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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적 시각으로 본 미국 테러 대참사 / 송위지
[8호] 2001년 09월 10일 (월) 송위지 한국외대 인문학 연구소 연구원

I. 인(因)의 장

세계 유일의 최강국 미국이 테러를 당했다. 세계 제일의 무력을 상징하는 미국 펜타곤의 한 귀퉁이가 뭉개지고,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먼지로 변했다. 이번 테러는 가히 엽기적이었다. 비행기가 건물을 빠른 속력으로 들이받고 그래서 100층이 넘는 건물이 무너지고 그 건물에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잠시 동안에 불과했지만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미국의 대통령이 테러의 위험 때문에 백악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들으면서 테러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문제로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테러 사태를 놓고 전문가들은 이른바 ‘문명의 충돌’을 말하기도 하고, 일부 극렬 테러리스트의 만행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것도 무고한 대규모 살상을 예상하면서 아니 그것을 목표로 테러를 감행했다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종교적 신념인가, 정치적 신념인가. 도대체 그런 것들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일까.

이번 참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반응 또한 마음을 무겁게 한다. 겉으로야 비극적 참사 운운한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테러 영화나 조폭 영화에 노출되고 길들여진 탓인지 그저 영화보다 영화 같다는 식으로 무덤덤해 하거나 미국의 강대국 우월주의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하여튼 이번 테러는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테러를 당한 미국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조그만 나라의 지극히 평범한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준 테러는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느 해 어느 날 아마 8세기말이나 9세기 정도로 해둬도 좋을 듯 싶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의 고향인 중동(Middle East) 어느 조그만 한 촌락에서 각기 다른 유일신을 믿는 아이 둘이 싸우고 있었다. “내가 믿는 신(God)은 이러이러해서 위대하다. 네가 믿는 신은 이러이러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신이 너희들의 신보다 훨씬 위대하다. 너희가 믿는 신은 없어져야 한다.

물론 너희들도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싫으면 너희들도 내가 믿는 신을 믿어라.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같이 싸우던 아이가 말했다. “웃기지 마라. 나의 신만 절대적이다. 너의 신은 나의 신보다 못하다. 전지전능한 나의 신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파멸하고 말 것이며, 만일 너희가 파멸하지 않으면 나라도 너희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나는 너희와 십자군전이나 성전(聖戰)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어른이 한쪽 아이의 편을 들면서 “이 아이의 신이 옳다. 너의 신은 능력도 없고 못되었다. 너는 그런 신을 믿는 걸 보니 어리석고 못되었구나.”라고 말하면서 한 아이를 꾸짖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그만 아이들의 싸움이, 1,000년이 지나는 동안 십자군 전쟁과 팔레스타인의 강제 이주와 이스라엘의 강제 정착 등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는 걸프전으로1) 그리고 서기 2001년 9월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서 수천 명을 죽이는 일로까지 전개되어 왔다.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만큼의 힘도 안 될 어린아이들의 싸움이 1,0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한쪽에서는 가슴이 철렁하고 보는 이들 모두가 경악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 참담한 사태를 보면서 환호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을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라고 하는가? 무엇이 이렇듯 미증유의 악랄한 일을 만들어 냈을까? 어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이리도 잔인해질 수 있을까? 또 이 일의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심연(心淵)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러한 생각이 도사릴 수 있도록 한 환경과 역사와 문화는 무엇일까?

2. 연(緣)의 장

세계는 얽혀 있다. 미국의 재채기가 한국의 독감이 되는 그런 일방적인 얽힘만이 아니라 한국 산사(山寺)의 선수행(禪修行)이 하바드의 한 젊은이를 서울의 화계사로 끌고 올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인의 심성에 조그만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미얀마나 스리랑카 같은 가난한 나라의 상좌부 불교가 가톨릭이나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유럽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상징적인 건물의 붕괴는 바로 그 다음날 한국 증시의 대폭락으로 이어졌고, 증시의 대폭락은 기업들로 하여금 신규 채용을 할 수 없도록 하여 직장을 원하는 젊은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정 부분 빼앗아 가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국에서 나서 한국에서 곱게 자란 젊은이가 왜 8세기말이나 9세기말쯤에 시작되었을 두 어린이의 종교갈등의 희생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치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의 섭리?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신의 섭리가 맞는다면 테러로 희생된 이들에게도 신의 섭리라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시간의 흐름을 타고 도미노적 사건의 모습으로 이어진 연기(緣起)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슬람이라고 하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 왜곡돼왔던, 이슬람인들의 말대로 한다면 ‘서구식 교육에 의해 편견으로 가득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다. 사실 그 동안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슬람이 홀대되어 왔다.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을 마치 이슬람 사상의 압권인 듯이 소개하며 이슬람이 마치 폭력에 근거한 종교인 것처럼 알리는 데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주저하지 않았었다.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적어도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의 제도권 교육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만을 심어주려 발버둥쳤던 것이 아니라 서양종교 즉 기독교와 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종교 역시 홀대해 왔다.

언론 역시 그 동안 이슬람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소홀했다기보다는 그들도 교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동안 이슬람을 홀대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이슬람에 대한 특집을 마련할 때에도 대부분 여성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마구 죽이는 듯한 내용으로 일관해왔으며 영국에서 제작된 ‘파키스탄의 퍼더’ 같은 폭력적인 것이 이슬람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줘서 마치 이슬람이 폭력을 일삼는 집단처럼 인식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테러 사태 직후 한국의 이슬람인들이나 이슬람 전공자들은 이슬람이 평화 지향적인 종교임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사실 그들의 의견에 동조나 하듯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일부 서구인들 역시 일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이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듯이 보이는 사건이지만 이번 테러는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리는 데에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각 언론에서 이슬람을 취급하는 것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그 양이 많아졌으며 비교적 공정하게 보도하고 미국의 무력 보복에 대해 금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신문도 있다.

이렇듯 이슬람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보면서 지워지지 않는 의구심은 지금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에 의한 폭력과 금번 테러를 환호하는 이슬람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과연 있는가 하는 것과, 비록 일부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긴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그런 폭력을 제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에서의 테러가 있은 후 많은 이슬람인들이 환호를 하고 거리를 나와 퍼레이드를 벌였다고 한다. 분명 순간적으로 적에게 응징을 가했다는 심정으로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비된 이성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노력이 이슬람 내부에서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안타깝다. 환호를 하고 퍼레이드를 하고 또 일시적인 승리감에 도취하여 즐거워했을 그들에게도 분명 생명체로서 생존권과 인권은 있겠으나 남의 죽음을 보며 환호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나 정치인의 태도 역시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지속적으로 미국과 반목을 하는 이슬람인들이 생겨나면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미국을 응징하고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들은 왜 종교적 아량으로 기도하고 용서하자고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들 스스로 이슬람은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한 이중성을 지닌 행동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이슬람은 영원히 폭력적인 종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막을 내린 영토 제국주의 이후―사실 이전에도 이슬람은 그런 경우를 많이 보여주었지만―이슬람이 보여주고 있는 팽창적 행위에 대해 이슬람은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을 필히 해야 한다.

테러 사태가 발발한 후 한국의 국회의사당에서는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희생자를 위한 추모 예배가 있었다. 물론 필요한 예배였다. 미국 도처의 교회에서도 그런 추모 예배는 대대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예배에서 만에 하나 아니 눈곱만큼이라도 이슬람을 믿는 테러리스트들과 이슬람이라고 하는 종교에 대한 미움을 표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예배는 이미 예배하는 이들이 믿는 신이나 예수님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많은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들은 과연 스스로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아야지 응징에 힘을 실어주는 어떠한 기도도 해서는 안 된다.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과는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힘과 힘으로만 뭉쳐진 제국주의와의 싸움이었고 그 제국주의가 소멸되니 또 싸워야 할 대상 역시 사라졌지만 이는 제국주의와의 싸움이 아니다. 종교와의 싸움이다. 테러리스트나 테러 집단을 없앤다는 이름으로 단순히 몇 명을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핵무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욱 아니다.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을 굴복시키고 인도를 해방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당시 인도 내부의 게릴라나 독립군이 아니라 간디의 평화로운 비폭력 투쟁이었다는 것을 추모 기도회에 참석한 이들은 명심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전통 사찰에 불을 지르고 법당의 탱화를 찢고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고성으로 그것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아주 무시하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조상을 모시는 차례를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는 것과, 미국에서의 테러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테러라는 측면으로 봐서는 똑같은 이치라 아니 할 수 없다.

특정 종교만을 위해서 세상이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미국에서의 테러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르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자신만을 위해 달라는 그런 위험한 생각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의외로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종교라는 결론에 이르면 사실 허망해지기까지 한다. 종교,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은 분명 미국과 미국을 동조하는 국가들과 이슬람권에 존재하는 테러 단체들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유일신을 믿는 종교간의 갈등이라는 확신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싸움의 기저에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이슬람 신도 중 극히 소수의 테러리스트만이 아니라 두 종교를 대표하는 ‘유일신(the Only Lord)’이 버티고 있다. 그 유일신에 현혹된 이들이 누구이든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결과가 초래되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 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종교 문화적 자의식은 문화적 제국주의의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치적 힘과 자본을 포함한 동원 가능한 모든 힘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결코 놓지 않으려 노력해 오고 있는 흔적을 너무 많이 드러내고 있다. 이런 흔적들은 주요 피해 당사자였던 이슬람의 결속을 가져오고 그래서 일부 친서방적인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미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종교에 의한 참담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3. 해(解)의 장

평화는 의외로 쉽게 올 수 있다. 하나만 깨닫고 실천하면 될 것이다. ‘홀로 존재하고 혼자만 인정받아야 하고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만 난다면 평화는 당장이라도 올 수 있다. 이런 ‘홀로 존재하고 혼자만 인정받아야 하고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다. 연기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일러준다. 적어도 평화적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 유일신으로 출발하는 것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출발점이라 한다면 연기는 불교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의 하나이다. 이런 불교의 정체성을 말하는 연기를 설하는 부처님의 태도에서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수밖에 없는, 필연적으로 뛰어날 수밖에 없는 면을 보여준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은 여래(如來)가 세상에 나거나 (出世) 세상에 나지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분별 연설한다.(《잡아함》 권12)

이 얼마나 종교의 교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겸허함의 극치인가? 어디 이런 교주의 겸허함을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교주가 이렇게 겸허하다는 것은 바로 그 종교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일어나지 않을 때 저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의 이것(此, this)은 무엇이고 저것(彼, that)은 무엇일까? 이것이 나라고 한다면 저것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주체라고 한다면 저것은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감각으로 느껴지든 또 그렇지 않든 모든 객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기독교라고 한다면 저것은 불교나 이슬람교, 그 밖의 또 다른 종교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공간적으로 더불어 있다.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다. 미국에서 파괴된 건물과 한국에 있는 나는 과연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히말라야의 조그만 눈덩이가 굴러서 그것이 커지고 또 커져서 산사태를 이루는 것이 서울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역으로 도착하는 지하철의 바람이 히말라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카오스(chaos)를 생각할 수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의 공통적 특징은―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강압하기 위해―카오스에서 시작하되 그 카오스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태초에는 혼돈과 어둠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입을 딱 벌리고 있을 심연(深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혼돈과 어둠을 지나 그들이 믿는 절대자에 의해 우주는 생겨났으며 어느 순간부터 인간도 바퀴벌레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혼돈의 개념이 지금까지 폭력적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에서 말하는 오직 야훼(여호아)만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야훼의 유독성(唯獨性)의 문제와 코란이 말하는 알라의 유일 절대성의 충돌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야훼의 유독성이란 야훼만이 천지를 창조하였으므로 야훼 이외의 것에 대해 신격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신격화된 세계나 우상화된 물질이나 인간의 제도적 억압의 손아귀에서 인간을 구출하심으로써 세계를 비신화화하고야 마는 사실을 야훼는 천명했다. 그러면서 예언자나 그 밖의 여러 사자(使者)들을 통해 야훼 한 분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부단히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코란에서 말하는 알라의 유일 절대성은 코란의 제1장인 개경(開經)에 잘 나타나 있다. 개경에는 “자비롭고 지혜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Allah, the Beneficent, the Merciful)”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알라의 절대성과 코란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슬람 교리에서 알라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래에 이르는 영원한 존재이며 전지전능하며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라는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만 인간은 알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즉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며 시간적이거나 공간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도 피조물로서 창조자에 대한 유추를 전혀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알라는 사람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자이기 때문에(코란 제30장 27절) 인간과는 수직적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위에는 알라가 아래에는 인간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한없이 깊은 단절, 무한한 거리가 있어 절대 불가지(不可知), 절대 불가시(不可視), 절대 불가촉(不可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서구 사회의 이슬람에 대한 콤플렉스를 들 수 있다. 소위 9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이슬람 전성기는 이후 서구 사회에 선진 기술을 일러주었고 그 결과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오늘날처럼 서구가 지구촌의 주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아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서구 사회는 이것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서구사회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이렇듯 종교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류의 불행의 시초가 있었던 것이다. 우주는 아니 지구는 하나인데 이렇듯 스스로가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전지전능하여 이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고 믿고 생각하다 보니 신(神)을 가지고도 싸우고 신(神) 이외의 것을 가지고도 싸우고 싸움에 싸움이 연속되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관찰해보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000년 전의 조그만 아이들의 싸움이 세계사의 전쟁의 항목을 짙게 도배하는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지하드(聖戰) 등 각종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쳐―현대의 팔레스타인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강제로 건국한 것과 1990년대의 걸프전을 포함하여―오늘의 테러 사태를 만들어낸 종자가 된 것이다. 실로 1000년 수백년 전의 어린아이의 싸움이라는 날갯짓이 태풍처럼 커져가고 있다. 이런 폭력의 시간적 점증성(漸增性)을 극복해야 한다. 폭력의 시간적 점증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식(意識)의 다양화 등이 요구되며, 그 기저에는 항상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 현상을 바로 보는 안목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도 상호 상관관계에 있다. 이번 미국의 사태는 홀로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번 테러 사태가 그 원인이고, 테러 사태는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지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박이 그 원인 중의 하나이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천년 동안이나 나라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라를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강제로 팔레스타인 백성들을 살던 곳으로부터 쫓아낸 것이 그 원인이고, 그 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 편만 들고…….

사태 발생의 조건을 없애야 테러나 반목도 없어진다. 미국의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신의 섭리를 논한다면 그 신은 너무 잔인하다. 그곳에 이미 신은 없었다. 오로지 신을 빙자한 폭력만이 있었던 것이다. 광야를 떠돌며 구원을 기다리는 힘든 이들을 겸허하게 가르치고 이끌었을 예수나 마호메트의 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나 마호메트는 결코 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 둘이 아닌 이들을 인간이 스스로의 잣대로 둘로 셋으로 또 더 많은 숫자의 절대자들로 만들지 않았는지 반성을 해야 한다. 이러한 반성만이 교활하게 역사의 이면에 숨어서 폭력을 만들어내는 상호 폭력성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지금 미국과 이슬람의 문제처럼 보이고 있는 이 문제는 미국과 그를 따르는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든 인류의 문제이다.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힘이면 다 될 것이라는 힘 우선주의는 결국은 자신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불교를 공격할 때 가장 많이 써먹는 무상의 도리를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무상의 법에서 미국 또는 그를 추종하는 많은 기독교 지향적인 국가들은 미국의 힘이 영원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현재는 미국이 가장 힘이 강한 나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그 자리를 다른 나라에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파괴된 세계무역센터 건물의 덩어리에서 충돌의 연기(緣起)와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건물이 없어지는 과정을 통해 무상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치를 배워야 한다. 만일 미국이 그것을 바로만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진정 겸허한 나라가 된다면 미국은 더욱 성숙해져서 진정으로 초일류 국가가 되고 누구나 동의하는 권위를 지닌 지도국이 되어 많은 무고(無故)한 자국 시민들의 죽음을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테러가 아닌 가치 있는 죽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미국이 초일류 강대국이 되고자 한다면 원수를 원수로 갚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옛말에 때린 사람은 꾸부리고 자고 맞은 사람은 허리를 펴고 잔다고 했다. 하지만 이도 꼭 바른 말은 아니다. 맞은 사람이 항상 허리를 펴고 자는 것은 아니다.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을 원망하면 결코 허리를 펴고 잘 수 없다. 맞은 사람이 허리를 펴고 자려면 때린 사람을 용서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굳이 이렇게 마음에 새기면
그 원한은 끝내 그치지 않으리라.
人若罵我 勝我不勝
快意從者 怨終不息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렇게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그 원한은 마침내 그치고 말지니라.
人若致毁罵 彼勝我不勝
快樂從意者 怨終得休息

이 얼마나 명쾌한 해결책인가? 새무엘 헌팅턴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놓고 양자간에 벌어지는 대립을 해결해야 한다. 이슬람이 이슬람으로 남아 있는 한(그렇게 될 것이다), 서구가 서구로 남아 있는 한(상대적으로 불투명하다) 두 거대 문명이 생활방식을 놓고 벌이는 근본적인 갈등은 지난 1,400년 동안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이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규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견해 역시 지나치게 서구적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자존심이 무척 상할 것이다. 하지만 15세기 콜롬부스라는 항해가의 마음에서 일었던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이 오늘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미국이 있게 했다는 연기(緣起)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콜롬부스가 중세 기독교회의 권위에만 추종했다면 적어도 아메리카 대륙은 더 늦게 서양에 알려졌을 것이다. 원한을 원한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성숙함이, 진정한 용기가 미국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연기(緣起)에 입각한 사고로의 회귀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만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그 돈으로 구호식량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다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고아들을 2000명만이라도 미국으로 입양해서 키워 준다면 이슬람에 대한 환상으로 어쩔 수 없이 정신적 궁지에 몰려 테러를 사주하거나 저지르는 이들은 이슬람 사회에서도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미국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슬람인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슬람은 결코 폭력의 종교가 아니라고 많은 이슬람인들은 강변한다. 하지만 그 동안 이슬람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미국이나 소련 등 외세의 핑계를 대면서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저질렀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들 스스로 자기정화의 능력이 없다면 그 또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극히 소수의 급진적인 이슬람들만이 테러를 행하고 있다고 하는 말은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불교 사원인 보로부드루 사원이 파괴되었던 일, 탈레반들에 의해 부서진 바미얀의 석불,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 일자리를 주는 일부 중동 국가들―그 때문에 쿠웨이트나 바레인으로 가정부의 일을 떠나는 많은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이 강제로 이슬람을 믿는다―이런 일에 대해 이슬람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종교가 용서를 하지 못하고 보복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고 폭력 그 자체인 것이다.

원망으로써 원망을 맞서면
끝내 원망은 그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쉬나니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法)이다.
不可怨以怨 終以得休息
行忍得息怨 此名如來法

《법구경》의 5번째 구절처럼 진정한 종교라면 설사 1,000년이 넘도록 싸웠더라도 화해의 악수를 하고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테러 희생자에 대한 이슬람 소녀들의 추모 행렬이나 부시 대통령의 이슬람 사원 방문을 보며 그나마 희망을 찾으면 인류의 미래가 너무 절망적일까?

4. 사족-또 다른 휴거나 종말론이 두렵다

10여 년 전 한반도를 광풍같이 휩쓸었던 그리고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던 사건을 든다면 단연 휴거 즉 공중들림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종말이 올 것을 예언하며 휴거가 오면 모든 재산은 소용없는 것이니 교회에 바칠 것을 강요하며 재산을 헌납한 이들에게는 구원의 특권이 지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이번 미국에서의 테러사건을 가지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운운하는 것도 이런 종말론자들이 혹세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된다.)

이런 종교현상의 원인에 대해 물론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사회학자나 종교학자들은 이 휴거라는 종말론적 이데올로기가 창궐할 수 있었던 원인 중 80년 광주에서의 동족간의 대량학살과 TV로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대량학살의 모습을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볼 수 있게 한 걸프전을 들고 있다. 평소에 유일신을 내세우며 지극히 과학적인 듯이 우기는 이들이 의외로 휴거와 같은 종말론에 쉽게 빠져든다.

미국의 테러 사태 역시 급속도로 돌진한 비행기,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 그 속에서 숨졌을 수많은 생명들, 이런 것들과 더불어 평화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세계 제3차 대전에 대한 불안감 등이 또다시 휴거와 같이 허무맹랑한 종말론을 들고 나오게 하기에 충분한 토양이 될 수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미국의 사태를 매개로 하여 어떤 다른 형태의 종말론을 가지고 또다시 혹세무민할지 모른다. 분명 제2 제3의 휴거론자들이 나와 자신들은 부를 챙기면서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고 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가장 수승한 대안은 합리적 사고의 회복이 될 것이며, 그 합리적 사고의 회복은 과학적 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이미 참이 아님이 검증된 전지전능성에 의존하면 또다시 정신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어떠한 것을 과학적 인식이라 할 수 있는가?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이 그 동안 변화해 온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만 알면’ 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연기(緣起)의 입장이다.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과학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갈 과학의 이면(裏面)에는 연기론적 사고가 항상 존재한다.■

송위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교육연구소 진(眞)' 소장·한국외국어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 <장아함 세기경과 팔리경전 비교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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