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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습관과 동물의 권리
특집: 불살생 선택인가 당위인가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허남결 hnk@dongguk.edu

-고기 위주의 식단을 근본적으로 되돌아 볼 때이다

듣기 거북한 말, 동물의 권리

산사 수련회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기 반찬 한두 가지쯤은 반드시 포함된 밥상을 아무 생각 없이 마주 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것이든, 아니면 생선요리이든 고기 반찬 종류인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내일도 사정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은 우리의 전통적 식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대체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이 같은 음식문화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예컨대, 우리의 식단에 오르는 고기들의 원형, 즉 동물들(생선 포함)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아무도 함부로 고기 음식을 마음 편하게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윤리적 경고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유명 활동가들 가운데서도 1975년 기념비적 작품인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내놓으면서 인간들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가리켜 이른바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자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침팬지 연구가이자 생명평화운동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제인 구달(Jane Goodall) 등이 특히 눈에 띈다.

 피터 싱어는 얼마 전 짐 메이슨(Jim Mason)과 함께 쓴 『죽음의 밥상(The Ethics of What we Eat)』에서, 그리고 제인 구달은 최근 출간된 『희망의 밥상(Harvest for Hope)』을 통해 육식문화를 채식문화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도덕적 행동이면서 동시에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윤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늘 대하던 밥상의 진실을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결코 편치 못하다. 동물들에게도 인간의 그것에 버금가는 도덕적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망발인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보고 지금 당장 자기들이나(피터 싱어나 제인 구달) 출가 스님들처럼 완전 채식주의자(vegan)로 개종이라도 하란 말인가?

이와 같은 물음 앞에서 솔직히 필자 자신부터 심기가 불편해 질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고 난 뒤, 글을 써 내려가야 할 듯하다. 그것은 남들과 같이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삶을 살다 갈 필자에겐 너무 지나친 도덕적 요구로 들리기 때문이다. 먼저 왜 하필 이때 동물의 권리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가에 대해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글의 순서상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동물의 권리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

필자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평등’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육식을 포함한 동물학대 행위를 전면적으로 중지하라는 동물권리론자나 채식주의자들의 요구는 당장 다음과 같은 반문에 직면할 수 있다.

 가령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nonhuman animals)'을 인간의 도덕적 지위에 버금가는 평등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개나 고양이 곁을 얼쩡거리며 동물의 권리 운운하는 한심한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인간의 자세가 아닐까 등과 같은 물음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거의 매일 방송 매체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당한 인권침해 사례들을 계속 접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갖가지 종류의 동물학대를 고발하고 동물의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말 그대로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동물의 보호에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있다는 모욕적인 비난을 듣기 일쑤다.

배고픔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힘겨운 삶을 꾸려 가는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 관광객을 상대로 한 동냥이나 구걸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부모가 의도적으로 사지를 절단해 버린 가엾은 아이들, 가난을 벗어나려고 아동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불쌍한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도덕적 분노와 함께 인간적인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간적 고통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다른 동물들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해도 좋다는 도덕적 결론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동물행동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동물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상당 부분 우리의 지적 무지나 태생적 교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반해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거나 인간은 감정과 상상력 및 추리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그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주장 등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물론 동물들은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인간처럼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동물들은 도덕적 인격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단순한 물건도 아닌, 그저 말 그대로 자연 존재의 일부인 동물일 뿐이다.

하지만 동물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각을 지니고 있어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가 하면, 추위에 떨고 힘들어하기도 하며 고통을 받거나 반대로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할 수도 있는 엄연한 주체적 생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동물들에 대해 종래의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와는 별도로 최소한의 도덕적 배려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그와 같은 아량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고 질문을 던져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윤리적 반성과 더불어 서구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동물 해방 또는 동물 기본권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먼저 인간들이 다른 동물 종을 자신과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착취하는 종차별주의의 철폐와 동물의 기본권리 인정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톰 레이건(Tom Reagan) 등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고통’과 ‘쾌락’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모든 존재들은 예외 없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간주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인간과 함께 다른 동물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의 이런 입장은 동물해방론 내지는 동물복지론으로 불린다. 이에 반해 레이건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동물의 본질적 권리를 인정하자고 제안하면서 한 살 이상의 능력을 갖춘 모든 포유류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자고 말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 전개들은 적어도 도덕적 대상의 외연을 동물들에게까지 넓힐 필요가 있다는 윤리적 공감대의 확산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실천과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면 윤리학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도 적지 않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후 제인 구달(Jane Goodall)과 다이안 포시(Dian Fossey), 파우츠 부부(Roger and Deborah Fouts), 화이트 마일스(H. Lyn White Miles) 등의 유인원(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연구에 따라,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거나 만들 수 있으며 언어 사용 능력이 있다는 가정은 허구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말을 바꾸면 동물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과 고통 및 쾌락을 느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언어적 추론 능력까지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들은 그동안 ‘인격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해 왔던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사실은 지극히 자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종은 이 지구 위에서 차지하는 생태학적 위치와 이에 수반되는 도덕적 지위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말하자면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며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고려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다른 모든 유정체들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의 도덕적 우선순위와 경중의 차이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여기서 동물 권리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특히 1991년에 제정되고 1997년에 개정된 ‘동물보호법’의 기본 취지를 참고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동물의 소유자나 관리자는 적정한 사육과 관리를 보장해야 하고, 동물학대를 해서는 안 되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동물 실험을 피하되 동물을 실험할 때에는 가능한 한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실험의 와중이나 종료 시에 회복 불가능하거나 지속적인 고통이 예상될 때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안락사를 시킬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배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물보호법의 기본 정신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이와 같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인식 부족이 잔인한 육식문화의 만연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형태의 환경 파괴를 낳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음의 논의에서 우리는 육식문화의 근본적인 개선 없이는 환경오염의 해결책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됨을 깨닫는다.

우리 밥상에 오르는 고기들의 기구한 운명

듣기 거북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양심선언 같은 생각도 들지만, 매일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 반찬이 되려고 희생당하는 식용동물들의 짧은 일생은 한마디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아니 끔찍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먹어 왔던 음식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나 자신부터 그러한 지적과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먹을거리의 선택, 즉 음식문화에서도 윤리적 사고의 적용을 요구받고 있는 것을 또 어쩌랴. 이렇게 되면 일상적 의미의 수준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먹는 음식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주의하거나 무지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음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동물들이 대부분 공장식 동물농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집 안마당과 담장 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한가하고 목가적인 가축들의 생활 모습과, 작금의 동물농장에서 식육용으로 강제 사육당하는 가금류 또는 동물들이 죽지 못해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생존 현장은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연의 본성상 돼지들은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그 새끼들은 꿀꿀대면서 서로 쫓고 쫓기는 가운데 성장하는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들 또한 푸른 풀밭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뜯고 이른 아침 따뜻한 햇볕을 마음껏 쬘 수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닭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가금류들은 땅을 긁거나 쪼아 댈 수 있어야 하고 가끔은 날개도 활짝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아야 마땅하다.

오리는 물장난을 치면서 타고난 본성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와 더불어 농장에서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은 깨끗하고 푹신푹신한 짚으로 만든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동물권리론자들의 목소리는 이미 대규모 산업의 일환이 되어 버린 공장식 사육장의 탐욕스러운 운영자들 앞에서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그들에게 동물들은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이익을 낳아야 하는 물건들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동물들은 사료를 투입하면 고기나 젖 또는 달걀을 생산하는, 말 그대로 단순한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런 감정이나 권리도 없는 한낱 자동판매기 정도로 인식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오직 인간들의 식재료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 없는 부모들의 몸을 잠시 빌려 태어나 마지못해 살다가, 마지막에는 너무나 끔찍한 방법으로 도살당하는 동물들의 일상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그들의 적나라한 실상을 알게 되면 우리는 모두 고기를 먹고 싶은 욕구가 싹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긴 그래서 우리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 불쌍한 닭의 경우

어린이들의 간식용이나 어른들의 맥주 안주로 애용되는 치킨은 흔히 말하는 전지식 양계장에서 집단 사육된 닭고기가 그 원료이다. 전지식 양계장이란 수백 개의 닭장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양계용 건물을 말한다. 전지식 양계장 건물 한 동에 알 낳는 암탉 7만여 마리가 한꺼번에 수용되기도 한다.

작은 닭장 하나에 네 마리에서 많게는 여섯 마리까지 암탉을 구겨 넣기 때문에 공간이 너무 좁아 날개를 펴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걸핏하면 암탉들끼리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 피투성이로 만드는 일이 잦다.

이 때문에 공장식 농장에서는 벌겋게 달군 인두 같은 연장으로 암탉들의 부리를 아예 정리해 버린다. 닭의 부리는 닭들이 사물을 찾고, 건드리고, 느끼는 주요한 수단인데 이를 강제로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자연적 본성을 깡그리 말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아무런 마취도 하지 않고 부리를 자르므로 닭이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 발톱이 닭장의 바닥을 이루는 철망에 자꾸 걸려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발톱이 영영 다시 자라나지 못할 만큼 도려내 버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닭똥은 바닥에 떨어져 무더기로 쌓이게 되지만 아무도 치워 주지 않는다. 병아리를 닭으로 키우는 동안은 물론이고 다 자란 닭이 된 후에도 1년 내내 때로는 몇 년 동안이나 그대로 내버려 둔다.

닭장 속의 닭똥 더미에서 풍겨 나오는 암모니아 냄새는 눈을 뜨고 있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다. 공기 중의 암모니아 비율이 높아지면 닭들이 호흡기 질환에 계속 걸리고 발과 무릎에 통증을 가져 오며 가슴에는 물집이 잡힌다. 눈에서는 진물이 나오며 심할 때는 시력을 잃기도 한다. 이때 항생제를 마구 복용시켜 잠시 생명을 연장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또 다른 장면 하나. 어느 날부터인가 달걀의 생산량이 줄어들면 며칠씩이나 암탉에게 모이를 주지 않고 때로는 물조차 주지 않는다. 그리고 낮과 밤의 주기를 아예 바꿔 버리기 일쑤다.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은 암탉들은 온몸의 털이 빠지면서 다시 알을 낳기 시작하지만 생산력은 불과 한두 주밖에 가지 못한다. 이처럼 살기 위한 닭들의 몸부림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더 이상 달걀을 낳지 못하면 이제 쓸모가 없어진 암탉은 치킨수프로 일생을 마감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양계장에서는 부화한 병아리가 수놈일 경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산물로 여겨져 대형 비닐봉지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렇게 한두 마리씩 쌓인 병아리들은 곧 질식해서 죽게 되고 그런 수평아리들은 더러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산 채로 분쇄기에 들어가 다른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구이용 어린 닭이나 거세되어 나중에 식용 수탉이 될 운명인 놈들은 비좁은 우리에 갇힌 채, 서로 밀고 당기고 부딪히며 살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한 놈이 다른 놈을 밟고 지나가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힘이 부쳐 죽은 놈들은 산 놈들의 발밑에서 짓뭉개지기도 한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 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암탉들의 마지막 순간은 더욱 기가 막히다.

대체로 닭들은 거꾸로 매달린 채 도살 라인을 지나면서 전기가 흐르는 수조에 머리가 처박힌 모습으로 목을 잘리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기충격기가 엉성하게 작동하거나 있으나 마나 한 경우가 많아 대부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목이 잘리고 있다고 한다.

닭들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몰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머리 나쁜 사람을 가리켜 새대가리 혹은 닭대가리라고 부르는 것도 반드시 정확한 표현은 아니란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병든 닭은 스스로 진통제가 든 모이를 골라 먹는다고 한다.

이는 닭들이 진통제가 고통을 해소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한 도살 라인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전기 수조에 이어 자동 목 절단기도 미처 전부 처리하지 못하고 일부의 닭들을 살려 보낸다.

그런 닭들은 의식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다음 단계는 펄펄 끓는 물이 단긴 탱크 속에 빠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닭이 산채로 튀겨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음식이 되기 전의 닭들이 겪는 최후는 그야말로 섬뜩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식용으로 사육되고 있는 오리와 거위, 칠면조 등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똑똑하고 정 많은 돼지의 경우

돼지는 멍청하고 미련하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지능이 높고 정이 많은 동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영화 <베이브(Babe)>에 나오는 꼬마 돼지 베이브가 개처럼 양떼를 돌보는 모습은 실제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전혀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일리노이대학교의 스탠리 커티스(Stanley Curtis) 교수는 실험을 통해 돼지들이 조이스틱을 사용하는 간단한 전자오락 게임을 소화할 정도로 “돼지들의 사고력과 관찰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동물농장에서 사육되는 어린 새끼 돼지들의 성장 환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식육용으로 길러지는 돼지의 90% 이상이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좁아터진 축사 안에서 평생을 갇혀 지낸다. 평생이라고 해 봐야 고작 몇 달 내지는 몇십 개월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하며, 따라서 흙에서 자란 풀밭을 밟아 보지도 못한다.

심지어 밀짚 더미 위에서 잘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돼지들은 그 쾌활한 기질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게 되니 다른 녀석들의 꼬리를 물어뜯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려고 사육장의 주인들은 태어나자마자 돼지의 꼬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 되었다.

 또 최대한 빨리 도축할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살점을 확보하고자 강력한 성장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도 농장 주인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그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갇혀 지내면서 비참한 일생을 사는 돼지는 번식용 암퇘지들이다. 공장식 농장의 엄격하고 타산적인 생산 일정에 맞추어 이 돼지들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은 새끼를 낳아야 한다. 다시 말해 번식용 암퇘지들은 삶 대부분을 새끼를 밴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16주일 정도 지속되는 임신 기간 중 이 암퇘지들은 ‘임신용 우리’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게 된다. 그것은 철창으로 지은 상자형 또는 반원형 우리로 어미 돼지의 몸보다 기껏해야 30센티미터 정도 클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그 속에 감금된 암퇘지들은 마음 놓고 몸을 뒤척일 수도 없을 정도로 공간적 제약을 받으면서 지내야 한다.

오직 서 있기 아니면 그대로 콘크리트 맨바닥에 드러눕기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어미 돼지가 갓 낳은 새끼를 깔아뭉개 죽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암퇘지들에게 자기 새끼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다. 어떤 어미가 제 새끼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런 암퇘지들이 자연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새끼들을 깔고 눕지 않는다.

그러나 좁아터진 우리에 갇혀 어미 돼지다운 행동, 예컨대 주변의 물건들을 모아 둥지를 만들고 혀로 새끼들을 핥아 주는 행위 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암퇘지는 어쩌다 실수로 새끼를 압사시키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사육장 주인들은 어미 돼지들의 운동 공간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새끼 돼지들은 한 마리에 얼마라는 식의 금전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자연적 본능의 몸짓들을 표현할 기회를 빼앗긴 암퇘지들은 처음에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것마저 포기하고 모든 것에 대한 열의를 상실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후에는 마치 가족의 상을 당한 상주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눈은 초점을 잃은 채 먼 허공을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다. 눈에는 허연 막이 씌워진 것처럼 보여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는 전언이다.

이렇게 강제로 사육된 돼지들이 도축장으로 끌려갈 무렵에는 그동안 운동 부족으로 허약해진 다리가 비정상적인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결국 부러지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한 돼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무심한 인부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돼지들의 비명은 곧 죽음의 공포로 뒤바뀐다. 도축장 인부들의 말에 따르면 돼지는 아주 영리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고 어떻게든 마지막 순간을 모면해 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어느 한순간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짧고 슬픈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3) 순하디 순한 우리의 옛 친구, 소의 경우

도회지 생활에 바쁜 우리가 가끔 떠올리는 고향의 옛 모습에는 대개 누런 황소 한 마리와 순하기만 했던 어미 암소가 새끼를 데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장면이 들어 있다. 소는 당시 말 그대로 살림 밑천이었다. 그것을 팔아 자식 대학 공부도 시키던 부모님 생각이 아련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풍경화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가 되고 만 지 오래다. 현재 공장식 사육장에서 오로지 인간들의 미각 충족을 위해 비육되고 있는 소들의 신세도 닭이나 돼지처럼 비참하기 이를 데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배설물로 진흙탕이 된 좁은 우리 속에 갇혀 도축될 날만을 기다리는 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윤회를 믿는 우리 불자들로서는 여기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삶이 어쩌면 전생의 혹은 다음 생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소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보통의 경우 송아지가 어미젖을 빠는 기간은 생후 6개월 정도인데 그동안 어미와 새끼가 주고받는 애정 표현과 유대감은 우리 인간들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공장식 사육장에서는 어미 소와 새끼 소가 그처럼 한가하게 보낼 시간을 마냥 허락해 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될 뿐 다른 고려 사항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젖소의 경우 새끼가 태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농장 직원이 달려와 곧바로 어미에게서 새끼를 빼앗아 가 버린다. 젖소 농장은 우유를 많이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지 송아지를 키우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새끼를 잃은 어미 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우던 어린 아들을 잃은 엄마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방금까지 새끼가 있던 짚더미를 코에 문지르며 킁킁대는가 하면, 이따금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안절부절못한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그 새끼는 농장의 다른 곳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바들바들 떨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송아지 시체를 집어든 인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농장의 두엄 더미 위로 힘껏 내던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미 소는 자신이 갇혀 있는 농장문의 아래쪽에 코를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어쩌면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짧은 인연과 긴 이별을 아쉬워하는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영국 동물학대방지협회의 농장동물분과 선임 과학자인 존 애비지니어스(John Avizienius)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자기 새끼를 잃고 6주일 동안이나 깊은 시름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암소를 기억하고 있다. 새끼를 처음 떼어 냈을 때 그 암소는 격렬한 비통함에 사로잡혔다.

새끼를 마지막으로 본 외양간 바깥에 서서 몇 시간이고 새끼를 부르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억지로 밀어내야만 그 자리에서 떼어 놓을 수 있었다. 6주일이 지난 뒤에도 그 어미는 새끼를 떠나보낸 외양간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축사 앞에 서서 새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암소는 마치 넋이 나간 듯했으며, 새끼가 혹시 돌아왔는가를 확인해 보려는 행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통한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직접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반성도 없이 고기를 먹어 대는 것이다.

이렇게 사육된 소들의 마지막 여정은 도축장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즐거운 나들이 길이 아니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 그대로다. 그곳으로 끌려가는 소들은 대부분 트럭이나 화물기차에 실려 운반된다. 도축장으로 가는 동안 소들은 규정상 사료와 물을 공급받도록 되어 있지만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운반 도중에 넘어지는 소는 대개 다른 소들에 밟혀서 죽거나 다친다.

다행히 죽음을 면했더라도 힘센 소의 뿔에 받히거나 밟힌 소는 다친 부위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잔인한 도축장 인부들의 하루 일감이 되고 만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모든 소는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하기 전에 반드시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1분 1초가 모두 돈으로 계산되는 농산업 현장에서 그런 규정을 지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허용되는지는 실로 의문이다.

여기서 자세히 묘사하기는 그렇지만 도살장의 살풍경을 떠올려 보는 것도 우리가 앞으로 식문화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의 아이오와 주 포스트빌에 있는 애그리프로세서즈는 이른바 유대교식 도살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정통 유대교의 율법에 따르면 도살 직전에 동물을 기절시키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유대교식 도살장은 전통적으로 동물들의 목을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절단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최대한 고통을 줄인 가운데 깨끗하게 도살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피가 급속하게 빠져나가면서 소의 뇌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무의식 속으로 빠지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몰래 잠입 취재한 비디오테이프에 따르면 소들은 목이 잘리고 기관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떤 소들은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는데, 그중에는 실제로 일어서는 소도 더러 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는 동안 도살장 인부들은 잡담을 하면서 소가 완전히 숨을 거두기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들의 경험상 소들은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고는 뒷발에 쇠사슬을 묶어 마당으로 끌고 나간다. 어떤 소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도살장 문을 빠져나와 옆방까지 간 뒤에야 숨을 거두기도 했다. 그 소가 짧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몸부림치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연장하려고 하는 동안 도살장 안에는 또 다른 소 두 마리가 들어와 목이 잘린 친족 소가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몸이 해체되는 장면이 곧 그것이다. 서울의 마장동 도축장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슬픈 운명을 커다란 눈망울에 담아 그렁그렁한 눈물로 호소한 소들의 이야기는 필자도 심심치 않게 들은 바 있다.

필자는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비단 소의 경우에만 산 채로 목이 잘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살아 있는 인간을 참수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그 끔찍한 장면을 비디오에 담아 언론에 공개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인간의 야만성은 어디가 그 한계란 말인가?

일찍이 칸트도 동물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도덕성을 길러 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래서 현대의 일부 사상가들도 우리의 육식문화를 심각하게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 탐욕스러움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를 완전히 파괴할지도 모를 위험성을 낳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4) 귀엽고 예쁘기만 한 물고기의 경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소나 돼지와는 달리 물고기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있어 우리를 아연 실색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 물고기도 고통을 느낄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고 또한 가장 신뢰받는 과학 단체 가운데 하나인 영국왕립학회의 학회지인 『영국왕립학회보』는 린 스네든(Lynne Sneddon)을 비롯한 에든버러 대학교 로슬린 연구소 팀의 흥미 있는 연구 결과를 게재한 바 있다.

스네든과 그녀의 동료 과학자들은 벌의 독과 초산을 야생 무지개송어의 주둥이에 주사하고 그 결과를 관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사를 맞은 무지개송어가 갑자기 수조의 바닥에 주둥이를 비벼 대고 펄쩍펄쩍 뛰는 듯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행동은 포유동물이 고통스러울 때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한편, 대조군에 들어 있는 다른 무지개송어에게는 그냥 소금물만 주사했더니 전자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실험 대상인 물고기가 “심도 있는 행태적, 생리적 변화를 나타냈다. ……그것은 고등 포유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비교될 만하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변화는 단순한 기계적 반응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러한 변화를 보이던 무지개송어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자 다시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진통제를 투여했을 때 보이는 반응과 동일한 행동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물고기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라고. 이 외에도 물고기들이 위계질서를 갖춘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험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물고기 또한 어쩌면 우리 인간들과 꼭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기를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선을 비롯한 육식문화를 계속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는 동물들의 삶을 존중하는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 고기와 똑같은 맛을 내는 횟감과 살코기를 인공적으로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이에 대한 과학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나 그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실험 결과도 잇달아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실용화 단계를 거론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계속 고기를 먹거나 아니면 식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입장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을 요구받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지속 불가능한 육식문화는 언젠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리적 거부감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자격으로 수천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인류의 식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제인 구달은 조심스럽지만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길만이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육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육류의 소비를 위해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류의 섭취를 크게 줄이거나 기껏해야 방목해서 키운 유기농 가축의 고기만을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참에 아예 육식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인 구달의 희망 섞인 관측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가축들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건강까지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공장식 사육장이든 풀을 먹여 기르는 방목형 농장이든, 가축을 집단적으로 사육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환경 파괴를 불러온다.

피터 싱어도 표현만 다를 뿐 유사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의 식품 소비자들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식품업체들이 야기하는 환경오염과 직,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 해 동안 60억 인구가 음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육지동물만 약 500억 마리라고 추산한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생애 전체를 구속받고 있으며 소속된 공장식 농장의 주도면밀한 생산 계획에 따라 억지로 태어나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품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살다가 오로지 인간의 미각을 위해 살육되는 정해진 길을 걷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 수십억 마리의 물고기나 다른 해양 생물들이 횟감이나 매운탕거리로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와중에 각종 화학물질과 호르몬제는 끊임없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지구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도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잘못된 먹을거리 선택에서 빚어지는 일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곧 인류의 도덕성이 그만큼 진보하고 있다는 또 다른 반증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가져 보자.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도덕적 합의 사항을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앞으로 동물들을 대하는 방식을 둘러싼 윤리학적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든지 간에 다른 동물들과 함께 하나의 자연집단에 불과한 인간 공동체는 더 이상 현재와 같은 모습 그대로 동물들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론적인 설명의 편의를 위해 설정된 가정적 상황은 도덕 원리나 정치제도를 명료하게 가다듬고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물들의 고통과 이와 관련된 우리의 윤리적 선택은 결코 가설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과 동물 사이를 어떤 기준으로 구별하든지 간에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을 도덕적으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다루지 않는 곳에서는 이제 이를 옹호할 지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까지 견지해 온 ‘자연과 동물’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끝으로 불상생계를 수지하고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일상적인 삶을 꾸려 나가고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

허남결 |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영국 더럼대학 철학과 객원 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이자 본지 편집위원. 《존 스튜어트 밀-생애와 사상》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 《불교와 생명윤리학》 등 다수의 역서와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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