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종교 갈등, 해결의 길은 없는가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불교학자들과 함께 서울 시내 조계사를 방문했을 때, 화려한 색깔의 등들이 ‘OUT'이라고 크게 적혀 마당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찌하여 한국불교와 이명박 정권이 이토록 심각한 대립 관계에 이르게 되었을까 하고 매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관계를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한국불교와 개신교 간의 종교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숙명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자리 잡고 다각도로 완충지 역할을 해 온 한국에서, 과연 이러한 종교적 다툼을 할 시간이 있단 말인가? 옛 속담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지혜로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이렇게 심각한 종교 간 알력이 백해무익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다가 《불교평론》 편집부에서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서’란 주제를 다루어 달라는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필자는 아무리 코가 석 자라도 한국불교와 개신교 대립 문제가 너무 심각해진 상황과 맺어진 인연을 피하지 않고 이 논문 작성을 통하여 그 책임을 다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글에서는 종교 간 화해의 문제 중에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불교와 개신교 간 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 화해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먼저 다종교를 인정하였던 고대 인도의 아쇼까 왕 시대에 나타난 종교 간 입장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개신교 간의 관계가 헝클어진 실처럼 된 이유를 분석함과 아울러 해결의 실마리와 함께 양자 간의 화해 방법을 모색해 보려 한다. 그 방법론과 결론은 다른 모든 종교 간 갈등 상황에 적용시켜서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로 삼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2. 아쇼까 왕 칙령에 나타난 종교 간 입장

흔히 실마리란 낱말은 ‘감았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도저히 깔끔하다고 보기 어려운, 그래서 지극히 복잡하게 헝클어진 실에 비유할 수 있는 한국불교와 개신교 간의 관계 매듭에서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고대 인도에서 아쇼까 왕이 돌기둥에 새기게 한 수많은 칙령의 내용 중 하나가 떠올랐다.

필자는 그 영감을 받고 나서 한참 동안 숙고한 끝에, 그 내용을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로 삼기로 했다. 따라서 본 논고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아쇼까 왕의 종교 간 화목에 대한 돌기둥의 칙령 내용을 소개하고, 그 칙령의 가르침을 분석해 본다.

1) 돌기둥 칙령

필자는 서강대학교 학부 과정인 ‘불교의 이해’란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이웃 종교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아쇼까 왕의 이웃 종교에 대한 칙령 내용을 수업 시간에 공동 토론 대상으로 삼기도 하며, 기말고사 때 논술 주제로 곧잘 사용한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상당히 교훈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와 관련된 내용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아쇼카 왕의) 종교적인 관용에 대해서는 그의 칙령의 하나가 충분히 표현해 주고 있다. 거기서 그는 백성들에게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신조들이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하더라도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효과를 가져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이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일치점들에 쏠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다른 집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우고 박식해지며,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의 종교 체계를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신조들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면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될 것이며, 다양한 신조들 속에서 일치의 느낌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내용만 보더라도 우리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국민이 화목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종교 간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져만 하는 이치를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아쇼까 왕은 인류 역사상 종교 간 대화의 창시자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각기 아쇼까 왕의 칙령을 본보기로 삼아 자기 나라를 다스린다면,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내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아쇼까 왕은 인도 통일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기 위해서 작은 나라였던 카링카를 정복하고 나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몸서리쳐서 평생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평화주의의 길을 시작했다. 불행히도 세계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정치인이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오히려 갈등을 악화시키거나, 악용하여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미국의 9·11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부터 이슬람교와 기독교 문화권이 심각한 대립 관계에 빠질 위험성에 처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정치인들의 권력에 관한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웃 종교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아쇼까 왕이 취한 방법이다.

2) 칙령의 가르침

아쇼카 왕의 방법적 핵심은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권고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의 종교 체계를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일치점들을” 발견하게 되어 이웃 종교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백성들의 일체감을 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대화적 접근 방법을 통해 언어를 통한 만남의 가능성과 종교들의 상호보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쇼까의 입장을 현대 종교학의 관점에서 해석해 본다면, 위 내용으로 미루어서 그가 분명히 종교적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다원주의란 다양한 종교들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표현하려고 설정한 개념이다. 그와 반대되는 개념은 자기 종교 말고는 이웃 종교들의 가치를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배타주의나 폐쇄주의다. 다원주의의 의미를 비유로 설명하자면, 산봉우리인 진리와 거기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인 종교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원주의적 입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포괄적 다원주의로 봉우리에 이르는 길들이 다양하지만, 결국은 그 봉우리가 자기 종교가 주장하는 고유한 진리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일원적 다원주의로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들이 다양하되, 궁극적으로는 모든 길들을 초월하는 봉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셋째는 다원적 다원주의로 봉우리에 이르는 길들만이 아니라 봉우리들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들이 영원토록 서로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 아쇼까 왕의 다원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둘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제 아쇼까 왕의 종교 간 화목에 대한 칙령의 가르침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불교와 개신교의 관계가 복잡해진 이유를 찾아보자.

3. 양 종교 간 관계가 엉킨 이유

아쇼까 왕이 권고하듯이 한국 불자들과 개신교인들은 서로의 종교적 가르침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나 하고 물어본다면 대체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솔직히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나라에 살면서 각각 인구의 25%정도씩 차지하는 불자들과 개신교인들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래야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개신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자.

1) 이웃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

개신교가 한반도에 진출한 지 1,700년이나 되는 불타의 위대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다원주의를 완전히 거부하고 극단적인 배타주의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개신교인들이 있기에 ‘사찰이 무너지도록’ 꾸준히 기도 운동까지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불교를 적대시하는 개신교인들은 자기 결속을 얼마든지 굳힐 수 있었겠지만, 아쇼까 왕이 백성들로 하여금 종교 간 화목을 통하여 일체감을 증진시키고자 했던 바람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 그 자체’라고 믿는 근본주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어릴 때나 신학교에서 머릿속에 한번 뿌리가 박혀 버리면 고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잘 살펴보면 그러한 종교적 자세의 근거는 성직자들이 이웃 종교를 두려워하는 것과 종교를 통해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는 욕심, 그리고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 경제적인 이익을 확보하려고 하는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한국 개신교의 배타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것으로서 전혀 평범한 것이 아니며, 본래의 기독교 정신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필자는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교회 일치를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캐나다에서 19년, 그리고 프랑스에서 17년을 각각 살았음에도, 1985년도에 한국에 처음 와서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미국 남부 출신의 젊은 개신교 목사에게서 “당신은 가톨릭이라면 이단자다.”라는 소리를 생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서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목사에게 불교에 관한 관심이 많다고 솔직히 고백했더니, 그가 모든 승객들이 듣는 가운데에서 큰 소리로 “당신은 지렁이가 들어간 사과와 똑같다.”라고 선언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기가 막히게 마음이 열린 목사들을 더러 만났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기까지 한 적도 했다. 그들 중에는 불교를 공부하고 가르치는데 인생 전체를 바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보통 가톨릭 성직자들보다 훨씬 개방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생들 중에도 질식사할 정도로 폐쇄적인 교회의 분위기를 벗어나려고 찾아오는 목사들도 간혹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가 소속된 종단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주변에 떨어져서 살 수밖에 없는 극소수의 사람일 뿐이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개신교 성직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희망을 안겨 준다.

이제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2)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입장

필자는 거의 20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왔는데 그간 진짜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불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물론 조금씩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불교 신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인 접근을 실천하는 불자, 즉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기독교의 기도 방법도 익히며, 본당이나 교회 공동체에 꾸준히 다니면서 기독교를 익히려고 하는 출가자나 재가 수행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한국 불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곱 가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 불교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정권하에서 계속 박해와 고통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1960년대부터 불교를 부흥시키느라고 정신없이 바빠서 기독교에 신경 쓸 시간이나 여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근 ․ 현대에 들어 불교가 국내외에서 기독교로부터 너무 신랄하고 부당한 비판만을 받아 왔기 때문에, 서구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온 그 외국 종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도저히 긍정적 관심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사한 예로 스리랑카가 서구 문명인 기독교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즉 포르투갈(1540~1658), 네덜란드(1658~1795) 및 영국(1795~1956)의 역대 식민통치 지배하에서 겪었던 불교의 법난을 염두에 둔다면 그 거부감을 더욱더 이해하기 쉽다.

셋째는 불교의 세계가 워낙 넓은 데다가 어떤 면으로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너무나 어려워서 불교를 올바르게 배우느라고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실정이므로, 설사 기독교에 관한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심도 있게 접근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는 현실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기독교인들이 불자들한테 기독교를 흥미롭게 설명하는 데에 실패해 온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다섯째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자기 종교를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을 개종시켜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불자들로 하여금 첫 순간부터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한국불교의 주요 가르침인 선종의 근본을 이루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불급언전, 이심전심 등의 사상들 때문에 언어의 상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언어를 통한 종교 간 만남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모두는 아니지만 어떤 불자들이 이웃 종교를 방편으로만 생각할 뿐, 그것의 궁극적인 가치까지는 인정하지 못함으로써 개신교 못지않게 불교적인 입장에서 종교적 배타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언급할 만한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위 일곱 가지 주요 원인만 보더라도 왜 불교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표상적인 관심을 쏟았다 해도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필자는 맨 앞에 나오는 다섯 가지 이유의 타당성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불교가 기독교를 전문적이며 다각적인 차원에서 공부하는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불자가 자기 종교가 아닌 이웃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려면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계는 그런 사명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하며, 그리고 만일 찾게 되면 그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인생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도록 권장하고 여러 가지 지원도 해야 한다.

문제는 불자들을 비롯하여 대다수 한국 사람들의 사고 범위 안에는 자기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이웃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이 부족한 것이다. 한 예를 든다면, 가톨릭 사제로서 불교를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필자가 불자들로부터는 “왜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받거나 “당신은 기독교 간첩이다.”라는 터무니없는 비난 발언을 듣는가 하면,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아직도 기독교인이냐?”라는 힐난을 받는다.

그러나 “불교와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국경과 인종 및 종교까지도 초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외국어를 완벽하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모국어를 잊어버릴 필요까지는 없다. 오히려 자기 모국어를 잘 알아야 그 외국어를 잘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외국어를 잘 배움으로써 자기 모국어를 더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한국 출가자와 재가 수행자 가운데서 열린 마음으로 사는 분들은 그 이치를 수월하게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런 뛰어난 분들은 흔히 교계의 주류를 이루지 못한다.

이제 불교와 개신교와의 관계가 헝클어진 실과 같이 된 분명한 이유를 찾은 것 같다. 그것은 서로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면서도 비판을 자제하기는커녕 도리어 속칭 ‘무식의 용기’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4.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방법

1) 가치관의 변화

우리가 아쇼까 왕의 칙령을 통해서 종교 간 화해를 위하여 찾은 실마리를 끝까지 따라가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반도 내에서 종교적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내에서 종교 간 갈등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본다.

이제는 한국 불교와 개신교가 서로를 단순히 경쟁 대상으로만 삼으며, 그냥 무시하거나 적대시할 수만은 없다. 또한 양자 간의 문제를, 종교적 권리들을 보장하는 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상당한 가치관 전도가 필요하다. 즉 새로운 깨달음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 아래의 단계들을 순서대로 겪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죄 고백이다. 그 내용은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면서도 서로 비판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짐이다. 앞으로 이웃 종교에 관한 비판을 함부로 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도 만일 비판해야만 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비판을 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비판부터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컨대 불교가 기독교 역사에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들을 거론해야 할 경우에는, 먼저 불교 역사에도 일어난 폭력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미약한 불교의 사회 참여를 비판하기 전에, 많은 경우에 기독교의 사회 참여가 무조건적인 자선을 베풀려는 목적보다는 교세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음을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나친 호교주의를 벗어날 수 있다면, 자신과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는 이웃 종교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 체계를 시대에 맞추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적 접근 방법에 의한 만남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대화적 접근 방법을 통한 만남

아쇼까 왕이 권장한 진리에 대한 이러한 대화적 접근 방법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까지 추적할 수 있다. 그 방법론의 정신을 좀 더 잘 익히려면 우선 소크라테스에 대한 얘기부터 들어보자.

서양 문명의 밑거름이 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표자로서 널리 알려진 소크라테스(B.C. 470~399)는 자칭 스승이라고 한 적도 없고, 제자로 삼은 사람도 없고,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도 전혀 없이 그냥 산파술(産婆術), 즉 문답으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된 생각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통해 대화를 나누면서 진리를 찾으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늘 대화를 마치면서 "오늘 당신 덕에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만나자."라고 했을 뿐이지 한 번도 스스로 결론을 내린 적이 없다. 민주주의적 정신의 바탕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진리에 대한 이러한 대화적 접근 방법은, 중도(中道)에 입각한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진리에 관한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자세와도 너무나 유사하다. 성철 스님이 강조하는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 즉 깨닫고 나서부터 부처의 수행을 실천함은 곧 달라이 라마의 진리에 대한 겸손하고 역동적인 자세를 의미할 수도 있다면, 진짜 서구 문명에 알맞은 깨달음의 정도에 관한 틀림없는 평가 기준을 제공해 준다.

소크라테스와 달라이 라마가 대표하는 진리에 대한 그 대화적 접근 방법을 이웃 종교와의 만남에서 올바르게 적용하려면, 자기 종교의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지나친 수직적 구조, 선후 관계, 권위주의, 체면 문화, 성차별 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계급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한 초기불교와 기독교 정신에 크게 어긋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대화적 접근 방법이란, 상대방과 동등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일깨워 가는 과정이다. 다종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일상생활 안에서 이웃 종교의 신도들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활용할 줄 알기만 해도 많을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로서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권고하는 아쇼까 왕의 ‘종교 간 화목에 대한 돌기둥 칙령’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늘고 가늘어서 찾기 어려우며, 찾았다 해도 놓치거나 끊어지기 매우 쉬운 그 헝클어진 실 가닥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잡아당겨서는 안 된다. 환언하자면 그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해도 미로 같은 종교 간 화해의 앞길은 여전히 머나먼 만리(萬里) 길이다. 그것은 화해에 관한 이론에서부터 시작하여 혹독한 과정일 수밖에 없는 그 실천으로 반드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종교 간 헛된 대립 관계를 일으키는 경쟁에서 협력 관계(partnership)로 건너가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가치관 전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종교 간 화해를 이루려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투신하며 책임질 수밖에 없는 윤리적 의무가 있다. 그 의무 수행을 끝까지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웃 종교에 대한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한 자세가 필수 조건이다. 그것은 초차별적인 입장에서는 순수한 의식 상태를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차별계에서 진리에 관하여 말할 때는 모두가 바다 얘기를 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배타주의 바벨탑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수행이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을 권고하는 아쇼까 왕의 칙령이 많은 현대인에게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권고를 끝까지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은 한, 국내 평화나 한반도 통일, 나아가 동북아시아 안정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적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종교인들이 힘을 모아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사는 길을 공동으로 찾아야만 평화로운 미래를 보장할 수 있으려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모든 종교인들뿐 아니라 인류가 다 같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명원/(Bernard Senecal SJ)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