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1. 정교분리원칙의 의미

정교분리의 원칙은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서로 중첩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것을 규범으로 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제시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종교의 독자적 영역이 미리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정치와 종교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각각에 자율적 영역을 배당할 뿐만 아니라, 분리로서 두 영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입장에는 매우 독특한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원칙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은 근대 서구이며, 이때 새롭게 나타난 세속의 개념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세속의 범주는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지금과 같은 의미로 정착되었다. 이에 대해 적절한 요약을 해주고 있는 탈랄 아사드의 말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그는 종교(sacrum: 신들에게 속한 영역)와 세속(saeculum, profanum: 사원 앞의 공간)의 구분이 서구 역사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세속사와 종교사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실은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세속은 타락과 최후 심판 사이의 기간이었고,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세속 세계와 종교적 세계는 나란히 옆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시대에 세속 영역은 인간행위가 행해지는 순수 자연의 영역으로 변형되어 초자연적 종교 영역과 구별되었다.1)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지배하게 된 근대 이후, 드디어 세속의 범주는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나란히 존재한다고 여겨지던 종교 범주를 합병하여, 근대 세속 범주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 세속의 영역은 초자연이 아닌 자연의 영역으로서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행위는 자연법칙적인 파악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근대적 세속 범주의 형성으로 인해 자연적 인간행위가 이루어지는 장(場)으로 사회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종교 영역도 사회개념이 지칭하는 장(場) 안에 자리가 배정되었으며, 종교를 사회현상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수많은 개인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영역이 설정되자, 이를 배경으로 하여 개인적 사적 이익의 이질성을 통제하여 동질성을 확보하고 보편성의 기반을 만드는 영역도 상정되었다.2) 이것이 바로 국가로서, 정치는 이 국가의 기능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런 맥락을 살피고 난 다음에라야 탈랄 아사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 유럽에는 ‘사회(society)’라는 포괄적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 ‘국가’, ‘민족경제’ 등은 ‘사회’라는 포괄적인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국가가 종교의 영역을 재규정함으로써 자신의 과업을 제대로 관장할 수 있게 된 것(종교신앙과 관계없이 국민을 도덕적 물질적으로 바꿔 나가는 일)도 ‘사회’라는 세속적 몸(體)이 나타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3)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 서구에서 종교 영역이 세속 사회 영역에 의해 포섭되어 세속 사회의 하위 영역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하더라도, 종교 영역의 위치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속 사회에서 종교의 본령은 외적 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의식 영역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종교의 위치가 개인의 내적 신념에 배속되게 된 것은 종교개혁과 그 뒤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일어난 종교전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종교적 신앙은 신분과 지역이라는 외면적 기준에 따라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두 종교집단이 서로에게 엄청난 종교적 폭력을 가한 결과, 어느 쪽도 더 이상 그런 참혹한 모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종교적 신앙은 이제 개인의식의 내면에 자리잡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종교의 본래 위치가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 보여지면, 종교의 외면적 표상으로 인해 야기된 갈등이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가 개인의 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반면, 정치는 세속적인 외적 힘이 작동하는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바야흐로 사적 영역에 소속되어 있는 종교와 공적 영역에 소속된 정치의 구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구별이 점차 확고하게 정착되면서 종교가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공적 영역에 개입한다고 여겨지는 경우 전 사회적인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짜여진 근대적 종교 영역은 근대적 세속 범주의 형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공적인 정치와는 분리되어 있는 영역으로 여겨졌고, 이런 점은 점차 당연시되었다.

2. 한국 사회와 정교분리원칙

천주교가 조선조의 근본 체제 이데올로기였던 조상제사를 거부하면서 야기되었던 조선정부와 천주교의 갈등은 19세기 내내 조선정부로 하여금 ‘서교(西敎)의 위협’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천주교의 조상제사 거부와 ‘불법적’ 선교활동을 반체제적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무자비한 박해로 일관하였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조심스럽게 선교를 개시한 개신교는 ‘정사(政事)에 간섭하지 않음’을 내세우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김홍집이 고종에게 바친 황준헌의 《조선책략》에도 프랑스의 천주교는 정사에 간여하는 데 비해, 미국의 ‘야소교’는 일절 그렇지 않아서 중국에서 ‘야소교 사람’은 하나도 살해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4)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성에 대한 이런 주장은 1895년에 간행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유길준은 천주교가 교(敎)를 위해 사람 죽이는 일까지 정당화하며, 많은 나쁜 일을 자행하는 이유는 죄의 사함을 받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천주교인이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천주교가 종교의 힘을 빌려 다른 나라의 토지와 국민들을 뺏으려는 반면, 야소교는 그런 해로움을 끼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5) 정교일치의 천주교와 정교분리의 개신교를 상정하고, 정교분리의 개신교 모델을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규범화함으로써 한편으로 종교집단이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여 종교집단에 대한 정부의 의구심을 없애고, 다른 한편으로 더 이상 위협적인 세력이 아닌 종교에 정부가 간섭할 필요성을 못느끼게 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정교분리는 종교집단과 국가가 서로의 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 각자의 고유 영역에서 최대한의 권력행사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인해 나타난 것이다. 만약 두 권력집단이 서로 충돌할 경우, 쌍방의 피해가 엄청나다고 예측된다면 어떻게든 두 집단은 이런 위험성을 사전에 방비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이 부각된 결과, 서구에서 강조되는 종교의 개인 내면성 혹은 사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는다. 개인적 종교신앙의 자유와 사적인 신앙 영역의 확보라는 측면보다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상호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시되기 때문이다.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종교집단의 특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서양 선교사들과 흥정을 벌이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모습은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물론 당시에 정교분리의 입장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감리교 목사였던 최병헌은 종교와 정치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종교가 정치의 근본임을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영역은 “인류의 지식이 미처 도달하지 못하는 곳과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관련되어 있는 반면, 정치 영역은 국가주권을 집행하고 운영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6) 최병헌은 국가주권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정치를 파악하는 한편, 종교가 쇠퇴하면 정치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종교가 바로 국가의 명맥이며, 정치의 바탕이라고 주장한다.7) 그에게 종교는 문명의 말(末)이 아니라, 문명의 본(本)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개신교가 종교의 모범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최병헌의 주장은 개신교를 통하여 한국의 문명화를 이루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관점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서구문명의 핵심을 개신교가 아닌 근대과학에서 찾는 입장이 확산되면서 약화되었고, 근대국가와 국교(國敎) 체제의 양립이 한국 사회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면서 주변부로 밀리고 말았다.

한국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정치세력과 종교세력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판 같은 성격이 강하였다. 여기서 정치세력이란 급격하게 쇠약해간 조선정부이기도 하고, 그것을 대체하며 새롭게 통치 기반을 넓혀가야 했던 조선총독부이기도 했다. 한편 종교세력이란 개신교와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선교사 중심의 종교집단이었다. 조선 정부는 흔들거리는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든 안정시키기 위해 정교분리의 원칙이 필요했으며, 조선총독부는 순조로운 통치의 바탕을 만들기 위해 서양 종교세력과의 마찰을 바라지 않았다. 종교세력은 통치세력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지 않아야 하며, 그대신 통치세력은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과 특권을 보장해 준다는 상호 불가침의 ‘신사협정’이 바로 한국의 정교분리 원칙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서양의 종교세력이 아닌 종교집단의 경우 정교분리 원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이다. 불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만해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에 주목하는 것은 그 좋은 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3. 만해 한용운의 정교분리원칙

1) 사찰령 이전 한용운의 입장

쓰여진 것은 1910년이지만 1913년에 출판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정교분리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한용운이 그 책에서 강조한 내용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때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8)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자율성과 그를 위한 불교의 쇄신을 주장한 것이다. 한용운은 불교의 자율성 획득을 위해 요청되는 혁신적 변화의 내용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였다. 그 중에는 승려의 교육과 참선방법의 개혁, 염불당의 폐지, 포교의 적극화, 승려의 생산노동 장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것은 승려의 결혼에 대한 그의 주장이었다. 한용운은 승려의 결혼을 금지한 계율이 특정 상황에 따른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강조하며, 이제는 이 계율을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옛날에는 금지하는 계율로서 부처님을 받들었지만 지금은 그 계율을 해제하며 부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9)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알맞게 불교도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승려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들고 있는 근거는 4가지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인구증가가 국가의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점, 그리고 불교인구의 증가가 포교 확산에 절대 필요하다는 점이다.10)

한용운은 자신의 불교 쇄신책에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정치의 힘을 빌려”11) 승려의 결혼 허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나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처음에는 1910년 3월 중추원(中樞院) 의장 김윤식에게, 그리고 두번째에는 같은 해 9월 당시 통감이었던 데라우치에게 승려의 결혼을 금지하지 말고 승려 자유에 맡겨 주도록 절실하게 간청하였다. 특히 첫번째 건의문인 〈중추원 헌의서(獻議書)〉는 당시 한용운이 어떤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인간계의 일은 변화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한번 정해진 채 변화할 줄 모른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존재를 오늘날처럼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금하는 법이 한번 바뀌어지면 공적으로는 식민(殖民)을 하는 것이고, 사적으로는 교세를 보존하는 것이 되어 타당하지 않음이 없사온데 무엇을 꺼려하여 고치지 않을 것입니까?12)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용운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모든 것이 ‘문명’의 방향으로 ‘진화’해 가는 시대13)에 오직 불교만이 정체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 것은 바로 불교의 자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에 걸쳐 정부에 승려의 결혼을 합법화하라고 요청한 그의 건의문도 시대에 맞도록 불교를 개혁하여 불교의 ‘자유성’을 얻기 위한 방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의 힘을 빌려 불교의 개혁을 도모할 정도로 ‘새로운 불교’에 대한 그의 바람은 절박하였다. 이렇듯 사찰령 반포 이전에 한용운의 주요 관심은 불교를 변화시켜 불교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고, 중앙 통제체제를 정비하여 불교의 자율성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힘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찰령의 반포 후, 한용운의 이런 입장은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된다.

2) 사찰령과 한국불교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한 것은 1911년 6월 3일로서, 한일합방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는 사찰령과 같은 불교사찰의 관리작업이 합방 이전부터 진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1902년에는 불교 사찰을 관리하기 위해 정부 내에 관리서(管理署)라는 기구를 두고, 서울 동대문 근처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적인 수사찰(首寺刹)로 삼는 한편, 전국 16개 사찰을 도내의 수사찰로 하여 2년여를 진행하다가 폐지하였으며, 1906년 11월에는 통감부가 한국사원 관리규칙을 발표하여 한국 사찰이 일본 승단의 관리를 요청할 수 있게 만들었다.14) 그래서 1911년의 사찰령은 이런 일련의 사찰 관리책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찰령의 요점은 사찰의 이전, 합병, 폐지와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사찰의 주요 재산을 처분할 때, 또한 사찰의 중요 법규를 정할 때 조선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사찰을 통상의 목적 이외에 사용할 때 지방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찰령의 내용은 정부가 불교 사찰의 관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와 같은 불교 사찰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필요했던 것일까?
우선 불교집단이 정부에 대한 저항 거점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여 근본적인 봉쇄조치가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종교집단의 세력은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정부의 공권력과 사사건건 대립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교의 경우에는 세력이 고립 분산되어 있어 강력한 세력기반이 마련되기 힘들었지만 처음부터 그럴 잠재력이 없다고 무시할 수 없었다.

사찰령을 통해 불교의 정치개입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15) 두번째로 당시 불교신자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공권력의 보호를 받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불교가 공공연하게 핍박받아 온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찰령에서 제시된 정부의 불교 간섭을 그들은 오히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 개입은 공권력을 통해 불교를 보호해 주고, 강화시켜 준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찰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본 불교도의 주장이 당시 일부 신자에게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일천 개가 넘는 사원과 이만 명이 넘는 승려들은 상당한 보호를 받고, 그 지위를 인정받아, 공공연하게 교화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16)

그 동안 소외되었던 경험을 보상받기 위한 불교도들의 노력은 사찰령 이전에도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졌다.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이 일본 승려의 건의로 해제되자 한국의 불교신자들은 일본불교의 힘에 대해 경의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불교와의 연합을 통해 한국불교를 강화시키려는 시도가 계획되었다. 이회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원종(圓宗)이 일본불교와 합병을 계속 시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불교와 합병을 통해 그 동안 조선불교가 당해 왔던 서러움을 털어 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원종에 대항하여 1911년 1월 새롭게 만들어진 임제종이 바로 그 도전 세력이었으며, 한용운이 그 실질적 지도자였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강조하며, 일본불교에 합병하려는 이회광의 원종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사찰령이 발표되어 원종과 임제종의 활동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한용운은 다른 방식으로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찰령에 대항하는 그의 정교분리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3) 한용운의 정교분리론

조선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사찰령이 반포되었다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은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폭로되었다. 3·1운동의 주모자로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던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를 지어 조선이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밝혔다. 여기서 그는 조선총독의 정책을 비판하며, “어느 나라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없거늘 조선에 대해서만은 유독 종교령을 발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17)고 사찰령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 6월에 결성된 조선불교청년회와 1921년 12월에 창립된 불교유신회 운동은 한용운의 이런 노선을 이어받아 사찰령의 개폐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1922년 4월 승려 2,300여 명이 서명하여 총독부에 제출한 건백서(建白書)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건백서는 사찰령으로 인한 조선불교의 왜곡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부터 14년 전에 30본사(本寺)로써 조선불교의 구관소(句管所)를 제정 시행한 후, 금일까지 공연히 본사 주지된 자에게 권위와 세력만 배양할 뿐이오. 내용의 교체(敎體)는 파열(破裂)하여 남은 것이 없고, 외식(外飾)의 교당은 도명(塗名) 허설(虛設)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선불교는 추운(秋雲) 참무(慘霧) 중에 침재(沈在)한 것이 반드시 심상사(尋常事)로 방치키 불능(不能)한 것이니다.18)

서명 승려들이 조선불교의 현상(現狀)이라고 지적한 3가지 중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본사 주지의 정치적 야합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

각 본사 주지는 당국과 밀접한 관계가 유(有)함으로써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고 세력을 뢰(賴)하여 위로는 교활한 수단으로 당국의 권위를 가(假)하고 밑으로는 신간(辛揀)한 방법으로 농락하여 일반 승려에 향(向)하는 등 기괴(奇怪)의 행동을 진(盡)하여 불교발전의 도(道)는 불고(不顧)하고 세력의 쟁(爭)으로 사(事)를 삼고 사복(私腹)의 충용(充用)을 업(業)으로 삼아 마침내 오늘과 같은 꼴불견을 보이게 이른 것이다.19)

이와 같이 사찰령의 문제점을 지적한 서명 승려들은 30본사 제도를 변혁하고 조선불교의 통일기관을 조직하여 불교의 자립과 자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 사찰령이 불교와 정치의 유착을 조장하여 불교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가 한용운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20) 사찰령의 정교 야합에 대한 고발에는 한용운이 정교분리론이 저변에 깔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30년대이다. 그는 1931년 불교청년 총동맹의 사명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정교분립의 달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정교분리를 광의와 협의로 나누고 사찰령으로 인한 조선불교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서 정·교 분립이라 함은 정치와 종교의 원리적 비판으로부터, 일반의 정치와 일반의 종교의 엄격한 본질적 분립을 말함이 아니요, 조선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특수한 정치적 간섭 즉 조선 사찰령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협의적 의미의 정·교 분립은 결코 불가능이 아니다. 그렇다고 관념적으로 용이하게 볼 수도 없다. 가능·불가능은 다만 승려의 자각 여부에 있을 뿐이다. 조선불교에 한하여 사찰령을 적용하게 된 것은 조선 승려의 자치력 부족이 큰 원인이라 한다.21)

한용운이 이른바 좁은 의미의 정교분립에 초점을 맞춘 것은 글의 대상이 불교청년 총동맹이란 특수한 단체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쓰여진 〈정·교를 분립하라〉라는 글에서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정·교 분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한용운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보조할 수 있는 것이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는 국가를 본위로 하는 사무적 행위니 인민의 표현행위를 관리하는 것이요, 종교는 지역과 족별(族別)을 초월하여 인생의 영계(靈界) 즉 정신을 정화 순화, 즉 존성화(存性化)하여 표현행위의 근본을 함양하며, 안심입명의 대도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인위적 제도로써 제한 혹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그 성질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인류의 정신계를 영도하느니, 지역적이고 단명적인 인위적 제도 즉 정치로써 종교를 간섭한다는 것은 향기로운 풀과 악취나는 풀을 같은 그릇에 담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조화를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에게 불행한 결과를 줄 뿐일 것이다.22)

이 글에서 한용운은 국가 유지를 위해 인민의 표현행위를 관리하는 인위적인 것으로 정치를 파악하는 한편, 종교는 시·공간 및 지역과 국가 단위를 초월하여 인류 전체의 정신계를 영도하는 것으로 대조적인 파악을 한다. 그가 이렇게 정치와 종교의 차이성을 역설한 것은 양자 사이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정치가 종교에 간섭할 수 없음을 “종교는 신성불가침이다.”23)라는 말로 강조하였다. 종교의 불가침성은 종교성이 인류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모든 나라의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종교성은 만유(萬有) 통유(通有)의 존재요, 종교의식의 행사는 표현동작의 필연적 현상이니, 이것이 어찌 인위적 제도로 좌우할 바이리요. 종교는 신성불가침이다. 정치와 종교는 근본으로부터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니, 종교는 정치를 간섭하지 않고, 정치는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는 것이니, 종교분립의 의미에서 각국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허(許)하였다.24)

이와 같은 정교분리의 당위성을 바탕으로 하여, 한용운은 사찰령이 이 기본 원칙에 대한 심각한 침해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사찰령이 얼마나 조선불교 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폐해에 폐해를 더하여 조선불교는 다른 종교와 일반 사회로부터 ‘관제(官製) 불교’라는 지칭을 받게 되는 동시에 특수 감정을 가진 조선 대중으로부터 점점 소격하게 될 우려가 있으니, 이것이 조선불교의 큰 불행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고 보면 사찰령은 이론에 있어서 정·교분립의 원칙에 위배되고, 현실에 있어서 조선불교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니 어떠한 의미로든지 존속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25)

한용운은 사찰령이 조선불교의 자치력 결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또한 조선불교의 ‘자치적 통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사찰령으로 인한 정·교의 혼란이라고 여겼다.26) 그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불교의 자치력을 제고(提高)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승려의 자각이라고 보았다.
객관적 정세에 있어서 정·교가 판연히 분립하지 아니함이 조선불교 통일에 대한 특례의 지장이 되지만, 그것보다도 승려의 자각이 부족한 것이 불교 통일에 대한 요소가 되는 동시에 정·교의 혼란을 순치(馴致)한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다.27)

그렇다면 승려의 자각을 통해 해 나가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불교에 통제적 규율을 세우고 유기적 통어작용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한용운은 이런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언제나 올바른 사회가 만들어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즉 2인 이상의 공동 조직체에는 반드시 통제적 규약이 있는 것이니, 사회라는 것은 아무리 중인(衆人)이 군거(群居)하고 있더라도 공동 조직체가 아니면 사회가 되지 못하는 것이요, 공동 조직체가 되더라도 통제적 규율이 없으면 완전한 사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28)

한용운은 조선불교에 이와 같은 통제적 규율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불교는 진정한 지도원리와 실행이 없게 되었고 급기야 고립분산적으로 되었다고 평가한다. 즉 “정치압제하에 대단결의 통일적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 조선불교는 자연히 지리분산하여 사사(寺寺) 고립하게 되었으므로, 불교의 교정(敎政)이라는 것은 사찰 본위의 교정이 되고 말았다.”29)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조선불교를 통합적으로 지도하고 규율화할 수 있는 장치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사찰의 통일이라 함은 물론 정·교를 완전 분립하여, 사찰제도의 조직방법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여 완전한 통일을 꾀하는 것이 최고(最高)의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최고 목적을 달하기 전에, 그 과정에 있어서 현재 사찰 제도 위에 불교의 최고기관을 설치하여 일정한 규약하에서 일치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편법이 될 것이다.30)

한용운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대안은 우선 31본사 제도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본사를 통합할 수 있는 최고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른바 총본산 제도가 그것이다. 그는 이 제도를 만드는 데 총독부의 승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총본산에 대해서는 행정 당국의 인가를 맡아야 한다는 법령이 없으므로 불교도로서 인가를 신청할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행정당국에서 그러한 신청을 수리할 권리도 없을 것”31)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은 조선총독부의 불교 자주성 침해에 대항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한편으로 종교의 보편성과 시·공간적 초월성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정치의 한계성과 인위성을 강조하였다.

종교와 정치의 이런 근본적 차이성은 양자 사이에 간섭이 불가능함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으나, 보다 초점이 두어진 것은 종교의 신성불가침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물론 정치가 종교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종교의 하위범주인 불교에 정치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결국 이런 일련의 논리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 조선불교의 숨통을 옥죄고 있으므로 이를 폐지해야 조선불교가 살아날 것이라는 입장을 강력히 전달하고 있다.

4. 결론

한용운의 일관된 사상은 조선불교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유신(維新)’이라고 부른 전면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그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요구하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32)라는 그의 유명한 구절은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33)는 그의 주장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가 이토록 불교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여태까지 불교가 스스로 자율적인 삶을 누려오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불교의 자율성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를 한용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인류의 자유성(自由性)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자존성(自存性)이다. 첫째 자유성이야말로 모든 인류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자유는 만물의 생명” 혹은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같다.”34)란 말로 표현한다. “인간생활의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는 것으로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아까워할 것이 없으니 곧 생명을 바치라고 해도 사양하지 않을 것”35)이라는 것이다.

이럴진대 만약 조선불교의 자유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불교신자들의 인생은 아무런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둘째 한 민족이 다른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36)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조선불교는 자존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과 자치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자율성을 행사하도록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은 바로 조선불교의 이런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종교의 신성불가침성과 초월성, 그리고 정교분리론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비록 그가 주장하는 종교의 초월성은 기독교와 같은 현세이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의 천당이며, 이 세상 속의 신생활”37)이지만,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정치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은 천주교와 개신교 등의 서양 종교세력과 정치세력 사이의 불가침 협정과 같은 통상의 정교분리론과 달리 사찰령으로 침해받은 조선불교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마련되었다. 그의 불교적 관점은 민족주의적 범위를 넘어서는 것38)이었지만 민족 자존성의 보편적 성격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통한 민족 자존성 회복에도 적극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교분리론은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대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조선 민족 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인간의 자유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정치와 종교의 간섭 배제를 거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점으로 말미암아 앞으로도 한용운의 사상은 끊임없이 반추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장석만
서울대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종교학박사. 현재 한국종교연구소 연구원·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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