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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魏晋)·당대(唐代)의 불교와 유교 / 김용남
특집 | 불교 속의 유교, 유교 속의 불교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김용남 yhunkim21c@hanmail.net

1. 시작하며

너 나 할 것 없이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는 불안하기 마련이다. 설사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어 청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생경한 곳으로 옮겨 앉는 일은 그리 녹녹지 않음이 틀림없다. 하물며 오랜 세월 집약된 사상이나 종교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녹아드는 일이란 기적에 가까울 만큼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이 새 장소에 뿌리내리는 데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선택되는 방법은 바로 습합과 교섭이다. 즉 이주하고자 하는 지역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던 사상이나 종교와 교설(敎說)을 결합하고 절충하는 것이다.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 역시 그 과정을 겪었다. 이름 하여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것이 그것이다.

격의불교1)란 중국사람들이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중국 고유의 사상을 통해 이해했던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1) 예컨대 축법아(竺法雅)와 같은 이들이 중국인들에게 불교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교나 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에서 유사한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하여 불교를 설명하였다. 소위 이러한 방식, 즉 자신들의 사상에 있는 개념을 통하여 불교를 이해하는 방식을 격의불교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중국인들이 불교를 그들 고유의 사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고 더욱 빨리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붓다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워낙에 중국인들은 서쪽 관문을 통해 사라진 노자가 천축으로 갔으리라고 나름대로 유추했고, 그 결과 붓다라고 하는 성인이 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붓다의 말씀, 즉 불교는 노자의 말씀, 즉 도가(道家) 사상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중국인 특유의 자부심 또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호감이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노자화호경》이 바로 그것을 입증해 주는 저작물이다. 이처럼 비록 노자를 앞세워 불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국인들이 불교에 대해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불교가 가진 장점 가운데 어떠한 종교나 사상을 막론하고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방대한 교리와 포용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도가 사상이나 유가(儒家) 사상에 젖어 있던 중국인들에게 그리 낯설고 생경하지 않았던 데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어떤 절대적이고도 강력한 존재2)에 대한 희구까지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고 하는 점은 충분히 호감을 살만 했다는 점이다.3) 2) 금으로 된 사람이 광명을 비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사람이 닿을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내용이라 할 수 있다. 3) 불교의 전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대체로 후한(後漢) 명제 때로 보는 경향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 당시 불교가 전래되게 된 배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새로운 학설에 대한 호기심이나 매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명제 영평 10년, 어느 날 밤 명제가 금인이 서쪽에서 광명을 비추면서 궁정에 내려오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채음, 주경, 왕준 등 18인을 서역으로 보내어 불도를 구하게 하였다. 그들은 인도로 가던 도중에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오던 가섭마등과 축법난 두 사람을 만나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는 무척 기뻐하여 낙양문 밖에다 백마사를 짓고 이곳에 두 사람을 살게 하였다.(道端良秀/계환 역, 《중국불교사》, 우리출판사, 2003, 17쪽.)”라고 하는 설이다. 이 내용을 토대로 살펴볼 때 마치 이미 정해진 숙명처럼 중국의 황제는 선몽을 통해 불교를 수입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논자 또한 그 학설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그때의 정황을 유추해 보았다.  

 어쨌든 그 덕택에 인도에서 성립된 이질적인 불교를 중국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 차원에서는 격의불교의 긍정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의 고유 사상과 불교를 습합 및 교섭하는 과정에서 편의 위주로 불교의 본뜻을 왜곡시킨 면도 없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볼 때는 불교와 유교라고 하는 두 입장은 불교와 도가라고 하는 두 입장에 비해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근본적으로 불교와 도가, 그리고 유교는 모두 인식함으로써 드러나는 세계를 내려놓음으로써만 진실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러나 유교의 대부분은 앞의 두 가르침에 비해 일반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 자체가 예를 지키는 질서규범에 모든 것이 얽매여 있다.

 따라서 표면만 보면 근본을 지향하는 불교와 형식을 중시하는 유교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좀 더 천착해 들어가 보면 예는 결국 성인의 행동거지를 본받아 만들었으므로 하늘〔天〕이라고 하는 뿌리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해 주는 경전은 바로 《중용》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공(空) 사상의 내용 또한 《주역》을 통해서 회통이 가능하다. 결국 《리그베다》에서 “진리는 하나이며, 현자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부른다.”라는 말처럼 서로를 이해하고자 얼마나 마음을 열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4)   4)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상(我相)이 높으면 남이 들어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상(我相)을 내려놓고 보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마당에 불교가 유교와 하나 되는 일이 무에 그리 큰일이겠는가 하는 것이 논자의 입장이다.

따라서 논자는 불교와 유교가 서로 배척하는 내용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서로 만날 수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하고, 나아가 종교 간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데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위진, 당대를 거쳐 중국 고유 사상인 유교와 습합과 교섭을 거쳐 중국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와 유교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 둘을 통합시키는 입장에서 각각 양교(兩敎)의 만남을 시도한 사상가들의 저작을 골라 분석하는 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종교의 습합과 교섭, 그리고 중국화

1) 위진부터 남북조 시대의 불교와 유교

양한(兩漢) 대의 중국 사상계는 유학(儒學)이 거의 독점해 오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학은 원시 유교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로서의 기능보다는 훈고 해석학이 위주였다. 그러므로 종교 본래의 기능인 인간 본연의 근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녔을 것이란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후한의 멸망과 함께 유교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5)  5) 비록 위진시대에 유교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주(宗主)의 지위까지 상실했다는 뜻은 아니다. 통치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서 충(忠)이나 효(孝)는 여전히 적절한 지도 이념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진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시대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현학화하기도 했으며 불교와 도교를 아울러 취급하기도 했다.(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중국유학사 2권》, 신원문화사, 1977, 220-222쪽 참조.)

이 변혁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현학(玄學)6)이다.  6) 위진 시대의 현학은 도가 사상과 유학 사상의 합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현학의 탄생과 함께 후한 시대에 들어와 근 300여 년간 신앙의 대상으로서 외에는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던 불교는 점차 중국인들의 관심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하였다. 중국인들은 노장(老莊)의 무(無)와 무위자연 사상이 도(道)의 근본이라 보고 이 도를 체득한 사람이 성인(聖人)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른바 격의불교, 즉 중국 사상으로써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죽림칠현으로 불리는 당대(當代)의 사상가들7)은 새롭게 제공된 한역불전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7) 현학가들은 노장 사상에 유가 경전의 사상을 혼합하여 양한(兩漢)의 경학을 대체했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무(無)를 만상의 근원이며 도의 근본이라 여겼다. 따라서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이들의 새로운 사상 운동은 위진 사상계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여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는 지식인들을 배출시켰다. 이들 덕분에 불교는 철학적 불교로 개화할 수 있었다.(鎌田茂雄 著/鄭舜日 譯, 《中國佛敎史》, 경서원, 1996, 45쪽.) 이들은 때마침 서역에서 들여온 대승경전 《반야경》이나 《유마경》 등의 공(空)사상이 도가의 무(無) 사상과 유사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들 덕분에 유교 사상 또한 형이상학적 해석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자(儒者)로서 불교에 심취한 사상가와 도가 사상가로서 불교에 심취한 사상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유자(儒者)로서 불교에 심취하였다가 훗날 불교를 믿게 된 모자(牟子)8)는 유·불·도 3교의 조화를 꾀했는데 그 저작물이 바로 《이혹론(理惑論)》이다.  8) 생졸 연대를 대략 165~251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불확실하다. 《홍명집》에는 모자를 후한의 모융(牟融)이라 하였으나 아닐 것으로 본다. 《이혹론》의 저술 연대 역시 후한 말에서 남조의 송(宋)·제(齊) 시대까지 설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후한 말이란 설은 맞지 않아 보인다. 조길혜 외/김동휘 譯, 《중국유학사》에서는 위진 시대의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149쪽) 

이 책에서 모자는 불교와 유교는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는 처음 불교를 접한 중국인들이 유교 윤리와 불교는 서로 결합하기 어렵다고 함으로써 부딪쳤던 충돌에 비하면 비약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부 유학자들은 《효경》을 들어 “불효에는 자식이 없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삭발하고 장가들지 않는 불교를 극력 배척했다.

이에 대해 모자 역시 《효경》을 들어 “선왕들은 가장 훌륭한 덕행을 제창했다. 그런데 태백은 삭발 문신하고 남방에 가서 오월(吳越)나라의 풍속을 따랐으니 이것은 부모가 준 몸을 아끼라는 명훈에 어긋난다. 그러나 공자는 도리어 그를 ‘숭고한 도덕을 갖추었다’고 칭찬했으며 태백이 삭발 문신했다 하여 꾸짖지 않았다. 대덕이 구비되었으면 사소한 일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여겼다.9)  9)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앞의 책, 149-150쪽 참조.

그야말로 원론적이지만 통쾌한 반박이 아닐 수 없다.10)  10) 실제로 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지하다시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논어》 〈이인〉: 朝聞道 夕死 可矣.)”라고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道), 즉 진리를 깨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양한 시대의 훈고학이라는 학문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시대에까지도 구태의연한 유학자들은 유학을 말하면 오직 가계(家繼)를 거론하며 무후(無後)를 가장 큰 불효로 꼽는다. 그들에게는 왜 무후가 불효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사 밖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이나 불교의 겉을 읽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진면목을 통해 아우르고자 했던 모자는 세인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모자가 《이혹론》을 지었던 이유도 말도 안 되는 반문에 일일이 답하느니 차라리 책 한 권으로써 대항하고자 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모자의 《이혹론》 내용을 보면 전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해박하면서도 겸손하며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반면 그를 비판한 유자들이야말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유불(儒彿) 성현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억지까지 부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순수하게 승려로서 유가 학설을 인용하여 불교를 해석함으로써 유가와 불교를 조화시킨 이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불교의 교의를 유교 사상과 완전히 일치시켜 해석함으로써 유학에 영합하였다. 예컨대 강승회나 강승개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강승개는 유교의 오상(五常)을 불교의 오계(五戒)의 내용에 넣기도 하였다.11)  11) 물론 이 당시에도 불교는 출세간법이고 유교는 세간법이라 하여 서로 융합되기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았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불교는 단순히 격의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한역화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격의적 해석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불교 경론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학파적 성격의 불교가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 교단도 생겨나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불교의 한역 작업이 왕성해지고 교단이 발전하게 된 데는 구마라집과 같은 인물의 공헌이 컸다. 게다가 새롭게 탄생한 현학의 유행과 도교의 생장도 불교의 성행을 돕는 데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유교에는 남북조가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즉 기존에 병존하던 현학경학과 훈고경학이 이 시기에 이르러 분립되는 국면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조에서는 유학이 현학화의 영향을 받은 데다가 불교·도교와의 세력 사이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러나 북조에서는 통치자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유학을 제창12)하는 바람에 유교 경전 연구가 활발하였다. 12) 소수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지배질서 확립이 중요했다. 따라서 삼강오상이라든지 예의제도 등을 더욱 열심히 제창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음은 물론 수많은 경전의 주석서도 나왔다.13)  13)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앞의 책, 200-202쪽 참조.

이 말은 비록 북조에서 유교 경전 연구가 활발했다고는 하나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도모할 수 있는 맥은 오히려 남조에서 이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와 유교를 논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두 종교는 가장 크게 부딪치면서 오히려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즉 이하(夷夏) 논쟁과 신멸불멸(神滅不滅) 및 인과응보에 관한 논쟁 같은 경우이다. 이하 논쟁이란 오랑캐와 중국 사이의 논쟁이다. 즉 하내(夏內)를 중국으로, 하외(夏外)를 이적(夷狄)으로 보아 불교를 오랑캐의 학문으로 규정짓는 논쟁이다.

 그리고 신멸불멸에 관한 논쟁은 유교가 죽으면 형신(形神)이 함께 없어져 후세에는 응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불교는 신불멸을 내세우고 3세의 인과응보를 주장한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겉으로 보면 서로 배치되므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론이다. 그러나 논쟁과 투쟁은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향한 조율일 수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로를 더 많이 알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위진남북조 시기 유학과 불교는 현학의 탄생과 함께 겨룸과 치열한 충돌 가운데서 나중에는 양자가 조화·융합으로 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진 시기에는 양교의 융합이 유학과 불교를 황권과 교권의 이익 관계를 조화시키는 데 있어 표면에 국한되었다고 한다면,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교의 융합이 이론과 사상층에 깊이 파고들었다 할 수 있다.

이는 유교가 이미 단독적인 사회 통치 지위를 상실하고 불교와 함께 사회 통치 사상으로서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양교의 융합을 통해 유학은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 더 한층 현학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학이 불교의 도전을 받음으로써 유자들은 유학 경전에 대해 더 깊게 연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수당(隋唐) 대에 영향을 주었고, 더 나아가 중국 전통문화의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14)  14)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앞의 책, 174-175쪽 참조.

2) 수당(隨唐) 시대의 불교와 유교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수당(隨唐) 대는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제각각 행보를 하던 유교는 통일을, 불교는 외래 불교로 인식되던 틀에서 벗어나 마침내 중국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불도 3교의 융합도 계속 진행되어 당조(唐朝) 중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양교가 서로 회통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불교에 의지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무제(周武帝)가 불교를 억제했던 것과는 달리 대대적으로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이는 유학의 지위가 날이 갈수록 낮아졌던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불경이 유교 경전보다 수백 배나 더 많아졌다.

동시에 불상을 주조하고 불탑을 널리 세움은 물론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그야말로 당대(唐代)에 이르러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할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수양제(隨煬帝)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심지어 수조(隨朝)의 명사 이사겸(李士謙)은 “불학은 해이고 도학은 달이며 유학은 오성(五星)이다.”15)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불교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15)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위의 책, 226-229쪽 참조.

실제로 이 시기에 불교는 많은 역경승들의 활약으로 수많은 경전들이 역출되었으며 영유·혜원 등과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론16)을 소의로 하는 삼론종과 천태대사 지의에 의해 세워진 천태종, 신행에 의한 삼계교 역시 이 시기에 세워졌다.17)  16) 《중론》과 《십이문론》, 그리고 《백론》을 말함. 17) 鎌田茂雄/鄭舜日 譯, 《中國佛敎史》, 앞의 책, 154-178쪽 참조.

그러나 유교는 기존의 남북 학자들이 경전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 여전히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경의 의미가 점점 더 번쇄해졌고 현실과도 동떨어졌다.

따라서 수문제를 비롯하여 유학에 흥미를 느꼈던 사람들에게조차도 날로 실망만 안겨 주게 되었다. 게다가 비속(卑俗)한 유생들의 품행은 유교 사상이 멸시받게 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잘 뒷받침해주는 내용은 《구당서》 〈소덕언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수조 시기에는 사회가 혼란하고 학교가 자취를 감추어 유도(儒道)는 진흙탕에 밟히고 시서(詩書)는 구덩이에 채워졌다.”18)고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18)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앞의 책, 225-247쪽 참조.

수(隨)가 멸망하고 즉위한 당 고조(高祖)는 유생들을 좋아했다. 따라서 즉위하자마자 학교부터 회복하였으며, 즉위 2년에는 조서를 내려 자신은 유학을 숭상하므로 유교를 흥하게 하리라고 천명하였다. 뒤를 이은 당 태종 역시 정관의치가 말해 주듯이 유교 경전에 정력을 쏟아부었고 조회가 끝나면 경전의 뜻을 강론할 만큼 열의를 보였다.

그 덕택에 위기에 놓여 있던 유교 경전은 본래의 뜻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물론 경전에 대한 주해서도 잇따라 편찬되었으며 《오경정의》19)도 완성을 보았다.  19) 태종의 명에 따라 공영달, 안사고 등이 오경(五經)을 주석(註釋)한 책. 

《오경정의》가 완성되자 조정에서는 교과서로 삼았으므로 당연히 과거 시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짚어야 할 점은 《오경정의》의 완성과 반포는 단지 경학 차원에서 유학의 통일과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지 진정한 유학의 부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학의 내재적인 도덕 심성(心性) 면에서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사회 정치에 도입시킴으로써 외왕(外王)의 전통만 드러내 치세에 도입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상 유학의 정취가 흐르는 듯 보였을 뿐 진정한 유학 정신의 부흥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20) 20) 조길혜 외/김동휘 옮김, 앞의 책, 255-259쪽 참조.

따라서 내적 심성론에 관심을 두었던 선비들의 불만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시문을 짓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당조(唐祖)의 문장은 전례 없이 빛나게 되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불교나 도교로 옮겨 갔다. 더욱이 당나라 중기를 넘으면서부터 유학은 아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으며, 새로운 가치 체계가 요청되고 있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정치적인 부패와 사회적인 불안이 놓여 있었다. 안사의 난 이후에 사회질서는 붕괴되고 부패한 정치권력은 무기력했으며, 기존의 사상이나 가치 체계에 절망한 대중은 어떤 형태로든 탈출구를 희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세속적 교의에 머물러 구세(救世)종교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유교는 대중들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의식 있는 선비들이 도교나 불교에 입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21)  21) 졸저, 《성리학, 유불도의 만남》, 운주사, 2002, 120-121쪽 참조.

당조에서의 불교는 중국화가 완성된 시기이면서 동시에 불교사상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시기이다. 서방과의 교류를 통한 다양한 외래 종교도 이 시기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게다가 삼장법사로 불리는 현장은 직접 인도로 가서 17년이란 세월 동안 익힌 언어를 통해 불교를 번역 해냈다.

 따라서 불교 문화가 만개할 수 있는 터전은 완벽하게 구축된 상황이었다. 물론 법상종·화엄종·밀교·선종·정토교 등의 제종(諸宗)이 성립하고 발전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 가운데 특히 혜능(638~713)에 의해 독자적인 종파의 위상을 갖추게 된 선종은 후대 중국 조사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된다.

선종은 그 이후 중국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교 신앙이나 문화는 서민층에 깊이 침투하였으며, 사원경제도 크게 발전하였다. 사원경제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서 마치 하나의 기업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즉 사원에는 승려 이외에 동자(童子), 사미(沙彌), 노비 등이 거주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음은 물론 자체의 수익사업도 크게 성행할 정도였다. 사원이 소유하는 영지(領地)는 원칙적으로 보시로 마련되었으나, 교단이 확장되고 사원이 융성해짐에 따라 승려들이 직접 사원의 영지를 확장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원래 복전(福田) 사상에 토대를 둔 금융사업까지도 나중에는 축재(蓄財)와 영리를 추구하는 고리대금업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로 당대(唐代)의 사원은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부렸으며, 귀족과 결탁하여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도 큰 영향을 주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22)  22) 鎌田茂雄/鄭舜日 譯, 앞의 책, 179-200쪽 참조.

따라서 황제를 영수(領袖)로 하는 국가정권과 승려지주 간의 경제적인 충돌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려는 생각에서 불교를 반대하기 시작하였다.23) 23) 王力/장영백 外 譯, 《經學槪說》, 청아출판사, 1992, 137쪽 참조.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배불 운동으로 나타났고, 자연스럽게 유교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융성했던 만큼 폐단을 드러낸 불교에 반발하면서 나타나는 사상적 지각변동이 바로 유교 부흥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형식적 교의에 그침으로써 정치·사회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던 당시의 유학 형태가 아니라 불교를 대체할 수 있는 심성론으로의 회귀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당나라 중기가 되면서부터 유불도(儒佛道) 삼교일치 사상도 생겨나게 되었으며, 대다수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인성론이 주된 관심과 논쟁거리였다. 그만큼 사회적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한유(韓愈, 768~824)24)와 같이 불교를 극력 배척하면서 유교 부흥 운동을 주창한 유자도 있고, 유불도에 두루 밝아 불교의 교리에 유교를 접목시킨 양숙(梁肅, 751~793)25)도 있었다.  24) 자(字)는 퇴지(退之)이며 스스로 창려인(昌黎人이라 했다. 3)세(歲)에 고아(孤兒)가 되어 형(兄)에 의해 양육되었다. 25) 자는 경지(敬之, 建中(780~783) 때에 한림학사가 되어 우보궐(右補闕)을 맡고 황태자의 시강(侍講)이 되었다.

그리고 불교가 유교와 다르지 않다고 인정하지만 유학을 진흥시켜야 할 시기라고 인식함으로써 인의도덕 중심의 원시 유교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던 이고(李퇅, 772 혹은 774~836 혹은 841?)26)도 있었다.
26) 자는 습지(習之)이며, 당시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던 문인 관료이기도 하다. 생졸연대가 불분명하며, 출생지 역시 분명치 않다.

또 유종원(柳宗元, 773~819)27) 같은 인물은 유불 통합 사상을 들고 나왔다. 이들 가운데 불교를 극력 배척한 한유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저작을 토대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27) 자는 자후(子厚)이며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유하동(柳河東)이란 이명이 있다. 한유와 함께 한유(韓柳)로 병칭된다.

3. 한자리에서 만난 불교와 유교

이미 언급했듯이 당나라 중기 이후는 지배 질서는 무너지고 불교의 폐단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지배 질서의 확립은 물론 이미 불교를 통해 종교의 순기능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에게도 대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체계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따라서 사회의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불교라고 하는 종교성을 여타 사상에서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둘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또한 그들이 대안으로서 새롭게 구축한 사상 체계가 기존의 불교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유교 부흥 운동이다. 위에서 언급한 몇몇은 그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그 가운데 한유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나름대로 불교와 유교의 종지를 하나로 인식한 사상가들이라 할 수 있다.

1) 양숙(梁肅)의 〈지관통례〉를 통해 본 불교와 유교
양숙은 유자(儒者)라고는 하지만 종교를 초월하여 학문을 궁구하였다. 물론 불교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천태지의가 지은 《마하지관》 20권을 다시 편찬하여 6권으로 만든 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형계잠연(荊溪湛然 711~782)28)의 영향을 받아 직접 〈지관통례〉를 저술하기까지 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28) 역시 원래는 유교인이었으나 나중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람이다.

〈지관통례〉는 《불조통기(佛祖統紀)》 권 제49에 실려 있는 글이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의 핵심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관통례〉를 살펴보면 양숙의 불교와 유교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지관(止觀)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만법의 이(理)를 이끌고 실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실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성(性)의 본(本)이다. 물(物)에 구속되어 회복할 수 없는 것은 혼(昏)과 동(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혼(昏)을 비추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동(動)을 비추는 것을 정(靜)이라고 한다. 명(明)과 정(靜)은 지관(止觀)의 체이다. 인(因)에 있어서는 지(止)·관(觀)이라 하고, 과(果)에 있어서는 지(智)·정(定)이라 한다. ……멈추면 보게 되고, 고요하면 밝아진다. 동(動)을 제어하면 정(靜)할 수 있고, 정(靜)하면 밝을 수 있다. ……삼제란 무엇인가? ‘하나’를 일컫는다. 공(空)·가(假)·중(中)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공·가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로 하는 말이다.29)   29) 夫止觀何爲也 導萬法之理而復於實際者也 實際者何也 性之本也 物之所以不能復者 昏與動使之然也 照昏者謂之明 動者謂之靜 明與靜止觀之體也 在因謂之止觀 在果謂之智定……止而觀之 靜而明之 使其動而能靜 靜而能明……三諦者何也 一之謂也 空假中者何也 一之目也 空假者相對之義.

이미 언급했듯이 양숙의 윗글은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도가 사상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용(中庸)》의 성(性)과 명(明)을 말하는 한편으로는 불교의 명(明)·정(靜)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의 무명(無明)을 혼(昏)으로 표현하였다. 또 지관(止觀)을 정(定)·혜(慧)로 풀이하는 대신 지(智)·정(定)으로 풀이하였다. 이어서 양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도’라는 것은 ‘하나’를 얻은 것의 이름이다.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이(理)는 근본을 이르는 말이고, 적(迹)은 말(末)을 이른다. ……공(空)을 들으면 법(法)에는 공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을 완성한 것을 가리켜 삼덕(三德)30)이라 하고 그것을 닦는 것을 삼관(三觀)31)이라 하지만, 그 요체를 들자면 성인이 지극히 연구하신 궁리진성의 설과 같다.  30) 佛果의 공덕으로서 智德·斷德·恩德을 말한다. 부처가 일체를 다 아는 것을 지덕이라 하고, 부처가 온갖 번뇌를 다 끊었다 해서 단덕이며,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여 해탈케 하므로 은덕이라 한다. 혹은 法身德·般若德·解脫德을 말하기도 한다. 31) 천태의 空·假·中觀.

……성인은 (그 하나를) 소유하였으므로 만법(萬法; 공간적)을 경륜하여도 차별을 두지 않고, 만겁(萬劫; 시간적)을 두루 덮어도 빠트림이 없다. 항하사 모래를 다 실었어도 소유하는 법이 없고, 무물(無物)로 돌아갔으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에 깃든 것을 이름 하여 ‘부처(佛)’라 하며, (무어라 이름 할 수 없어서) 억지로 ‘각(覺)’이라 부른다. 종지(宗旨)를 궁구할 것 같으면 그 해탈자재함은 극묘지덕(極妙之德)보다도 크다. ……지관(止觀)은 세상을 구제하고 도를 밝히는 글이다 .……오직 성(性) 하나일 뿐이거늘 그것을 얻으면 깨달았다 하고 그것을 잃으면 미혹되었다 하나니 일리(一理)일 뿐이다. 미혹된 자를 범인이라 하고 깨달은 자를 성인이라 한다. 미혹된 자는 스스로 막힌 것이지 이(理)는 막히는 법이 없다. 잃어버린 자는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지 성(性)은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32)  32) 中道者得一之名……自然之理也……理謂之本 迹謂之末……擧空則無法不空 成之謂之三德 修之謂之三觀 擧其要則聖人極深硏 幾窮理盡性之說乎……聖人有以彌綸萬法而不差 旁?萬劫而不遺 燾載恒沙而不有 復歸無物而不無 寓名之曰佛 强號之曰覺 究其旨其解脫自在莫大乎極妙之德乎……止觀其救世明道之書乎……是唯一性而已 得之謂悟 失之謂迷 一理而已 迷而爲凡 悟而爲聖 迷者自隔 理不隔也 失者自失 性不失也.

양숙은 중도는 ‘하나를 얻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를 다시 도가 사상의 자연(自然)의 이(理)로 합하였으며, 자연지리(自然之理))를 만법의 근본인 이(理)로 풀이하고, 다시 이(理)를 유교의 성(性)으로 각각 요해함으로써 유불도를 통섭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양숙은 천태의 삼관(三觀)을 말하면서 그 요체를 유교의 궁리진성의 가르침과 연결시키고, 성(性)을 ‘부처’(혹은 ‘覺’)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은 자를 성인, 잃은 자를 범인이라 하였다. 범인이 본성을 잃어버리는 까닭은 혼(昏)과 동(動) 때문이라 하고, ‘지(止)’로써 동을 멈추면 혼은 밝아지며, 밝아지면 바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지관(止觀)은 세상을 구제하고 도를 밝히는 글이라고 하였다.33)  33) 그 밖에도 양숙은 범인을 말하면서 ‘생멸심’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기신론》의 용어에 이미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止觀統例〉)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양숙은 비록 표면은 유학자였으나 내면에서는 불교와 유교 뿐만 아니라 도가사상까지도 회통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고(李퇅)의 〈복성서〉를 통해 본 불교와 유교
이고는 불교에서 ‘사람은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성불론을 흡수하여 ‘사람은 누구나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성성론(成聖論)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특하고 망령된 정(情)을 제거하고 본성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복성론(復性論)’이다. 그러므로 〈복성서〉의 내용을 통해 불교와 유교의 사상체계가 어떻게 접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고는 〈복성서〉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성(性)이고, 사람이 자기 성(性)을 미혹시키는 원인은 정(情) 때문이다.34) 34) 《李文公集》 〈復性書〉, 상편 : 人之所以爲聖人者 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 情也.(以下부터는 《李文公集》 〈復性書〉는 생략하고 단지 상편, 중편, 하편으로만 표시함.)

물론 《중용》의 성(性)과 정(情)을 인용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성인이 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중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정(情)을 대입한 것은 불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마치 업(業)이란 장애로 말미암아 여실하게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이 미혹되어 살아가는 사람, 즉 정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을 범인(凡人)이라 하는데 그들은 칠정(七情)이 순환하여 교대로 공격하기 때문에 본성이 충만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 정(情)은 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고, 정은 망령되고 사특한 것이며 사특하고 망령됨은 인(因)한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이 소멸되어 없어지면 본성은 원래대로 맑고 밝아진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음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는 모두 정의 작용이다. 정으로 이미 어두워지면 성은 숨어 버리지만 성(性)의 허물은 아니다. 칠정이 순환하여 교대로 오기 때문에 성이 충만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성과 정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비록 그러하나 성이 없으면 정은 생겨날 곳이 없다. 정은 성으로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것이니, 정이 스스로 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으로 인하여 정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성이 성인(聖人)의 성과 같다면 좋아함과 욕심, 사랑과 미움의 마음은 어째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하면 대답은 이렇다. “정은 망령된 것이며 사특한 것이다. 사특함과 망령됨은 인한 바가 없다. 망령된 정이 소멸되어 없어지면, 본성은 맑고 밝아져 육허(六虛)에 두루 흐르게 되니, 그 때문에 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35) 35) 상편: 喜怒哀懼愛惡欲七者 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也……性與情不相無也 雖然無性則情無所生矣 是情由性而生 情不自情 因性而情……人之性猶聖人之性 嗜欲愛憎之心 何因而生也 曰 情者妄也邪也 邪與妄則無所因矣 妄情滅息 本性淸明 周流六虛 所以謂之能復其性也.

다시 말해서 중생심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중생심이라는 것도 역시 진여라고 하는 불성에 입각한 것이지 중생심이 스스로 중생심일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마치 《기신론》에서 일심(一心)을 크게 진여심과 생멸심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情)이 근본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어서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한 내용은 불교의 일원론(一元論)적 입장을 그대로 견지한 것이다.36) 36) 이러한 이고의 일원론(一元論)적 입장은 고스란히 장재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주자는 철저하게 이원론(二元論), 즉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전자는 순선(純善)하다고 하고, 후자는 선악이 공존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다음은 성인의 정(情)에 관한 내용이다.

성인이라고 어찌 그 정(情)이 없겠는가? 성인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하여 가지 아니하여도 이르고, 말하지 아니하여도 신령스러우며, 빛을 발하지 아니하여도 빛나며, 제작은 천지에 참여하며, 변화는 음양(陰陽)에 합하니, 비록 정(情)이 있으나 일찍이 그 정을 소유함이 없다.37)  37) 상편: 聖人者豈其無情邪 聖人者 寂然不動 不往而到 不言而神 不耀而光 制作參乎天地 變化合乎陰陽 雖有情也 未嘗有情也.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실상은 ‘부처’이다. 이름 할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다시피 모든 부처의 총칭이라 할 수 있는 명칭은 아미타불이다. 아(阿)는 부정[無]을 의미하고, 미타(彌陀)는 헤아리다[量]는 뜻을, 그리고 불(佛)은 빛[光] 또는 수(壽)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아미타불은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밝은 빛이므로 ‘무량광불’이며, 시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므로 ‘무량수불’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우주의 실상’인 ‘부처’의 자리는 ‘빛’이면서 동시에 ‘생명’이라 할 수 있다. 그 생명이 우주의 만물을 살린다. 제작은 천지에 참여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그러므로 그 작용을 사람의 안목으로 헤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신령스러운 것이다. ‘물질과 물질이 아닌 모든 것〔陰陽〕’과 하나로 움직인다. 이것이 천지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영원한 빛 또는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부처는 사욕으로 흐르는 일이 없다. 따라서 너무나 고요하여서 적정(寂靜)인 것이다. 그것은 움직임이라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말없이 모든 곳에 통한다. 저절로 빛난다. 따라서 성인은 웃는다고 하지만 흔들리거나 본성이 가려지는 법이 없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니 정을 소유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다음은 정사유(正思惟)에 대한 내용이다.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情)이 생기지 않으며, 정(情)이 생기지 않으면 이미 올바른 생각이 되니, ‘올바른 생각’이란 헤아림이 없고,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38)  38) 중편: 弗慮弗思 情則不生 情旣不生 乃爲正思 正思者無慮無思也.

여기서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별지각 작용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다. 분별지각 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칠정이 교대로 나타나서 서로 공격하는 것이 멈추게 된다. 분별지각 작용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본성은 더욱 숨어버리기 때문이다.39)  39) 상편: 情으로 이미 어두워지면 性은 숨어 버린다; 情旣昏 性斯匿矣.

이것은 불교의 지관(止觀)과 관련이 있다.40)  40) 《起信論》 〈修行信心分〉 참조.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弗慮弗思]’는 것은 불교의 수행 방법인 사마타, 즉 선정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불려불사의 결과로 얻어지는 정사(正思)란 불교의 정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정사유를 위해서 ‘불려불사’ 하는 것은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을 그친다는 점에서는 ‘지(止)’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을 그친다는 것은 마음을 보기 위해서다. 즉,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진여와 만나기 위한 것이다. 진여와 만난다는 것은 생멸하는 마음, 요동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지혜로운 진여의 마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여의 마음이 되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생멸상(生滅相)으로서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청정진여로서 사유인 것이다. 그것이 ‘정사유’이다. 다음은 ‘모든 성은 상대 개념, 즉 혼(昏)·명(明)이나 동(動)·정(靜)을 떠나서 적연부동하고, 광대청명(廣大淸明)하여 천지를 밝게 비추며, 감응하면 마침내 천하의 연고에 통한다’라는 내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밝음과 어두움은 성(性)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41)  41) 상편: 明與昏 性本無有.


동(動)과 정(靜)을 모두 여의어 적연부동해지는 것이 지성(至誠)이다.42)  42) 중편: 動靜皆離 寂然不動者 是至誠也.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일심(一心)일 뿐이지만 그것을 이문(二門), 즉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을 들어서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며, 또한 심생멸을 말하면서, 여래장을 들어서 세(細, 不相應心)를 말하고 생멸심을 들어서 추(?, 相應心)를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일심으로서의 대승(大乘), 즉 진여 본체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 세계를 초월한다는 내용과 같다.43)  43) 이 밖에도 이고의 복성론 전체를 놓고 하나하나 분석한다면 불교의 해탈론과 흡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에 다 열거하지는 못했음을 밝힌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볼 때, 우리는 이고의 복성론이 불교의 진리관을 섭렵하고 소화한 수준에서 쓰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의 해탈론적 체계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유교의 옷으로 갈아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이고가 주자에게 비판받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이고가 유학에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유학의 사상 속에 잠자고 있는 내용을 끄집어내 새롭게 구성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대한 유학의 사상 체계에서 불교의 해탈론적 체계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새롭게 정리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44)  44) 이로 인해 훗날 이고는 유자들에게서 ‘겉은 유교지만 속은 불교’라는 비난을 받음으로써 신유학의 머리, 즉 초석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세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쨌든 이고의 〈복성서〉는 염계학(濂溪學)의 시원이란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이고가 성리학의 창시자라는 것을 의미한다.45)  45) 논자뿐만 아니라 적원확 또한 염계학의 연원이 이고의 〈복성서〉임을 증명함으로써 이고가 송대 성리학의 개창자임을 입증하였다.(荻原擴, 《周濂溪の哲學》, 日本; 藤井書店, 昭和10, 107쪽.) 그리고 말강실도 충분한 고증을 거쳐 이고를 송학의 선구자라고 하였다.(末岡實, 〈(宋學의 先驅者) 李퇅〉, 《中國思想史上》 所收, 日本; ぺりかん社, 1987, 431쪽.)

그럼에도, 주렴계를 비조(鼻祖)로 삼음으로써 오늘날 성리학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46)  46) 더 구체적인 내용은 졸저, 《성리학, 유불도의 만남》에 상세하다.

3) 유종원(柳宗元)의 유불(儒彿) 통합 사상
유종원(유하동)은 일반적으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교에 대한 조예도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유와 같이 고문 운동을 주도했지만 한유처럼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와 유교를 통합시킬 것을 주장했다. 유종원은 불교와 유교는 그 종지(宗旨)가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근본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교의에 머물러 있는 유교만 제 모습을 찾으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한유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한유가 (불교를) 허물하는 것은 바로 (불교도들의) 발자취이다. 말하기를, “머리를 깎고 승복 입고서 부부와 부자 관계를 없애며, 농사짓고 누에를 치지 않으면서 남에게 의지해 살아간다.”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것은 비록 나일지라도 역시 싫다. (그러나 이것은) 한유가 겉모습에 분노해서 그 알맹이를 버리는 격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돌만 알아보고 (돌이) 그 속에 옥을 품고 있음은 모르는 격이다.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보배를 품고있기 때문). 불교도들과 교유한다는 것이 꼭 부처님의 가르침에 통할 수 있어서는 아니다.47)  47) 《유하동집》권 25, 〈송승활초서〉: 退之所罪者其跡也 曰 ?而緇 無夫婦父子 不爲耕農蠶桑而活乎人 若是 雖吾亦不樂也 退之忿其外而遺其中 是知石而不知?玉也 吾之所以其浮圖之言以此 與其人遊者 未必能通其言也.

당시의 불교도들이 비록 유자(儒者)들이 생각하는 강상(綱常)을 어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겉으로 보이는 불교도들의 문제를 마치 불법 자체가 잘못된 양 매도하는 한유의 태도에 대한 반박이다.

사실 유종원이 불법에 통하고 못 통하고를 언급하는 데는 나름대로 자부하는 바가 있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나는 어려서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도를 구한 지 삼십 년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 그(부처님) 말씀에 대하여 관통한 사람이 드물었다. 영릉에서 나 홀로 깨달은 것이 있다.”48)라고 했다. 48) 《유하동집》권 25 〈送巽上人赴中丞叔父召序〉: 吾自幼好佛 求其道 積三十年 世之言者罕能通其說 於零陵 吾獨有得焉.

 본인의 말대로 깨달음이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종원의 다음 글은 일이관지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부처는 진실로 배척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빈번하게 《역경》이나 《논어》와 더불어 일치하여 진실로 즐겁다. (불교 이론이) 그 성격에서는 분명히 공자의 도와 다르지 않다.……말하기를 “오랑캐라서 배척한다.”라고 하는데, 도(道)는 믿지 아니하고 오랑캐라 하여 배척한다면 장차 악래와 도척 같은 중국의 악인은 벗삼으면서 계찰과 유여 같은 현인은 천하다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이른바 ‘이름을 떠나 실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취하는 것은 《역경》과 《논어》의 뜻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비록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배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49)  49) 《유하동집》권 25, 〈송승활초서〉: 浮圖誠有不可斥者 往往與易論語合 誠樂之 其於性情奭然 不與孔子異道……曰 以其夷也 果不信道而斥焉以夷 則將友惡來盜? 而賤季札由余乎 非所謂去名求實者矣 吾之所取者與易論語合 雖聖人復生不可得而斥也.

유종원에게는 불교냐 유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아닌가만 중요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종원에게는 상대가 불자(佛者)인지 유자(儒者)인지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불교도, 즉 승려들과의 교류를 좋아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승려들의 처세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 그것이다.

무릇 그 도를 행하는 자는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능력을 다투지 아니하고, 산수를 좋아하고 한가롭고 편안함을 좋아하는 자가 많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오로지 세력만 추구하여 서로 반목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한 즉 이를(불교) 버리고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제가 불교도들과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50)  50) 《柳河東集》 권 25, 〈送僧活初序〉: 凡爲其道者 不愛官 不爭能 樂山水而嗜閑安者爲多 吾病世之逐逐然唯印組爲務以相軋也 則舍是其焉從 吾之好與浮圖遊以此.

뿐만 아니라 불교 유입 이래 지속적으로 유자들이 들먹이던 인의도덕문제 역시 ‘불교는 계율을 지킴으로써 근본을 삼는다’는 견해를 보임으로써 매듭을 짓는다. 

유교는 예로써 인의를 확립하므로 그것이 없으면 무너진다. 불교는 계율로써 정혜를 유지하므로 계율을 떠나면 끝이다. 그러므로 예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인의에 들었다고 하는 자와는 유교를 말할 수 없고, 계율을 달리하면서도 정혜에 들었다고 하는 자와는 불교를 말할 수 없다.51) 51) 《유하동집》 권 7, 〈南嶽大明寺律和尙碑〉: 儒以禮立仁義 無之則壞 佛以律持定慧 去之則喪 是故離禮於仁義者 不可與言儒 異律於定慧者 不可與言佛.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仁義)란 무엇인가? 바로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이 내면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인이고 그 길을 바로 가는 것이 의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 즉 범인(凡人)은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저절로 하늘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 즉 천인합일(天人合一)된 삶을 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범인이 하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바로 성인의 행동거지를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 성인의 행동거지를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예(禮)이다. 다시 말해서 예를 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따르는 길이 된다. 또한 불교는 어떠한가? 정(定)과 혜(惠)가 드러나지 못하면 궁극적인 실상(實相)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실상이란 바로 중도이고, 중도란 바로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계율과 완전히 합치된다는 것은 바로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완전한 중도의 실천은 부처님만이 가능하다. 부처란 궁극적 실상과 하나 된 것의 이름이다. 즉 해탈한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해탈하는 방법인 동시에 부처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불, 즉 해탈을 통해서만 완벽한 계율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정혜의 완성이 바로 중도이고 중도가 바로 계정혜의 완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종원이 말하고 싶었던 결론이었을 것이다. 유자들은 입만 열면 인의도덕이니 윤리강상을 들먹이면서 불교를 반대하지만 그 종지(宗旨)를 안다면 불교를 반대할 명분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자가 유종원을 유불(儒彿) 통합 사상가로서 설명하고자 한 이유도 그의 이러한 관점 때문이었다.

4. 마치며

지금까지 불교가 위진·당대를 거치면서 유교와 만나는 과정과, 만나서 이루어 낸 통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이미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표면만 놓고 보면 유교와 불교는 서로 만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불교는 형식보다는 근본을 지향하고 유교는 근본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를 보면 두 종교 모두가 다 인식함으로써 드러나는 세계를 극복함으로써만 진실과 만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52)  52) 유교의 핵심 사상을 인(仁)이라고 할 때, 인의 실천법으로 공자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극기복례란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는 주지하다시피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용》의 내용 또한 성인의 삶과 범부들의 삶을 구분지어 설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유교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성인의 삶이란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조에 이르러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우친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한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불교로 거듭났다고 해서 원시 불교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 말은 중국에 내재해 있던 고유 사상, 즉 유교나 도가 사상이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리로서의 중국사 상과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의 조우였으므로 그 근본이 비종교로 바뀔 일은 없다. 종교란 불완전한 사람을 완전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매개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53)  53) 그러므로 만약 어떠한 종교의 종지(宗旨)가 인간을 화합하고 순화시키는 내용이 아니라 사분오열을 부추기는 의미로 읽혀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과거를 돌아보면 가끔은 종교가 단지 위정자의 지배 이념으로서의 기능에 국한되기도 하고, 또 간혹은 사상가의 신념과 부딪침으로써 왜곡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종교로서의 순기능은 상실하고 단지 인간의 이기적인 처세를 합리화시키는 데 명분을 얹어 주는 경우마저 있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선각자와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의식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런 구조는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에서 성현의 말씀을 대하면서 드는 생각은 ‘중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가 곧 과거의 사회문제이고 과거의 사회 병폐가 역시 지금의 사회 병폐이다. 그리고 성현들이 탄식했던 인성 문제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고민이 현재의 고민이고, 그 역 또한 그렇다. 어쩌면 그래서 이 사바세계는 언제나 고(苦)일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긴 부처님도 없애지 못한다는 중생계를 어찌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요 몽상가의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는 있다. 바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생사 문제의 근원을 파헤칠 필요는 없다는 것 말이다. 비록 이 시대를 아파하며 살아가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복인(福人)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데도 복인의 삶에 지족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지족을 못하고 철학자나 종교인으로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숙명적인 몫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같은 멍에 덕분에 수많은 종교가 수천년 이상 그 생명력을 이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분명 심각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 이 시련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년부터 시작한 경제 위기는 물론이거니와 인성 문제, 종교 문제, 환경문제, 먹을거리 문제에서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인성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성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종교가 쥐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종교 간의 대화를 넘어 통합을 일구어야 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화합을 통해서만 위에 열거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인류의 화합을 위한 대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김용남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취득(1999년). 동국대학교 BK21 불교문화사상사연구단 연구원 및 불교학과 강사 역임. 현재 성균관대학교(유교철학과) 및 대림대학교 강사. 저서로 《성리학, 유불도의 만남》, 《이고(李퇅)》와 논문으로 〈유교의 행복관〉, 〈정신물리학의 입장에서 본 莊子의 無情〉, 〈불교의 수행위차에 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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