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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상의 윤리 / 장기홍
장기홍 경북대학교 지질학과 명예교수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장기홍 경북대 지질학과 명예교수

우리 집 삽살개는 이제 늙어서 수명이 다 된 것 같다. 끙끙 앓기도 하고 가끔 비틀거릴 때가 있는데 그러다가는 쓰러져서 두 발을 허우적대며 땅을 파는 시늉을 한다. 개가 땅을 파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개는 그러다가도 넉넉히 일어서서 살아가기를 벌써 여러 번째 거듭해왔다. 아마도 죽음의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 나는 대학동기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항암 투병 중이며 여러 달 만에 기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여러모로 다행해 보였던 그를 나는 다소간 부러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와병 소식은 부러움과 비교가 다 헛것이었음을 밝혀 놓았다.

젊은 학자들도 흔히 요절하여 놀라게 한다. 학회 때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어떤 젊은 보석학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광산을 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현지를 답사했다. 소유주의 기대 이상으로 다이아몬드가 난다고 알려준 대가로 그는 우선 십억 원어치 주(株)를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병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지병이라는 설도 있어 잘 알 수 없다. 여하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나는 지질학자로서 인류뿐 아니라 지구나 태양이 유한한 수명을 가졌음을 안다. 우리가 아는 우주도 수명이 있다고들 한다. 먼 훗날에 서서 볼 때 색즉시공(色卽是空) 색불이공(色不異空)은 너무나 명백하다.

노인만이 아니라 제왕이나 필부필부(匹夫匹婦)나 그 누구라도 사람이면 최대의 배움은 ‘앞으로 죽음이 있다’는 자각이겠다. 나이 먹어 가면 곧 죽음이 있을 것도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일상사의 환상을 즐기고 누리기에 연연하게 된다. 착각의 망(網)에 걸려 사는 것을 즐기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 자신을 돌아다본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일컫지만 사(死)야말로 면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 다음으로는 질병이다. 비교적 건강한 사람도 있기는 하나, 사람들에게 어차피 병은 있게 마련이며 누군가가 병을 담당해야 한다. 질병과 죽음은 늘 따라다니는 삶의 필수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라 생각할 때 서로 돌아다보아 자비심(慈悲心)이 없을 수 없다. 고(苦)를 함께 나누는 동지라는 자각이다. 그래서 나는 모두를 수고(受苦)동지라 불러 본다.

옛사람들은 사후에 천당에서 보상을 받을 것을 믿는다든지 예수가 말세에 재림하면 의인들을 무덤에서 일으키리라 믿었다. 인도사상에서는 윤회를 믿고 다음 태어날 때를 위해 적선(積善)을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의 조명 아래 사는 우리는 그런 개인적 사후보상은 없음을 알고 있다. 개인의 자아는 죽음과 함께 분해되고 취소되는 것이다. 옛날에 있던 도덕의 기반이 무너지고 없음이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고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서로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다. 우리는 서로 체온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실존의 모습이고 휴만이즘의 이유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 이제 인류는 극히 고상한 신인류(新人類)가 되어야 세상이 자발적인 윤리 사회가 될 수 있다.

보상을 초월한 성인(聖人)들 초인(超人)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 어렵기 그지없다. 그런 대중화가 가능할까? 현황은 정 반대로 되어가는 감이 있다. 그래도 길은 오직 그 길이 앞에 있을 뿐이다. 거족적 신인류로 거듭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피하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사멸(死滅)을 겪는다. 모든 생물 종(種)에는 수명이 있다. 인류에게도 수명이 있음은 물론이다. 고생물학 서적에는 옛 생물종들의 수명에 대한 연구결과가 도시(圖示)되어 있다. 거기 보면 알려진 과거의 무수한 생물의 생존기간이 일목요연하게 선(線)의 길이로 표시되어 있다. 포유류 종의 평균수명은 200만년 미만임을 알 수 있다. 인류종(Homo sapiens)은 수십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앞으로 살 날이 백 수십만 년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백 수십만 년은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살 경우의 수명이고 지금처럼 인공을 자꾸만 가하면 수명은 단축될 게 뻔하다. 한편 인위적으로 영생을 도모할 것이니 인간의 재주가 비상함에 비추어 보면 어떻게 인조(人造)인간으로 둔갑하여 생존을 이어 갈지는 알 수 없다. 인류가 어찌어찌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하자. 지구와 태양 자체가 결국은 유한한 것이다. 물론 너무나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유한(有限)이므로 아깝고 귀하다.

어떤 철학자는 사람을 ‘죽음을 앞둔 존재’라 강조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의 정의(定義)라 보았던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만이 의식적으로 ‘죽음을 앞두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산다.

죽음이 있어서 비로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임을 대견히 여긴다면 죽음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이는 본래 불교의 중심 원리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열반과 동의어로 씀으로써 죽음을 평가해 왔다. 허무주의 같지만 허무라 해서 겁낼 것 없다. 허무를 깨닫는 일은 알찬 일이다. 깨달음은 곧 연기(緣起)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석가는 설파(說破)했으니 이제 그 이치를 주목해 보자.

교훈은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요즘의 환경과 생태계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대들고 있다. 자연 정복이란 말이 있더니 사람들은 마구 개발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여 그만 환경이 파탄 났다. 우리는 이제 ‘나’와 환경을 대립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뉘우치고 ‘나’와 환경이 하나다 하는 이치를 배우고 있다.

사람과 환경이 생태적인 관계에 있다는 말은 서로 연기(緣起)적이라는 그 뜻이다. 환경이 망하면 인류도 망한다. ‘나’ 없으면 ‘너’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서로 의존적이라는 말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덜 싸우게 되고 서로 선(善)해야 한다는 틀림없는 답이 얻어진다. 깨달음은 바른 선택 바른 결단으로 이어짐이다.

생태라는 연기(緣起)를 여래는 벌써 그 옛날에 지적했던 셈이다. 오늘의 생태적 위기와 절박한 환경문제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산 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삶의 토대인 천석(泉石)도 공경해야 한다. 자연보호의 철학이다. 예수가 만일 지금 살아서 가르친다면 사람 서로 간은 물론 모든 중생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과 같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절박하게 사람에게 깨달음을 요청하고 있다.

개인으로는 가끔 성인이 되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어도, 국가들이 있는 한 부국강병을 면할 수 없고 걸핏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보듯이 전쟁이 붙으면 짐승처럼 된다. 아니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은 세계 대통령 격인데 그가 아무리 휴전을 역설해도 외면하더니 결국은 휴전의 권유는 효력을 거두었으니 다행이다. 어서 세계가 한 나라가 되어 모든 개인이 세계시민이 되면 부국강병의 원리는 물러갈 것이다. 유엔이 세계정부가 되는 날이 어서 와서 신인류로의 큰 걸음이 걸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제도의 정돈뿐 아니라 새로운 윤리가 지배하게 될 날을 꿈꾸어본다. 어떻게 그런 꿈같은 미래를 만들까 생각할 때 유교와 불교에 있던 무보상의 인생관이 연상된다. 공자는 미래의 보상을 전혀 논하지 않았다.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도 물론이다. 그런 성자들처럼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이 사람아, 아무런 보상이 없을 걸세! 애쓰지 말게!” 이렇게 누군가가 내게 충고한다 해도 나는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 했던 그 철인을 따르리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인류의 목숨이 유한한 것은 마치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는 산중에 피었다 스러지는 꽃밭의 유한(有限) 같다. 유한하므로 귀중하고 유한하므로 고귀하다. 촌음을 아껴서 한껏 좋게 쓰겠다 하는 자각이 솟을 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필부필부가 아는 상식이 아닌가. 그러니 새 윤리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며 이미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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