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1. 시작하는 말

무릇 우리가 위대한 철학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모두,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 무엇이며 그것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 이 세계 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위대한 사상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 나와 단 한 번 살고 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길일까 하는 관심은 일생 동안 저버릴 수 없는 화두이다.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원칙도 없고, 우연의 연속인 경우가 허다하지만, 바람직한 삶의 방향, 진리로서의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 또한 모든 인간들에게 본질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상, 철학들이 이 세계의 본질 및 바람직한 삶의 길에 대해 저마다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오랜 세월 동안 폭넓은 보편성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에는 그 이유가 있다.

이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계를 보는 눈뿐 아니라 나아가 실천적인 삶의 방향도 제시해 주고 있는 철학 중에, 서양에서는 칸트의 철학과 동양에서는 불교철학을 통해서, 이 양자의 존재론 및 인식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이 양자의 철학은 각기 어떠한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 및 미래에 과연 어떠한 철학이 이 세계의 존재 및 인간들에 대해 가장 적절한 이해를 보여줄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 인식의 대상

이 논문에서 칸트와 불교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글을 씀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 각 영역에서 양자의 사상이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양자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좋은 세계관 및 인간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칸트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인간관은 많은 점에서 상이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유사한 사고 기반을 지니고 있다. 우선 존재, 대상 개념을 통해서 양자의 사상의 유사점 및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칸트에서 현상으로서의 대상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은 엄밀하게는 서양철학에서 유래한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 자체는 한자어이지만, 이것은 서양의 말, philosophy, Philosophie를 번역한 용어로서, 고대 그리스어 philia(우정, 사랑)와 sophia(이해, 지식, 통찰, 지혜)를 합성함으로써 생겨난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철학이라는 말은 ‘지식 및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식 및 지혜에 대한 사랑’은 ‘진리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서 순수하게 앎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해해야 한다(실천적인 행위 문제라기보다).
서양철학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 및 자연을 이루고 있는 궁극적인 요소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 서양철학의 중심적인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근세 이후에는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인식 구조 및 본성에 대한 문제에로 그 중심이 옮겨졌다. 그러한 방향 전환은 칸트에서 정점을 이룬다.그러나 존재론적 탐구에서 인식론적 탐구로의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존재 문제는 칸트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의 인식 구조의 성질을 밝힘으로써,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칸트 자신의 탐구 목표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을 체계화한 책으로서 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도 종국에는 미래에 도래해야 할 진정한 형이상학(존재론)을 위한 예비학인 것이다. 칸트는 이 책의 서언(초판과 재판)에서 그러한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인식 구조는 어떠한 것이며, 우리의 인식 구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존재의 세계는 어떠한 성질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이 처음 출판되어 나오기(1781년) 이전부터 칸트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한 문제를 이미 1770년 교수취임논문에서도 서술하고 있다. 이 교수취임논문과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확립되는 존재 개념이 바로 현상 개념으로서, 현상은 우리 인간의 인식 구조와의 관계에서 논의되는 대상 개념이다. 물론 이 두 권의 책에서 모든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 개념은 이미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에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존재, 대상 개념으로서의 현상 개념이 칸트 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전의 철학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며, 나아가 서양철학 전반,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개념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논하고자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철학사에서 칸트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한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1) 1) A.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2권, Diogenes Verlag, Zu촵ich, 1977, 514쪽 참조.

서양철학의 역사는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실체)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고대 자연철학으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철학과 근세의 합리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칸트 이후의 헤겔에서도 철학적으로 근본적인 관심사였다. 영원히 참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오로지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혹은 물질과 정신 양자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한 견해들은 유심론, 유물론, 이원론이라는 존재론(형이상학)의 명칭으로 불린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이한 이론들에는 기본적으로 공통된 생각이 들어 있었다. 이 세계는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존재이든, 물질적인 존재이든 또는 정신과 물질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존재이든 간에 고전적인 서양철학은 이 변치 않는 참 존재를 찾아내 그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특히 근세 이전까지는 이러한 철학 방향, 즉 존재론적인 철학 방향이 우세했다. 그러한 사고에 반기를 들고나선 것이 근세의 경험론 철학이다.

존 로크(J. Locke, 1632∼1704)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사변적인(이론적인)2)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인(도덕적인)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도 아니라는 점을 이 책 맨 앞에서부터 논함으로써, 로크 자신이 이 책을 씀에 있어서 무슨 문제를 가장 중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로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정신)은 살아가면서 증가하는 경험적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일 뿐, 처음부터 본유 관념, 생득적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2 ) 여기에서 사변적인(speculative), 이론적인(theoretical)이라는 말은 존재, 대상에 대해 논하는 사고 태도를 뜻한다.

우리의 마음은 태어날 때에는 완전히 비어 있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칠판(tabula rasa)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조지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철학을 자신의 《인간 지식의 원리에 대한 이론(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로크와 버클리에는,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로크에서 제1성질3)이나 실체 개념, 그리고 버클리에서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담지자로 인정되고 있는 신의 존재 개념 등이 특히 그러하다. 3) 로크는, 사물의 제2성질은 우리의 주관적인 지각(맛, 소리, 빛깔, 냄새 등)이지만, 제1성질(형태, 크기, 운동, 정지, 수 등)은 사물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함

고전철학의 실체 개념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벗어난 이는 흄(D. Hume, 1711∼1776)이다. 흄의 생각에 지식이란 것은 감각적인 인상과,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는 관념(생각)뿐이다. 종래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인과법칙)이라고 하는 것도 경험에 의해서 축적된 관습적인 지식일 뿐이다.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법칙 위에 성립하는 종래의 형이상학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흄에게는 자연의 대상도 우리의 마음도 그때 그때의 지각에 의해 쌓인 관념들의 다발일 뿐이다. 관념들의 ‘다발’은 상황에 따라 풀어지고 묶일 수 있는 임의적인 것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뉴튼의 자연과학의 필연성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상학 및 자연과학에 대한 흄의 주관주의적, 심리주의적 입장을 접하고 나서,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학문성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서 숙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10여 년 동안 연구한 성과를 칸트는 1781년에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칸트는 이 책에서 미래에 도래해야 할 형이상학을 위한 정초작업을 하고자 했다.4) 4)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단지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준비단계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은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기본적인 구도를 이미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A 11/B 24 - A 16/B 30 참조. 여기서 A는 초판, B는 재판을 가리키며, A, B 다음의 숫자는 각기의 쪽수를 표시함.

흄의 사고 혁명에 의해서 종래의 형이상학의 토대는 무너졌지만, 칸트는 어떤 사고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러한 확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수립했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대상 개념과, 그리고 현상을 인식하는 주관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감성형식(공간형식과 시간형식5))과 사고형식(오성의 범주)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한다. 우리들은 대상 그 자체, 즉 물자체(실체)는 인식할 수 없다. 사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대상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들의 인식 구조를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식 구조가 바로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이다. 우리들의 인식 구조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들의 표상, 즉 현상일 뿐이다. 현상은 우리의 주관에 대한 상이다. 5)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주관적 구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시공 개념에 형식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상(현상)이 있으면, 그것을 있게끔 한 원인으로서의 물자체 또한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러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상을 아무리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해도 물자체는 절대 인식할 수 없다. 물자체는 우리의 주관에 대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고상의 존재(ens rationis)’일 뿐이다. ‘사고상의 존재’에는 감성(시공)의 재료가 대응하지 않고, 사고로 그칠 뿐이다. 우리에게 대상은 공간 및 시간상의 존재일 뿐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시공과 ‘관계없는’ 존재는 우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는 공간상의 존재와 시간상의 존재이다. 공간상의 존재는 물체적인 형태를 지닌 존재이고,6) 시간상의 존재는 심리적인 존재(사태)이다.시공간상의 존재에는 인과법칙이 적용된다. 시공간상의 존재로서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는 현상들간의 관계이다. 결코 물자체(실체)들간의 인과관계가 아니다. 칸트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상들에 대해서이다. 6) 칸트에서 시간이 공간보다 더 포괄적인 직관 형식이기 때문에, 공간상의 존재는 동시에 시간 속에서 지각된다.

이렇게 해서, 흄이 자연의 대상에 대해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부정한 데 비해, 칸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흄은 인과관계를 실체들간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실체들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구조로는 실체들 자체의 관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흄은 실체들의 인과법칙을 부정했다기보다, 우리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에 비해, 칸트는 처음부터 자연의 대상에 실체 개념 대신 현상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현상들간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인정한 것이다. 현상 외의 자연의 대상은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시공형식 외에 다른 지각 방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7) 우리는 세상의 존재를 시공형식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공형식에 의해 지각된 현상들의 인과법칙의 필연성은 우리의 인식 구조의 필연성을 뜻한다. 우리 인식 구조의 필연성에 의해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성립한다. 그의 관념론이 선험적, 필연적인 이유는 우리의 인식 구조 외에 다른 인식 방식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과율 문제는 자연과학의 근본법칙에 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핵심문제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이든 형이상학이든 이 세계의 존재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하는 학문으로서, 양자의 학문은 존재를 인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은 넓은 의미의 존재론에 포함된다. 칸트는 이제 존재를 현상으로 봄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존재론을 정초했다. 칸트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우리가 시공형식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대상에 관한 학문으로서, 현상의 존재론이다.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볼 때는, 칸트 자신이 자주 언급하고 있듯이, 그것은 선험적 관념론이다.

칸트의 현상의 존재론에 따를 때, 물질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양자에 대해 필연적인 인과율8)이 인정된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자연 대상도 현상이며,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자아도 현상으로서, 이것들은 우리 주관(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의 구조와 ‘관계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 구조와 ‘관계없는’ 실체로서의 자연 대상도 실체로서의 자아도 인식할 수 없다.8) 칸트에서 인과법칙은 12개의 범주 중 ‘관계’ 범주군에 속한다.

현상으로서의 존재 개념에 의해 칸트철학은 그 이전의 고전철학과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한다. 칸트 스스로 그러한 방향 선회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종래에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실체를 중심으로 하고, 우리의 이성9)에 의해 실체를 가능하면 존재하는 그대로 비춰내고자 했다면, 이제 칸트에서는 우리의 인식 주관이 중심이 되어 대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현상이다. 9) 고전철학에서는 인식 주관인 이성 또한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제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주관이 대상을 임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지각 재료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직관형식(시공)과 사고형식이 합작으로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자칫 오해를 야기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나의 ‘인식’ 이전에 ‘밖에’ 존재가 있고, 또한 내 ‘안에는’ 이미 절대적인 인식 구조가 있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의 경우가 그러하다. 칸트에서 대상(현상)과 주관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있다.’ 밖의 재료와의 ‘관계’에서만 나의 인식 구조(시공형식과 사고형식)가 ‘있고’, 인식 대상(현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서의 대상 인식은 주객의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칸트철학에서 물자체 개념이 ‘사고상의 존재’로나마 인정되고 있다는 이유에서, 칸트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선험적 시공형식에 기초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그것에 의한 현상의 존재론은 획기적인 방향전환이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도 칸트의 이러한 철학은 현대의 자연과학 및 동양의 존재론, 특히 불교의 존재론과의 연관에서도 매우 호소력을 지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 불교에서 연기(緣起)의 대상
앞에서 논했듯이, 서양철학은 존재론적 관심에서 시작되었으며, 적어도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철학이 우세했다. 근세 이후에는 인식론적 문제에로 관심의 비중이 옮아갔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철학은 전반적으로 존재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구조는 어떠하며,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로서 말이다.

불교에서는 존재론적인 물음은 인간의 실천적인 삶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세계의 본질 및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및 인식론적 물음 자체는 붓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붓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고통은 집착 때문에 생긴다. 인간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마음의 완전한 평정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애착, 지위 및 명성에 대한 욕심, 혹은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 등, 실로 우리 인간사라는 것은, 그리고 인간의 발전이라는 것은 욕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현재보다 더 나은 단계에 이르려 하고, 그것에 이르지 못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원하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잠시 기뻐하고는 또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식으로, 우리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다른 것을 향해 있다. 무릇 인간의 삶은 부단히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집착을 일으키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존재인가? 붓다는 그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밝히고 있다. 집착 및 갈애에 의해 결과하는 고통이 의존하고 있는 조건들은 십이연기로 대표된다.
십이연기는 무명(無明), 의지적 행위(行), 의식(識), 개인적 존재(名色), 마음과 감각(六入, 六處), 감각적 인상(觸), 감각과 감정(受), 애(愛), 취(取), 생성력(有), 재생(生), 노사(老死)를 말한다. 이들 열두 개의 연기는 서로간에 연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는 탐욕(貪), 증오(瞋), 미망(癡)이라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붓다는 고통을 인간의 삶의 근본적 조건이라고 보았다면, 이 고통을 제거해야 하는 것을 인간의 진정한 의무라고 보았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연기의 조건 및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즉 무명, 잘못된 의도, 청정하지 못한 의식, 자아에 대한 망상, 오온에 대한 자아의 집착, 결과로서 생기는 갈애와 집착 등을 끊어야 한다. 갈애와 집착을 끊으면 고통이 제거되고, “존재의 풍성한 완성”10)에 이른다. 10) 존 M. 콜러, 《인도인의 길》, 허우성 옮김, 세계사, 1995, 244쪽.

이것이 열반이다.인간의 근본 조건 및 도달해야 할 이상적 상태에 대해 붓다는 사성제(苦集滅道)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 이 중 고·집·멸에 대해서 서술했다.

사성제는 앞에서 논의했듯이 존재론적으로 연기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개념에 의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정적인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실은 오온(五蘊)에 불과하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모임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모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무상(無常)이다.11) 11) 平川彰, 《인도불교의 역사》, 상권, 이호근 옮김, 민족사, 1989, 65쪽 참조.

그리고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아는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단지 그때그때 물질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가 연기의 관계에 의해 모여 있는 모임일 뿐이다.

붓다의 말씀(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키는 것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은 데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그에 비해 부파불교 시대에는 붓다의 말씀을 부파마다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데서 논장(論藏, Abhidharma, Abhidhamma)이 성립하는데, 논장은 ‘법(dharma)의 연구’라는 의미로서 ‘대법(對法: 법에 대해서)’이라고도 한다.12) 12) 平川彰, 앞의 책, 155쪽 참조.

부파불교에서는 법(dharma)의 유(有)를 말한다. 여기에서 법은 요소로서의 실재이다. 그러나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13) 부파불교에 속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심리작용을 각각 독립의 실체로 보았다.14) 유부는 무아설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각기의 심리작용을 각각 별체라고 한 것이다.15)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활동하는 근거를 밝힐 수 없다. 그리고 법의 유(有)를 강조함으로써 법공(法空)사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양자의 문제(법공사상과 마음의 통일성 문제)는 대승불교의 과제가 된다. 13) 平川彰, 앞의 책, 174쪽 참조. 14) 이러한 해석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는 해석도 있다.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경우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일체는 무상하다, 무아다’를 논증하고자 한 독특한 입장을 취하였다.”(櫻部 建·上山春平, 《아비달바의 철학》, 정호영 옮김, 민족사, 1994, 46쪽) “‘일체유(일체가 존재한다)라는 말이 때로는 이 학파가 아가마 이래의 제행무상의 사유 방식을 부정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다.”(위의 책, 45∼46쪽) 15) 平川彰, 앞의 책, 188쪽 참조.

요소로서의 법유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이론 등16)을 나가르주나(龍樹)는 구별(分別)의 철학17)이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공의 논리를 가지고 논박한다. 그의 공사상은 중도 및 연기 이론과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그의 《중론(Madhyamaka-Sastra)》은 바로 이러한 공사상 이론을 담고 있다. 16) 나가르주나는 그의 저작에서 설일체유부·상키야학파·바이쉐쉬카학파·니야야학파 등의 원리를 비판한다. 梶山雄一 외, 《공의 논리》, 민족사, 1994, 73쪽 참조. 17) 설일체유부는 분별(vikalpa)의 입장이고,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은 분별을 부정하는 입장이며, 유식사상은 中正과 양극단에 관한 분별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服部正明 외, 《인식과 초월》, 이만 옮김, 민족사, 1993, 205쪽 참조.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처음에서 “상서로운 연기”를 설하신 부처님께 예배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연기(緣起), 희론이 적멸(寂滅)하며 상서로운 연기를 가르쳐주신 정각자(正覺者), 설법자들 중 제일인 그분께 예배합니다.”18) 18) 龍樹, 《中論》, 김성철 역주, 경서원, 1996, 26쪽 제1觀因緣品 제1게·제2게.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근본사상을 ‘연기’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명하는 것을 《중론》의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나가르주나가 원시불교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연기를 불생불멸의 팔불중도(八不中道)19)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십이연기에 입각한 원시불교보다 그의 입장이 진일보했음을 말해준다.20) 19) 不生·不滅·不常·不斷·不一·不異·不去·不來의 중도를 말한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중론》의 제1관인연품 제1게와 제2게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八不中道는 불교 근본 진리인 연기 바로 그것이요, 《반야경》의 논리 이념이며, 희론·取着·多慢心을 제거하여 청정심을 일으켜 정각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천명하고 있다. 김인덕, 《중론송연구》, 불광출판부, 1995, 82쪽 참조.
20) 平川彰, 《인도불교의 역사》, 하권, 민족사, 1991, 47쪽.

나가르주나는 원시불교 이래의 일체개공(一切皆空)·제법무자성(諸法無自性)·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을 받아들여 부파불교의 이론들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의 준거가 바로 연기와 공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세간의 어떠한 존재도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은 없다. 어떠한 존재도 지속적인 본성을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어떤 것으로 인식(파악)하는 순간 그것은 바뀌어 버린다. 찰나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존재: 法, dharma)은 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현상 세계에서 다양한 존재들을 경험한다. 우리들은 사물들을 개체로서 지각하며, 각기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연기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연기의 상대적 관계에서는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이 성립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상대적 관계이다. 상호의존의 연기의 관계는 개체들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호관계 없이, 그 이전에 개체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개체들이 이미 존재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상호관계는 필요 없다.21) 그럴 경우에는, 이미 존재하는 개체들에 대해 인위적으로 중언부언하는 ‘관계’가 있을 뿐이다.
나가르주나가 논하는 연기는 공의 다른 차원, 즉 현상의 측면이다. 공이 제법의 실상, 근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면, 연기는 인간이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21) 平川彰, 앞의 책(하권), 49쪽 참조.

나가르주나는 사람들이 공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절대공(絶對空), 악취공(惡取空)의 견해를 갖게 됨을 비판하기도 한다.22) 나가르주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거나 혹은 절대적 공이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타파하고자 중도(中道)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 세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공으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중도(中道)이다.”23) 22)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어떤 부처님도 (그런 자는) 교화하지 못하신다.” 용수, 《중론》, 김성철 역주, 236쪽, 제13觀行品, 제9게. 23) 용수, 《중론》, 김성철 역주, 414쪽, 제24觀四제品 제18게.

나가르주나는 연기의 공이 절대적인 공(惡取空)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이론이 허무주의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유식(唯識)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과 더불어, 원시불교의 연기론 및 공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파불교의 법유 이론을 논박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의 이론을 보완, 극복하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지각 현상들은 단지 연기의 관계로만 있을 뿐, 자성을 갖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지만(空), 그래도 그와 같이 지각되는 현상들은 분명히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이 지각하는 현상들은 우리의 마음이 의식, 인식하는 과정으로서만 있을 뿐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식뿐(唯識)이다. 그런데 유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인식은 오로지 식이라는 ‘사실’의 의미와, 둘째로는 우리들은 유식사상에 따라 바람직한 식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의 의미이다. 두번째의 의미는 우리의 실천적 삶과의 연관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의미에서 유식사상은 유가행파(Yogacara)라고도 불리운다.

우리의 의식, 인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할 수밖에 없다. 원시불교 이래 우리의 마음은 심(心)·의(意)·식(識)으로 불리어 왔는데, 유식사상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여 더 심화시킨다. 심은 제8식, 의는 제7식, 식은 6개의 식(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에 대응한다. 안이비설신의의 6식은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사물을 구별하는 식이고, 제7식은 마나스식(manas-vijn??a, 末那識)이라고 불리며, 이것은 각 개인의 자아의식으로서 나와 다른 이들을 구별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제8식은 알라야식(a?aya-vijn??a, 阿賴耶識), 종자식(種子識), 장식(藏識: 종자를 저장하는 식), 혹은 아타나식(ada?a-vijn??a, 阿陀那識: 執持識)으로도 불리며24), 이것은 각 개인의 근본적 주체로, (인)식의 주체이자 생명의 주체이자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24) 《섭대승론》에서는 알라야식을 아타나식으로 부른다. 橫山紘一, 《유식철학》, 묘주 옮김, 경서원, 1989, 128쪽 재인용.

어떤 사람의 인식(의식) 현상은, 언제나 그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동일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의 주위 상황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 상태와의 관계에서,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요인과의 관계에서 의식 현상으로 나타난다. 식은 그 자체로 “연기적 존재”25)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식의 현상은 이미 무수한 요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도 연기적 존재이지만, 우리 마음의 여러 차원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도 연기적 존재이다. 25) 平川彰, 앞의 책(하권), 107쪽.

끊임없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식의 상태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성)으로서의 식이며, 끊임없이 무엇이라고 식별, 분별해내는 식의 상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분별성)으로서의 식이며,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空) 인식함으로써 알려지는 식은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서의 식이다. 의타기성·변계소집성·원성실성으로서의 식은 서로 다른 종류의 식이면서, 동시에 동일한 식이다. 미망의 입장에서 보면 의타기성이요 변계소집성이지만,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원성실성이다.

그러나 범부의 인식이 그 자체로 원성실성의 식이라는 것은 아니다.26) 깨달은 자, 붓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유식사상의 인식론적 철학이 유가행의 실천철학으로 발전한 것은 특히 ‘식전환’의 이론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26) 平川彰, 앞의 책(하권), 106쪽 참조.

앞에서도 말했듯이 유식사상은 원시불교의 심·의·식 개념을 8식 개념에 의해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확립되었다. 8식 중에서 제8식, 즉 알라야식은 유가행파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술어이며,27) 알라야식의 발견이야말로 유가행파를 하나의 학파로 독립시킨 원동력이었다.28)27) 橫山紘一, 앞의 책, 115쪽.
28) 橫山紘一, 앞의 책, 111쪽.

식의 전환, 혹은 식의 전변(轉變)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밑바닥에 요소들(종자들)이 보관, 저장된 채로 잠재되어 있다가 지각, 인식의 과정에서 표면으로 나타나는 것(現行)을 말한다. 또 거꾸로 표면심의 현행은 훈습(熏習)29)에 의해 알라야식에 저장된다. 이 과정은 유동적, 역동적으로 진행되며, 종자로서의 인(因)이 현행의 과(果)로 나타나고, 현행이 또 종자로 저장되는 과정은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결코 아니다. 식의 모든 과정은 찰나멸 찰나생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창조적인 과정’으로 점철된다. 29) “향기가 의복에 훈습되듯이 경험이 즉 알라야식 이외의 7식의 활동이 알라야식에 뭔가의 형태로 배어 들어간다고 유식설에서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어든 경험, 말하자면 경험의 잠복 형태를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竹村牧男, 《유식의 구조》, 정승석 옮김, 민족사, 1989, 81쪽.

알라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들은30) 우리들이 깨어 있거나 혹은 꿈을 꾸고 있을 때(이때에도 식이 활동한다) 활동하게 된다. 나를 남과 구별하는 의식,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등의 자아의식(제7식인 마나스식)은 알라야식 중의 종자가 전변하여 성립한다. 또한 사물 및 사태를 파악하는 식, 예를 들어 물체들을 지각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나는 심리를 경험하는 등의 지각(6식)은 모두 식별, 구별 등의 마음 현상이다. 우리들은 제7식인 마나스식과 여섯 가지 의식(안이비설신의)을 통해서 자아 및 대상의 세계를 구축하여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경험한다. 이러한 의식은 근본적으로 주객 분열 의식이다. 30) 알라야식에는 현생 이전의 경험들(윤회)과 현생의 경험들이 저장되어 있다.

우리들의 식(지각·의식·인식)은 매 찰나마다 ‘폭류처럼’ 변화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들은 이것이 자아라고 혹은 세상의 대상이라고 집착하며, 그러한 의식은 ‘허망분별’에 불과하다. 이러한 허망분별이 허망분별임을 자각하고, 이러한 식은 모두 연기의 현상이며, 따라서 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아라한의 位), 전 6식과 마나스식뿐 아니라, 알라야식도 소멸하는 것이다.31) 유식이론의 바탕에 서 있는 유가행철학은 이러한 견해에 따라 수행함으로써 해탈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31) 아라한의 位에서 알라야식은 없어지지만, 아타나식(생명의 주체)으로서는 명칭을 바꾸어 그 이후에도 존속한다고 한다. 알라야식이라는 이름은 없어지지만, 살아 있는 한 붓다에게건 아라한에게건 생명의 주체는 있다고 생각된다. 平川彰, 앞의 책(하권), 130쪽 참조.

3. 인식하는 자아

앞장에서는 우리의 인식 대상을 칸트와 불교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논했다. 칸트에서 인식 대상은 오로지 현상일 뿐이며, 현상은 물체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으로 나뉜다고 했다. 그리고 원시불교와 대승불교(중관사상과 유식사상)에서 인식 대상은 연기의 대상이며, 연기의 대상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고 그 자체로는 공이라고 했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자아도 공이고 대상적 존재도 공이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지각되는 내지는 인식되는 대상에 대해 논했다. 그러면 이 대상들을 인식하는 주관은 어떤 존재인가? 칸트와 불교에서 각기 어떠한지 알아보자.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정신(마음·이성·영혼)의 개념은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속했다. 정신은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서(이원론), 혹은 물질을 포함한 이 세계의 궁극 원인으로(유심론)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한 경우, 정신은 궁극적 실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물론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정신을 그 자체로서 인식할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정신은 인식 가능한 존재로 가정되었다.

칸트는 서양의 전통적인 합리론적 견해에 대해 논박한다. 다른 사람들의 정신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정신조차도 인간은 오로지 ‘현상’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앞에서 논했듯이, 칸트에서 현상은 우리의 인식 구조(시공의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에 인식 재료(물질적 재료나 심리적 재료)가 주어졌을 때, 이 양자(인식 구조와 재료)가 서로 ‘관계함’으로써 인식되는 ‘대상’이다. 심리적 현상의 경우, 마음의 다양한 상태들(무엇을 생각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등의 마음 상태들)이 시간형식과 사고형식과의 관계에서 각기 ‘개별적인’ 마음 상태로서 인식된다.

이렇게 인식되는 심리적 현상들은 마음 자체, 주관 자체가 아니다. 마음의 다양한 계기일 뿐이다. 물론 칸트에서 각 개인의 마음 자체, 주관 자체가 논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에서 주관 자체의 문제가 빠진다면 그 인식론은 아예 성립할 수도 없다.

물리적 대상이든 심리적 대상이든 그것이 현상으로서 인식될 때,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의 근거로서의 근원적 자아, 선험적 자아가 언제나 더불어 기능한다. 이 선험적 자아가 항상 동일한 자아로서 ‘더불어’ 활동하지 않는다면,32) 개별적 대상 및 사태에 대한 지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동일한 선험적 자아만을 독립적으로(개별적 지각과 관계없이) 인식할 수는 없다. 칸트에서 선험적 자아는 개별적 대상 및 사태의 지각과 ‘더불어서만’ 활동하는 것이다.33) 32) 자신의 인식 활동(물리적 지각과 심리적 지각)을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동일한 자아’의 활동은 ‘의식된다’. 칸트에서 모든 개별적 지각, 인식은 결국 자기인식, 자기의식(Selbstbewu쬼ein)이다. 33) 칸트, 《순수이성비판》, B 131-132, A 341/B 399, B 406, A 345-346/B 404 참조.

이렇게 해서 칸트는 전통적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정신, 이성, 영혼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게 된다.불교에서 인식 대상은 오로지 연기의 대상이다. 그 자체로 각기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독립적인 실체적 존재를 인식할 수도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처음부터 실체적 존재(각기 自性, 본질을 지닌)가 아니고 연기의 존재이다.34) 34) 이에 비해, 칸트에서는 우리의 인식 대상인 ‘현상’의 배후에 물자체를 인정함으로써, 철저히 연기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불교사상과 존재 문제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교에서는 인식 대상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도 단지 연기의 존재일 뿐이다(我空). 연기의 존재인 자아의 배후에, 혹은 근저에 실체적 정신, 마음,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논한 바에 따르면, 유식학에서는 원시불교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의 과정을 더 철저히 분석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아, 즉 인식하는 주관이라는 것도 결국 연기의 현상이며 공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사물 및 사태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이 어떠한 흐름, 변화를 보이는가를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유식사상은 이전의 그 어떠한 불교 이론보다도 자아 문제에서 치밀한 이론을 제시했다.

‘대상’에 관한 모든 인식은 사실은 ‘식’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지식은 지식 내부의 현상이며, 지식은 지식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 자기 인식을 본질로 한다는 것은 유식학파의 기본적인 입장의 하나이다.35) 35) 服部正明 외, 《인식과 초월》, 이만 옮김, 1993, 민족사, 87∼94쪽 참조.

이렇게 볼 때, 칸트가 현상 배후에 물자체 개념을 유보해 두었다는 점에서는 불교사상과 차이를 보이지만, 칸트의 선험적 자아 개념과 유식학파에서의 식의 주체인 자아, 특히 알라야식으로서의 자아 개념에서는 상통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36) 36) 칸트에서의 대상 인식은 현상으로서의 인식이며, 모든 현상으로서의 인식에는 언제나 선험적 자아가 동반하며, 대상 인식은 결국 선험적 자아의 자기인식이다. 그리고 유식학파에서의 대상 인식은 연기로서의 인식이며, 연기로서의 모든 인식에는 언제나 알라야식이 동반하며, 대상 인식은 결국 알라야식의 자기인식이다. 그리고 칸트에서 선험적 자아가 선험적 자아만으로(개별적 대상 인식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의식될 수 없듯이, 유식의 알라야식도 개별적 대상 인식과 관계없이 그 자체만으로 의식될 수 없다.

4. 실천하는 자아

서양철학의 전통이 형이상학이었다고 할 때, 이 말은 서양철학에서는 존재론으로서의 이론철학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계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우선 규정함을 통해서(형이상학)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도 가능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 이전까지는 대체로 윤리적인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포함되는 것으로, 혹은 윤리적 문제는 존재론에 부수적인 것으로 다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에서 이러한 경향이 크게 달라졌다.

칸트에서는 이론철학(존재론과 인식론)과 실천철학이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러한 구분은 칸트의 주요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존재론 및 인식론)과 《실천이성비판》(윤리학)을 통해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37)과 인식할 수 없는 대상,38)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과의 관계에서의 우리의 자아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자아는 ‘인식하는 자아’를 다룬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실천하는 자아’를 다루고 있다. 칸트에서 ‘인식하는 자아’는 주관에 주어지는 대상을 자신의 구조에 따라, 그리고 필연적인 인과율에 따라 인식하는 자아라면, ‘실천하는 자아’는 마치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 듯이, 그리고 자신이 영원한 본질을 지닌 정신의 소유자인 듯이(신의 본성을 원형으로 하여), 행해야 하는 자아이다. 37) 경험 가능한 대상 세계이다. 38) 경험할 수 없으나 ‘생각할 수는 있는’ 대상, 예를 들어 절대적 신, 우주 전체 등의 문제를 말한다.

앞의 자아는 현상 세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뒤의 자아는 현상 세계를 넘어서서 절대적인 이성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명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두 개의 자아는 마치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 무관한 자아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면, 다른 하나는 초경험적 세계에 속한다.

칸트의 이론에서 인간은 이원론적인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자들처럼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속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이성법칙에 속한다. 인간이 절대적인 이성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준수해야 하는 근거는, 인간 자신이 절대적인 이성의 소유자, 절대적인 자유의지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있다.39)39) 순수이성은 그 자체로 ‘실천적(praktisch)’이며, 바로 순수이성이 우리에게 도덕법칙인 보편적 법칙을 부여해 준다(칸트, 《실천이성비판》, A 56: A는 초판). 칸트에서 ‘실천적’이라는 술어는 공리주의적, 경험주의적 의미에서의 실천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실천’만을 뜻한다.

칸트가 이전의 철학자들과 다르게, 존재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하여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윤리학 또한 존재론의 체계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필연적인 인과율이 적용되는 경험 세계에 속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초경험적 세계의 절대적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존재규정’으로부터, 인간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규정’이 나온다. 칸트에서 ‘윤리적 인간’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인간’의 개념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 인간은 절대적 이성법칙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도록(명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면 연기의 법칙에 속하는 불교의 인간에서 ‘실천’의 문제는 어떠한가?
불교는 근본적으로 실천의 철학이다. 붓다 자신이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존재론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예를 들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苦)의 존재라는 등의 생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종국에는 그러한 인간 규정에 의해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길을 보이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중부경전》에 포함된 마룬캬풋타의 우화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에 대한 붓다의 태도를 아주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40) 붓다는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자아와 육신은 분리된 것인가 같은 것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마룬캬풋타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삶에 진정한 이익을 주는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삶에 참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의 조건들 및 이들 조건들의 절멸에 관한 실천적 진리라고 붓다는 생각했다. 40) 존 M. 콜러, 《인도인의 길》, 246∼248쪽 참조.

불교의 실천철학적인 면은 대승불교 중에서 중관사상보다 유식사상에서 더 두드러진다. 중관사상은 공(空)의 관점에서 존재론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유식사상의 경우에는 가치론에 기울어져 있다.41) 유식사상이 유가행파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기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근본 관심인 것이다. 41) 服部正明 외, 《인식과 초월》, 224∼225쪽 참조.

절대적인 신의 존재, 자유의지, 영혼불멸의 요청 위에 정초된 칸트의 이성론적 윤리학에 비교해 볼 때, 불교의 실천철학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존재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니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삶의 길은 완전히 스스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앞에서 연기의 이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밝혀졌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연기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란 것도 찰나마다 변해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내 마음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내가 타자들(인간 및 사물)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신체 및 마음과의 ‘관계에서’ 나의 마음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나의 마음, 정신의 존재는 나 자신에게도 미지의 것이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창조적인’ 존재이다. 그것의 창조자는 바로 나이다.

5. 현상의 법칙과 연기의 법칙

쇼펜하우어도 말했지만, 칸트의 현상 개념은 그 이전의 철학에(서양에서) 비해 볼 때,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현상 개념을 통해서, 대상은 주관과의 관계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고전적인 실체 개념 없이도 ‘필연적인’ 인식42)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42) 이 논문에서는 칸트의 현상이론으로서의 필연적인 법칙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는 것은 생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의 여러 편의 논문에서 논한 바 있다. 특히 필자의 〈칸트의 이론철학에서 대상 개념에 대한 연구〉(《철학연구》, 51집, 2000년 겨울)에서 그러한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주객의 통일로서의 현상 개념보다는 덜 철저하지만(물자체 개념을 유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현상 개념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의43) 서양 전통철학 안에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 세계의 ‘존재’는 우리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해 받아들이는 표상으로서의 대상뿐이다. 우리의 표상으로서의 현상 외에 대상, 존재는 없다. 있다고 해도 우리의 인식 구조로는 영원히 모를 터이니, 사실은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43)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러한 논의는 타당하다. 칸트 이후 독일관념론에서는 다시 칸트의 현상론적 이론에서 ‘후퇴’했다.

불교에서의 연기의 대상 또한 우리의 마음의 현상일 뿐이다. 일체의 존재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다. 칸트는 선험적인 인식 구조를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어떠한 흐름으로서의 마음은 말할 수 있어도 ‘필연적인’ 구조는 없다. 모든 것은 찰나멸 찰나생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어떠한 방향, 어떠한 경향으로서의 인식 구조를 말할 수 있을 뿐.

이러한 문맥과 연관되지만, 인과관계의 문제도 이와 흡사하다. 칸트에서 대상 인식은 필연적인 인과율44)에 종속되지만, 불교의 연기법칙(일종의 인과관계)은 엄밀한 의미의 인과법칙이 아니다. 어떤 것이 원인이 되고 그것에 대해 필연적인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먼저 있고(因), 그 다음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생길 뿐이다(果). 이 과는 앞의 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인과 과는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고, 각기 독립적인 요소이다. 찰나멸이고 찰나생이므로 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 인과 과가 있을 수 없다. 44) 칸트에서 인과율은 사고 범주 중의 하나이다. 고전적 의미의, 혹은 자연과학적인 인과율이 아니다. 즉 ‘대상 자체’에 관한 인과율이 아니다.

칸트와 불교는, 특히 대승불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위점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사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 철학의 중심을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인식하는 마음에로 돌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45) 45) T. R. V. Murti,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1974, Oxford, 293쪽 참조.

그리고 이 양자는 ‘관계’ ‘통일’의 철학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현상’과 ‘연기’의 개념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 ‘통일’에서 성립한다. 차이가 있다면, 불교에서는 그 ‘관계’ ‘통일’이 철저하다면, 칸트에서는 조금 느슨하다는 점이다. 칸트는 서양철학의 전통(주관과 객관의 분리, 그리고 실체 개념의 문제에 연관되어 있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최인숙
동국대학교 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교육학과 졸업(교육학 석사). 독일 마인츠대학교 철학전공, 인도철학, 교육학 부전공(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논문으로는 <순수이성비판 제1, 제2판에서의 칸트의 자아이론> <선험적 종합명제로서의 칸트의 도덕원리> <판단력비판과 낭만주의철학에서 자연과 예술의 개념> <칸트의 데카르트 비판> <칸트의 이론철학에서 대상 개념에 대한 연구> <로크의 사유재산 이론> <낭만주의철학과 인도사상의 만남> <칸트와 가다머에서의 놀이 개념> 등이 있고, 번역서로 J. Kopper의 《계몽철학, 그 이론적 토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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