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호 《한국의 고고학》상임편집위원

우리는 지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을 흔히 내재적 근대화와 민족주의가 맞물려 돌아간 격동의 시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계의 열강은 19세기 들어 국가의 여력을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쏟아부었다. 이때 식민 지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이들 지역에서는 근대화를 열망하는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더구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유구한 문화전통을 저력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시대로 기억된다. 아시아 지역 민족주의 운동 중심에 들었던 인도와 한국의 열정의 위인들에는 어쩌면 뿌리를 같이했을 법한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인도는 영국이라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고, 한국은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한 후발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반을 비켜 인도에서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에 이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969~1941)가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뒷날 민족주의 깃발을 든 만해 한용운이 태어났으니, 이들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면서 도반 같은 인연의 고리를 맺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동방의 시성으로 추앙되었던 타고르는 당대 인도의 감성을 대변한 세계적 엘리트였다. 인도 전통의 브라만 문화의 세계관과 동아시아의 자연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고매한 시풍을 떨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기의 마지막 해가 핏빛 붉은 구름 증오의 선풍 속에 진다…….”는 그의 시구처럼 서구의 외세를 백안시하면서, 주권 독립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타고르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마하트마로 칭송한 시를 지어 본인에게 직접 건네주었다고 한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간디가 흉탄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의 이름에 늘 따라붙는 고유명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간디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를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으로 이끌어 낼 비폭력·무저항주의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만해 한용운 역시 비폭력 가치를 앞세운 3·1운동에 민족 대표로 뛰어들었거니와, 일찍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선각자였다. 한국의 장래를 희망의 언어로 노래한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보다 3년 앞서 발표한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는 격조 높은 저항 정신이 잔잔하게 묻어난다. 만해의 저항 정신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다르게 해석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러 나오는 모양이다.

간디의 비폭력은 모든 불이익을 감수한 것이지만, 3·1운동의 비폭력에는 자기희생이 뒤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 직전에 독립선언서를 다시 쓰겠다고 고집했던 만해는 뒷날 옥중에서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국민의 역사와 유전성(遺傳性)이 유(有)하다.”는 그 유명한 〈독립의 서〉를 남기지 않았던가.

어떻든 이들이 추구한 민족주의는 세계적 패권을 노린 19세기 서구 열강이나,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을 부추기는 데 활용한 민족주의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식민 종속 상태의 외세에서 벗어나고 해방을 갈망한 순수한 열정 말고는 다른 복선(伏線)을 깔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의 민족주의 저항운동은 브라만과 힌두로 이어진 자국의 종교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은 고대 자유사상가 그룹이 인도 종교의 주류로 이끌어 낸 불교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래서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을 살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간디 저항 운동의 중심사상 아힘사와, 제도중생의 보살정신이 함초롬한 만해 시집 《님의 침묵》은 서로 어울리는 데가 있다.

그런데 지난봄 어느 날 마하트마 간디의 유품과 백담사의 선사 만해 한용운이 쓴 친필 기록이 뉴욕의 한 경매시장과 서울의 어느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을 빌려 각각 공개되었다. 간디의 전유물을 상징하는 둥근 테 안경을 비롯 회중시계와 샌들 등 경매시장에 나온 그의 유품이 여러 국제기업을 거느린 인도인 CEO에게 18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품을 인도 뉴델리의 국립간디박물관에 기증할 것이라는 뉴스가 전파를 탔다. 서울의 한 공중파 방송이 공개한 만해의 유품인 자필 이력서는 감정가가 2000만 원 이었지만, 소장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 이력서에는 만해의 출가에서 수계는 물론 전을 공부한 수학(修學)기록과 경성명성측량소장을 지낸 경력 따위를 상세히 적어놓았다. 이는 만해의 개인사이지만, 그가 염원한 근대화의 역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해를 기리기 위해 백담사 이웃에 세운 만해박물관에다 유품을 보냈다는 소식은 여태 듣지 못했다. 어찌 인도를 가난한 후진국이라고 얕잡아 보겠는가. 졸부 티를 한껏 드러내며 우쭐대는 우리네보다 오늘의 인도인이 더 위대한 국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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