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준 동국대 교수

1. 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인류 역사에 있어서 불의 발견 못지않게 획기적인 사건은 돈, 즉 화폐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폐에 의해서 기존의 물물교환경제(barter economy)가 화폐경제(monetary economy)로 바뀌면서 우리 인류의 경제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경제학에서도 이른바 ‘화폐이론’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화폐란 일반적으로 지불의 수단으로 통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일반적 통설 외에도 ‘시카고 학파’라든가 ‘걸리와 쇼오’ 등은 화폐에 대한 보다 넓은 광의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논의의 대상을 화폐에 국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돈으로 상징되면서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제문제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경제문제에 대해 경제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시 말해 출가자냐 재가자냐에 따라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돈, 즉 경제문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편의상 출가자와 재가자의 경우로 나누어 살피기로 한다.

1) 출가자에 대한 가르침

(1) 모든 경제활동의 금지
오늘날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사정이 조금 달라져 있지만, 부처님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원칙적으로 식량을 얻기 위한 농사일이라든가 돈을 벌기 위한 장사 등의 모든 생산활동과 경제활동에 관여해서는 안 되었다. 《유교경(遺敎經)》의 다음 가르침은 출가자는 모든 세속적 직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청정한 계율을 지닌 사람은 물건을 사고팔거나 무역을 하지 말고, 집이나 논밭을 마련하지 말며 하인을 부리거나 짐승을 기르지 마라. 재물 멀리하기를 불구덩이 피하듯 하고 초목을 베거나 땅을 개간하지 마라. 약을 만들거나 사람의 길흉을 점치는 일, 하늘의 별로 점치는 일, 수(數)를 놓아 맞추는 일들을 하지 마라.1)

또한 잡아함 권 18 《정구경(淨口經)》은 모든 출가수행자는 ‘4부정식(不淨食=邪命食)’에 의해 살아가면 안 되고 오로지 걸식(乞食)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4부정식이란 ①논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 살아가는 것(下口食), ②해와 별과 달, 비와 바람 등을 관찰하고 연구함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仰口食), ③권력에 아첨하며 교언영색으로 그들로부터 재물을 얻어 살아가는 것(方口食), ④점치고 관상 보는 것을 배워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말하거나 의술(醫術)로써 살아가는 것(維口食)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바른 직업이든 나쁜 직업이든, 출가자는 일체의 세속적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되고 경제활동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2)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이 발생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전에서는 출가자의 경제활동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데 반해, 막상 율장(律藏)에서는 출가자의 경제활동과 세속적인 직업을 금지하는 직접적인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율장의 가르침이 경전의 그것보다 구속력이 더 강하다고 볼 때,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의문점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큰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초기불교 교단의 계율은 일시에 제정된 것이 아니라 교단 내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에 따른 계율 조항이 하나씩 추가되어 점진적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율 제정의 원칙을 불교에서는 흔히 ‘수범수제(隨犯隨制)’라고 한다. 이 원칙에 따른다면, 만일 출가자들 가운데 생산노동에 참여하거나 세속적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면, 이에 관한 계율 조항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에 관한 계율 조항이 없는 것은 부처님이 제자들의 경제활동과 일반적인 직업을 허용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출가자들 사이에 세속적 직업에 관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부처님 재세 시의 인도에서는 모든 출가 수행자가 세속적인 생활방식과 결별하는 것이 관례였다. 일반인들은 출가 수행을 통해 높은 지혜와 덕을 갖춘 그들을 존경하였으며, 공양의 제공을 비롯한 물질적·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가자 또는 일반인들은 그들에게 보시하면 그에 상응하는 공덕을 되돌려받는다고 믿었고, 또한 기후 조건상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없어서 그날그날 여분의 음식을 누구에게든 큰 부담 없이 베풀 수 있었기에 이러한 관습은 보편화될 수 있었다.3) 부처님 당시 불교교단 내의 출가자에게는 모든 경제활동과 생산노동이 금지되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돈과 귀금속의 소지(所持) 금지
인류는 자급자족 시대를 거쳐 물물교환경제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물물교환의 불편성 때문에 그 불편함을 경감하고 더욱 편리하고 능률적인 교환을 실현하기 위해 화폐라는 교환 매개물이 창안된다.4) 화폐가 처음 통용될 때에는 화폐의 실물 그 자체로서도 사용가치가 있는 이른바 ‘상품화폐(commodity money)’가 대부분이었다. 상품화폐로는 돌이나 소, 조개껍질이나 곡물, 또는 금속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금속은 주화(minted coin) 형태로 발전된다.5) 오늘날에는 공급의 수월성 등의 이유로 지폐가 일반화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상당한 부의 축적을 이룬 자산가 계급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산가 계급의 출현은 인도 사회가 이미 화폐경제 시대에 진입해 있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6) 율전의 하나인 《사분율(四分律)》에는 금돈, 은돈, 쇠돈, 구리돈, 백납돈, 납돈, 나무돈, 호교(胡膠)돈 등 8가지 화폐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데,7) 이러한 내용을 보더라도 부처님 당시에는 화폐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부처님은 제자 발난타가 한 대신의 부인에게서 돈을 받아 가지고 저자에 맡겨 두어 물의를 빚은 사건을 계기로 “만일 비구가 제 손으로 금·은과 돈을 잡거나 남을 시켜 잡거나 땅에 놓게 하여 받으면 사타(捨墮) 죄이니라.”라고 제자들에게 설하신다.8) 출가자는 어떤 경우라도 돈이나 금·은 등의 귀금속을 손으로 잡거나 지니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또한 그 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설한다.

사문·바라문이 술 마시기를 버리지 않고, 음욕을 버리지 않고, 손에 금·은 가지기를 버리지 않고, 그릇된 방법으로 생활하기를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사문·바라문의 환난이라 하는바, 이것들은 능히 사문·바라문을 밝지 못하고 맑지 못하고 비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위신이 없게 하기 때문이오.9)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절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로 스님들을 받들고 돕는 공인된 재가불자인 정인(淨人)을 통해 돈을 유통케 하고 있다.10)

2) 재가자에 대한 가르침

(1) 경제활동의 적극적 권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처님은 출가자들에게는 모든 경제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재가자들에게는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권장하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의 하나인 앙굿따라니까야에 설해진 내용을11)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재가자의 경제활동에 대한 불교의 두 가지 기본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재산의 획득과 증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산을 획득하고 증식하는 방법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가자들은 첫째,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둘째, 돈을 벌되 바르게 벌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꿀벌이 꽃의 꿀을 모으기 위해 부지런히 이리저리 날아다니듯, 무엇보다도 근면과 정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다음의 가르침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상인이 오전에 열심히 업무에 힘쓰고 낮에도 열심히 업무에 힘쓰며 오후에도 열심히 힘쓴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를 성취하는 상인은 능히 아직 얻지 못한 재산을 얻고 또한 이미 얻은 재산을 증식할 수 있을 것이다.12)

그러나 재화의 획득과 증식을 위해서는 단순한 근면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먼저 기술을 배우고 난 뒤에 재물을 구하라”13) 라고 설하신다. 기술 습득의 강조는 분명 경제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입장이 중아함 《선생경(善生經)》의 내용 중에 나오는 이른바 ‘사분법(四分法)’의 가르침 속에 표명되고 있다.

재물을 구한 다음에는 이것을 넷으로 나누되, 4분의 1은 생계(음식)비로 쓰고, 4분의 1은 생산(田業)비로 쓰며, 4분의 1은 저축해 두어 긴급한 때에 소용이 되게 하고, 4분의 1은 경작인이나 상인에게 빌려 주어 이자를 창출하도록 하라.14)

소득의 4분의 1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어 이자를 창출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은 이자 수입을 금기시하는 성경(the Bible)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많이 벌어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지키고 관리하지 못한다면 그 재산은 금방 소실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재물을 얻어 이미 구족하거든 마땅히 스스로 지키어 보호하라.”15)라고 가르치며, 재산을 잃게 되는 낭비의 원인에 대해 여섯 가지로 설한다.

장자여, 재산을 탕진하는 여섯 가지는 무엇인가. 술에 탐닉하는 것은 참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문이며, 때 아닌 시간에 거리를 나도는 것은 실로 재산을 탕진하는 문이다. 장자여, 제례(祭禮)와 가무(歌舞) 등의 집회에 열중하는 것, 그리고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재산을 탕진하는 문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 그리고 게으른 습관은 실로 재산을 탕진하는 문이다.16)

부처님은 이 가르침에 연이어 이 여섯 가지 행동이 재산을 소실케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폐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합리적인 원리라고 생각된다.

(2) 불교에서 본 재(財)의 효용
우리의 경제활동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하나는 돈을 벌고 관리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돈을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財)의 효용에 대한 불교적 인식이 어떠한지를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재화는 의식주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불교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람된 의무와 도리를 다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다시 말해 의무 이행을 위한 윤리적 기초로서 재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고히 하고 있다. 초기경전은 재화가 다음 다섯 가지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부모와 아내와 자식, 하인과 일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둘째, 친구와 동료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셋째, 왕의 난(難), 물의 난, 불의 난, 도적의 난, 전쟁에 대비하고 상속을 준비하며 재산의 보존을 위해.
넷째, 친족, 손님, 아귀, 왕, 신에 대한 다섯 가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섯째, 인내와 겸손으로 자아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17)

이 가르침은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지만 분석해 보면 실로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와 둘째의 내용은 재화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도리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쓰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셋째의 내용은 미래의 위험과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재화의 확보와 보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저축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여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여러 어려움에 적극 대비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왕의 난이란 국가적 재난 또는 국가적 차원의 억압과 착취, 권력기관의 가렴주구 등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넷째는 일가친척에 대한 보살핌과 손님에 대한 대접, 배고픈 중생에 대한 배려, 국가(왕)에 대한 세금 납부, 신(神) 또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위해 재화가 쓰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은 사람들에게 참다운 삶의 지혜와 궁극적 진리, 그리고 인간 구제의 길을 가르쳐 주려고 고행의 길을 가는 성직자에 대한 지원에 재화가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세금의 납부는 불교적인 국가관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국민의 의무이다. 경전에서 인류 최초의 왕을 ‘마하삼마타(Maha-sammata: 위대한 선출된 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불교는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사회와 국가를 바라본다. 따라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질서를 지켜 주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납세의무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또 다른 의미의 재의 효용은 복전(福田), 다시 말해 사회적 복지 개념으로서 재의 효용이다. 이에 관한 것은 《제덕복전경(諸德福田經)》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 경에서는 복전의 대상으로 다음 일곱 가지를 예시한다.

첫째, 부도(浮屠)나 승방(僧房), 당각(堂閣)을 세우는 일.
둘째, 과원(果園)과 목욕하는 연못에 나무를 심어 시원하게 할 것.
셋째, 항상 의약을 베풀어 사람들로부터 질병의 고통을 구할 것.
넷째, 튼튼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을 건네줄 것.
다섯째, 교량을 건설해서 힘없고 약한 자를 건너게 할 것.
여섯째, 길 가까운 곳에 우물을 파서 목마른 사람들이 마시게 할 것.
일곱째, 공동변소를 지어 여러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토록 할 것.18)

여기에서는 특히 여행자를 위한 편리시설의 건설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상업과 교역의 발달에 따른 교통로의 확충이 필요했던 당시 인도 사회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전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공동이익에의 참여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이타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공익 증진을 위한 실천적 행위는 모두 그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19)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수입과 소득은 일정 부분 사회적 복리 증진을 위하는 일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인들은 특히 《우바새계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세 가지 복전의 개념에 유념하면서 경제생활을 꾸려 간다. 그 세 가지 복전이란 공덕전(功德田=敬田)·보은전(報恩田)·빈궁전이다.20) 불교인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이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으로 중생을 이끌어 주는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공경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공경의 마음이 깊으면 불교의 법륜이 더욱 널리 굴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님과 사찰, 불교 교단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덕전의 가르침이다.

 다음은 보은전이다.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인간 윤리의 근본이며 은혜의 근본은 부모님이다. 따라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봉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진실로 효를 행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해 갈 것이다.

세 번째 복전은 빈궁전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보시는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병자를 돌보는 것은 곧 나(부처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21)라고 설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받들고 돌보라는 것이 빈궁전의 가르침인 것이다. “엄청난 부와 황금이 있고 먹을 것이 많은 사람이 다만 혼자서 누리고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라는 《수타니파타》의 가르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3) 경제활동에 대한 가르침의 종교적 메커니즘
앞에서 살핀 것처럼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어떠한 생산노동이나 경제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농부인 바라드바자의 눈에는 한가롭게 길을 가는 부처님 일행이 빈둥빈둥 놀고먹는 사람들로 비쳤던가 보다. 그는 부처님께 따졌다. “나는 땀을 흘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으십시오.” 농부의 비난에 부처님은 정중하면서도 당당하게 답했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노력은 황소이므로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22) 이것은 부처님도 육체노동은 아니지만, 정신노동에 참여하며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대답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출가자에게 육체적인 생산노동을 금했던 것일까.

첫째, 그것은 석존 당시 인도 사회의 관행이자 종교문화적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출가 수행자로 하여금 모든 세속적 생활방식에서 떠나 수행에 전념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수행의 상징과 이미지는 일반 대중에게 정신적 가치와 성스러움의 의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그들의 일상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한 차원 더 높이 승화시켜 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의 수행을 얼마나 중시하였나 하는 것은 다비 후에 수습한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제자들이 수행하는데 장애가 될까 봐, 출가 제자들이 아닌 재가 신자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유언하셨던 사실23)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째, 그것은 초기불교 교단의 이원구조(二元構造)의 특성 때문에 가능했다. 교단의 이원구조는 《이티붓타카》 107의 “재가자와 출가자는 서로 의지하여 올바른 진리와 위없는 안락에 도달한다.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옷과 생활필수품과 침구, 약품을 얻는다. 또한 재가자는 깨달음에 도달한 성자들의 성스러운 지혜의 힘에 의해 이 세상에서 법을 실행하며 하늘의 세계를 누리고 바라는 것을 얻어 기뻐한다.”라는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육방예경〉에서 상방(上方)에 해당되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및 역할에 대한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불교 승원을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시킨 것도 탁발은 물론 재가자의 방문과 보시를 가능케 하고 그들에게 법을 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24) 이러한 사실 역시 초기 교단의 이원구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 교단의 ‘출가―재가’의 유기적이고도 분업적인 이원구조적 특성상 출가자에게는 생산노동이 금지되었던 것이지, 불교가 노동 자체를 거부하고 노동의 가치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25)

그러나 이러한 생산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은 그 목표가 이기적 욕망의 무한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시 또는 시여(施與)를 통해 성취되는 생천(生天: 천상세계에 태어남)이라는 종교적 기제(機制)와 연계됨으로써 그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의 근본 입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답은 위에서 말한 교단 구조의 이원적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출가〔출세간〕와 재가〔세간〕는 대립과 모순의 구조가 아니라, 상호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보완 관계이다. 출가자는 재가자의 물질적 보시〔財施〕에 의해 교단을 유지하고 종교적 목표를 달성해 가는 반면, 재가자는 출가자의 정신적 가르침〔法施〕에 의해 올바른 삶을 영위하고 종교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요컨대, 남에게 베풀고〔施論〕 스스로 계행을 잘 지킴으로써〔戒論〕 천상에 태어난다〔生天論〕는 차제설법(次第說法: anupubbikatha-)의 종교적 메커니즘을 통해, 불교는 경제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의 모순을 회통하고 있는 것이다.

2. 불교 교단 경제의 역사적 전개

1) 인도의 교단 경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 입문한 출가 수행자들은 일체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상의 이유뿐만이 아니라 도의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검소하고 간결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출가 생활의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의지(四依止=四依)’는 수행자의 간결한 생활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사의지란 출가자가 평생 지켜야 하는바, 음식 섭취는 걸식(乞食)으로, 옷은 분소의(糞掃衣: 버려진 더러운 천이나 옷을 깨끗이 빨아 기워 만든 옷)로, 거주(居住)는 나무 밑에서, 약은 진기약(陳棄藥: 부뇨약이라고도 함. 소 오줌에 하리이다키 열매를 넣어 이것을 흙 속에 묻어 발효시킨 것)으로 해결하는 생활 방식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삼의일발(三衣一鉢)’ 또는 ‘육물(六物)’에 의해 생활해야 했는데 그것은 거의 무소유에 가까운 생활이었다. 삼의일발이란 옷 세 벌에 발우 하나라는 의미이고, 육물이란 세벌의 옷[안타회(下衣) ·울다라승(上衣)·승가리(大衣)]과 발우, 깔고 앉는 방석과 물을 걸러 먹는 주머니(녹수낭)를 가리킨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본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약간 더 허용되지만, 규정 이외의 또는 규정 이상의 물품을 갖고 있는 자가 발각될 경우, 그 사람은 그것들을 4명 이상의 도반들 앞에 내놓고 참회해야 했다〔捨墮〕.

이러한 규칙은 출가자들로 하여금 수행에 전념케 하고, 출가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소유의 불평등을 제거함으로써 승가의 화합을 도모케 하고, 일반인들의 신뢰를 이끌어 내며, 재가 신도가 지나친 보시로 부담을 느끼거나 재시의 원천이 고갈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26)

또한 교단에 대한 재가자들의 보시는 일반적으로 대중 전체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보시물 가운데 옷가지라든가 일상적인 소비재는 승가 대중에게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하지만 시물(施物) 가운데 토지, 가람, 주방(住房), 침구, 기타 모든 기물과 도구 같은 더욱 중요한 내구적 소비재는 개인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유행자들을 포함한 승가 대중 전체가 공동 사용토록 하여 특별한 관리자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사방승물(四方僧物)’ 또는 ‘승물’인데, 이거한 공동의 소유물은 팔거나 대여하거나 사유화할 수가 없었다.27) 지극히 사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용품〔私物〕을 제외한 모든 것은 사방승가(四方僧伽)의 공동 소유〔僧物〕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승가는 생산은 않고 소비만 하는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소비 공동체’라고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승가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불멸(佛滅) 후 약 100년경, 웨살리(Vesa-li)에 사는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재가자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물이 담긴 구리 단지(항아리)를 수도원 입구에 놓아 두고, 승가에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필요하니 그것들을 구입할 돈을 보시하라고 신도들에게 거의 구걸하다시피했다.28)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야사(Yasa) 스님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결국 불교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두 부파로 분열하게 된다. 이러한 ‘근본 분열’ 이후에도 ‘지말 분열’이 계속되어 교단은 수많은 부파로 분열되면서 부파불교 시대를 낳는다.

이러한 불교사 변천의 이면에서는 불탑신앙이 태동하고 있었다. 불멸 후 건립된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이 봉안되어 있어서, 부처님에 대한 숭배의 종교적 감정은 자연스럽게 불탑을 향하게 되고 불교도들은 불탑 앞에 많은 공양물과 재물을 바치게 되었다. 부파불교의 부정적인 면이 확산되면서 불탑신앙은 더욱 고조되고 그에 의거하여 대승불교가 흥기하게 된다.

그런데 상좌부 가운데는 불탑에 바쳐진 공양물이나 돈, 기타 재물 등〔塔物=佛物〕이 부처님의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것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부파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 대중부와 설일체유부, 불탑신앙의 핵심 세력은 비록 탑물일지라도 제자들이 이용할 수 있다고 보고, 탑물을 재가자나 일반인들의 사업에 투자하여 이윤을 얻거나 때로는 저당을 잡고 대부해 주어 이자를 받아 원본의 무한한 증식을 꾀했다.

이러한 탑물 및 제도는 흔히 ‘무진물(無盡物)’ 또는 ‘탑물무진(塔物無盡)’이라고 불린다. 무진물 제도는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고, 인도 사회에서 일종의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무진물로 얻은 이익과 이자는 탑에 대한 헌공비, 승원의 유지 운영비에 충당되었다. 나아가 사회적 빈곤의 구제 등에도 사용되어 대승불교 이념을 민중 속에 실현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였다.29)

2) 중국의 교단 경제
불교가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C.E. 67년〕의 일로 알려져 있다.30) 전래 초기에는 출가자들이 비교적 출가자 본연의 생활에 충실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단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사탑(寺塔)이 점점 많아지고 교단이 정비되자, 왕공귀족(王公貴族)과 부호들의 시주가 늘어나고 그 규모도 커진다.

이렇게 해서 사찰의 큰 재산이 형성되면서 승려들은 걸식을 중지하고 사찰 내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사찰의 재산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전(寺田)이었다. 사전은 원래 사탑을 건립할 때 신도들이 사원의 경제적 기초를 위해서 자신들의 전답을 보시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여기에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일반화되면서 보시는 더욱 많아지고, 나아가 재원을 확보한 사찰은 권력을 배경으로 하층민 계급의 토지를 사들이기도 하고 개간에 투자하기도 하고 저당 등에 의한 토지 병탈을 자행함으로써 땅을 넓혀 갔다. 이제 사전은 귀족이나 부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장원과 다를 바 없었다. 사전을 사장(寺莊)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31)

불교 사원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사찰 재산의 일부를 사람들에게 빌려주어 이자소득까지 올렸다. 또한 귀족이나 부호들 사이에서는, 집안 분묘에 공덕원(功德院)이라는 절을 짓고 거기에 전답을 기증하여 사원이 누리는 면세의 특권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장원을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당대(唐代)에는 자본을 투자하여 수력을 이용한 방앗간〔홛쾪〕을 세우거나, 점포 내지 창고〔邸店〕를 건립하거나 수레를 대여하는 사업〔車坊〕을 운영하는 절들도 있었다.

물론 승단 내부에서는 사찰의 공유재산과 승려들의 사유재산은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래서 공유재산을 사적인 용도로 전용하면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하는 규정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사원경제의 비대화는 계속되었고 이러한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면세나 면역을 목적으로 위장 출가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들에게 출가는 속임수일 뿐으로 그들은 농민이나 상인들과 다름없이 재산을 늘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길흉을 점치는 일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고 사재를 축적하여 고리대금업을 운영하는 자도 있었다.32)
그러나 불교의 자비 이념과 복전(福田) 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사회구제사업의 큰 흐름도 중국불교 교단 경제에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위 사찰이나 승려 개인이 추진했던 사회사업도 있었지만, 제도화된 사회사업도 적지 않았다.

먼저 승기호(僧祇戶) 제도는 북위 때 사문도통(沙門都統)인 담요(曇曜)의 건의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국고(國庫)에 납세하는 지방의 곡물을 승조(僧曹)에 납부케 하고 승조에서는 이것을 관리하여 빈궁자에게 대여하였다. 불도호(佛圖戶)는 죄인이나 노비를 불교 사찰의 관리하에 두고, 절의 건립이나 청소, 사전(寺田)의 경작, 기타 잡역에 종사시키면서, 그들을 불교로 교화하면서 동시에 불사(佛事)를 위한 노동력으로도 활용한 제도이다. 담요가 계획하고 관리한 이 제도는 흉년의 구휼, 서민 금융, 농업 노동력의 정착, 범죄자의 보호와 교화 등을 위한 다목적 사업으로서 시대 상황에 부응하였기에 단기간에 북위 전체에 확산되었다.33)

다음으로 무진장(無盡藏)은 원래 양무제(梁武帝)에 의해 방생과 보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여기에 전당포〔質庫〕를 병설하여 서민들에게 금융 편의를 제공한 사찰도 있었다. 이 무진장원(無盡藏院)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는데, 신행(信行)이 창시한 삼계교(三階敎) 소속의 화도사(化度寺) 무진장원이 특히 유명하다. 이것은 원래 스님들의 생활비, 사찰 건물의 수선비(修繕費), 불사법회(佛事法會)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흉년에는 빈궁자에게 무이자로 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출하기도 하여 빈민구제 기관의 성격도 농후하였다.

삼계교단의 무진장원과 성격이 거의 비슷한 기관으로 일반 사찰에는 ‘사고(寺庫)’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관들은 훗날 그 근본 취지를 망각하고 여러 가지 폐해를 낳게 되어 당 현종(玄宗)에 의해 폐쇄되는 운명을 맞는다. 당대(唐代)의 무진장원과 사고는 송대(宋代)에 들어서는 장생고(長生庫)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사회구제사업은 외면한 채 영리사업에 치중하게 된다.

중국불교 교단은 이와 같이 빈민과 기아자를 구제하는 데 재정의 상당부분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교량을 건설하고 수로를 만들며 나무를 심어 홍수에 대비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은 일부 시설을 여행자나 수험생을 위한 숙박 시설로 제공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대신 치루어 주기도 하였다.34)

3) 한국의 교단 경제
중국불교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는 사상과 신앙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경제적 측면에서도 인도불교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환경과 생활양식, 문화 환경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국가권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국가가 불교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으로 흥국이민(興國利民)을 도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원 건립은 대부분 국가나 왕실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고 사원경제의 토대가 되는 전지(田地) 역시 대개가 국가나 왕의 사급(賜給)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대에 사원 노비가 있었다고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일반 노비와 달리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었다.35)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가권력과 깊이 결탁되어 큰 세력을 행사하였고 대중화된 신라불교의 영향으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와 숭앙을 얻어 가위(可謂)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사원은 조정으로부터의 사급, 권세가들의 경쟁적인 시납(施納), 가렴주구를 피해 차라리 소작인이 되고자 스스로 결행한 투탁(投託), 매입과 탈점(奪占) 등에 의해 늘어만 가는 사원령으로 경제적 비만증에 걸렸다. 또한 사원은 불교의 자비와 평등의 이념과도 배치되는 노비들로 넘쳐났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는지 스님들은 계율도 무시하고 술을 만들어 팔고, 파와 마늘을 팔며, 옷감, 유리기와, 청자 등의 공예품을 생산 판매하는가 하면 염전에도 손을 뻗쳤다. 불사의 비용 조달과 사회구제사업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보(寶)를 운영하면 높은 이자를 받아 국민의 비난을 샀다. 사원을 건립함에도 그 규모가 너무 크고 호화로웠으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창건불사와 각종 법회로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은 노역에 시달렸다.

이러한 폐단의 근본 원인은 사원이 탐욕과 집착을 여의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축적된 부를 사회에 환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에 얽매인 데 있었다. 갖가지 폐해가 드러나자 고려 말엽에 이미 승려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금령(禁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배불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고려시대 사원경제의 지나친 팽창은 숭유억불의 조선조에 불교계가 겪게 되는 고난과 시련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36)

조선조 태종(太宗) 대에 접어들면서 불교 배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태종은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한편, 사원 소유의 토지를 약 60% 정도 몰수하고 사원 노비를 거두어 군정(軍丁)에 충당했다. 세종은 비록 만년에는 불교를 받들었지만, 초년에는 내불당을 폐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억제하는 등, 태종의 정책을 계승하여 더욱 가혹한 척불을 단행했다.

세종 중엽 이후 세조(世祖) 대에는 세조의 불교 외호로 사원의 재건과 증축이 도처에서 이루어졌으며 사원전도 제법 늘어났다. 특히 상원·낙산사의 경우는 ‘면세’ 특혜를 받아 가며 사원 농장을 운영하였다. 과전법의 붕괴로 승려들의 개인적인 전지(田地) 소유가 가능해지고37) 승려들의 풍부한 노동력으로 인해 사원전은 늘어 갔다. 그러나 연산군과 현종의 치세 중에는 전국의 사원전과 노비가 다시 몰수됨으로써 사원경제의 기반이 무너지고 만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 대에는 이미 천민으로 추락한 승려들에 대한 사대부들의 가렴주구가 실로 극심하였다. 스님들은 인조 이후 도성 출입금지라는 차별을 감내하면서도 남·북한산성을 쌓고 수비를 담당하였으며 산성 수비에 필요한 경비까지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스님들의 생활은 날로 비참해져 환속하는 스님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아예 산속 깊이 은둔해 버리는 스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스님들은 사원 운영을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들은 탁발을 하고 전지를 개간하였으며, 짚신과 미투리, 종이와 누룩 등을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품팔이를 하여 재산을 모았다. 조선 후기에는 갑계(甲契), 도종계, 어산계, 미타계, 관음계 등의 각종 계를 조직하여 공동의 자구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소유의 재산은 바로 조선시대 스님들의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38)

3. 끝맺으면서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교단의 ‘출가―재가’라는 상호보완적 이원구조의 특성상 부처님 당시 모든 출가 수행자는 화폐를 비롯한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을 일절 소지하거나 비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환경이 바뀌고, 인도와는 기후와 풍토 및 문화와 역사가 판이하게 다른 중국과 한국의 불교 교단에서는, 출가자도 돈을 소유할 수 있다는 이른바 ‘금은정(金銀淨)’의 입장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출가자의 지나친 돈과 재산의 소유가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원 재정의 팽창과 비대화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불교의 역사를 통해 생생하게 알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 빈곤과 실업으로 고통받는 이웃과 중생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종교계의 풍요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적 이상은 자유와 평등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기에, 부처님은 깨달음을 강조하는 한편 자비와 보시를 가르치고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합리적 조세정책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불교의 존재 이유, 출가자의 본분, 불교인의 올바른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저절로 열릴 것이다.

또한 불교는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오늘의 천민자본주의와 카지노자본주의에 대해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설령 재산을 잃는다 해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지혜가 없는 부자는 지금 한순간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라는 《테라가타》의 가르침처럼, 불교는 정신적 충족을 중시한다. 적절한 물질적 충족은 이 정신적 충족의 필요조건이 되겠지만, 필요 이상의 물질은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황폐화하여 결국 행복을 감소시키고 고통을 증가시킨다.

오늘의 지구적 경제 위기는 역설적으로 너무 비대해진 몸집 때문에, 넘쳐나는 거품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경제 상황에 대한 불교의 기본 입장은 진부하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슈마허의 다음 말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박경준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 취득. 학위 논문은 〈원시불교의 사회·경제사상 연구(1992)〉이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이며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생산과 소비에 대한 불교의 기본 입장〉 등이 있으며, 역, 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학》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