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유교, 유교 속의 불교

‘수(修)’란 무엇인가?

수행·수양·수련이란 개인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체계를 기반으로 심신을 단련함으로써 현상적 자아를 변혁시켜 본래적 자아에 도달하려는 자기완성의 노력을 말한다.(불교에서는 ‘자기완성’을 추구한다기보다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없음을 깨닫는 일에 주력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지향 역시 결국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깨닫거나 회복하려는 노력이므로 ‘자기완성’이라는 넓은 범주에 포함하여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교에서는 수양(修養)·수신(修身)·수기(修己)를 말해 왔고, 불교에서는 수행(修行)을, 그리고 도교에서는 수련(修鍊)을 이야기해 왔다. 동양의 전통 종교에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수도(修道)나 수덕(修德) 또는 영성수련(靈性修鍊)을 이야기해 왔는데, 이처럼 세계의 주요 종교에 공통된 ‘수(修)’는 자기가 지닌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실천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자 문화권에서 ‘수(修)’자의 고전적 의미는 무엇인가?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서는 ‘수’의 의미를 이렇게 풀고 있다.

‘수(修)’는 ‘식(飾)’이다. ‘식(飾)’은 ‘닦는다(刷)’는 뜻이다. ‘식(飾)’은 오늘날의 털어 낼 ‘쇄(刷)’자에 해당한다. 사물에 묻어 있는 먼지와 때를 털어 내어 본래의 빛이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1) 1) 段玉裁, 《說文解字注》(漢京文化事業有限公司, 1970), 429쪽. “修, 飾也. 飾者刷也…… 飾則今之拭字. 拂拭之則發其光彩.”

‘수’의 의미를 “먼지와 때를 털어 내어 본래의 광채를 드러나게 하는 일”로 설명하는 《설문해자주》의 해석은 유·불·도를 막론하고 수양·수행·수련에 내포된 공통된 의미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유교에서는 수양을 통해 자기중심적 의념을 극복하고 본래의 선한 성품을 드러낼 것을 강조하고,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분별심과 아상(我相)에서 벗어나 자아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일을 목표로 한다.

또한 도교에서는 수련을 통해 욕망을 제거하고 천진(天眞)·무위(無爲)한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처럼 불교의 수행과 도교의 수련 그리고 유교의 수양은 각기 다른 종교적 이상을 담고 있으며 ‘수(修)’를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도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자아의 단련을 통해 자기변혁과 자기완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송대 유학에 미친 불교 좌선수행

불교는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해져 한자 문화권의 주요한 종교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유학의 부흥기에 접어든 송대(宋代)에 불교는 유교의 형이상학이나 심성론뿐 아니라 수양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는 불교 수행자뿐 아니라 유교 지식인들까지 모두 ‘정좌(靜坐)’를 깨달음을 위해 수행해야 할 필수적 과정으로 여겼다. 북송에서 남송에 이르는 동안 묵좌(默坐)·정좌(靜坐)·올좌(兀坐)·단좌(端坐) 등의 좌법 명칭은 학파와 관계없이 뒤섞여 사용되었다.

송대 지식인들은 유학을 새롭게 건립하는 과정에서 불교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북송5자의 선두 주자인 주렴계는 수애(壽涯)·혜남(慧南)·상총(常摠) 등 당시의 유명한 선사들과 교분이 깊었고, 그의 주정(主靜)·무욕(無欲)설과 《주역》 ‘간괘(艮卦)’에 대한 해설은 불교 및 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이다. 북송5자의 또 다른 일원인 장횡거(張橫渠)의 경우에도 20~30대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였으며, 한때는 주렴계와 더불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로 찾아가 상총 선사에게서 성(性)과 무극(無極)에 관해 얻어 듣기도 했다.

북송5자의 또 다른 일원인 정명도·정이천 형제도 젊었을 때는 10여 년 동안이나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였으며, 정이천이 세상을 뜨기 전에 문인 중 상당수가 선학(禪學)으로 가 버렸다고 한다. 북송5자를 집대성한 주자 역시 젊었을 때에는 10여 년 동안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18세 때 향시(鄕試)를 보러 갈 때 그의 보따리 속에는 《대혜어록(大慧語錄)》 한 질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불교의 심성론에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좌선 수행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횡거는 《정몽(正夢)》을 지을 당시 잠을 자지 않고 ‘묵좌’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하고, 정명도의 부친 정향(程珦)은 20여 년이 넘도록 집 안에서 ‘묵좌’를 실천하였다고 한다.

정명도의 경우에도 “마치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정좌를 하였다.”라고 전해지는데, 그는 제자들에게 언어·문자를 통한 학습만이 아니라 정좌를 실천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아우인 정이천 역시 매번 정좌를 하고 있는 학인을 볼 때마다 그 호학(好學)하는 태도를 칭찬하였다.

 하루는 유치산(游?山)과 양귀산(楊龜山)이 정이천을 뵈러 왔다가, 그가 눈을 감고 정좌에 든 것을 보고 감히 깨우지 못하고 옆에서 시립하다가 날이 저물고서야 비로소 물러갔는데 문밖에는 이미 눈이 한 척도 넘게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정이천의 엄격한 사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인용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의 정좌에 대한 선호를 보여 주는 구절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에서 “정좌하여 눈을 감고(坐而冥目)”라는 표현은 달마(達摩)의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面壁而坐)”와 유사하며, 두 제자가 눈 속에 시립하고 기다리며 가르침을 구하는 일은 마치 신광(神光)이 눈 속에서 팔목을 잘라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했던 고사와도 비슷하다.

신유학의 ‘미발(未發)’ 개념과 선종의 ‘미발(未發)’ 공안

‘미발(未發)’ 개념은 신유학의 수양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빠뜨려서는 안 될 핵심 개념이다. 정이천의 문인 가운데 여여숙(呂與叔)과 양귀산은 정좌하여 희·노·애·락이 발하기 전(未發)의 ‘중(中)’을 구하는 일을 수행의 요체로 삼았다. 여기서 ‘중’을 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희·노·애·락이 발하기 전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신유학의 수양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선종(禪宗)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미발’은 원래 유교 경전인 《중용(中庸)》에 등장하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송대에는 꼭 유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송대에 유행했던 선종 어록을 보면 ‘미발(未發)’이나 ‘미생(未生)’을 키워드로 하는 수많은 공안(公案)과 만나게 된다. 이 중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털끝 하나도 발하지 않은 때(未發)란 무엇입니까?”
“일념도 생하지 않을 때(未生)란 무엇입니까?”
“온갖 꽃이 발하지 않은 때(未發)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생하지 않았을 때(未生)에 법(法)은 어디에 있습니까?”
“깨달음의 꽃이 발하지 않았을 때(未發)에는 어떻게 줄기와 열매를 분별합니까?”
“부모가 [나를] 낳아 주기 이전(未生)에 [나의] 콧구멍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등록》에 보이는 ‘미발’이나 ‘미생’은 현상적 의식의 근원에 있는 선험적 순수 의식 즉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가리킨다. 중국 대승불교에서는 현상적 의식의 흐름을 고요하게 잠재우고 삼매(三昧: sama-dhi)에 든다면 반야바라밀의 지혜(慧)가 비추어 자신의 본래성품(性)을 보게 된다고 여긴다. 자신의 본래성품을 볼 수 있게 되는 의식의 계기가 바로 ‘미발’ 또는 ‘미생’인 것이다.

송대의 적지 않은 불교인들은 ‘불성(佛性)’ 개념이 《맹자》나 《중용》에 나오는 ‘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운문종의 계숭(契崇) 선사는 《맹자》와 《중용》에 나오는 ‘성’ 개념이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만물동일진성(萬物同一眞性)’ 즉 ‘불성’과 같다고 여겼다.

그리고 《중용》에서 말하는 ‘미발’의 상태 즉 ‘중’은 선정(禪定)에 든 수행자의 의식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오등전서(五燈全書)》에서는 《중용》에 나오는 ‘미발’을 선종에서 말하는 “한 생각도 나지 않은” 일념무생(一念無生)의 경지와 동일시한다.

불교의 ‘불성’과 유교의 ‘성’ 개념을 동일시했던 것은 비단 불교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선종 공안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미발’이나 ‘미생’이 《중용》에도 있음을 생각해 냈고, 정좌를 통해 이를 직접 체험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도남학(道南學)을 개창한 양귀산의 경우, 상총(常摠) 선사의 영향을 받아 《중용》의 ‘성(性)’ 개념을 선(善)으로 규정하기보다 선악을 초월한 ‘무선무악’으로 규정하였으며, 《맹자》에 나오는 ‘성선(性善)’ 개념을 《입능가경(入楞伽經)》에 나오는 ‘때묻지 않은 정결한 마음(白淨無垢)’ 즉 제9식인 아마라식(菴摩羅識)과 같다고 여겼다.

《중용》의 ‘미발’과 불교의 ‘선정’을 동일시하는 태도,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서 자아의 본래면목인 ‘성’을 체인(體認)할 수 있다고 보는 양귀산의 태도는 계숭 선사의 관점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중용》에서는 희·노·애·락이 발하기 이전의 고요한 의식 상태 즉 ‘미발’을 ‘중(中)’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적고 있다. 양귀산은 《중용》의 이 구절을 선종식으로 해석하여, 현상적 의식이 전개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면 천하의 대본인 ‘중’을 체인할 수 있고, 이러한 일이 바로 자신의 본래성품(性)을 보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의 ‘중을 구한다(求中)’라는 수양론은 ‘중을 본다(見中)’라는 말과 다름없으며, 이는 선종의 ‘견성(見性)’과 마찬가지로 정좌를 통하여 자아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본체직관의 수행법에 해당한다.

선종에서는 자아의 본래성품을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 또는 성(性)이라고 부르고, 수행을 통하여 분별심에 물들지 않은 본래성품을 보면 곧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 것이다. 이로 볼 때, ‘미발’의 상태에 들어가 ‘중’을 구하려는 양귀산의 수행법은 선종의 지상 과제인 ‘견성’을 《중용》이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유교적으로 재구성해 낸 것이다.

현상적 의식이 발생하기 이전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이 상태에서 자신의 본래적 성품을 체인하는 일은 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으로 다가왔다. 마치 선사들이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 좌선하여 입정(入定)하듯, 이들 역시 자아의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 《중용》을 지침서로 삼아 정좌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주자(朱子)의 구도와 불교 수행법

송대 유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 사상의 전개 과정은 그가 추구했던 수행법의 변천 과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15, 6세 때부터 선(禪)에 뜻을 두었던 그는 21세 때 도겸(道謙) 선사를 찾아가 ‘도’를 물었고, 도겸은 주자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狗子還有佛性也無)”라는 공안을 화두로 주었다.2)   2)  《雲臥紀談》 卷下.(束景南, 《朱熹年譜長篇》, 139쪽에서 재인용.)

주자는 23세 되던 해에 도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속적으로 화두를 참구하고 있지만, 한마디만 더 던져 주시기를 간절히 원한다.”라고 썼고, 도겸은 답신에서 “일도양단의 자세로 용맹정진하라.”라고 격려하였다.

주자는 화두를 참구하면서도 틈틈이 도경(道經)을 읽으며 ‘장생비선지술(長生飛仙之術)’을 연마하기도 하였고, 무이산에 있는 도교 사원 충우관(沖佑觀)으로 도사를 만나러 찾아가기도 하였다.

도겸이 세상을 떠난 후 주자는 유학자 이연평을 찾아가 도(道)에 관해 물었고, 이연평은 주자에게 “도는 현묘한 데 있지 않고 평실한 데 있는 것이니, 일용 간에 착실하게 공부하라.”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워낙 선종식 깨달음에 흥미를 느꼈던 주자는 일용 공부를 강조하는 스승의 가르침에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이연평은 주자에게 분수지리(分殊之理)를 점진적으로 탐구하라고 강조하는 한편, 공부하고 남은 시간에는 ‘위좌(危坐)’3)하여 《중용》에 언급된 희·노·애·락이 발하기 전의 미발(未發) 기상을 체험하라고 가르쳤다. 주자는 이연평의 가르침대로 정좌하여 ‘미발’의 기상을 체험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3)  명대에 편찬된 《御定小學集註》 卷 6의 주에서는 위좌(危坐)를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발꿈치에 닿도록 앉는 자세로 설명하고 있다.

주자가 34세 되던 해에 이연평이 세상을 떠나자, 주자는 “연평 선생께 수학하면서 《중용》 서를 받아 ‘희노애락 미발’의 의미를 구하고자 했으나 미처 도달하지 못했는데 선생께서 떠나시고 말았다.”라고 슬퍼하였다. 연평이 세상을 떠난 후, 주자는 약 3년여(34~37세)에 걸쳐 ‘미발’을 체인하고자 정좌에 몰두하였으나 결국은 참담한 실패만 경험하고 말았다. 그는 장흠부(張欽夫)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실패담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성현의 말씀 가운데 이른 바 미발지중(未發之中)·적연부동(寂然不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찌 일상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잠시 멈추어서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를 미발(未發)이라고 하겠습니까? 일찍이 이러한 식으로 [未發之中을] 구해 보았는데, 모든 것이 사라져 지각(知覺)이 없는 가운데 삿된 어둠만 가득 차서 텅 비어 밝게 사물을 응대하는 본체가 아닌 것 같았고, 미세한 의식의 움직임(幾微)의 순간에 홀연히 지각이 있게 되어 곧 다시 ‘이발’이 되고 마니 적연(寂然)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4)  4) 《朱熹集》, 30-14(1289쪽). 〈與張欽夫〉3. “然聖賢之言則有所謂未發之中寂然不動者, 夫豈以日用流行者爲已發, 而指夫暫而休息不與事接之際爲未發時耶? 嘗試以此求之, 則泯然無覺之中, 邪暗鬱塞, 似非虛明應物之體, 而幾微之際一有覺焉, 則又便爲己發而非寂然之謂.”

위 편지에서 주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실패를 ‘민연무각(泯然無覺)’ ‘사암울색(邪暗鬱塞)’이라는 여덟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민연무각’이란 의식이 끊어져 아무런 지각도 없는 상태이고, ‘사암울색’이란 의식이 어두컴컴하여 꽉 막힌 듯한 상태를 말한다. 주자가 경험했던 이러한 의식의 상태는 “어두컴컴하고 적막하여 감각과 지각이 없는 상태” 즉 ‘혼침(昏沈: syta-na)’이었던 것이다.

‘미발’ 체인에 실패한 주자는 호상학(湖湘學)의 이발찰식(已發察識) 수행법으로 눈을 돌린다. ‘이발찰식’ 수행법은 불교의 ‘염처(念處)’ 수행과 비슷하게 ‘수관(隨觀 anupassati: 따라가면서 봄)’을 특징으로 한다. 호상학의 ‘이발찰식’ 수행법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따라가며 관찰한다(隨事察識)’라는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염처 수행의 특징인 ‘수관’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하지만, 염처수행에서 말하는 ‘따라가며 본다.(隨觀)라는 개념이 전개되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즉 ‘무의도적으로’ 본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데 비해, 호상학의 ‘수사찰식(隨事察識)’은 수행자의 의도적인 노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개입되는 것이다. 이발찰식 수행법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관찰하면서 흐름 속에서 문득 드러나는 본래적 성품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의식의 집중’을 위하여 작위적이면서도 맹렬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하게 작위적인 주의 집중은 수행자를 오히려 피곤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의식 상태를 불안정하고 급박하게 만들게 된다. 도남학의 미발체인 수행법이 주자를 ‘혼침’으로 몰고 갔다면, 호상학의 이발찰식 수행법은 역으로 ‘도거(掉擧)’ 상태로 몰고 갔던 것이다. 주자는 자신이 이발찰식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도거’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단지 ‘근원(역주: 性體)’에서 곧바로 비치는 ‘강물이 기울고 바다가 뒤집히는 듯한 기상’을 언뜻 엿보았을 뿐, 일용 간에는 급박한 흐름에 떠밀려 마치 커다란 파도와 거대한 물결 속에 휩쓸려 잠시도 멈추어 정박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소견이 줄곧 이와 같기 때문에 외부 사태에 접하거나 반응할 때 거친 맹렬함과 용맹스러운 과단함은 전보다 증가하였지만, 너그럽고 온화한 기상은 터럭만큼도 없게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 병폐라고 여기고 있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5)   5) 《朱熹集》 32-3(38세) 〈答張敬夫 34〉. “蓋只見得箇直截根源, 傾湫倒海底氣象, 日間但覺爲大化所驅, 如在洪濤巨浪之中, 不容少頃停泊. 蓋其所見一向如 是, 以故應事接物處, 但覺粗?勇果增倍於前, 而寬裕雍容之氣略無毫髮. 雖竊病之, 而不知其所自來也.”

주자 스스로 회고하듯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관찰하려는 ‘이발찰식’의 수행법은 작위적이고 맹렬한 주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을 좆아 맹렬하게 바라보려 하면 할수록 의식은 더욱 급박하게 요동치게 된다. 폭류처럼 흐르는 자신의 의식을 좇아 또 하나의 의식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자체가 수행자의 의식을 요동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주자는 윗글에서 이발찰식 수행법에 경도되었을 당시 자신이 경험했던 의식 상태를 “강물이 기울고 바다가 뒤집히는 듯한 기상을 언뜻 엿보았을 뿐, 일용 간에는 의식의 급박한 흐름에 떠밀려 마치 커다란 파도와 거대한 물결 속에 있는 것 같아서 잠시도 멈추어 정박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술회한다.

 그는 또 요동치는 불안정한 의식 상태로 인하여 “외부 사태에 접하거나 반응할 때 거칠고 맹렬함과 용맹하고 과단함은 전보다 배나 증가하였지만, 여유롭고 온화한 기상은 터럭만큼도 없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주자의 이러한 고백은 자기의 의식을 관찰하려는 작위적이고도 맹렬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수행자의 의식을 ‘도거(掉擧: auddhatya)’ 상태에 빠뜨려 버린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하여 자전적으로 술회한 것이다.

‘혼침’과 ‘도거’를 모두 경험한 주자는, 본래면목을 체인하고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심(觀心) 수행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 관심(觀心) 수행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작위적이고 맹렬한 주의 집중을 요구함으로써 의식의 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병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작위적이고 맹렬한 주의 집중 대신, 평시에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수준의 ‘일깨움(提醒)’ 또는 ‘항시 깨어 있음(常惺惺)’을 대안으로 채택하게 된다.

‘수사찰식(隨事察識)’을 특징으로 하는 호상학의 수양론이 수행자의 의식을 고도로 집중하게 하여 의식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심적 경험이나 느낌을 포착하려는 ‘사냥꾼’의 태도에 가깝다면, 평시 ‘함양(涵養)’을 강조하는 주자의 수양론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무겁거나 가볍지도 않은 정도의 경각심(敬)만을 유지한 채 부지런히 물을 주고 양분을 주어 성품을 길러 나가는 ‘농사꾼’의 자세에 가깝다.

 ‘이발찰식’ 수행법이 의식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본성의 실마리를 즉각적으로 포착하려는 ‘본래성품 보기(見性)’에 해당한다면, 주자의 ‘평시 함양’은 일상적인 의식과 행위에 대한 ‘수시 점검(提?)’ 또는 ‘일깨움(喚省)’을 통하여 자아의 성품을 앞서 함양함으로써 유사시(도덕적 문제 상황)에 대비하려는 ‘성품 기르기(養性)’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수행의 최종 목표는 의식의 내용에서 ‘관념’이나 ‘개념’과 같은 ‘태도의 옷’을 벗겨 버리는 일이다. 즉 분석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명제태도(propositional attitude)에서 주관의 ‘태도(attitude)’를 탈각시켜 버린 투명한 순수지각(pure perception)의 상태7)가 바로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적적성성(寂寂醒醒)’의 경지이다.  7) 《朱子語類》 59-144. “心兼攝性情, 則極好. 然出入無時, 莫知其鄕, 難制而易放, 則又大不好. 所謂〈求其放心〉, 又只是以心求其心. 〈心求心〉說, 易入謝氏有物之說, 要識得.”

이와 달리 호상학의 이발찰식법은 자기의 의식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그 근원에 있는 본체로서의 ‘성’을 확인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의식 내용에 ‘태도의 옷’을 덧씌우는 상반된 결과를 낳게 된다.

‘인·의·예·지’와 같은 유교적 성품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가치에 의해 형성된 관념의 축조물이기 때문에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가치에 물들지 않은(즉 ‘태도의 옷’을 벗어 버린) ‘본래적 성품’이 여실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발찰식 수행법은 유교적 목표에 불교적 수행법을 가미한 성취 불가능한 축조물이었다. 유교에서 전제로 하는 본래면목은 불교에서 전제로 하는 본래면목과 다르다. 유학에서는 인·의·예·지의 성품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반면, 불교에서는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일에 목표를 둔다.

본래면목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종류의 수행법을 요청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성찰에 기초하여, 새로이 성립된 주자의 수양론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관심(觀心) 수행에서 벗어나 평시에 항상 깨어 있는 태도로 자신의 성품을 길러 나가려는 ‘함양(涵養)’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주자는 이전에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추구했던 이발찰식 수행법을 “하나의 마음으로 다른 하나의 마음을 찾는 일(以一心求一心)”이라고 비판하고, 대신 평시에 ‘일깨우기(提醒)’ 또는 ‘깨어 있기(醒覺)’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관심(觀心)수행에 대한 불교 내부로부터의 비판

자기의 본래면목을 체인하는 일은 송대의 수행자뿐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자명하고도 심오한 종교·철학적 주제로 여겨진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참 나를 찾아서’라는 문장을 쳐 보면 수많은 종교 단체와 수행 단체들이 카페와 블로그를 만들어 놓고 구도적 열정을 가진 고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진정한 자아를 깨닫는 일 또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는 일은 주자가 살았던 12세기나 우리가 사는 21세기나 똑같은 매력으로 구도자들의 열정을 사로잡는 종교·철학적 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수많은 수행법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행법들은 탄탄한 심리철학적 기반을 결여하고 있거나 실천상의 난제를 안고 있다. 호상학의 이발찰식에 대한 주자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교정이며,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평시 함양의 수양론은 유교적 목적에 맞게 수정·보완된 치료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의 마음을 본다.”라고 할 때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지나간 시점의 ‘그림자’일 따름이다. 주자는 “마음은 무시(無時)로 들고 나가기 때문에 그 고향을 알 수 없다.(出入無時, 莫知其鄕)”7)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부단히 일어나고―흘러가고―사라지는 의식의 특징을 설명한다. 지나간 시점의 그림자를 실재하는 사물과 혼동해서는 안 되듯이, 부단히 흘러가는 의식의 폭류를 거슬러 올라가 ‘본디마음’을 볼 수 있다고 여기거나 자아의 본래면목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자기의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이발찰식의 수행법이 신수(神秀)의 북종선과 닮았다면, 마음을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주자의 수양론은 신회(神會)의 남종선과 비슷하다. “나의 마음이 방실되었다고 알아차리는 순간 본래 마음은 보존된다.”라는 주자의 입장은 “망념이 사라지면 그 상태의 마음이 곧 본심(本心)이지 이와 별도로 ‘찾아야’ 할 본래적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신회의 입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주자에 의하면, 마음은 집 나간 강아지를 찾아서 목줄 끌고 오듯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화초에 물을 흠뻑 주어 자라나게 하듯 미리 길러 나갈(涵養) 수 있을 따름이다. 본디마음을 보거나(觀心), 마음의 본체를 찾거나(覓心), 본래 마음을 인식하려고(識心) 하는 수양법은 주자에 의하면 유교적 목적에 맞지 않는 수행법이며, 오히려 수행자의 의식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에서 주자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본다(觀心)’, ‘중을 구한다(求中)’, ‘마음을 본다(覓心)’, ‘마음을 찰식한다(識心)’ 등의 표현을 쓰지 말도록 경계했다.

호상학의 식심(識心) 수행에 대한 주자의 비판은 신수(神秀)의 관심(觀心) 수행에 대한 혜능(慧能)의 비판과 구조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혜능은 신수의 관심 수행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마음을 보는 일(看心)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니, 마음이 그림자(幻影)와 같음을 안다면 볼 대상마저 없는 것이다.”8)  8)  《六祖壇經》 〈坐禪品 第五〉. “若言看心, 心原是妄, 知心如幻, 故無所看也.”

여기서 혜능의 비판은 마음을 실재하는 대상처럼 간주하는 태도 즉 ‘아상(我相)’을 깨뜨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혜능에 의하면 마음은 ‘그림자(幻影)’처럼 허망한 것으로, 결코 대상화하여 관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봄(看)’의 대상으로 설정하려는 수행법은 그림자처럼 실재하지도 않는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 따라서 혜능은 “마음을 응집시켜 청정한 본성을 보려는 북종선의 관심 수행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9)라고 극언하기도 한다.   9)  《六祖壇經》 〈頓悟品 第八〉. “住心觀淨, 是病非禪.”

혜능을 이어받은 신회는 ‘관심’ 대신 ‘무념(無念)’을 수행의 요결로 제시한다. 무념 수행의 초점은 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청정한 자성을 ‘보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념을 일으키지 않음(不作意)’으로써 청정한 자성이 절로 ‘드러나게’ 하려는 데 있다. 무념 수행에서는 관심 수행과 달리 (물론 자아의 본성을 청정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마음 자체를 ‘봄(看)’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신회는 “보는 대상이 없어야 비로소 ‘참다운 봄(眞見)’이다.”10)라고 말하는 것이다.  10) 《神會和尙語錄》 〈雜徵義〉. “見無物, 卽是眞見常見.”

분별심에 물든 망념이 사라지면 그 상태의 마음이 곧 본심(本心)이고 진심(眞心)이지, 이와 별도로 ‘보거나’ ‘찾아야’ 할 본래적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회보다 백여 년 후에 다시금 관심 수행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를 잘못된 선법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황벽(黃壁) 단제(斷際)의 〈전심법요傳心法要〉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불성으로 불성을 보려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면, 억겁을 다하고 육신생명이 다하더라도 끝내 얻을 수 없다.”11)라고 하여 ‘마음으로 마음을 잡으려는 수행법’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11) 大正藏 48.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但是衆生著相外求, 求之轉失. 使佛覓佛, 將心捉心, 窮劫盡形, 終不能得. 不知息念忘慮佛自現前, 此心卽是佛, 佛卽是衆生.”

단제는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는 수행법’이 지닌 문제를 〈전심법요〉의 여러 곳에서 누차에 걸쳐 지적하고 있다. “마음을 다시 마음에서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不可將心更求於心)”12)라는 언명, 그리고 “마음으로 다시 마음에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不可以心更求于心).”13)라는 언명이 바로 그것이다. 12) 大正藏 48.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380c08. “世人聞道, 諸佛皆傳心法, 將謂心上別有一法可證可取, 遂將心覓法, 不知心卽是法, 法卽是心. 不可將心更求於心, 歷千萬劫終無得日. 不如當下無心, 便是本法.” 13) 大正藏 48.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381b01. “心卽是佛, 佛卽是法. 一念離眞皆爲妄想, 不可以心更求于心, 不可以佛更求於佛, 不可以法更求於法.”

단제의 이러한 언명은 관심법에 대한 주자의 비판과 동일한 유형으로서, 마음 그 자체를 ‘봄’의 대상으로 설정하려는 수행법은 논리적으로 오류일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잘못된 수행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서 관찰하려는 자기 직관 수행법에 대한 불교 내부의 비판은 황벽 단제 이후로도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예를 들어 속장경에 수록된 〈달마대사오성론(達磨大師悟性論)〉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구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법으로 법을 구하려 해서도 안 된다.(亦不將心求心, 亦不將法求法)”14)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송대의 대혜종고(大慧宗톓) 역시 당시의 묵조선 수행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판한다. 14) 新纂續藏經 卷 63, 〈達磨大師悟性論〉. “夫道者, 以寂滅?體. 脩者, 以離相?宗. 故經云: 是以聖人亦不將心求法, 亦不將法求心, 亦不5將心求心, 亦不將法求法. 所以心不生法, 法不生心, 心法兩寂.

“삿된 선사의 무리가 사대부들로 하여금 마음을 거두고 고요히 정좌하여 모든 일에 관계하지 말고 (마음의 작용을) 쉬고 또 비우라고 가르치니, 어찌 마음으로 마음을 쉬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며, 마음으로 마음을 쓰게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와 같이 수행을 하면 어찌 외도(外道) 이승선(二乘禪)의 적단견(寂斷見)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겠는가?”15) 15) 大正藏 47, 《大慧寶覺禪師語錄》, 〈答陳少卿 季任〉.邪師輩, 敎士大夫, 攝心靜坐, 事事莫管, 休去歇去, 豈不是將心休心, 將心歇心, 將心用心? 若如此修行, 如何不落外道二乘禪寂斷見境界?

역사적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자기 직관 수행법에 대한 불교 내부의 비판은 이러한 지적이나 비판에도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는’ 구도적 호기심이 지속적으로 수행자들을 매료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하고 올바른 수행법을 위하여

관심(또는 察識) 수행에 대한 주자의 비판은 단지 경쟁하는 학파를 꺾기 위한 호승심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자아를 하나의 실체처럼 간주하고 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이를 체인할 수 있다고 믿는 환상을 깨뜨림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지닌 유교적 지식인들을 다시금 건강하고 합리적인 수양법으로 안내하는 것이 주자의 진정한 의도였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병을 야기하는 잘못된 수행법에 대한 ‘철학적 치료’로서 주자의 관점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못된 수행법에 대한 주자의 철학 치료는 존재론/인식론/실천론의 세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먼저 존재론의 차원에서, 자기의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이발찰식의 수행법은 ‘마음’ 또는 ‘본성’을 과도하게 대상화하거나 실체화하는 일은 아닌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주자에 의하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는 ‘자기 직관’의 수행법은 주관의 ‘활동 그 자체’인 마음을 불필요하게 실체화하거나 대상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주자는 이러한 오류를 ‘유물지설(有物之說)’이라고 부른다. ‘유물지설’은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과도한 실체화(대상화)의 오류’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하나의 ‘기능’ 또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직관하려고 하는 태도는 마음을 불필요하게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주자에 의하면 “‘성’은 마음 안에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물건이 아니다.”16) 16) 《朱子語類》 5-68. “〈心, 統性情者也〉. 性不是別有一物在心裏.”

“‘성’은 내면에 어떤 물건이 있어서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치상으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理所當然)이 바로 ‘성’이고, 단지 사람이 이러이러하게 행해야 하는 도리(合當如此做底)가 바로 ‘성’이다.”17)   17) 《朱子語類》 60-24. “性, 不是有一箇物事在裏面喚做性, 只是理所當然者便是性, 只是人合當如此做底便是性.”

주자는 ‘성’을 자기 직관에 의해 발견해야 할 ‘본체’로 여기기보다, 인간의 의식 활동에 깃든 ‘합리적 성품’ 정도의 의미로 사용한다. “마음은 ‘성’과 ‘정’을 통괄한다.(心統性情)”라는 주자의 심성론 구조는 ‘성품’ 또는 ‘성향’이 주체의 노력에 의해 길러지고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마음(心)이 지닌 ‘주재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성’을 완벽한 현실태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본체’로 여기기보다 주체의 노력에 의해 실현되어야 할 ‘성향’으로 간주할 경우, 수행의 방향은 자연히 ‘구하기’나 ‘관찰하기’가 아닌 ‘기르기(養)’로 정향되기 마련이다.

인식론의 차원에서 볼 때, ‘마음을 본다(觀心).’라는 일상적 표현은 자아를 주격(관찰하는 주체)과 목적격(관찰되는 대상)으로 나눔으로써 주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마음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를 바라보는 마음₂를 상정해야 되며, 마음₂는 다시 이를 바라보는 마음₃을 요청하고……, 이런 식으로 마음n까지 상정해야 하는 무한 퇴행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자아 안에 자아를 관찰하는 난쟁이 자아를 설정하고, 이러한 난쟁이 자아 안에 또 다시 그 난쟁이 자아를 관찰하는 더 작은 난쟁이 자아를 설정하고…… 하는 일은 논리적으로도 건전하지 못하지만, 실천적으로도 그다지 실용적인 일이 못 된다. 마치 양파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가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 무한소급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들여다보더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천철학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마음의 용도를 자신의 내부 의식을 관찰하는 일로 한정할 경우, 주체와 외부와의 소통 또는 사회적 관계 맺음을 멀리하고 향내적(向內的) 주관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이발찰식의 수행법은 수행자로 하여금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의식을 자기 내부로 집중하게 함으로써, 자칫하면 순간적으로 감지해 낸 주관적 느낌이나 자의적인 환상을 마치 객관적·합리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더욱이 지식인의 대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의식의 흐름을 관찰하는 일에만 힘쓰고 사회적 실천을 뒤로 미루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의 태도는 더더욱 용납되기 어려운 것이다. 주자가 사상채를 평하면서 “인을 행하는 일(爲仁)에는 힘쓰지 않고 인을 깨닫는 일(知仁)에만 힘쓴다.”18)라고 비평한 것도 ‘함양’보다 ‘찰식’을 앞세우고 ‘실천’보다 ‘자기 직관’에만 노력을 경주하는 소위 ‘도 닦는’ 태도가 유교의 종지에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8) 《論語或問》. “謝氏之意, 不主乎爲仁, 而主乎知仁.”

호상학의 이발찰식 수행법에 대한 주자의 비판은 스스로의 수행 체험에서 경험했던 실천적 난제와 철학적 오류에 대한 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행하는 의식의 흐름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배후에 있는 본체 즉 자아의 본래면목을 체인할 수 있다는 믿음은 호상학파의 학자들뿐 아니라 불교나 도교 그리고 그 밖의 지적 전통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사항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정진하는 적지 않은 구도자들이 있다. 이 중 어떤 수행법은 철학적으로 탄탄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실천적으로도 건전한 것이 있을 것이고, 어떤 수행법은 철학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이론 체계에 실천적으로도 건전하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체인하려는 다양한 수행법 중 특히 송대 유학자들의 수행법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관심수행에 대한 주자의 비판은 자아를 주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처럼 간주하고 이를 체인하기 위하여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는 신비적 성향을 지닌 오늘날의 구도자들에게도 시사 해주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

 

이승환 /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 철학연구소에서 석사, 미국 하와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로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1998)과 《유교 담론의 지형학》(2004) 등이 있으며, 공저로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감성의 철학》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성리학의 수양론에 나타난 심-신 관계 연구: 주희 심리철학에서 지향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으며, 현재는 신유학의 ‘수양론’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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