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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초록 - 동아시아 속의 한국불교 / 버스웰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Jr.)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로버트 버스웰 이상민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Jr.)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불교의 전법(傳法)은 드넓게 펼쳐진 아시아 대륙의 땅끝까지 흘러들어 간, 거의 과장 없이 세계 최초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간단없는 물결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율장 대품(Mahāvagga)》에는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에 불교 교단이 형성된 직후 붓다가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옵니다.

“비구들이여, 가라! 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인간과 하 늘에 있는 존재들의 이익,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이 명령에 따라 서쪽의 카스피 해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초원, 동쪽으로는 일본 열도,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군도에까지, 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세계 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 중 하나인 불교의 전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주로 아시아의 지리적, 문화적 경계 사이로 길게 뻗은 무역로를 따라 적어도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 들어왔으며, 몇백 년 지나지 않아 주변의 동아시아 국가들까지 도달하였습니다. 현재에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중요한 종교적 위치를 점하고 있지요.

그러나 불교의 전파가 점차 동쪽으로 확산되는 일방향적인 전법 활동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단지 불교 전법사(傳法史)의 일부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동아시아 불교의 경우엔 또 다른 이야기, 즉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소용돌이 혹은 역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문화 ․ 정치 발달사 전반에서 중심지 역할을 했던 중국의 존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변 지역에서 발달한 불교를 위시한 모든 문화는 필연적으로 중국 본토에서부터 시작해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던 주변 국가로 퍼져 나갔다고 짐작합니다.

물론 거대한 영토를 지닌 중국은 동아시아 불교의 창조적인 작업들을 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주변 국가에서는 중국 본토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변 국가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심지어 근본적인 역류는 인접 국가의 전통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나아가 '중국 문화권'의 불교 발달에 대한 어떠한 개괄적인 설명이라도 동아시아 '주변 지역'-일본, 베트남, 티베트,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은 중국 불교의 성장을 촉진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의 영향을 받기 쉬웠고, 한국의 경전 주석서(이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습니다.)는 종종 기존에 중국에서 저술된 문헌만큼이나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 대해 제가 제시하는 구조적인 특성을 따르면, 이러한 '주변 지역'의 저작물들은 중국 본토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 자체의 저작물만큼이나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불교의 주석서들이 이러한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는 명백한 증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중국에서 각 지역으로 퍼진 경우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 간 경우 또한 고려하여 동아시아 불교 전통 간의 파생 관계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예를 들어 이러한 일방향적인 흐름과는 다른 영향력에 주목하여 불교의 특정한 지역적 요소들이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 전통 위에서 함께 다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불교가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양태를 보면, 한반도는 그저 중국 본토의 불교와 문물을 일본 열도로 전해 주는 ‘교량’이라는 한국 학계의 전통적인 비유를 넘어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계에서 이러한 비유가 통용된 역사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인 일본 중심적 관점(Japan-centric view)은 이제 폐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일본으로 초기에 유입된 불교는 중국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직접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건너간 승려들이 중국의 몇몇 종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일본의 초기 불교에 대한 한국의 영향보다도 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나아가 한국 불교는 쓰촨성이나 티베트 같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국은 '교량'이 아니라, 중국 문화권의 불교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요새'였던 것입니다.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한국의 역할

일찍이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이 붙여 준 “은자(隱者)의 나라”라는 석연찮은 명칭에도, 우리는 한국이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주변 지역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최소한 근대 초까지 중국문화권 그물 속에 묶여 있었습니다. 중국문화의 한반도 침투는 교리(敎理)나 의식(儀式)뿐만 아니라 중국의 깊고 넓은 지적 자산들을 함께 들여왔던 불교 승려들의 포교 활동을 통하여 촉진되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경전을 들여온 불교는 한문 서적에 대한 한국인의 지식,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교 ․ 문학 ․ 역학(曆學) ․ 점술을 포함한 중국의 종교적 ․ 세속적 글들에 대한 친밀성을 키웠던 것입니다.

한국은 불교와 중국문화의 동부 전파에서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한반도의 승려, 기술자, 장인(匠人)들은 불교를 포함한 일본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한국의 고대 왕국이었던 백제는 일본열도에 불교문화를 전파함으로써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나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일본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과소평가를 하더라도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말까지 백제는 일본의 문화적 생산물들에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 불교 전파의 주요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당시 학자들은 유교의 고전과 불교의 문헌, 그리고 의술을 일본에 전했고, 기술자들은 중국 사찰의 건축양식, 축조술, 심지어 재봉술까지 소개하였습니다. 7세기 초 대승 삼론종의 대가로 알려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 또한 역학(曆學), 천문학, 기하학, 점술, 수비학(數祕學)에 관한 문헌들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국 승려들은 일본 승단 체계 성립의 조언자인 동시에 관리자로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일본 비구니 승단의 성장도 결국 6세기 말 백제에서 3년 동안 율장을 배운 세 명의 비구니(善信尼, 禪藏尼, 惠善尼, 최초의 일본 유학생)를 포함하여, 백제에 유학을 온 일본 비구니들이 들여온 한국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7세기 말경 중국 본토에서 직접 일본으로 문화가 유입되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지만, 그 후에도 가마쿠라 막부 시대(1185~1333)에 강력한 한국의 역류가 재등장했으며, 이는 호넨(法然, 1133~1212), 그리고 특히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란(親鸞)은 선대 중국 논사인 담란(曇鸞, 476~542)과 선도(善導, 613~681)를 제외하면 7세기 불교 주석가인 경흥(憬興, 생몰년도 미상)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란(親鸞) 이전의 정토 관련 저서들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들 또한 원효(元曉, 617~686), 법위(法位, 생몰년도 미상), 현일(玄一, 생몰년도 미상), 의적(義寂, 생몰년도 미상) 등 통일신라 초기 사상가들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한국 주석가들의 영향은 결국 일본 정토종을 특징 지우는 몇 가지 독특한 성격을 이끌어냈습니다.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는 네부츠(念佛)가 정토종의 구원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든지, 위경(僞徑)으로 알려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īvyūha-sūtra)》을 더 강조한다든지, 《무량수경》에 기재된 사십팔원(四十八願) 가운데 서원을 일으키는 모든 이들의 정토왕생을 보장하는 제18, 19, 20원에 중점을 둔다든지, 제18원에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13세기 동안에(까지?) 한국은 일본 불교 발달에 끊임없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중국을 넘어선 한국 불교의 영향

근대 이전 한국의 승려들은 중국 불교의 학적 ․ 수행적 중심지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대개는 본토의 사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만주를 가로지르는 육로를 통한 한국과 북중국의 접근성이 한반도와 대륙 간의 정치적 ․ 문화적 결합을 공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삼국시대(4~7세기)와 통일신라(668~935) 시기의 한국은 실질적으로 동아시아의 페니키아였으며, 그들의 항해술과 잘 정비된 해로(海路)는 한반도의 항구를 지역 무역의 중추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 승려들은 상대적으로 중국으로 떠나는 상단(商團)에 합류하기 쉬웠고, 그래서 중국의 승려들과 함께 수행하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9세기 중엽 중국을 방문했던 엔닌(円仁, 793~864)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 있던 외국인 승려들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한국 유학승들을 주목합니다.

그는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승려나 상인들의 민족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사찰이 세워져 있고, 치외법권 지역이면서 자체 행정기관이 있던 중국 동부 연안의 한국인 집단 거주 지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을 넘어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까지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8세기 초 해로를 통해 인도로 건너가 727년에 중국으로 돌아온 혜초(慧超, 720~773년 활동)는 인도 아대륙 전역을 여행하였던 인도 유학승 중 가장 유명한 한국 승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문화 전 영역에 걸친 빠른 변화 덕분에 불교 사상에 대한 한국의 독자적인 논서들(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두 한문으로 쓰였습니다.)은 중국, 심지어 중국 너머 중앙아시아와 티베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저술된 문헌들은 상대적으로 급속하게 전파되었고 이 때문에 동아시아 전역의 학자들은 그들 동료의 진전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은 의상(義湘, 625~702), 원효(元曉, 617~686), 경흥(憬興, 7세기경)과 같은 이들이 찬술한 신라시대의 주석서나 논서들을 높이 평가하고 사상적으로도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 화엄종을 조직한 법장(法藏, 643~712)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이전에 썼던 졸저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에서 한국의 선승이 찬술한 위경으로 간주되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Vajrasamādhi-sūtra)》이 선불교의 가장 오래된 형태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금강삼매경》은 선종의 독자적 특징을 발달시키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인 전수법-보리달마가 중국의 조사들에게 전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心心相印]” 법-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입니다. 이 경전은 한국에서 저술된 지 50년도 안 돼 중국에 알려졌는데, 뜻밖에도 세린디아(Sehndia) 지역 원본에 대한 믿을 만한 번역으로 받아들여져 경전으로 편입되었고, 나아가 일본 심지어 티베트에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여타 지역에서 일어난 이러한 빠른 변화로 말미암아 저는 이 국가들의 부분의 합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승려들은 또한 중국 본토를 자주 방문하였으며, 중국 불교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비록 이들 중 대다수가 결국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들 중 몇몇이 중국에 남아 중국 불교 종파의 저명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명백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 또 그 너머까지 한국이 끼친 영향의 범위와 폭을 가늠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 예시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인도 철학의 중관학파와 대응되는 중국의 삼론종의 선구자인 승랑(僧朗, 대략 490년대에 활동)은 고구려 출신 승려로, 그의 민족성이나 중국불교에 대한 공헌도로 보았을 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중국 불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최초의 '한국인' 승려로 간주됩니다(사실 승랑은 요동 지역의 중국인 가계 출신인 듯합니다.).

한국인이라는 논란이 좀 덜한 이는 법상종(法相宗, Yogācāra School)의 성립에 영향을 준 신라 출신 승려 원측(圓測, 613~696)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역경승이었던 현장(玄奘, 664년 입적)의 두 수제자 중 하나였으며, 서안(西安)에 있는 현장탑 옆에 유골이 묻혔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원측(圓測)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출생지나 활동 지역 때문이 아니라 티베트 인들에게 '위대한 중국 주석서'로 알려진 그의 대표 저서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때문입니다. 원측의 저서는 중국의 변경인 둔황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국왕 랄파첸(재위 815~841)의 명을 받아 법성(法成, Chösgrub, 775~849)이 이를 번역하였습니다.

5세기 후반에 나타난(?) 저명한 티베트 사상가 총카파(1357~1419)는 티베트불교 전통을 개혁하면서 원측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였습니다. 삼전법륜(三轉法輪)에 대한 해석 방법, 아홉 가지 식(識)의 모습, 아홉 번째 식인 '청정식(淸淨識amalavijñāna)'의 성질과 특징과 같은 문제에 대한 티베트 불교의 입장에 원측의 관점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후 티베트불교의 모든 주요 학파들이 정교하게 구획을 짓고 세분하는 해석학적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원측의 주석 방식에 기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송대(宋代)에 제관(諦觀, 971년경 사망)이 소멸해 가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천태종의 교리적인 분류에 대한 결정적인 논서이자 '중국' 불교의 고전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습니다. 송대에 또 다른 몇몇 한국 승려들도 천태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고려의 왕자이고 승려이며 서적 수집가였던 의천(義天, 1055~1101)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의 만남은 중국 문화권 내 선불교 전통을 보면 특히 명확해집니다. 서남쪽의 변경 지역이었던 쓰촨에 자리한 두 초기 선종 학파였던 정중종(淨衆宗)과 보당(保唐宗)은 서로 자신들의 조사를 고향의 성씨를 그대로 사용한 김화상(金和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국의 선사 무상(無相, 684~762)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무상은 선종의 모든 가르침을 계(戒)에 해당하는 무억(無憶), 정(定)에 해당하는 무념(無念), 혜(慧)에 해당하는 막망(莫妄)이라는 세 구절로 축약하였던 이로, 그의 입적 이후에도 종밀(宗密, 780~841)과 같은 선종의 유력한 선사들이 끊임없이 그의 가르침을 면밀하게 연구했습니다.

한국은 단지 종교적 수행, 교리 주석, 학적 지식, 영적 지도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국불교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의 혜인사(慧因寺)는 고려왕조의 방대하고도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 때문에 “고려사(高麗寺)”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찰입니다.

고려 왕족은 의천(義天)의 중국인 스승이었던 정원(淨源, 1011~1088)이 저술한 화엄 계통 논서들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송나라에 바치는 공물에도 수년간 혜인사에 배당된 지원금을 명기하였으며, 또 다른 자금들은 화엄종 문헌을 담아 놓을 탑의 축조, 비로자나불 ․ 보현보살 ․ 문수보살상 주조, 그리고 탑에 바칠 봉헌물 구매에 할당되었습니다. 의천(義天)이 입적하자 혜인사는 그의 초상화를 사찰 안 납골당에 걸어 놓고 고려 왕족들을 위해 납골당을 공덕원으로 꾸며 고려 정부의 지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이 사찰의 주지를 임명하는 권력을 지닐 정도로 고려의 경제적 지원이 컸던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자기 정체성

한국 출신 승려들의 광범위한 한문 사용 때문에 종종 그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주변 국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고국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한 많은 승려는 여러 면에서 중국화 되었지만, 좀처럼 그들의 (한반도 동료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같은) 독자적인 전통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승 지엄(智儼)이 입적한 후 중국 화엄종의 차기 수좌 자리가 유력했던 의상(義湘)은 670년, 중국의 급작스러운 침략을 고국의 왕에게 알리고자 조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침략이 무마된 후, 그의 헌신적인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 왕족은 그를 아낌없이 지원하였고, 그 후 화엄종이 한국 불교계를 지배합니다. 의상의 후계자인 중국 화엄종의 법장(法藏)은 의상이 조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 조언을 구하였고, 그에 대한 답신이 현재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국 승려들이 중국 불교에 동화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민족성은 종종 그들의 사회적 ․ 종교적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무상이 ‘김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것도, 그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땅에서도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 원측이 현장의 후계자라는 입지를 확립하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격렬한 비난-원측의 경쟁자였던 중국 승려 규기(窺基, 632~682)의 제자들이 조작한-은 은연중 한국 출신 학자에 대한 인종차별의 (효시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화된 한국 승려들이라 하더라도, 능동적인 한국인의 존재는 중국 불교 승단 내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승려들은 이처럼 동아시아 불교 전통 속에서 지리적, 역사적으로 폭넓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승려들 자신이 '한국' '일본' '중국' 출신의 승려라는 근대적인 국가관이나 시대관을 넘어선, 더욱 넓은 의미의 종교 전통에 속한 공동 작업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승려들의 자기 인식은, 국가주의에 관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잘 알려진 문구를 약간 변형하자면, “근대 역사의 축소된 상상력(shrunken imaginings of recent history)”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근대 이전의 한국 승려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한국'의 승려라기보다는 어떤 법맥(法脈)에 따른 문중의 일원, 또는 어떤 학파나 수행전통에 속하는 자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한국의 승려'보다는 6세기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여러 고승전(高僧傳)에서 발견되는 승려의 분류법에 따라 역경(譯經), 의해(義解), 습선(習禪), 명율(明律), 호법(護法) 등으로 지칭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국가나 문화 영역을 넘어서 있으며(여기에 '한국 승려'나 '일본 승려'라는 범주는 없습니다.)

중국의 편찬자들은 이러한 고승전의 범주들 밑에 한국, 인도, 중앙아시아 그리고 일본 등으로 세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기에서는 그들을 “신라 승려” “해동의 현자”-모두 고승전의 표현들-라고 언급했다 해도 그들은 주로 '호법', '명율' 등으로 분류되며 동시에 '아무개의 제자' '아무개의 스승' '아무개와 같이 수행한 자'로 기재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문화권 변두리에 살았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 승려들은 중국과 차별되는 문화적 · 사회적 · 정치적 주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마이클 로저스(Michael Rogers)가 매우 적절하게 기술하였다시피, 한국은 중국 전통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도 '문화적 자기역량(cultural self-sufficiency)'을 유지하는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한국이 중국문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일화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려 왕건이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자손들에게 훈계한 '훈요십조(訓要十條)'의 네 번째 조목이 그것입니다. 그는 고려가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문화적 사회적 전통을 유지하도록 이를 꼭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저 우리 동방은 오래전부터 당나라의 풍습을 흠모하여 문물예약 모두 그 제도를 따랐는 데,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격도 서로 차이가 나니 (중국풍을) 똑같이 따르도록 할 필 요는 없다.(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不必苟同.)

왕건은 또한 불교를 지원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담아, 고려만의 독특한 의식을 꼭 보존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독자적인 한국의 불교 의례에 대한 맹아적 관념이 다루어진 여섯 번째 조목이 그것입니다.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 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岳),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함부로 늘리거나 줄이라고 간하는 것을 절대 금지한다.(朕所至願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 關, 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 建白加減者, 切宜禁止.)

사실 인도와 중국에서 팔관회란 재가신도들이 여덟 가지 계를 받는 격주제 불교 행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자연주의적인 행사로 설명하는 한국의 팔관회는 주변 아시아 국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행사로 생각되며, 아마 한국에서 독특하게 변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삼국사기(三國史記, 1122~1146)》 서문에서 당시 조국의 고유한 역사를 경시하는 풍조를 개탄하고 이것이 새로운 역사서를 편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서술한 것도 한국의 독자적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근대 이전의 불교 승려들은 자신들의 민족과 지역적 정체성, 조국과 국왕에 대한 충성, 종파와 사문의 관계 등을 인식하고 있음과 동시에, 스스로를 공간적 ․ 역사적으로 인도와 붓다로까지 소급되는 가르침(dharma)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동아시아 불교도들은 이러한 관점을 통해 공간적 ․ 시간적으로 먼 기원을 가진 종교적 전통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인들은 불교를 사상, 수행, 깨달음이 완벽한 세계 종교라고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치 불교 문헌과 수행의 과도한 경쟁 관계가-각각 불교 본래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나 외관상으로는 서로 거의 정반대되는- 모두 실제로는 큰 천을 구성하는 조각천처럼 합리적 수행 체계의 부분들이 됨을 설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해석학적 분류법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불교 전통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왜 모든 동아시아 고유의 종파들이 '스승' 혹은 '조사'에서 붓다까지 이어지는 법통(法統)을 통해 끊임없이 그들의 기원을 추적하려 하는지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동아시아 불교 영향(?)의 역류를 찾아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 '스승'의 계보가 종종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번역 정리 = 이상민/고려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동양철학)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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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1)  

2009-04-26 13:34:40
유롭을 기준으로 따라야 하는지 ?
동남아시아란 유롭을 기준으로 하는거고
한국에서 보면 서남아시아 인데
그게 구별이 어렵네요
유롭을 기준으로 따라야 하는지 ?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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