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편집위원

지금 전 세계에는 다시 대공황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수천만 명이 파산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기아에 직면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고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하게 하였으며 결국 자신마저 파산하였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와 이동은 허울뿐, 온갖 장애와 규제가 사라지자 견제되던 악과 이기심이 자유로이 분출하였다.

초국적 기업은 가장 금융 비용이 저렴한 나라에서 돈을 빌려 가장 원료가 싼 나라에서 원료를 사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역, 즉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가장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에서 생산을 하고 판매와 수출을 최대화할 수 있는 나라에 생산 기지를 두고 제품을 팔아 세금이 가장 낮은 나라로 기업소득을 이전시키고, 자본 수익과 환차익이 가장 높은 나라로 자금을 이동시켰다.

 금융 마피아들은 각종 사기성 파생상품을 만들어 대중의 건전한 자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제3세계에 투기를 하여 민족자본과 기아를 구제할 밑천마저 약탈하였다. 그들은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인 순간에도 수백억 원의 성과금을 챙겼고, 대다수가 이 돈을 사치와 환락으로 낭비하였다. 이는 합법을 가장한 범죄이다.

그 결말은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직면한 것,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확대된 것, 수많은 사람이 실업과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놈 촘스키는 1970년대에는 국제자본 중 10%가 투기 자본이었으나 1990년대엔 90%가 투기성 자본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금융 자본은 숫자 놀음일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지적처럼, 금융자본이 얻는 이익은 산업자본이 얻는 이윤을 수탈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 때문에 90%가 투기 자본이라는 것은 세계 경제가 실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 도박판이고 거품임을, 더 나아가 이의 수혜자는 1%도 안 되기에 나머지 99%는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1960년에 세계 극빈층 20%의 총소득은 그나마 세계 전체 총소득의 2.3%에 달하였으나 신자유주의식 세계화가 진행된 1996년에는 1.1%로 떨어졌다. <포브스>에 따르면,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소유한 억만장자는 해마다 늘어 2008년에는 1,125명에 달하였으며, 상위 50여 명의 재산은 1조 달러를 넘는다. 이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 명의 1년 소득액보다 많은 것이다.

대신 67억 세계 인구의 3분의 2인 44억여 명이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고, 해마다 4천만에서 6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학자들은 2009년을 기점으로 이 숫자는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인류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무언가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류는 금세기나 다음 세기를 넘기지 못 할 수도 있음을 말해 주는 메시지다. 21세기는 ‘비워 둠이 사라진 시대’라 할 수 있다.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둠[虛]을 두는 것이기에, 이름 그대로 ‘스스로 순환하면서 존재하는’ 자연(自然)을 이룬다.

우리 동네 개천의 물이 흐르면서 자연정화를 할 수 있는 폐수의 양이 10갤런이라면 하루에 8갤런을 버리면 2갤런의 비워 둠이 있다. 이 비워 둠 때문에 8갤런의 폐수를 버리더라도 이 개천은 버들치가 뛰노는 맑은 냇물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10갤런을 넘어서는 순간, 이 냇물은 금세 오염되어 악취가 나고 그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과 생명체들은 오염에 약한 순서대로 죽어 버린다.

한 20여 년 사이에 이 빈 곳들이 없어져 버렸다.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도,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굶주리면서도 까치밥을 남겨 두고 과일을 땄기에 까치는 다른 과일은 쪼지 않았다.

가난해도 개다리소반을 현관 가까운 곳에 걸어 두고 거지가 오면 한 상 차려 주었기에 거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 가난한 집단과 부자 집단의 차이가 다섯 배가 넘으면 그 집단은 붕괴 위험에 놓인다고 하는데, 현재 세계는 수만에서 수십만 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어느 정도 비워 둠이 있어서 가난한 자도 나름대로 생을 연명하고 생명체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이제 거의 전 세계에서 비워 둠이 사라졌다.

신자유주의는 가속페달일 뿐,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비워 둠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체제이다. 돈, 정확히 말하여 상품화폐가 삽화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지배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자본주의 교환 체계이다. 이 체제에서 사물과 인간 모두 객관화하면서 본래 가치를 상실하고 물화(物化, reification)한다. 이 체제는 사랑과 자비 같은 추상적인 가치는 물론 인간의 정신과 육체마저 교환가치로 대체하도록 강제한다. 사물과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를 화폐가 대신하기에, 자연히 사람들은 사물들로부터,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각자가 의미 있는 다채로운 삶들은 교환가치 속에 매몰되고, 우주의 중심이자 불성(佛性)을 담고 있는 인격들은 무시되고 물욕이 우선한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상품과 금전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찬 화폐만능사회이다. 돈 때문에 사람과 사랑, 의리를 배신하고 한 덩이 재물에 사람을 살해하고 학살하는 사회가 바로 이 체제다.

자본주의 체제는 확대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동력으로 한다.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만 이 체제는 존속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자본의 욕망은 더욱 자유로워졌고 세계화하였으며 전 세계 차원에서 더욱 강한 강도로 타자를 착취하고 폭력을 행하고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지구촌을 거대한 쇼핑센터와 전쟁터와 쓰레기장으로 만들었다. 거대한 쇼핑센터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거의 무한하게 착취하여 공동체와 개인의 인간성을 파괴하였다.

또 확대재생산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착취하고 부단히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오늘보다 내일에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하여 초국적 기업들은 전쟁과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또 한 편에서는 확대재생산 원리에 따라 자연을 무한한 곳으로 간주하고 마구 착취하고 개발하여 지구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전 지구촌의 환경위기’를 야기하였다.

이제 우리는 유턴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을 걷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의 탐욕이 극단에 이르렀고 이 체제를 떠받치는 확대재생산의 원리가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전조다. 이 체제가 이렇게 자연과 인간을 망침에도 별로 저항과 도전을 받지 않는 것은 이 체제의 최대의 피해자인 중산층과 가난한 자들마저 화폐증식의 욕망, 곧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화폐증식의 욕망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자리에, 사회의 장에, 지구의 공간에 비워 둠의 틈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모든 장에서 비워 둠이 사라졌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할 여분이 없다. 욕망은 신기루! 모두가 더 많은 돈, 더 즐거운 환락, 더 크고 좋은 집, 더 높은 권력, 더 많은 소비를 갈망하고 그를 이루려 삶을 허비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만, 그를 이루는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린다. 욕망이 신기루라면, 우리는 욕망을 확대하는 데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던 삶에서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E.F. 슈마허의 선언대로, 다시 작은 것이 아름다운 시대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것보다 덜 받고 이를 나누는 삶으로, 육신이 더 즐거운 환락보다 마음이 즐거운 삶으로, 더 크고 좋은 집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작은 집으로, 더 높은 권력보다 상대방을 모시고 섬기는 삶을, 더 많고 좋은 것을 소비하는 것보다 검소하게 절제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미덕을 추구할 때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사람들은 나와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연기를 깨달으면 각 존재자들이 ‘우리’의 범주로 들어온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듯,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도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그렇듯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점유함을 깨닫고 타인을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유보하고 절제하며 곳곳에 비워 둠을 마련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시대다.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개인 차원에서는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마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는 이를 구체화하는 시스템과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인류에게 실낱같으나마 아직 내일은 있다. ■

                                                                2009년 3월
                                                          이도흠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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