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1. 머리말

조선왕조시대의 한국불교는 일반에서 알고 있듯이 억불정책 속에 신음을 하고 있던 일종의 암흑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불교를 가리켜 ‘타성적 수난의 시대’1)니 ‘가까스로 잔천(殘喘)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2)니 하는 경우가 있지마는, 어쨌든 그때의 불교는 활기가 너무도 미미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종승(宗乘)도 없고 종통도 없었다’3)는 혹평과 함께 승려를 가리켜 ‘칠천(七賤)’4) 운운하는 말까지 있었을만큼 그때의 위상은 말이 아니었었다.

한마디로 왕조시대의 불교는 사람으로서의 인권이 무시된 채로 가지가지의 침탈과 핍박을 당하면서 근근이 여맥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국불교가 이와 같이 참담한 상황에 있을 때에 이른바 ‘문호개방’(1876)이란 사태와 함께 일본세력이 밀려오기 시작을 한다는 것은 일반에서도 아는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정치·외교 내지는 군사력을 주축으로 하는 침략이었지마는, 또 한편으로 그것은 불교인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던 일종의 문화적 침략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소위 개화기라고 하는 과도적 현상과 함께 불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한국불교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며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던가. 다시 말해서 개화기 불교의 실상과 성격 내지는 그때 교단의 사상적 노선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문호개방과 일본불교의 침투

문호개방과 더불어 침략세력과 함께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 불교인들의 목적―그것은 순수 종교의 홍포 확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상 침략자들의 앞잡이로서의 역할수행이 더욱 크고도 중요한 것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아래와 같은 자료들을 가지고 볼 때 이것은 입증이 되는 일인 것이다.

우리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말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명치(明治)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한 뒤부터 점차 중국·조선에 향하여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또한 북해도(北海道)의 개척을 비롯하여 중국·조선의 개교를 계획하였다. 명치 10년(1877) 내무경 대구보(大久保) 씨는 외무경 사도(寺島) 씨와 함께 본원사 관장 엄여상인(嚴如上人)에게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종용 의뢰하였다. 이에 본원사에서는 곧 제1차 개교에 공로가 있는 …… 오촌원심(奧村圓心)과 평야혜수(平野惠粹) 두 사람을 발탁, 부산에 별원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5)

다시 말해서 그들 불교인들은 그 침략세력과 완전히 이신동체가 돼서 한국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때 불교인들의 이와 같은 동향이 위 문건 하나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소위 ‘폐불훼석(廢佛毁釋)’6)이라고 하는 ‘법난’ 속에서 더욱더 군국주의적인 집단으로 변모를 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위와 같은 그들의 주구성은 충분히 수긍이 되는 일인 것이다.

당시 일본 불교인들의 ‘앞잡이 역할’에 관한 자료는 이 밖에도 많은 것이 있지마는,7) 그들이 앞을 다투어 침략세력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사실에 우리는 자못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와 같은 맥락 속에 진종본원사(眞宗本願寺)·대곡파본원사(大谷派本願寺) 또는 일련종(日蓮宗)·정토종(淨土宗) 등 각 종파에서는 도처에 ‘○○別院’이란 것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그 숫자가 1905년대까지 대충 17개소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8)

그렇다면 이와 같이 침투해 들어온 일본 불교인들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되는가. 그들이 이때 우선적으로 먼저 착수한 일은 한인 내지는 한국 불교인들을 유인, 포섭하는 공작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물론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되도록 완화시키기 위한 방략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때 우리로서는 지극히 신기한 물건이었던 남포(램프)니 석유니 하는 박래품이라든가,9) 또 혹은 내복·과자·약물 등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선물을 하는 등 여러 모로 선심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사진기를 들고 와서 한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든가, 또 혹은 일본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저들이 타고 온 군함·대포 등의 성능을 실연함으로써 한인들을 혼비백산케 한다든지, 하여간 여러 가지 방략을 동원하고 있었던 것이다.10)

그런데 이와 같은 방략들 중에서도 그 효험이 가장 컸던 것을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입성해금(入城解禁)’에 관한 공로(?)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안이라 이 방면 연구에서는 으레 한번씩 언급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마는, 어쨌든 이는 ‘파천황(破天荒)의 은혜를 베풀어 준 격’이었다는 선언까지 한 사람이 있을 만큼11) 그들로서는 자못 자부를 하는 사건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고 있던’ 왕조시대의 악법을 해제해 주는 데 일본 불교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불교사상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왕조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혹심하게 수모·천대를 당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대개 알고들 있는 일이지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사안은 바로 이 ‘입성금지’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때 불교의 위상을 무엇보다도 잘 상징하고 있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해금’에 관한 일은 그들이 착안해 냈던 방략 중에서도 효과가 가장 큰 것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실제에 있어서 이 ‘해금’을 계기로 왕조 말기 승려들의 ‘불교재흥’에 관한 의욕과 용기가 실로 눈부실 정도로 일어나고 있음을 봐도 이는 짐작이 되는 일이다. 즉 연산군 때 성중 사찰이 훼철된 이래 처음으로 재건된 것이 바로 각황사(覺皇寺)인데, 이것이 바로 그 ‘승리입성의 표지’로 세워진 사찰이었다는 회고가 있는 것이다.12)

한편 일제는 이때 정부 당국이 또한 한국불교 포섭을 위해 직접 공작을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위에 말한 각 종파의 조선 포교 활동에 당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던 사실을 볼 것 같으면 이는 입증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교라고 하는 앞잡이를 통하지 않고 당국이 직접 공작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테면 1907년 이후 여러 차레에 걸친 ‘일본시찰단’ 파견 같은 것은 이러한 사례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었다.13)

일본 시찰이라고 하는 것은 교단의 간부급 인사들을 일본으로 초청, 몇 달씩 구경을 시키며 융숭한 대접을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호감을 갖도록 유도하기 위해 벌인 사업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온 뒤에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기행문 같은 것을 가지고 짐작해 볼 수가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 있다.

각 공창의 동작하는 상황을 주람하고, 각 명소의 형승을 유완하고, 어편전(御便殿)에서 알현의 영(榮)을 몽(蒙)하고, 빈리궁(濱離宮)의 사연(賜宴)의 광(光)을 획(獲)하고, 신숙어원(新宿御苑)을 배관함을 득하고, 박람회의 우대를 피(被)하고, ……에서 서양식 연(宴) 등을 수(受)하였는데, 기시 단원을 인솔함은 즉 조선주차사령관 …… 각하이셨는데, 각하의 보살피심으로 종종의 편의를 득하여 …… 여(余)는 동경 백일의 호기념이 지금토록 심중에 불민(不泯)하며, 시찰한 호이익(好利益)이 지금까지 현전에 응용되는 터이라. 금회 시찰단에 대한 총독 각하의 성의(盛意)는 여의 경험상으로도 지득키 족하도다.(李能和)14)

이능화같이 비교적 온건했던 학자15)가 이 정도로 쓸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의 경우는 어떠했겠는가. 일제의 포섭 공작은 하여간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입성해금’ 이후 교계의 현실 인식

그렇다면 일제 및 그 불교인들의 위와 같은 공작들이, 그때 교단의 현실 인식에 얼마나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겠는가. 위 《조선국포교일지》에 나타나는 문자들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16)

① 1877. 11. 4. …… 부산 거주 최모 씨와 반복 필담, 그의 신심 여부를 알아본즉 그는 금석같이 맹세를 하는지라, 불상과 염주를 주니 재배 돈수(頓首),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② 1878. 1. 3. 금강산 신계사 태묵당(太默堂) 내방. 그는 한국불교의 쇠퇴를 개탄하면서 나의 도한(渡韓)을 만강의 성심으로 환영, 앞으로 한국불교 발전을 도와 불일증휘(佛日增輝)의 날이 있게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③ 1878. 6. 16. 일요일. 한국인들의 마을을 산보하다가 엿과 떡을 주니 마치 굶주렸던 호랑이와 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④ 1878. 8. 13. 양산 거주 김문헌 내방, 우리 종문(宗門=곧 정토종)의 제자가 될 것을 논의함.

⑤ 1878. 8. 18. 칠불사 문정(文定) 내방, 교의(敎儀)를 담론하며 우리 종문에 귀할 것을 논의함.

⑥ 1878. 8. 30. 범어사승 내방. 한국불교의 쇠퇴상 및 목하 승려의 행적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 승려는 오직 기도하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대답.

⑦ 1880. 7. 31. 길천인(吉川人) 내방, 국체(國體)의 쇠미를 개탄하다가 배불(拜佛)하고 갔다. 또 승려 4인이 와서 법당 재건 모연문(募緣文)을 제시하므로 일금 3백 문(文)을 보냈다.

⑧ 1880. 8. 13. 경성 민성호(閔聖鎬) 내방 필담. 국가의 쇠퇴를 누누진담(縷縷陳談)하다가 어느새 동녘이 밝았다.
⑨ 1880. 11. 23. 묵암(默庵) 소승이 와서 명년 봄에 도일(渡日)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감.

⑩ 1881. 1. 9. 금강산 태묵(太默)이 묵암의 서신을 가져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 사람은 그 동안 많은 경서를 읽고 참선도 해봤습니다만 …… 아직도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는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 이제 바다 건너 귀국으로 가서 여러 종장(宗匠)들을 뵙고 지도를 받고자 하옵는바, 과연 허락을 해주실른지오…….”17)

⑪ 1881. 5. 1. 민치복(閔致福)이 와서 말하기를 “진종(眞宗, 일본 정토종) 교법이 우리 나라에 홍통하게 되면 이는 곧 야소교 방어의 최상책이 될 것이온바……”라고 한다. 나는 이에 매우 감격하였다.

위의 기사들 가운데는 물론 아전인수격 과장 내지는 윤색된 부분도 더러는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아주 없는 사실들을 날조 기록한 것이라고만 생각을 할 수는 또한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일부에서라고는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인식과 동향이 그때 교단 내에 엄연히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는 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글을 볼 것 같으면, 특정인에 따라서는 더욱더 일본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소생은 본산(本山, 곧 京都 東本願寺의 본산―필자)에 도착한 뒤론 잘 먹고 따뜻이 자며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법주(大法主)의 넓으신 은혜 이렇듯이 높고 후하시니, 장차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위 어학(語學, 곧 일본말) 공부는 아득하고 멍멍하여 분간을 할 수가 없으니, 어느 때나 귀가 뚫리고 입이 터져 보고 듣고 말을 할 수가 있을른지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가등사(加藤師)18)께서도 평안하시며 다른 도반(道伴)들도 잘들 지내시는지, 여러분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하루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

이것은 개화기 초기에 혜성같이 나타나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기걸승 이동인(李東仁)20)이, 그때 경도(京都)에 가 있으면서 본원사(本願寺) 윤번(輪番) 오촌원심(奧村圓心)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그러니까 이는 서간문의 형식과 한문의 과장성을 일단은 감안을 하면서 분석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의만을 가지고 본다 해도 그는 이미 일본불교를 구세주와 같은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문면에서 감지된다.

위와 같은 교계의 동향은 일본 불교인들이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이전, 그러니까 그들의 ‘입성해금’(1895) 공작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곡파 본원사의 경우 마침 《……포교일지》라고 하는 문건을 남긴 것이 있어서 알 수가 있는 일이기도 하지마는, 여타 종파들의 경우까지 다 조사할 수가 있다면 그 결과는 또 어떠했을는지 모른다.21) 어쨌든 위에 말한 동향은 그 후 그들의 침략 강도가 더해짐에 따라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 또한 저간의 사정이었다.

그러면 그 양상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던가. 다음에 몇 가지 사실을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입성해금’이 이루어진 직후인 1895년 4월, 상순(尙順)이란 법명을 쓰던 최취허(崔就虛)란 이가 좌야전려(佐野前勵)에게 보낸 감사장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22)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이를 데 없이 천한 대접을 받아 온 나머지, 불입성문(不入城門)의 차별 대우가 실로 수백 년에 걸쳐 있었을 만큼 답답하고 억울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존사(尊師)께서 오시어 5백 년래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시니, 그 감사하고 경하스러운 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대의만 초역)

문면을 통하여 그가 일본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들도 감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내지 일본불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이 상순 한 사람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곧 그때 교단에는 제2, 제3의 상순이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여기에는 물론 그들의 침투 공작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배경도 있지마는, 어쨌든 이와 관련되는 다음의 문건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23)

한국팔도에 대한 포교의 보급을 도모하려면 국내추요지(國內樞要地) 30여 개소에 회당을 개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신축하는 데는 재정적 난문제가 따르게 되니, 차라리 한국 사찰을 이용함이 어떠할까? 즉 한국 현존 사찰 1,600개사 가운데 편의한 사찰을 선택, 일·한 승려 공동의 회당으로 쓴다면 한승(韓僧)도 또한 후의로써 그것을 승락하게 될 것이다. 논자가 이미 10여 개사의 내약(內約)을 받은 바 있거니와 이것은 매우 편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사찰은 매우 견고하니 조금도 부자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일련종의 가등문교(加藤文敎)가 남긴 글 가운데의 한 토막인데, 요컨대 1900년경에는 일련종에서도 한국 사찰과의 절충을 감행, 10여 개사의 내약을 받고 ‘공동회당으로 쓰기로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계(戒)를 받는 승려가 생기는가 하면,24) 또 일부에서는 통감부를 움직여 ‘사재보호(寺財保護)에 관한 법령’을 내리도록 종용한 예가 있으며,25) 1906년 2월에는 이보담(李寶潭)·홍월초(洪月初) 등의 주동으로 정토종의 정상현진(井上玄眞)과 결탁, 원흥사(元興寺)에다 불교연구회란 것을 만들어 놓고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1906년을 전후해서는 일본 ○○종파의 ‘관리청원(管理淸願)’까지를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니, 저간의 사정은 더욱더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26) ‘관리청원’이란 일본 ○○종파와의 연합 또는 그 말사(末寺) 가입을 뜻하는 말인데, 사찰에 따라서는 일본측의 말사가입 공작을 단호히 거부한 예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어쨌든 아래와 같이 여러 사찰이 그것을 수락하고 있었다 한다.

① 통감부로부터 허가까지 얻은 사찰 : 김천 직지사, 철원 사신암, 박천 심원사, 과천 연주암
② 청원은 냈으나, 허가를 얻지 못한 사찰 : 안주 대불사, 영변 보현사,27) 영변 법흥사, 영동 영국사, 고산 화암사, 합천 해인사, 동소문 외 화계사, 진주 대원사, 용담 천황사, 회양(淮陽) 장안사, 전주 학림사, 동소문 외 봉국사, 동래 범어사, 구례 화엄사

위와 같은 일련의 ‘가말(加末)’ 현상은 물론 당시의 불안한 정정(政情)과 일본불교에 대한 호감 내지는 의앙심(依仰心)에서 나온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찰들의 이러한 동요는, 때로는 일승 자신에게까지도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자못 시끄러운 현상들이었다. 다음과 같은 문건은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자료이다.

지난번 통감부 초기에 선포한 종교에 관한 포고령 가운데에 “일본 승려로서 한사(韓寺)를 관리코자 하는 자는, 피차가 연서청원(連署請願)을 해서 윤허를 얻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이에 각 종파에서는 다투어 그 관리권을 얻어내고자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들은 한승(韓僧)들의 우매함을 악용, 기를 쓰고 사약(私約)을 맺는 경우가 허다히 있었다. 그리하여 그때 나는 이를 보고서 이렇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우리의 포교승들이 조선민족을 위해서 들어와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가람을 약탈코자 해서 그 틈을 엿보고 있는 것인가.”28)

즉 통감부 초기에 일제는 종교 선포령이란 것을 발포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나온 뒤로부터 그들 불교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 한국 사찰을 포섭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논설의 필자는 동족의 발호함을 이렇듯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 말한 여러 가지 현상들은 요컨대 ‘입성해금’ 이후 교단의 주체성이 얼마나 박약한 것이었던가 함을 말해 주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뒷날 권상로 같은 학자는 이때의 상황을 가리켜,29)

……승려계의 일변은 풍조를 흡인(吸引)하고 일변은 습관을 고집하고, 혹은 세력을 희모(希慕)하여 외호(外護)도 의뢰코자 하며, 혹은 분개를 포(抱)하여 자립으로 유지코자 하나, 기대부분(其大部分)은 내지(內地) 하종(何宗)과 연락하여 교세(敎勢)를 인상(引上)코자 하는 고로……

운운하는 평가를 한 일이 있지마는, 이는 실로 적절히 압축이 된 평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능화 역시 다음과 같은 문자를 남긴 것이 있는데 이것도 물론 같은 맥락의 논지였다.30)

조선 승려들은 그때에 대체 어떤 종지(宗旨)를 써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토종(=일본의 淨土宗)을 표방해도 말이 없고, ……원종(圓宗)을 만들어도 무조건 따르며……, 또 혹은 임제종(=일본의 臨濟宗)에 부속을 해도 수수방관……, 기타 조동종(曹洞宗)과 맹약을 해도 그들은 그냥 보고만 있을 뿐 말이 없었다. ……부화뇌동이라 할까, 손잡고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 할까, 어쨌든 그때의 동향은 모두가 일본 세력을 의지해서 일시적 구안(苟安)을 도모하려는 추세 그것뿐이었다.

입성해금 이후 ‘합방’시기까지 약 15년간의 교단은 어쨌든 향방을 못잡고 방황을 하던, 글자 그대로 과도기중의 과도기였던 것이다.

4. 조동종과의 연합 소동

그런데 위와 같이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고는 해도, 당시의 주조(主潮)는 역시 어떤 외세(특히 일본 쪽의 어떤 종파)에 의지해서 살길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의타적 동향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원종(圓宗) 대 조동종(曹洞宗)과의 연합소동이었다 할 것이다. 이것은 그때가 1910년대였던 점으로 보나, 한국 불교 전체를 일본의 특정 종파에 예속시키려 했던 점으로 보나, 그야말로 매종역조(賣宗易祖)의 망동이었다는 비난을 듣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장본인은 그때 원종의 종정이요 사찰령(1911) 이후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李晦光, 1862∼1931)인데, 그렇다면 그는 대개 어떤 인물이었던가.

이회광은 교단 일부에서는 아직도 당대의 생불(生佛)이었다는 회고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또 《동사열전(東師列傳)》 같은 것을 봐도, 그는 실로 범상찮은 경지를 가지고 있던 고승이었음이 짐작되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우선 《동사열전》의 서술을 보자.

물푸레나무 꽃향기를 맡아 보았나, 聞木섐香乎31)
매화의 열매가 무르익었음을 보도다. 看梅子熟矣32)
네 거리 술집에서 흠뻑 취하여, 滿醉於衢樽33)
돌아오니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도다. 歸家破問程

선의 세계란 원래가 비논리·비상식이 많은 것이라 문외한으로서는 알기가 어려운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위의 문자는 어쨌든 이회광의 공부가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을 듣고 양서(兩西)·삼남(三南)의 학인들이 풀덤불을 헤치며 몰려들었다 함이 역시 《동사열전》의 서술이며,34) 나아가서는

하룻밤 그가 자고 가면, 마치 사향노루가 봄바람에 노닐 적에 풀밭 위에 저절로 향기가 남아 있는 것과도 같았고, 또 한번만 그 사람과 대화를 하면 마치 맑은 달이 정중승(定中僧=定中에 들어 있는 수좌)을 비치듯이 속이 자못 시원하였다.35)

운운이 또한 《동사열전》의 찬사였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범해 각안(梵海 覺岸)의 입적 연대가 1896년이니, 그가 이 해에 《열전》을 쓴 것이라 해도 이때 이회광의 나이는 불과 34세밖에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30대 초반에 벌써 이와 같은 찬사를 들었던 것이라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이 책을 쓸 때에, 같은 연대대(年代帶)의 고승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가 유독 이회광만을 적출, 수록하였다는 사실에는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36)

그러면 이와 같은 이회광이 어찌하여 그러한 망동을 하게 됐던 것인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1907년 6월 25일 그가 불교연구회 회장과 명진학교(明進學校) 교장이 되면서부터 마장(魔障)은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불교연구회’라고 하는 것은 1906년 이보담(李寶潭)·홍월초(洪月初) 등이 만든 단체인데, 그렇다면 이 연구회는 대체 어떤 성격을 갖는 조직체였던가.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① 그때 이 연구회에서는 내놓고 일본 정토종을 표방하고 있었다.
② 이 연구회를 발기하기 이전부터 홍월초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정토종 승려들과 접촉을 한 사실이 있었다.
③ 이 연구회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불교 교육기관인 명진학교(名進學校)를 세운 것도(1906) 실은 그 정토종 개교사인 정상현진(井上玄眞)의 권유 때문에 시작이 됐던 것이다.37)

등등이 그것인데,38) 이런 사실들을 가지고 볼 때 불교연구회는 말할 것도 없이 친일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친일 불교단체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능화도 이 문제와 관련,

(연구회는) 공공연히 일본 정토종을 표방하고 있었는데도 그때 교계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39)

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간의 사정은 더욱더 확실한 바가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순수 전통에 입각한 통할기구를 갈망하는 여론도 또 한편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한다.40) 그리하여 아직까지의 지도자였던 홍월초(洪月初)·이보담(李寶潭) 등이 사직을 하고 대신 이회광이 이를 계승하게 되니, 이는 곧 위와 같은 여망에 부응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니까 이때 이회광의 정신이 정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마땅히 《동사열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큰 법력을 발휘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연구회의 성격을 어디까지나 한국적 전통을 갖는 조직으로 바꾸어 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장직’은 도리어 그의 부일적 야심만을 채우게 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니, 이는 실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때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극성스러울 정도의 친일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 이듬해(1908년 3월) 그가 각도 사찰 대표 52인이 모인 회의에서 원종종무원이란 것을 만들게 되는 때로부터의 일이었다. 원종에 대해서도 말은 많으나,41) 하여간 이때 그가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통해서 일인 괴승 무전범지(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영입하게 되면서부터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용구·송병준은 물론 이보다 앞서부터 이미 무전범지와의 접촉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무전범지와의 사이에 소위 〈조선불교재흥방략〉이란 것에 대해 피차 의견 교환이 있어온 사람들이기도 하였다.42)

그리하여 무전범지의 ‘방략’은 이용구 등을 통해 여러 가지로 이회광을 충동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중에서도 조동종과의 연합에 관한 사안이 가장 큰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무전범지는 또 어떤 사람인가. 이는 이회광의 친일 행보에 지대한 관련을 갖는 변수가 되는 터인즉 한 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전범지는 명치(明治)시대 천황주의(天皇主義) 극우단체인 흑룡회(黑龍會)의 핵심으로 활동을 하던 일종의 낭인(浪人)이었다.43)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불교를 필두로 한학(漢學)과 한문에까지 깊은 조예를 가지고서, 한국 ‘합방’ 때에 아주 깊숙이서 이면 공작을 벌이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그에 대해 괴승(怪僧)이니 걸승(乞僧=일본어로는 욧坊主)이니 하는 등의 폄칭을 쓰기도 하나,44) 어쨌든 그는 그때 일종의 괴걸이기도 하였다. 경력은 대충 이러하다.45)

① 1863년(文久 3) 출생, 한학을 배우다가 23세에 중이 됨.
② 1889년 절을 떠나 한국에 입국, 각처를 유랑.
③ 1894년 ‘동학’이 일어남에 현양사(玄洋社) 일당들과 함께 각처에 출몰, 이를 선동하고 다님.
④ 1905년 민비(閔妃) 시해사건에 연루, 광도옥(廣島獄)에 하옥되어 1년간 복역.
⑤ 1906년 흑룡회(黑龍會) 주간 내전양평(內田良平) 초청으로 재차 내한, 시천교(侍天敎) 고문 겸 일진회의 사빈(師賓)으로서, 이용구의 추천으로 원종(圓宗)의 고문이 됨.
⑥ 1910년 ‘합방’이 되자 귀국, 이듬해 사망. 49세.

위에서 보이는 현양사니 흑룡회니 하는 것들이 명치(明治)시대 극우단체의 대표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무전범지가 어떤 인물이었던가 함은 상상키 어렵지 아니 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민비사건의 장본인인 삼포오루(三浦梧樓)와 함께 이 사건의 핵심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시사하는 것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는 또 이용구를 충동해서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이란 것을 지어 바치게도 한 인물이고 보면46) 저간의 사정은 더욱더 맹랑한 바가 있는 것이다.

일언이폐지해서 그는 일제 침략 정권의 가장 기민한 앞잡이였다. 그런데 이회광은 추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이용구의 권고로 무전범지를 고문으로 모시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설득과 ‘지도’로 조동종과의 연합소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현재의 우리로서는 허탈감마저 없지 아니하다. 더구나 그때가 1910년 9월 전후의 일이었음에랴.

어쨌든 이회광은 위에 말한 ‘불교연구회’와는 별도로 1908년 3월 각도 대표 52인을 규합, 원종종무원이란 것을 만들게 되는데, 각도의 대표들을 망라한 것이니 이는 그때 일종의 중앙기구로서의 성격도 다소간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처음부터 그는 불교연구회의 주체성 회복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두고 있지를 않았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에 말한 이용구 내지 무전범지와의 결탁 속에 연합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한 감이 있는 것이다.

하여간 1910년 6월, 조동종과의 연합조약 7개조라는 것은 성립이 되는데, 이 조약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데 대해서는 그 동안의 연구에 자주 언급들이 있었으니 여기서는 생략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 즉 임제종운동의 경위, 기타 1912년 6월 20일 양당의 문패가 동시에 철거를 당하는 경위 또한 알려져 있는 것이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위에 말한 대로 이용구·무전범지 등의 충동에 놀아나고 있던 이회광에 대한 제3자의 평가는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점만을 부언해 두는 정도로 이 글은 끝을 낼까 한다. 제3자라고 하는 것은 《불교통사》의 저자인 이능화를 말하는데, 이능화는 뚜렷한 매도(罵倒)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아래와 같이 어딘지 모르게 탐탁치 않은 듯한 인상을 풍기는 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그때 분위기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여운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한 번 제시해 두는 것이다.

……출가 초기에는 자못 행각승의 맛을 풍기며 …… 널리 ‘회광불(晦光佛)’의 칭예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속가(신도의 집)로 내려와 있게 되면서부터는47) 운수납자의 풍모도 속세의 누(累)가 되었음인가. 그리하여 원종을 만든(1908. 3) 뒤로부터는, 임시종정이니 30본산관리소장이니 하는 직책들도 사실은 모두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내 마음을 바꿀 것인가 하면 그렇게도 못할 일이요, 한편으로는 또 대중들의 빗발치는 비난도 두렵지 않은 바는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한편에서의 명예는 잃었다 해도 아직 시간을 두고 만회할 여지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을른지. 한세(寒歲)를 겪어 보지 않고서야 어찌 송백의 지조를 알 수가 있겠는가.48)

이 글은 한문의 함축성과 여백의 미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라, 번역도 어렵지마는 내용 파악도 필자로서는 실상 쉽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회광의 친일성은 완곡하게나마 지적이 돼 있고, 아울러 우리 민족 우리 교단의 비애랄까 소망이랄까 하는 데 대해서도 다소간은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개화기의 교단의 현실 인식은 하여간에 갈피를 못잡고 헤매고 있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함이 필자의 생각이다.

5. 결어

잘 알려져 있듯이 왕조시대의 불교는 오랫동안의 억압과 침탈 속에 그 위상이 너무도 떨어져 있던 일종의 암흑시기였다. 대대로 겪어오는 모멸과 냉대 속에 생기를 거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기에 소위 ‘문호개방’(1876)이라고 하는 사태와 함께 일본의 침략세력은 한국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을 한다. 이는 물론 정치·군사적인 실력을 앞세우며 들어온 것이지마는,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곧 종교―특히 불교인들이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들어오게 되는 현상인 것이다. 불교인들이 침략세력의 선도역할을 하면서 계속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때 한국에 와서 하게 되는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었던가. 여기에는 물론 자국 불교의 해외 홍포라고 하는 선교적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침략세력의 앞잡이로서의 역할―다시 말해서 그때 한국의 민심을 되도록 완화·절충시킨다고 하는 역할이 그들에게는 더욱 큰 것이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그들의 공작 대상이 되었던 것이 곧 한국의 불교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와의 접촉이 시작되는데, 그렇다면 이때 그들이 동원하게 되는 방략과 술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곧 그때 한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고마운 일 또는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한국인의 민심을 일단 호일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일, 그것이었다. 이를테면 남포니 석유니 하는 박래품들을 들고 와서 호기심을 자극한다든가, 또 혹은 ‘도성출입’ 금지에 관한 악법을 해제시켜 준다든가, 어쨌든 호감을 갖게 할 만한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랫동안 눌려 있던 한국 불교인들은 급속도로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마치 구세주와도 같이 인식을 하는 풍조조차 한편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일본으로 가서 계를 받는 사태가 생기는가 하면, 혹은 그들 종파의 종칭을 모칭하면서 무슨 사업인가를 해보려는 세력이 나타나고, 또 혹은 어떤 사찰 전체를 그들에게 위탁해 보려는 시도도 때로는 있었다.

이는 물론 왕조시대 억불에 대한 일종의 반동적 현상이기도 했겠으나, 어쨌든 그때의 불교는 일정한 노선이 없이 매우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0년대에는 한국불교 전체를 일본의 어떤 종파와 연합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니, 그때 불교의 현실 인식이 주체성이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위에 말한 연합 음모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를 분쇄해 보려는 운동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이러한 사태와 대결하면서 한국불교 독자의 노선을 세워 보려는 움직임도 사실은 매우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던 것이 또한 저간의 사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그때 이미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일제에 의해 여지없이 좌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운동은 위에 말한 여러 가지 친일적 움직임들과 함께, 아울러 모두 일제의 통제 속으로 들어가 소멸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1911년의 이른바 사찰령 체제라는 것이 그것인데, 이로부터 한국불교는 명실공히 강력한 통제 속에 또 한번의 압박과 질곡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문호개방 이후의 한국불교는 요컨대, 조선왕조적인 억불 체제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주체적인 인식 결여와 함께 뚜렷한 향방 설정이 불가능했던 시기, 이를테면 글자 그대로의 과도기였다.■

정광호
서울대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인하대학교 대우교수. 논저서로 <일본의 불교계와 식민통치> <일본 침략 시기 불교계의 민족의식>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 편년≫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과 전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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