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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역설 / 장기표
장기표 신문명정책원구원 이사장
[38호] 2009년 03월 10일 (화) 장기표 신문명정책원구원 이사장

‘알 것은 다 안다’는 말이 있다. 특히 ‘정치인보다 국민이 더 잘 안다’는 말도 있다. 하기야 대중의 지식 수준이 크게 높아졌고 정보통신 수단의 첨단적 발달로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알 것은 다 안다’거나 ‘정치인보다 국민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과연 알 것은 다 알고 있을까? 정치인과 국민을 따질 것 없이 사실은 아는 것이 별로 없고,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명(無明)이 절감되는 시대이고, 이것은 문명사적 대전환으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는 데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지금 미국발 금융 대란으로 세계경제가 파탄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그 해법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원인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경제가 이토록 어려운데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 갔나?’ 하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의 여러 사회현상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 ‘나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나눔’이 강조되고 있다. 나눔이야말로 사랑 내지 자비의 구체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나눔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수 있다. 불교 화엄경의 인드라망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나눔으로써 존속할 수 있거니와 인간 사회 또한 서로 나누지 않고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눔은 생존을 위한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을 돕는 우리 사회의 ‘자선형 나눔’은 나눔의 근본 취지에 배치됨은 물론 지극히 반인간적일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자선형 나눔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을 돕는 것은 사랑 내지 자비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을 때 옳은 것이지 모든 경우에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을 통해서 누구나 남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는 하지 않고 사적인 나눔으로 이들을 도우려 한다면 이것은 사랑 내지 자비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지극히 반인간적일 수 있다. 더욱이 이 나눔이 빈곤층을 존속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이런 나눔은 죄악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현재와 같은 사적 나눔은 다음 두 가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유념해야 하겠다.
우선 사적인 나눔은 그것을 아무리 활발히 전개하더라도 나눔의 혜택에서 빠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빈곤층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다음으로 사적인 나눔에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나눔(十種布施)을 말씀하면서 ‘삼종원만청정보시(三種圓滿淸淨布施)’ 곧 나누어 주는 사람과 나누어 받는 사람과 나누는 물건이 모두 원만하고 청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했는데,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우리사회에서 강조되는 나눔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눔으로 빈곤층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함으로써 누구나 사적인 나눔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나 되는 나라에서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못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빈곤층이 20%나 된다는 것은 국가적 수치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을 강조함 없이 ‘나눔’이나 강조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빈곤층의 존속을 영속화하려는 음모의 결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들의 평균 기부액은 1인당 국민소득의 1.34%(약 23만 원)로 일본(0.02%)의 20배에 달하며, 미국(1.7%)에 약간 뒤질 뿐 호주(0.6%)와 네덜란드(0.9%) 등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미국도 한국에 비해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 한국식의 ‘자선형’ 나눔은 별로 필요치 않거니와 특히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나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은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완벽하게 정비되어 있어 자선형 나눔은 거의 필요치 않다.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을 통해 자선형 나눔이 거의 필요 없는 나라의 기부액과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자선형 나눔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이 많은 나라의 기부액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엄청난 난센스다.

심지어 사회보장제도를 채택하더라도 서유럽 복지국가들처럼 모든 국민에게 사회보장 혜택을 주는 보편주의를 채택해야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일이 없지 미국처럼 빈곤층에만 사회보장 혜택을 주는 선별주의를 채택해서는 인간의 존엄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까지를 고려한다면,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을 외면한 채 나눔이나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산업의 정보화에 따른 대량실업과 소득 양극화, 그리고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에 따른 빈곤층의 급격한 증가로 나눔이 더 많이 강조되게 생겼는데, ‘나눔’으로써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결국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빈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임을 알아야 하겠다.

어떤 일도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는 ‘나눔’에도 적용된다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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