반의 존재를 온전히 부정하면서 존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한 자유주의로서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진단이 가능해진다.

2)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의 설정 근거

이제 본격적으로 자유와 공동체를 둘러싼 논쟁에 동참하면서 그것에 부합하는 불교적 대안을 모색해 볼 순서이다. 이미 우리 근대 이후의 불교사 속에서 만해에 의해서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진 적이 있기도 하다.

그는 불교의 주의(主義)를 크게 나누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로 나눌 수 있다고 보고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불평등한 거짓된 현상에 미혹하여 해탈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에 평등한 진리를 들어 가르치셨던 것이니, 경에 ‘몸과 마음이 필경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같고 다름이 없음을 알라.’고 하셨고, 또 ‘유성(有性)·무성(無性)이 한 가지로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하셨다.

이런 말씀은 평등의 도리에 있어서 매우 깊고 넓어서 일체를 꿰뚫어 남김이 없다고 하겠다. 어찌 불평등한 처지와 판이함이 이리도 극치에 이른 것인고.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가 사실은 평등한 이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10)

물론 만해가 파악한 자유주의가 서구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전해진 그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한반도 상황 속에서 맞아야 했던 세계주의에 대해서까지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꾀하고 있다.

자유의 법칙을 논하는 말에,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한계를 삼는다.’고 한 것이 있다. 사람들이 각자 자유를 보유하여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동일하고 저 사람의 자유가 이 사람의 자유와 동일해서 각자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될 것이며, 이리하여 각자의 자유에 사소한 차이도 없으므로 평등의 이상이 이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 세계주의는 자국과 타국, 이 주(州)와 저 주, 이 인종과 저 인종을 논하지 않고 똑같이 한 집안으로 보고 형제로 여겨 서로 경쟁함이 없고 침탈함이 없어서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을 다스리는 것 같이 함을 이름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평등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인가.11)

자유주의와 세계주의에 대한 만해의 이러한 정의와 해석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로크적 단서를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이것이 불교의 평등주의에 이미 그 단초가 마련되어 있다는 입장을 택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평등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진리를 이르는 것’이라고 전제한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만해의 이러한 자유주의 해석은 자유의 동일성과 평등한 존중 가능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적극적 자유의 의미보다는 소극적 자유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도 지닌다. 각자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한다는 것이 반드시 각 개인의 자유 보장 과정에서의 충돌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해서 이 충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하고,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공정성의 원칙과 그 원칙 보장을 위한 일종의 협의체 필요성으로까지 이어지는 자유주의의 외연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만해의 주장 속에는 물론 이러한 지적을 수용하면서 대응할 만한 다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의 식민지 세력으로 상징되는 악에 대해서 불교의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대응해야 한다는 보다 실천적인 의미의 사회윤리 이론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세력이란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니, 세력이 한번 꺾이면 자유 또한 상실되어 살아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지게 마련이다. 아, 뒤집힌 보금자리 밑에서는 성한 알을 기대할 수 없고 가죽이 남아 있지 않으면 털을 어디 가서 구하랴.”는 사자후 속에 그러한 사회윤리적 인식과 대안 제시가 포함되어 있다.12)

이러한 만해의 상황 인식과 함께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적극적인 실천성은 그 출발점을 불교의 기본 윤리, 즉 자리와 이타를 동일시하는 자비의 윤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윤리의 사회윤리적 지평을 연 전형적인 근대 불교인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부처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적 상황과의 연계성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진리 인식과 실천행의 틀을 마련하고자 한 점에서 그의 노력은 우리의 불교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윤리의 모색으로 평가받을 만하다.13)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불교철학적 지평 위에서 펼쳐내는 데 성공한 또 하나의 전형으로 우리는 원효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원효의 저서 중에서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지어 주목해야 할 것들은 계율과 관련된 저서들인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와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인데, 특히 그중에서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에 유념하면서 불교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꼭 검토되어야 하는 저서는 전자이다.

이 저서에서 원효는 먼저 이 경에 ‘범망경보살계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를 설명한 후에 이 경이 담고 있는 뜻을 자신의 관점에서 주석하여 제시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중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사이의 관계를 해와 달의 관계에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곳이다.

만약 해만 있고 달이 없으면 모든 초목의 씨앗이 타버려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그렇다고 달만 있고 해가 없으면 모든 씨앗이 썩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싹을 틔울 수 없다. 계도 이와 같아서 율의(律儀)와 정법(正法)을 모두 포섭했다고 해도 중생계를 포섭하지 못하면 오직 자리행만이 있고 이타행은 없게 되는데, 이 둘이 근원이 같은 데서 나온 두 수레이기 때문에 보리의 풍부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직 중생계만을 포섭하고 율의와 정법을 포섭하지 못한다면 오직 이타행만이 있고 자리행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 범부로 돌아가 보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14)

자리와 이타의 관계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개인의 자유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고려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자유주의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난점은 그 자유의 범위 안에서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만큼 또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고, 공동체주의의 난점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이타행이 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수 없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 근거해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을 불교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자리와 이타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원효는 계율은 수행의 과정에서 가장 근원적인 스승의 하나임을 전제하면서 그 계율이 같은 근원에서 나온 두 가지 주체화된 계율인 율의(律儀)와 정법(正法), 그리고 중생계(衆生戒)로 나뉘고 이 둘을 포괄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택하고 있음을 위의 인용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15) 율의와 정법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스스로 견지하는 내면적 자리행(自利行)의 계율이고, 중생계는 다른 중생들의 구제와 깨달음을 위해 스스로 선택해서 지키는 타자적 이타행(利他行)의 계율이다. 이 둘은 원효의 사상에서 핵심 논리로 채택되고 있는 기신론적 사유의 근거하면 하나의 마음[一心]에서 비롯된 두 개의 문[二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설정 속에서 우리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 자체가 해소되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자유주의의 이타행 문제와 공동체주의의 자리행 문제가 더 이상 갈등을 빚을 공간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판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언가 미진한 느낌을 다시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미진한 느낌은 불교윤리가 근본적으로 깨달음을 향하는 최대의 윤리를 지향하는 담론인 반면에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장인 시민사회의 윤리는 각자의 이익과 권리, 자유 등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으로서의 최소의 윤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범주가 각각 다른 것인데, 만약 이런 범주의 차이를 무시하고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범주의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셈이다.16)

그러나 시민사회의 윤리가 근본적으로 최대 도덕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고 그것을 다만 각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선택과 권유의 문제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와 함께 불교윤리의 최대 도덕 문제도 결국 각 개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근본 스승으로 삼아 지키고자 한다는 전제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 둘이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21세기 한국의 정신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시민윤리의 최대 도덕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불가피하고 우리는 이미 도덕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까지의 접근이 시민사회의 최소 도덕 영역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도외시한 채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이고, 이러한 노력을 도덕교육 내에서 철학교육을 도입하고 강화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이다.17)

이제 우리의 논의를 개념적으로 구조화하는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실제로 이 작업은 이미 이상의 논의 속에서 이루어져 있는 셈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오늘의 담론 체계에 맞게 재구성하는 노력은 필수적이고, 그 노력을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18) 자리와 이타가 서로 갈등 없이 만날 수 있는 근거는 무아이기도 하고 공성(空性)이기도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개념인 나와 타자가 연기성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자가 아니라는 진리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성 자체가 각 개개인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연기를 근거로 하는 동체관계(同體關係)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가 지니는 수많은 의존성과 함께 그 스스로의 존재함 자체가 지니는 우주적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필요충분한 독존성(獨尊性)을 획득한다.

연기적 독존성에 근거해서 개인과 공동체를 바라본다면, 개인은 타자와의 연기성 속에서만 비로소 실존이 가능하고 공동체는 다름 아닌 그 연기적 관계 자체인 셈이 된다. 이 관계는 서로를 불필요하게 억압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배척할 수도 없는 열린 관계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삶의 심연은 그 연기성에 대한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고, 그 작업은 시민사회 속에서는 기본적으로 무명(無明)의 한계 안에서 존재하는 각각의 존재자들이다. 이들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보살심(菩薩心)과 보살계에 근거한 자비와 교육이 베풀어져야 하고, 우리는 그 일단을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교육에서 마련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다. 누구나 교육받아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균적으로 고등학교 졸업 정도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는 21세기 현대 한국의 시민들은 그런 점에서는 최소한 많은 가능성을 부여받고 있는 혜택 받은 개인들이다.

4. 맺으면서

20세기 중반 이후 주로 서양 정치철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 전개되어온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은 독립된 개체로 인식되어 온 시민사회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의 개인이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물음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자유주의의 자기파괴적 속성, 즉 극단적인 형태의 자유지상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에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자신의 근원적 공동체성과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현실화되면서 전개된 경향이 강하다. 그 결론은 공동체적 자유주의이거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같은 절충적 대안이거나 각각의 입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평행선 달리기일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그것은 불교와 유교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공동체와도 만나야만 하는 이중고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나 공동체주의자로 쉽게 분류되는 학자들 개개인은 그러한 분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논쟁 과정에서 이른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난무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어떤 지점에 대한 고려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우리의 논의는 그러한 쟁점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자유에 해당하는 독존(獨尊)과 공동체에 해당하는 연기적 관계(緣起的 關係)라는 두 개념을 근간으로 삼는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한 후에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이념에 근거하면 각 개인들의 삶은 독존성을 보장받으면서도 관계성을 상실하지 않는 균형 잡힌 그것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굳이 공동체라든지 개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각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그 존재성에 맞게 설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삶의 의미를 그 관계 속에서 독자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된다.

다만 이 담론이 근본적으로 시민사회의 최소 도덕 담론과는 충돌할 여지가 있고, 각 시민이 스스로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몽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대안적 담론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차원의 논의 심화와 함께 그 개인에게 계몽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 수행과 교육 방안을 함께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두터운 과제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의 논의도 그러한 과제를 확인하고 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요청을 공유하는 계기로 작동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박병기 / 서울대 교육윤리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및 박사. 불교원전전문학원 삼학원 수료. 전주교육대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 교수,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로 《윤리학과 도덕교육》 1, 2, 3 권과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등이 있음.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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