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남아 불교의 힘을 말한다

1. ‘동남아시아의 불교의 대승성’ 이라는 말에 대한 고민

‘동남아시아 불교의 대승성’이란 주제는 복합적이고 상호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선 동남아시아라는 지정학적인 주제가 복합적이며, 그곳의 불교가 복합적이며, 그곳 불교의 성격과 대승성이라는 말 또한 복합적이고 상호 모순적으로 보인다.

필자는 ‘동남아시아의 불교의 대승성’이란 말이 이렇게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데에는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 불교를 바라보면서 한국 불교의 모습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남아시아 불교의 복합성은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인 복합성과 동남아시아 불교 내부의 복합성이 서로 모순인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며,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논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불교에 관한한, 한국에서 교육받은 입장에서는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편견이 발단이며, 이는 전체 불교를 왜곡시키고 대·소승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은 자신은 수행자적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이라는 이름아래 반수행적·반불교적인 행동을 생활처럼 행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비록 소승이라는 말로 폄하되지만, 그들의 수행은 개인적인 삶의 질의 향상은 물론 사회성도 충분히 갖춘 수행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혹자들이―사실은 대다수이지만― 말하는 동남아시의 불교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가 큰 과오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한국인들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그 지역에 대한 문화적 이해보다는 경제적인 모습만 별견하고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아직도 가난한 지역, 게다가 그곳의 불교는 소승불교로 이기적이며 자신들만 아는 불교라는 식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의 불교라고 하면, 대승적인 면보다는 그렇지 않은 면이 더 먼저 와 닿으며, 승단은 사회적인 역할에 소홀히 하며 개인의 수행에만 전념하는 듯이 생각되며, 일반 신도들 역시 공동체 사회를 이끌고 가기위한 불교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종교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불교는 소승불교도 아니고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불교도들은 이기적이고 자신들만을 아는 그런 이들이 아니다.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부르는 소승이라는 말은 상좌부 불교의 잘못된 사용이며 상좌부 불교 역시 대승불교에서 내세우는 화중생(化衆生)의 개념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불교의 한 부류일 뿐이지 대승·소승으로 나뉘어 우열이 구별될 그런 게제는 아니다.

다음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라고 하면, 하나의 권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나 동남아시아는 한두 가지의 단어로 규정지어 질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비록 현대에는 유럽이나 아메리카 등과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뒤쳐진 면이 없지는 않으나 동서 교통로라 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동남아시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오래된 역사와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지닌 복합적 지역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자바원인의 발생지이고, 배후에는 인류 문화의 양대 축인 인도와 중국이라는 대륙이 있으며 아프리카, 중동에서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양적 교통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복잡다양함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한두 마디의 말로 결정짓는 데에는 무리가 없지 않겠으나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규정짓고자 한다. 하나는 다양한 성격을 지닌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지역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던 원주민과 이주민과의 문제이다.

1) 동남아시아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친 지역은 크게 인도, 중국, 아랍과 유럽의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 중국, 아랍 세 지역은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동남아시아에 문화를 전파함에 있어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 식민지 정복이라는 기치아래 시도된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력 정복이 동남아시아의 피지배인들로부터 많은 배척을 받아 식민지의 쇠퇴와 동시에 필리핀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영향력 역시 쇠퇴하였다.

첫째,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도의 영향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해 있으며 육상으로 맞닿아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는 육상은 물론 해상으로도 자연스럽게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입장이다. 인도문화의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향은, 중국 문화의 경우도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우수한 문화의 상대적으로 열등한 문화에 대한 전파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인도 문화가 동남아시아에 미친 영향 중 큰 것들을 말한다면 문자―언어가 아님―와 종교로 표현할 수 있다. 주로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남부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그 지역들인데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와 불교―특히 현대에는 스리랑카를 거쳐 도입된 상좌부 불교―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다음 중국의 영향은 주로 중국인들의 종교와 문화가 중심이 되었으며 유교, 대승불교, 도교가 이에 해당하며 일부 지역에는 언어의 영향도 있다. 이 지역으로 이슬람이 도래한 것은 이슬람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 지역을 근거지로 아랍과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관장하던 세력들에 의한 것으로 이슬람의 침략이라 하기 보다는 교역을 하던 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왕국을 중심으로 퍼져 있다.

2) 다음은 동남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문제이다. 동남아시아는 동서 해상 교섭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항상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런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제는 동남아시아를 문화적으로 상승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원주민 중심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의 종족은 대륙에 47개 종족, 해양에 49개의 종족이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들 원주민들이 역사적으로 뿌리를 내린 데에는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으나 주로 자신들의 고유문화 위에 중국과 인도, 아랍의 문화를 받아들여 계승 발전시켜 왔는데, 이들의 문화는 종교적으로 볼 때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로 남아있으며, 가톨릭의 경우는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와 관계가 있다.

이런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제는 현대에 와서 종교 분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종교적 분쟁은 주로 이슬람과 가톨릭 같은 유일신교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이들 90가지가 넘는 종족들 못지않게 과거부터 꾸준히 이 지역의 문화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담당하고 있는 집단이 화교(華僑)들이다.

화교들이 중국으로부터 동남아시아에 이주해 오기 시작한 기원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보수성과 독립성이 강해 화교들 특유의 정신문화와 신앙형태를 보이며 독자적으로 유지해오고 있으며 높은 문화적 수준으로 다른 종족들에게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교통로이면서 다민족적인 이 지역의 역할은 이 지역에서 토착화된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동남아불교를 단순히 상좌부 불교라 불러서는 안 되며,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가 복합된 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아래 불교 하면 떠오르는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은 태국,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리고 여기에 필자가 억지로 끼어 넣다시피 한 스리랑카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국가가 모두 불교만 신봉하는 국가들인 것은 아니다. 태국이나 버마처럼 불교를 국교로 정해놓은 나라도 있고, 라오스나 캄보디아처럼 대부분이 불교도인 나라, 싱가포르와 베트남처럼 타종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나라, 말레이지아와 인도네시아처럼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불교의 세력이 강했으나 현재는 회교의 지배를 받아 불교의 유산조차 보존하기가 쉽지 않은 나라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여기에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은 18·9세기부터 서양의 식민지였다는 점이다. 이들 나라들의 식민지화로 인한 변화는 일부 기득권층들의 기독교화이다. 이런 현상은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대부분의 지역들이 지니는 공통된 현상으로 동남아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 국가의 불교의 특징을 말하자면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정도를 제외하고는 안정된 승단과 승단의 바람직한 대사회적 역할 등을 들 수 있다.

2. 대승성의 고찰

1) 상좌부 불교 혹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 혹은 과오


불교에 대해 지니는 가장 큰 오해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에 대한 오해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시작된 이래 항상 스스로 수행하며 남을 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데 과거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승려들이 자신의 수행을 대승으로 명명하며 상대적으로 수행에 있어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에 대해 소승이라는 말로 폄훼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의견이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불교권에서 받아들여지면서 대승불교가 상대적으로 소승불교보다 우월한 불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대승불교를 내세웠던 승려들에 의해 발생했던 오류이다.

이런 오류를 잘 나타내면서 불교계 전반에 통용되어 왔던 말로 ‘일반적으로 소승이라고 불리는 부파불교는 자신의 구제에만 전념하고 타인의 구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월폴라 라훌라는 소승(Hinay?na) 및 대승(Mah?y?na)을 일컫는 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진 상좌부 불교의 팔리 경전이나 그 경전들의 주석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어들이라고 설파했다. 월폴라 라훌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주 관념은 대승은 나와 남을 공동으로 위하는 것이며, 소승 혹은 상좌부 불교는 나만을 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불교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연결되었다.

 필자는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는 것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수행 의지 혹은 그 수행의 실천과 그 결과에 의한 것이지 처음부터 나는 대승이고 소승이고 하는 식으로 불교의 성격을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위의 대승불교개설에서 볼 수 있는 오류는 현존하는 상좌부 불교에 대한 오해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며, 이는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불교의 대사회적 활동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으리라는 편견 혹은 선입관을 유발하였다고 생각한다.

2) 대승성과 동남아시아 불교에서의 대승성이란 무엇인가

대승성이란 단어는 불교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性)’이라는 말은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와 대승계나 대승경을 근거로 대승성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설사 기본 수행은 비대승적이라 하더라도 그 수행자가 행하는 행위가 자리이타행을 한다면 그것을 대승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달리 말하면 ‘설사 상좌부 불교권의 수행자라 하더라도 대승불교적인 본질’ 혹은 ‘대승불교적인 요소’를 수행하면 그것이 대승성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승성은 설사 그 사회나 승단 혹은 그 사회의 불교를 부르는 명칭이 대승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을 버리고 사회를 구제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승성을 다시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 대승성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대승성이다.
개인적 대승성이란 개인이 수행을 통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부처의 경지라 하니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권의 교리와 충돌 하는 것처럼 보이나 상좌부의 수행과보인 사향사과의 아라한과가 대승의 부처의 경지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대승의 ‘대(大)’자의 노예가 되어 상대를 업신여기는 이들이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부처의 경지에 대한 대승성과 상좌부권의 사향사과는 다르다고 볼 수 없다.

다음은 사회적 대승성이다. 사회적 대승성이란 불교도라면 불교도답게 사회의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불교도답게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은 비폭력에 기반을 둔 채 사회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계에 뿌리를 둔 변혁이라 할 수 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사회계약에 근거를 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불교가 표방하고 있는 민주적 의식에 기초하여 사회적 불평등으로 야기된 빈곤과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회적 대승성이다.

사회적 대승성을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외침 즉 전쟁과의 관계이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화적으로 멈추기 어렵다. 이때 불교인이 갖추어야 할 대승성이란 자신을 희생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사회의 강자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적 강자란 이웃을 지배하는 이민족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속한 국가 권력이 될 수도 있으며, 이웃이 속한 기업의 소유자일수도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형성된 관계 속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형성된 힘의 우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사회적 대승성이다.

이에 더하여 자발적 대승성의 행위가 있다. 흔히 이는 보시라는 말로 대체될 수도 있는데, 비록 나보다 크게 못하지는 않으나 조금이라도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 경우를 의미한다. 여기서 논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사회적 대승성의 경우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사회적 대승성은 어려움을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 경우가 많지 않으며 잘못하면 그 대승성이 일시적으로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희생당한 이들보다 저 많은 이들에게 복덕을 나누어 주는 결과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사회적 대승성의 가치가 큰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 주제로 삼는 동남아시아 불교에서의 대승성이란,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면서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이들의 신앙형태에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사회 공동체적 지향 즉 자신을 버려가면서 이웃의 안녕을 이루는데 얼마나 불교의 수행자들이 노력하는가 하는 것이며,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본고의 목표라 하겠다.

3. 동남아시아 불교의 대승성의 예

1) 스리랑카의 예

스리랑카 승단의 역사는 대승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승성의 측면에서 모범적이다. 대승적인 입장에서 모범적이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불교의 대사회적 기여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기여는 승단뿐 아니라 신도들의 기여도 포함된다.

이런 모범적인 대승성들이 스리랑카 국민들의 가슴을 울려 결과적으로 스리랑카인들 스스로 붓다와 관계가 깊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면서, 불교인임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런 자부심을 나타내는 예로 스리랑카의 개국 연도를 들 수 있다.

스리랑카인들은 자신들의 개국 연도를 붓다가 입멸한 해와 동일하게 하였는데, 이런 일은 불교를 통한 자기정체성의 확립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대승성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스리랑카의 역사에서 이런 국민들의 열망에 보답이로도 하듯 스리랑카의 승단은 꾸준히 대승성을 보여 왔으며, 앞으로도 대승성을 일탈하는 행위를 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① 식민지 저항
스리랑카에서 승단이 보여준 대표적 대승적 행위는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와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할 때 무기력하고 절망에 빠진 국민들을 대신해서 행했던 일들이다. 스리랑카는 1815년 2월 15일 왕도(王都) 캔디(Kandy)가 영국군에게 정복되고 스리랑카의 왕 스리 비크라마 라자싱하(Sri Vikrama R?jasinha)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면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스리랑카를 지배하는 유럽 세력이 되었으며, 과거와 달리 스리랑카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첫 경우가 되었다. 이후 1815년 3월 2일 영국과 스리랑카 사이에 캔디 협정이 체결되어 스리랑카가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이전까지 보름 동안 영국은 전승국이었으면서도 스리라카 승려들의 반발에 부딪혀 캔디에서 자신들의 기(旗)조차 게양하지 못했다. 이런 저항 속에서 체결된 캔디 협정에서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협약의 제5조이다.

협약 제5조는 애당초 영국에서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나 스리랑카 승단의 요구로 관철된 것으로, 그 내용은 “불교는 범할 수 없는 신성한(inviolable) 종교이므로 그것의 의식, 의식 관련자 그리고 예배하는 장소는 유지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일부 용기 있는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항이기는 하나 스리랑카인들에게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부심을 갖도록 한 중요한 조항으로 두고두고 영국인들과 시비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기독교와 불교의 역사적인 대논쟁이었던 차나두라 대논쟁과 이후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에 큰 힘이 되는 조항이었다.

 이외에도 식민지 기간 중에 스리랑카 승단이 보여준 행위는 실로 괄목할 만하다. 스리랑카인들에게 불교가 기독교보다 우수함을 만천하에 증명시켜 주어 스리랑카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도록 했던 그나난다 스님의 파나두라 대논쟁은 물론 국제대각회(MahaBodhi Society)의 설립 등 불교인이 주가 되어 전개되었던 일련의 역사적인 과업들은 상좌부 불교권의 대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② 평상시의 스리랑카 불교의 사회적 역할
위에서 서술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는 일 이외에도 스리랑카에서는 정부에서 진행하는 사회복지 이상의 사회 복지를 승단이 책임지고 있다. 진정으로 스리랑카에서 시민계몽과 빈민구제 등의 개념으로 대승성을 찾기란 아주 쉽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책임져주는 승단의 모습―한국의 불교 신자 일부는 가족이 사망했을 때 염불하러 오는 스님에 대한 대접이 부담되어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을 수행하면서도 아무런 티를 내지 않는 스님들의 겸허함 이것이 진정한 대승성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스리랑카의 대부분의 사찰에는 전통 의학에 기초를 둔 의원(醫院)들이 있으며 이들이 차지하는 전통의학에서의 비중은 실로 크다. 이외에도 스리랑카의 사원은 유치원 같은 교육 시스템은 물론 빈민에 대한 상시 구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스리랑카의 사원에서 운영되고 있는 다함빠살라(Dhaham Pasala)는 단순한 포교의 차원이 아니고 어린아이의 교육은 물론 초중고생들을 위한 학습지도, 성인들을 위한 평생교육 시스템과 마을의 공회당 역할을 같이 하고 있으며, 스님은 마을사람들의 의견이 충돌될 때 거중 조정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스리랑카의 대부분의 노인보호시설과 고아 보호 시설은 불교계에서 운영한다. 특별히 보호시설이라고 명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리랑카의 대부분의 사찰은 마땅한 거주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잠잘 곳과 의복과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아소카 황제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던 일이다.

사찰에서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스리랑카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청년들이 시작하였던 YMBA(Young Man Buddhist Association)는 지역마다 조직이 결성되어 유스호스텔을 만들어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 계몽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③ 최근의 경우

이런 평소에 진행되는 일 말고 좀더 구체성을 지닌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대승적 행동은 현재 진행중인 종족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승단의 노력을 들 수 있다. 스리랑카의 종족 분쟁은 주로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과 힌두교도가 주인 타밀족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 갈등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괴롭혔던 이민족들로부터 스리랑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승단이 있었던 것이다. 스리랑카 섬 전체가 영국에게 완전히 식민지가 될 때는 물론 독립 후에도 스리랑카의 승단은 스리랑카인들의 사표로서 사회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왔다. 이런 승단에게 1956년 재현된 종족 분쟁 역시 자발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던 것이다.

이런 종족분쟁이 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1987년이다. 1987년 이후 스리랑카 승단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종족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정치권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M. 소비타 스님의 경우 단신으로 타밀 반군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평화 협정의 기본을 이끌어 내기도 했으며, 스리랑카의 승단은 국제사회 특히 로마교황청과 영국 천주교에 호소하여 타밀 반군에게 무기 공급을 중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고, 그 결과 노르웨이 장부가 주가 되어 중재하였던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스리랑카 승단이 종족갈등에서 보여준 가장 값진 성과는 사미니 스님들로 구성된 평화협의체의 평화대행진을 들 수 있다. 스리랑카는 비구니 스님이 없다.

평소 비구니 스님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에서 묵묵히 수행 정진하며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많은 사미니 스님들은 1990년 이후 매년 빠지지 않고, 콜롬보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인 트린코말리까지, 인간띠잇기 운동 등 상호 화해와 이해 그리고 평화 정착을 위한 일들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진행되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아직 이 때문에 사망한 사미니는 없다.

2) 태국의 예

태국은 일본과 더불어 지외세의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비록 문헌에 의한 태국의 역사가 천 년도 채 안 되지만 그래도 외세에 의한 식민지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게 된 이면에는 승단 혹은 불교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고 태국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승단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① 많은 승려의 환속과 호국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때 휴정, 유정등 승병들의 활약으로 왜군을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00년 이상 유지되던 아유티야 왕조(A.D.1350-1767)가 멸망한 것은 무능한 왕실과 버마인들의 침입 때문이었다.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의 침략을 받았을 때 승려들의 환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승려들의 대대적인 환속은 무엇이 진정 대승성을 지닌 것인지 보여주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사찰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은 외적으로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승단을 지키는 것만큼 나라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여 환속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환속한 이들과 조선의 승군이 다른 것은 조선의 승군의 경우 승려의 신분으로 적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승려들은 승려의 신분으로 살생을 할 수 없다 하여 환속을 한 후 전쟁터로 나갔으며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몰렸을 때 많은 승려들은 사원을 지키는 것보다 환속하여 국가를 방어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후에 아유타야 왕조는 멸망하였으나 태국인들의 가슴에는 하나의 자부심으로 남아있으며, 호국불교라는 면에서는 한국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으나 불교적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② 술락시바락사의 buddha(소문자 b) 운동
술락시바락사는 태국 불교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불교가 “(썩은) 사회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되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며 “참선과 내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현실도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항상 서민의 적이 되는 빈곤과 그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가 되는 부정을 퇴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데 주가 되고 있는 신(新)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인간 복지와 환경 보존의 측면에서 이익을 축적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분명히 세계 사회를 조절하는데 적합한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그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를 폭력이라 치부하며 반대한다. 이런 현상은 나라의 국내뿐 아니라 나라들 간에 이층 구조를 만들며 부유한 극소수는 절대 다수의 고통과 가난 위에 그들의 성을 세우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기회도 없는 자유를 누리고, 굶어 죽을 자유는 있지만 가난에서 해방될 자유는 누리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해 불교적 관점에서 약자들이 겪는 사회적 환경적 폭력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사회문제의 해결책으로 불교의 사무량심을 내세우고 있다. 사무량심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친절인 자(Metta, 慈),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그러한 고통을 끝까지 없애 주고자 애쓰는 비(Karuna, 悲), 동정에서 우러난 기쁨인 희(Mudita, 喜), 마음이 평등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공평무사하게 될 때까지 수양하는 상태인 사(Upekkha, 捨)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탐·진·치 삼독을 끊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는 길이 된다고 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런 주장의 실현을 위해 ‘소문자 b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소문자 b 운동’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다소 대승 불교적이고 상좌부 불교의 본질과는 일면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담은 운동으로 붓다가 고유명사만을 나타내는 대문자 B 가 아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소문자 b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③ 짬렁의 대승성
짬렁은 방콕 시장이었다. 그는 한국인이 우리도 저런 공직자가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할 정도로 청렴한 공직자였다. 그의 청렴성은 노벨 평화상의 후보의 반열에 까지 그를 올려놓았다. 그는 단순히 청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웃과 같이 있었다.

방콕 시장으로서 자신이 받았던 봉급은 물론 전액 사회복지기금으로 기탁하였다. 그의 부인 역시 빈민과의 삶을 살면서 삯바느질을 하며 그를 내조하였고 삯바느질의 수입 역시 사회복지 기금으로 냈다. 그는 1992년 5월 혁명 당시 시민들의 편에 섰다가 옥고를 치렀다. 1992년의 5월 혁명은 1980년부터 쁘렘 정권 8년, 찿차이 정권 2년 등 10년 동안 비교적 민주적으로 이어져 오던 태국이 군부 쿠데타로 인하여 민주화 운동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가 군부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새 헌법을 선포하자 이에 민주세력, 학생, 의회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차기 정부를 민주적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한 시위이다. 이 시위는 짬렁 시장이 신임 쑤진다 수상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단식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짬렁의 단식은 성공하여 결국 쑤진다 수상의 사임을 이끌어냈다. 그는 2006년 3월에는, 지금은 축출되어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탁신 전 총리의 실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3) 버마

①버마 불교청년회(YMBA)와 일단의 스님들
20세기 초 버마는 인도와 같이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시켜줄 것을 대대적으로 요구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버마 불교청년회 역시 영국 정부에게 버마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 결성된 버마 불교 청년회가 독립의 선봉에 선 것이다. 1916년 평소 버마의 불교를 하대했던 영국군들이 만달레이의 사원과 불탑에 신을 신고 들어오는 행위를 하였다.

이에 버마불교청년회와 레디사야도 스님은 민족적이고 종교적 자긍심을 내세우며 사원에 산을 신고 들어오는 행위 등 반 종교적인 행위를 금지해줄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발표가 있은 후 버마 내부에서 이들의 성명 발표에 동조하여 항의하는 스님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버마 독립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1919년 10월 여성을 포함한 유럽의 관광객들이 만달레이의 한 사원의 경내에 다시 신을 신고 들어가자 스님들이 이에 항의하였고, 일부 스님들은 구속되었으며, 우 케떼아 스님은 종신형을 선고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스님들의 항의는 물론 버마 젊은이들 역시 영국정부에 항의하여 결국 연행되었던 모든 스님들은 풀려나고 영국 정부는 향후 불교사찰에서는 전통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불교청년회는 전불교도평의회(General Council of Buddhist Association)로 개칭하고 독립과 자국민 보호를 위한 각종 사업을 수행하였다.

② 버마와 스님들의 시위
1945년 해방 후 불교식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한 버마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탄트라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할 정도의 국력을 유지하던 나라였다. 특히 1961년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버마의 앞날은 밝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네윈이 소위 미얀마식 사회주의 정책을 쓰면서 암흑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력은 쇠잔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보여준 일련의 일들이 버마의 민주화 운동이다.

버마의 민주화 운동은 네윈 정권에 반대했던 스님들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위로 1988년과 2007년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라지만 1988년 시위에서는 스님을 포함한 3000명의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2007년 시위에서는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만 알려지고 있으며 아직 버마의 봄은 오지 않고 있으나 고통에서 헤매는 버마인들을 위한 버마 승단과 불교청년회 등의 대승성은 계속될 것이다.

4) 화교들의 대승성

싱가포르와 홍콩에 주 근거지를 둔 일련의 화교들이 중화 불교도회를 조직하여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을 돕고 있다. 이들의 구심점이 되는 이는 중국계 말레이시아 스님이자 현재 홍콩대학 교수인 법광(法光 K. Dhammajoti) 스님이다. 그는 스리랑카 남부 발라비띠여 지역에서 애민원을 운영하면서 스리랑카의 젊은이들에게는 최신 IT기술을 무료로 가르치고 있다. 그의 애민원 운영 기금 전체를 싱가포르와 홍콩 등지의 화교들이 마련해 주고 있다.

이외에도 그는 방글라데시와 네팔에서 온 사미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승려 교육을 위한 사찰에는 100명이 넘는 10대 안팎의 동자승들이 수행하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이런 모든 일들은 중화불교도회에서 경비를 부담하고 있다. 화교들은 중화 불교도를 구성하여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를 뛰어 넘는 대승성을 보여주고 있다.

5. 결론

동남아시아 불교의 대승성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복합성과 상호모순성에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불교에 대한 무지와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에 대한 무지가 앞서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이런 무지를 야기한 한국인의 무지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오류는 그 동안의 한국불교가 안아야 할 역사적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 왕조 500년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흘러온 승단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로 연결되면서 비불교적인 요소가 승단에 이입되어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불교, 몇 번의 정화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기만 한 한국 종단의 미래, 이런 상황에서 바른 출가동기를 갖고 있지 않은 수행자들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에 대해 왜곡하였으며, 이것이 한국불교의 대사회적 반불교적 행위로 이어져 온 것이다. 나아가 대승불교를 내세우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대승성이 부족한 한국 불교계로서는 스스로가 비대승성의 안에 있는지조차 모르고나 있지 않은지 하는 염려 섞인 생각이 든다. 만일 필자의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한국 불교는 대승임을 내세우기 이전에 무엇이 진정 스스로와 사회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불교의 대승성의 확립이다.

또 하나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지의 문제이다. 그저 동남아시아 하면 후진국이고 가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확실한 오류이자 실수이다. 동남아시아는 그 지정학적인 조건이 지니는 것처럼 다양한 문화와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지역이다. 그리고 그 다양함이 불교를 불교답게 녹여내서 그곳의 불교와 대승성을 논하더라도 손색없게 만들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대승 보살적인 인물이나 기구가 많은 지역이 동남아시아이다. 동남아시아 불교의 대승성은 한국 불교가 배우고 따라야 할 사표라 할 수 있다.


송위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스리랑카 국립켈레니야대학 팔리불교학과에서 〈한문 장아함 세기경과 빨리 경전의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을지대학교 교수, 역서로 《불교선수행의 핵심》이 있으며, 이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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