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숙 ‘우리는 선우’사무국장

미술이나 음악을 취미가 아니라 직업으로 전환하게 되면 큰 고통이 따른다고 한다.

불교도 비슷한 무엇이 있는 듯하다. 내가 단순히 신자였을 때와, 불교가 직업이 되었을 때는 질적으로 다른 영역 같다. 그렇다고 학술진흥재단이 인증서를 발급해 주는 논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니폼을 입은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주신 월급으로 생존 보존한 지 7년째, 나는 도대체 뭔가 싶다.

불교가 좋다~라는 기본 전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막상 직업불교인이 되고 나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모든 상황을 나 자신부터가 수용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야 했고, 납득을 해서 믿기보다, 믿어야 하니 어쨌든 납득하려고 용을 썼다.

교리도, 수행법도, 불교계 내의 여러 가지 역학관계도, 대외적인 이미지도, 불교의 역사도……. 불교 공부 시간에 귀에 딱지 앉도록 듣는 이야기, “와서 보라”, “불교는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긴 시간 어쨌든 신심을 잃지 않으려 용을 썼다. 불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일 뿐이지만, 왠지 나 같은 불자가 많지 않을까 감히 추측도 해 본다.

직업으로 불교를 선택하게 될 때, 가장 먼저 검증대에 오르는 것은 ‘신심’의 여부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조직(모임이든 어디든)에 대한 충성심 테스트라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신심과 충성심은 엄연히 다르지만, 현실에선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 신심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삼귀의인데, 작년에 불교청년교육과정을 진행하면서, 성태용 교수님(현재 내가 일하는 조직의 보스)과 교육 시작 전에 삼귀의를 하느냐 마느냐로 살짝 대립 모드에 들었던 적이 있었다.

평소 나의 업무 활동을 지나치게 방임 상태로 두시기 때문에 ‘살짝’일어난 대립은 꽤나 큰 사건에 속한 것이었다. 성태용 교수님께서는 불교 교육 받으러 와서 삼귀의 정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고, 나는 아직 스스로 불자라 생각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는데 삼귀의를 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결과는 보스의 주장 관철 ㅠ.ㅠ).

성 교수님의 말씀이 틀림없이 옳다. 옳은 것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자신 없고 권위 잃은 어른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에게 더욱 엄하게 대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실제로 법을 가장 안 지키면서 법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위정자들, 툭하면 파사현정에 핏대 올리며 정법타령 하시는 분들이 연상되었다(이 글을 성 교수님이 읽는 일이 절대 없기를…….이런 비유가 그분에게 얼마나 부당한가를 잘 알지만, 지금은 편의상 악역을 해주셔야 하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평가 속에, 몇 명 되지 않는 학생들과 불교청년캠프를 진행하면서, 삼귀의, 사홍서원, 반야심경, 천수경, 108배, 발우공양, 새벽예불, 간화선 실참, 청법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목탁 대신 뿅망치로 게임하고, 밤새 기도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우당탕쾅탕 놀았다. 하지만 앞으로 그 아이들은 빼도 박도 못할 불자가 될 것이 분명한 인연의 종자를 심어 두었다고 확신한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나의 설레발을 오히려 진정시켜 주는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런 확신을 받게 된다.

정말 불교가 위대한 가르침이라면, 그런 의례들과 무관하게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의 ‘신심’이 그런 확신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역사드라마 〈천추태후〉를 보다가 팔관회 연등회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버럭 화를 내는 대사를 주고받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 팔관회와 연등회를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불자가 누가 있는가.

그렇다고 삼귀의부터 사홍서원까지 그 의례를 깡그리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것이 내가 무시하자고 무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 저변 위에 나의 존립 근거도 있는데, 그 자체를 개밥그릇 차듯이 쉽게 무시할 정도로 나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불교의 개혁과 변화 발전을 생각하고 실천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욱 형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사찰에는 반드시 나가야 하고, 스님의 지도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종단에 소속되지 않은 모임이나 조직은 사이비라는 초강수까지 두면서, 불교 태생의 자유분방함과 평등정신을 저버리는 신심돈독자들을 볼 때면, 같은 계에 있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까지 생겨난다. 무엇이 그리 자신이 없는가.

나는 직업으로서 불교라는 시니컬한 표현을 썼고, 일인일사(一人一寺)도, 스님의 지도도, 종단에 대한 소속감도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나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불교에 대한 신심이 흔들렸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해 왔고, 직업이길 그만두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불자일 것이며, 내 삶 전체를 두고 일관되게 추구할 어떤 가르침이 있다는 것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사한다.

작년에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된 귀한 아들을 먼저 저세상에 보내신 회원님의 49재에 참여한 적이 있다. 49재에서는 눈물지으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도, 그곳에서 진행되는 법회에서 삼귀의를 하는 순간,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숱하게 반복해 왔던 삼귀의가 그렇게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불교청년캠프 과정 내내 아무런 의례를 하지 않았지만,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의 열정과 절실함과 성실함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 삶의 진정성이 펄떡거리고 살아 있는 그 위에 형식도 절차도 함께 살아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칫 거룩함의 형식에 집착하면, 코믹해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신심이 너무 장한 나머지,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코믹한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글을 마무리 지으며 하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

“《불교평론》에 ㅋㅋㅋ을 쓸 수 있는 자유분방함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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