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남아 불교의 힘을 말한다

미얀마 정치에서 종교적 상징: 근대정치사를 중심으로*

1. 문제제기

이 글의 목적은 미얀마 근대정치에서 힌두·불교적 세계관이 정치행위의 핵심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근대국가 출범 이후 정치지도자의 정치행위를 고찰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근대화의 산물인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를 결정적 사례로 선정하였다. 다시 말해 민주화 운동에도 전통과 상징이 강하고 또 이러한 요소들이 여전히 정치 행위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친다면 이는 미얀마 정치 일반으로 확대 적용할 개연성이 높아지므로 “가장 그럴 듯 하지 않은 사례”(The least likely case)에 해당된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에 대한 기존 논의는 민주화 운동, 폭동이나 봉기, 전민주화(pro democracy) 운동으로 분류되며, 공통적으로 네윈(Ne Win) 체제의 경제 실패를 시위 발생의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시위 현장을 주도한 학생이나 시민들의 행동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부족했다. 따라서 이 글은 정치적 동학의 일환으로 시위 전개과정에 초점을 맞추던 기존 연구를 탈피하여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치부되었던 시민들의 정치행위를 결정한 정치사상을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실패원인을 보완하고자 한다.

1988년 3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민주화 요구 시위는 구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사회혁명이었지만 우 누(U Nu)와 네윈 체제의 정치문화적 유산이 시위 과정에서 그대로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지도자는 공히 불교 교리와 철학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체제를 정치적 이상형으로 제시했고, 이에 따라 경제정책도 평등한 소득과 분배의 원칙을 따르는 사회주의원리에 입각했다.

그러나 네윈 체제에 들어 일관성이 없고 폐쇄지향적인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어 결국 전국적인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네윈 체제의 경제적 파탄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경제 정책 수립과 시행보다 일회성이 짙은 점성술과 산자술에 의지하는 전통적 정치행위였고, 정권 퇴진을 요구한 시민들의 정치행위 또한 이와 유사한 범위 내에 머물렀다는 딜레마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글은 민주화 요구 시위 가운데 존재했던 미얀마 정치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며 근대 정치사에서도 힌두·불교적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정치행위의 중요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습속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문화의 정의가 모호하고,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에서 일탈한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며,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구조 자체를 배제하며, 국제적 영향력을 무시하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애매한 정의와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의 영역을 초월하면, 26년간 장기 집권한 군부 통치하 미얀마의 폐쇄적 정치 환경은 국제적 영향력에 특별한 영향력을 받지 않았으며 참여적 정치문화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나아가 이 글은 왕조시기에 태동한 문화 요소가 근대 정치에서도 소전통으로 계승되는 미얀마 정치현상의 영속성을 대비시켜 미얀마 정치문화의 보편적 특성과 함께 기타 국가와 차별 되는 특수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정치문화가 하나의 이론이기 보다는 이론 정립을 위한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가설과 분석모형 설정: 사회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정치와 종교

1) 가설설정


문화란 상징으로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전승된 의미의 유형, 즉 인간이 그것을 통하여 생활에 관한 지식과 태도를 서로 전달하고 영속화하고, 발전시키는 상징의 형태로 표현되는 전승된 개념의 체계이다. 즉 문화는 각각의 사회에서 체계의 특수성을 내포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적용되어 사회통제의 기능을 하는 일련의 상징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상징은 지도자의 정체성을 세우고 지속시키며 반대로 지도자들은 상징을 정치이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이어온 상징을 활용하고 현재의 필요성에 따라 새롭게 변모시키거나 새로운 상징을 창조하여 정치적 대립자들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다시 말해 상징은 지도자들이 타자를 지배하도록 정치사회 내에서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며 때로는 자신이 강력한 상징적 인물이 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하며 때로는 권력의 균형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행위는 개인과 대규모 정치 질서를 연계하는 ‘신비화’(mystification)를 통해 구체화 되며 기능적으로 타자에게 다양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으므로 집단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상징적 행위와 해석의 대표적 사례는 의례이다. 예술이나 미신과 달리 의례는 사회적 규율을 표현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며 인간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여 경험을 쌓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세계관에 대한 정신적 모델을 창조한다. 따라서 의례는 권력의 실체와 구조를 강화하여 권력 구조의 이념적 정통성을 지지하고, 상징적 해석을 통해 전통적 가치와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어 인간의 행위 및 동의를 동원하여 정체성을 확립한다.

만약 근대사회에서 종교가 지배 엘리트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거나 또는 정치권력을 가졌거나 가지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사회구조를 조작하거나 그들의 전통에 종교를 기반에 두고 있는 경우 권력은 초자연적인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동일하며 곧 정치권력의 획득 수단이 된다. 근대화된 국가 구조 하에서 정치 엘리트들은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으로 역사적 관습을 통해 전수된 문화, 즉 상징체계를 다시 정치에 활용하는 것이다. 창출된 전통(invented tradition)은 과거의 맥락과 형태적으로 관련성을 가지면서 새로운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며 과거를 준 강제적으로 반복시키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제기되는 문화요소들은 정치적 결과를 낳게 하는 종속변인에 영향을 미치는 간섭변인이다. 민주화 요구 시위의 실패가 종속변인일 경우 반정부 세력이 부재했던 점을 독립변인으로 취급할 수 있는데, 이 때 반정부 세력의 부재를 부추긴 결정적 요소, 즉 간섭변인이 문화요소였다는 것이다. 방법론상으로 통칙을 구축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설에 포함된 독립변인들만이 종속변인에 영향을 미친다는 단순화 가정에 입각하면서도 연구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변인들의 감추어진 영향력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각 사회의 정치적 역학관계에는 그 사회의 문화가 미치는 일정한 역할이 있을 것이지만 이 글에서 사용하는 의례, 종교, 풍습 등 일군의 문화요소들은 정치경제적 환경이 변화했을지라도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쉽게 변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지속성을 유지한다고 조작적으로 정의한다.

영국의 식민통치 이후 미얀마는 국가로부터 종교의 분리, 신왕(神王)적 왕실에서 세속적 정부로의 변화, 정치적 권위의식과 제한된 정부 도입, 대중 참여, 시민·정치 권리 확대 등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이 총망라된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도입하였다. 국가구조와 정치과정을 서구의 그것과 동일하게 근대적으로 탈바꿈한 일대기적 전환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버마인의 사고는 800년 동안 형성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왕권의 본질은 광범위하게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결정한다.”라는 지적과 “버마의 어느 지역에 있던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버마인들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라는 지적은 영국이 미얀마의 국가 구조를 근대화 시켰다고 할지라도 미얀마인의 본질적 사고방식을 근대화 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군부 정권은 허약한 국가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시민사회의 봉쇄 또는 부분적 허용으로 귀결된다. 군부는 고도의 중앙집권적 지배체계, 민간 집단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칙, 광범위한 연락망과 단체정신을 겸비하고 있으며 특히 무기를 독점한다는 점에 저항세력과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미얀마에서 군부는 독립의 주체이자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대상이었다.

 이에 걸맞게 미얀마 정치인들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미얀마어로 아들이라는 의미인 ‘따’(tha)를 강조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따’는 짜웅다(kyaungtha, 학생), 싯따(sittha, 군인), 퍼야따(payatha, 승려)로 결코 이들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자(awza)와 아나(ana)를 동시에 소유해야지만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권력에 대한 미얀마의 사회적 관습은 군부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네윈 시기에 들어 군이 중앙과 지방 행정 기관과 국영 기업체에 포진됨으로써 상명하달의 군사 문화가 사회전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을 초월한 더 큰 의미의 정치체계를 자각하면서도 정치 참여에 제한을 받는 신민적(subject) 정치문화에 길들여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폐쇄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사회·경제는 저발전된 상태로 정체되면서 국지적(parochial) 정치문화까지 나타났다. “군사정권 하 미얀마의 시민사회는 암살당했다(murdered).”라는 스타인버그 교수의 지적처럼 미얀마 시민문화는 군사정권의 압력아래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의거 다음과 같은 가설 설정이 가능하다.

첫째, 근대화된 제도 및 권력 관계 등 정치적 상징이 새롭게 구성된 가운데에서도 정치 지도자나 집단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전통의 재발견을 행하지 않고, 전통 문화 그 자체에만 천착할 경우 사회체계 내에서 통합과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 여기서 정치적 상징이란 개인이나 특정 계층을 겨냥하여 정치적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동원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도구이다.

둘째, 전통 문화에 의존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정치행태는 곧 근대적 정치문화를 생산하지 못한다. 정치문화가 정치발전을 위한 독립적 개체로서의 역할에는 의문이고 이에 동의하지만 문화 요소가 정치발전에 어떠한 형태로든 기여를 하며 그것이 각 국의 사례에서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정치발전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즉 정부 기능이 종교와 문화적 상징 요소에 의존한다면 행정 및 법제도가 체계화된 세속적 정치와 구조적으로 통합될 수 없으며 결국에는 근대적 정치문화를 생산하지 못한다. 여기에 군부 권위주의는 정치권력을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집중시키므로 민중의 정치 참여를 봉쇄시켜 시민 의식의 성장을 억제한다.

셋째, 정부 구조와 기능이 부조화를 이룬 가운데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도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의 정치행위는 전통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는 근대적 정치구조와 전통 지향적 정치 기능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적 의미로 통합시키기 위한 사회변동 과정이었다. 그러나 정치문화의 발전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동학의 계기를 맞는다 하더라도 민주화 투쟁의 이념적 바탕은 전통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2) 분석 모델

미얀마의 정치체제 및 현상에 관한 연구는 식민지 이전과 이후 근대국가 출범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인도화된’(Indianized) 왕권체제를 중심으로 전자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면, 후자는 왕조 시대 정치사상의 단절과 계승에 초점을 맞춘다. 즉 100년 이상 지속된 서구의 간섭과 정치적 병합에도 불구하고, 정치제도는 전통적 정치문화의 소산인 불교적 교리에서 파생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형성 및 발전하고 있다는 연구가 지배적이다. 미얀마 정치현상에서 종교적 가치관이 순환의 과정을 겪으며 상징체계로 재편되는 현상을 지적하며 식민시대 이전과 현재의 정치적 정체가 차이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미얀마 정치체제의 특징을 표로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느슨한 사회불자왕정치행위도구힌두·불교교리불교국가체제(A)(B) (C)불교정치사상힌두문화만달라적 정체불교정치체제점성술, 산자술권력분립위협정화 및 통제상징의 정치<그림 1> 분석모델: 전통왕조 국가 및 정치행위 과정

(A), (B), (C)는 각각 힌두·불교 사상에 의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상징적 불교국가체제의 유형을 분리한 것이다. 불교 정치사상(A)은 불교를 매개로 하여 국가 통치의 근본 원리를 마련함과 동시에 왕의 정통성을 보장 받는 도구이다. 전통왕조의 정치체제는 힌두이즘(Hinduism)과 불교의 교리가 융합된 과두체제(oligarchic polity)로 정의할 수 있다. 불교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왕은 왕직에 봉역 할 진위(眞僞) 판단, 정의로운 자를 격려, 정당한 방법에 따른 부의 획득, 국가의 번영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추구하였다.

또한 군주가 준수해야할 열 가지 덕목을 따를 경우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고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정의로운 왕’(dhammaraja)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교리의 가르침인 정법(Dhamma)은 부처의 아들로 믿겨지는 상가(sangha, 僧家)에 의해 왕을 합법화 하며 전달되는데, 왕은 정법에 따라 백성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상가의 청렴에 의해 정법이 수호된다. 상가의 일원들이 계율을 정확히 준수함으로써 상가의 청렴이 명백해지지만, 만약 왕이 법을 위반해 불법(athamma)을 저지르면 통치의 정통성을 상실 당하며 국민의 그에 대한 통치권 거부는 정당화 된다.

누법전(Manu Code)에는 왕이 불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듯이 힌두문화(B)도 왕권의 신성성을 부여하였다. 왕은 지혜를 터득하거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하여 왕실의 브라만 사제들에게 조언을 받았다. 브라만 사제들은 왕실의 혼인을 주관하고 수도의 위치를 정하거나 중요한 상거래의 길일(吉日)을 점치는 등 왕실과 개인의 미래를 예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2세기 이후 왕실에서는 힌두 요소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따드나바잉(thatanabain)이 브라만 사제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점성술 및 산자술을 이용해 왕실 업무를 결정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승려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은 산자술과 점성술을 섭렵하는 전통을 이어왔고, 현재까지도 근대 정치체제 및 국민의 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지적이 있다.

미얀마에서 점성술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국가의 길흉화복이나 대소사를 결정한 미신적 술법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예지력이 신비로울 정도로 정확하다. 또한 공계친족(cognatic kinship)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까닭에 성(姓)이 없고, 대신 작명(作名)을 하는 경우 태어난 요일과 이를 상징하는 천체에 해당하는 자음의 음절 값을 이름의 초성자음과 맞추는 풍습이 있다.

따라서 아이가 출생할 경우 바로 점성술사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작명을 하는 경우 주의할 점이 또 있는데 바로 음절 값을 9에 맞추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미얀마인의 이름 ‘이몽’(yimon)의 경우 각 음절의 초성인 y와 m의 음절 값, 즉 4와 5를 합쳐 9가 되게 하는 것이다. 숫자 9는 미얀마에서 ‘꼬나윙’(konawin)으로 불리는데, 이 수를 더하고 곱하여 그 합을 다시 더 할 경우 결과는 꼭 9가 포함되므로 신비한 능력을 가진 숫자로 인정한다.

(C)에 제기된 만달라(mandala)적 정체도 불교 국가체제로 인해 빚어진 느슨한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사례로서 힌두사상 및 불교 교리에서 제시하는 절대적이고, 신권적인 왕권에 비해 여러 개의 만달라가 국가 전역에 분포하는 권력 분립의 체제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지방에서 권력의 규모와 영향력이 확대될 경우 왕실을 위협할 수 있고, 반대로 왕실의 무력적 통제에 의해 소규모의 만달라가 사라지기도 했다. 미얀마 역사상 상좌 불교의 원리가 채택되지 않은 왕조가 없었기 때문에 권력의 만달라 형상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보편적인 사회구조로 압축된다.

이론적으로 왕권은 신성불가침과 같은 절대적인 권리를 보장 받으나 실제로 왕의 기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왕실에 반감을 가지는 자들이 왕실을 상대로 암살을 기도하는 등 권력 분산이 극심했다. 13세기부터 권력 배분을 통한 국정이 운영되어 왔다는 점만 보더라도 신권적 왕권 개념의 현실적 모순관계를 인정한다. 훌룻또(Hluttaw)라는 국가 최고 정책결정기관에서 중앙 권력은 왕실 귀족으로 구성된 관료들에게 배분되었고, 각 지방은 지역별 수장이 중앙으로부터 독립된 묘자(myoza)체제를 구성하여 지방권력을 장악했다. 왕실 법이 마누 법전을 모체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느슨한 법체계와 권력구조가 특징이고, 개인적 성향이 법 집행 과정에 반영되는 행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만달라적 권력 구조와 연관되어 제기될 수 있는 특징으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있다. 두 번째 버마족 통일왕조인 따웅우(Taung Oo) 왕조는 17세기 서양인의 도래와 함께 중국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자 16세기 영토 팽창 정책을 수정하고, 수도를 남부 지방인 버고(Bago)에서 중부 지방인 어와(Ava)로 돌연 천도하여 고립 정책을 펼쳤고, 제2차 영국-꽁바웅전쟁(1852-53)이 끝남과 동시에 조정은 수도를 만달래(Mandalay)로 옮기고, 왕조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의미에서 부처 탄생 2,400주년을 기념하여 제 5차 불교도 대회를 개최했다. 왕조가 멸망해가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점을 배제하고도 밍동왕은 하부 미얀마 영국 사령부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외국인 혐오증을 보여주면서 수도를 지키려는 성향을 보였다.

3. 근대 국가 출범 이후 상징의 정치: 우 누와 네윈 사례

1) 우 누 시기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미얀마에서 권력을 규정하는 세 가지 개념을 기준으로 볼 때 이를 모두 충족시키는 지도자는 초대 총리였던 우 누뿐이었다. 우 누는 스스로를 왕조 시대의 정통성을 잇는 불자왕으로 인식했고, 점성술과 산자술에도 남다른 조회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가웅바웅(gaungbaung: 미얀마 남자들이 쓰는 전통 모자), 전통의상인 롱지(longyi: 통치마), 퍼낙(panak: 슬리퍼)을 항상 착용하고 다녔고, 매일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수행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무시절 직접 불가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미얀마의 독립 시각(새벽 4시 20분), 6차 불교도 대회의 시작 시각(오후 12시 12분), 1956년 총리직 사임 시각(아침 9시) 등 주요한 국가 대사(大事)는 우 누 스스로의 점성술적 결과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번은 그가 운전하던 차가 개를 치자 불길한 징조로 간주하여 그 날의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고 한다.

불자왕이 되기 위한 우 누 총리의 행적은 영국의 침입에 불교를 앞세워 국가를 수호하려했던 밍동왕의 행위와 유사하다. 밍동왕처럼 우 누 총리는 부처 탄생 2,500년을 기념해서 1954-56년 간 개최된 제 6차 불교도 대회를 개최하고, 거바에(Kaba Aye) 거리에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거바에파고다(세계평화)를 건립했다. 1959년 정치계로 돌아온 우 누는 국론 분열화를 촉발시킨 불교 국교화를 정치권에 대두시켰고, 결국 총리로 당선된 이후 1961년 불교를 국교화 했다.

독립 이후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종족과 공산당원들의 무장 봉기로 어지러운 정국을 평정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 누는 스스로가 불자왕이 되고 국민이 불교의 가르침을 따를 때 국가 위기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었다.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종족의 대부분은 기독교들이었고 이들의 요구는 종교적 차별에서의 해방이 우선이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소수종족과 공산당원들의 봉기는 국가 권력구조가 중앙으로 집중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우 누는 이들을 배타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담만더예(dammandaye, 종교의 적)로 정의하고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1949년에는 까렌 반군의 일파인 ‘까렌민족방위군’(Karen National Defense Organization: KNDO)에 의해 양공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삥롱협정(Panlong Accord)에 임하지 않은 까렌족은 자신들의 자치권 및 권익을 위해 우 누에게 협상을 제의했고, 나아가 ‘여카잉공산당’(Arakan Communist Party)과 연합하여 무장 투쟁을 감행하였지만 우 누는 이들을 모두 민주주의를 해치는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우 누의 지지기반이었던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AFPFL)은 1958년 우 바쉐(U Ba Swe)와 우 쪼응에잉(U Kyaw Nyein)이 이끄는 ‘안정파’(The Stable)와 우 누가 이끄는 ‘청렴파’(The Clean)로 와해되었다. 정파 간의 이데올로기 경쟁이 아니라 부총리인 우 쪼응에잉이 우 누와의 권력 경쟁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 구도를 재편하여 이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 파벌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다. AFPFL의 급작스런 와해에 시민들도 놀랐는데, 대부분 정치권력 분배와 경제적 특권이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정실적인 관계로 묶인 전통왕조의 왕실의 군신관계 및 방벌(放伐)을 꾀하기 위한 정치적 야욕과 동일한 양상이기도 하다.

불자왕의 이미지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우 누는 효율적으로 상가를 정화하거나 통제하지 못한 오점을 남겼다. 당시 상가는 분파적으로 늘어났고 계율도 해석 상 여러 가지의 견해가 난무하여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뒷받침 해줄 상가 집단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왕조시대에는 왕이 국가의 목적 달성을 위해 상가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이 시기는 오히려 상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파벌화된 상가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선택함으로써 정실적인 주종관계를 강화했다. 실제로 1950년 선거에서 상가의 지도자가 특정 당에 표를 몰아줌으로써 상가가 국가를 압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2) 네윈 시기

뽕과 아나, 즉 개인적 카리스마와 군권을 장악한 네윈은 1962년 3월 2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했다. 그러나 네윈은 근본적으로 ‘선출된 자’(maha sammatha)가 아니기 때문에 정통성이 결여된 인물이었으므로 오자를 소유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점성술에 대한 네윈의 맹신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됐다. 1930년대부터 아웅산을 비롯하여 양공대학 학생들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을 때부터 슈마웅(Shu Maung)이라는 본명 보다는 떠킹(Takhin: 주인) 네윈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지고한 철학적 의미가 숨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불운한 숫자를 8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성술적으로 이 숫자의 값은 수요일 오후에 해당되며 군인에게는 치명적으로 나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요일 오후에 해당 되는 ‘S’의 자음과 이를 상징하는 포악한 성격의 코끼리 대신 토요일에 해당되는 ‘N’을 선택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의 말로를 걱정하기라도 한 듯 편집증(paranoia) 속에 미신적이고 일회성 짙은 산자술과 점성술에 의존하여 정책 집행을 해 나갔다. 그는 외형적으로 왕처럼 귓불을 뚫고 머리를 땋아 올렸으며, 왕들이 창으로 대신들을 위협했던 것처럼 상스러운 욕설로 각료를 비난했다. 외국인 혐오증, 분노, 다혼(多婚), 근거를 알 수 없는 인사 조치 등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온갖 방편을 총 동원했다.

그는 버마사회주의계획당(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 BSPP) 내 상주하는 점성술사로부터 의사결정의 점괘를 확인했다. 또한 운이 좋다는 이유로 전용 요리사 인도인 라주(Raju)와 해외여행을 항상 동행했다. 양공의 깐도지 호수(Royal Lake)에 왕조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설상의 새 가루다(Garuda) 꺼러웨익(Kalaweik)의 모양을 본 뜬 호텔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기초가 만들어진다는 점성술사의 조언을 따랐다.

미얀마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화폐 개혁 뒤에는 이성적 판단으로 납득하지 못할 배경이 있었다. 네윈은 75세가 되던 1985년 기존에 유통되던 100, 50, 20짯을 무효화 시키고 새로이 25, 35, 75짯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신권 화폐가 발행된 지 3년도 안 돼 중국, 태국 등 국경 지역에서 밀무역을 하는 암거래상에게 타격을 준다는 명분으로 1987년 9월 5일 이 화폐들을 전량 무효화 하고 22일 새로이 45, 90짯을 발행하였다. 이 정책은 네윈이 선호하는 숫자 9를 화폐로 발행할 경우 자신의 임기가 연장된다고 조언해 준 점성술사의 결정이었다.

점성술사가 거울에 네윈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쏘게 하거나 고고(go go)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면 네윈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는다고 믿었고, 1970년대 우파 세력의 봉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차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변경했다. 국가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릴 때 모힝가(mohinga: 미얀마 전통 국수 중의 하나)를 각료들과 함께 먹었다. 좌우로 영역을 양분하여 급격히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한 시도였다.

왕조 시대 왕처럼 불교를 부흥시키고 승려를 후원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으나 철저히 자신의 정통성을 지지해 줄 상가를 선택하거나 비밀리에 파고다 건축을 지시했다. 예를 들어 쉐더공파고다 맞은편에 마하위자야(Maha Wizaya: 대(大)승리)파고다를 1983-84년까지 건립했는데, 원래 입지(立地)는 거바에 파고다 근처였으나 1982년 그의 점성술사의 결정에 의해 현재 자리로 변경되었다. 아직까지 미얀마인들은 이 파고다를 누가 지었는지 정확히 모르거나 일부는 별칭인 ‘국민의 파고다’란 의미인 삐두퍼야(pyithu paya)에서 유추하여 국민들의 보시로 건축한 것으로 알고 있거나 심지어 우 누가 건축에 자금을 대고 직접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1986년에는 레디 서야도(Ledi Sayadaw)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북부 몽유아(Monywa) 지방을 방문하여 27(2+7)송이의 세인빵빈(seinpan pin: 미얀마인들이 고귀하게 여기는 꽃의 한 종류)을 목요일(점성술적으로 18이라는 요일의 가치가 있음)에 헌화하였다. 정치에서 종교를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불교 국교화법을 중지시키고, 전국의 모든 승려들에게 승려증을 배부함으로써 불교의 개혁도 단행했다. 그러나 고승들을 상대로 거금을 보시하거나 자동차, 텔레비전 등 고가의 물품을 선물함으로써 이들이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을 유도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내세웠던 ‘버마식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는 결국 불교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자체가 모순이었고, 새롭게 제창된 것도 아니었다. BSPP가 1962년 4월 30일 발표한 ‘버마식사회주의: 혁명평의회 노선의 성명서’(Burmese Way to Socialism: the Proclamation of the Revolutionary Council’s Philosophy)는 이미 우 누가 자신의 정통성을 획득하고, 불교식 사회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먼저 언급한 내용이다.

1963년 1월 17일 버마식사회주의의 실천 강령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표된 ‘인간과 환경의 상호체계: 버마사회주의당의 노선’(The System of Correlation of Man to His Environment: The Philosophy of the 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은 당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사회주의’는 ‘물질(Matter)과 정신(Mind)의 상호관계’이자 ‘변증법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의 철학’으로서 ‘현실의 문제’(mundane view)와 동등한 ‘인간사회의 일상적인 일’과 관련된다. ‘상호관계’(Correlation)는 왕조가 부활하는 의미에서 세속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이고 불교 중심적 정치관을 보였던 우 누 체제를 모방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강령은 1920년대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던 승려 우 칫흘라잉(U Chit Hlaing)이 종교적 목적으로 빨리(pali)어로 작성해 놓은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한편, 권력 구조 측면에서는 허약한 우 누 정권보다 군권을 동원한 네윈 체제가 중앙집권화를 이뤄냈다. 우 누 정권 시기 실시된 준연방제(semi federalism)가 국가의 분열과 내전을 조장했다고 판단한 네윈 체제는 1974년 제정된 신헌법에 기존의 지방 행정조직을 7개의 행정주(Division)와 자치주(State)로 개편하여 제도적 정비를 통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였다.

이와 함께 분리 독립을 주창하는 소수종족과 공산세력에 대한 무력적 공세를 펼쳐 이들의 활동을 약화시켰고, 국민들의 반체제 움직임을 감시 및 예방하기 위한 제도로서 주민의 연대 책임제와 상호 감시제를 도입하였다. 종교적 신념으로 국가의 통합을 이룩하고자 했던 우 누의 방법론과 달리 네윈은 다소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지만 세속적인 방법으로 각 지방에 분포한 만달라를 중앙화 시키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또한 우 누 시기 때 보였던 파벌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해 네윈 자신과 가깝거나 혹은 급속히 힘을 키워가는 군 간부를 다양한 명목으로 제거했다. 먼저, 그는 쿠데타 이후 설치된 혁명평의회 15인의 위원 중 ‘30인의 동지’(Thirty Comrades) 출신은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쿠데타 1년 뒤에는 혁명 평의회의 서열 2위이며 버마식사회주의의 급진적 추진을 반대한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아웅지(Aung Gyi) 준장을 해임하였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 당시 아웅산수찌와 연합하여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였던 띤우(Tin Oo) 군 참모총장도 1976년 쿠데타 음모설과 관련하여 해임하였다.

4.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상징의 정치: 세계관과 권력구조

1) 힌두·불교적 세계관

민주화 요구 시위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심지어 발포를 준비하는 군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시민의 편에 서 줄 것을 요구하는 도덕적인 측면까지 보였다. 양공(Yangon) 시위의 핵심 장소는 바로 ‘버마인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쉐더공 파고다였는데, 이곳은 종교적 자긍심 이외에도 국민적 통합과 정체성을 불러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미얀마에서 파고다는 불교사원이라는 일차적 기능 이외에도 유일하게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시민들의 광장(square)이다.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여한 ‘전버마학생민주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ABSDF)은 기구 상징기로 전통 왕실과 독립 운동 당시 독립군의 상징이었던 싸움공작(fight peacock)을 채택했다. 후에 농민을 상징하는 모자와 함께 싸움공작은 국민민주연합(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정당기로 채택되었다. 즉 전통왕조 군주의 상징을 그대로 답습하여 학생들 스스로가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립 후 우 누 내각 구성 시기에 이 싸움공작을 국기(國旗)에 형상화 시키는 문제가 상정되었는데 ‘국기위원회’(Flag Committee)는 싸움공작이 이미 무너진 왕실을 상징할 뿐 연방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왕조시대의 상징을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전통의 ‘재발견’으로 이해 할 수 있으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시공압축의 분위기는 학생 지도자들이 사용한 가명(nom de guerre)에서 정점에 이른다. 학생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당시 양공대학 출신 군부들이 왕조시대 왕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초자연적이고 미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밍꼬나잉(Min Ko Naing)이란 이름을 사용한 보우뚱(Baw Oo Tun), 밍제야(Min Ze Ya: 정복왕), 네밍(Ne Min: 태양왕), 밍쑤밍(Min Su Min: 유일한 왕)으로 통한 마웅마웅 쪼(Maung Maung Kyaw)등의 이름에는 ‘왕’의 의미를 가진 미얀마어 ‘밍’(min)이 모두 포함된다. 특히 1988년 8월 28일 재결성된 ABSDF의 의장을 맡은 밍꼬나잉은 아래와 같이 학생 운동자들의 근본적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내가 죽었다 하더라도 더 많은 밍꼬나잉이 나의 자리를 대신 할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밍꼬나잉은 악행을 하는 왕을 정복할 수 있다. 만약 통치자가 선하면 우리는 우리의 어깨 위에 그를 세울 것이다.

점성술과 산자술도 정치행위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숫자 8이 무려 6개나 들어간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8분을 기점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미얀마인들은 이 날을 ‘8 넷의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인 ‘씻레롱어예어킹’(sitlelonayeahkin, Four Eights Affair)으로 부르는데, 8을 싫어하는 네 윈의 심리를 이용한 점 이외에도 산자술적으로도 이 날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본 시위는 1938년 미얀마 국민들과 인도인들 간에 발생한 ‘1300년 대혁명’(htaungtounnya ayedabon)의 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새로운 ‘혁명의 해’를 만들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 식민국과 집권 군부라는 대상의 차이는 있지만 사건 해결에 대한 소극적인 정부의 자세, 불교문화를 멸시하여 국민들의 자존심에 손상을 가한 행위,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맞물려서 발생한 점 등 유사한 사건 발달의 경로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지배와 종속이라는 주종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고통 받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둘째, 8이라는 숫자와 관련하여 이 날은 미얀마력으로 어와(Ava)왕조의 멸망과 관련 있다. 어와왕조는 1486년 버고 지역에서 밍찌뇨(Minkyinyo)가 건국한 따웅우왕조의 2대 왕인 떠빙쉐디(Tabinshwehti)에 의해 1527년 멸망했는데, 이 해를 미얀마력으로 환산하면 꼭 888년에 해당된다. 어와왕조가 버마족이 건국한 버강왕조 지역을 통치했고, 버마족의 두 번째 통일 왕조인 따웅우왕조에 의해 멸망했다는 점은 버마족의 중흥을 의미한다.

셋째, 미얀마어 4번째 자음인 가(ga)는 모양새가 숫자 8과 동일하여 통용되기도 하는데 이를 빗대어 ‘가’ 세 개만 있으면 과일 중 껍질이 가장 단단하다고 하는 마르멜로(bael fruit)를 깰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강예똥구 옷씨투”(gannyethoungu, ousihtu)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다. 즉 군부가 마르멜로 과일에 비유되고 국민들은 자음 ‘가’ 또는 숫자 8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가능하다.

8월 8일과 같이 겹쳐지는 날짜를 선택하여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은 1988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시발점이 된 사건은 네윈의 집권이 얼마 지나지 않은 62년 7월 7일에 발생한 양공대학 학생들의 시위였다. 이외에 77년 7월 7일 네윈정권의 전복을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이었고, 1988년 민중항쟁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99년 9월 9일에는 학생 및 국내 NLD 잔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를 계획했다.

2) 만달라적 권력구조

민주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에 대항할 세력의 부재로 지적된다. 수치상으로 양공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고, 규모면에서도 전국적이었으며 학생, 농민, 노동자, 승려 등 사회 모든 계층이 총 동원된 사회혁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체계화 및 조직화된 반정부 세력이 부재했고, 그로 인해 집단행동의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정향은 각 권력 간 상관관계를 가지면서도 통합이나 연계하지 않고, 각 권력들이 구심점을 이탈해 각기 떠있는(floating)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총 승려의 60퍼센트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비폭력주의를 옹호하고 심지어는 시위대에 포위된 정부 인사를 보호하기도 했다. 1988년 8월 30일 시위에 참여한 1,500명의 승려들은 불교에서 제시하는 지도자의 10가지 덕목을 외치며 군부의 퇴진을 간접적으로 요구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승려는 승단만이 피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집단이라고 간주한다.

승려들은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범국민 계몽 운동을 펼친 사회 최고의 지도층이다. 근대 국가 출범 이후 상가를 보호하고 후원해 주는 왕의 존재가 사라졌고, 세속적 법률이 정법을 대신했기 때문에 상가는 사회적으로 그 기능이 고립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러나 상가는 여전히 계율을 따르고 정법을 전달하는 불교의 일차적 기능을 담당하는 매개체로서 종교적 성향이 뚜렷하며 교리상 비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불교 중앙 조직인 국가상가대위원회(Naingandaw Thanga Maha Nayaka Komiti, State Sangha Maha Nayaka Committee)는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시위를 시위대에 요구했고, 정부에게는 시위대의 요구를 경청해 줄 것을 요구하는 다소 애매한 성명을 발표했다. 일부 젊은 승려들과 단기 출가자들은 식민지 시대와 2차 대전 중 젊은 승려들이 군인으로 참전했던 역사를 기억하며 1988년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나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시위의 주도 세력이었다. 학생들은 미얀마 독립의 주체였던 버마독립군이 있게 한 장본인이었고, 군 창설 이전부터 지하활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구상했다. 네윈 시기에 들어서도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시대정신을 배양했으며,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하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다.

정권 타도를 위한 학생들의 목적의식은 같았더라도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체제의 종착점은 상이했다. 아직까지도 폭력적 혁명을 꿈꾸는 일부 학생 지도자들은 세계의 게릴라 전술이나 폭동 내용이 담긴 비디오를 보면서 폭력적 행위를 학습했고, 학생 집단들은 이념과 목적에 따라 집단별로 와해되었다. 또한 일부 학생들은 대중들을 농락하는 것과 같은 무례한 행동을 일삼으며 마치 자신들이 정치가라도 된 듯이 행동하며 메시아적인 발상에 사로잡혔다.

우 누는 네윈의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강탈당했기 때문에 1947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여전히 자신이 정통성을 가진 총리라고 선언하고 9월 9일 25명의 내각 명단을 포함한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반정부 지도자들의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은 관계로 아웅산수찌와 아웅지(Aung Gyi)는 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는 아웅산 장군의 후광을 얻어 단기에 대중적 인기를 끌고 권력의 일원화를 현실화 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아웅산수찌의 양공행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병든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서였고, 3월 유혈사태부터 8월 말 쉐더공 파고다 연설이전까지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들은 아웅산의 장남인 아웅산우(Aung San U)를 시위의 지도자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웅산우는 이미 미국의 시민권자로서 스스로 미얀마 내정에 간섭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지 않았다.

마하삼마타(maha sammatha)는 인도 군주정치의 모델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보편적인 것이다... 마하삼마타는 국민의 합의에 의하여 선출되고, 올바른 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요구되는 터이므로,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가 버마의 전통적인 사상과 상충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마하삼마타는 국민을 기만하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국민을 잘 못 인도하는 일은 직무상의 과실이요 배덕 행위이다... 전통적인 가치를 거론함으로써 국민들은 민주적인 정부를 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며,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정부의 왕은 국가를 자신들의 마음대로 영원히 통치하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 왕은 지켜야할 열 가지 덕목(minkyinttaya), 타락을 대비한 일곱 가지 계율(apalihaniyataya), 국민을 돕는 4가지 수단(thingahataya)이 있다.

위의 연설문에서 보는 것처럼 아웅산수찌는 왕조시대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국민에게 강조하며 집권 군부를 간접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시위대는 민주화 요구 시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아웅산 장군의 영전을 앞세웠다는 점을 참조했을 때 세월이 흘렀어도 미얀마 근대 정치의 마하삼마타는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 장군의 혈육이 등장한 것은 새로운 마하삼마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제 아웅산수찌는 왕조시대 왕들처럼 ‘이미 태어난’ 지도자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외국생활로 인해 미얀마 내부 문제에 밝지 못했고, 이 때 당시만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개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서구적인 시각에 입각했다. 따라서 지적 수준이 높지 않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 정치사상과 융합될 수 없었다. 정치 입문 초기에는 아웅산 장군의 영정 사진에 자신의 사진을 대비시킴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이끌었으나 1989년부터 1995년 가택 연금 기간 동안 위빠사나(vippasana) 수행을 하는 등 불교가 제시하는 정치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95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후 미얀마에서 지명도가 높은 승려(sayadaw)와 함께 사진을 찍고 그것을 자신의 선전 포스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2003년 열반에 든 우 위나야(U Vinaya)는 아웅산수찌의 영적인 스승이었다. 그녀가 주장했던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및 사상은 미얀마에서는 완전히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아웅산수찌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집권 세력과 대화나 국가 화해를 소망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었다.

5.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얀마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왕조시대부터 형성되어 지속된 힌두·불교문화의 하위 요소인 정치철학과 점성술, 산자술은 근대 국가 출범 이후에도 정치행위에 중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제도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정치 이데올로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근대 미얀마의 정치 이데올로기 성립 배경이 불교적 정체성에서 모색되었던 점은 국민 및 정치 엘리트들의 역사적 요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사적 배경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전통왕조의 기능적 행태를 근대적 정치구조와 통합 시키지 못하여 국가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켰다. 즉 빠르게 변화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의 측면에서 지속 가능한 공식적 문화 요소들을 발전시켜 동시대적 분석이 병행되는 역사적 관습을 재구조화 또는 재건하는데 두 지도자 모두 실패했다고 보인다.

둘째, 정통성 없이 집권한 네윈은 점성술과 산자술 등 미신적 술법에 의존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했고, 개인의 집권 연장을 꾀하고도 했다. 또한 군권을 동원하여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했다. 점성술과 산자술은 현실세계의 통과 의례나 어떠한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일회성 높은 행위에 불과하므로 근본적으로 정치인들의 정통성 확보와는 무관한 요소이다.

셋째,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발생한 민주화 요구 시위는 두 시기의 체제적 특징이나 모순점이 전개과정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민주화는 사회체제의 변동, 즉 근대화의 바탕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중 정치적 근대화는 문자 해독률, 교육, 증가된 커뮤니케이션, 매스미디어의 배열과 도시화의 결과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이 현대세계에 공통된 태도, 가치관, 기대로 변화하고, 동시에 경제발전은 사회 제집단의 열망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체제 전복이나 자유화에 대한 열망적 기대가치에 비해 그 목적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문화적 요소가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미얀마인이 공유하고 있는 불교적 가치관과 근대 정치사에서 목격된 우 누 및 네 윈 체제의 기능적 특징이 정치 행위의 근본 도구로 채택 되었다. 따라서 근대화의 산물인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정치행위는 자신들의 목표를 지지할 수 없는 기능적 한계에 봉착하였다. 다양한 권력이 분립적인 양상을 띠고, 시위를 이끌어 줄 제도와 지도자의 부재는 점성술과 산자술이 대신했다.

결과적으로 1988년 사태는 발생학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구조적 실패를 새로운 정치제도로 변환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사회 운동이었으나 문화적 측면을 기준으로 볼 때 기존의 정치체제가 마련해 놓은 이데올로기의 틀 또는 영향력 아래에서 전개된 딜레마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 누 시기를 제외하고 허약한 정통성 기반을 가지고 있는 작금의 제도권이 전통적 가치관을 정치행위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현상을 고려할 때 동일한 구도로 전개된 1988년 사태는 근대 미얀마 정치체제의 특징 및 역동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이자 정통성의 도구가 여전히 전통적 가치관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 주는 증거이다.

장준영
부산외국어대학교 미얀마어과 및 서강대학교 석사과정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미얀마 군부와 불교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작성 중이며, 외국어대 강사. 주요 관심 분야는 미얀마의 정치와 불교, 체제변동, 시민사회 발전 등이다. 논저서로 <미얀마의 정치적 동학과 가능성: 군부의 갈등과 재편을 중심으로>(2005) <미얀마-아세안 관계발전: 아세안의 정책변동과 미얀마 군사정부의 대응>(2006) <미얀마의 신헌법 제정과 정치질서의 미래>(2006) <탈냉전 이후 미얀마-중국 관계의 지속과 변화: 형제간의 우애인가?>(2007) 《미얀마》(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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