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1962년 10월 11일 전 세계의 눈과 귀는 바티칸 교황청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날 전 세계에서 온 2,540명의 주교는 성베드로 대광장을 가로질러 대성당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주교들의 얼굴은 숙연하다 못해 비장감마저 엿보였다. 침묵 속에 이어지는 그 기나긴 행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엄미사였다. 터질 것 같은 긴장은 폭발 직전 내연하는 용암과도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가.

그날 시작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까지 계속됐다. 매년 3개월씩 4년간 열렸으니, 전체회의 회기만 1년을 꼭 채웠다. 나머지 시기엔 분과위원회가 계속 열렸다. 그러나 가톨릭 회의가 그렇듯이 새어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심과 기대는 커져만 갔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라 할 수 있는 전 세계적 차원의 주교회의였으니,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 결과는 이런 관심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아니 일반적 기대 수준을 월등히 넘어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가톨릭은 이 회의를 고비로 더 이상 이전의 가톨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새로 난 자가 되었다. 과학과 화해하고, 동방교회나 개신교와 일치를 추구하고, 다른 종교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고,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고, 독재자와 착취자와 맞서 싸우고, 시대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권위와 형식에 빠져 있던 옛 가톨릭은 사라졌다.

그 결과는 가톨릭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위축 속에 가톨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2배 가까이 신도가 늘었다. 특히 제3세계에서 가톨릭의 신장세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이다. 다른 종교가 인구 증가에 비례하는 수준이었던 데 비해 가톨릭은 절대 숫자로는 3배 이상, 종교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는 5배 가까이 늘었다. 이런 성장을 이끌었던 사람이 지난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다. 그에게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그만큼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고, 이런 그의 노력은 한국 가톨릭을 의로운 종교, 포용하는 종교, 열린 종교, 위로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글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과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종교로서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아울러 2차 가톨릭 공의회는 단지 가톨릭의 쇄신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서구 문명을 이끌어왔고 또 세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기독교 안에도 심각한 충격과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지금도 변화의 격랑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변화상과 함께 그 속에서 저만치 떨어져 저 혼자 고고한 불교의 현실도 아울러 짚어 보기로 한다.

2. 김수환 추기경 현상

지난 2월은 김 추기경의 달이었다. 특정 종파의 지도자일 뿐인 그의 장례는 국민적 애도 속에 사실상 국장으로 치러졌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문 방송은 물론 인터넷 매체까지 일거수일투족 그의 장례 과정을 중계했고,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각종 프로그램과 기획기사를 통해 쏟아냈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는 현실 속에서 그의 빈자리는 그만큼 커 보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잠시나마 한국 사회는 삶의 의미, 목적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물질적인 화려함 속에서 피폐해 가는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향한 저 깊은 곳의 갈망을 깨우기도 했다. 돈과 성공 신화에 죽어 버린 사랑과 헌신, 배려와 관용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기도 했다.

그가 각막을 기증한 사실이 알려지자 장기 기증을 약속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청빈한 삶을 약속하며 기부 약속을 하는 이도 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종교인이 이처럼 영적인 고양을 불러일으킨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럼 인간 김수환의 삶, 그 무엇이 이런 현상을 일으킨 것일까. 무엇이 그를 단지 한 종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적 영적 지도자로 일떠세운 것일까.

1) 세상의 부름에 답하다

그의 삶 가운데 언론이 주목한 부분은 절묘하게 일치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종교적 차이, 이념적 차이를 막론하고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모든 매체는 김 추기경이 약자의 편에서 기도하고, 고민하고, 싸웠던 일들에 주목했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기간으로 보면 그가 추기경에 취임한 1968년부터 서울대교구 대주교에서 물러난 1998년까지였다. 특히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인간 기본권의 유린이 가장 악랄하게 이뤄졌던 박정희 전두환 시기에 집중돼 있었다.

이런 활동은 1966년 마산교구장 시절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례적으로 40대 초반에 주교가 된 그가 내건 사목의 기치는 ‘여러분과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하여’였다. 단지 신도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위한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도 겸하고 있었다. 1968년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 일어나자,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를 이끌어 냈다. 정치, 경제, 권력을 향한 첫 발언이었다. 가톨릭 주교단이 나서자 정부도 업체에 압력을 넣어 해고자를 복직시키도록 했다. 이후 정권의 주목 속에서도 비인간적 환경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활동은 계속됐다.

동일방직 여공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은 구사대로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고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그들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피신해 왔을 때 김 추기경은 권력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나라의 법은 약자를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리던 권력이었지만, 로마 교황청이란 막강한 배경을 가진 김 추기경을 어찌하지 못했다.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나고, 은폐조작 사건까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알려졌을 때 그는 미사에서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은 묻고 계십니다. 박종철은 어디에 있느냐고.” 사제단은 김 추기경의 지원이 있었기에 독재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저항세력으로 성장했다. 6월항쟁 때 정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겠다고 통보하자, 그는 명동 들머리에 서서 외쳤다. “저들을 붙잡으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야 합니다. 내 뒤에는 신부님들이 있고, 수녀님들도 있을 것이니 그들도 밟아야만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당시 그의 실천은 시대의 요청에 답하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회고하듯이 그의 가장 큰 관심은 공의회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2)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세례

공의회가 결정한 방대한 문건의 고갱이는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자’였다. 그가 주교가 되어 마산교구장에 착좌할 때 내건 ‘여러분과 또 모든 사람을 위하여’,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내건 ‘교회의 담을 허물고 세상 속에 교회를 심자’는 기치는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에서 그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 해 달라는 우리 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 그리스도가 걸어간 길을 걷고, 그가 살아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곧 십자가 형극의 길이었다.

김 추기경은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진보적 신학자 요셉 회프너 추기경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우게 된다. 이는 교회와 사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교회의 소명 등을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가 유학한 이듬해 교황청은 공의회를 소집했다. 100여 년 만의 공의회였다. 세상은 놀랐다. 소집권자인 교황 요한 23세가 밝힌 공의회 소집 목적에 또다시 놀랐다. 아조르나멘토! 이태리어 말뜻 그대로 풀이하면 오늘, 이 시대에 적응한다는 말이다. 금일화 혹은 현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요한 23세가 말하는 아조르나멘토는 단순히 겉모양만 바꾸자는 게 아니었다. 그가 요구한 건 가톨릭의 완전한 개조였다. 교리나 전례, 교회 운영, 세상과의 관계에서 기존의 것을 모두 재건축하자는 것이었다. 요체는 교회의 닫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자였다.

요한 23세의 이런 요구에 대해 바티칸의 보수적인 고위 관료들은 시큰둥했다. 그들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전의 공의회처럼 그저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한 신학적 교의적 성찰에 국한된 공의회가 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이끌어 갈 전문위원과 분과위원회 구성부터 이들의 이런 기대를 배반했다. 위원회에서 이들을 배제하고 진보적인 신학자, 민중의 고통 속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주교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전문위원에는 독일계의 개혁적 신학자들 즉 라너, 큉, 라칭거 등이 포함됐다.

 김 추기경이 가톨릭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주역인 독일의 개혁 신학의 세례를 듬뿍 받을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1964년 귀국과 함께 그는 가톨릭시보사(현재의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세계사적 변화를 가장 먼저 접하고, 이를 한국교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67년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격변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돌아왔다. 그 충격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세계주교회의 이듬해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가 된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동자, 농민, 영세민을 향한 낮은 곳으로의 행진도 이와 함께 시작된다.

신학적으로도 김 추기경은 파격적인 변신을 꾀한다. 이런 일화가 있다. 각별하게 지내던 김지하 시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추기경을 방문했다. 아이가 추기경에게 물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지요?” 그러자 그는 웃으며 “여기.”라고 답했다. 그가 가리킨 것은 하늘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김지하는 그때의 감동과 충격이 그로 하여금 지금도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을 고민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사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이 세상만사, 세상 만물을 주관한다고 믿는 종래의 신학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일이다.

3) 그로 말미암은 한국 가톨릭의 급성장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활동하던 30년 동안 가톨릭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가 대교구장에 취임하던 1968년에만 해도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30년 후인 1998년 말 본당 203개소,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늘었다. 신자 수로만 보면 무려 8배가 늘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교세는 2배 정도 더 늘었다. 불교의 정체와 개신교의 상대적 위축 속에서 가톨릭만이 비약적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표1〉 참조). 통계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1985년 186만여 명이던 것이 10년 뒤 300만 명으로, 다시 10년 뒤 5백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화두 삼아 궁구하는 원인도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 김종서 교수는 가톨릭의 성장을 조직력(일사불란한 조직력 아래 군사정권 시절 사회적 문제에 정면 대응한 일), 청렴도(인사권 및 재산권이 교황청과 교구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패 여지 적음), 결속력(관혼상제 등에서 헌신적인 지원), 개방성(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자세)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가장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며 권력 지향적 종교가 가장 개방적이고 평등한 종교로 비치게 된 것이다.

<표1> 한국 종교 현황

불교 개신교 가톨릭
1985(전수) 19.9% 16.1% 4.6%
1995(전수) 23.2% 19.6% 6.6%
1999(표집) 26.3% 18.6% 7.0%
2003(표집) 25.3% 19.8% 7.3%
2005(전수) 22.8% 18.3% 10.9%

3. 2차 바티칸 공의회

1) 경과, 가톨릭의 혁명과 요한 23세

공의회는 가톨릭의 교리, 규율, 전례와 생활 전반을 토의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해 모인 전 세계 주교들의 집회다. 일종의 최고 대의기구다. 교황이 소집하고 인준해야만 그 효력을 갖는다. 가톨릭 역사상 공의회는 21번 열렸고 바티칸에서 열린 공의회는 두 번이었다. 요한 23세가 소집한 공의회는 마지막 공의회이자 바티칸에서 두 번째로 열린 공의회였다.

1차 공의회는 326년 니케아에서 열렸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느님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결정짓기 위한 회의였다. 여기서 삼위일체론만 인정됐고, 아르메니안 교회 등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시각은 이단으로 단죄됐다. 이후 8차까지 그리스나 소아시아에서 열렸다. 1054년 동방교회(그리스 정교)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로 분열된 이후 공의회는 서방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에 의해 소집됐다. 가장 잘 알려진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 이태리 북부 트리엔트에서 열린 19번째 공의회다. 당시 서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담은 것으로 루터나 칼뱅이 주창한 성서주의 등을 이단으로 단죄해, 반종교개혁 공의회로도 알려졌다.

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69년 소집됐으나, 보불전쟁의 여파로 교황 무오설, 마리아 동정녀론만 확인하고 서둘러 종결됐다. 당시 교황청은 이태리 반도의 3분의2 정도를 교황령으로 통치했으나, 교황청 군대가 반도의 통일을 추구하던 이태리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패배한 결과 교황령이 사라졌다.

21번의 공의회 가운데 전 세계를 포괄하는 것은 2차 바티칸 공의회뿐이었다. 19차 트리엔트 공의회까지는 가톨릭 교회가 유럽에만 있었다. 당연히 참가자도 유럽인뿐이었다.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기에 미국이 더해졌고, 참가한 주교도 500여 명뿐이었다. 이에 비해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중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주교들이 참여했다. 주교 숫자만도 2,540명에 이르렀고, 준비 과정에 참여한 위원과 고문도 900여 명에 이르렀다.

공의회의 주역은 요한 23세였다. 그가 1958년 선출됐을 때 나이는 78세였다. 일생의 대부분을 교황청 대사 등 외직에 봉직했기에 교황청 정치와는 비교적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고령이었기에 교황청 주변에선 그가 과도기적 역할만 수행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취임 후 불과 3개월 만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공의회 소집을 선언한다. 전 세계의 주교를 모두 모으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은 떨떠름했으나, 교황의 명이니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나아가, 공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갈 10개 분과위원회를 그들 중심으로 구성하자는 관료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전 세계 각지의 사목 현장에서 활동하는 주교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유럽과 중남미의 진보적 신학자들을 전문위원으로 포진시켰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의 혁명을 이뤄 낼 수 있었던 것은 요한 23세의 이런 명철한 비전과 담대한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25일 공의회 소집을 지시하고, 이듬해 6월 5일 중앙예비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자신이 위원장직을 꿰찬다. 이어 공의회 개회를 앞둔 1962년 2월 교황회칙 ‘회개하기 위하여’를 반포한다. 회칙의 고갱이는 회개와 쇄신으로 집약되며 이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 정신인 ‘아조르나멘토’로 표현된다.
가톨릭은 교리와 전례 등에서 콘스탄티누스 시대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교회는 변하지 않았다. 아조르나멘토는 이런 가톨릭의 앙시앙 레짐을 극복하고, 종파주의와 반종교개혁의 편협한 정신을 참회하며,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동적 신학과 사고로부터 탈피하고, 교회의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대의 물음에 교회가 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 23세는 총회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공의회는 예전과 달리 교회의 교리를 다시 확인하거나 오류와 이단을 단죄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자비의 약으로 포용하고 우리의 진리를 드러내면서 현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공의회가 되어야 합니다.” 공의회 기간 내내 교회 안팎은 들끓었다.

종교적 다원주의가 화두로 떠올랐고, 이로 말미암은 신학적 혼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고, 교회의 민주화로 말미암은 교황과 주교 권위의 약화, 종교 자유의 허용으로 인한 종교적 무차별주의 및 신앙의 혼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용광로와도 같았던 4년간의 기나긴 회기 동안 논란은 하나 둘 정리됐다. 그리고 가톨릭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요한 23세는 갈라진 형제 교회들과의 일치를 떠나, 공산주의자와의 우호 관계도 모색했다. 사실 그건 평화를 향한 당대의 요청에 대한 답이었다. 당시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도 그의 행동에 감명을 받아 딸과 사위를 교황청에 보내 교황을 알현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는 동구권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탄압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공의회 문헌과 특징

공의회는 4개의 헌장, 9개 교령, 3개의 선언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문헌을 낳았다. 헌장은 교령이나 선언의 토대가 되며 교령은 교회 생활 전반에 관한 것이었고 선언은 주요 쟁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교회 안팎에 천명하는 것이었다.


1. 전례헌장(가톨릭의 토착화 허용)
2. 교회 및 교의 헌장(교회 밖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
헌장 3. 계시 헌장(성서와 교회의 관계 조정)
4. 사목헌장(인간 삶에 대한 지침)
1. 매스미디어 교령
2. 일치운동 교령
3. 동방교회 교령
4. 주교 사목직 교령
교령 5. 수도생활 교령
6. 사제양성 교령
7. 평신도 사도직 교령
8. 선교 교령
9. 사제직무 교령
1.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
선언 2.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타 종교의 교리와 계율 존중해야 한다)
3.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 지지)
이 방대한 문헌은 새로운 가톨릭의 설계도이자 건축 공법이다. 성서와 교회, 교회와 세상, 사제와 신도, 다른 교회와 가톨릭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이다. 이 문헌을 토대로 가톨릭은 낡은 부자재의 교체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가톨릭은 세워졌다. 그것은 이전의 가톨릭과 이렇게 달랐다.
1. 교회는 자유, 평등, 대화, 복지를 추구하여 문화적 고립에서 탈피한다.
2. 표현은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3. 사목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 교황에서 주교로, 다시 본당 신부로, 평신도로.
4.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과 사고방식을 지양한다.
5. 평신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 지위를 향상시킨다.
6. 갈라진 교회나 타 종교와 대화하여 화해, 일치, 협력을 추구한다.
7.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지지한다.
8. 신학과 성서 연구에서 역사적 원리를 도입한다.
9. 성서에 토대를 두는 전례와 기도 형태를 육성한다.
10. 지역 문화를 존중하고 교회의 모든 면에 토착화를 도입한다.
11. 세상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갖고 세계 운명에 대한 책임에 동참한다.

정상인의 눈에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어서, 새롭다고 할 게 무엇인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과거의 가톨릭이 얼마나 편협되고, 독선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고, 근본주의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았고, 표현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에도 제약을 가했으며, 다른 교파는 단죄했으며, 성서조차 무시했고, 세상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새로운 가톨릭이 이런 비상식에서 상식으로,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전환한 것에 다름 아니지만, 가톨릭의 입장에선 혁명적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3) 고백과 참회

공의회 문헌의 키워드는 뭐니 뭐니 해도 고백과 참회였다. 문헌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가톨릭은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고,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되는 만큼 교회는 잘못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공산주의 발생에 그리스도인의 부분적 책임이 있다.” “교회가 갈릴레오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다.” “과거나 현재에도 빛과 소금이 못 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있었다.”(이상 사목헌장). “16세기 교회 분열의 책임은 양측에 있다.” “분열 이후 일치 노력을 등한히 한 것은 잘못이다.”(이상 일치교령). “교회가 과거에 종교 자유를 침해한 것은 반 복음적이다.”(종교 자유의 선언).

또 다른 키워드는 변화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리도 전례도 변하고 또 변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한 것있다. 이전까지 가톨릭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톨릭은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나온 교리 표현, 예식, 규율 등이 변할 수 있느냐는 완고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러나 실은 성서 해석과 전례, 교회법, 교리 표현은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을 뿐 모두 조금씩 변해 왔다. 이에 대한 인정은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배타성에서 관계론적 인식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깊은 참회에 바탕한 사목헌장은 공의회의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가톨릭은 세상의 일로부터, 즉 정치권력이나 자본과 충돌하는 것을 최대한 회피하려 했다. 영혼의 구원만을 이야기할 뿐 현실 세계의 문제와는 담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는 새 사목헌장을 통해 세계에 대한 관심이 곧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관심임을 천명했다.

교회로 하여금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고뇌의 해결에 참여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7항에선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실의 억압에 직면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 명시했다. 4항에선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사목헌장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 하여 이단시되던 남미의 해방신학도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중남미의 신학자들은 다수 민중의 삶이 가난과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된 중남미 역사가 갖고 있는 시대적 징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또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 등 사제들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총까지 들고 독재정권과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예언자적 소명의 실천 속에서 로메로 대주교 등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희생당했다. 패권주의와 결탁한 정치 경제적 기득권자들은 이들을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해방신학이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1986년 교황청은 공의회 정신에 입각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을 반포했다. 훈령은 “자유의 신장을 저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여러 장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해방을 위한 강렬한 열망이 일어나 우리 세계를 휩쓸고 있다. 교회는 이런 열망을 자신의 열망으로 삼아야 한다.”고 천명했다.

한국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 근거하고 있던 신학적 토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개신교에선 안병무 목사 등을 중심으로 시대의 질곡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민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자유와 평화의 복음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라며 이들과 함께 억압과 착취를 해체하도록 요청하는 민중신학이 풍미하고 있었다. 민중신학도 결국은 해방신학과 함께 공의회의 세례를 받은 신학적 성찰이었다.

공의회에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학자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정교회, 콥트교회, 시리아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퀘이커 등 다른 종파 및 다른 교회의 대표들이 초청받아 옵서버로 참관했다. 이들은 비록 투표권은 갖지 못했지만 모든 자료를 공유하고, 주교들과 대화하고, 토론에 참석해 각 교파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이들의 수는 1회기 땐 50여 명이었으나 마지막 회기엔 100여 명이나 됐다. 일치교령과 종교 자유의 선언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그 뼈대는 두 가지 고백으로 구체화된다. “16세기 교회 분열의 책임은 양측에 있다.” “분열 이후 일치 노력을 등한히 한 것은 잘못이다.”

참관한 대표들이 속한 교회들은 과거 가톨릭이 이단으로 단죄했던 대상들이었다. 이들은 종교재판에 넘겨져 투옥되거나 화형에 처해지는 등 핍박과 형벌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가톨릭은 교리나 전례 따위의 작은 차이마저 포용하지 못했던 권위주의적 폐쇄 집단이었다.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 교령도 채택해 평신도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꿨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부각되었다. 평신도 신학도 정착돼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공동체로 전환하도록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공의회에는 남성 29명과 여성 3명의 평신도가 옵서버로 참여해 의견을 개진했다. 여성에 대한 인식 또한 바꿨다. 미사를 돕는 복사에 소녀도 포함시켰다.

“교회가 과거에 종교 자유를 침해한 것은 반복음적이다.” 사실 공의회 문헌 가운데 종교 자유의 선언만큼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이 문제는 그 논란의 소지 때문에 마지막 회기 막바지까지 논의가 보류되기도 했다.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선언’ 역시 같은 맥락의 반성과 다짐을 담은 것이었다.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배격한다.”

사실 세계사를 통해서 로마 가톨릭만큼 하느님의 이름으로 야만을 저지른 집단은 없었다.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에 대해 저지른 학살과 약탈, 방화와 파괴는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 가톨릭은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동유럽에선 가톨릭계 민병대가 정교도에 대해 인종청소를 하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바냐루카 학살은 대표적이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시기에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가톨릭이 이슬람과 유대교도 그리고 정교도에게 저지른 만행,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납치와 인신매매와 학살, 남미에서 저지른 약탈과 인종청소 등 그 악행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다. 악행이 컸던 만큼 가톨릭은 이 역사 속의 상처를 건드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은 한 분이며, 그분만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그들의 으뜸 되는 교리와도 충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리에 매여 있는 한 가톨릭은 이웃 종교와 갈등하고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요한 23세의 결단은 담대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지만, 교황청 수뇌진의 입장에선 과격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 선언은 이렇게 천명한다. “인류 사이에 평화적 관계와 화합이 확립되고 강화되려면, 지구 위 어디서나 종교의 자유가 효과적인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사회생활에서 종교생활을 자유로이 하는 인간 최고의 의무와 권리가 준수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공의회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와 만나 화해했고, 이슬람 지도자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가톨릭이 공격적이고 자폐적인 집단에서 졸지에 열린 종교, 화해와 평화의 종교로 이미지 변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4. 세계 종교의 지형과 흐름

1) 다원주의의 대두와 확산

지난 1997년 캐나다 최대 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 목사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핍스의 발언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다.

기자 :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믿으십니까?

핍스 :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기자 :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고 믿습니까?

핍스 : 아니오. 저는 그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는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기자 :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까?

핍스 :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의 일부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예수님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한 아이의 물음에 “여기.”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 것과 다르지 않다.

핍스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연합교회는 실행위원회를 소집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총회장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선물, 그가 임기 동안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공헌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우리의 강점은 교회가 허용하는 다양성과 자유다.”

사실 연합교회는 1940년대 이미 새로운 신조를 택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새 시대의 사상에 맞게,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여 그 신조를 새롭게 천명할 의무가 있다고 천명했던 터였다. 예수님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몸소 보이신, 고통당하는 이웃과 세계를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핍스의 생각에 교단은 전폭적으로 동의했던 것이다.

가톨릭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야 현대적 모습을 찾기 시작했지만, 개신교 내부에서는 이미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미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고 있었다. 개교회 중심주의 탓에 통 합된 조직력을 갖지 못하고 고립 분산적으로 논의가 진행됐을 뿐이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주도권을 잡았던 미국에 여전히 강고했던 복음주의는 이런 논의를 덮어 버렸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다른 교파나 다른 종교를 수용하지 않고 배격했다. 다원주의적 흐름을 현대 종교의 지배적 경향으로 정착시킨 공로가 가톨릭에 돌아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가톨릭은 전 세계, 특히 제3세계에서 교세 신장을 주도할 수 있었다(〈표2〉 참조).

<표2>세계종교통계 연례표 중 종교별 인구 (단위 백만명)

1900 1970 2000 2002
세계 인구 1,600 3,600 6,000 6,200
무슬림 199 551 1,188 1,239
기독교 553 1,296 1,989 2,051
(가톨릭) (266) (616) (1,057) (1,084)
힌두교 203 462 811 836
불교 127 233 354 368

(참고/ 데이비드 바렛과 토드 존슨이 매년 실시하는 세계기독교 관련 조사에서 발췌. 기독교에
는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회, 성공회, 독립교회, 유사 기독교가 포함됨.)

2) 종교적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양한 종교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다. 역사와 전통에 따라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는 서로 통하거나 같다는 게 바탕을 이룬다. 다원주의는 종교와 진리의 관계를 보통 산봉우리와 그리로 접근하는 여러 갈래의 길에 비교한다. 길은 여럿이지만, 결국 한 봉우리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를 좀 더 세분하면 다음 세 가지로 나뉜다. 봉우리는 하나이지만 결국 그 봉우리가 자기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포괄적 다원주의, 봉우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길을 초월하는 봉우리는 하나라는 일원적 다원주의, 길만이 아니라 봉우리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여러 종교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다원적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보통 다원주의라고 하면, 두 번째의 경우를 말한다. 포괄적 다원주의는 가톨릭이 현재 공식적으로 취하고 있는 태도, 즉 다른 종교에도 진리는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리로 수렴된다는 태도와 근접해 있다.

다원주의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신조를 지키는 유일신교의 한계와 역사적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에서 나온 개념이다. 초월적인 곳에서 전지전능한 권능을 행사하는 유일무이의 인격신은 역사적 혹은 과학적 도전을 당할 수 없었다. 바티칸 공의회가 갈릴레 오 사건에 대해 수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참회한 것은 그 좋은 실례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는 창조론이나 처녀탄생설 육체부활설은 물론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를 놓고 고민한다.

초월적 절대자에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얻고 복락을 누린다는 유일신교와는 시작부터가 다른 불교로서는 다원주의냐 배타주의냐를 따지는 게 오히려 낯설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이 있고, 삶과 실천 속에서 스스로 이를 깨닫고 완성해 간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미 그 안에 다원주의 이상의 포용력을 갖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정년을 앞둔 강연에서, 앞으로 미래 세대는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 무엇을 꼽을까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불교가 서양에 들어와 기독교를 대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서양 기독교가 불교를 만난 일이라고 옮기지만, 정확하게는 대체였다. 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변화만을 보면 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다원주의적 신관의 확산, 영성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 따위가 그렇다.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는 절대자가 자연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한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러나 미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세계가 똑같이 존중을 받는 기반 위에 성립될 것이다.

이런 선각적 깨달음을 미국의 목사 글로즈토드랜크는 이렇게 구체화했다. 그는 저서 《기독교의 전환》(1996년간)에서 기독교는 지금 다시 내적으로 종교개혁을 치르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전망한다.(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서 재인용)

1.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모든 종교를 진리와 구원의 길로 함께 가는 도반으로 생각하고 함께 대화하고 서로 배우며, 협력해야 하는 시대다.

2. 상하 구조에서 평등 구조로.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교회의 계급 구조가 수평 구조로 변하고 있다. 인종차별, 남녀차별, 빈부차별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저 위의 하나님에서, 내 안의 하나님으로. 하늘 어딘가에 있는 백인 하나님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그리고 이 세상에 임재하는 하나님이라는 전환이 일어난다.

4.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교리나 신조를 맹목적으로 진리라고 믿던 피동적 태도 대신, 각자가 영적 통찰과 혜안을 통해 각자의 실존적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찾아 나서고 체험하려는 태도가 커진다.

5. 죄에 대한 강조에서 사랑의 강조로. 원죄를 주제로 한 음산한 교향곡에서 사랑의 존재라는 기쁨의 교향곡으로 재편된다.

6. 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영육을 분리하고 육체를 죄악시하던 것에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본다.

7.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강자의 편에서 진실과 정의와 사랑의 원칙에 따라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입장으로 전환하도록 요구받는다.

8.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자연과 생명을 치료하는 일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9. 분열에서 연합으로. 분열과 다툼을 지양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연대해야 한다.

10.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동정녀에게 나시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자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예수님에 관한 교리의 믿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진리와 평화를 이 땅에 전파하고 실현하기 위해 살다 죽임을 당한 예수의 믿음을 본받고 실천하는 종교로 거듭나기를 요구받는다.

3) 근본주의의 도전

다원주의의 확산에 대해 가장 크게 위협을 느낀 것은 배타주의다. 배타주의 교파는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며,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고 기독교만이 참 종교이며 자기네 신학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다. 이들에게는 이단과 정통을 가리는 몇 가지 근본적 믿음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일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성경 무오류로부터,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생전의 육체 그대로 부활했으며, 그가 이룬 이적은 모두 사실이라는 것과 함께 인간에겐 아담과 이브로부터 내려온 원죄가 있고,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왔으며, 언젠가 다시 재림해 심판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의 근본으로 믿고 따른다고 하여 이들에게는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이 붙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믿음 위에서 아직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위계를 중시하고, 진화론을 배척하고 창조론을 견지하며, 성적 다양성을 거부한다. 세속 정치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런 시대착오적 정서 때문에 세계적으로 그 위세가 위축되고 있다. 주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나 활개를 친다. 서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생활 및 교육 수준이 높은 동부 쪽엔 별로 없다. 근본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근본주의 교인은 전체 기독교인의 20~40%에 불과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도 90~95%는 근본주의 경향의 복음주의 계열이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지원하는 공화당 매케인 후보를 당선시켜 달라며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이들은 지금도 북한을 망하게 해 달라고, 이슬람 등 사탄의 무리를 이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애걸복걸을 한다. 서남아시아에서 지진해일로 30만여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대형교회 목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집단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오강남 교수는 이런 현상을, 어렸을 때 제 아빠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철수가 성장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바보, 이단, 사탄이라고 단죄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정신적 성장이 정지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도 일찍부터 종교적 다원주의를 주창했던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다. 유영모, 함석헌 선생은 물론 변선환 전 감리교신학대 학장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는 1960년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대학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교단에서 파문당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 지향적이다. 기독교 근본주의건 이슬람 근본주의건 힌두교 근본주의건 신정일체를 추구한다. 태생부터 신정일체인 이슬람 국가의 경우 천막은 이슬람, 기둥은 통치자, 밧줄은 국민에 비유된다. 종교와 정치는 한 몸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슬람 국가의 세속화, 예컨대 터키처럼 세속정치와 종교가 구분돼 있는 경우를 가장 혐오한다.

터키는 이슬람이 사실상 국교이지만, 정치에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다른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철저하게 신정일체를 추구한다. 탈레반은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정권을 세속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이었다.

기독교 근본주의도 다르지 않다. 정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확고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신보수주의 부시 정권(네오콘)을 탄생시켰다. 부시 집권 기간 동안 네오콘은 외교, 국방 정책은 물론 국내 교육 정책에까지 신의 계시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교적으로는 악의 축과의 군사적 대결, 교육적으로는 교육과정에 창조론을 반영하는 따위의 행태가 그것이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와 결합하면 세상에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파스칼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에 차 있을 때 가장 처절하게 만행을 저지른다.” 사실 중세 가톨릭의 만행, 남미에서 가톨릭 정권의 인디오 학살, 북미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원주민 학살, 인도나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살육전, 발칸반도에서 정교도와 가톨릭의 살육전 등이 그것이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권은 종교적 근본주의를 이용하고, 종교는 정권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극우 집단처럼 맹목적 애국주의, 도덕적 순결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근육질의 패권주의 등을 신봉한다. 파시즘과 상통한다.

5. 불교의 경우

글로즈토드랜크 목사가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실 불교에겐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불교는 한 번도 다른 종교를 거부한 적이 없다. 다른 종교의 신조와 신앙을 존중했다. 비록 남녀유별의 전통은 있지만, 부처님은 카스트를 부정했고,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했다.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했으며, 사람을 겁주는 원죄는 언급도 안 했으며, 하다못해 풀뿌리나 돌까지도 귀히 여기도록 했다.

부처님은 제자에게 당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길을 지시했을 뿐이다. 육체를 위험시하지 않았지만, 권력의 위험성은 강조했다. 이 모든 미래 지향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음에도 불교는 전근대의 유물, 혹은 낡은 종교로 비춰진다. 왜 그럴까.

불교는 관계론적 세계관을 가르치고, 무상의 이치를 전파한다. 그러나 불교만큼 세상과 관계 맺고 대화하고 세상의 운명에 동참하는 일에 무관심한 종교는 없었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 전례나 교리, 구성원 간의 관계 등을 변화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대가 무엇을 요청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중생이 아우성치는 것은 못 들은 척 외면했다. 때문에 지배자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즐겨 이용됐고, 불교 또한 은근히 이를 즐겼다.

변화와 발전은 외부의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시대를 이끌어 간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비전에 합당한 전례와 교리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불교는 오래된 과거로만 남아 있다.

세상에 순종은 없다. 자연계의 종은 물론 문화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형태는 융합을 통해 이루어 낸 것들이다. 종교도 그렇다. 유대교도 바벨론 포로 시절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천사, 부활, 최후심판, 낙원 등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도 이런 유대교 사상에 그리스의 밀교와 철학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났다. 선불교도 인도불교와 중국 도가사상이 결합된 것이며 한국불교 역시 산신사상 등 토착신앙과 결합했다.

비교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는 이렇게 말했다.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 대다수 종교는 인간의 궁극 관심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잡아 가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각 종교는 서로 대화하고 교류함으로써 시대의 부름에 더 적절한 답을 줄 수 있다.

독일의 종교사학자 프리드리히 하일러(Friedrich Heiler)는 아쇼카 왕을 두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실제 그처럼 종교적 관용과 진리로써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세계사에 없었다. 정복왕이었던 그는 불교로 귀의한 뒤 가장 먼저 나라 안의 모든 종교는 서로 협력하고 화목하라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잘 지켜지도록 전국 곳곳의 바위, 동굴, 돌기둥에 새겨 모든 사람이 읽고 실천하도록 했다. 아쇼카 석주로 불리는 돌기둥 가운데 가장 유명한 12번째 석주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과인은 모든 종교인을, 그들이 수도인이든 평신도이든 한결같이 존경한다. 과인의 어떤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인이 모든 종교의 기본 교리를 옹호한다는 사실이리라. ……자신의 종교는 자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하리. 이렇게 삼가면 자신의 종교도 존경을 받고, 남의 종교도 돕게 되리.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하하는 것은,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 조화가 최선이라.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하도록 할지라.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고 진리도 더욱 빛나리.

(오강남의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103~105쪽에서 옮김)

불교가 다른 종교를 억압하거나 배척하고, 비난한 일은 사실상 없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투기 싫어 제가 태어난 인도 대륙에서 떠나, 스리랑카로 인도차이나 반도로 혹은 티베트로 이주했다. 문제는 무관심이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나 세상에 대해 무관심했다.

대화하려 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진리를 최고로 생각한 탓일까. 다른 종교의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에선 오로지 수도에만 열중하고, 다른 한편에선 경제적 목적으로 최소한도로 세상과 접촉했다. 호의적인 권력자를 만나면 권력의 옆자리에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또 생존을 위해선 토착신앙과 다양하게 결합했다.

 그 결과 절집은 온갖 신들의 쇼윈도가 됐으며, 미신에 가까운 종교, 돈벌이도 못하면서 돈벌이에 바쁜 종교, 권력에 약하거나 또는 권력에 이용만 당하는 종교로 비판받았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초기불교엔 여러 차례의 결집이 있었다. 부처님 말씀을 정리하고, 그 뜻을 바로 세웠으며, 의례를 여법하게 조정했다.

한국불교도 이런 노력이 있었다. 시대가 불화하고, 중생이 고통받고, 불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마다 다양한 결사가 출현했다. 결사의 목표는 쇄신이었다. 권력이나 돈과의 관계를 쇄신하고, 고통받는 이들과의 관계를 쇄신하고, 시대의 요청을 수렴하는 체제를 쇄신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은 가톨릭보다 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깨인 스승들을 중심으로 고립 분산적으로 시도됐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각성은 있었으되 불교의 총체적인 쇄신에는 이르지 못했다. 봉암사 결사도 그랬고, 수선사 백련결사도 그랬다. 억압의 시대에 등장했던 미륵신앙과 후천개벽도 변방의 아우성이었을 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했던 아조르나멘토의 핵심은 시대의 요청, 시대의 부름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사불란한 힘과 의지로 따르는 것이었다. 불교의 아조르나멘토, 즉 쇄신과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

 

곽병찬 /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졸. <한겨레> 정치·사회·문화부장과 편집부국장, <한겨레21> 편집장 등 역임. 현재 <한겨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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