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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일상성과 소통을 위한 불교 / 조성택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27호] 2006년 09월 12일 (화)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우리에게 2002년 월드컵 이후 응원은 단순히 응원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물론 한국에서 학교 스포츠가 시작된 이후 집단적 응원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그 가운데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에서의 응원은 다채로운 소재와 함께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응원이 양교만의 ‘놀이’라는 참여의 제한성이 있기도 하지만 ‘문화’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드컵 응원에는 2000년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과 행동양식이 녹아있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태극문양을 그린 젊은이들만이 붉은 악마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흥겨울 수 있으면 누구나 붉은 악마였다. 월드컵 응원을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월드컵 응원에는 소위 W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그들만의 놀이가 아닌 열려진 참여가 있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일상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민주화 시대에 ‘광장’은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 잠시 확보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지만, 이제 월드컵 응원과 함께 일상적 문화공간이 되었다. 그곳에는 젊은이들만의 강렬한 개성이 있으면서도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를 뛰어넘는 광범한 소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놀이는 우리의 문화가 될 수 있었다.

불교문화-일상으로서의 불교

문화에 대한 정의는 대단히 다양하다. ‘문화’란 한편으로 사회적 제도를 포함하여 개인의 삶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삶과 관련된 인간의 여러 행위 가운데 특정한 영역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컨대 문화란 규범, 행동양식과 같이 다양한 행위의 근저에 있는 어떤 무형의 것들을 총칭하는 용어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와 같이 사회적 분화에 따라 구별되는 삶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일단 문화를 삶의 양식, 그리고 집단성과 집단 개성의 표현이라고 정의하자. 그렇게 볼 때 불교문화란, 다른 종교인들과는 다르게 불교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삶과 행동양식인 동시에 불교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유·무형의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있는데 불교문화는 없다고 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것은 우스개 소리이기도 하고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적 레토릭이지만 “불교에 문화가 없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대단히 비극적이다. 신체가 건강할 때 우리는 그 신체의 존재를 잊고 지낸다.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눈에 병이 들면 비로소 눈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문화도 그러하다. 불교문화를 얘기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징후가 된다는 얘기이다. 불교가 있으면 그 문화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문화를 운운한다는 것은 불교문화가 부재하거나 그 병의 정도가 심각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현대 한국불교에 문화가 없다고 하는가?

어떤 이들은 불교문화가 없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하여 국보급의 많은 유물들이 불교 전통에서 나온 것들이며, 사찰 건물과 탱화 그리고 불상 등 불교문화라 할 수 있는 유형의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부한 학술적 전통과 더불어 불교 고유의 의례인 예불, 발우공양 및 다양한 법요식 등과 같은 규범적 자산과 템플스테이, 단기출가 등과 같이 재가자들에 의한 다양한 신행활동은 그 자체가 포괄적인 범주의 불교문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불교문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불교에 문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일상성의 부재이며, 두 번째는 소통성의 부재이다. 불교문화란 불교인들의 일상적 삶과 행동양식이면서 동시에 불교 바깥과 소통하는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의 경험에서 제도화 되고 만들어진 유무형의 전통이 ‘문화’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에서 실천되고 일상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통은 다만 유물일 뿐이다. 불교문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유물을 문화로 착각하고 있는 현대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전통이 지금 여기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될 때 비로소 불교는 문화로서 불교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문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이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불교 바깥과 소통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불교에 있어 일상성의 부재

불교는, 아니 모든 종교는 일상적이지 않다. 종교적 경험은 일상적 경험과 구별되는 경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성이 담보되지 않는 종교는 종교라 하기 힘들다. 어쩌면 초월성과 일상성의 끊임없는 교차와 상호 긴장에서 종교는 인간과 사회에 그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가 초월성만을 강조할 때 그 종교는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을 억압하고 마비시켜서 폐쇄적이고 소수 독점적인 종교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든지, 혹은 일부 집단만의 컬트가 되어 반문명적이며 반사회적인 아편이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종교가 일상성만을 강조할 때 그 종교는 기껏해야 윤리적 강령 내지 교시이거나 철학의 아류에 불과하게 된다.

불교전통 안에서 초월성과 일상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점이 불교가 여타의 종교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불교는 이것을 불일불이(不一不二)라 한다. 다시 말해 초월성과 일상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구별되는 동시에 양자가 함께 ‘불교’가 보여주는 진리를 완성하게 된다.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이라 일컫는 것들은 대개 깨달음의 단계에서 체득된 초월적 경험이다. 고·무상·무아라는 삼법인이 그러하며 욕망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십이연기, 그리고 대승불교의 정점이라 할 공과 반야 그리고 유식(唯識)은 일차적으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가르침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초월적 가르침이 이제는 일상적 차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적 차원으로의 전환이란 의미는 범부들을 위한 낮은 차원으로의 하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경험이 일상적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일례로 불교의 키워드가 되어 버린 ‘무아’라든지 ‘공’ 사상이 일상적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어버린 세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이 본질적으로 ‘개인적’ 경험에 속하는 것이지만 일단 경험된 것은 사회적 역사적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무아’라는 교리는 일상적 삶 속에서 용서와 관용, 그리고 배려의 윤리적 바탕이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원적 세계질서추구의 이론적 근거로 다시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초월성과 일상성의 전환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다. 일상 경험은 초월적 교리의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식민지, 전쟁, 가난과 혁명 등 다양한 역사적 질곡을 겪어온 한국인들의 경험은 어떤 불교 교리에 대한 독특한 해석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개인이 삶의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불교해석의 원천을 제공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이천 오백년의 불교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에 있어 일상성 회복의 과제는 비단 교리 해석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수행의 일상성이며 신행활동의 세속화 문제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불교가 형성되었고 주요 교리가 만들어지던 시대와는 전적으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불교에 있어-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출가·재가의 구별은 적어도 교리적인 측면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 구분이 깨달음의 가능성 여부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톨릭 성직자처럼 신의 대리인은 더욱 더 아니다. 물론 불교 전통은 출가와 재가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차이를 다양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적어도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 전통의 현대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차이는 수행자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며 다분히 기능적인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이 불교가 국교인 일부 상좌부 전통과 구별되는 점이다. 물론 출가자에 따라 이 차이를 여전히 신분적 차이로 혼동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다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현대 사회에서는 재가와 출가의 그 기능적 차이조차도 최소화 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세속화 요구에 따라 출가자의 수행과 활동 범위는 재가자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수행은 거의 전적으로 출가자의 몫이었고 출가자의 행동반경은 산문(山門)을 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하지만 종교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요구는 물론이거니와 출가자들 자신의 사회참여에 대한 욕구 또한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출가자는 단지 복전(福田)이 아니라 사회봉사자로서, 환경운동가로서, 교수로서, 학교 경영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때로는 사회적 주요 현안에 대한 오피니언 리더로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출가자들은 수행의 공덕만이 아니라 세속 학문의 전문성과 세속 사회에 대한 준 전문가적 식견 또한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출가자의 사회참여를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수행을 통한 공덕과 세속적 전문성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초세속적 교리들을 일상의 세속적 담론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불교 본래의 이상과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세속 안에서 실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불교문화의 일상성으로의 전환 작업에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초월적 교리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속적 전문성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재가 불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재가자의 경우 세속사회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불교적 가치관과 연결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재가불교인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전문적 영역과 불교적 삶은 따로 존재한다. 그들의 전문성을 발휘하는 데에 불교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불교는 고달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안정제 역할일 뿐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종교 따로 삶 따로 인 생활 방식은 비단 불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의 전문적 영역 안에서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고도의 분업화라고 하는 현대사회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우선 불교의 초세속적 교리를 일상적 담론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진리라면 그 진리는 세속 바깥에서 그리고 산문(山門) 안에서만의 진리여서는 아니 될 것이며 일상적 세속적 삶의 현장에서 바로바로 구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구체적으로 실천 되는 것은 바로 선정(禪定)의 지혜가 세속의 지혜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될 경우에 그것을 우리는 불교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교리의 소통성 부재

불교의 불살생 교리는 그 이해와 실천의 수준에서 다양한 층위가 있다. 식물을 포함하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불살생을 베푸는, 절대적이다 싶을 만큼의 철저한 실천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인간에게만 적용하는 아주 느슨한 수준의 실천도 있다. 한편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실천이 있는 반면, 호국(護國)과 충성 혹은 더 큰 살생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가는 실천도 불살생의 이름 하에 행해져 왔다.

이와 같이 불살생의 교리는 공이나 무아와 같은 다른 불교 교리보다 훨씬 보편적 공감이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각 종파를 초월한 보편적 윤리 원칙으로 제시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불교 전통 안에서도 불살생의 교리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층위가 이처럼 다양한데 하물며 다른 전통과의 공감과 소통은 어느 정도나 가능할 것인가?

전통사회와 달리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사회적 공동선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타종교 혹은 종교 외적인 사회의 제 부문과의 협력을 위해 가장 주요한 것이 바로 소통의 문제이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또 불교든 한 종교의 교리가 오랜 발전의 역사를 통해 가지고 있는 내포와 외연을 생각하면 교리간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 점은 많은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이미 경험하고 있다. 예컨대 기독교 창조설과 불교 연기설의 갈등·대립은 식상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례에 속한다.

그런데 오히려 현안으로 부각되는 것은 종교 외적인 사회 부문과 종교 교리간의 소통의 문제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의 창조설과 자연 과학의 소통 문제는 고전적인 주제가 되었으며 불교의 경우 불교 교리와 사회과학의 소통 문제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거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가치관의 사회적 실현에 필요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획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소통을 위해서는 불교의 교리를 사회적 담론으로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의 불살생 교리와 연기론은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환경과 생태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교리이지만 그 교리들만으로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획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불살생과 연기의 교리를 일상적·세속적 언어를 통해 생태학의 담론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불교가 전통적으로 무시해왔거나 거의 다루지 않았던 사회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살사상, 무아론 등 다양한 교리를 거론하면서 불교에도 사회정의론이나 사회복지론 같은 사회사상이 있다고 강변해왔지만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교리를 담론으로 재구성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불교적 교리를 사회적 담론으로 재구성할 때 불교는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 바깥의 사회 부문과 소통할 수 있으며 그럴 때 비로소 불교는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는 문화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다. 문화란 곧 소통의 내용이며 소통의 양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의 경우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경우 근대화의 한복판에서 세속화의 과정을 이미 겪어 왔으며 기독교 바깥의 다른 세계와의 소통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과오를 범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기독교적 정신을 일상적 문화로 전환하는 일에 비교적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근대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어 그 극점에 달한 서구에서 동양 종교, 특히 불교에 관심이 급속하게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기독교 정신이 서구사회에서 일상적이며 세속적인 문화로 전환되었듯이 이제 불교가 급속하게 일상적 문화로 그리고 세속적 담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다. 불교 전통이 일천한 서구에서의 그러한 전환이 다소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전통의 무게 탓으로 쉽사리 그 전환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2006년 가을 겨울

조성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석사 : 인도철학), 미국 UC버클리대학원 졸업(박사 : 불교학), 전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현대불교학의 합리주의적 경향」「무아 : 불교의 정의관을 향하여」 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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