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인류는 지금 전환기에 서 있다.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라는 말로 지칭되는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가 하나가 된 지구촌 시대의 최대의 과제는 ‘더불어 삶’이다.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다른 생명체와도 서로 살리며 더불어 살아야 하고 생명이 없다고 간주되고 있는 무생물하고도 조화와 균형 속에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이렇듯 지구 위의 모든 존재하는 것이 서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과제를 슬기롭게 떠맡아가야 할 21세기의 최대의 화두가 ‘생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생태 문제’이다. 인간이 또 다른 천년을 맞이할 수 있으려면 자연에 대한 관계 맺음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고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사명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인식론적 사유 틀이 ‘존재(있음)에서 생명(살아 있음)’에로 전환되어야 한다. 동서양의 대화를 통해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면서 인류의 문제를 함께 풀어 나가려고 시도해야 한다.

20세기 말부터 철학에서의 핵심적인 논의도 ‘생태 문제’ 내지는 ‘생명 문제’를 맴돌고 있다. 21세기 제일 철학은 당연히 ‘생태철학’ 또는 ‘생명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이다. ‘생명’에 대한 논의에 한국의 사상가들이 세계적인 사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 배경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전통적인 ‘살림살이’의 생활방식과 사유 자세를 현대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 내는 대안적 사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서양 사상가들로부터 생명사상을 배워야 할 처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땅에 사는 철학인들이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생태학, 새로운 인간학으로 ‘생명학’을 개발해서 세계 철학에 기여할 수 있는 과제와 책무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간직해 온 동양사상의 바탕 위에서 현대의 서양사상을 비판적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2. 지구 생명 시대의 생명 문화 공동체

1) 지구 생명 시대

140억 년 우주의 역사는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궤도에 들어섰다. 우주는 더 이상 죽은 물질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생명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물질의 법칙이 지배했다. 그러나 생명체가 등장한 이상 이제 물질의 법칙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생명체의 등장과 번식, 확산, 변형 등을 설명할 새로운 생명의 법칙이 필요하다. 우주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때 오히려 우리는 “물질은 처음부터 ‘복잡하게 됨’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 법칙에 나름대로 복종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1)

생명체 역시 물질처럼 동일한 물리화학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생명은 물질 속에 비결정성을 삽입”하여 물질의 운동[흐름]과는 다른 운동을 펼친다.2) 물질에 생명이 삽입되어 생명체가 자신의 주변 환경을 물질적 공간에서 삶의 생태학적 둥지로 만들면서 지구는 단순한 혹성이 아니라 지구 생명체가 된다. 35억 년이라는 생명의 역사가 흐른 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등장했다.

“물질이 내려온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생명의 노력”3)은 인간이 등장하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던 물질 또는 우주의 ‘안’이 인간의 ‘의식’, ‘정신’으로 인해 밝아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뛰어남은 그가 가지고 있는 반성 행위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반성하는 존재로서 나타났다는 사실은 모든 생명 요소가 처음으로 ‘중심’에 모인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다. 또한 우주의 처음부터 있었던 마음[정신, 의식, 얼]이 끝까지 발전한 결과로서의 ‘참 얼[의식]’의 발생인 것이다. 즉 참 얼[의식]의 발생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4)

오로지 반성하는 능력과 그를 통해 지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록 해부학적으로 유인원과 별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샤르댕에 의하면 반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찾아볼 수 있는 얼[의식]의 농축과 그에 상응하는 전체적이면서도 균형이 있는 진화는 우주의 본질이 사람 안에 온전히 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 됨(Hominisa-tion)의 의미도 바로 이 측면에서 보여진다. 즉 인류 속에 들어 있는 동물적인 힘을 점점 얼[의식]로 다스려 참된 인류문명을 이룩해 나가는 것이 사람 됨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거대한 승화의 과정이다.5) 다시 말해서 지구를 통째로 바꾸는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모든 가치 있는 것, 활발한 것, 발전의 힘이 있는 것은 모두 ‘참 얼누리[의식계]’6) 에 모여 있다.

더 이상 진화는 해부학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개인과 집단의 얼[의식]의 자유 속으로 영역이 옮겨진 것이다. 문명의 발생 그리고 발전, 이것이 영과 육의 큰 물줄기들이 서로 만나고 부딪쳐 차츰 조화를 이루는, 참 얼누리[의식계]가 넓게 펼쳐지는 모습이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여러 곳에서 이러한 얼[의식]의 농축을 통한 문명들이 생겨났다.

윌슨은 인류와 지구 위 모든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생물권이 보호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지구 위의 생물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디서나 세 가지 수준으로 조직된다고 설명한다.

최상위에는 다우림, 산호초, 호수와 같은 생태계가 있다. 다음에는 조류, 호랑나비, 곰치와 사람을 아우르는, 생태계 내의 생물로 구성되는 종이 있다. 밑바닥에는 각 종을 구성하는 개체의 유전을 결정하는 다양한 유전자들이 있다.7)

각 종은 군집(community)에 독특한 방식으로 소속되어 다양하게 먹고 먹히며, 다른 종과 경쟁하고 협력하며 살아간다. 각 종은 또한 토양, 물, 공기를 변화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군집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군집과 그것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 사이에는 물질과 에너지의 끊임없는 유출과 유입이 이뤄지며 영속적인 생태계 순환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생존은 이 순환에 달려 있다. 생태학자는 이러한 에너지와 물질의 연결망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생태계는 또한 생물, 물질, 에너지의 역동적인 연결망으로 다른 생태계와 연결되어 있다. 제임스 러브록(James E. Lovelock)은 생태계가 일종의 초생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구 전체 생물권에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태양계의 행성 중에서 유일하게 지구의 물리적인 환경은 생물이 없을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고 있다. 그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가 바로 생물이다.

윌슨은 첨단 과학 기술이[기술 만능주의자들이] 펼쳐 보이는 21세기의 낙관적인 전망에서 빠진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명이다. 각 종은 서식처 내의 독특한 물리 화학적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각 종은 다른 종들과 서로 어울려 살도록 진화되어 왔는데 생물학자들은 이제야 그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8)

지구 자체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고 그 삶의 원칙과 방식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구 생명에서 보고 배워야 할 새로운 인식의 틀을 ‘생명의 패러다임’이라고 이름하자.

2) 생명의 패러다임

우리는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패러다임이 지구촌 시대, 아니 지구 생명의 시대에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생명의 어떤 독특한 특징들이 주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제레미 리프킨은 20세기가 되자 환원주의적이고 기계론적 사고방식은 자연의 상호 연결성을 파악하기에는 그 개념이 너무 좁고 제한되었다고 지적한다. 과학자들은 사회나 자연을 이해하려면 각 구성 요소의 특성만이 아니라 현상들 간의 수많은 관계까지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9)

사회과학자들은 주위 세계와의 관계를 감안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했다.
1911년 러시아의 과학자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Vladimir Vernadsky)는 생태학적 관계를 지구 전체로 확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생물권(biosphere)’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그것을 “우주의 복사 에너지를 전기, 화학, 기계, 열 등의 효율적인 지구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변환자들이 존재하는 지구의 표면”으로 정의했다.10)

그는 지구의 화학물질 순환은 생명체의 양과 질에 영향을 받으며, 또 생명체는 지구를 통해 순환되는 화학물질의 양과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생물권은 지구 표면과 대기권을 포함해, 어떤 형태의 생명체라도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복합적인 생명 유지 시스템이라고 정의된다.

지구화학적 물질과 생명체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피드백은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작용함으로써 지구의 기후와 환경을 유지하고 생명체를 보호한다. 그렇다면 지구 자체가 생명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자체적 조절 기능을 통해 생명체가 유지될 수 있는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11)

지구가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작용한다면 지구의 생화학을 혼란시키는 인간의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생물권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화석 연료 에너지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구의 기후 변화를 가져와 모든 생명체를 유지해 주는 생물권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인간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다.

리프킨은 지금 우리 세계에는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신과학 운동을 ‘제2의 계몽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학의 원칙과 가정은 네트워크적 사고방식과 잘 어울린다. 기존 과학의 특성이 분리, 활용, 해체, 단순화였다면, 신과학의 특성은 참여, 보충, 통합, 전체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 과학이 자연을 물체로 보았다면, 신과학은 자연을 관계로 파악한다. 기존 과학이 자연을 생산적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며, 신과학은 자연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기존의 과학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추구했다면, 신과학은 자연과의 연대를 추구한다. 옛 과학이 자연에서 독립하는 자율성을 중시했다면,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다시 참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12)

리프킨은 불행하게도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사고 대부분이 해묵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얽매여 있어 지구촌 시대, 지구 생명 시대에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3) 생명문화 공동체의 필요성

지구촌 시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핵심 단어는 ‘문화’다. 사람들은 21세기를 한마디로 ‘문화의 세기’라고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구촌 시대에 인류를 하나로 평화롭게 묶을 수 있는 끈은 국경을 허물고 삶의 곳곳에 파고든 냉혹한 시장경제의 논리인 무한 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정을 내세워 통제만을 일삼고 가진 자, 기득권자의 권리 보호에만 집착하는 국가의 통치 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기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을 다양하게 표출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서로서로를 인정하고 살려 나가는 생명의 문화다.

제레미 리프킨은 지구촌 시대 ‘살아 있는 공동체’는 시장과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의 세 축으로 운영되는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공동체에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고 지구 위 모든 생명체와 생명의 연대를 형성해 지구 생명의 보존에 신명을 바칠 수 있는 주체가 시민사회라고 본다.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정치적 변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 과정에서 시민사회 부문의 참여가 증가했다는 점이다.13)

그에 의하면 시민사회는 시장과 정부 사이에 위치한 영역이다. 시민사회는 개인의 문화생활과 그가 속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활동을 아우른다. 거기에는 종교, 예술, 교육, 건강, 스포츠, 공공 오락, 연예, 사회 및 환경 운동, 지역사회 참여, 그리고 공동체의 유대감과 사회적 결속을 형성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시민사회는 문화를 가능한 모든 형태로 재생산하기 위한 만남의 장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고 행동 규범을 확립하기 위해 ‘심오한 놀이’에 참여하는 장소다.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내재적 가치다. 시민사회는 문화의 표현을 위한 포럼이며 가장 원초적인 영역이다.14)

리프킨은 문화가 시장과 정부보다 앞서며 그것들을 가능케 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은 언어다.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 언어를 이용해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설이나 신화로 만들며 자신들의 기원을 숭배하고 집단 운명을 계획한다.

그런 다음 행동 규범을 확립하고, 우리가 ‘사회자본’이라고 부르는 신뢰를 구축하며, 사회적 결속을 다진다. 다시 말해 공동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심오한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충분한 결속과 유대감이 생기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시장을 세우고, 거래를 하며, 그와 관련된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정부를 만든다.15)

사회에 신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문화 의식에 의해 결정되었다. 문화 의식이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각 집단의 사고방식에 적합한 새로운 발견이 나온다. 물론 문화 의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발견과 발명으로 공간적, 시간적 의식이 계속 수정되며, 경제와 정치 시스템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 패러다임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역사 전체를 볼 때 인간의 현실 경험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며, 그 이야기가 모든 진화적 변화를 위한 기본적인 문화 DNA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16)

리프킨은 문화는 과거나 현재나 시장과 정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시장과 정부가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장과 정부는 부차적인 존재다. 시장과 정부는 문화가 만들며 문화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구촌 시대의 다양한 많은 시민사회 운동은 국경을 초월한다. 그들의 비전은 인류 보편적이며 그들의 목표는 지구적이다. 그들은 인간 의식 자체의 변화를 추구한다. 모든 개인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 집단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아이디어다.17)

리프킨은 새로운 초국가적 권익 운동 단체들이 궁극적으로 보편적 행동 규범을 확립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것은 기술적이거나 전문적인 성격이 아니라 인간 행동 자체를 관장하는 규범이다. 그들의 정통성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저변 깊숙한 곳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합리적 계산보다 인간적 공감에 호소한다. 그들은 실리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지향한다. 그들의 목표는 물질적이라기보다 이상적이다. 그들은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에게는 물질적 진보만큼이나 개인적 변신이 발전의 기준이다.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모범을 리프킨은 유럽연합에서 보고 있다. 유럽 공동체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하나의 지붕 아래 보편적 인권과 편협한 문화의 권리 둘 다를 수용하려 한다. 그런데 다문화주의와 인권을 동시에 수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양한 인권 운동들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한다. 그들의 민족문화가 아니라 개인의 인권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은 영토가 아니라 ‘생물권’ 전체다.18)

리프킨은 인류의 미완성 임무가 지구를 구성하는 더 큰 생명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책임 의식’의 확립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인류와 동식물, 그리고 생물권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개인적으로 느껴져야 하고 집단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윤리와 도덕은 모두가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는 세계에서만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19)

3. 인간은 생명의 관리인, ‘살림지기’

리프킨은 서양 사람들이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 더욱 자율적이 됨으로써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비극적인 환상이었다. 이제 죽음 본능, 즉 자연을 정복하려는 공격적인 욕구가 기후 변화, 핵 확산, 빈곤 확대, 사회 혼란 같은 세계적인 위험의 형태로 돌아와 우리에게 재앙을 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더욱 안전하도록 상황을 제어하려 했지만 결국은 이전보다 더욱 취약해지고 말았다. 인류는 이제 스스로 자초한 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죽음 본능이 우리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20)

리프킨은 이제 인류가 인간 의식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본다. 이 단계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써 자연과 재결합하는 단계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유럽의 지식인, 과학자, 미래학자들의 이상을 높이 산다. 그들은 지구를 존중되고 보호될 가치가 있는 생명체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의식의 제3단계는 인류의 연계성을 지상권(geosphere)에서 생물권(biosphere)으로 전환시킨다.

지정학(geopolitics)은 언제나 환경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거대한 전장으로 간주했다. 그 전장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자원을 확보하는 싸움을 벌인다. 반면 생물권 정치(biosphere politics)는 지구가 상호의존 관계로 구성된,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우리가 속한 더 큰 공동체를 잘 관리함으로써 생존하고 번성한다는 개념에 기초한다. 자아에서 다른 사람으로 관계를 확대하고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만드는 다양한 관계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21)

리프킨은 이러한 의식이 유아나 원시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원초적인 참여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참여가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로써 자연과 재결합하는 것이 인간 의식의 제3단계가 그 이전의 단계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는 케네스 J. 거겐(Kenneth J. Gergen)의 말을 인용하며 자아가 관련성의 무대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야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서로 연결된 세계에서는 자신이 속한 관계의 틀에서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서양 역사의 지난 수백 년 동안 개인의 자아가 차지했던 중심부를 이제 네트워크 관계가 차지하게 되었다.”22)

그러면서 리프킨은 서양인과 동양인의 의식이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지만 이제는 서양인의 의식이 동양인의 의식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제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보는 시각을 버리고 자연의 관리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3) 유럽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는 구절을 더 이상 예전처럼 낱말 그대로 인간이 주인이 되어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배’와 ‘다스림’의 의미가 ‘보호 및 관리’를 의미하는 쪽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는 관리인의 구실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창조물인 자연을 이용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지구 생명 시대 인류는 지구 보존을 위한 윤리도덕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보존 윤리는 미래 세대에게 비인간적 세계의 최상의 부분을 전해 주겠다는 목표를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애착을 갖는다는 것이며, 세계를 잘 안다는 것은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에드워드 윌슨24)은 생명체는 그 자체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생명체 각각의 종은 무한한 지식과 심미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들은 각각 살아 있는 도서관이다. 세포의 유전체는 무진장한 정보를 담고 있다. 벌레나 잡초와 같이 하찮게 생각되는 생물들도 스스로를 창조해 왔다. 이것은 이름과, 100만 년의 역사와, 세계에서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유전체는 각 생물이 독특한 생태적 지위를 갖도록 적응시켰다. 유전체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를 통하여 드러나는 윤리적인 가치는 우리를 둘러싼 생물들이 아주 오래되었고, 아주 복잡하며, 부주의하게 무시되기에는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하다는 것이다.25)

그 다음 그는 생명의 유전적 통일성이라는 또 다른 윤리적 가치가 잠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모든 생물은 동일한 원시 조상 생물에서 유래되었다. 유전자 암호를 읽어 보면 살아 있는 모든 종의 공통 조상은 가장 단순한 해부학적 구조와 분자 조성을 가진 단세포 미생물인 오늘날의 세균이나 고세균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모든 생물들은 지구에 35억 년 전에 나타났던 단일 조상을 가지기 때문에 기본적인 분자 형질을 공유하고 있다.26)

윌슨은 이것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 행동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것 같은 관리인 정신이다. 모든 생물은 단일한 공통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인류가 태어났을 때 생물군 전체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나머지 생명이 몸이라면 인간은 마음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자연계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피조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살아 있는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다.27)

윌슨은 유전적인 통일성, 친족 관계, 그리고 심층 역사에 대한 감각이 생물계와 우리를 묶어 주는 가치들이라고 말한다. 이것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 종을 위한 생존의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불멸성에 대한 투자인 셈이다. 윌슨은 사람이 아닌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포용력과 경향은 사람의 본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을 그는 생명 사랑(biophilia, 생명 애호, 생명 애착)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생명과 생명을 닮은 형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는, 어떤 경우에는 이들과 감정적으로 교제하려는 천부적인 경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확연하게 구별한다. 우리는 다른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함과 다양성을 존중한다.28)

윌슨은 지난 200년의 환경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보고 생명을 바라다볼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나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자신의 일생이라는 짧은 시간에서 수세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사의 확장된 미래까지 시야를 확장할 때 환경운동은 생명보존 운동이 되고 생명보존 윤리가 되어 힘을 받는다.29)

윤리적인 성향을 키우며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와 종교적인 교리에 근거한 고질적인 도덕적 우월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다음 일은 무장해제이다. 윤리적인 해결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과 보전이 하나의 동일한 목표로 융합되는 공통의 토대를 향해 나아가도록 영향을 준다.30)

윌슨은 관리인 정신이 이데올로기와 국경의 벽을 넘어선 인류의 공통된 도덕적 명령이라고 말한다.31)

윌슨은 관리인 정신이 인간의 사회 행동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한국인의 삶 속에 각인되어 있는 삶의 방식과 그 지칭을 보면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일상적인 주거 생활을 ‘살림살이’라고 이름 하였다. 그리고 집안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살림지기’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살림살이’에는 ‘살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도록 감싸 주고 보살피는’ 삶의 방식을 가장 중요한 생활 자세로 본 우리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배여 있다. 살림을 생활화해서 그것을 우리의 삶의 일로 삼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살림살이’라는 낱말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살리다’는 사역동사로서 ‘살게 하다’, 달리 말해 ‘죽지 않도록 하다’를 뜻한다. ‘살다’와 ‘살리다’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살다’는 자동사로서 ‘목숨을 지니고 있다’,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를 뜻한다. 이와는 다르게 ‘살리다’는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살아 있음의 상태를 바람직한 가치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 살아 있는 것이 그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다른 살아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살아 있음’에 관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렇듯 살아 있음을 가치로서 소중히 대하는 생활 방식은, 그것을 ‘생명(生命)’이라고 명명하며 거기에서 살아 있도록 보살펴야 하는 명령을 보고 아무리 미물이라도 살아 있는 것은 천명을 받고 거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 우리말 ‘생명’은 서양어인 ‘vita, life, vie, Leben’ 등에서 표현되고 있는 단순한 ‘삶’이 아니다.

생명이란 낱말은 생물, 유기체, 목숨 등과 같은 비슷한 단어들로는 감지될 수 없는 성스러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살아 있음에서 그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함을 말없이 전달하고 있는 하늘의 뜻을 알아보아야 함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살림살이’와 ‘살림지기’란 지칭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지 않고 살아 있도록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생명학적 역할이 함축되어 있다.

지구 생명 시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살림지기로서의 인간은 생명에 뿌리를 둔 삶의 진리, 삶앎의 진리, 살림의 진리를 묻고 배워서 생명의 진리에 부합한 살림살이의 규범을 정립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기술, 과학 모두 생명의 신명을 일깨우는 살림의 축제와 마당이 되어야 한다.

지구의 살육자인 인간은 한시바삐 살림지기로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새 천년에도 인류는 인간이 포함된 우주 진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 생명과 평화의 길

인류는 문명 대혼돈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대혼돈을 헤쳐 나갈 방법은 있는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대에 지구 위의 서로 다른 민족과 인종이,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화합하며 사이좋게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상생과 공생의 길은 없는가? 지구 위의 만물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평화의 길은 없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간디의 말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평화를 위한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이 대혼돈이, 이 위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제부터라도 생명이 무엇이며 평화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지혜를 짜내어 생명과 평화의 길을 찾아보라는 인식론적 명령이다. 인간은 앓음과 아픔을 통해 알음[앎, 지식]에 이르게 되고, 그 전후 사정을 배워서 그 의미와 뜻을 물어 사태의 실상을 깨친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여 얻은 앎을 삶에 되먹임시켜 삶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위기로부터 생명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

오늘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적극 개척·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살림에 바탕을 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새 문명의 패러다임의 두 가지 원리로 분별할 수 있다.

하나는 이분법적 분리주의를 대체하는 것으로서 생명, 우주생명의 유기적 관계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에 따른 지배와 억압의 사유 체계를 청산하고, 이를 대신할 호혜적 상생의 사유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지평을 포괄하되 더 나아가 자연적 감성과 생태적 영성의 차원에서 조망할 때, 바로 생명윤리의 안팎인 ‘모심’과 ‘살림’으로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심’과 ‘살림’이라는 새 문명의 화두는 생명적 기반인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사회 내에서의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속적 세 계기를 포함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자연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문화, 즉 ‘생명지속적 문화’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문화 구성원 각자가 개별성과 자율성을 갖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되, 서로 협력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의 분권적 융합’, 즉 ‘호혜 관계망’을 구성하고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얻는 혜택을 공정하게 향유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명 호혜 관계망으로 구성된 문화 민족이나 나라들 간의 평화를 포함한 일체 자연과의 평화는 물론 지구촌 인류 간의 평화와 인간의 내면적 평화 등 모든 평화가 함께 이룩되도록 해야 한다.32)
동아시아 문화권이 상대적으로 서구 문화권에 비해 자연 친화적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문화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 종교와 종교 이전의 샤머니즘이나 신화 역시 매우 깊숙한 층위에서 자연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불선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의 자연 친화적 문화를 복원하고 또 그것을 창조적으로 새 차원에서 발전시킴으로써 서구의 지혜와 더불어 새로운 문명에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실현의 길이 바로 ‘생명과 평화의 길’이며, 그 길은 환경론과 생태학을 넘어서되, 그 뼈대와 진리는 그대로 제 안에 품어 안는 새로운 ‘생명학’ ‘우주생명학’ 성립의 길이다.33)

우리 민족은 어질고 착할 뿐 아니라 죽임과 다툼을 싫어하였으니 이미 현대 인류와 지구 및 주변 우주생명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생명과 평화의 길’을 애당초 포함하고, 또 유불선의 기본 정신을 담은 고유의 풍류 사상을 이전부터 갖고 있었으니, 한편으로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또 민족간의 평화를 도모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깊고 넓고 높은 새 차원의 인류적·우주적 생명평화사상의 참다운 원형을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34)

대혼돈의 시기에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생명과 평화의 지혜가 요구된다.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지혜를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상생과 공생의 ‘살림살이 학’으로 세상에 내놓아야 할 사명과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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